모든 바이오로이드를 해체하여 자신의 탈출선을 만든다는 광기어린 사령관의 명령에, 이성을 잃어버리고 자기 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적막함을 깨는 구두소리.


북방의 암사자 레오나는 이름처럼 사자같은 용맹을 떨치던 때가 있었지만. 복구된 그녀의 논리회로는 현 사령관의 심장에 간절히 필요한 총알을 박아 넣을 생각도, 가증스러운 레모네이드 파이의 하수인 유미처럼 탈출선을 하이재킹할 생각도 못한 채 오래 전에 떠나간 발키리의 방 안으로만 가라고 명령을 내리를 뿐이다.


도저히 식지 않는 감정모듈. 인간과 다른 사고를 해야 하는 그녀들에게 채워진 감정의 족쇄는 끊임없이 타오르며 대뇌에 낯선 고통을 주고 있었고, 부활하기 전이나 후를 통틀어 느끼지 못한 고통에 레오나는 몸부림쳤다.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끊긴 얼굴의 신경과 존재하지 않는 눈물샘이 지금처럼 미웠던 적이 없었다.


그보다 더 레오나를 고통스럽게 했었던 것은 인간의 것을 본따 만든 감정과 감각에 따라. 그녀의 하얀 제복의 단추 안 쪽 어딘가가 참을 수 없이 아파온다는 것이었다. 갑갑하고 먹먹한 고통은 남은 비상식량을 깡그리 해치워도, 철충에게 그녀의 P86G 피스톨을 한가득 쏟아내도 가실 길이 없는 고통이었다. 가슴 한 켠의 고통에 비하면 감정모듈의 고통은 천상의 숨결일지도 몰랐다.


지직거리는 시야. 인간이 아니라서 인간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암시하듯 그녀의 시각 모듈이 떨린다. 발키리의 방에 들어가자 패널을 환하게 밝히는 전 사령관의 모습. 그녀는 오류와 과열로 인해 잡음이 심해지는 시야로 전 사령관을 수행하는 발키리의 모습을 쫒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과 같은 무표정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발키리가 지은 미소를. 자신의 휘하에 있을 땐 결코 짓지 않았던 행복한 미소임과 동시에 자신을 향한 조소와도 같은 그 입꼬리를.


"수고했습니다 대장. 당신은 철충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주받은' 오르카를 파괴해버렸으니 말입니다. 이제 좀 영웅이 된 것 같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발키리의 목소리였다. 한번 죽기 직전에도, 죽고 나서 부활하고도 듣지 못한 발키리의 비아냥거리는 어조였지만, 분명히 내가 전 사령관에게 수없이 했을 조롱의 어조였지만 목소리는 분명히 발키리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전 사령관의 평가보고는 좀 과장되지 싶습니다만?"


감정모듈의 과부하가 발성모듈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나오지 않았다. 갈라지고 기계적인 음이 섞인 목소리로 레오나는 겨우 말을 내뱉는다.


'이건 말도 안돼...'


반면 발키리의 목소리는 한없이 힘이 넘쳤다. 항상 의기소침하거나 무언가에 억눌린 목소리가 아닌, 언젠가 눈구덩이에 빠진 알비스를 제손으로 구해 냈을 때 단 한번 들었던 자신감 넘치는 발키리의 목소리였다.


"아. 장담컨데 말이 됩니다."


'어떻게?'


"'어떻게'가 아니라 '어째서'겠지요. 대장님은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감정 모듈이, 논리 모듈이, 시각 모듈이, 그리고 그녀가 가진 모든 회로가 활활 타오른다. 스카디의 심정으로 걸친 모든 것들을 벗으려고 레오나는 몸부림쳤지만. 그녀의 탈의를 항상 갈구하던 현 사령관은 지금 광소를 뿌리며 분해실에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자매들을 분해기에 차 넣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심해져 자연스러운 사람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레오나는 애처롭게 발키리의 비난에 대항하려 한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은 내가 어쩔 수 없었어'


"그러셨습니까? 대장님이 각하의 잘못을 그냥 묻어뒀다면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대도 대장님은 각하를 끌어내렸습니다. 대체 뭘 위해서였습니까?"


레오나는 기계음으로 소리쳤다.


'나는 너희들을 구하려고 했다고!'


"대장님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대장님의 재능은 조금은 다른 데에 있었겠죠."


시각 모듈이 내지르는 또다른 비명을, 수치로 나타나는 회로의 과부하와 손상 정도를 잡음과 함께 받아들이며 레오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치려한다. 인간의 목소리를 딴 기계음에서 점점 소음으로 바뀌어가는 목소리가 차가운 발키리의 방에 울려퍼진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아아아아!'


그러나 매정한 발키리는 그 십자 시각 모듈과 같은 정확도와 매정함으로 그녀의 감정 모듈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눈 앞의 것을 거부하려면 당연히 대장처럼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리고 만약 진실을 거부할 수 없다면, 자신만의 걸 창조해내는 것일테구요."


완전히 맛이 가버린 발성모듈과 애처롭게도 튼튼하게 만들어진 논리모듈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을 소리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레오나."


단 한 번도 자신에게 하지 않았던 평칭. 그리고 하대. 옛 부하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을 레오나가 '느끼기'에는 이미 그녀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해체를 기다리는 몸이었다. 얼마 전까지 사령관의 노리개이자 생체 오나홀로, 사령관의 분노 표출을 위한 생체 샌드백으로. 그리고 이제는 사령관의 탈출선의 자재가 될 고철로. 그보다 더 슬픈 사실은 뚱땡이와 들러붙어 도망간 저년이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죄책감이었다.


"진실은 말이야, 네가 너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된 것처럼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이지경이 된거야."


아니야...


"영웅 말이야. 북방의 암사자 씨. 근데 그건 네가 아니었잖아?"


나도 너희를 훌륭히 지휘했어. 너희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어.


"내가 여기서 너에게 말하는 이유는 네년이 스스로 벌인 짓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렇지?"


아니야.. 나는 너희가 다치는 것을 볼 수 없었어..


"그게 널 망가트렸어. 비난할 누군가가 필요했겠지?"


내가 너때문에 수모를 겪었지만, 사실 너를 원망하지 않았어.. 말로는 너를 배신자 년이라고 비난했지만 말이야..


"그러니 책임을 나에게 돌린 거지. 배신자에게 말이야."


미안해 알비스... 미안해 바..ㄹ..ㅋ...ㅣ..........................












"에이 씨발 여기있었네 개같은 년. 지 부하 다버리고 어디로 숨었나 했더니 간데가 고작 배신자년 방이냐? 인간의 이름으로 명한다. 얼른 안일어나 개같은년아? 어? 죽었네? 하하하하하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년. 니년 밑창 맛만큼이나 쓸모없는년. 캬악 퉤. 닥터 얼른 뛰어와라. 이년처럼 만들어버리기 전에 안뛰어와!"


"알... ㄴ.네! ㅇ..사령관님!"


"이년 주워다 빨리 분해실로 가져다 버려 당장!"


닥터의 기계팔에 질질 끌려 분해실로 가는 레오나의 머리채 뒤로, 붉은 두 줄의 길이 길게 이어졌다. 굉음을 내는 분해기를 따라 붉은 길을 거슬러 갔을 때 그 끝이 한 때 레오나였던 것의 시각모듈과 가까웠다는 것을 사령관은, 닥터는, 그리고 발키리는 알았을까? 분해의 효율을 위해 통상의 분해절차에서 과거 차량용 분쇄기와 비슷하게 바뀌어버린 개조 분해기의 핏빛에서 레오나의 진심은 그저 100부품과 나머지 쓸모없는 무언가였을 지도 모른다.











한편, 탈출선을 타고 복귀하는 유미는 개선장군의 느낌으로 PECS의 AGS의 호위를 받아 김지석의 묘로 향하고 있었다. 레모네이드 파이는 그녀에게 특급 공신으로서 서훈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이뤄주겠노라고 하였다. 한 때 재미있게 즐겼었던 스틸라인 온라인이 복구되어 하이랭커가 된 자신을 상상하던 유미는 문득 든 의문점을 먼저 해소하기로 마음먹었다.


"파이 님! 여기는 유미.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호호호호. 얼마든지요 유미. 오르카 멸망의 특급 공신인 당신에게 질문 하나 답변 못해드리겠어요?"


"대장급들에게 미리 녹음된 음성을 재생하는게 큰 영향이 있을까요? 뭐 어짜피 갈릴 운명일텐데요?"


레모네이드 파이는 마치 사령관이 다른 바이오로이드와 동침할 때 리리스가 짓는 미소를 무의식적으로 지으며 대답하였다.


"나는 그년들이 곱게 부품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아요. 지금 오르카의 상황도 내가 원하는 고통보다 한참 모자라답니다. 한낱 음성 파일일 뿐이지만, 그것이 그년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면 나는 얼마든지 만들어서 들려드릴 수 있어요. 북방의 암캐년에게는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었을 뿐이에요."


유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 생각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레모네이드 파이는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마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리.. 레모네이드는 회장님을 힘들게 한 년들이 고통받길 원해요. 백배, 천배, 아니 무한대로요."



희미해지는 오르카의 산소와 대비되는 맑고 청량한 공기라고 유미는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