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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Day 121. PM 04:18

 

 오르카호에는 다양한 바이오로이드들이 탑승하여 생활하며 지내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의 일상은 주기적인 훈련과 업무, 그리고 휴식 등이지만 그들이 이 오르카호에 굳이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오르카호의 함장이자 저항군의 총사령관인 최후의 인류, 사령관은 그들에게 자의적인 권한을 하나 부여하였는데 다름 아닌 후방배치였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데 가장 큰 요인이 된 것은 오르카호 1호의 내부 인원들의 인구 밀도의 문제였다. 불굴의 마리가 이끄는 스틸라인은 대부분의 구성원이 저가(타 부대에 비해)의 생산비를 자랑하는 흔히 멸망 전 인류들의 말에 빗대어 양산형 모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따라서 스틸라인의 인구수가 폭증하면 타 부대에서 새로운 병력을 충원할 기회를 뺏기기 때문에 사령관은 전역함과 동시에 후방 부대 지원이라는 명목하에 이프리트와 같이 전역을 요구하는 개체들과 작전 중 극심한 중상을 입은 경우 전투모듈을 제거해 이들을 후방으로 배치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다만 이런 사령관의 방안에도 불구하고 스틸라인의 부대규모는 점차 커져만 가 현 오르카 1호의 인구 비율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대로 확립되었다. 이러한 스틸라인의 성장에는 멸망 전 개체인 불굴의 마리 4호의 리더쉽과 작전 수립 능력, 그리고 그녀가 내세운 슬로건인 ‘인류 재건’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그들의 유치에 가장 큰 요인을 차지했다.

 

 불굴의 마리 4호, 현재 멸망 전 생산된 마리 모델 중 유일하게 생존한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나 최전선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과거 인류가 멸망한 이래 갈 곳 잃은 다수의 스틸라인 바이오로이드들을 최대한 규합해 사령관이 부임하기 전부터 저항군 내에서 큰 활약을 했던 그녀는 자신의 후임기인 철혈의 레오나의 유전자 지도를 발견, 수복하는 공로와 전장에서의 경험을 인정받아 현 오르카호의 스틸라인 지휘관으로 재임명되었다.

 

 불굴의 마리는 경험했다. 인류가 사라진 세계 아래 인류에게 탄압받던 이들이 인류가 사라져 오히려 갈 곳을 잃어 헤매며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구심점이 사라진 이들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그녀는 인류 멸망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이를 두 눈에 담았고 이에 절망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인간탐색에서 21스쿼드가 기적적으로 인간을 발견, 그가 오르카 1호의 함장 겸 저항군의 총사령관으로 직무를 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다시 한번 명예로운 전장에 나서 인간을 수호하고 인류를 재건한다. 그녀는 그 대의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을 먹었다.

 

철컥-

 

 조용한 생활관을 지나쳐 이프리트들이 준비해 준 지휘관실의 문을 열고 불굴의 마리는 평소와 같이 당당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굳이 이렇게 큰 방을 쓸 필요 없이 병사들과 같은 생활관을 써도 무방하다고 하였으나 그 소식을 들은 이프리트 모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방 2개를 합쳐 준비한 이 방은 그녀 혼자 쓰기에는 매우 넓었다. 모처럼 병사들이 준비해 준 호의를 거절하기 힘들어 지금까지 쓰고 있음에도 그녀는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넓은 방이라 내심 좁은 방을 원했다. 그러나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호오, 그대의 방은 매우 넓군. 다른 지휘관실들에 비해 2배는 넓지 않은가.”

 

 불굴의 마리 뒤에 따라 들어온 인영이 지휘관실 내부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불굴의 마리 못지 않은 건장한 체구, 체구에 걸맞은 강인한 인상과 적갈색의 머리칼이 인상적인 AA캐노니어의 지휘관, 로열 아스널이었다.

 

“조금만 기다리게. 커피를 한 잔 대접하지.”

 

“하하-! 알겠다. 그대가 꽤 커피 마니아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딱히 커피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만. 그저 작전을 세울 때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자주 찾는 것이지.”

 

 로열 아스널은 큰 방의 가운데 위치한 소파에 몸을 눕혔다. 소파 역시 최고급 소재로 만들어진 멸망 전 유산인지 푹신함이 자신의 지휘관실의 것과 다르다고 느꼈다. 그녀가 방안을 둘러보자 이곳저곳에 생활의 흔적들이 들어왔다.

 

‘흠..저건 작전계획서와 보고서들인가. 책도 몇 권 보이고, 따로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군.’

 

 한쪽 책장에는 다량의 파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다른 한쪽 책장에는 멸망 전 도서들이 몇몇 채워져 있었다. 지휘관실 끝자락에는 불굴의 마리의 전용 책상과 그 뒤에 거대한 스틸라인의 로고와 함께 영어로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We die standing..우리는 서서 죽는다라.”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토이자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지.”

 

탁-

 

어느새 불굴의 마리는 커피를 두 잔 가져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로열 아스널의 앞에 커피를 한 잔 내밀었다. 잔은 딱딱한 방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철제 군용컵이었다.

 

“마셔보도록. 나쁘진 않을 것이야.”

 

“감사히 마시겠다. 하하!”

 

로열 아스널은 이에 개의치 않고 그것을 들어 호록하고 한 모금 삼켰다.

 

“호오, 달군. 커피치고는 달아.”

 

“믹스 커피라는 인스턴트 커피다. 우리 스틸라인의 보급품 중에 하나지.”

 

“기대했던 커피와는 조금 다르군. 그대와 같이 높은 직위에 있는 이라면 좀 고급스러운 것을 마셔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저 이 커피가 좋아서 종종 찾곤 한다. 정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다른 커피도 있네만.”

 

 불굴의 마리가 쓴웃음을 짓자 로열 아스널은 됐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믹스커피에 다시 입을 대었다. 커피의 쓴맛보다 프림, 설탕으로 단맛이 강하게 띈 설탕물 같음에도 딱히 나쁘지 않았다. 불굴의 마리 역시 조용히 자신의 믹스커피를 들어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흠, 꽤나 이 커피에 정을 붙일 것 같네. 다음 보급 때는 이것도 한 상자 넘겨달라 해야겠군.”

 

“그거라면 안드바리보다는 실키에게 말하면 될 걸세. 내 미리 이야기를 해두겠어.”

 

“하하! 그 후드를 입은 소녀들 말인가. 흠..그 아이들은 매번 나를 볼 때마다 왠지 눈물을 글썽여서 말이야. 혹시 아는 게 있는가?”

 

“이유는 알고 있지만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군.”

 

 둘은 그렇게 시시껄렁한 주제로 대화를 계속 이었다. 로열 아스널은 자신의 부관인 비스트 헌터가 점점 자신이 지휘관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뭐라고 한다는 둥 요즘 에밀리가 성적인 것에 눈을 뜨기 시작해 그것이 자기 탓이라고 부대원들이 질타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꺼냈고 불굴의 마리는 그것을 들으며 살짝 웃어 보였다.

 

“이렇게 그대와 대화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군.”

 

 로열 아스널은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삼키고 철제 컵을 내려다 놓았다. 불굴의 마리의 컵은 어느새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서로 지휘관이라는 입장 상 같이할 기회는 적을 수밖에.”

 

“흠, 그것도 그렇네만. 그런 것에 비하면 오히려 낮은 계급의 부하들은 생각보다 교류가 잦아 보였지 않나.”

 

“...각하 덕분이지. 타 부대 병사들끼리는 로비에 모여서 각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자주 봤었다.”

 

“호오.”

 

 로열 아스널은 불굴의 마리의 대답에 눈을 반짝였다. 불굴의 마리는 그런 그녀를 보고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자기를 따라온 그녀의 목적을 알아챘다.

 

“자네는 각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보이는군.”

 

“하하! 이것 참, 아무래도 복원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야. 사령관과 대면한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지.”

 

 로열 아스널은 자신의 속내를 알아챈 것에 개의치 않고 호탕하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로열 아스널은 복원된 지 이제 한 달을 넘긴 바이오로이드였다. 불굴의 마리는 후하고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아닌 철혈의 레오나 소장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그러기에는 그 북방의 암사자씨가 너무 침울해져 있어서 말을 걸기 힘들더군,”

 

“..그렇지. 그렇군.”

 

 불굴의 마리는 조금 전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전 지휘실을 나선 철혈의 레오나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지쳐 보였다. 로열 아스널은 다리를 꼬며 불굴의 마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아가씰 빼면 그대가 여기 지휘관들 중 가장 고참이 아닌가? 그러니 뒤를 따라왔지.”

 

“..후후, 그래. 무엇부터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하지?”

 

“그의 첫인상부터 묻고 싶다만.”

 

“..각하의 첫인상이라.”

 

“그래. 내가 느낀 그의 첫인상은 철혈의 레오나를 빼다 박은 남자 같더군.”

 

 불굴의 마리는 눈을 감고 사령관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한 부관마저 잃고 오랜 전투에 희망을 잃을 때쯤 그가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찾아왔기에 합류해 함께 연결체를 물리쳤다. 합류했을 당시의 그는 어제까지의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불굴의 마리는 생각했다.

 

‘만나서 반갑다. 불굴의 마리. 오르카 1호의 함장이자 현 저항군 총사령관이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령관으로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불굴의 마리 4호, 철혈의 레오나와 함께 내 보좌를 부탁하지.’

 

‘..보좌를 말씀이십니까?’

 

‘불편하다면 개인적으로 행동해도 좋다. 그저 권유에 불과해.’

 

‘..각하께서 그것을 바라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차가운 어투와 달리 분명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이었으나 그는 서슴없이 그렇게 말했다. 이것만으로도 불굴의 마리는 그가 멸망 전 인류와 다르다고 느꼈다. 멸망 전의 장성들은 한없이 무능하고 무지했으나 언제나 자신의 부하들, 스틸라인을 소모해가며 공에 집착했다. 하지만 그는 만나자마자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안심이 되던가.

 

“각하께서는 겸손한 분이었지. 만나자마자 내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해주었어.”

 

“흠.”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나보다 빨리 그와 합류한 노움 1021과 레프리콘 219가 내게 찾아와 각하께서는 원래 따스한 분이라 알려주었지.”

 

“호오.”

 

“솔직한 내 심정을 토로하자면 난 지금 모시는 각하께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아니, 각하가 아닌 다른 인간이 저 자리에 앉아 있는걸 용납하지 못하겠군.”

 

“하하! 상당히 사령관에게 빠진 모양이군! 그대!”

 

 로열 아스널은 팔을 무릎에 올린 채 턱을 괴고 불굴의 마리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그와 오래 지낸 바이오로이드들이 대체로 그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불굴의 마리와 철혈의 레오나마저 그를 이토록 따른다는 것이 내심 놀라웠다.

 

“만약 사령관보다 더 뛰어난 지휘력을 가진 인물이 온다고 해도 말인가?”

 

 로열 아스널은 장난기 서린 말투로 넌지시 불굴의 마리를 떠보았다. 사령관은 좋게 포장해도 그의 자리에 어울리는 능력자로 보이지 않았다. 전략은 지휘관들에게 일임하거나 그녀들의 작전계획을 읽은 후 그걸 수정해 이용하는 정도. 전술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에 맞추기보다는 변수가 적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불굴의 마리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생각외로 즉각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두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지휘력의 문제가 아니다. 각하께서 전략적, 전술적 견해가 부족하다면 나와 같은 지휘관들이 채우면 그만이네만 인간님들이 가지는 인품이라는 것은 본디 후천적인 것에 가깝다고 본다.”

 

“흐음.”

 

“우리는 인간님들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엄연히 다른 존재이지. 만들어진 성격과 만들어진 능력. 그것이 우리들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것이 바이오로이드이니까. 생김새부터 성격, 능력까지 모두 인공적인 것이지.”

 

“하지만 인간님들은 다르지. 제각기 다른 성장과 환경, 그리고 배움의 방향과 깊이. 그 모든 요소가, 경험이 만들어진 우리와 달리 자신의 개성이라는 것으로 발전하지.”

 

 그런 점에서 현 오르카호의 사령관은 멸망 전 개체인 불굴의 마리의 눈에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항상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그가 지휘관들의 작전계획서를 항상 검토하며 자신의 작전을 수립해가고자 노력하는 것은 불굴의 마리 또한 알고 있었다.

 

 불굴의 마리는 그런 사령관의 모습을 보며 멸망 전 인류들과 비교했었다. 어떤 이는 얄팍한 전략 지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리한 작전을 감행해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어떤 이는 세 치의 얄팍한 혀로 자신들을 속이고 대치 중이던 삼안의 먹잇감으로 자신들을 팔아넘겼다. 치가 떨렸고 여러 번의 배신을 당했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들과 달랐다.

 

“그런 점에서 각하는 우리가 바라지 마지않던 개성을 가진 인간님이야. 언제나 발전을 도모하고 스스로를 갈고 닦기에 여념이 없으신 분이지. 그런데 그저 능력이 부족하다고 각하를 내치는 것은 만들어진 능력에 자만하는 더없이 멍청한 바이오로이드일 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한다네. 한 잔 더 마시겠는가?”

 

“기꺼이.”

 

 로열 아스널은 싱긋이 웃으며 자신의 철제 군용컵을 내밀었고 불굴의 마리를 그것을 받아들며 다시 커피를 타기 위해 책상 옆에 둔 커피포트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음? 누군가?”

 

“충성! 제 1연대 소속 연대장 레드후드 1호입니다! 불굴의 마리 소장님께 보고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도록.”

 

“실례하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어투와 힘이 팍 들어가 있는 목소리에 로열 아스널은 등을 돌려 그 주인공을 찾았다. 쫙 빠진 스틸라인 특유의 슈트에 아담한 체구, 그리고 힘이 들어가 있는 녹색의 두눈동자가 인상적인 레드후드 모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레드후드는 미처 로열 아스널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몰라 눈에 띄게 당황해하고 있었다.

 

“추..충성! 스틸라인 제 1연대 소속 연대장 레드후드 1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열 아스널 준장님.”

 

“하하!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네. 어차피 다른 부대 소속 아닌가? 게다가 오늘은 내가 손님일세.”

 

“아..아닙니다. 미처 제가 방문해 있으신 줄 모르고..”

 

“그만, 그만하면 됐네. 레드후드 1호. 그래서 무슨 일이지?”

 

 내심 각이 잡힌 레드후드의 모습에 불굴의 마리는 웃음을 지었지만 그녀와는 반대로 레드후드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런 점만 본다면 차라리 브라우니 모델이 더 친화력이 좋아 보였다.

 

‘너무 좋아도 문제지만 말이야.’

 

 이미 곁에 없는 이전의 부관을 떠올리며 불굴의 마리는 커피포트의 물이 다 끓은 것을 확인하고 믹스커피를 뜯어 부었다.

 

“레드후드 1호라 했나? 자네도 앉아서 커피 한잔하는 것이 어떤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로열 아스널 준장님. 하지만 저는 보고만 하러 온 참이기에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역시 스틸라인의 연대장이야. 하아, 우리 부관도 이렇게 좀 격식 있게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대의 부관인 비스트 헌터는 아마 그댈 빼곤 다 저리 대할 것 같다만.”

 

“뭣! 이것 참, 다른 지휘관들에게는 저렇게 하고 나한테만 그렇게 한다 이 말인가? 부대로 돌아가면 진지하게 상의해 봐야겠어.”

 

 짐짓 긴장한 레드후드를 풀어주려는 듯이 로열 아스널은 농 아닌 농을 던지며 호쾌하게 웃었다. 저런 호쾌한 성격이 내심 부러운 불굴의 마리는 자신도 저렇게 하면 병사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의 바람과 달리 다른 스틸라인 병사들은 모두 그 모습에 기겁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 보고할 것이 무언가?”

 

“예!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일부 병사들이 현재 사령관 각하의 정보를 요구하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부사관들이 이들을 막았을 것입니다만..”

 

 레드후드는 말미를 흐렸다. 차마 말려야 하는 부사관들과 장교들 역시 이들과 같이 사령관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정작 지금 서 있는 본인 역시 궁금함을 참지 못해 달려온 것이다.

 

 당초에 이런 혼란을 예상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전우들의 죽음에 대한 항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외로 병사들은 전우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병사들 역시 애당초 불사의 군대를 가정하지 않았다. 언제가 죽을 것이라, 하지만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램은 이루어졌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불굴의 마리는 그녀의 보고에 흡족했다. 이 얼마나 훌륭한 병사들인가.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로열 아스널 역시 불굴의 마리의 속마음을 내심 읽은 듯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음, 그들에게 사령관의 건강 상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전해주도록. 경호대장과 닥터의 소견이야. 그리고 사령관께서 잠깐 혼자 있을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하여 지금 나오지 않고 계신 것이라고 그 또한 알려주게.”

 

“예, 마리 소장님. 그들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다. 그들이 각하를 걱정하는 마음을 알았으니 오히려 상점을 주고 싶을 정도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안입니다만..”

 

 레드후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며 그녀답지 않게 눈을 굴렸다.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불굴의 마리는 입에 대려던 철제 군용컵을 내려놓고 레드후드에게 물었다.

 

“무엇인가? 연대장이 그러다니, 앞선 이야기보다 중요한 사안인가?”

 

“나 또한 궁금하군. 저 당당한 스틸라인의 선봉장이 움쩍달싹 못하는 사안이라니.”

 

 두 장성들이 자신을 일제히 바라보자 레드후드는 뺑끼치다 걸려 자신 앞에 던져진 이프리트의 기분이 무엇인지 체감하며 스스로 부끄러워 살짝 고개를 숙여 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일부 병사들이 인식표의 재발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지급하지 않으면 병사들의 사기에 큰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식표? 아, 이것 말인가?”

 

 레드후드의 입에서 나온 인식표라는 것에 로열 아스널의 자신의 제복 아래 감춰둔 군번줄을 꺼내며 흔들었다. 이것 때문에 그 굴강의 병사들이 흔들리다니 로열 아스널의 생각으로는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알겠다. 분실한 병사들의 개체번호를 정리해 내게 가져오도록. 가까운 시일 내로 닥터와 만나 재생산해 배분하겠다.”

 

 불굴의 마리는 살짝 고개를 숙인 레드후드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그녀의 목에도 군번줄, 병사들 사이에서는 인식표라 부르는 것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도 잃은 것인가. 그래서 저랬던 거였군.’

 

 로열 아스널은 목에 걸린 인식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인식표에는 ‘오르카 저항군 AA캐노니어 총지휘관 로열 아스널 준장’이라고만 적혀 있었고 마이크로 칩이 내장된 기능이 전부인 그저 평범한 은빛 인식표가 다였다.

 

“이게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

 

“후후, AA캐노니어와 같이 정예소수로 움직이는 부대는 딱히 별 신경을 쓰지 않을 물건이지. 하지만 우리 쪽에서는 목숨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그 인식표다.”

 

“왜지?”

 

“우리 오르카 저항군 스틸라인 소속 브라우니들의 머릿수만 해도 족히 300을 넘어가지. 다른 장병들의 모델들도 각각 그 수가 족히 100은 넘어간다. 물론 장교급 모델들은 한 자리를 못 넘으나 그래도 다수가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하긴, 브라우니들이야 심심하면 마주칠 정도로 숫자만큼은 압도적이더군.”

 

“그렇지. 그렇기에 다들 그 인식표를 아낀다네. 자기가 누구인지, 스스로들은 알고 있어도 저 인식표가 있으면 타인에게도 쉽게 구분을 지어줄 수 있으니 목숨 다음으로 아끼는 것이지.”

 

 불굴의 마리는 철제 군용컵을 들어 조용히 컵 너머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로열 아스널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치로 인식표를 품 안에 넣으며 물었다.

 

“당초에 이걸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리 아낀다는 것인가? 같은 부대원들끼리는 서로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지 않나.”

 

“..각하께 보여주기 위함이다.”

 

 불굴의 마리는 그 말을 마치고 믹스커피를 다시 한 모금 삼켰다. 그녀의 말이 의외라는 듯 로열 아스널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사령관에게? 무슨 뜻이지?”

 

“애초에 우리에게 이런 인식표는 없었다. 하지만 점차 부대가 커짐에 따라 각하께서 각 부대원 별로 인식표를 나누어주라고 하셨지. 그것도 자신들의 고유번호를 알 수 있는 마이크로 칩이 내장된 것을 말이야.”

 

 불굴의 마리는 자신의 손목에 달아둔 인식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의 인식표에도 ‘오르카 저항군 스틸라인 총지휘관 불굴의 마리 4호 소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자신은 애초에 이 오르카호의 유일한 불굴의 마리 개체임에도 이걸 항시 소지하고 다녔다.

 

“어느 때라도 각하를 마주치면 브라우니들이 자신들의 목에 걸린 인식표를 보여주며 각하께 경례했지. 각하는 그걸 하나씩 보며 마이크로 칩을 각하의 단말기로 읽고 그녀들을 마주 보았어. 그래, 나는 거기서 각하에게 미래를 걸었다.”

 

 불굴의 마리는 말을 끊고 눈을 감으며 자신의 과오를 자책했다. 철혈의 레오나만큼은 아니었으나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짧았던 것은 아니었다. 항상 무심한 표정과 차디찬 인상으로 병사들을 대하는 그였지만 그녀도 병사들도 내심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는 얼굴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런데도..나는..’

 

“그럼 더더욱 이해할 수 없네. 대체 그런 남자를 가지고 왜 그 작전을 시행하려 한 건가?”

 

 불굴의 마리는 눈을 뜨고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로열 아스널과 눈을 맞췄다. 그녀 너머로 문밖을 나서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인 레드후드를 보며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이 큰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 자신의 죄를 마주 봐야 한다고 불굴의 마리는 결심했다.

 

“우리 스틸라인의 전투력의 대부분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는가?”

 

“보병, 기계화, 포병 거기에 공중 병력까지 다채로운 병종에서 나오지. 그 때문에 육상전의 대부분은 그대들이 일임하지 않나.”

 

“그렇지. 그래. 우리는 보병부터 시작해 공중전까지. 다양한 병종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힘은 군단에서 나온다. 그것이 핵심이지.”

 

“흠..그렇군. 사령관의 전역 제도, 그것이 발목을 잡았나?”

 

“그것도 맞지만 그건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는 부분이야. 필요하다면 후임에게 전투 모듈과 전술 지식을 인수인계해 군단의 힘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나? 그 작전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니었단 건 나도 아네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이 작전을 좋아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그대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인데.”

 

“그래..각하는 중상입은 대원들을 각별히 챙기셨지. 비록 그걸 드러내려 하지 않았어도, 전역 제도를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각하가 쓰러지시면 우리는 무얼 할 수 있나?”

 

 불굴의 마리는 떠올렸다. 에바라는 바이오로이드와 대화하다 갑작스레 고꾸라진 사령관은 하루 종일 잠에 빠져 있었다. 곧 닥터가 사령관의 상태를 검사한 결과 이미 휩노스병이 많이 진행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 말을 들은 불굴의 마리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었다.

 

“아니..이것도 나한테 하는 변명이다. 그래, 나는 두려웠다. 우리가 설 전장이 사라지는 것을.”

 

 로열 아스널은 그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나 왜인지 그녀에게만큼은 자신의 모든 걸 토로하고 싶었다.

 

“..우리는 다양한 병종과 압도적인 머릿수로 오르카 저항군 내의 입지를 다져왔다. 도시전과 험지의 전투를 담당하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신속의 칸을 선두에 내세운 강력한 돌파력을 가진 앵거 오브 호드, 무수히 많은 미사일들을 이용해 전장을 불태우는 둠 브링어, 전선을 지워버릴만큼 강력한 일제사격을 자랑하는 그대의 AA캐노니어. 이 오르카호 안에는 다양한 부대들이 모여 있다.”

 

 불굴의 마리는 점점 식기 시작하는 철제컵을 아쉬운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로열 아스널은 자신의 컵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흠.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겠네.”

 

“..그 어떤 부대도 우리의 자리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무적의 용 지휘관과 멸망 전 인류의 유산인 그녀의 함대가 나타나면서 우리 부대는 퇴색하고 있다고, 난 그렇게 느꼈었다.”

 

 넓게 펼쳐진 전장, 무수히 많은 철충들. 그리고 자칫했다가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 지형. 하지만 그녀의 함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둠브링어의 미사일 포격조차 무색해지는, 펼쳐진 전장은 일순간 조용해지고, 철충들은 파편이 되어 땅을 굴렀다. 베테랑들조차 긴장하게 하는 험한 지형은 아예 평탄하게 바뀌었다.

 

“그녀가 합류하고 난 오르카호의 전력이 늘어 기뻤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더는 우리가 설 전장이, 각하께 바칠 충성이 없어진다고 느꼈지.”

 

“,,,확실히 그 함대 일제 포격은 사기에 가깝긴 하군.”

 

 로열 아스널 역시 불굴의 마리의 말에 공감했다. 비록 복원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서도 일전의 작전에서 순간적으로 전선이 아닌 전장을 지워버리는 무적의 용의 함대 포격은 그녀를 비롯한 AA캐노니어 부대원들 모두 긴장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 AA캐노니어의 경우 정밀 포격을 통한 일점 포격이 가능하다. 그리고 자네의 스틸라인 역시 언제나 최전선을 지키는 보병군단이 아닌가. 그대들의 입지는 유효했을 텐데.”

 

“...아니. 점차 우리의 출격 기회는 미뤄졌다. 각하는 본래부터 누군가 죽는 상황을 바라지 않으셨다. 그 흔한 브라우니들조차 크게 다치는 날이면 병가와 휴가계를 마구 주셨지. 난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불굴의 마리는 이제 완전히 식은 커피를 들어 그것을 물 마시듯 마셨다. 달싹한 프림의 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이제는 지쳤다는 듯이 양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어 탁상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쓰러지시고 각하를 구할 방도가 김지석이 생전에 남겨놓은 생체 재건 시설을 확보하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하게 기뻤다. 그곳이라면 우리 스틸라인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뿐만이 아니었어.”

 

 그녀의 말대로 사령관이 쓰러지고 나서의 작전 회의실은 혼돈의 도가니였다고 로열 아스널은 떠올렸다. 무적의 용은 침묵하고 신속의 칸은 계속해서 자신을 비롯한 앵거 오브 호드가 그 시설을 확보할 것이라 주장했으며 둠 브링어의 멸망의 메이는 재건 시설에 영향이 가지 않을만큼의 폭격을 통해 그 시설을 확보할 것이라 했다. 철혈의 레오나 역시 평소보다 격앙된 모습으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작전 능력을 주장했다.

 

“나야 어차피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매한가지라 여겼지만, 그대들은 조금 달랐나 보군.”

 

“후후, 사실 말이 좋아 작전 회의지. 그건 쟁탈전에 가까웠었지.”

 

“그 부분은 인정하는군. 하하!”

 

 결국 회의는 무산되었다. 무적의 용이 그녀들을 중재했고 다음 회의 때에는 아예 그녀의 통제 아래 진행되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제시된 그 작전은 3명의 지휘관들의 찬성과 2명의 지휘관들의 중립, 그리고 1명의 반대로 그 작전은 사령관의 참석 없이 비밀리에 수렴되고야 말았다. 로열 아스널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앞에 놓인 철제 군용컵을 팅구며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팅-

 

“처음엔 그대들이 한심스러웠다. 어차피 세상에 남은 인류, 아니 남자는 그 혼자뿐인데 왜 그렇게 열을 내나 했지. 어차피 독점은 무리지 않나. 난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팅-

 

“그래서 나는 중립을 지켰었지. 나는 누가 그를 차지하니 마니 해도 상관없었다. 그 남자가 멸망 전 인류와 같은 멍청한 작자였어도 나는 그를 안았을 것이야.”

 

팅-

 

“그것이 ‘인류 재건’이라는 슬로건에 걸맞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인간을 지키고, 인류 문명을 재건한다. 어차피 만들어진 우리들에게 그것밖에 없지 않았나. 그래서 그 작전의 진행이 결정되었을 때 난 따로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들의 목표인 ‘인류 재건’을 가속 시킬 작전이라 판단했으니.”

 

팅-

 

“하지만 그런 나라도 이제야 조금 후회되는군. 이건 우리가 멍청했어. 암, 그 사령관의 욕설을 들어보니 그도 잠만 자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야. 후후, 우리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그는 알고 있었음에도 중단할 생각이 없었다라..알면 알수록 속내를 읽기 힘든 사내야.”

 

 로열 아스널은 그 말을 마치고 소파에 등을 맞긴채 눈을 감았다. 그녀가 철제 군용컵을 때리는 것을 멈추자 지휘관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불굴의 마리도 그녀의 부관인 레드후드도 로열 아스널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정적 아래 생각을 정리하던 로열 아스널의 머리에 문득 잊고 있었던 것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대, 혹시 우리 부대의 에밀리를 아는가?”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불굴의 마리는 로열 아스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안다. 이번 전투에서 큰 공로를 세운 아이지. 지나가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흠..그 아이, 원래부터 제녹스라 부르는 우리 부대의 최강이라 할 수 있는 레일건 병기를 다룰 수 있게 만들어진 실험적인 아이이기는 하다만.”

 

 로열 아스널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불굴의 마리 역시 굽힌 허리를 세우며 팔짱을 꼈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나?”

 

“그래...그건 좀 이상했어. 내 이곳에서 복원되고 난 이후 그 아이의 출력을 몇 번 본적이 있다.”

 

“그 아이의 레일건을 말인가?”

 

“음, 그렇다네. 복원되고 나서 그 아이의 프로필을 보고 작전 중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 시험 삼아 몇 번 쏘게 했었지.”

 

 로열 아스널은 곰곰이 생각하며 신중히 말을 이었다.

 

“내가 봤던 때의 제녹스 출력값과 그때 그 무어라 했지. 익스큐셔너? 분명 사령관이 그렇게 불렀었지. 그 녀석의 방패를 뚫을 때와의 출력값이 확연히 달랐었다.”

 

 로열 아스널은 머릿속에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백흑의 코트를 입은 것만 같은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며 양팔의 거대한 칼, 압도적인 내구도로 그 어떤 공격도 먹히지 않던 여태 만난 연결체들 중 최강의 연결체. 익스큐셔너.

 

 그 강함은 등장과 동시에 휘두른 일격에 정찰을 하던 레이븐 모델 하나를 반토막 내며 주변에 있던 다른 기동형 정찰 모델들 역시 여파로 전부 기동불가 상태로 만들었다. 대지를 그을 때마다 노움들의 콘크리트 벽이 종잇장처럼 무너졌고 지상 병력들과 공중 병력들의 포화에도 끄떡조차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익스큐셔너는 자신의 주위를 부유하는 거대한 방패와 창을 가지고 온 부대를 휩쓸었고 이번 전투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들의 대부분은 그 녀석에 의해 발생하고 만 것이다.

 

“그래..사령관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내가 한번 에밀리에게 명령해 그놈의 방패를 조준해 쏜 적이 있다. 그때는 제녹스의 강함이 무색해질 정도로 그건 흠집조차 나지 않았지.”

 

“..하지만 사령관이 도착하고 나서 그녀는 단 한방에 그걸 부수지 않았나.”

 

“그래. 그것이 걸리는군. 자꾸.”

 

“그저 앞선 포격에 데미지가 누적되어 부서졌다는 건?.”

 

“아니야. 이건 확실해. 분명 내가 봤던 제녹스 출력값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단순히 그 아이가 나보다 사령관을 따른다고 해서 나올 출력값이 아녔어.”

 

 로열 아스널의 의문이 불굴의 마리에게 전파되었다. 무엇인가 자신이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불굴의 마리는 즉각 자리에 일어섰다.

 

“여기..그래, 이쯤에 뒀었지.”

 

 그녀가 작전보고서와 계획서를 꽂아둔 책장에 다가가 병사 진급표와 같이 둔 작전보고서를 집을 때 갑자기 그녀들의 단말기에 삑삑 하는 알람음이 울렸다.

 

“흠? 별일이군. 북방의 암사자양이 우리 모두를 호출하다니.”

 

 로열 아스널은 그녀의 머리에 맴도는 의문을 잠깐 치우고 자신의 손목에 달린 단말기에서 출력되는 메시지를 읽었다.

 

“음, 아무래도 그녀가 결심한 모양이네. 후, 타 독립부대와 사령관 직할부대의 지휘관들 및 부관들까지 전부 호출하다니. 발할라로 떠나는 것을 결심했나.”

 

 불굴의 마리는 방금 뽑아둔 병력 현황표를 제자리에 두고 자신의 부관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드후드 역시 자신의 단말기의 메시지를 읽고 자신에게 눈길을 돌렸다. 방금까지와 같이 축 처진 눈이 아니었다. 전장으로 나서는 전사의 눈이었다.

 

“또 다른 전장으로 나설 때인가! 하하하!”

 

 로열 아스널은 자리를 털고 대범한 웃음과 함께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단말기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비스트 헌터. 나다.”

 

-대장님! 대체 어디서 뭘하고 계신 겁니까!? 작전 회의는 이미 끝났다고 들었는데 부대 복귀도 안 하시고!

 

“그렇게 화내지 마라. 잠깐 스틸라인 지휘관실에 왔을 뿐이야.”

 

-예? 거길 갑자기 왜 가신 겁니까?

 

“부대 간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직접 왔지.”

 

-...하여튼 저도 메시지는 봤습니다. 곧 작전 회의실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에밀리는 좀 어떻나?”

 

-차라리 대장님이 오지 않으신 것이 나았습니다. 지금 제녹스를 탄 상태로 대장님만 찾고 있습니다.

 

“하하! 이게 바로 나의 선견지명이지. 아무리 나라도 제녹스에 치이면 무사치 못해.”

 

 로열 아스널은 피식 웃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제녹스에 올라타 자신에게 돌격하는 에밀리를 상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지 라고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불굴의 마리에게 고갤 돌렸다. 그녀 역시 안되었다는 듯 웃었다. 로열 아스널 어깨를 으쓱대며 소파를 돌아 나왔다.

 

“자, 이제 심판대에 올라갈 시간이군. 그대.”

 

“그저 시간이 앞당겨진 것뿐이다. 어서 가지. 죄인들이 느긋하게 가면 안될 일이지.”

 

“이렇게 온 김에 다음에 합동작전이나 한번 해보지 않을 텐가? 자고로 최강의 포병대는 최강의 보병들과 함께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 좋은 생각이다. 우선 우리가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각하께 부탁을 드려 보겠다.”

 

 불굴의 마리는 군모를 고쳐 쓰고 지휘관실의 문을 열었다. 그 뒤로 로열 아스널과 레드후드가 차례로 나섰다. 이제 자신의 과오를 청산할 때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당당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숨을 한 번 들이키고는 자신의 각오를 내뱉었다.

 

“서서 죽는다. 그래, 그곳이 어디든 할지라도. 나 불굴의 마리는 서서 죽겠다. 설령 그곳이 각하의 앞일지라도.”

 

“후-이제야 이 답답함을 좀 풀 수 있겠군. 음, 나는 우선 에밀리부터 어떻게 할지 고민이야.”

 

 시원스레 웃는 로열 아스널이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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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편을 내가 다시 읽어봤는데 씹노잼이더라.

그래서 이번 편부턴 아예 1인칭 시점으로 고정하는 건 관둘려고. 오히려 몰입감이 더 떨어져.

긴 글 읽어줘서 고맙다. 오탈자 수정이나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