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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Day 121. PM 03:07

 

 오르카 1호는 언제나 활기찼다. 병사들은 항상 웃음기를 머금고 다녔으며 앞날에 대한 걱정보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은 너무나 좋았다. 사령관은 한참을 울다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불도 켜지 않아 오로지 수면 너머로 들어오는 미약한 햇빛만이 그의 방의 음영을 채워 넣고 있었다.

 

“...저건..”

 

 그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양쪽의 눈은 한참을 울어댄 탓인지 시뻘겋게 부어 있었고 굵직한 목에서 나오는 중저음에는 힘이 없었다. 안색 역시 파래해 생기가 돌지 않고 있었다. 뿌연 시야 너머로 블랙 리리스가 퇴실하기 전에 조용히 밀어 넣은 음식 카트가 보였다.

 

‘소완이구나.’

 

 아마 소완이리라. 그는 직감했다. 처음 소완을 만났을 때 그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소완은 6지역 이후 오르카호에 합류했었기에 갑작스레 자원 탐사팀과 함께 찾아온 그녈 보고 크게 당황하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만나서 반갑사옵니다. 사령관님. 소첩은 소완이라 하옵니다.”

 

 얼굴이 강제적으로 억제된 상태이었기에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소완은 자신의 욕망을 스스럼없이 표출하는 얼굴이었다. 분홍빛이 감도는 은발처럼 새하얀 피부와 싱긋이 미소 짓고 있는 입가는 언제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준비를 하는 음흉한 얼굴이었다.

 

“...만나서 반갑다. 소완이라 했나. 특기는 무엇이지?”

 

 짐짓 그녀에 대해 모른체 하며 그녀와 면담하면서 힐끗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를 바라보았었다. 소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후하고 안심했었다. 소완은 블랙 리리스에게 일절의 관심도 주지 않고 자신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첩은 사령관님, 아니 이제 주인님이라 해도 되겠사옵니까?”

 

“..허가한다. 소완.”

 

“후후, 감사하옵니다. 주인님. 소첩은 주인님께 지고의 쾌락을 선사하기 위해 만들어졌사옵니다.”

 

“..지고의 쾌락?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지 설명해다오.”

 

“소첩에게 관심을 가져주어 감사하옵니다. 주인님. 소첩은 인류 멸망 이후에도 여러 곳을 전전하며 소첩의 주특기인 요리를 연마했사옵니다. 소첩의 요리는 가히 지고의 쾌락을 주인님께 선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요리라 그럼 오르카호에서 주방을 맡아 주겠나?”

 

“물론이옵니다. 주인님. 그럼 지금 당장 준비해도 되겠사옵니까?”

 

“..알겠다. 안내인을 붙여주도록 하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음흉한 눈빛에 내색하지 못했었지만 자신은 그 눈빛이 두려웠다. 핸드폰 너머로 봤던 것보다 자신처럼 차가운 인상이 자신의 기억 속의 소완을 덧 씌웠다. 고갤 돌려 옆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에게 턱짓을 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소완을 따라나섰다.

 

“사령관, 저 여자. 뭔가 이상해. 말투에서부터 꺼림칙 한걸?”

 

 소완이 나서자마자 부관용 업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철혈의 레오나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그녀였지만 그때만큼은 미간에 주름을 띄우고 있었다.

 

칙-

 

“안다. 뭔가 숨기는 게 있어.”

 

 소완 때문에 술렁이는 마음을 잠재우고자 눈을 감고 입에 담배를 한 대 물렸었다. 불을 붙이고 깊이 한 모금 삼키자 입과 목구멍을 타고 폐에 담배 특유의 독한 연기가 가득 채웠다. 그녀의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저건 나한테 가지는 불만이구나. 예상대로 화살이 소완이 아닌 자신한테 날라왔다.

 

“..사령관, 담배는 몸에 좋지 않아. 자신이 최후의 인간이라는 자각 정도는 하는 게 어때?”

 

 옛적 자신의 엄마처럼 잔소리하는 그녀에게 사령관은 무덤덤하게 그녀의 걱정을 맞받아쳤다.

 

“..기호품 정도는 봐주는 게 어때.”

 

“기호품이 당신에게 득이 안되니까 이러는 거 아냐.”

 

“하루 반 갑이라고 네가 정했잖나.”

 

 감았던 눈을 뜨자 그녀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젠장, 이제는 안 봐도 뻔하다. 표독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을 보고 괜히 말대답을 한 것이 후회되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건 사령관의 의사를 존중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그러니까 하루 반 갑으로 합의 봤잖나. 여기서 더 줄이면 내 의사는 어디 가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사령관, 나는 사령관이 좀 더 나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길 원해.”

 

“...그 소리를 하루 열두 번도 더 듣는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좀 알아듣는 척이라도 하면 어때? 다 당신을 위한 거란 걸 모르겠어? 우리 알비스도 이 정도로 이야기하면 알아듣는 척이라도 한다고.”

 

 이제는 엄마가 아니라 전에도 없던 마누라가 생긴 기분이었다. 사령관은 반절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면서 몰려오는 두통을 참았다. 철혈의 레오나는 자신의 요구가 받아질 때까지 몰아세울 거라는 듯 말을 계속이었다.

 

“숙녀의 걱정을 그저 잔소리로만 취급하는 남자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알았다. 반의반 갑, 5개비로 줄이지.”

 

 결국에 사령관은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었다. 그가 백기를 들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했다는 듯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고 소완의 약물 투여 사건은 블랙 리리스가 그녀의 손짓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그녀가 수상한 약병을 스리슬쩍 넣으려던 걸 붙잡아 미수에 그쳤었다.

 

 블랙 리리스를 비롯해 철혈의 레오나 역시 강력한 처벌을 요구를 했었지만 그녀에게 오르카호 주방을 전담시키는 것으로 사령관은 합의를 보자고 했었다. 그녀의 전투능력과 요리솜씨를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저 그녀를 내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웠던 탓에 한동안 레오나의 등쌀에 시달렸지만 지금 그 과거를 생각하니 사령관은 그때가 너무 그리웠다.

 

 사령관은 침대에서 일어나 은은하게 빛나는 음식 덮개를 열어보았다. 은접시 위에는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내는 전복죽 한 그릇과 약간의 밑반찬 그리고 쪽지가 하나 죽그릇 밑에 꽂혀 있었다. 사령관은 그걸 꺼내 읽어보았다.

 

-부디 소첩의 음식을 드시고 힘을 내어주십시오. 주인님.

 

 살짝 물기가 묻은 그 쪽지를 읽고 사령관은 힘없이 수저를 들어 전복죽을 한입 삼켰다. 딱 좋게 따뜻한 죽 사이사이에 잘게 썰어 넣은 전복이 입안을 맴돌았다. 딱히 예전에 살던 곳의 편의점 냉장 전복죽과 다를 바 없는 외관임에도 은은하게 퍼지는 전복의 향과 식감이 눅진한 쌀알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위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역시 소완이야.”

 

 사령관은 힘없이 웃으며 죽을 한 숟갈씩 조금이나마 삼켰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몸은 그렇지 못한 듯 위장에 음식이 들어오자 참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죽을 반쯤 먹고 나자 몸에 생기가 돌았다. 생기가 도니 잊고자 했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업무 테이블 쪽으로 사령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지 않고 그대로 서서 그는 책상을 두 번 두드려 자신의 업무용 홀로그램을 띄웠다. 최근 열람문서 폴더로 들어가니 제일 상단에서 2번째에 4일 전 날짜로 동영상 파일이 첨부된 닥터의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오빠, 큰일이야. 언니들이 미쳤어!>

 

“...후우.”

 

 닥터의 다급함이 느껴지는 보고서 제목을 보자마자 사령관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더는 느껴지지 않아야 할 강한 두통이 밀려왔다. 한 손으로 가슴께 셔츠 단추를 쥐어 잡으며 사령관은 다시 한번 그 보고서를 열었다.

 

-주군이 쓰러진 마당에 대체 그대들은 무얼 하자는 것이오? 작전이 수립되지 않잖소.

 

 익숙한 차가운 음성과 함께 작전 회의실을 비추는 영상이 홀로그램 위에 띄워졌다. 아마 에이미가 설치한 카메라였을 것이다. 스카디는 숨기는 것에는 영 별로였으니.

 

-그가 쓰러졌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 지금 당장 삼안의 생체 재건 설비를 확보해야 한다고! 이렇게 어물쩍거릴 여유가 어딨어?!

 

 철혈의 레오나가 평소의 냉정한 모습은 어디 가고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탁자를 치며 화를 내고 있었다. 씩씩거리며 이마에 핏대를 세운 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그녀가 굉장히 다급하다는 것을 영상 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다.

 

-철혈의 레오나 소장의 말이 맞습니다. 한시바삐 움직여야 하는 건 저 역시 동의합니다.

 

 불굴의 마리였다. 흥분한 철혈의 레오나와 달리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무덤덤하게 무적의 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조급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팔짱을 낀 오른손은 왼팔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 역시 다급하오. 하지만 그대들이 이렇게 규합이 되지 않아서야 될 것도 안되오.

 

-그래서! 지금 뭘 하자는 건데! 지금 당장 사령관이라도 억지로 깨워 볼까?! 휩노스 병이 저만치 진행되었는데 언제 다시 일어날지 어떻게 알아!

 

-목소리를 낮추시오. 철혈의 레오나 소장. 엄연히 작전 회의 중이오.

 

-내가 낮추게 생겼어?! 확보를 위한 내 작전을 모두 무시하는데 지금 짜증이 안 나겠냐고!

 

-대장님, 진정하십시오.

 

-이 손 놔! 발키리! 

 

 사령관은 이미 한번 보았던 영상이었지만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평소에 알던 모습과 많이 달라 낯설었다. 항상 차갑게 굴며 자신이 쳐다보면 그 시선을 피하던 그녀와 영상 속의 그녀는 확연히 달랐다. 

 

-철혈이란 이명이 어울리지 않게 행동하는군. 철혈의 레오나 소장. 벌써 이 함은 이미 그 재건 시설로 이동 중이라는 걸 잊었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잖나. 우선 진정하게.

 

 가만히 상황을 무덤덤하게 지켜보던 로열 아스널이 철혈의 레오나를 타박했다. 씩씩거리던 철혈의 레오나는 자신을 말리는 발키리의 팔을 뿌리치며 자리에 앉았다. 발키리는 그런 대장의 변한 모습에 크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선 사령관이 휩노스 병을 버티는 동안에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

 

 신속의 칸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당당한 표정이었지만 눈가에는 평소와 같이 그리던 워페인트 대신에 다크서클이 짖게 내려앉아 있었다.

 

-애초에 사령관이 저렇게 될 동안에 그 누구도 눈치를 못 채었던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멸망의 메이는 팔짱을 끼고 자신의 옆에 있는 철혈의 레오나를 보며 날이 선 말을 날렸다. 흥분을 식후던 철혈의 레오나가 그 말에 멸망의 메이를 죽일 듯이 째려봤다. 멸망의 메이는 거기에 개의치 않고 그 시선을 맞받아치며 말을 이었다.

 

-뭐? 뭐가 불만이야? 우리 중에서 계속 그의 부관을 자처하던 건 너 아녔어? 흥, 부관이 사령관의 건강 상태를 알지도 못했다니. 그만 부관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어때?

 

-..니년이 오늘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대장님! 진정하십시오!

 

-이리 와! 이 썩을 꼬맹이! 이거 놔! 발키리! 오늘 저년의 머리통에 납탄을 박고 말겠어!

 

-발키리씨! 그쪽 대장 좀 막으세요! 이 망할 땅꼬마 대장! 제발 이때는 가만히 있으면 덧납니까?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어!? 매번 사령관 옆에서 으스대던 년이 정작 사령관이 저 꼴이 되는 동안 뭐했는데!

 

-아이, 대장! 그만 하세요! 알아봐야 어떻게 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잖습니까! 에바라는 여자가 아니었으면 휩노스 병을 치료할 생체 재건 설비조차 못 찾았다고요!

 

쾅!

 

-...다들 닥치시오!

 

 발키리와 나이트엔젤이 머리채를 쥐어 잡고 싸우려는 각자의 대장들을 붙잡으며 말리고 있자 무적의 용이 주먹으로 강하게 회의실 원형 탁자를 때렸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넷을 보는 그녀의 눈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뭐하자는 게요! 주군이 쓰러지신 마당에 언제까지 고집을 피울 셈이오! 철혈의 레오나 소장! 그리고 회의 중에 각 부대의 장이라는 자들이 싸움이라니! 언어도단이오!

 

 무적의 용의 분노 섞인 호통에 철혈의 레오나와 멸망의 메이는 싸움을 멈추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간신히 싸움을 말렸으나 무적의 용은 손을 이마에 짚으며 의자에 몸을 맡겼다.

 

-유치한 다툼은 끝났나? 그럼 본제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가.

 

 로열 아스널은 자기 옆의 두 대장들을 한심한 눈초리로 한번 쓱 훑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 생체 재건 장비를 확보하는데 며칠이나 소요될 것 같은가. 사령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고 한다만.

 

 그녀의 물음에 모든 이들이 신음을 흘렸다. 사령관 본인이야 저 생체 재건 장비 시설에 어떤 적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머릿속에 지식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그걸 알리 만무했었다. 불굴의 마리가 무적의 용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 스틸라인이 먼저 수색과 정찰을 도맡겠습니다. 함 내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하고 있으니 수색과 정찰을 단시간 안에 해낼 수 있을 겁니다.

 

-하! 애초에 그냥 볼 것도 없이 우리 둠브링어의 ALCM을 갈기면 끝날 일이잖아!

 

-멸망의 메이 소장, 그러다 오히려 생체 재건 장비 시설을 날려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나?

 

-흥! 우릴 얕보지마. 둠브링어의 화력은 강한 만큼 조절하기도 용이하다는 걸 간과한 모양이네. 애초에 땅개들보다 우리 기동팀이 정찰에 더 우수하다는 것도 잊었어?

 

-...내 부하들을 모욕하는 언사는 취소하도록. 내 말은 머릿수만큼은 우리가 더 많으니 소수정예 부대들보다 더 넓은 지역의 정찰에 더 우수하다는 뜻이다.

 

-아니,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 불굴의 마리 4호 소장. 애초에 특수전에 특화된 우리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미확인 지역 정찰 능력과 험지를 기반으로 한 상황에서 더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걸 잊었어? 이번 확보 작전은 우리 부대가 주도할 거야.

 

-아니, 그 말에 나 역시 동의할 수 없다. 철혈의 레오나 소장. 단시간 안에 철충들을 부수고 시설 내부로 들어가 설비를 확보하는 것은 우리 앵거 오브 호드가 제격이다. 돌파력만큼은 이 함 내에서 우리가 가장 점수가 높다는 것을 잊었나.

 

-...대체 왜들 이렇게 싸우는 것이오. 정말이지. 주군은 어떻게 그대들을 매번 조율했는지 이제 감탄이 나오는구려.

 

 이제는 말리기도 지쳤다는 듯 무적의 용은 의자에 누운 채 이마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옆에서 질렸다는 듯이 서로 싸우는 대장들을 보던 로열 아스널이 입을 열었다.

 

-정말 꼴불견들이군. 지금 최후의 인간인 그 남자가 없으니 전부 내분하는 꼴이라니. 병실에 누워있는 그 남자가 이 장면을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군.

 

 그 말에 서로 죽일 듯이 째려보던 네 명의 대장들은 짐짓 그 일침에 고개를 숙였다.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무적의 용이 자세를 고치고 진중하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보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더 크게 보였다.

 

-우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소. 더 진행해봐야 진전은커녕 후퇴만 할 것이니. 내일 다시 작전 회의를 열고 내가 진행할 것이오. 각자 부대로 돌아가 오늘 일을 반성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부관과 함께 작전 회의실을 나섰고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사령관은 다시 봐도 골이 아파 머리를 싸맸다.

 

“하..”

 

 저 당시의 자신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나. 아, 한가롭게 침대 위에 누워 잠이나 자고 있었지. 사령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의 무능함을 타박했다. 애초에 휩노스 병이 주인공에게 발발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녔다. 김지석의 무덤에 생체 재건 시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거기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올 줄을 몰랐을 뿐.

 

'아니...아니야. 내 잘못이야. 이건.'

 

 분명 전의 살던 세계에서 본 이 게임의 스토리 진행은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쓰러지지 않았었다. 그는 그저 약간의 두통을 느낀 정도였다고 사령관은 기억했다. 그와 자신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나중에 생각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용..무적의 용을 찾겠다고 꽤 많은 시간을 소비했었지.'

 

 주인공은 5지역에서 6지역으로 오며 그리 큰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어땠는가. 굳이 오르카호의 전력을 크게 확충할 마음에 7지역에서 만났어야 할 그것도 신체를 바꾸고 한참 뒤에야 만났어야 할 무적의 용을 찾겠다고 온 멸망 전 해군기지들을 수색하고 다녔다.

 

'결국..이건 내 실수야. 내가 그녀들을 이렇게 만들고 말았어.'

 

 긴 수색과 정보 추적을 통해 무적의 용이 잠든 곳을 찾아내 그녀와 합류하고 그 이후 그녀의 함대를 최대한 이용했다. 사령관이 대부분의 작전 지휘 권한을 그녀에게 넘기자 철혈의 레오나는 그에게 경고했었다.

 

'사령관, 당신이 그 함대를 온전히 지휘할 능력이 없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명심해. 그녀에게만 기대면 나를 비롯한 다른 부대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 거야.'

 

'..필요한 전력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네가 바라는 게 대체 뭐야? 철혈의 레오나.'

 

 참을 수 없는 답답함. 그게 그녀의 경고 아닌 걱정을 내치게 했었다. 사령관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 이 오르카 1호를, 바이오로이드들을 지키고자 내린 결정이었다. 더는 누군가 자기의 미숙함으로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루 온종일 전략 전술을 탐구하고 공부해도 일반인이었던 자기에게 이것을 습득하고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부족했었다.

 

 결국 무능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해 철혈의 레오나의 말대로 머릿속에 그것까지 박아넣어 이제는 표정을 바꾸는 법도 까먹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어쩌면 사령관 본인은 매우 화가 나 있었으리라.

 

'사령관, 내 말의 뜻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대체 뭐야. 불만이라고? 네가 그걸 안 가져 본 적이 있나? 너에겐 아직까지도 내가 미숙한 햇병아리처럼 보이겠지. 맞아, 난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 그래서 무적의 용에게 대부분의 권한을 이임했잖나. 패배가 아닌 승리만을 안겨주고 있잖나. 너에게는 내가 내 책임에서 도망치는 걸로 보이나?'

 

'....'

 

'그렇게 생각한다면, 맞아. 정답이야. 너는 항상 내게 너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라고 했지. 미안하지만 그 말은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완벽한 남자가 아니니. 네가 처음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나? 그래, 난 겁쟁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사..사령관. 내..내 말을..'

 

'오늘 업무는 이걸로 끝이다. 숙소로 복귀하도록. 오늘도 수고했다. 부관.'

 

 분명 감정이 억제되었어야 했다. 말을 뱉으면 뱉을수록 자신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철혈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손을 휘휘 저으며 내려진 축객령에 철혈의 레오나는 황망한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터덜터덜 자리를 떠났었다. 그 뒷모습에 사령관 역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었다.

 

 그때의 자신은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계속해서 자신의 결정에 참견해오는 철혈의 레오나가 어느샌가 밉게만 느껴졌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꼭 들었어야 했다고 사령관은 크게 후회했다.

 

 그날 이후부터 부쩍 둘 사이의 대화는 적어졌다. 철혈의 레오나는 항상 자기의 눈을 피했고 자기도 그녀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사령관은 부관 변경을 요청하는 타 부대 지휘관들의 요구를 수락할지 아니면 그대로 그녀를 둘지 고민했을 정도로 그녀와의 관계는 크게 소원해졌다.

 

"레오나...난 대체..네게 무슨 말을..레오나.."

 

 사령관은 쉰소리로 이제 자신의 옆에 없는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곳에 온 이후부터 항상 자신을 돌보아주던 그녀와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령관, 이 전술은 이 상황에 적합하지 않아. 오히려 우회하는 편이..'

 

 그녀는 항상 내 옆에서 부족한 전술과 전략을 메꿔주기 여념이 없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던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도 그녀의 덕이 컸다.

 

'흠, 오늘은 기분이 좋아. 그러니 1m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할게.'

 

 날이 선 태도는 무서웠지만 내심 자신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업무 도중에 함께 홍차를 마시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이 이상 시간을 쓰면 내일 업무는 누가 해?'

 

 밤을 새워가며 홀로 모의전술 프로그램을 돌려가며 학습하고 있자 그녀는 굳이 늦게까지 남아 자신의 공부를 도와줬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은 어떻게 했었나. 몰려오는 죄책감과 후회가 자신을 벼랑 끝에 몰아세웠다. 이제 자신의 과오를 되돌리 수 없다.

 

"...."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자책하던 사령관은 다시 홀로그램 보고서에 눈을 돌렸다. 처음 휩노스 병으로 인한 잠에서 깨어나 이 보고서를 읽었을 때는 미처 다른 것을 생각하기 어려웠었다. 일어나도 찾아오는 강렬한 두통과 혼미해지는 정신. 거기에 각 부대의 대장들의 신경전. 이걸 모두 받아내기에는 자신에게 여유가 없었다.

 

<오빠, 일어나면 꼭 연락해줘. 언니들을 막아야 해!>

 

 제일 최근에 올라온 보고서는 불과 그저께에 올라온 것이다. 앞선 보고서와 똑같이 동영상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고 사령관은 그걸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흐...흐하하하..."

 

 힘없는 웃음이 사령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 보고서를 보고 얼마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던가. 팔에 각성제를 계속해서 투여하지 않는 한 눈도 뜨기 힘든 상황에 저 영상을 보고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었다. 옆에서 블랙 리리스가 당황하며 자신을 부축했어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황망히 이 영상을 봤어야 했었다.

 

"결국..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사령관은 도저히 저 영상을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회의가 무산되고 난 이후 그녀들이 다시 열었던 회의 속의 내용은 그만큼 자신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주었었다. 자신의 여태까지의 노력이 모두 부정당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그녀들을 믿었었다. 말릴 힘도 없었기에 억지로 팔에 각성제를 투여한 상태로 지휘 패널을 잡고 그녀들의 지원을 도맡았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그의 기대는 배신당했었다.

 

"차라리..주인공이었다면..내가 아닌 그 녀석이었다면.."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언인지 사령관은 그저께 이 보고서를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의 원래 주인공. 그가 항상 자신을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완전무결, 지휘도, 작전도 부대의 케어도 그 어떤 것도 자신은 주인공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난 대체 여태까지 뭘 한 걸까."

 

 천장을 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 천장이었지만 사령관은 아직 이 천장이 낯설었다. 그가 기억하는, 보고 싶은 천장은 더는 볼 수 없다.

 

"돌아가고 싶어..더는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아."

 

 이곳에 온 이후 자신이 자신답게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녔었다. 주인공이라는 캐릭터의 가면을 쓰고 그처럼 행동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었다. 감정과 얼굴을 억제하기 위해 뇌에다가 그것까지 박았다.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 아닌 배신뿐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령관님과 저희는 가족이니까요. 가족을 지키는 건 당연하잖아요?'

 

 배신감과 자책감으로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노움 1021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사령관이 부임한 이후부터 함께 해온 그녀는 작전 중 중상을 입고 돌아와 사령관이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사령관 자신을 가족이라고 그러니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었다. 그 말에 사령관은 반드시 그녀들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냐...아니야, 노움1021. 가족은..진짜 가족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제 가족을 지옥으로 밀어 넣지 않아...난 너희의 가족이 아냐."

 

 사령관은 아무도 듣지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정신없었지만 따스했던 초창기 때의 과거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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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 애호물로 시작했는데 어째 가면 갈 수록 레오나 불쌍하게 만드는 것 같네 ㅅㅂ

다음편에 레오나가 사령관한테 뭘 박아 넣었는지 쓸게. 글이 점점 떡밥만 올리고 안풀어지는 것 같아서 나도 노이로제 걸린다.

첫 문학이라 부족한게 많아. 봐줘서 고맙고 피드백이나 오탈자 있으면 적어줘. 아니 누가 글 좀 쓰는 법 좀 알려줘 싯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