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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가 한바탕 난리를 칠 것을 예상했던 사령관이었지만 레오나는 의외로 굉장히 차분했다. 레오나는 평소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사령관에게 말했다.

 

 “사령관, 멍하니 보고 있지 말고 다른 곳을 봐줄래?”

 

 “어..어.”

 

 레오나의 말에 사령관은 돌아서서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레오나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사령관을 불렀다. 그제서야 사령관은 다시 레오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즐겨 입는 하얀색 정복으로 갈아입은 레오나는 사령관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차 한 잔 할래?”

 

 평소 같은 레오나의 차분한 태도에 사령관은 당혹스러웠다. 다른 남자가 여자의 속옷차림을 봤다면 보통 놀라서 소리치는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사령관은 레오나가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는게 오히려 더욱 두려웠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있는 고요함이란 건가? 

 

 “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사령관은 레오나의 권유를 받아드렸다. 레오나는 티포트를 기우려 하얀 도자기 잔에 차를 따랐다. 잔을 반 정도 채우고 레오나는 사령관에게 잔을 건넸고 사령관은 찻물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잔을 받았다. 사령관에게 차를 건넨 후에 레오나는 본인의 잔에 차를 채웠다. 레오나가 건넨 차는 그녀가 평소에 즐겨 마시던 홍차였다. 사령관은 레오나가 홍차를 마시는 것만 봤지 직접 마셔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사령관 이 야심한 밤에 왠일이야? 내일 업무를 위해 잠을 자는 것도 중요한 자기 관리야.”

 

 속옷차림 때문에 순간 잊고 있었지만 레오나의 말에 사령관은 레오나의 방에 온 이유를 기억해냈다. 사령관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근 며칠 동안 레오나와 있었던 일 때문에 사령관은 마음속은 후회란 고름으로 가득 찼다. 고름을 빼지 않고 방치했다간 그 안에서 썩고 만다. 고름을 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름이 찬 주머니를 따는 것. 그 과정이 거칠어 흉터가 남더라도 사령관은 이 이상 바보처럼 가만히 있기는 싫었다.

 

 “너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서 왔어.”

 

 “사과? 나한테?”

 

 “그래...”

 

 숨을 들이마셔 마음을 다 잡고 사령관은 레오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며칠 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레오나, 내가 미안해. 일주일 전에 너에게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했었지. 그때는 내가 순간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어. 내가 너무 멍청했어.”

 

 사령관의 짧은 말이 끝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레오나는 사령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 차를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레오나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사령관의 목은 타들어갔다. 방 안에 흐르는 침묵은 단단한 밧줄처럼 서서히 몸을 조여왔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맺혔다. 레오나의 답을 기다리는 그 순간순간이 무거운 바위가 자신을 짓누르는 듯 무거웠다. 

 

 “솔직히 말 할게. 사령관.”

 

 드디어 레오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말을 할지 사령관은 가슴을 조렸다. 과연 사과를 받아줄까? 아니면 냉정한 성격의 그녀답게 깔끔하게 거절을 해버릴까?

 

 “난 사령관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을까봐 두려웠어. 지금까지 사령관은 계속 나에게 의지해왔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나를 찾아와줬네. 고마워 사령관 용기를 내줘서.”

 

 레오나의 한 마디는 사령관에게 매마른 땅을 적시고 타오르던 불꽃을 꺼뜨리는 물이었다. 사령관은 레오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오나가 사과를 받아준 후에야 사령관은 말라버린 목을 차로 적실 수 있었다.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자 몸과 마음이 누그러졌다.

 

 “사령관 나도 미안해. 사령관에게 일주일동안 모습도 보이지 않고 명령까지 거부해버리다니 부하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어.”

 

 사령관이 감격에 젖어 있을 때 레오나는 사령관에게 사과했다. 아무리 철혈의 레오나가 고급 바이오로이드라고 해도 결국에는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물건이다. 인간의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바이오로이드에게는 반드시 따라야하는 원칙이다. 하지만 레오나는 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했다. 무슨 이유가 되었든 레오나는 원칙을 깨버렸고 그녀는 그것을 어물쩡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사령관, 나는 당신의 명령을 거부했어. 지휘관 개체가 인간의 명령을 일부 거부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령관의 명령은 거부해서는 안 되는 명령이었어. 그것에 대한 처벌은 추후에 받을게.”

 

 “네가 명령에 불복종하게 만든 건 내가 한 말 때문이야. 네 잘못이 아니야 레오나. 너에 대해 잘 모르는데 함부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사령관은 레오나에게 차를 한 잔 더 부탁했다. 레오나는 사령관의 차를 채워주었다. 비어있던 잔은 붉은색 찻물로 다시 채워졌다. 사령관은 한 번에 잔을 비우고 빈 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사령관은 레오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오나.”

 

 “왜 그래 사령관?”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레오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령관의 눈빛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사령관을 봤을 때 그의 눈빛은 작은 물웅덩이 같았다. 너무 얕아 그 바닥이 훤히 보이는 작은 웅덩이. 하지만 지금 그의 눈빛은 예전과 달리 거대하고 잔잔한 호수처럼 깊지만 맑아보였다.

 

 “일주일 동안 많은 걸 생각하게 되었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무엇이 너를 화내게 한 걸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더라고.”

 

 사령관은 조소했다. 자신을 향한 조소였다. 

 

 “그때 알았어.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말이야. 난 그저 너를 냉정하지만 똑똑한 지휘관으로 여겼을 뿐이었어.”

 

 사령관은 자신이 한심했다. 오르카호에 오르고 거의 두 달 동안 레오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녀와 보낸 시간은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사령관은 레오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그녀가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대장이란 것이 사령관이 알고 있던 전부였다. 

 

 “이틀 전에 발할라 부대에 대한 내가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어.”

 

 이틀 전 사령관은 영혼 없이 기록 보관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그날 그곳에 있었는지는 사령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냥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기록 보관소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사령관은 손에 닿는 기록들을 아무거나 읽었다. 기록 보관소에는 상상외로 엄청나게 방대한 양의 기록들이 있었다. 

 

 멸망 전의 세상과 인간들에 대한 기록, 바이오로이드가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기록, 아직 만나지 못한 다른 지휘관 개체들에 대한 기록 등등. 여러 가지 기록물 등 중 사령관의 기억에 박힌 기록은 각 바이오로이드들이 속해 있는 부대를 정한 기록이었다. 사령관은 기록을 넘기던 중 발할라 부대에 대한 정보를 집중해서 읽었다. 사령관은 그 기록을 읽으면서 자신이 레오나에게 절대로 해선 안 될 말을 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철충으로 인해 한 번 전멸 당했고 다시 재생산된 부대라는 걸 그때 알게 되었어. 그걸 알고 나니 내가 정말 한심하더라고 항상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소중한 사람을 잃은 고통, 사령관은 그 고통을 모른다. 한 번도 소중한 자를 잃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레오나는 다르다. 레오나는 재생산된 개체이지만 다른 레오나 개체들의 기억을 링크시켜 정보와 기억을 이어받을 수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감정에 휘둘려 버린 거야. 정말 한심해 죽겠더라고.”

 

 사령관은 한숨을 푹 쉬었다. 바로 옆에 있는 자에 대한 것도 모르는 주제에 순간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본인은 사령관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자신이 바이오로이드들을 위하는 사령관이 되겠다고 그녀에게 말했던 것이 한심했다. 사령관은 다시 말을 했다. 

 

 “너가 없는 동안 깨달았어. 나는 아직 너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한 가지는 너에게 약속할 수 있어.” 

 

 사령관은 의자에서 일어나 레오나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있는 레오나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사령관은 레오나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레오나의 손을 잡고 사령관을 레오나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너에게 의지하기 위해 너를 필요로 했다면 지금부터는 내가 너에게 의지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너가 필요해. 내가 너에게 의지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줘.”

 

 레오나는 사령관의 말에 마음이 동했다. 사령관은 말에는 어느 때보다 감정이 담겨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사령관은 더 이상 애가 아니었다. 굳은 신념을 가진 한 명의 남자가 되었다. 레오나는 앞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다. 사령관을 한 명의 우수한 지휘관으로 성장시키는 것. 오르카호를 이끌 유능한 지휘관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가 할 일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령관이 자신처럼 냉정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사령관의 천성이 너무 선하다. 때때로 눈물도 흘릴 것이고 때때로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레오나는 사령관을 완벽한 지휘관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역사속의 위대한 지휘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완벽한 지휘관으로 만들겠다고. 

 

 “사령관 걱정하지마. 나는 사령관 옆에 있을 거야. 지금도 앞으로도.”

 

 “레오나...”

 

 “내가 당신을 내게 어울리는 남자로 만들거야. 그리고 그 옆에 내가 있을 거야. 사령관도 좋지?”

 

 “잘 부탁해.”

 

 사령관과 레오나는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어떠한 가식도 담기지 않은 은은한 미소였다. 사령관과 레오나는 이제야 서로에게 진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령관과 레오나는 그날 밤 서로에게 하지 못하고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말을 했다. 밤을 길었고 그 시간 동안 둘은 웃기도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따뜻한 차보다는 좋은 술이 어울리는 그런 밤이었다. 

 

 --

 

 “그래서 사령관과 섹스는 했나?”

 

 “그런 일을 없었다고 몇 번을 말해. 내가 당신인줄 알아 아스널?”

 

 “아니 남녀가 서로에게 진심이 되었으면 섹스말고 더 남아 있나?”


 “말을 말자.”

 

 옛날 기억에 젖어 있던 레오나는 아스널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 섹무새가 뭘 알까? 아스널은 레오나의 시큰둥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레오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마리는 레오나의 말이 굉장히 놀라웠다.

 

 “각하께서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셨나보군. 자네의 말대로 라면 내가 두 달 정도 후에 오르카호에 합류를 하는데 그 사이에 어엿한 한 명의 지휘관이 되셨다니.”

 

 “나도 달링이 그렇게 빨리 배울지 몰랐어. 그날 후로 달링은 스펀지 같았어. 나의 모든 지식을 거의 완전히 외워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후로 달링도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세운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망자는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신념 말이야.”

 

 “역시 각하께서는 떡잎부터 다르셨군.”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사령관 같은 인간을 상사로 두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마리는 내심 오르카호에 가장 먼저 합류한 지휘관이 자신이 아닌 레오나인 것이 안타까웠다. 만약 레오나보다 먼저 합류했다면 지금쯤 저 반지와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되어 있을 텐데. 마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아쉬워만 했다. 어차피 사령관은 한 명이 독차지 할 수 없는 존재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순서는 온다. 첫 번째가 안 된다면 두 번째가 되겠다고 마리는 생각했다. 이는 다른 지휘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사망자가 나왔으니 사령관이 저렇게 슬퍼하는게 이해는 가는군. 레오나 자네가 가서 진득하게 위로해 주게. 남자에게는 언제나 여자가 필요한 법이니까.”

 

 아스널의 말에 레오나는 얼굴을 붉혔다. 지휘관들은 그런 레오나에게 응원의 말을 한 두 마디씩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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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웹툰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올리게 되네 글 빨리 쓰시는 분들 진짜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