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지의 밀림도, 작열하는 사막도 인류의 발걸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인류사는 수많은 위기를 직면해왔지만 그 어느 대지에도 깃발을 드높이 세워 당당히 군림하였다.


만물의 영장은 그렇게 1만년의 시간동안 대륙을 정벌해왔다. 그리고 이제야 정복 당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뜨거운 무언가가 뺨을 가른다. 미칠듯이 뛰는 심장소리와 온 몸을 적시는 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감을 느끼기 힘들다.

벌써 감각을 잃어버린 것도 아닐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


옆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듯한 기척을 느낀다. 아까전부터 조용한 것이 청각을 잃은 듯 하다. 

무거운 머리를 가까스로 돌려 옆을 바라보았지만 그 곳에는 더 이상 말을 거는 존재가 없었다. 형체잃은 고깃덩어리가 놓여있을 뿐.

갑작스러운 진동과 함께 몸이 중심을 잃었다. 힘들게 세운 몸이 다시 지면과 마주한다. 몸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체내로 박아넣듯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조금씩 감각이 돌아왔다.


손 쪽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고개를 돌려보자 큼직한 소총이 그 존재감을 드려냈다.

SM10 Light Machin Gun.

지긋지긋한 내 애인같은 화기. 무기를 마주하고 나서야 지금이 어디인지 실감이 갔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내 멱살을 쥐어잡고는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세요!"


날카로운 음성이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나를 잡아채는 인물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겹도록 많이 본 얼굴이다.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T-20S 노움. 

스틸라인의 든든한 방패.


"아..."


입을 열고 무언가가 말하고 싶었지만 쩍쩍 갈라지는 입술과 목은 소리가 새어나오는걸 거부하였다.

목 안에서 타고 올라오는 갈증이 정신을 덥치고 나서야 허리춤에 있던 수통이 떠올랐다.

급하게 입 안으로 물을 털어넣자 내가 참호속에 들어와있다고 실감되었다.


"컥... 커헉..."


급하게 삼킨 물이 사례가 들려 목 안을 간지럽힌다. 몇 번의 기침으로 뱉어내자 눈 앞에 나를 바라보고 있는 T20S 노움 개체가 보였다.

감사하게도 기다려준 것일까.


"소속을 말씀해주세요."


역시 내가 아는 그녀와는 다른 모양이다. 그녀라면 이렇게 차갑게 말하지 않았을테니.


"21사단... 21사단 제 3탄약중대 61분대 1699번 레프리콘입니다."


나의 말에 그녀는 살짝 눈가를 찌푸리더니 참호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무참한 시체와 피범벅들, 그리고 신음소리 가득한 광경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들이 누군지 깨달았다.


"아."


그 이상은 말하지도 못했다. 여기는 33호 참호. 우리 분대가 탄약을 보급하기로 한 최전선이다.

그리고 이 시체들은 우리의 전우일 것이다. 혹은 우리이거나.


"1699번 레프리콘, 저는 2022번 T20S 노움입니다. 이제부터는 제 분대에서 합류하도록 해요."


갑작스러운 소속변경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식의 소속 변경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하나뿐이지.

내가 있던 중대는 전멸했다. 더 이상 21사단에 제 3탄약중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1699번 레프리콘, 합류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분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물을 필요는 없으리라.

이 곳은 최전선. 그녀의 분대가 멀쩡했다면 지금 혼자 이 참호를 기어다니고 있지는 않을테니.

이제 이 곳에는 그녀와 나 둘 뿐이다.


피비린내와 화약냄새로 마비된 후각. 끊임없이 이어지는 포격소리로 멀어져가는 청각, 그리고 매운 연기로 가려져가는 시각까지.

곧 옆에 누워있는 전우들과 함께해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였던가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