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탄 - 1

불발탄 - 2


"여기도 틀린 것 같습니다."


무덤덤한 말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생각보다도 퉁명스러운 말투에 나도 모르게 잠시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녀가 눈치챈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와 같이 무너져내린 32호 참호로 향하는 통로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통로의 앞에 하반신이 사라진 레드후드 개체의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눈 먼 포탄에 피해를 입었는지 마지막까지 그 표정에는 허탈감이 남아 있었다. 언제나 최전방을 앞장서던 분이셨을테니, 그 괴로움도 말로 이룰 수 없으리라.

고독한 전우의 눈을 감겨준 2022번 노움은 마침내 참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동부전선은 철충들에게 완전히 밀려 사실상 철충들의 기지가 되어버렸고, 중부전선도 이제 철충들이 들이닥쳤을 시간이다. 혹시라도 서부전선에는 통로가 남아있지 않을까 희망적인 관측도 가졌던게 몇 시간 전이었지만, 이젠 그런 기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간간히 우리를 머리위를 가로질러 32호 참호를 향해 떨어지는 포탄들을 보고 있으면 남아있던 용기도 쏙 들어가버린다.

지금이야 전선에 집중되고 있지만 우리가 이 참호를 나오는 순간 우리에게로 그 목표가 집중될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밤까지만 버틸 수 있어도 가능성을 더 키울 수 있을텐데.


- 투두두둥!


육중한 라이플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가까운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그게 우리가 가려던 방향과 일치한다는게 유일한 문제점이었고.


2022번 노움과 나는 눈이 마주치자말자 상체를 낮추고 조용히 전투음이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참호의 특성상 구불거리는 경로로 인해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져도 쉽게 다가가기 힘든 경우가 많다. 다행히도 다가가는 도중에 전투음이 끊기지는 않았다. 곧 코너를 돌자 캐미컬 칙 한 기가 눈에 들어왔다. 


2022번 노움의 정지 신호에 머신건을 들어올려 초록색의 형체를 조준했다. 두 발로 가까스로 서 등에 거대한 산성 탄두를 짊어지고 걸어가며 주위로 특유의 악취를 풍기며 녹색 액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니 역겨움이 목 아래까지 올라왔다.

바이오로이드라는 특성상 놈들의 산성탄두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는 쉽지 않지만 장비를 녹이고 끈적거리는 액체로 인해 발이 묶이는 상황은 캐미컬 칙이 있는 전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놈은 먹잇감에게 다가가듯 천천히 무언가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특유의 굉음을 내며 상체를 뒤로 꺾고는 관을 통해 무언가를 흘러보내고 있었다. 화학탄을 쏘기 위한 준비자세, 저 더럽고 음탕한 존재의 목표가 그 앞에 있다는 의미다.


2022번 노움도 그 사실을 인지하였는지 내게 사격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화기를 들어 캐미컬 칙을 조준했다. 엄호와 보조, T-20S 노움들이 전장에서 주로 보여주던 역할들이었다.


나는 고글을 내려쓰고는 망설임 없이 참호 옆으로 몸을 돌려 경기관총을 난사했다. 목표는 볼 것도 없이 캐미컬 칙이었다.

대면한 상태의 캐미컬 칙은 쏴 죽이기 힘든 적이지만 이렇게 뒤돌아 있는 캐미컬 칙은 아주 손 쉬운 사냥감이다. 등에 짊어진 화약통은 민감하고 안전성을 요구하는 존재였으니까.


날카로운 총격음이 이어지면서 캐미컬 칙의 등에 매달린 화학통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움의 지원 사격은 캐미컬 칙의 다리를 노렸고 중심을 잃은 철충놈은 옆으로 쓰러지면서 하늘 위를 향해 화학탄을 쏘아냈다. 

다행히 참호 밖으로 떨어진 화학탄에 피해를 입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옆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탄피들을 발로 밀어내며 캐미컬 칙이 쓰러진 방향으로 다가가 마무리 사격을 실시하였다. 철충놈들은 숙주가 파괴되어도 조그마한 본체가 보란듯이 탈출하여 새로운 숙주를 찾아 도망친다. 이 사실을 깨닫는데 시간이 걸린 탓에 초반에는 무익한 전투가 이어져 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도망치던 벌레를 처치하고 나서야 캐미컬 칙 너머에 쓰러진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브라우니?"


나의 말에 눈 앞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쓰러진 바이오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레프리콘 상병님?"


지겹도록 많이 본 얼굴. 지겹도록 많이 들은 목소리. 


"저... 저..."


브라우니 23766. 우리 분대의 막내였다.


"저... 진짜로... 죽는 줄 알았지 말임다..."


울먹거리며 내 눈을 바라보는 브라우니를 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 분대는 전멸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 명은 남아있었으니까.


"레프리콘, 서둘러야 해요."


어느 새 옆으로 다가온 노움이 급하게 말을 꺼냈다. 

철충들은 항상 무리지어 다니며, 의식을 공유하는 듯이 행동한다. 아마 우리가 캐미컬 칙을 쓰러트린 것도 알고 있을 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전투음으로 인해 근처의 철충들이 찾아올 수 있다.

해후의 감격을 풀기에는 장소가 적합하지 않다.


"브라우니! 일어나세요."


"예, 옙!"


브라우니는 그제서야 저 멀리 떨어진 자신의 총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눈에 띄는 부상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충분히 뛸 수 있으리라.


"뛸 수 있겠어요?"


"넵! 뛸 수 있습니다!"


확인하듯이 묻는 노움의 말에 브라우니는 당차게 대답했다. 노움은 브라우니에게도 자신의 분대에 합류할 것을 명하면서 아까와 마찬가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조금이라도 더 32호 참호에 가까운 지역으로 가는 것. 뛰어가면서 모든 작전을 들은 브라우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곧 각오를 다진 듯 눈을 전방으로 부랴렸다.

이등병치고 굳은 마음가짐, 역시 마음은 단련되는 것이다. 여기서 머물러봤자 죽도 밥도 안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리 없지.


손해밖에 없는 치킨 게임이 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