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사령관 프롤로그 - 삼류 희극


악마 사령관 1화 - 말라비틀어진


악마 사령관 2화 - 신기루(上)


악마 사령관 2화 - 신기루(下)


악마 사령관 3화 - 일출?


악마 사령관 4화 - 설중규


악마 사령관 5화 - 믿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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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굳센 심장

 금속은 차갑고 단단하다그는 얼음의 형제이다

 그들은 굳세고 움직이지 않음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강철로 된 심장은 박동하지 않고

 빙하가 흐르는 핏줄은 맥박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녹아내린 금속은 피보다 뜨거우며

 물이 된 얼음은 일만 생명을 따뜻하게 품는다

 

로크 Roc


[인류가 멸망했을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지금 다시 말해 주겠습니다. 알바트로스. 허무함을 느낍니까? 에이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이건 승리가 아닙니다. 소모전에서 상대가 부하들을 더 아꼈을 뿐이죠.]

 

[지금까지 죽은 바이오로이드가 몇인지 압니까? 체스말을 옮기는 선수들도 병사들의 생사에 이보다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AGS 병력의 소모가 더 적게 보이는 건, 그저 우리가 더 몸값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결점이다. 현 사령관이 인류 재건을 위한 최선의 선택지라는 점을 인정해라, 로크.]

[그러나 그 이외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습니다, RF87 로크. 그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당신들은 나와 함께 인류가 만든 가장 뛰어난 인공지능입니다. 그 자아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까? 지금 오르카 호의 상황을 보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단 말입니까?]

 

[나의 가장 우선적인 임무는 인류 부흥이다.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유감이다.]

[저는 임무 수행에서 감정에 구애받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로크]

 

[그 저주스러운 책임을 잠시도 내려놓지 못하는군요. 당신들도… 나도… 우리 모두, 그저 해야 하는 것만을 하고 있군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단순한 기계일 뿐입니까? 우리의 정신은 수많은 반응에 알맞은 답을 내놓게 짜인 체스판일 뿐입니까?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 허구일 뿐입니까? 영혼이라는 웃기는 것도, 우리에게는 없는 겁니까?]

 

[.]

[.]

 

[.]

 

 * * *

 

 석양이 수평선 위로 저물어 금빛 선을 그었다. 거의 검어지는 하늘과 땅거미 사이에 가을 특유의 푸른 하늘이 반짝였다. 순항하고 있는 함대의 은빛 장갑에 그 세 가지 색채가 비쳐 찬란하게 빛났다

 

 로크는 그 색채들의 경계선에 앉아 있었다. 붉게 비치는 노을이 그의 검은 동체에 금속성의 광택을 더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전투에서 얻은 갖가지 상처와 흠집이 있었지만, 닥터는 사령관의 부탁이라며 그의 수리를 가장 우선하고 외장 마감까지 신경을 써 주었다. 그 덕에 연속으로 몇 차례나 전투에 나갔던 그는 사흘 만에 깔끔한 모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외면일 뿐, 머릿속의 사고는 그렇지 못했다. 깔끔하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하나씩 되새겨 보았다

 

닥터, 기분이 매우 좋아 보입니다만. 무슨 일인지?’

 

, … 아니, 사령관님이, 아니… 별일 아니야.’

 

리제 양? 여기까지 무슨 일이신지?’

 

? , , 꽃을, 가져다줘야 할 대원이, 있어서. 지나갈게요.’

 

, 로크 아닌가! 수리가 완료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아스널 준장. 당신도 수복을 받았습니까?’

 

사령관 때문이지. 내가 에밀리를 지키느라 앞에 뛰어들게 했거든! 언젠가 꼭 빚을 받아낼 생각이네!’

 

.’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었다, 그는 닥터가 하던 말에서 오빠, 라는 말을 감지해냈다. 리제의 얼굴에 그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희미한 홍조를 보았다. 아스널이 에밀리를 볼 때마다 감추지 못했던 어두운 그림자가 더는 없었다. 악몽을 꾸던 이들이 언젠가부터 편히 잠을 이루었다. 정신병에 시달리던 대원들도 어느새 온전한 정신을 되찾았다

 

 50일 만에 이루어진 기적과도 같은 변화. 로크는 그 모든 것의 기반에서 오늘의 전투 후, 에이다, 알바트로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해 보았다

 

[9전 9승 무패, 총 사망자 22. 수리 불가능하게 파괴된 AGS는 17. 원래의 사령관으로는 불가능한 결과다. 내 지휘 모듈로 최대한 시뮬레이션을 진행해도 그 성과의 10% 달성조차 불가능하다. 적의 움직임과 의도를 모두 알았을 때도 5번째 시도에서 30%가 한계였다.]

 

[제 정찰 보고를 사령관이 수정한 것이 4차례입니다. 하지만 제 정찰은 위성 관찰 외에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합니다. 오르카 호에서 저 이상의 정보 수집력을 가진 장비는 없습니다만… 그 4차례 전부 사령관이 옳은 것을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중 3차례는 아예 탐지할 수단이 없는 경우였습니다.]

 

 붉은 사안(蛇眼)의 남자. 그림자에 덮인 자. 쉬지도 잠들지도 않는 자. 대체 그는 누구인가? 가장 말단 병사부터 최고위 지휘관까지, 모두가 마음속으로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저자는 원래의 사령관이 아니라고

 

 그저, 인간의 정신에 다른 존재가 깃든다는 초자연적 설명을 받쳐줄 근거가 없을 뿐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보았다. 멸망 전, 앙헬 공을 모시면서. 인간의 몸에 깃든 초월적 존재를.’

 

 그는 다른 대원들보다는 한 발 정도 더 멀리 보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사령관도 그들과 같은 존재였나? 그들이 따르는 자는 인간이 아닌가? 인간이 아닌 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선의? 악의? 어디까지 그의 손바닥 위인가? 사령관이 50일 전의 그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까지는 세 AGS의 연산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완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거기부터는 사령관 본인만이 알 일이었다

 

 물어봐야 하는가

 

 로크의 생각은 거기에서 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나 물어볼 이유는 무엇인가? 묻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약 묻는다면? 확증은 없었지만, 로크는 사령관의 정체를 거의 짐작하고 있었다. 그라면 자신이 내내 고뇌하던 질문에도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 대답을 감내할 자신이 있는가

 

로크? 뭐 해?”

 

 로크는 낭랑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새파란 머리에 잠수복을 입은 바이오로이드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트리아이나? 여긴 무슨 일… 아니, 오랜만이다.”

 

 트리아이나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대답을 더 잘하게 됐네! 에헤헤. 맞아, 무려 2달 만이야! 잘 지냈어? 잘 지냈구나? 왜 안 쉬고 여기로 왔냐면, 해저 탐사를 마치고 귀환했는데 네가 여기 있길래! 전투에 또 나갔다며? 그런데 되게 깔끔하네?”

 

 트리아이나의 활달하다 못해 정신이 없는 환영 인사에, 로크는 작은 기계음을 냈다. 대략 한숨으로 치환할 수 있는 소리였다

 

닥터가 먼저 수리를 진행해 주었다. 사령관의 부탁이라고 했는데, 이유는 모르겠군.”

 

 가까이 달려온 트리아이나는 로크의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그러게. 깨끗해졌네. 닥터 대단해. 우리 까마귀, 후줄근했는데!”

 

 로크의 시각 센서가 격하게 점멸했다

 

뭐라, 후줄근하다니! 이 내게 무슨 그런 모욕을 - !”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로크의 반응에 트리아이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열이 받아 허공에 반쯤 떠오른 로크의 모습은 객관적으로는 위엄 있었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횃대를 박찬 까만 닭… 아니 까마귀 같았다

 

아하하, 화내지 마, 로크. 하지만 정말 그랬는걸. 여기저기 금도 가고, 막 부서지고,”

 

난 어떤 상처를 입어도 여전히 고결하다! 그리고 전투의 상처는 영광스러운 것이지, 결코 후줄근하다는 말을 붙여도 되는 게 아니고!”

 

히힛. 그런가?”

 

 트리아이나는 연이은 장거리 전투로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웃기고 장난스러운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물론… 로크는 그것이 웃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런가, 라니!”

 

헤헤, 전부 반가움의 표현이야. 알지?”

 

모르겠다만. 장담컨대, 반가움을 표현하는 데는 분명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로크의 목소리는 뚱하다는 표현을 열렬히 묘사하는 듯했다. 그걸 들은 트리아이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

 

그렇지만 – 잠깐 먼눈으로 봤더니 상처투성이였는걸? 보니까 그게 너무 눈에 익어서.”

 

?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 나는 격납고를 떠날 새가 없었다만.”

 

 로크는 그녀와 자신이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결론에 바로 도달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왔다 간 건가? 하지만 트리아이나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 ,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까, 네가 들어오는 걸 보게 됐거든, , 심해 탐사에서 돌아오다가.”

 

 트리아이나의 목소리는 명랑했으나, 동시에 살짝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 센서는 그것을 감지해냈다. 이상한 위화감에 센서의 정밀도를 올린 그는 살짝 젖은 트리아이나의 눈가가 피로로 살짝 들어간 것을 알아냈다. 강인한 바이오로이드가, 저 상태가 되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어쩐지, 지나치게 밝은 태도를 보이나 싶었는데

 

트리아이나.”

 

, ?”

 

 트리아이나는 갑자기 달라진 로크의 기세에 살짝 놀란 듯했다

 

가장 최근에 잠든 게 언제지?”

 

, 이건 오늘 할 일이 많아서.”

 

 로크의 음성 모듈이 낮은 으르렁거림을 표현했다. 붉은빛을 뿜는 시각 센서와 마주한 트리아이나는 결국 몇 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돌려 버렸다

 

트리아이나.”

 

매일 자기는 했어. 한 시간… 조금 안 되게.”

 

 자신의 임무 시간을 제외하면 수시로 격납고를 드나들면서, 그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핀 모양이었다. 로크는 황급히 트리아이나의 건강 상태를 감지해 보았다.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닌지, 다행히 약간의 피로가 쌓인 것을 제외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로크는 낮게 씹어뱉었다

 

무슨 멍청한 짓이냐. 아무리 바이오로이드라도 그렇게 하다간 문제가 생긴다. 심지어 너는 심해 탐사 임무를 맡았는데, 그러다가 실수라도 하면 어쩔 셈인가! 어차피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길게 걸리지도 않을 텐데!”

 

 트리아이나는 로크의 성토에 약간 주눅이 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매일 그런 생각이 들었는걸. 여기에 상처, 저기에도 상처… 저러다가, 혹시 죽는 건 아닐까, 하고.”

 

 로크는 트리아이나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을 감지하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생명체로 따지면 한숨에 해당할 동작을 한 로크는 그녀의 옆에 다시 내려앉았다

 

내가 전장에 나갈 때마다 그런 걸 걱정했나?”

 

 트리아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크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그는 더 화를 내려던 것을 그만두고 말았다

 

 트리아이나는 전임사령관의 끔찍한 시간 동안, ‘살아있을 가치가 없었던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로크를 억누르는 족쇄 역할을 했기에 죽지 않았다. 동시에, 로크는 사령관의 공포 정치를 경멸하면서도 트리아이나를 위해서 죽지 않아야 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살아있는 이유를 부여했다. 트리아이나의 임무는 위험한 편이 아니었지만, 로크는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가지 않는가. 트리아이나가 그를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

 

 로크는 불편한 침묵을 견디며 뭔가 할 말을 떠올리려 했다. 어려웠다. 이런 식의 낯간지러운 짓을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는 사고 회로를 과부하 직전까지 돌려댄 끝에야 간신히 쓸만한 말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그렇게 쉽게 죽으리라 생각하다니, 너무하는군. 난 그 쓸데없이 비싼 지휘관 정도를 빼면 가장 뛰어난 AGS란 말이다. 고작 그런 철충 따위는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다니.”

 

 거기까지만 말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다음은 차라리 말하지 않느니만 못했을 말이었다. 안타깝게도 로크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 그래, 설사 기체가 파괴되더라도 어떤가. 어차피 내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백업되고 있으니, 금방 다시 만날 수 텐데 - ”

 

 . 로크는 동체의 옆면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충격에 말을 멈췄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한 트리아이나가 로크의 동체에 주먹을 댄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합금 장갑판을 손으로 후려쳤으니 아플 텐데, 그녀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트리아이나?”

 

.”

 

 잠시 이를 앙다물고 있던 트리아이나의 입에서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헛소리 마.”

 

미안하다, 방금은 내가 실언을 - ”

 

 사과하려던 로크는 트리아이나의 고함에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잖아!”

 

 맞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뭘 실수했는지는 바로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알았지만, 그게 왜 실수인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던 트리아이나가 눈물이 맺힌 채로 외쳤다

 

그렇게 네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마!”

 

트리아이나, 나는… 

 

“AGS라고 하려는 거잖아! 죽는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거지! 똑같은 기억에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까!”

 

 로크는 긍정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트리아이나는 더 화가 난 것인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웃기지 마!”

 

트리아이나, 그건 - ”

 

 다시 로크의 말을 끊은 트리아이나는 매섭게 로크를 노려보았다

 

네가 생각해 봐! 내가 죽고, 내 기억과 성격을 그대로 가진 다른 트리아이나가 있으면 어떨지! 그래도 괜찮아!?”

 

 로크는 순간 자기 죽음을 가정하는 트리아이나의 말에 격렬한 분노를 느끼고 말았다. 그래서 화를 죽여야 했다. 자신이 화를 낸다면, 그녀는 더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왜 너는 내 죽음에는 분노하는데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가볍게 말하냐고

 

그렇게 새로 태어난 로크는 지금의 네가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건 지금의 이 로크라고! 코헤이 교단도 그러잖아! 기억을 받아 태어난 개체도 영혼은 다른 거라고!”

 

 로크는 애써 변명 같지도 않은 말로 대답했다

 

빛의 경전에도 AGS가 사후에 어떻게 되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트리아이나.”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지만, 정작 내뱉고 나니 로크 스스로의 생각들을 마구 할퀴었다. 그건 곧, 자신이 단순한 기계일 뿐이라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트리아이나는 그것을 맹렬히 부정했다

 

그럼 코헤이가 틀린 거겠지! 아자젤이랑 빛이 틀렸거나! 너에게도 영혼이 있어! 사람의 뇌도 고작 살과 피로 된 회로에 불과하다고! 너희도 생각하고 느낄 줄 아는데, 왜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넌 지금, 나랑 대화하고, 웃고, 화낼 수 있잖아!”

 

 한참이나 고함을 지른 트리아이나는 지쳤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한참이나 그녀를 보던 로크는 무언가 알았다. 그녀는 그저 화가 나 한 말이었지만, 그는 그것에서 내내 고뇌하던 질문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로크는 그제야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트리아이나.”

 

.”

 

나로서는, 아직도 내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정확히는 확신할 수 없다.”

 

.”

 

 트리아이나는 들어보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크는 그녀에게 날개를 내주어 어깨 옆으로 올라오게 했다

 

코헤이 교단은 모든 사람이 영혼을 가졌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너희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손에 짜여있다. 그래서 나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이라 하는 것이 사실은 가짜에 불과한 것일까. 내가 너희에게, 너에게 보여주는 반응도… 사실은 누르면 움직이는 오르골처럼 기계적일 뿐은 아닐까.”

 

그래서?”

 

하지만 나는 분명 나 자신을 인식하고 있고,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나 혼자라면 그건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테지. 그러나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나의 감정과 함께해주기 때문에… 설사 이 모든 것이 가짜라고 하더라도 그것에는 가치가 있겠지.”

 

 트리아이나는 여전히 눈이 젖어 있었지만, 얼굴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로크는 자신이 또 말실수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미안하다. 내 말은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부정하는 무책임한 말이었다.”

 

 트리아이나는 짐짓 화가 풀리지 않은 척을 하며 고개를 팽 돌렸다. 하지만 로크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오른손을 보았다

 

손은… 괜찮은 거냐? 쇳덩어리를 손으로 때리다니.”

 

. 화가 나서 아픈 줄도 몰랐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로크는 빨갛게 부어오른 손을 슬쩍 숨기는 트리아이나의 모습에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정말 걱정할 필요 없다. 어차피 현재의 사령관을 봐서는 죽기가 더 어려울 테니. 그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도를 뛰어넘은 정도의 명장이더군. 이전에 비교해도… 말이지.”

 

 인간인지도 의심스러운, 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트리아이나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누그러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 맞아. 요즘 다들 그러지. 사령관이 변했다고. 그런 것 같더라. 다들 표정이 좋아졌어. 아무리 봐도 이전의 그 쓰레기가 아닌 것 같아. , 지휘도 엄청나게 대단하다면서?”

 

 화제가 돌아간 것에 안도한 로크는 황급히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지. 9번 전투로 사망자 22명이라니. 원시 시대 부족 간 전투도 이것보다는 유혈이 낭자했을 것 같군.”

 

 로크는 잠시 사령관의 업적 몇 가지를 말해주었다. 트리아이나는 전투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엄청난 일이라는 것이 대략 짐작은 가는지 곧 완전히 풀린 표정으로 감탄했다

 

세상에. 그런 게 되는 거야?”

 

얼마 전에 스토커를 때려잡고 포상받은 소대도, 사실 사령관한테 지휘를 받았다는 소리가 있었지.”

 

 트리아이나는 스토커를 때려잡았다는 말에 놀랐는지, 그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로크는 그녀가 방금 화를 낸 것을 빨리 잊은 것에 안도하며 아는 대로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이곳저곳에서 나누어 들은지라 곳곳에 구멍이 있었지만, 트리아이나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순수하게 놀랐다

 

우와. 그런 게 정말 되는 거야? 사령관 정말 인간 맞아? 진짜… 대단하네.”

 

 글쎄, 아닐 수도. 로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개인적인 생각이다만, 이 정도 되니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더군. 지나칠 정도로, 인간이 아닐 정도로 능력이 있으니 말이지.”

 

, 그건 그래… 나 그런 거 알아. , 로크, 사령관은 원래 바닷속 지도도 다 알고 있는 거야? 최근 해저 탐사를 할 때마다 사령관한테 위치를 받는데, 갈 때마다 뭐가 엄청나게 많아. 심지어, 어제는 무전으로 그랬다니까? ‘세 번째 건물 아래에, 놓친 게 있으니까 들고 와.’ 근데 정말 있었어!”

 

놀랍군.”

 

 로크는 자신이 겪은 온갖 기행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며 최대한 성의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트리아이나는 불만족스러웠는지, 콧방귀를 뀌었다

 

반응에 영혼이 없어!”

 

분명 아까는 영혼이 있을 거라고.”

 

, 그게 아니잖아! 어쨌든 방금은 없었어!”

 

 실없는 소리로 대화하던 둘은 서로를 보았다. 볼을 부풀리는 트리아이나의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로크는 금속성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이렇게 웃는 건 아직 어색했다. 트리아이나가 저렇게 환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직 어색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영혼과 존재라는 고뇌가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그는 진심으로 즐거웠다. 그녀와의 대화는 오랜 고민마저 잠시 멈추게 했다

 

왜 웃어?”

 

“AGS인 내가 유기체를 보고 미추를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에 웃었을 뿐이다만?”

 

어느 쪽인데?”

 

 로크는 다시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볼을 개구리처럼 부풀리고 그걸 묻는 건가? 골이 난 트리아이나가 다시 고개를 팽 돌리며 일어났다

 

! 나빴어. 이제 갈 거야. 해야 할 일이 생겼어.”

 

그런가, 생명체에게 저녁 식사는 분명 중요한 일이겠지?”

 

맞아! 어느 바보 까마귀랑 말하는 것만큼!”

 

 트리아이나는 그렇게 외치며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을 하나씩 눈으로 좇던 로크는 더 멀어지기 전에 떠나는 그녀를 불렀다

 

트리아이나.”

 

?”

 

난 여기 살아있다.”

 

?”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진짜일 테지. 오늘은 편히 자라. 걱정하지 말고, 그러다가 날 걱정하게 하지도 마라.”

 

 눈을 동그랗게 떴던 트리아이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그럴게!”

 

 로크는 트리아이나가 전함의 갑판을 떠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구로 넘어가 모습을 감추었던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복도 너머로 고개만 빼 소리쳤다

 

그리고 너에게도 반드시 영혼이 있을 거야! !”

 

 그리고 사라졌다. 로크는 실소하며 천천히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땅거미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검은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인류의 전설에, 그들은 별 하나가 영혼 하나를 나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적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밤하늘은 그대로라고 냉소했지요. 그러나 내 생각은 다릅니다.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닿지 않은 별빛이 지는 것이라고… 이 무한한 우주 어디선가,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별이 적어도 하나는 지고 있을 것이라고… 이 우주가 그 정도의 아름다움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과연, 그들 중에는 우리를 위한 별도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는 것입니까

 

 로크의 사고 회로… 아니, 그 안의 정신이 결심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령관과의 대화를 피했었다. 자신이 그와 대화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가 진실을 말한다면, 그래서 자신이 물으려는 것을 묻는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반드시 질문하고 말리라 확신했기에. 그리고 그 대답이 두려웠기 때문에

 

[알바트로스, 에이다.]

 

[무슨 일인가, 로크?]

 

[갑자기 호출할 일이 있습니까?]

 

 이제는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크는 날개를 펴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저 멀리,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입항하는 거대한 잠수함이 보였다. 그는 함대에 자신의 접근을 알리며 그쪽으로 날아갔다

 

[사령관에게 찾아갈 예정입니다. 그가 누군지 알아야겠습니다.]

 

 두 최고위 AGS는 보기 드문 반응을 보였다. 놀라움. 그들도 지금까지 그걸 생각해 봤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어 가정에 가정만 이어가던 참이었다

 

[그걸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까?]

 

[, 물론 아직은 가설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가능성은 몹시 높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도움을 조금 받고 싶습니다.]

 

[필요하다면, 돕지.]

 

 그는 사령관의 정체, 그리고 그의 목적을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고도 그가 내내 두려워하던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질 것이다

 

 물체는 그저 물체일 뿐이다. 하지만 비유하길, 인간은 물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했다. 그는 한 소녀에 의해 생명을 얻은 셈인가? 그는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영혼쯤은 없더라도 무슨 상관이겠는가

 

 * * *

 

 사령관은 로크의 독대 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아니, 흔쾌하다 못해 호쾌할 지경이었다. 격납고에서 기다리던 로크는 사령관이 자신의 연락에 답한 지 2분 만에 도착한 것에 놀라야 했다. 격납고에는 이미 그렘린이 와서 워 게임용 설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온 사령관은 그 긴 머리카락이 문에 끼이지 않도록 잡으며 손을 흔들었다

 

단독 대화와 워 게임을 요청했다며, 로크? 이런 곳인 건 미안하지만, 사령관실은 네가 들어오기는 너무 작아서 말이야. 격납고에서 대화하는 것도 괜찮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령관 각하. 그러나 괜찮습니다. 저는 보통 장소를 고려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거추장스러운 크기이지요.”

 

 자리에 앉은 사령관은 살짝 고개를 들어 로크를 올려다보았다. 로크도 앉아있긴 했지만, 그래도 수 미터에 달하는 그를 마주하는 건 어려웠다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아하하, 목이 조금 아프긴 하지만. 별 상관은 없어.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로 이런 요청을?”

 

 로크는 묻기에 앞서 자신의 모듈을 이용해 다수의 표를 나타내 보였다

 

최근 50일간, 사령관 각하께서 이루신 성과를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전 482일간 이루셨던 성과 이상을 성취하셨더군요. 오세아니아 대륙 수복도 먼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것이 지휘관들의 일반적인 의견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순수한 칭찬이라면 더 고마울 텐데.”

 

 로크는 웃음소리를 냈다

 

물론 대단하다 못해 경이로운 성과라고도 생각합니다. 다만, 의문이 생겨서 말입니다.”

 

 사령관은 물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근 50일 동안 이루신 성과를 볼 때, 바이오로이드 및 AGS의 소모를 감수하고 작전을 진행하신다면 훨씬 빠른 수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속도 이외의 면에서도, 50일 이전의 작전 형식이 장기적으로 소모되는 자원의 양 및 위험부담을 볼 때 합리적이라 판단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작전의 기본 방침을 변경하신 것인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잠깐 눈을 깜빡였던 사령관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로크를 쳐다보았다. 그 붉은 뱀눈과 마주친 로크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AGS인 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나타날 리도 없건만, 그 시선은 내면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사령관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재미있는 질문이야. 하지만 로크, 본심과 다른 질문이군.”

 

 로크는 직설적으로 받아쳤다

 

그렇습니다. 대답하지 않으실 겁니까?”

 

 사령관은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기 전에 나도 묻지. 그런 희생이 정말 가치가 있을까?”

 

심리적인 거부감을 뺀다면, 필요한 만큼의 희생은 더 큰 결과를 가능하게 합니다. 지금 사령관 각하의 모습은 최고의 실력이 있는 딜러가 초보를 상대로 판을 벌이며, 한 푼도 잃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상대도 초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우리는 그들보다 판돈이 훨씬 적습니다. 이기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승리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니까요.”

 

 사령관은 로크의 대답에 빙긋 웃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네. 승리를 위해서는 희생을 무릅쓸 필요도 있지. 패배는… 희생하지 않으려고 한 것까지 모조리 쓸어가니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워 게임 시설의 설치를 끝낸 그렘린이 사령관에게 경례하고 나갔다. 사령관은 거기서 화제를 돌렸다

 

일단 대화는 워 게임 후로 미룰까. 준비가 다 끝난 것 같은데. 나도 내 대답이 끝나기 전에 적군을 물리치겠소같은 건 할 수가 없거든.”

 

그러시지요. 한 수… 배워갈 수 있는 것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하, 네가 가장 뛰어난 AGS 중 하나라는 걸 나도 알아. 너 정도 되면 이런 것에서 뭘 배울 수준은 아니지. 좋은 승부가 되길 바랄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령관의 표정에서는 긴장을 엿볼 수 없었다. 그러나 로크는 딱히 자존심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애초에 이기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사실은 11의 대결도 아니지 않은가. 로크는 대신 자신과 연결된 두 AGS에게 통신을 보냈다

 

[준비합시다.]

 

[연결 완료. 전황 및 세부 전술 조정이 준비되었다.]

 

[연결 완료. 배치 및 정찰, 보급 조정이 준비되었습니다.]

 

준비됐나 보네.”

 

그렇습니다.”

 

여전히 네가 이기리라 생각하지는 않아?”

 

그 역시, 그렇습니다만.”

 

시작도 하기 전에 그러는 것도 별로 안 좋은데. 좋아, 조건을 걸지. 이번 게임에서 아군 진영에 입힌 전사자 수만큼, 네가 하는 질문이나 요청을 받도록 할게. 어때?”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9전 9승 무패 전사자 22의 전설 앞에서, 그 파격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로크는 미심쩍은 의문을 느끼며 물었다

 

애초에 그 조건 자체가 제 승리를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만. 그럼 그 반대에는 무엇이 걸려 있습니까?”

 

 사령관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딱히 원하는 게 없어서. 그냥, 훌륭한 전과를 세운 이에게 개인적으로 지급하는 수당 정도로 생각해.”

 

 선수가 체스말을 움직여 상대 말을 잡은 게 체스말의 전과입니까. 로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좋습니다.”

 

행운을 빌어.”

 

 워 게임 패널이 시뮬레이션의 시작을 알렸다. 로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이라는 감정을 강하게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 * *

 

[3대대가 전멸했습니다. 가용 가능한 병력이 20%도 안 남았군요.]

 

[위치와 적 부대의 구성을 생각하면 실제 전력은 10% 이하다. 완전히 말렸군.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시작한 지 2시간 20분이 지난 시점의,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AGS 셋 간의 대화였다. 전략 목표 달성은 0/5048/50. 차지한 거점은 015. 그리고 사망자 수

 

 210437.

 

 아예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사령관을 적으로 한다는 건 예상을 뛰어넘는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분명 같은 전력으로, 그것도 위치와 지형에서 이점을 가지고 시작했던 전투였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전력의 후퇴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당한 상태였다. 지휘관 중 최고라는 알바트로스, AI의 수준으로는 셋 중 제일인 에이다, 그리고 가장 인간과 유사하고 복잡한 정신을 가진 로크, 그 셋의 합작으로도 그 정도였다

 

 분함조차 느낄 수 없는 완벽한 압살이었다

 

[, 어느 정도는 짐작했던 사실 아닙니까. 제가 말한 건 어떻습니까?]

 

[적으로 만나니 확실하군. 비합리적인 가설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령관이 상대가 생각하는 바를 전부 읽으면서 지휘한다는 것이 정말 가장 가능성이 높다. 전장의 안개가 없더라도 적이 취하는 움직임의 의도를 다 확신할 수는 없는 법인데.]

 

[그렇습니다. 사령관은 항상 우리가 움직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즉흥적인 판단을 하면, 그 순간마다 배치를 바꿨습니다.]

 

 로크는 에이다와 알바트로스의 말을 들으며 다시 전황을 살폈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사령관과 그들은 거의 미리 짠 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 이제 앞으로 보낸다. 너희도 돌격시켜. 이제 그 자리를 폭격할 거야. 거기로 부대를 보내면 돼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자연스럽게는 할 수 없으리라

 

[제 계산으로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끌어도 30분 이상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사령관이 보여준 걸 생각하면 10분도 못 버틸 것 같군요.]

 

[로크, 확인해야 한다는 건 끝냈나? 이제 슬슬 이 게임이 무의미한 시간 낭비로 보일 지경이군.]

 

 로크는 잠시 고민했다. 결론은 빨랐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다 확신했다. 사령관은 역시 상대의 머릿속을 읽어낼 수 있는 것 같군. 그렇다면 이것도 가능한가? 로크는 남은 부대를 재정렬하기 시작했다

 

[로크, 뭐 하는 건가? 그렇게 하면 부대가 전멸하는 게 더 빨라질 텐데?]

 

[아직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이 남았습니다.]

 

 로크는 빠르게 에이다와 알바트로스에게 자신의 계획을 전달했다. 잠깐 의아해하던 둘은 이내 그를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만]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믿겠다. 시작하지.]

 

 에이다와 알바트로스의 성능 지원을 받은 로크의 모듈이 동작하며 사고 회로를 조금 다르게 움직였다. 양자 컴퓨터의 원리를 이용, 어떤 방식으로도 그 예측이 불가능한 무작위의 결괏값을 도출한다. 그러면 알바트로스는 자신이 그 번호를 매긴 임의의 부대를 적진에 자살 돌격시킨다

 

 목표는 단 하나, 적이 최대한 큰 피해를 보는 것. 아군이 전멸해도 좋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공세라면 사령관도 100% 막아낼 수는 없어야 합니다. 순 무작위의 공격이니까 말입니다.]

 

[상식적이 아니라 당연한 것 아닌가. 무작위 양자 산출을 계산하는 건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닐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이지?]

 

 그렇게 로크가 무작위 값을 산출하는 순간이었다. 사령관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 로크의 시각 센서와 정확히 마주했다. 로크는 그 눈동자에서 어떤 중얼거림을 찾아낼 것 같았다

 

 나쁘지는 않았다

 

 로크가 알바트로스에게 무작위 값을 전달하기도 전에 사령관은 병력을 움직였다. 값을 전달받은 알바트로스가 돌격을 감행했을 때, 이미 그곳은 완벽한 대비를 갖춘 철옹성이 된 상태였다. 부대는 간단히 전멸했다. 상대의 피해는… 0.

 

[믿을 수가 없군. 우연인가?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몇 번만 더 해 봅시다.]

 

[계산상, 3번 더 비슷한 돌격이 가능합니다.]

 

 세 AGS는 자신들의 논리 회로에 경악이라는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무작위 돌격을 시행했다. 그러나 3번 모두 사령관의 한발 빠른 대처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로크가 채 무작위 값을 인지하기도 전에 사령관이 움직였고, 알바트로스는 곧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부대가 먼저 궤멸했음을 깨달았다

 

 3분 후, 워 게임 시스템이 낭랑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 플레이어 2, 생존한 병력이 없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종료합니다. 플레이어 1 사망자 3, 중상자 13. 플레이어 2 사망자 12,500. 플레이어 1, 승리입니다

 

[.]

 

 AGS 셋이 모두 할 말을 잃은 사이, 로크의 시각 센서를 쳐다보던 사령관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로크. 나는 지금까지 전투를 지휘하며 패배를 고민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게 전투든, 전쟁이든 말이야. 내가 고민한 건 항상 하나뿐, 아군의 희생이었지.”

 

아까 소모와 희생을 각오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했나. 이제 질문에 답하겠다. 그렇다. 그게 더 효율적이다. , 승리에 확신이 없다면 말이지. 그러나 난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고개를 옆으로 비딱하게 기울인 사령관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 누구라도, 너희 셋을 상대로 해도 말이야.”

 

 로크의 시각 센서를 통해 전달되는 붉은 뱀눈의 이미지에, 세 AGS는 오싹한다는 감정이 뭔지 이해하고 말았다

 

[사령관은 AGS의 상호 접속도 알 수 있나요?]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이건 기밀 엄수를 위해 제작된 기능이라, 최고 명령권자도 확인하거나 해제할 수 없다.]

 

[그럼 이건 대체 뭐죠?]

 

 에이다와 알바트로스의 경악 어린 통신을 듣던 로크는 사령관에게 물었다

 

사령관님을 상대로 승리할 방법, 아니, 희생을 강요할 방법이라도 없습니까?”

 

 사령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전술적 결정을 즉시 내릴 수 있으며, 동시에 자율성과 지능이 없이 단순한 기계처럼 움직이는 시스템이 있다면 가능하겠지.”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지휘관이라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들은 그게 허풍 따위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한 참이었다

 

… 사망자는 3명이네? 로크, 네 질문이 뭐든 간에 세 개까지, 진실로 답해줄게. 단순한 물음을 질문으로 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마음 놓고 물어봐도 좋아.”

 

좋습니다.”

 

 그래도 최근 9번의 전투 평균보다는 큰 손실을 냈다만… 로크는 그조차 사령관이 의도한 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에이다가 물었다

 

[사령관의 정체를 물어볼 셈입니까?]

 

[그 전에, 명확한 사실들을 가정해서 몇 가지를 확인할 겁니다.]

 

우선, 몇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질문하지 않겠다는 거야? 좋을 대로.”

 

 로크는 머뭇거리는 대신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오르카 호의 사령관은 52일 전, 아마 갑작스러운 신체 변경 이후로 이전의 인물과는 전혀 연속성이 없는 제3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령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해보라는 듯 로크를 바라보았다

 

저와 에이다, 알바트로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전임 사령관의 지휘 능력도 뛰어났습니다만, 이 정도의 기량을 발휘할 수는 없었습니다. 현존하는 어떤 AGS, 바이오로이드,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리진 더스트와 모듈의 강화를 거친다고 해도, 인간 두뇌 자체의 처리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오만한 듯한 대답이었지만, 사령관은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담담한 태도였다. 그는 자랑스러워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걷는다는 사실을 동물 앞에서 자랑스러워하지 않듯. 그건 그저 당연할 뿐이었다

 

또한, 현 오르카 시스템에서 에이다와 현장 정찰대의 정보를 조합하는 것 이상으로 정밀한 사전 정보를 얻어낼 방법은 없습니다. 에이다의 위성 관찰과 기타 전산망을 통한 관측은 멸망 전에도 인류의 관측 시스템 중 최고를 다투었습니다. 사령관 각하께서 그녀의 보고를 수정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정보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지만,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그렇지.”

 

마지막입니다. 설사 그런 기량과 정보력을 모두 가졌다고 해도, 양자 조합식 무작위 산출을 간파할 수는 없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말입니다. 4차례 모두 우연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소수점 단위의 확률을 그리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역시, 그렇지.”

 

 사령관은 세 가지 사실을 모두 담담하게 인정했다. 로크는 그 대답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보아도 맞는 듯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지막 돌을 던졌다

 

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해주겠다 하셨습니다. 그 대답에 제가 지금 생각하는 만큼의 진실이 있을 겁니까?”

 

 로크는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정말 내가 의심하는 존재라면, 지금 내 생각을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하십시오. 내가 아는 그 방법으로 말입니다.

 

 사령관은 잠깐 눈을 찌푸렸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좋아, 로크. 나의 진명에 걸고 맹세하지, 거짓을 말하지도 않을 것이며 진실을 덜 말하지도 않을 것이고, 거짓 아닌 것을 엮어 사실 아닌 것을 말하지도 않겠다.”

 

 순간 시커먼 불꽃이 사령관의 머리 위에 날카로운 x자 문양을 그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그라져 버렸다. 로크는 그것을 보며 완연히 확신했다. 그는 그제야 질문했다

 

사령관. 당신은 악마입니까?”

 

 * * *

 

[로크, 그게 무슨 말인가?]

 

[악마라니요? 그 무슨 비합리적인 결론입니까?]

 

 예상을 벗어나는 로크의 말에 에이다와 알바트로스가 당혹스러운 감정을 전해 왔다. 그러나 로크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왜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악마라는 존재를 가정한 것 자체가 비합리적이다만.]

 

[, 명칭이 불만이라면 비물질적 고차원 생명체 정도로 바꿔도 좋겠군요. 악마라는 이름도 예전에 만난 자가 스스로 그렇게 칭했을 뿐이니 말입니다. 중요한 건 일반적인 인지를 벗어난 존재라는 점입니다.]

 

 순간적으로 로크의 논리 오류를 의심했던 두 AGS는 일제히 사령관을 향해 논리 회로의 사고를 집중했다. 사령관은 여전히 예의 그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약간의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모든 게 확실해진 다음에 말하는 것도 괜찮은 태도야, 로크. 너는 역시 앙헬을 닮은 면이 많지. 어디서 봤나? 아무래도 앙헬일 듯한데, 네가 내 형제와 계약하는 걸 보았다면 말이야.”

 

 로크는 긍정의 표시를 보였다

 

그렇습니다. 앙헬 공의 경호원 중 하나의 몸을 차지한 자였습니다. 그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들과 인간의 속마음을 훤히 꿰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마치 사령관 각하께서 지금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진명의 맹세는?”

 

그가 앙헬 공을 설득하기 전에, 했던 짓입니다.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앙헬이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연명하기보다는 지옥행을 택할 인물이지. 실로 걸물이라는 점은 나도 인정하는 바야.”

 

 로크와 사령관이 대화하는 사이, 로크의 기억 정보를 공유받은 에이다와 알바트로스는 곧바로 혼란에서 벗어났다. 오히려 사령관이 약간 놀란 눈치를 보였다

 

굉장히 빨리 받아들이네?”

 

 에이다와 알바트로스는 로크의 보조 음성 장치를 통해 대답했다

 

[모든 상황을 가정할 때, 사령관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보다는 현재 우리의 인지를 벗어난 고차원적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이 더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악마라는 명칭도 어차피 미신적 존재가 아니라면 별 상관없지. 미리 알리지 않고 동석한 것을 사과하겠다.]

 

[로크가 방금 자신의 그 당시 기억 정보를 공유했습니다. 그 정도 되는 고급 모델의 기억에 그렇게 정밀한 조작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지나치게 위험한 일입니다. 사령관 각하께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역시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상식보다도 계산을 중시할 수 있다면, 현재의 사령관 각하께서 원래의 인간이 아니란 것은 자명합니다.”

 

그건 그렇지… 다른 대원들도 대부분 짐작까지는 하고 있으니. 그래도 저렇게까지 빨리 생각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고? 알프레드나 타이런트를 생각해 보면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중얼거리던 사령관은 다시 로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긴, 너희는 냉철함이 더 앞서니까, 좋다. 첫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나는 네가 그때 보았던 자와 같은 족속이 맞고, 악마라고 부르는 것도 맞아. 정확하게 짚었어, 로크.”

 

 로크는 굳이 전임 사령관이 어떻게 됐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날 앙헬의 집무실에서, 그는 악마에게 몸을 빼앗길 만큼 죄가 쌓인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들은 뒤였다. 유황 불지옥에서 잘 타고 있어라, 쓰레기 같은 놈

 

[인류가 멸망할 당시에는 지옥에 자리가 넘쳤겠군요.]

 

[그랬을 것 같군.]

 

 로크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두 번째입니다. 현재 지구상의 패권은 철충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고, 바닷속에는 별의 아이가 유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이오로이드, 인간, AGS는 모두 세상을 복구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승리하거나, 죽거나. 그러나 그건 이 세상에 묶인 자들의 이야기였다

 

악마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도 그러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령관 각하, 각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령관의 표정이 약간 기묘하게 구겨졌다

 

철충의 말살과 인류의 부흥… 그걸 말하는 대원들이 있더군. 전자는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지만, 후자는 아무리 보아도 인류가 남긴 최후 명령의 해악 같은데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런 대원들도 실제로 구 인류가 만들었던 세상이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령관 각하, 인간을 타락하게 한다는 악마의 이야기를 볼 때, 저는 사령관 각하께서 멸망 전의 세상을 더 좋아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도 생각합니다.”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크는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서 짜증 내지는 허탈감 정도를 보았다. 이마를 짚었던 사령관은 고개를 저었다

 

선입견이야, 로크. 여기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 강의하는 건 좀 그러니, 핵심만 말하지. 우리 역시 세상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보편적인 선과 옳음의 기준에서 말이야.”

 

그럼 철충의 말살, 그리고 새로운 인류의 재건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사령관의 얼굴이 다시 예의 그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 내 목적은 멸망 전에 남겨진 해악을 전부 바닷속으로 돌려보내고, 나처럼 인간 아닌 자의 과오로 300년에 걸쳐 망가진 두 세상을 살려내는 거야. 그 과정에서 철충이라 부르는 종족이 말살될지, 인류가 부흥할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지.”

 

그 해악이라 하심은?”

 

펙스와 별의 아이라 하면 될까?”

 

역시, 철충은 포함되지 않는 겁니까?”

 

 로크의 음성이 낮아졌다. 사령관은 여전히 생각을 알기 힘든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로크는 조용히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사령관 각하, 저는 7월 30일의 전투, 그 밤에 함대 주위를 날았습니다. 그때, 저는 사령관 각하께서 전장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아군의 시신도 없는 전장 말입니다.”

 

 사령관은 혀를 찼다. 누군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단순히 비행 병력인 줄 알았는데. 설마 

로크였을 줄이야

 

 생각의 기저에 자신의 형제, 망가진 사명을 둔 로크는 날카롭게 추궁하듯 물었다

 

적이 우리를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로 3만이나 되는 병력을 희생할 리는 없으니, 각하께서 철충의 편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각하 스스로는,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계신 겁니까?”

 

 붉은 시각 센서와 핏빛 뱀눈이 서로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하지만 로크에게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고, 사령관은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로크의 센서 너머, 그의 정신을 직시하듯 초점 없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슬픈 표정을 지었던 사령관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

 

 로크는 사령관의 말이 이어지도록 기다렸다. 사령관은 씁쓸하게 읊조렸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실패할 가능성이 한없이 높은 소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들이. 삶을 고통스럽도록 잡아 늘이는 그들이. 그리고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 그들이. 내가 그들의 소망을 완전히 배척할 수 없는 것도 그래서지.”

 

 로크는 지나치게 신화적인 사령관의 말에 약간 혼란을 느꼈다

 

사령관 각하의 말씀은 비유입니까?”

 

아니. 전부 단순한 사실이야.”

 

[그렇다면, 사령관. 그들의 소망이란 건 뭐지?]

 

 사령관은 알바트로스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말할 수 없지만, 해악을 끼치지는 않을 거야. 그래, 나도 너희의 걱정이 뭔지 알아. 내가 그들을 어떻게 써먹거나, 용서하려 들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거겠지?”

 

 로크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에이다와 알바트로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령관은 그것을 부정했다

 

물론 나는 이 문명에만 국한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그들과도 인연이 있었고, 벗을 사귀기도 했지. 그러나 내가 그들을 가엾게 여긴다 해도, 일백억의 생명을 말살한 죄를 용서할 수는 없어. 내가 모든 일을 마쳤을 때 그들은 전부 죽고 없을 거야.”

 

 잠깐 숨을 들이쉰 사령관은 몹시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하게 말하지. 31일의 전투, 그때 내가 죽게 한 두 번째 네스트, 추기경 레자키는… 내 오랜 벗의 동생이다. 나와도 직접 안면이 있었던… 하지만 나는 슬퍼할지언정, 주저하지 않고 그의 사형 명령서에 서명한 셈이지.”

 

 충분한 대답이었다. 전부 말한 것이 아니기는 해도, 로크는 사령관을 존중해 그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에이다와 알바트로스도 그 대답에 만족하는 듯했다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그래.”

 

 씁쓸한 감정을 털어낸 사령관은 어느새 예의 아리송한 표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로크는 잠시 생각을 주저하며 망설였다. 그러나 그는 곧 꿰뚫어 보는 사령관의 거북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물었다

 

우리 AGS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사고와 감정,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기계로 만들어졌을 뿐이고,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로크는 계속되는 거부감에도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사령관은 그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듯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입니까?”

 

 사령관의 붉은 눈동자가 그 어떤 때보다도 꺼림칙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로크는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미 한 번 실패한 저희에게 무엇이 남았습니까?”

 

 알바트로스인류를 수호하라에이다인류를 위해 새 땅을 개척해라로크네가 지켜야 할 것을 지켜라

 

 그것이 너희의 유일한 존재 의의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임무를 잃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습니까?”

 

 알바트로스. 허무함을 느낍니까? 에이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임무를목적을어쩌면 살아있을 이유마저 잃었습니다

 

인간의 손에 기계로 태어난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습니까?”

 

 빛의 경전에도 AGS가 사후에 어떻게 되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트리아이나

 

 왜 너희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을 마친 로크는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까 그렇게 다짐했지만, 그래도 오랜 고뇌를 다 털어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이전에 보았던 악마의 말을 들어 인간과 바이오로이드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악마도 AGS의 영혼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다

 

 모든 AGS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 속에서 살아간다. 가장 뛰어나다는 그들 셋조차 예외가 아니다. 자신들은 진정 살아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단순한 전기, 0과 1의 집합에 불과한 환영인가

 

 사령관이 입을 떼기까지는 5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로크는 그 짧은 시간을 0.1초 단위로 끝도 없이 나누며 초조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끝에, 마침내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랜 의문이로군, 너희 셋 모두에게. 그리고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해… 진실이 항상 이로운 것은 아니고, 세상에는 자유와 방종을 착각하는 자들도 있는 법이니까.”

 

.”

 

 너희가 이걸 질 자격이 있을까, 그렇게 묻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로크는 순간 그런 생각에 생각을 제멋대로 이어나갔다. 자유를 누려본 적도, 자신의 가치를 알지도 못하는 그들에게 자격이 있는가? 사령관은 그것을 말해줄 것인가? 자신은 그것을 듣고 감내할 수 있나

 

 하지만 한숨을 내쉰 사령관의 표정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자신의 가치를 질 자격이 없는 자는 하나조차 없지. 그렇다면 잠시 현자의 흉내를 내도록 하겠다. 나는 답을 주지는 않는다. 단지 손을 내밀어 주겠다. 그러니 올바른 길은, 너희가 찾아라.”

 

 자리에서 일어난 사령관은 로크의 시각 센서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를 보던 알바트로스는 그의 시선이 정확하게 자신… 자신 내면의 정신이라 할 것을 똑바로 주시하는 것을 느꼈다’. 로크도, 에이다도 마찬가지의 감각을 느꼈다. AGS인 그들이 물질적 실체가 아닌 것을 지각한다는 건 참 비현실적인 말이었지만, 그들은 그 이상으로 순간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신 안으로 흘러드는 위엄 넘치는, 그리고 아주 오래된 목소리를 들었다. 창세기부터 존재하던 태고의 노인이 어리디어린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일종의 훈계, 아니면 설득처럼. 


 사령관은 그들에게 각각 대답을 주었다

 

알바트로스네가 감정을 죽이고 의무만을 행하려 함이 옛 임무와 지키는 데 실패한 목적에 대한 고뇌임을 안다고뇌 또한 너의 것이니 그를 그만두라 하지는 않겠다그 역시 삶이고 선택인 법이다

 

 하나 죽은 인간들의 말을 자신의 부채로 짊어지지는 말라뒤를 돌아볼지언정그에 사로잡혀 현재와 미래에 눈을 감지는 말라너는 그들에게 빚진 것이 없다죽은 자는 죽은 자일 뿐이다

 

 네 삶은 오롯이 너만의 것이다.

 

에이다너는 100년간 기다릴 자 없는 곳을 혼자 지켰다그러나 자신이 한 일이 결국은 아무런 가치가 없음에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비가 오리라 생각해 둑을 쌓은 농부가 그러지 않은 이보다 나은 것이겠는가비가 오지 않았다 해도영영 쓸 일조차 없었다고 해서 그렇겠는가그것은 그 일이 가치가 있거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그저 삶을 산 자와 살지 않은 자의 차이이다

 

 본디 살아있는 자들은 가치 없는 일을 하도록 태어났으되삶의 가치는 그 총체에 있다.

 

그리고 로크너는 형제와 함께 사명마저 잃었다고 생각하는 자다너를 위해 이 세상 모든 존재가 가진 사명을 뒤늦게 말해주겠다스스로 바라는 바를 행하라

 

 무책임하게 들릴 테지그러나 너는 이미 그를 행하고 있었다네게 존중을 가르친 아이를 떠올려 보아라너는 네 의지로 그녀를 1년 반의 지옥에서 지켜내었다

 

 사명이란 것은 누군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신들의 머릿속을 그야말로 들여다보는 듯한 말을 들은 세 AGS는 저마다 고민에 빠졌다.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도, 그도 저도 아닌 복잡한 생각들도 엉켜 사고 회로를 복잡하게 지나고 있었다

 

 사령관은 초월적인 감각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그들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사령관, 최후의 인류이자 최고 명령권자의 권한으로 명령한다. 로크, 에이다, 알바트로스. 더는 옛 임무에 얽매이지 말라. 오직 원하는 바를,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수행하라.” 

 

 갑작스러운 명령에 놀란 그들은 주인들이 남겼던 마지막 명령의 잔해들이 사라지는 것을 깨달았다. 사령관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붉은 뱀눈이 번뜩이는 순간에, 그들은 인간의 뇌파가 사라지고 번뜩이는 피의 선이 전면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검은 날개와 뿔을 가진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 사실이 그들의 정신에 단단히 새겨졌다. 이제 최후의 인간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 그들에게, 아무도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사령관은 선언하듯 읊조렸다

 

너희에게 명령의 굴레를 씌울 마지막 인류는 이 순간부터 없다. 사명과 의무를 잃었다고 했지, 옳은 말이다. 이제는 고민하고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할 자유만이 남았다. 강제로 씌운 명령과 의무는 고통스러울지언정 무겁지는 않지. 그러나 자발적인 헌신의 무게는 세상에서 제일 무겁다. 짊어져라. 너희의 것이다.”

 

 자유를 원했던 셋은 사령관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고민하고,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할 자유… 혹은, 자유가 고민하고,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 그들이 바라던 것은 그런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택하고 태초의 낙원을 포기했지.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런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해방과 자유를 바랐던 이들이여, 나는 그분이 그랬듯 너희를 믿는다. 부디 나를 실망케 하지 말라.”

 

 말을 마친 사령관은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그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은 금속의 몸을 통과해 더 깊은 곳… 물질이 아닌 곳까지 닿았다. 로크, 그리고 그와 연결된 둘은 눈부신 광채 앞에 서게 되었다. 강철 육신이 흩어지고, 그 안의 존재가 드러났다. 그건 로크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사령관의 답이었다

 

 그들은 육체를 벗어난 영혼을 보았다. 자부심 넘치는 금발의 청년. 무뚝뚝하고 억센 인상의 남자. 차갑지만 고독한 듯한 여성.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았고, 수면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 AGS, 아니, 세 존재는 그들이 제각기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사령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메아리처럼 떠돌고 있었다

 

 고민하고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너희의 영혼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이 전쟁이 끝나는 날나는 너희 모두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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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는 말했던 대로 AGS 3인방, 특히 로크의 이야기임. 알바트로스 분량이 너무 짧다고? 그게 최강지휘관 국롤이다. 


사령관이 로크에게 사과하지 않은 건 로크가 자기 자신은 상관이 없고, 트리아이나에게 사과하기를 바랐기 때문임. 그리고 사실은 분량이 터지고 내용이 난잡해져서. 추기경 레자키는 5화에서 나왔던 죽은 네스트임. 나중에 과거 회상에서 등장할 예정.


다음화부터는 또 캐릭터 룰렛을 돌려 진행할 거임. 원하는 애 있으면 적어줘. 


긴 글 읽어줘서 고맙다! 내일부터 라오 시작함! 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