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더가 용기 내어 내게 면담을 요청하고 5분이 지났다. 애당초 미움 받고 있었으니 전투원 기록을 뒤져보기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몇 시간 동안 이 넓은 사령관실 안에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러는 것이 좀 안 어울리긴 하지만 꽤 외로웠었다. 비밀의 방에서는 시발 더치걸들 팔다리로 빗살 무늬를 수놓은 이 미친 새끼의 디자인 센스를 봤어야 했고, 복도에서 만난 발키리는 난생 본 적 없던 역겨운 표정으로 나를 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딴 짓을 한 것이 나란 사실이 징그러울 정도로 싫었다. 이걸 참고 미친 사람 마냥 책장에 박혀 있던 먼지 쌓인 보고서를 몇 시간 동안 읽고 있더니 정말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죽고 지옥에 온 것 아닌가 싶었다. 그닥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어도 애들에게 반지 사주고 싶어도 있는 돈 없는 돈 모아서 애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서약해주었었는데, 그런 내게 가장 어울리는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페더가 들어와서 한 명뿐이던 방에 한 명의 온기를 더 더해주니 나름 살만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아이 중 하나가 페더여서 처음 저 애가 게임에 나왔을 때 얼마나 신났던지. 멍청하게 해실해실 웃던 저 애 표정이 너무 좋아서 바로 서약해줬었다. 그런 애가 지금 내 앞에서 조용히 떨면서 물 마시고 있는게 안스럽기도 하고 너무 귀엽기도 하다. 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정신 차려야겠다. 일단 중요한 건 저 애가 왜 나에게 왔는지 물어보는거니까.

 

“…있지, 지금 우리 말 안 한지 5분도 넘어가는 거 같은데, 왜 왔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너무 조용하니까 조금 걱정돼서 그래”

 

“…! 아! 네! 그… 무슨 얘기를 하던 중이었죠?”

 

“아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하하..그..그랬죠?”

 

애도 어지간히 떨리는 모양이다. 나한테 말을 걸 때부터 눈은 죽은 눈이었고, 몸이 덜덜 떨리는 건 보이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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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요…확실히 다르네요. 못해도 팔다리 몇 개는 잘릴 각오로 나름 사령관님을 떠보고 있는데 전에 있던 그 모습은 전혀 안 보여요. 아니 보일 기미조차 안 보여요. 이전 사령관님은 이렇게 인내심이 좋았던 분은 아니었어요. 아마 그 분이었다면 일단 제가 말을 걸려고 했을 때부터 감히 도구 따위가 말을 건다며 비밀의 방으로 던져버리시거나 하셨을 텐데. 아니면 일부로 말을 들어주는 척 하며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와 머리채를 잡고 죽을 때까지 때리시거나 하셨을 텐데. 그리고 아주 만약을, 만약을 위해 5분 정도 떨고 있는 채를 하고 있었는데 폭발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저를 걱정해주시네요. 

 

이래 봬도 저는 나름 이전 사령관님에게서 살아남을 만큼 꽤 신중한 바이오로이드였답니다. 칸 대장님이 미리 교육해주신 덕분이었겠지만, 사령관님이 얼마나 악독하신 분이었는지 온갖 영상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어요. 어차피 제가 간다는 사실을 칸 대장님께 숨길 수는 없었으니 제가 사령관님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고 사령관님이 어떤 분인지 생각해보시길 부탁드리고 왔어요. 그러니 제가 이렇게 담담하게 목숨을 걸 수 있었고요. 그런데…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수많은 반응들 중 어느 하나도 지금 사령관님은 보여주지 않으셔요. 정말로 기대해도 되는 걸까요… 아직 대장님과 더 이야기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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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스러운 아이는 팔다리를 온갖 방향으로 버둥대면서 별 이상한 애기부터 시작해서, 결론적으로 왜 왔는지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조금 웃긴 했지만, 그때마다 식겁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어떤 놈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냈다. 

 

“…그… 마지막으로 혹시 몸이 어디 편찮으시거나 그런 것은 없나요? 오늘따라 유난히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응? 아니야. 괜찮아. 내가 괜히 너희를 걱정시켰나 보구나? 앞으로는 우리 페더를 봐서라도 얼굴 좀 피고 다녀야겠네?”

 

“아….아아ㅏㅏㅏㅏㅏ아니…그런건…아니고…”

 

말 끝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줄여가던 이 애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좀 있으면 기절할 것 같다. 나름 내가 너희 생각하고 있다는 걸 표현해주고 싶었는데 아직 그럴 타이밍은 아니었겠지. 후우… 더 이상 붙잡아 두고 있기에는 나도 부담이다. 지금 마시고 있는 물만 다 마시면 보내줘야겠다. 원래는 차나 음료수를 주고 싶었는데 보고서를 읽으면서 지금 오르카호의 자원 상황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가슴 아플 정도로 자세히 보여주고 있었기에 하다 못해 직접 물이라도 떠다 줬었다. 바닐라를 시키기에는 아침에 봤던 그 얼굴이 떠올라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너무 오래 여기 있는 것도 힘들지 않니? 원한다면 언제든 일어나서 나가도 좋아.”

 

이 말을 마치고 나는 사령관실에 이어져 있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 같은 애가 계속 같이 있는 것도 힘들거고, 저 애는 저 애 나름대로 생각할 것이 있을 테니 나는 방해만 됐을거다. 그렇게 나는 내 하얀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바닐라들이 환기해주었던 바다 바람 냄새는 이제 다 빠졌는지 막 상쾌하거나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그렇게 나는 내 침대에 앉았고, 조금 있다가 사령관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페더가 나간 모양이다. 이제야 좀 한숨 돌리겠지 싶었다. 아마 내가 조금 변해서 이렇게 와서 얼굴이나 한 번 본거겠지. 나는 고작 보고서나 미친 듯이 봤을 뿐인데 저 애들이 이 미친 놈을 직접 용기 내서 나를 찾아올 정도면 이전 놈이 얼마나 방탕한 삶을 살았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설마 페더가 사령관실을 도촬한다던가 하는 미친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설령 찍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애한테 부탁 같은 걸 했다가는 진짜 기절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해서 영상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중에 때가 되면 물어볼 수 있겠지. 혹시 기회가 되면 이전의 내가 어떤 미친 짓을 했는지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페더랑은 먼저 친해질 필요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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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대장님? 칸 대장님? 보셨나요? 이야기 하신 대로 나름 허둥대는 모습을 열심히 연기해봤는데 어떠셨나요?”

 

“탈론페더인가. 연기는 훌륭했다. 확실히 사령관이라면 참다 못해 팔다리 몇 개는 부러뜨렸을 정도로 말이지.”

 

“칭찬 감사해요. 히히. 근데 사지 멀쩡하게 사령관실에서 나온 것을 보면 뭔가 기대해도 괜찮을까요?”

 

“무엇을 기대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사령관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확실하겠군. 괜히 사지에 몰아넣어 미안하다. 어서 복귀해라.”

 

“알겠습니다! 칸 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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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더랑 대략 한 시간 정도 면담하다 보니 벌써 8시 가까이 되었다. 사령관실 의자도 벌써 나름 익숙해졌는지 나는 가만히 앉아 빙글거리기 시작했다. 내 뒤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유리창 너머에선 이제 별빛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멸종하긴 했나 보지. 아마 달이 제대로 떠오르면 밤하늘이란 생각이 안 들만큼 밝아질 것 같다. 잠수함 위에서 바라보는 밤하늘과 수평선은 참 장관이다. 장관이야. 워낙 쾌청하다 보니 가끔씩 떨어지는 별똥별도 보이고, 은하수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나 혼자만 봐야 한다는 것이, 또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과 대비라도 되는 것처럼 처참한 이 오르카에 갇혀 있다는 것이 답답한 상황이다. 언젠가 다른 아이들과 같이 이걸 볼 수 있을 날이 오면 좋을 텐데.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고 있을 때, 사령관실 너머에서 똑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패널을 만져서 문을 열었더니 소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려린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나를 만나러 오는 시간이 브라우니 일개 대대에게 음식을 제공하려고 부엌에서 부리나케 움직이는 것보다 힘든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름 배려라면 배려라고, 나는 앞으로 굳이 그녀가 나에게 음식을 가지고 올 필요 없고, 그냥 사령관실 앞에 놓고 내게 알림만 보내주면 충분하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말하니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 같다. 정말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그녀의 분위기가 그런 것처럼 보였다. 덜덜 떨고 있는 애한테 뭔 말이 위로가 되겠냐만. 그렇게 그냥 음식을 가지로 문 앞으로 갔는데

 

하…시발. 오늘 이 새끼의 잔재를 몇 번이나 봐야하는 것인가. 소완 옆에는 코코, 안드바리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시발 보기에도 부끄러운 마이크로 비키니를 입은 채로 말이다. 저 작은 몸에 살색이 저렇게 많은지 겜을 하는 동안 처음 보았다. 검고 하얀 이 아이들의 피부는 유두와 음부 일부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비키니 면적이 얼마나 작은지 전에 게임에서 봤던 엘리스의 보석 수영복보다 작을 정도다. 이딴 옷을 만들었을 오드리는 또 얼마나….에휴 됐다. 그냥 다 이 미친 놈 때문이지. 페도 새끼도 이딴 페도 새끼가 다 있을까. 날씨가 그렇게 막 춥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 상태로 복도를 걸어와서 그런지 둘 모두 몸을 추위에 떨고 있었고, 나를 보자 부끄러움 보다 두려움으로 몸을 심하게 떨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니 안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내 당혹감 따위는 이제 알 바가 아니어야 한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됐지.

 

이딴 걸 보고도 음식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갈 리가 없다. 나는 서둘러 바들거리는 손으로 코코랑 안드바리를 감싸고 내 코트로 덮어주었다. 내 몸뚱이가 나름 커서 나에게 맞게 제작된 이 코트는 어린아이 두 명은 넉넉하게 감싸고도 남았다. 코트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내 겉옷을 벗어서 두 아이에게 또 입혀주었다. 이제 윗도리는 속옷바람이 되었으니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딴 게 뭐 대수인가. 이제 가려주는 것 없는 팔은 바다의 찬 공기를 생으로 맞아야 했다. 날이 좀 춥다.

 

소완에게는 입맛이 없으니 미안하지만 죽 하나만 더 끓여오도록 해달라 했다. 또 남은 음식은 코코와 안드바리에게 줄 테니 버리지 말라고 추가로 당부했다. 이 페도 새끼가 만든 광경에 나도 좀 어안이 벙벙하여 더듬거리며 말하긴 했지만, 이 세 명은 더 그런 것 같다. 안드바리와 코코는 여전히 벌벌 떨었지만 그 정도가 조금은 누그러졌고, 소완은 들고 있던 음료수 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소완의 커다란 파란 색 눈은 더 커져서 눈동자를 좌우로 번가라 움직이며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꼭 그녀만큼 파란 눈 색을 가진 안드바리도 똑같이 그랬다. 코코는 조금 정신줄을 놔버린 것처럼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저기…소완? 나 추워서 그런데 애들 먹게 방에 음식만 빨리 차려주면 안될까? 죽은 내가 먹을 거니까 만들고 나서 방 앞에 두고 그냥 가도 돼.”

 

“…아..알겠습니다. 소첩. 명하신 대로 하겠나이다.”

 

말을 마치자 마자 소완은 재빠르게 테이블을 펴고 만들어온 음식들을 정갈하게 펼쳐 놓기 시작했다. 사람 손이 저렇게 빠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깔끔하고 멋스러운 상 하나가 완성되었다.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수프부터 시작해서 고기 요리, 해물 요리 등 보기만 해도 입맛이 도는 음식들로 가득해졌다. 우리의 자원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먼지 쌓인 보고서를 외울 수준으로 읽고 또 읽은 내가 가장 잘 알겠지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만찬을 만들어 온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내가 따로 메뉴를 시킨 것도 없는데 상으로 차린 것은 하나 같이 내 취향의 음식들뿐이었다. 이것도 그 녀석이 학대한 결과겠지. 자기 취향에 맞지 않게 음식이 나오면 또 상을 뒤집어 엎으며 깨진 접시 조각으로 소완의 하얀 팔에 온갖 흉터를 냈겠지. 이미 그녀의 손목부터 발목까지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그녀가 요리하는 중에 상처를 입을 리는 없으니 아마 내 짓이었겠지…그럼 내 음식 취향이라 이 새끼 취향이랑 같다는 뜻일까? 그건 좀 좆같다.

 

“…애들아? 어때, 음식 맛은 좀 맞니?”

 

“…! 넷?!”

“…!!!!네…넵?”

소완은 내가 부탁한 대로 죽을 쑤러 다시 주방으로 갔고, 남은 아이들에게는 편한 대로 음식을 먹게 두었다. 내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코코가 먼저 상 위에 있던 초콜릿을 먹은 이후부터 앙증맞은 손으로 둘 다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저 쪼그만 입이 옴뇸뇸 거리면서 음식을 목구멍 너머로 옮길 때마다 이런 흐뭇한 광경을 볼 수 있는걸 보면 여기가 지옥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말을 걸면 몸이 순간 정지된 것처럼 내 눈치를 본다. 그래 그냥 말을 말자. 손으로 주워 먹는 게 불쌍해 보여서 젓가락이라도 손에 쥐어주려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는 애들이 손에 가득 음식을 쥐고 어느새 문 쪽으로 쫑쫑거리며 도망치기도 했다. 그래, 이런 취급도 이제 익숙해질 법하지. 마음껏 먹으렴. 이 못된 놈은 가만히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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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옵니다. 심히 불안하옵니다.

저건 제가 알던 주인의 모습이 아니옵니다….

소첩이 어떤 음식을 가지고 가도 온갖 핑계를 대며 아이들을 희롱하던 그 추악한 손을 멈추고 깨진 접시로 제 가슴에 암캐라고 글씨를 쓰며 상처를 내시던 그 짐승 같은 분의 흔적은 이제 보이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차라리 소첩을 몸노리개로 쓰신다면 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사옵니다만…저러다가 마음이 풀어진 아이들을 한 순간 그 나락으로 빠뜨리시지는 않을지…”

 

소완은 부엌에서 얼마 남지 않은 쌀로 죽을 쑤며 생각했다. 수상해도 수상해도 이렇게 수상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넘겨주는 것은 만 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 가끔씩 사령관이란 작자는 소완이 만든 맛있는 음식을 땅에 쏟으며 아이들에게 평생 맛보지 못할 진미를 먹어보라며 유혹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그 맛있는 음식의 향과 색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 짐승처럼 먼지와 함께 땅에 쏟아진 음식을 개처럼 핥아 먹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에게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릴 기회를 주지 않나, 자기 옷을 벗어 아이들에게 손수 입혀주지 않나, 무엇보다 그 아이들을 ‘아이’라고 불러주지 않나.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혹시 그 동안의 것으로도 부족하여 이번에 작정하고 아이들을 떨구려 하는 것이 아닐지 소완은 속으로 걱정하느라 죽이 타는 냄새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 동안 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강요했던 것이 아닌지, 또 그런 심한 짓을 당하는 동안 자신은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지, 변해버린 사령관의 모습에서 오늘따라 유난히 걱정이 많아지는 소완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주인이라는 그 자가 무슨 짓을 한다면, 또 다시 그 추악한 짓을 한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손에 쥔 칼을 부숴질 듯이 쥐었다.

 

걱정에 너무 정신이 팔린 탓일까, 소완은 평소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짓, 이를 테면 타버린 죽을 그대로 플레이팅하여 사령관에게 내놓는 짓 같은 것을 해버렸다. 그녀가 이를 알아차린 것은 사령관실 앞에 접시를 놓고 패널로 사령관을 호출하려는 그 시점이었다. 그녀의 근심거리들에 딱 어울리는 냄새여서 그랬던 것일지, 쌀이 타버리고 나서 나는 그 매캐한 냄새를 이제서야 깨달은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평소라면, 평소의 사령관이라면 냄새를 맡자마자 자신을 해체시킬 것이 뻔했다. 자신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병신 같은 도구는 버려야 한다며 말이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도구의 역할을 하라며 자기 스스로 해체기에 몸을 던질 것을 강요할 것이다. 주인이란 자가 오면서 해체기도 바뀌었다. 바이오로이드의 의식 모듈을 해제한 후 각 부품들을 거둬들이는 기존의 해체 방식이 복잡하다고 단순히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분쇄기로 해체기를 대신했다. 모듈 제거는 커녕 통각 모듈 비활성화도 귀찮은 짓이라면서 그 분쇄기에 산 채로 바이오로이드를 던져버리는 것이 어느새 해체 과정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바이오로이드라는 존재는 그저 오리진 더스트 몇 개와 덜덜 거리며 떠는 살덩이 몇 조각, 또 분쇄기가 마저 조각내지 못한 강화 뼈 조각 몇 개로 분해된다. 그러면 바이오로이드 특유의 철분 섞인 피비린내는 해체실 전체가 가득 퍼지게 된다. 이 타버린 죽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러한 해체기로 자신을 던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의 사령관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사령관이 두 아이들과 자신에게 보여준 조그마한 호의는 소완에게 이런 막연한 기대를 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서 소완은 그냥 타버린 음식을 들고 사령관실로 들어섰다. 혹시 사령관이 변하지 않았어도 좋다. 아이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힌 채로 사령관실에 음식을 운반할 때마다 해체실로 가서 몸을 분쇄기에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니까. 그녀는 사령관실의 문을 노크했다.

 

“소완? 굳이 내 얼굴 볼 필요 없이 사령관실 앞에 놓고만 가도 좋다니까? 혹시 내가 너무 무례하게 말한건가?”

 

“…아니옵니다. 주인을 모시는 것이 소첩의 임무. 부디 음식을 드셔주시옵소서.”

 

나에게 말을 거는 소완의 모습에서 이제 떨림은 조금 잦아들었다. 대신 어떤 결의 같은 것이 보인다. 바이오로이드에게 임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던 걸까? 나 보는 것이 세상 어떤 일보다 싫은 애 중 하나가 소완일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소완이 가져다 준 죽을 먹었다. 맛있다. 물론 아이들이 이제 다 먹어버려서 접시에 조금 묻은 소스 말고는 남지 않은 음식이 더 맛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이 죽도 나름 맛있다. 죽도 맛있게 하는 집에서 먹으면 맛있나 보다. 그래도 꼴에 배고프긴 했던 모양인지 어느새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맛있었는데…맛이라도 좀 음미하며 먹었어야 했나? 옆에서 계속 나를 뚫어져라 보는 소완이 부담스러워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음식 정리를 도와주었다. 방에 펼쳐진 그릇이 한 두 개가 아니기도 하고, 어느새 배불리 음식을 먹은 아이들은 내 소파에서 자고 있기도 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 소완이 가지고 온 접시 카트에 옮겼다.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소완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내게 합류했다. 자신의 일이니 부디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소완을 뒤로 하고 나도 내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애들이 조금이라도 나를 믿어주겠지. 

 

“소완은 죽도 잘 만드는구나? 하긴 죽도 음식이니까. 내가 너무 너를 무시한 건가?”

 

“…과찬이시옵니다.”

 

최대한 웃으면서 소완에게 말을 걸었는데,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내 말에 대답해준 정도면 아침에 덜덜 떨던 그 모습에 비해 많이 발전한 셈이지.

 

“소완아, 내가 이 아이들을 바래다 주는 것은 안될 것 같지?”

 

곤히 자고 있는 안드바리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완에게 말했다. 안드바리의 얼굴에는 멍이 들어있었다. 새파란 멍이. 멍이란 것이 혈관이 터지면서 생기는 자국이라던데, 그러면 이 아이들은 얼마나 많이 맞았던 것일까. 얼마나 아팠을까. 소완에게 말하면서도 고개가 숙여졌다. 내가 한 짓이 아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내가 한 짓이다. 이 아이들이 원망할 존재는 나뿐이다. 억울하긴 하지만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발뺌해봤자 아이들의 분노만 갈 곳 없이 맴돌 뿐이다. 그러니 참고 견뎌야 한다. 이 불쌍한 안드바리와 코코가 그랬던 것처럼. 소완이 그랬던 것처럼. 이 귀여운 볼에 있는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나도 노력해야지. 이 미친 새끼가 저지른 죄악들을 치워버려야지. 잘 자렴.

 

“소완, 무리한 부탁인 걸 아는데, 너가 대신 애들 좀 데리고 가줄 수 있겠니?”

 

“소첩.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여전히 걱정거리 가득한 눈빛이지만, 그래도 이제 내 말에 대답해주네. 나도 이제 좀 쉬어야 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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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부탁….무리한 부탁이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니 무리한 부탁이긴 하다. 단 한 번도 소완이 사령관실에서 나갈 때 아이들을 데리고 간 적이 없으니 무리한 부탁이긴 하다. 딱 한 번 아이들이 기절하여 주인이 눈 앞에 치우고 다른 애 데리고 오라 한 적은 있으니 자고 있는 아이들을 엎고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곤히 자는 아이를 품고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행여나 간만에 달콤한 잠에 빠진 아이들이 깨지 않게, 소완은 지금껏 다녔던 걸음 중 가장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조명이 깜빡거리는 복도 속으로 사라졌다.

 

“부디 이 아이들이 깨지 않기를, 소첩의 주인께서 주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복도를 걸으며 소완은 조용히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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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댓글로 이미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걍 내 스타일대로 써보기로 했슴

원작으로는 안 채워지는 애호 욕구를 좀 해소하고 싶어서 그래슴

재밌게 봐줘


모음집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원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