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얀 정장을 갖춰입은 사령관은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꽃다발을 품에 안고 복도를 거닐고 있다. 

최근 힘들어했던것과는 다르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구둣발로 탭댄스를 출 기세로 경쾌한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잠시 후, 복도 끝에 위치한 어느 방 앞에서 문을 두들기며 사령관은 헛기침을 한번 한 후 입을 열었다.


"리리스, 방에 있는거 알아"


평소였다면 사령관이 왔단 이야길 듣자마자 달려나올 그녀는 어째서인지 꼼짝도 않고 있었다.


"안나올거니? 사령관이 이렇게 꽃도 준비해왔는데.....좀 서운하네?"


"죄송해요. 저, 못열겠어요"


사령관의 말에 마지못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문 너머에 기댄 채 리리스가 답했다.


"그 반지가 꼭 필요하다고 전에 설명했잖니. 시간을 줬으면 리리스도 준비했어야하는거 아닐까?"


"어떻게.....저한테....이러실수가 있어요?"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리고 사령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었다.


"오늘은 오르카호에 있어서 중요한 날이라고 했잖니. 우리한테 무적의 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거아냐?"


"리리쮸는 그런거 몰라요. 그깟 함대 없어도 리리쮸가 철충들은 다 죽여드릴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 손에서 이 반지만큼은 거두지 말아주세요.

 갑판 위에서 저한테 하셨던 말은 다 거짓인가요?"


마지막이라 생각한 리리스는 문을 열며 사령관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금빛 반지는 어찌나 소중하게 생각한건지 처음 받았던 그 날의 광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령관의

마음은 그 빛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와.....리리스,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나보구나. 반지가....새거같다"


사령관은 그녀의 오른손을 잡아당기며, 반지에 넋이 나가있었고, 애원하는 그녀따윈 안중에도 없는듯 행동하였다.


"사령관이 반지만 가져가긴 미안해서, 이렇게 꽃도 준비해왔는데.....민망하게 자꾸 이럴래?"


"금잔화...네요"


리리스는 알고 있었다. 금잔화가 상징하는 뜻을


"싫어요, 이럴거면 차라리 제 손을 자르고 가져가세요. 다시는 이 손에 반지따윈 끼지 못하게 만들고 가시라구요. 전 사령관님이랑 헤어지기

싫어요!!"


계속된 저항에 지칠대로 지친 사령관의 손이 그대로 리리스의 뺨에 적중하였다.




-2-


햇볕이 좋은 어느날, 오르카호는 간만에 해안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중해의 어느 외딴 섬에 정박한 선원들은 간만에 찾아온

자유시간을 만끽하였고, 이틈을 타 사령관은 그동안 간직해두었던 반지를 꺼낸 후 리리스를 갑판 위로 불러들였다.


"주인님, 무슨 일이신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진한 눈망울로, 그저 사령관이 자신을 불러주었다는게 기쁜 듯 새하얀 얼굴엔 귀여운 홍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백마디 말보단 이게 확실한거 같아서, 그동안 주고 싶었는데 늦게 줘서 미안해"


품에 넣어 둔 반지를 꺼내, 그녀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주자, 놀란 토끼처럼 커다란 눈망울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주인님, 이거....정말 저한테 주시는건가요?? 저 알고 있어요. 오른손 약지에 끼워준 반지는...."


"그래, 리리스. 너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사령관님!!"


너무 기쁜 나머지 곧장 사령관에게로 달려들었고 두 사람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갑판 위에 쓰러졌다.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기대에 부응하도록 할게요"


누워있는 사령관의 볼과 입술에 연신 키스를 퍼부으며, 리리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애정표현을 보여주었고, 사령관은

혹시나 거절하진 않을까 생각했던 지난 시간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진작 줄걸"


"제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건가요? 꿈은 아닌거죠? 네?"


"어떻게 하면 리리스가 믿어줄까....그래, 이렇게 해주면 될까?"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당긴 후 입술이 아닌 입 안 깊숙히 혀가 들어간다. 약 1분여간의 가벼운 딥키스는 리리스에겐 처음 겪는

신체접촉이었고, 사령관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속 깊이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저 같은걸 사랑해주셔서...고마워요"


"너 같은거라니, 너니까 사랑하는거야. 리리쮸"


"리리...쮸?"


"아....오늘 한건 다른 아이들한텐 비밀이니까, 우리끼리만 아는 별칭을 만들어 부르는게 어떨까해서"


"좋아요, 그럼 전 주인님만의 리리쮸가 될게요"


"그래, 리리쮸. 사랑해"


다시 한번 입술을 맞추며,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3-


시간은 흐르고 철충들의 공습은 날이 갈수록 치밀해졌다. 그저 인간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진화했을거라 생각했던 녀석들은 생각을 바꾼건지,아니면 그저 모르고 있었던건지, 오르카호 선원들의 능력에 맞게 개량.강화되어 목슴을 위협하고 있었다.


"리리쮸, 정신차려. 리리쮸!!!"


적들은 강대해지고, 바이오로이드들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철충들을 상대로 일말의 주저없이 총알을 박아넣던 리리스는

들것에 실려 수복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주인님......죄송해요. 녀석들이 너무 빨라서 그만....."


"아니야, 너가 잘못한거 없어. 내 실수야"


생각하기도 싫었던 일이 발생했다. 리리스의 기동력이라면 가볍게 처리할거라 생각했지만, 전에 상대했던 녀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리리스의 총알이 단 한발도 철충에게 적중하지 못한 것과는 다르게,  철충이 쏜 초탄은 정확하게 리리스의 복부를 관통하였다.


"오빠, 언니는 방금전에 수복실로 들어갔어"


"수고했어, 상태는 어때?"


"치명상은 아니야. 하긴 치명상이어도 죽진않으니까....리리스언니가 저렇게 당할 줄은 몰랐어"


"모듈 조정을 한번 더 점검했어야했어. 어쩐지 느낌이 좋지않았는데"


"누가 알았겠어, 저번에 상대했던 녀석과 외형이 판박이던데"


닥터의 말이 맞긴 했지만, 사령관의 마음은 무거웠다.


"닥터, 저번에 말했던 그 계획...슬슬 시작해야할것같아"


"물류창고에서 봤던 그 기록 말하는거야?"


"맞아, 그녀라면 도움이 될것같아"


"오빠, 라비언니한테 들었잖아. 확실한 자료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우리에게 협조적일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저번에 라비 언니가

그랬던것처럼 오빠를 직접적으로 해칠 위험도 있으면 어떡할거야? 명령도 안통하고 성격도 고지식하다는건 우리 입장에선 곤란해"


"그래, 사람으로만 보면 그렇지. 하지만 그녀가 가진 함대는 지금 우리에게 있어선 필수야. 더이상 이런 일이 생기게 할 순 없어"


"난...모르겠어,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내가 좀 더 노력해볼게. 분명 해답이 있을거야"


"이미 늦었어, 철충들의 진화속도는 우리가 대응할 시간을 줄 것 같지않아"


리리스의 부상 이후, 사령관은 그간 잊고 있었던 무적의 용 발굴 계획을 다시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4-


"주인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여기서 이 관을 열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저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시겠습니까?"


"열어줘, 부탁할게"


".....그정도로 절박하신거라면, 열어드려야죠"


사령관과 함께 동행한 라비아타는 냉동관의 옆에 있는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입력하였다. 잠시 뒤 타이머가 가동하고, 냉기가 서려있던

관은 어느새 물이 흐르며 안에 있던 형체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는데"


"외형에 속으시면 안돼요. 결코  쉬운 사람은 아니니까 조심하세요"


타이머가 종료되자, 하얀 가운을 걸친 여인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기지게를 펴며 관에서 일어났다.


"반갑소, 날 깨웠다는건 인류가 많이 곤란하단 뜻이겠지?"


"반가워요, 우리 본 적 있죠? 자세한건 제가 설명할게요"


"기억하고 있소, 상호조약 당시 우리쪽에 파견된 바이로오이드 아닌가. 그보다....옆에 계신 신사분은?"


"이 분은 제 주인님, 아니...우리 사령관님이세요"


"흠....장군감으로 보이진 않다만"


그녀는 방금 해동된 상태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상황파악이 빨랐고, 금방이라도 작전에 투입될 수 있을 정도의 기백을 온몸에서 뿜어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인류 마지막 생존자이자, 오르카호의 사령관입니다"


"그렇군.....그런 연유에서.....일단은 알겠소. 그리고 하나만 좀 물어도 되겠소?"


"말씀하시죠"


"지휘권을 나에게 넘기는게 어떻겠소?"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나온 제안이었다.


"주인님께 무례하군요, 그냥 넘기긴 힘들겠어요"


"전투를 위해 많이 개조한 모양이오? 내가 알던 그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만....자신있소?"


무적의 용은 관 옆에 놓여있던 검을 집은 후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런 비좁은 곳에서 그런 큰 칼을 휘두르면, 옆에 계신 당신 주인님도 무사하지 못할것이라 판단되오.

 반면, 이 칼은 두 사람을 노리기엔 더할나위 없이 안성맞춤이니 조금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게 어떻겠소?"


"말로는 못당하겠군요. 좋아요, 일단 칼은 내려놓고 말씀하시죠"


무적의 용은 씨익 웃으며 허리춤에 검을 건 후 손잡이에서 손을 땠고, 이를 본 라비아타도 검을 내려놓았다.


"주인님, 말씀해주세요. 이대로 마무리도 하지 못한채 돌아간다면,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될거에요"


"무적의 용이라고 했죠? 당신 말이 맞아요. 지휘면에선 당신이 더 우세할수도 있고, 체계적으로 병사를 관리하는것도

 당신이 더 나을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 자리를 당신에게 내줘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봐요. 어디까지나 우리는 가능성을

좀 더 넓히기 위해 당신을 깨운 것이지, 능력이 부족해 당신을 찾은게 아니에요"


"구차하구려, 사령관이란 작자가 변명 한번 길게 늘어놓는군.....그래도 무슨 뜻인진 알거 같소. 거기 있는 라비아타도 보통내기는

아닌데, 당신을 따르는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제안을 하겠소. 나와 혼인하여, 정식으로 공동지휘권을

가지는건 어떻소?"


"당신, 끝까지!!!"


"라비, 잠깐만"


"주인님, 저 이야길 받아들이실 생각은 아니신거죠? 그렇죠?"


"아니야, 일리가 있어. 저런 이야길 아무렇지않게 할 정도면 그쪽도 그만한 카드가 있단 소리겠지?"


"함대 120척, 운용가능 바이오로이드 3만4천. 그쪽이 어느정도 규모의 병단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면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지않소?"


".....인정할 수 밖에 없겠네. 좋아, 대신 우리와 함께 생활해보고 그 이후에 판단하도록 할게. 당신이 어디 소속이던간에

일단은 오르카호에서 같이 지내봐야 결정할 수 있을거아냐"


"좋소, 당장 출발하지"


세 사람은 그렇게 비밀을 간직한 채 오르카호에 승선하였다.



-5-


"주인님, 저 다 나았는데....출격은 언제 가능할까요?"


"아....리리스 왔구나? 배는 좀 괜찮아졌니?"


"네, 신경써주신 덕분에 다 나았어요. 근데 옆에 계신 분은"


"반갑소, 무적의 용, 아니 무용이라고 불러주시오"


무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리스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반가...워요, 처음 보는 분이네요"


왠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하기 싫은,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는 무용을 보며 리리스는 경계하는 듯 보였다.


"호오, 오른손에 이건 반지 아닌가? 꽤나 어려보이는데 반려가 있다니....신기하군"


"네?? 아 이건...저기 그....."


"아, 선물로 줬어. 그동안 출격도 많이 해줬고....고생시킨게 미안해서"


"내가 알기론 오른손 약지는 서약반지로 알고있소만"


"편한 손가락에 끼운거겠지. 그치, 리리스??"


"리리스???저기 사령관님.....잠깐 이야기 좀 할 수있을까요?"


"미안,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보자?"


"네.....기다리고 있을게요"


리리스를 남겨둔 채 사령관은 무용과 함께 자리를 떴다.


"당신, 나한테 숨기는건 없소?"


"없어, 아직도 의심하는거야?"


휴게실을 나오기가 무섭게 무용은 지나칠 정도로 사령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난....욕심이 많은 사람이오. 나 외에 다른 여인과 즐기는건.....어쩔수없다 생각하겠지만.....다른 이를 반려로 삼는건

용납 못하오"


"알고있어, 그럴 일 없을거야"


"오늘 내 함대의 시범사격은 만족했소? 이젠 그대의 함포로 날 만족시켜주면 좋겠소만...."


"그런거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사랑해"


"나도, 사랑하오"


사령관은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건 무적의 용이 아닌 함대가 초도화 시킨 철충들의 잔해만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런것쯤은 얼마든지 할수있어....얼마든지....'


속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키며, 사령관의 손은 천천히 그녀의 엉덩이로 향했다.




-6-


"리리스, 널 사랑한다고 한건 거짓말이 아냐. 하지만 말하지 않은게 한가지 있어"


"듣기 싫어요, 말하지 마세요"


"난 너의 성능을 사랑한거야, 미안해"


"제가......좋았던게 아니신건가요?"


"아니, 전엔 널 좋아했던게 맞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텅 빈 눈동자로 리리스를 바라보며 사령관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너가 귀여워서도, 날 잘 따라서도, 집착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도, 목소리가 예뻐서....사랑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어.

 너가 철충들 사이를 누비며 서스럼없이 살상을 저지를때, 오직 그 순간에 난 너를 사랑했단다"


"침대에서 했던 말은 전부...."


"그래, 거짓말이야.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너가 포기하지 않을것 같아서 말하는거야. 더는 상처주기 싫었는데.....

 미안해"


"이제야....이해가 가네요. 왜 더이상 저를 찾지않으셨는지......"


리리스는 덤덤하게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꺼내, 사령관에게 건내주었다.


"이 반지를 받는 사람도 참 딱하네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텐데"


"항상 지금처럼만 해준다면, 변할리는 없겠지"


"주인님이 다시 절 사랑해주실 날이 올까요?"


리리스의 말에 사령관은 답하지 않은 채 꽃다발을 그녀 앞에 놓은 후, 갑판으로 향했다.



-에필로그-


마침내 찾아온 그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고작 십여초가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마치는 것과 도잇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름답게 장식된 갑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