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움 주의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폭력적이고 잔인한 묘사가 나옴

대회용으로 쓴건데 쓰다보니 대회 주제랑 맞게 써진건지도 모르겠음, 

영 아닌거같으면 창작물 탭으로 옮길게









1




안녕하세요! 하치코입니다. 저는 바이오로이드에요! 

음..어려운 건 잘 모르지만 주인님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막는거나, 싸우는 거나.. 미트 파이를 만드는 건 자신 있어요!

오늘은 제가 지킬 주인님에게 가는 날이라고 해요! 어떤 분일까요?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잠이 잘 안와요! 

그래도 주인님에게 실수하지 않기 위해 인사하는걸 엄청 연습했어요!

내일 주인님을 만나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안녕하세요! 하치코 입니다! 주인님, 우리 뭘 하고 놀까요?






“...이게 하치코인가?”


상자 틈으로 밝은 빛이 들어오자 하치코는 귀를 쫑긋 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가 자신의 첫 주인이 된다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네! 하치코 입니다! 주인님! 잘 부탁드려요!”


그래서 하치코는 망설이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꽉 끼는 상자에 오래도록 갇혀있던 몸이 아팠지만 상관없었다.


“음...불량품 치곤 멀쩡해 보이는데.”


하지만 그는 하치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위 아래로 훑을 뿐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하치코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네! 하치는 엄청 튼튼해요! 그래서 주인님을 잘 지켜드릴 수 있어요!”

 

무섭도록 과학이 발달한 미래지만, 운송 기술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 하치코의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복도 끝에 난 작은 문을 가리켰다.


“당장 저기서 씻고 와, 명령이다.”


“네! 주인님!”


광이 나도록 씻어야지! 하치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신나게 욕실로 달려갔다.

무표정한 남자의 시선이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2



남자가 차를 몰아 하치코와 함께 도착한 곳은 눈 쌓인 산의 중심. 

작은 마을 하나만이 있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남자는 그 마을과도 훨씬 떨어진 작은 오두막에 차를 세웠다.


"...내려라."


“네! 주인님!”


뒷 좌석에 앉아 차창 밖의 풍경을 보던 하치코가 힘차게 대답했다.

주인님과 같이 살게 될 집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그는 하치코를 돌아보지도 않고 짐을 챙겨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앗! 같이 가요 주인님!”


“....”


남자가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지고 있을 때도 하치코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쫓고 있었다.






3



집 안은, 그러니까 일반적인 가정집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정면으로 크게 난 창문으로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그 창문과 붙어있는 거실에는 작은 소파와 밥상이 놓여 있었다.

그 흔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은 마치 결벽증 환자의 방을 연상시켰다.


"와아~ 여기가 주인님과 하치가 살 집인건가요?"


"..그래."


그는 짧게 대꾸하고는 아까부터 들고 있던 커다란 봉투를 내려놓았다. 

봉투를 묶은 매듭이 느슨하게 풀리자 달콤한 초콜릿 향이 피어올랐다.


"..!!"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에 하치코의 귀와 꼬리가 반사적으로 흔들렸다.

봉투 안에서 케잌을 잔뜩 꺼낸 남자는 그것을 하치코에게 던져 주었다.


“다 먹어치워라."


이걸? 전부요? 하치코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 앞에 쌓인 스물다섯개의 케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으우..네에,,,"


물도 없이 그 많은 케잌을 먹는것은 바이오로이드라 해도 쉬운일은 아니였다.

하지만 어쨋든 그건 명령이였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케이크를 모조리 먹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케잌 조각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강력한 애정이 그녀의 의식을 까맣게 덮어 버렸다.


"힉..헥..주인님? 하치코는 주인님이 너무..너무 좋아요!"


하치코의 꼬리가 광속으로 양 옆으로 흔들리고, 귀가 미친듯이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곧 그녀가 균형을 잃고 힘없이 쓰러져 침을 흘리기 시작하자,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머니에서 작은 반지를 꺼냈다.


“자, 하치코? 지금부터 우리는 부부인거야, 착한 바이오로이드면 남편의 말을 잘 들어야지?”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꿈틀거리는 하치코의 손을 밟아 고정시키고 반지를 쑤셔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치코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죽이 터졌다.


"흐아아앙..주이인니임…"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해일처럼 밀려와 하치코의 마음을 뒤엎었다.

그건 마치 높은 곳에서 갑자기 떨어질 때 처럼 몸도 마음도 짜릿해지는 기분이였고, 

결국 만들어진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던 그녀는 폭탄처럼 터지는 감정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3




그가 돌아왔을 때도 하치코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예의 헝클어진 메이드복을 입고 쓰러진 모습 그대로 눈을 감은 채,

파랗게 멍이 든 손가락에는 그가 끼운 반지가 처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품 속에서 작은 카메라를 꺼내 방의 이곳 저곳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소파 베개 사이에 한대, 천장에 한대, 액자 뒤에 한대.

익숙한 솜씨로 설치를 마친 그가 다리를 들어 하치코의 얼굴을 걷어찼다.


"...일어나라."


발차기의 충격으로 일어날 법도 하건만 하치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설마 죽은건가 싶어 자세히 살피니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따라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이 보인다.

하긴, 아무리 모듈이 고장난 불량품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약할리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남자는 이번엔 주먹을 들어 그녀의 배를 후려쳤다.


"켁..케헥!!"


폐에서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가자 눈이 뜨여질 수 밖에 없었다.

하치코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바로 그녀의 가슴팍을 밀어 넘어뜨렸다.

딱딱한 바닥에 등이 부딫히자 하치코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헛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토하지 마라, 명령이다."


하치코는 울것 같은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 왜 그러시는거에요? 제가 뭔가를 잘못한 건가요? 너무너무 아파요.


하지만 남자는 애써 그런 하치코의 시선을 외면한 채 그녀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악..! 켁..커억.."


너클까지 낀 주먹은 하치코의 배를 몇번이고 후려갈기며 멍투성이로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아까 먹었던 케잌들이 올라오며 토기가 돌았지만,

"토하지 마라" 는 명령에 묶여있던 탓에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음식물들을 다시 삼켜야 했다.


"흑..흑.주인..니임..."


하지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도 새로운 주인님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전혀 가라앉지 않고, 더더욱 커져가기만 한다.

뺨을 후려치는 손길은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정강이를 노리는 발길질은 상냥한 칭찬보다도 기분좋았다.

이상한 마법에 걸린 것만 같은 기분에 하치코는 몸을 비틀며 울부짖었다.


"아파요..흑..흐아..그만...잘못했어요...주인님.."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호소를 듣고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진 무자비한 폭력은 빠각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이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이고 나서야 겨우 멈추게 되었다.







4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치코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서서히 의식을 회복했다.

튼튼한 경호용 바이오로이드의 몸 답게 통증은 어느새 거의 잦아들고 있었다.


"흐앙? 주인님? 주인님!? 어디계세요?"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자 깔끔하게 정돈된 방 안이 눈에 들어온다.

피투성이가 되었던 메이드복 역시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그냥 나쁜 악몽을 꾸었던 것일까?

하지만 단순한 꿈으로 생각하기에는 왼손 약지에 끼인 반지의 촉감이 너무도 생생하다.


“으우..주인님…?”


코를 킁킁거리자 희미한 주인님의 냄새가 느껴진다. 

하치코는 홀린듯 그것을 따라 방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거실을 지나 집 밖으로 나가자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숲이 펼쳐져 있었다.


“주인님!! 어디 계신 거예요!!”


큰 소리로 외쳐봤지만 거에요..요..요...하는 메이리만이 되돌아 올 뿐, 대답은 없었다.

그때 하치코의 귀가 쫑긋하며 머릿속으로 인간의 뇌파가 흘러들어왔다.


“...! 주인님?”


높다랗게 서 있는 소나무로 다가가자 흘러들어오는 뇌파의 세기가 점점 더 강해졌다.

두꺼운 나무기둥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하치코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쭉 내밀었다.


“흐앙! 주인님?”


“으아악! 살려주세요!”


“어어?”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주인님이 아닌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하치코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냄새를 맡기 위해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히익!”


뒤로 넘어져 있던 소년은 하치코의 얼굴이 다가오자 몸을 질질 끌며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놀란 탓에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치코는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리는 어린 ‘인간님’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인간님? 다치신건가요?”


주인님이 아니더라도 다친 인간을 돕는 것은 바이오로이드의 의무,

조심스럽게 소년을 살피던 하치코는 그의 다리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여기, 피가 나요!”


어딘가에 걸려서 넘어지신 걸까?

그렇게 생각한 하치코는 메이드복의 끝자락을 부욱 찢어 그의 상처를 꼭 묶어주었다.


“자! 이제 괜찮을 거에요!”


“응...아..고마워..”


하치코가 해맑게 웃으며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 미소를 본 그는 아까보다는 느슨해진 얼굴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헤헤, 다행이에요, 앗! 주인님 차 소리다!”


멀리서 들려오는 부르릉하는 소리에 하치코의 고개가 휙 돌았다. 

한번밖에 듣지 못한 소리였지만 그건 분명 이곳에 올때 들었던 차의 엔진음과 같았다.


“그럼 인간님!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렇게 말한 하치코는 소년을 향해 손을 붕붕 흔들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으..응..잘가...요.”


홀로 남게 된 소년은 멀어지는 하치코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붉게 물든 뺨을 쓸어내렸다.





5




“흑...흐아….”


“...일어나라.”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하치코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반쯤 뜯겨진 귀와 왼팔, 빛을 잃고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슬쩍 구르며 그의 얼굴을 살핀다. 

몇일 사이 하치코는 처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흑...흑..주인님..그만”


“...”


그가 다시 칼을 들어올라자 하치코는 반쯤 덜렁거리는 팔로 그의 다리를 잡고 애원했다. 

사랑을 느끼는 이에게 몇일 동안이나 폭행 당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짜증스럽게 그것을 털어버리고 담배를 피워 물 뿐이었다.


“후…이 짓도 지긋지긋하구만.”


눈 앞에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보던 그는 문득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바이오로이드라는 상품이 대중화된 이 시대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학대 영상이라는게 말이야, 생각보다 돈이 된다고.

몸과 마음은 고되지만 요즘 세상에 이만한 돈벌이가 어디있겠나?”


남자는 딱히 사디스트는 아니였지만, 주어진 기회를 차버리기에는 너무도 굶주려 있었다.


바이오로이드의 사지를 으깨고 마음을 부수는 것은 사장의 말처럼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직업을 잃고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을 보면 죄책감은 금세 사라지곤 했다.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대부분의 일자리를 빼앗긴 인간들의 분노를 원동력 삼아 그의 채널은 더욱 더 성장해 나갔다.


그에 따라 영상의 수위도 점점 더 높아졌다. 압착기로 팔을 으깨버리는 것은 예사였고, 

때론 바이오로이드의 몸을 산채로 구워버리기도 했다.

자극적이고 잔인할수록 벌이가 좋았다. 


물론 그는 평범한 인간이였기에 때로 자신이 죽인 바이오로이드가 나오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담배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통장에 쌓여가는 돈을 본 뒤로 그는 그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흑흑…아아아악!!"


하치코의 맨 살에 담배를 비벼 끈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꼬리가 아직까지도 살랑거리고 있던 탓이다.

맨살을 지지고, 내장을 뭉개도 그를 향한 하치코의 충성심과 애정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반지를 끼웠다지만 이건 너무 과하다.

이래서야 저번의 리제처럼 고통을 가하는 ‘척’만 했다는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던 그는 그녀의 등을 박혀 있던 칼을 뽑아내 발치에 던졌다.


“꺼내라.”


“...에?”


맹한 하치코의 말을 들은 그는 그녀의 뺨을 후려치는 대신, 고개를 까딱해 반쯤 시력을 잃은 눈동자를 가리켰다.


“그거, 꺼내라고. 명령이다.”


바이오로이드에게 있어 인간의 명령은 절대적, 하치코는 떨리는 손으로 칼을 잡았다.

그리고 곧 하치코의 입에서 그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끔찍한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꺄아아아아악!!”


“썅...”


무슨 애원의 목소리 같고 또 때로는 자신을 원망하는 저주같은 비명에 그는 욕지기를 뱉었다. 

언제 들어도 이 소리는 끔찍하기만 하다.

하지만 남자는 애써 침착을 연기하며 떨리는 손으로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이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카메라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담아내고 있었다.





6




소복히 쌓인 눈이 이불처럼 덮인 숲속, 유달리 높은 나무 아래 하치코와 작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멍한 얼굴로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하치코의 얼굴에서는 전에 없던 서글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누나, 아파보이는데...정말 괜찮은 거에요?”


“네..헤헤, 주인님을 지키는건 조금 힘든 일이거든요.”


그녀는 빙긋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남자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은 옆 마을에 사는 의사의 아들이였는데, 

하치코가 다친 그를 치료 해준 뒤로 종종 이렇게 그녀를 만나러 오고는 했다.

때로 하치코는 그에게 미트 파이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고, 

소년은 굶주리고 있는 하치코에게 몰래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그렇게 몇일이 지나자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난..누나가 그런 일은 안했으면 좋겠는데...”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온몸에 든 멍과 팔다리에 감긴 붕대, 한쪽 눈에 걸린 하얀 안대까지. 

하루가 다르게 그녀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없는 그가 보더라도 지금 하치코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응..주인님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네요..헤헤..”


하지만 하치코는 그렇게 말하며 왼손 약지에 끼인 반지로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약에 취한듯 몽롱한 기분과 함께 주인님에 대한 사랑이 차오른다. 

그런 하치코를 불만스럽게 보던 소년은 그녀의 눈 앞에 주먹 쥔 손을 쑥 내밀었다.


"자요.선물이에요."


"우와! 이거 하치한테 주는거에요?"


꼭 쥔 주먹 속에는 작은 철반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별다른 무늬조차 세겨져 있지 않은 반지는 하치코의 손에 끼워진 반지보다는 초라했지만,

하치코는 눈을 반짝거리며 그것을 받아 오른손에 끼웠다.


“와아~ 고맙습니다.”


소년은 뿌듯한 얼굴로 이리저리 손을 돌려가며 반지를 감상하는 하치코를 바라보았다.

반지는 마치 처음부터 그녀의 것 이였던 것 처럼 손가락에 꼭 맞았다.


“누나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소년은 우물거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치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먼 곳에서 부르릉거리는 엔진소리가 들린 탓이다. 


“...미안해요.. 하치는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하치코는 소년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주고 천천히 일어섰다. 

소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가 조금 더 어렸더라면 가지 말라고 울며 그녀를 껴안을 수도 있었고,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그녀의 아픔을 눈치채고 감싸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도 저도 아닌 14세의 소년인 그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하치코를 바라보던 소년은 힘없이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순간 기묘한 소리가 소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끼이이 


소년은 코앞에서 들리는 섬뜩한 기계음에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을 가진 폴른 한대가 기묘한 눈빛으로 소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7



소년이 폴른의 첫 일격을 피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까맣게 타버린 바닥을 바라보았다.


“헉..헉…”


폴른은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 것에 화가 난 듯, 붉은 눈동자를 굴리며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를 겨눈 총구가 붉게 달아오르며 총알을 쏟아냈다.

소년은 다가올 고통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치면 안돼요!”


재빠르게 달려온 하치코가 소년을 낚아챈 것은 순간이었다.

바닥을 때리는 총알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하치코는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AGS는 인간의 친구’ 라는 당연한 상식이 깨져 버린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검은 폴른은 그녀의 적일 뿐이었다. 


“저리 비켜요!”


방패도 무기도 빼앗긴 탓에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전투용 바이오로이드인 하치코의 주먹은 폴른을 일격에 쓰러트릴 정도로 강했다. 


끼기기기


하치코는 비틀거리며 옆으로 넘어간 폴른을 바라보았다.

잠깐이지만 이것으로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하치코가 쓰러진 소년을 안아올리려는 순간, 

먼 곳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이 망할 AGS들은 뭐야?"


그곳에는 검은 AGS 무리에 둘러싸인 하치코의 주인이 있었다. 

폴른이 소년에게 총을 쏜 것을 본 그의 눈은 공포에 젖어 있었다.


"저딴 거 신경쓰지 말고 날 지켜!! 지키라고!!!"


겁에 잔뜩 질린 비명 같은 명령에 소년에게 다가가던 하치코의 발이 무언가에 걸린듯 덜컹하고 멈췄다. 


"아직...안되는데..!"


하치코는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느세 회복한 폴른이 끼기긱 거리며 느릿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달아오른 모듈에서 희미하게 탄 냄새가 올라왔지만, 주인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죄송해요.”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린 하치코는 뒤돌아 그녀의 주인에게로 뛰었다.

결국 그녀는 소년을 지킬 수 없었다.





8





차가운 눈송이가 얼굴에 닿는 것을 느낀 하치코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주인도 소년도 보이지 않는다.

소년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마지막 폴른을 쓰러트린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의 기억은 까맣게 가라앉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아야야야…”


한박자 늦게 찾아온 통증에 팔을 더듬자 허전한 팔목이 느껴진다.

덜렁거리던 왼손은 완전히 끊어져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떨어진 손에서 반지를 줍는 대신 그것을 빼서 눈 속에 던져 버렸다.


“...”


왼손과 함께 반지가 떨어진 탓일까? 

이상하게도 주인님에 대한 걱정보다 소년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OO!! 어디있는 거예요?”


하치코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소년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푹푹 다리를 삼키는 눈길을 헤쳤다.

그렇게 다섯 발자국정도 걸었을까?


“앗!”


무언가 딱딱한 것이 하치코의 발에 걸렸다. 

높게 쌓인 눈속으로 넘어진 그녀는 남은 손을 들어 그것을 파헤쳤다.

그리고 거기서 차갑게 변해버린 소년을 보았다.


“...!”


누군가를 감싸안은 모습 그대로 눈을 감은 소년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해, 

총알구멍이 난 배가 아니라면 잠든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런 소년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미안해요…”


끝없이 내릴 것만 같은 새하얀 눈이 모든 것을 덮어나가고 있었다.









9




사령관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하치코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었다.

한쪽 밖에 남지 않은 귀와 팔, 

자신의 것이 아닌 무장을 들고 있는 그녀는 확실히 그가 알고 있는 하치코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음...어디 불편한 건 없고?”


“네, 저는 괜찮아요. 사령관님.”


저렇게나 딱딱한 목소리라니, 얼마 전 ‘주인님! 특제 미트파이를 만들어왔어요! 먹어 주실거죠?’ 

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민트 미트파이를 가져다 주었던 오르카호의 하치코와는 정반대의 텐션이지 않은가. 

하지만 사령관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하치코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하, 그럼 다행이네.”


사령관은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감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머쓱해진 사령관은 서랍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하치코에게 건냈다.

그것을 본 그녀의 손이 순간 움찔 했지만, 곧 별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


상자 속에는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하치코는 조용히 그것을 되돌려주었다.


“어...하치코?”


당황한 사령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로 받아 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단칼에 거절이라니.

놀란 그의 표정을 본 그녀는 씁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소중한..사람이 있어서요.”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히지기는커녕 더욱 또렷해지는 과거가 있다면 그것은 아주 기쁜 추억이거나 너무도 슬픈 추억일 것이다.

사령관은 문득 처연하게 웃는 하치코의 표정에서 그런 그녀의 옛 추억을 엿보았다.

자신의 수십배를 살아온 그녀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랑도 겪어보았겠지.

문득 부끄러워진 사령관은 상자를 숨기고 얼굴을 붉혔다.


“미안..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하치코는 눈매를 조금 찡그렸다. 

부끄러워 하는 사령관의 모습에서 그와 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떠올랐던 탓이다.

그녀는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사령관 앞에 앉아 조용히 그를 달래 주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쓸어내리는 그녀의 오른손에는 철로 된 작은 반지가 소중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편으로 쓰다보니 줄인게 많음

중간에 소년이 굶고있는 하치코에게 밥을 가져다 준다던가, 

하치코가 소년에게 미트파이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던가,

하치코의 주인이 더한 학대를 위해 초반에 하치코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던가..

이런 장면을 2챕터쯤 썻다가 지운거 같음 ㅜ



안 올리려 했는데 쓴게 아까워서 올림...

다음에는 재미있거나 달달한 거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