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는 부드러운 담요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곤수단차, 아니 콘스탄챠가 가져온 기록들을 읽어내리는 중이었다. 


홍위가 가장 먼저 파악하고자 한 것은 이곳이 어디이고 이 시대는 대체 어느 시절이며, 도대체 무슨 괴력난신의 조화가 나타난 것인가였다.


"지금이...2171년? 이 달력과 역법은 도대체 어느 나라의 역법을 아국이 따른 것이었단 말이던가? 

60갑자로 따지고 보면 올해는..."


" 인간 님, 인간 님이 궁금해하시는 걸 알려줄 만한 사람이 저말고 하나 더 있는데, 데려와도 괜찮을까요?"


곤 낭자의 말을 듣고보니, 그게 시간도 아끼고, 이치에 자못 맞는 듯 하였다.


"그렇다면 낭자, 그 분을 데려와 주시면 감사하겠소."


콘스탄챠가 때마침 도서관에 틀이박혀서 책을 읽고 있던 P-22 하르페이아를 데려온 것은 홍위의 기준으로 채 1각(약 15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 오, 인간님, 만나서 반가워, P-22 하르페아아야! 제공권 장악은 맡겨줘! "


또 다른 아리따운 여인을 본 홍위는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으레 느끼는 심미적 기쁨과, 

심리적인 불쾌감을 동시에 느끼는,

실로 기이하고도 기묘한 느낌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색목인들 중에서도 드문 밝고 풍성한 금발에 벽안, 그리고 어리고 섬세한 외모는 실로 진이한 광경이었고 홍위는 넋을 잃은 채 색목인 처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홍위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고 이내 그 당당하고 아름다운 가슴과 흰 속살이 눈에 들어오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이전에, 곤 낭자 정도의 복장을

매우 남사스럽다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던 홍위의 얼굴은 이제 더욱 붉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르페이아의 일상 복장은 풍만한 앞 가슴이 자기 주장을 확고히 하며 사방에 드러나 있었고, 

하반신은 차마 묘사하기 힘들 만큼 아찔하게 조여드는,

 조선 초기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아예 안 입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넓적다리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몸맵시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위가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리는 사이 하르페이아는 빠르게 자료 뭉치를 들고 다가왔다.


"인간님이 궁금해하는 것들이 워낙 많은 것 같아서 콘스탄챠의 부탁을 받고, 

사서인 내가 직접 찾아왔어."


하르페이아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홍위에게 가까이 다가와 서책들을 내려놓았다. 


하르페이아가 추가적으로 가져온 서책들은 다른 서책들보다 얇았지만, 홍위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정보를 담은 역사책이었다.


" 정말 고맙소, 하 낭자, 그대를 하 낭자라 부르면 되는 것이오?"


홍위가 미소를 지으며 하르페이아에게 묻자, 하르페이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냥 하르페이아라 해도 되고, 편한 대로 해도 된다며 유쾌하게 받아 넘겼다.


홍위는 역사서를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 조선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동시에 조선이 자기가 아는 그 조선일지도 의문이었다.


홍위는 결단을 내리고 역사서를 들춰 전주 이왕가의 조선이라는 항목을 들추며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홍위는 순간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책장을 넘겨 한줄 한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책은 다소 빠진 데가 있는 훈민정음으로 쓰여있었는데, 

홍위 자신도 이 서책을 술술 읽어내릴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이후 홍위는 

아예 이 항목을 몰랐으면 차라리 행복했으리라고 생각하며 

본인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


급히 역사서를 넘기며 읽어내리는 홍위의 

숨이 미친듯이 가빠왔고,

얼굴은 차마 감출 수 없을 만큼 

무섭게 일그러져 갔다.


" 허! 숙부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에 

여는 그래도 그만치 애를 써서 강탈한 왕업에는 적어도 숙부가 충실할 줄 알았는데, 

이따우로 사직을 해쳐먹으려고 그런 

금수 같은 짓거리를 저질렀단 말인가? 

이유, 네 놈이 정녕 인간이더냐? 

(수양대군, 즉 조선 세조의 본명이 이유였다.저 시대 기준으로 사람 이름을 막 부르는 건 패드립 급의 무례였기에, 어지간하면 그런 일은 다들 삼가했다.) 


홍위는 너무 분노한 나머지 숙부를 숙부라 부르는 것도 포기한 채 찻잔을 쥐고 있던 손을 가늘게 떨었다.


" 뭐, 숙부의 증손자란 놈(연산군)은 아예 백성들을 괴롭히고, 부녀를 겁탈하며, 

걸주(중국 역사 최고의 폭군의 대명사)의 행위를 본받았기에 제 동생에게 쫒겨났다고? 

아주 거지 같은 혈통이 아닐 수가 없군!!!"


" 뭐시라, 아예 왕통이 한 번 끊겨서 데려온 서손(선조)이 수도까지 버리고 도망을 치고, 

왜놈들 따위에게 평양까지 밀려? 

수많은 백성들이 왜적에게 유린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고??? 

태종 대왕님 때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일들이건만! 

도대체 통치를 어떻게 해온 것인가??!!!!???"


"아니, 그 많은 화포와 북방의 정예 군사들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것도 모자라, 야인 놈들이 황제를 참칭하고 수도로 쳐들어 오는 것을 막지 못해,

 게다가 삼궤구고례(세 번 절하고 아홉번 고개 숙여 인사하는 예법)의 예를 오랑캐 두목한테 올려?

이 놈이 사직에 끝없는 치욕을 가져오는구나! 

태조 대왕을 뵙기 부끄럽지 않더냐???"


홍위의 달아오르는 분노는 다름 아닌 왜인들로 인해 500년을 근근히 이어나간 왕조가 희미한 숨통마저 끊기고, 

백성들이 36년간 유린당한 후에 다시 둘로 나뉘어 끝없는 전쟁을 치루다,

 끝끝내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세상의 종말과 함께 멸망하였다는 대목에서 정점에 달했고,

홍위는 그 대목에서 입에 머금은 차를 분무기마냥 뿜어댈 수 밖에 없었다.


"쿨럮....끄읍....도대체....여가 무엇을 본 것인가? 이게 참으로 벌어진 일들이라고?

정녕 하늘이 여 뿐만 아니라, 아국을 버렸단 것인가?"


세조라 자칭하며 스스로를 띄워댄 원수의 후손들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고,

그 원수의 자손들이 자랑스러운 사직의 절반을 전조조차 가져오지 못한, 끝없는 수치의 연속으로 물들여가는 꼬라지를 목도하며,

홍위의 마음에는 끝없이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할바마마과 아바마마의 영전에 가 통곡하고픈 생각이 끝임없이 밀려들었다.


"하...원통하고 원통하구나, 

과인이 죽더라도 옥좌에서 내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수양의 후손들이 삼한의 옥좌와 왕가의 명예를 경멸받는 대상으로 몰락시키는 꼬라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어야 했다..."


홍위는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숨결을 쿨럭이며 속으로 이유 그 역적을 수십번 수백번씩 저주했다.


홍위는 급히 달려온 곤수단차가 내민 손수건을 감사를 표하며 받아 조심스럽게 닦았다.

하 낭자도 자못 심려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홍위는 깨닫고 애써 의관을 정제하였다.


" 아리따운 낭자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구려,

실로 송구스럽기 그지없소."


"인간 님, 아까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이제 좀 괜찮아?"


하르페이아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홍위를 바라보았다.


"여가 읽은 것들이 전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 맞소?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며, 

재난들이며...게다가 세상의 멸망이라니???소생은 너무 혼란스럽기 그지 없소이다.


정녕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거요???


여긴 정녕 대체 어디고?"


두 낭자가 눈빛을 주고받더니, 다시 하 낭자가 입을 열어 홍위에게 말했다.


" 앉아 봐, 인간 님, 이 모든 걸 갑자기 처음부터 받아들이기엔 당연히 어려울 수 밖에 없겠지만, 책에서 읽고 실제로 내가 경험한 바를 토대로 차근차근 얘기해 줄게."


홍위는 무슨 일이 더 일어났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하르페이아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