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의 입장에서 하르페이아, 아니, 

하 낭자에게 듣게 된 현재의 세상은 

불가에서 말해오던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아주 골고루 망해, 

인간이란 족속 자체가 아주 풍비박산이 나버린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 몰락의 단초는 인간들이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홍위는 굳이 하 낭자나 곤 낭자가 말을 보태지 않아도 서서히 깨닫는 중이었다.


멸망 전의 사회에는 더이상 사대부도 선비도 충신도 충의지사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들 도척(전국시대의 유명한 도적으로 식인을 일삼았다.)이나 궁기처럼 미친듯이 쾌락을 탐했으며, 약자를 학대하고, 여인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온갖 끔찍한 흉사로 유린하는 데 그 문명은 통달했다고 했다.


수많은 바이오로이두가 학대를 받고 죽어가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내는 

두 여인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홍위는 이상하게 차오르는 먹먹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았다.


기나긴 역사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아조가 망한지 대략 130여년이 지난 후에, 아국의 삼안 사업이라는 상회는 무척 강력한 물질을 획득했고, 

그 물질을 통해 강화된 인간들이 

바로 그 바이오로이두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한 홍위는, 

그렇다면 왜 그들 스스로는 본인들이 

인간의 족속이 아니라고 하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곤수단차, 즉 콘스탄챠가 하르페이아 대신 답했다.


" 저희는 만들어졌으니까요...인간님들께 봉사하고 인간님들을 따르도록 모듈이 심어져 있고, 또 그게 저희 존재의 유일한 목표이자 

기쁨이 되도록 정해졌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곤 낭자의 안색은 조금 그늘지고 피로해보였다.


홍위의 마음 속에는 갖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울 도리가 없는 정해진 마음은, 

마치 주박이나 저주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그걸 아녀자들에게 강요할 정도로 인세가 이리도 뒤틀렸단 말인가? 


홍위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스스로 

문득 떠올린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정당한 왕을 어떤 거짓부렁을 씌워서라도 내몰고 목 졸라 죽이기까지 하던 세상인데, 

세월이 흘렀으면 그보다 더한 일들이 허다했겠지.

여가 한 번 이미 배신을 당해 훙하고도,

비정한 세상에 기대를 했구나."


홍위는 애써 진정했지만, 

눈앞의 낭자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이전까진 그녀들을 그저 아름다운 여인, 

자신을 깨운 은인들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홍위였다.

그러나 이젠 알게 되었다.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그녀들을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사무치도록 알게 되었다.


그대들도 여와 같구나....


홍위의 마음을 세차게 후려치고 지나가는 

영혼의 속삭임이었다.


홍위는 그 여인들의 무기력한 눈빛이나

체념한 눈빛이 언뜻 보일 때마다,

옛날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되었을 시절, 

버려진 아기새를 보고 읍조렸던 자신의 시구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리 원통한 그 새마냥 

저 여인들은 부모나 다름없는 인간에게 내몰려 자유를 얻지 못한 채, 

그저 쉼없이....

자신을 주인을 위해 내몰아야 했던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을 학대하고 물건 취급할지도 모르는 주인을 위해...


홍위는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내몰렸을 때 

죽음을 택할 자유라도 있었건만, 

저 낭자들에겐 그런 자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영혼 깊이 새겨진 

그 헤아릴 수 없는 철저한 주박은 

마침내 영겁을 잠들 수도 있었던 자신을 깨워 그녀들의 주인으로 모시기로 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홍위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이 모든 사정을 헤아려보고 있었고 

그 눈빛은 다 헤아리기 힘든 

갖가지 마음들로 어떤 심연보다도 깊게 

그늘져있었다.


홍위는 스스로를 반성했다.

한번의 기회를 더 얻고도, 여전히

왕답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왕이 된 자는 자신을 따르기로 한 이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저버려서는 아니되는 법이건만...


그리고 왕은 

오롯이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하며 

자신이 택한 길에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홍위는 왕좌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 이젠 그런 과거는 반복하지 않겠다. 

여는 여의 숙부와도 다르고, 

다른 이들이 그녀들에게 행했던 일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각오하노라. "


홍위는 속으로 굳세게 다짐했다.


괴력난신의 장난일지 

하늘님이 여를 내려보낸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저들이 더이상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괴로워하지 않도록,

도움 주는 이가 없어 세상을 미워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그런 나락을 맛보는 자는 나 하나로 충분하고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없어야 한다.


아...이유나 숙주놈만 빼고...

홍위는 슬그머니 어두운 냉소를 지었다.


홍위는 생각에 빠져 있던

자신을 조용히 계속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시선을 느꼈다.

홍위는 마음을 굳히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여는 너희가 여전히 인간이라고 생각하노라. 

적어도 여에겐 너희 하나하나는 모두 인간이로다."


콘스탄챠도 하르페이아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더 부드럽고 산뜻한 느낌이 느껴지는 이유는

홍위 스스로도 도무지 알지 못했다. 


콘스탄챠와 하르페이아는 그 밖에도 다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홍위는 그녀들이 이야기하는 어조라던지 

조곤조곤한 말투라든지 

밝은 미소라든지를 보면서 

문득 어린시절에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혜빈 양씨와 할머니 소현 왕후를 떠올렸다.


도란도란 화로가에 다가가 불길을 쬐며,  

이야기를 주거니받거니하고 있는 사이에 

시끄럽게 주변이 뛰어다니는 발소리로 분주하더니

누군가 쪼르르 달려와 홍위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 권속! 드디어 일어났느냐???"


홍위의 무릎으로 덤비듯이 튀어오른 

어린 계집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계집애의 한 쪽 눈이 안대로 가려져 있는 광경을 보고 

홍위는 전조의 궁예를 잠깐 떠올렸다가 

미안한 마음에 민망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그 눈은 어찌 된 일이냐?"


" 후후후...권속...이 눈은..."


계집애가 힘껏 몸의 모양을 부풀리며 젠체하려는 참에 우악스럽게 또 다른 여인이 급하게 계집애를 잡아챘다.


" 야, 인간한테 함부로 올라타지 마! 언제 또 뻗을지 모른다고!"


다소 표독스럽게 말하는 여인네의 얼굴은 

실로 곱상했으나 괜시리 

새침데기 같은 면이 있었고, 역시 밝은 금발의 머리는 짧게 쳐서 어깨에 겨우 닿았다.


역시 색목인의 한 부류로 보이는데 

아까의 하 낭자와는 자매로 보이는 외양이다.

하르페이아의 명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개할게, 이 쪽은 내 자매인 그리폰,

그리고 이 친구는 LRL, Long Range Light, 굳이 말해 멀리까지 비추는 빛이라는 뜻이야."


홍위는 비로소 자신을 깨운 이들을 한 자리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본인은 아직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