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맞다, 권속, 짐의 눈에 얽힌 사연을 물었으니 이제 알고 싶지 않더냐? 

이 작렬하는 사안은, 오직 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파멸의 멸절의 봉인을 푸는 비장의 무기지." 

 

"으이구, 넌 언제 철들래? 인간이 좀 알아듣게 말할 수 없어?"


그리폰, 아니, 굴리혼 崛莅眃( 우뚝 솟아 빠르게 임한다.)이 계집아이가 까불거리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인지 

급히 LRL, 애란애愛欒愛( 뜻: 사랑으로 단란해지고, 단란하니 사랑이어라.)의 머리에 알토란 같은 꿀밤을 한 번 먹였다.


" 아! 아야! 아파, 아프다고! 그리폰! 알았어...

히잉...제대로 말할게...제대로 말하면 되잖아...!"


어린 계집아이는 그렇게 아픈 머리를 애써 

쓰다듬으며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이윽고 다시 재잘재잘 지저귀듯이 말을 이어갔다.


홍위에겐 계집아이의 청아한 목소리며 

낭랑한 손짓이며 영월의 산골에서 지저귀던

산새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홍위는 본시 타고나기를 

시끄러운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고 말을 되도록이면 아끼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는 찬품을 타고 났을지언정, 

대화할 사람도 없이 수년간 고립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사람과의 대화가 고플 때도 있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리라.


홍위는 처음에는 그 계집아이의 이름을 애써 발음하느라 애먹었고, 

저 계집아이를 처음으로 낳은 이가 뉘인진 몰라도 이름을 실로 요상케 지었다고 

홍위는 지나가듯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LRL이 신이 나서 말하고 있는 것 중에 지금 홍위가 간신히 알아듣는 것들은 반절도 되지 않았지만, 

(LRL은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라던지 하는 자신의 중2병 서사를 꽤나 멋들어지게 설명하는 중이었다.)

둘 다 목적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만담은 꽤 오래 이어졌다. 

대화가 고픈 것은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으니까.


대화에 홍위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그 계집아이, LRL이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는 소리였다.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스스로를 '짐'이라 칭했느냐?"


홍위가 갑자기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의문을 표하자, LRL은 의기양양해하며 가녀린 몸을 쫙 펴고 으쓱였다.


"그렇다, 권속이여, 짐은 유구의 세월을 살아왔노라."


"내 하나만 여쭈어도 될런지, 

세상이 멸망했다고 했는데, 아직 

전조의 여인들이나 철인들은 살아남았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그대는 대명국의 황녀로서 

대명의 황제 자리를 이은 것이오? 

그대가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는 연유가 

여는 사못 궁금하오." 


갑자기 예를 더욱 차리는 홍위의 말투에 

LRL은 당황하며 통통한 볼을 부풀렸다.


"으윽...권속! 갑자기...짐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나 해대고, 지금 장난치는 거야?

왜 갑자기 날 그런 눈으로 봐?

혹시 화났어?"


LRL은 홍위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자, 

당황했고 가라앉은 눈빛을 바라보다가 

부담스러워져서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홍위는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만,

어떤 몸에 있든 홍위가 겪었던 일들이 

홍위의 눈에 깊은 무언가를 보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홍위가 자못 생각에 잠겨 무언가를 가만히 

구상하거나 궁구할 때이면 

한없이 처연하기도 하고 당당하기도 하고,

겉뵈기엔 칼날처럼 냉정하게도 하며 

은은한 격정이 심연에서 타오르기도 하고, 

한 없이 약해보이면서도 

한 없이 강해뵈기도 하는 그런 분위기를,

홍위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LRL이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는 것은 

사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굴리혼이 꽤나 당황한 듯 홍위에게 다가와 

재빨리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인간, LRL은 말이야, 

100여년 간 등대에 혼자 갇혀 있느라 저런 말투를 쓰게 된 거지, 

실제로는 착한 아이고, 자기가 쓰는 말들이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를 거야, 

그러니까 불편하거나 해도 좀 양해해줄 수 있어?"


홍위는 LRL이 무려 일백년을 홀로 

등대에 갇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전율할 수 밖에 없었다.


"맙소사...

여인들의 수명도 천여년인 것도 놀랍거니와...

(신선의 도라도 익힌 것이었던가?)

그 중에서 백여년을 갇혀 있었다니....

인세는 도대체 어디까지 타락한 것이었던가?

그리고 이 계집아이는 얼마나 강인했던 것이며....또 얼마나...얼마나...

혼자서 유구한 세월을 괴로워해야 했던 것일까 ?"


홍위는 다시 영월에서 유배를 보내던 시절, 

좌절하여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칩거했던

기간의 자신을 회상했다.


사람이 오랜 연금 상태에 놓인 채 고립되면,

아무리 강인한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부터 서서히 깎여 나가다, 

언젠가는 정신이 결국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홍위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홍위는 LRL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조막만한 손을 잡고 끌어당겨 끌어안고 

조용히 등을 쓸어 주었다.


LRL이 놀라 눈이 동그라지는 사이에 홍위는 차분히 속삭여왔다.


" 여는 알고 있노라, 그동안 많이 힘들었더냐?

홀로 와주지 않는 이들을 기다리는 마음은 

여도 잘 안다...

아무도 와주지 않고 기약없이 자신의 운명을 기다려야 했던 시절의 슬픔도...아픔도..

미련도....너도 괴로웠겠지. 

때로는 가혹하기 그지 없는 세상을 저주하고

시련을 주시는 하늘을 원망했겠지.....

아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


홍위의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는

자못 처연하고 잠잠했으나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고통을 위로하는 

진심이 잔잔히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열두살의 자신에게 하던 말이기도 했다.


" 궈...권속? 아니...난...나는...으으....으으...으아아아앙!!!"


LRL은 안긴 채로 등을 쓸어주는 인간의 부드러운 손길과 포근하고 넓은 가슴팍에 기대어

참아 왔을지도 모를 울음을 거세게 터트렸다.


" 흐윽....으아아앙...사실 너무...너무....힘들었어...오지도 않는 인간들을 기다리느라...

너무 괴로웠어...죽을 정도로 힘들었어...

아무도 안 와주고...혼자서...혼자서..."


LRL은 그동안 자신이 겪어온 일들에 대해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다름아닌 인간이 그런 슬픔을 

공감해주고 위로해준다는 것은,

LRL에게 있어선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만 같은 일이었다. 


홍위는 그런 가여운 아이를 부드럽게 계속 끌어안고 

아이가 울다가 울다가,

제풀에 지쳐 새근새근 잠들 때까지 품에서 놓지 않았다.


숙연하게 홍위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던 

그리폰, 아니 굴리혼이 애써 시큰거리는 눈가를 닦아내며 홍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인간, 이제 몸 상태가 어느 정도 괜찮다면, 만나 봐야 할 이들이 있어."


그리폰, 아니 굴리혼이라고 하는 여인은 

그러면서 홍위에게 닥터라고 불리우는 처녀를 만나러 가자고 재촉했다.


홍위는 마침 슬슬 주위의 상황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지난 생에서 몇년을 영월의 유배지에만 갇혀 지낸 터라 

마냥 한 곳에만 머무는 것에 

이골도 나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따라왔다.


물론 곤히 잠들어 있는 LRL을 담요로 덮어주고 

자신의 걸상에 눕혀 놓은 뒤의 일이었지만. 


홍위가 발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두런거리다 

멈추어섰다.


"맙소사, 여긴 용궁전이라도 되는 곳이던가?"

 

홍위는 전율하며 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을 

정신 없이 몰입하며 바라보았다.


큼지막한 물고기떼 하며, 


지나가는 별주부며, 


요상하게 생긴 인어 같은 것들이며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산호, 


햇빛이 바닷물 사이로 새어 들어와 안을 흐트리며 빛나는 정경이며,


아름다운 풍경이 홍위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듯했다.


현대인들조차도 바닷 속의 풍경을 보면 감탄하게 될 때가 많건만, 


15세기 초반에 살았고, 잠수함을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사람이

그 풍경을 눈 앞에서 직접 목도했을 때 

느끼는 감격은,


아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홍위가 비취와 햇살이 어우러지며 오색이상으로 반짝이는 바다의 정경에 전율하고 있을 때, 급히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와아아아!!! 인간님이다!!!"


그 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헥헥거리며 왠 

복실복실한 붉은 무언가가 홍위의 가슴팍에 

세차게 안겨왔고 홍위는 기우뚱하며 바닥에 넘어졌다.


"......불개???...음....소저는 누구시오?"


"펜리르, 안돼요! 인간님은 아직 우릴 잘 모른단 말이에요!"


급히 펜리르를 뒤쫒아가던 페로가 

이미 인간님의 곳곳을 핥으며 헥헥대는 

펜리르를 보며 희고 고운 머리를 쥐어뜯었다.


" .....하얀 괭이???"


홍위 자신은 아직 상상도 못하고 있었지만,

이전 생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든든한 방패 중 하나를 얻게 되는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드디어 컴패니언 시리즈와 

유일한 인간이 조우하게 된 것이다.


P.S. 

☆홍위의 머릿속에서의 바이오로이두들 이미지

1) 콘스탄챠: 조곤조곤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면모가 있는, 

이상한 기물을 착용한 낭자.

2) 그리폰: 심퉁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래도 

심성이 고운 면도 있는 색목인 미녀

3) 하르페이아: 매우 박식하고 아름다운 색목인 처녀+ 춘추관의 사관을 시키면 잘할 것 같다

(사관: 실록을 기록하는 기록관)

4) LRL: 뭔가 열두살의 자신 같아서 

지켜주고 싶고 돌보아주고 싶은 아이

5)펜리르: 불개

6)페로: 흰 괭이, 흰 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