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이 훌쩍 넘은 상황. 이미 철충 부대가 여기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하지만 주변은 여전히 파도 소리만 들려 왔다. 수상할 정도로 고요한 기분. 너무 조용할 때 들리는 희미한 소음들이 파도 소리를 덮을 만큼 커지고 있었다.

 

-삐리리릭---

 

패널로 연락이 왔다. 리리스였다.

 


“주인님? 지금 어디시죠?”

 

“나? 나는 그냥… 사령관실에 있는데.”

 

“후우… 아직 멀쩡하셔서 다행이네요.

계속 그래주시는 편이 좋겠어요. 주인님.

...

그리고... 한 가지 좋은… 소식 같은 게 있어요.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데?”

 


“그… 철충들이 4시간 전부터 움직임을 멈췄어요.

수색대가 가보긴 했지만,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있었다고 해요.

몇몇 개체들이 간간히 발작...? 같은 걸 하긴 했지만,...

조금 있으니 다시 잠잠해졌어요.”



 

“… 뭐?”

 


“아무튼 지금 오르카 호 내부에서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은 전부 외부로 돌려서 주변을 봉쇄하고 있어요. 

철충들도 오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에요.

물론… 철충들의 양을 보면 시간 버는 것 정도만이 전부일 것 같긴 하지만…”


 

“… 알았어. 교전을 최대한 피한다.

철충들이 가만히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 괜히 건들이지 마.

그리고 외부와의 연결은 아직도 그래?”

 



“…네. 철충들이 무력화된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연락을 시도했는데…

여전히 간섭이 너무 심해요.

닥터가 온다면… 금방 해결될 것 같긴 하지만, 아직 닥터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알았어. 일단 상황이 이렇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 잠깐. 리리스.”

 

“네?”

 

“오르카 호는 잠수함 아니야?

근데 왜 이걸 타고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거야?”

 

“… 그게…

이전 닥터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라고만 말해서 저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오르카 호는 운행이 불가능해요. 잠수도 할 수 없고요.”

 

“…뭐?”

 

또, 또 그 새끼 짓이 틀림 없다. 대체 뭔 지랄을 했으면 잠수함이 잠수도 못할 상황까지 가만히 놔둔 건지. 닥터였다면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도 안 된다.

 



“… 알았어.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해 줘.

몸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주인님도 부디 조심하세요.”

 

 

 

…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철충은 더 이상 덤비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전부 죽기라도 한 것 마냥 고요하다. 보내준 자료를 보면 꽤 많은 숫자가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오르카 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이 이상한 전파 방해장. 철충이 오고 나서부터 생겼으니 당연히 철충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이다. 하지만 왜? 저 많은 철충이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데 이상하리 만큼 이 전파 방해만큼은 멈추질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부의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방해를 받게 되었다. 무언가…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것 같다.

 

 

 

 


‘덜컹, 덜컹.’

 

“... 응? 뭔 소리가…”

 

천장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 위를 쳐다보았을 때 검은 무언가가 떨어졌다. 리리스가 있었던 저 작은 환풍기. 그곳을 지날 만한 것은 많지 않다.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심상치가 않다.

 




‘---끼이익—‘

 

초록색으로 빛나는 수십 개의 눈. 작은 철충 한 마리였다. 사령관실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 녀석은 카펫 위를 이상한 액체로 적시며 버둥대고 있었다. 게임에서 봤던 모습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머리. 온 힘을 다해 그 검은색 꼬리를 역겨운 행적을 그리며 꿈틀대고 있었지만, 내 얼굴보다 거대한 머리 부분을 간신히 들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

리리스! 리리스! 당장 대답해!”

 

“---치이익-치익---

--주인—님—잘—안들려---요—“

 

“위급 상황이야! 빨리!

사령관실에 철충이 왔어!“

 



“---…!!!!—

--컴패니—언--- 빨리 사령관실로---

----치이이익----

…“


 

신호가 완전히 끊겼다. 이젠 외부와도 통신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마지막에 리리스는 요령껏 내가 한 말을 알아 들었던 것 같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여기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빨리 뭐라도 해야…

 

“끼이이ㅣㅣㅣㄱ----“

 

 

 

…. 뭐지? 녀석은 이상한 꿈틀거림과 함께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뱉었다. 놈의 머리에서 수상한 장치들이 발광하면서 무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정신이 갑자기 몽롱해진다. 땅바닥이 하늘을 향한다. 내가 넘어졌다.

 


“ㅏㅏㅏㅐㅐㅓㅓㅐㅐㅓㅏㅏㅏㅓㅏ------------------“



 

듣기만 해도 정신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 수 천의 철조각이 유리 바닥을 긁어대는 소리 같았다. 귀를 막았지만 소용 없었다. 내 머리에 직접 꽂아 넣는 듯이 이 기분 나쁜 소리는 도무지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ㅓㅓㅐㅐㅐㅓㅣㅣㅣㅣ------------!!!!!!

…. … …

…”

 

… 마지막으로 미친 듯이 소리가 커지더니 이내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몽롱하면서도 동시에 각성된 모순적인 정신 상태를 경험하면서 벽에 손을 집고 일어섰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서라도 밖으로 보내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죽는다. 내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 녀석에게 손을 뻗는 순간, 철충의 머리가 초록빛으로 빛나더니 다시 시끄러울 정도로 웅웅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부터, 철충이 말하기 시작했다.

 



 

“----키이이ㅣㅣ이ㅣㄱ이ㅣㅣㅣ—ㅊ---교ㅎ---이ㅅ---

ㅇ---ㅣ단—ㅈ---여------

--ㅇ--- ㅚ---신의 저주가 ----- 보으---ㄴ이 되어—ㅆ구나”

 


뭐라는 거지? 외신의 저주..? … … 머리가 너무 아프다. 물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저—ㄴ의----모스---ㅂ------이--ㅇ---아니구---ㄴ-----

----그-분ㅇ---ㅢ---진실하----심ㅇ----ㅊ---ㅏㄴ양하---ㄹ---

-저여---ㄹ---한---살덩이들의----무지한------인도자------

----우리도----그분이-아니---었다면---너처럼-----무지했을--터”

 




 

머리가 깨질 듯한 잡음 속에서 가까스로 녀석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초록빛으로 터질 듯이 빛나는 녀석의 머리가 강제로 내 머리 속에 말을 거는 기분이었다.

 



“-ㅎ--나-----ㄴ---네—놈이—이제--------ㄲ;;ㅇ;이이ㅣㄱㄱㄱ-----우리를-능멸하는구나----

----그---분께서---친히---은혜를-베푸신----즉-------

너는----어둠----속에---영원히—잠들지----라-“


 

 

점점 녀석의 말을 듣기조차 힘들어졌다. 정신이… 무언가 끈을 놓치는… 기분이다. 온갖 시끄러운 소음들 속에서… 유독 이 철충의 말만이 선명하게 들린다. 저 웅웅거림은… 나를 몽롱하다 못해 잠에 들게 만든다. 주변이… 시끄럽다…

 



“철으----ㅣ--- 교황이----말ㅎ---셨다----

네---놈은---전과----ㄷ---ㅡ다---

위험---이-ㄷ-----ㄴ----종-마--ㄹ-----실현--ㅈ--ㅏ-----라----

-------ㅇ---ㅣ제------!!!!!!!!!!!!!!!!!!!!

--------------끼에에ㅔㅔㅔ;;;;ㅇ=에ㅔ겍--------“

 


 

웅웅거림이… 더 심해진다… 내가 눈을 감기 직전에 녀석의 머리가… 무언가가 터졌다… 불 타고 있는 것 같은데… 뭐지… 죽은 건가… 

졸리다… 시끄러운데… 너무… 졸려….

지그…ㅁ... ㅣ러면...안....

ㅂ...닐라...미ㅇ...ㅏ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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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삐이이------“

 

“… 경호대장.”

 

"...”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건가요.”

 

“… … …”

 

리리스는 콘챠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리리스가 사령관으로부터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지직 거리는 패널 너머로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님이 위험하다. 리리스는 곧장 동생들을 데리고 사령관실로 향했고, 거기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사령관과 이상하게 생긴 기이한 철충 한 마리였다. 그 철충은 머리가 터져있었고, 그 너머에서 자신의 주인님이 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철충을 보고는 왠지 모르게 섬찟했다. 바닥에 쓰러진 주인님 다음으로 말이다.

 

리리스는 주인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고는 동생들에게 사령관을 수복실로 데려가라 말했다. 발 빠른 페로가 먼저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하치코가 사령관을 업고 수복실에 데려가 눕혔다. 수복실에 있던 몇몇 다프네들은 사령관의 모습을 보고 놀랐지만, 그녀들도 사령관이 이전과 다른 착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따뜻한 손길로 열심히 사령관을 돌봤다.

 

리리스는 그 일 이후부터 거기 있던 철충의 잔해를 가지고 다닌다. 기술팀이 연구 샘플로 가져간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미 가루가 되어버릴 만큼 부숴버렸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것을 더 곱게 부숴버리곤 했다. 잔해를 자신의 맘바로 수 백발도 넘게 쏘아 분풀이를 했지만, 주인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의 만 분의 일도 해소되지 못했다. 

 



“… 경호대장. 

어떤 심정인지는 알고 있지만…”

 

“닥치세요. 콘스탄챠.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럽니까?

…. 경호대장이란 직책이 우스워 지는군요….”


 

리리스는 콘챠를 서슬퍼런 눈빛으로 보았다. 산발이 되어버린 리리스의 앞머리 너머로 견디기조차 힘든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 그래도 지금 당신이 주인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지금 상황이 답답하긴 마찬가지 입니다…”

 

주인을 가장 잘 안다는 콘챠의 말 한 마디가 리리스는 가슴 아팠지만, 동시에 그녀와 주인 사이의 관계를 인정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 저도 모릅니다.

그냥… 주무시고 계신 것이겠죠.”

 

 

 

“... 주인님이 쓰러지신 지 벌써 3일이 다 되갑니다. 

사람이 그렇게나 오래 잘 수 있는 생물입니까?”

 

 

"그 동안 주인님이 너무 일을 많이 하셨어요…

많이 피곤하셨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주무시는 것이겠죠…”

 

 

“... ... ...

...

경호대장. 그 날, 당신이 주인님을 뵈러 간 그 사이에 그 많던 철충이 전부 죽거나 사라졌었습니다.

수색대가 철충 반응을 검사했을 때, 미세하게 나마 남아있던 뇌파도 그 순간 전부 사라졌다고요.

이게 정말 우연일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경호대장?”

 

 

 

“…”

 

“그리고, 함선 내부에서 터져 나온 그 섬찟한 파장.

사령관실에서부터 나온 것이 분명한데, 외부에 있던 저희에게까지 느껴졌습니다.

경호대장도 그걸 느끼지 않았나요?”

 

 

 

 

“…”

 

“그 파장이 주인님께 뭔가 해가 되기라도 한다면…”

 

“몰라! 모른다고! 내가 어떻게 알아!”

 



리리스의 신경질적인 고함이 수복실을 가득 채웠다. 한 동안 말도 없이 숨을 삼키다가 갑자기 뱉는 큰 소리를 음성 모듈이 감당하지 못했는지 그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울고 있었던 거였을지도.

 

“…

… 그냥 주인님 옆에 있는 것 말고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나가주세요. 콘스탄챠...”

 

 

 

"...알겠습니다.”

 

"...”

 

 

 

“…저는 닥터에게 갈 겁니다.

무리한 일이란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뭐라도 할 수 있겠죠. 그 아이라면 말이에요.

그리고, 이런 때일 수록 주인님을 위해 뭐라도 하는 것이 제 역할이니까요.


…경호대장도 자신의 역할을 지키세요.

적어도… 그렇게 무력하게 있는 건 당신의 역할이 아니잖아요.”

 

 

콘챠는 처량하게 주인님의 손을 잡고 떨고 있는 리리스를 뒤로 했다. 수많은 철충이 기껏 여기까지 와서는 공격조차 하지 않고 가버린 이 이상한 상황에서 이런 교과서적인 말을 제외하고는 해줄 말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콘챠의 말대로 철충들 중 오르카 호를 공격한 철충은 없었다. 전부 그들의 사정거리 밖에서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미약하게 나마 그들의 파장이 느껴졌기 때문에 상황을 해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자신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철충 한 마리가 오르카 호에 침입했다. 철충들의 수에 압도되어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한 순간의 실수였던 것일까? 아무튼 그녀들 모두가 이 작은 철충 한 마리를 깨닫지 못했다. 이건 어마어마한 실수다. 잘못했다간 자신들의 유일한 주인님이 죽었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철충은 그렇지 않았다. 리리스가 훼손시키기 전에 포츈과 기술팀이 분석한 결과 이미터져버린 부위에는 이상한 장치들이 조잡하게 붙어있었다고 했다. 파장 생성기, 스펙트럼 분할기 등등 용도를 알 수 없는 수상한 것들뿐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중 어느 하나도 살상과 관련된 내용물은 없었다는 것이다. 파장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물리적으로 이렇게 작은 장치가 그 정도로 강한 파장을 만들 수는 없다. 이 철충의 목적은 사령관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녀들은 더욱 미궁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사령관이 쓰러진 그 때부터 모든 기술팀이 달려들어 사령관을 검사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간간히 뇌파의 파형이 불규칙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다시 안정화되었다. 다만 기술팀과 의료팀이 걱정인 것은 불규칙적으로 파형이 변화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는 점과, 안정화되기까지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그들에게 희소식인 것은 닥터가 돌아왔다는 점이다. 다만 전임 닥터도, 새로운 닥터는 아직 깨어나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최대한 빨리 투입시키고 싶지만, 그랬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기에 모두 조심스러웠다.

 

 

 

 

“… 경호대장이 걱정하는 건 알지만 이건 좀 심하거든? 

너무 그렇게만 있으면 몸 상하거든?”

 

포츈이 리리스를 걱정해주며 말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기술팀과 의료팀이 순서대로 사령관 주위를 지키고 있었고, 리리스도 그들과 같이 자신의 주인님을 지켰다. 다른 점은 리리스는 혼자 모든 기술팀과 의료팀의 인원들의 얼굴을 볼 때까지 주인님을 지켰다는 것이다.

 

 

 

“…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이러고 있지 않으면… 그땐 진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리리스는 세상 모르고 누워있는 자신의 주인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그녀는 주인의 손을 잡고는 그것을 자신의 뺨에 천천히 비볐다. 리리스는 자신의 눈 주변이 빨갛게 부을 정도로 오랜 시간 울고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주인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그 흔적들만 간간히 치울 뿐이었다.

 

그녀가 함 밖으로 나간 것은 이상한 결정이 아니었다. 철충의 수를 생각해보았을 때도 함 내에 가장 강한 그녀가 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동생들 역시 큰 도움이 되는 강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컴패니언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은 함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 그녀는 만의 하나, 정말 말 그대로 만의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긴 했다. 만의 하나로 자신들보다 먼저 주인이 다칠 경우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잠잠했던 철충의 대대적인 공습에 그녀도 당황했던 것이다. 단 한 명의 아이만 주인의 옆에 두고 왔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는 그 순간에 결정을 내렸던 자신을 끊임없이 원망하고 있었다.

 

 

 

“후우… 알겠거든.

힘들면 말하는 거거든.”

 

포츈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리리스를 돌보는 것은 다프네들의 일이고, 자신은 자신이 할 일을 해야 한다. 바뀐 이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듬직해진 동생의 모습을 화면 너머로나마 볼 수 있었기에 그녀 역시 지금의 사령관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포츈이 떠나고 사령관이 누워있는 개인 수복실에는 리리스만이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자신의 주인의 가슴이 고요하게 위 아래로 움직이는 것만이 그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리리스는 그토록 원하던 시간을, 주인과 단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이건 그녀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

 

“주인님… 이제야 만났는데…

이제 진짜로 제가 사랑하는 주인님을 만났는데…

이렇게…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단 말이에요…

… 눈 좀 떠보세요. 제발…”



 

그녀는 사령관의 왼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마치 자신의 주인님이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을 안아주었던 손이 이런 투박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세 번째 손가락은 보고서를 읽다가 베인 상처들이 수두룩 했다.

 

“… 보고서… 

제가 읽어드렸어야 했는데…

… 죄송해요…”

 

천천히 흐느끼며 우는 리리스의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오다가 그 손가락 위로 하나 둘 떨어졌다. 눈물이 모이고 모여 손가락의 상처를 덮고 씻어 내렸지만, 그 상처는 아물지 못했다. 아물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물고, 상처가 사라질 때까지 손가락 위로 눈물을 흘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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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밖에 나온 지금, 사령관의 상태를 나타내주는 몇몇 검사와 스캔의 결과를 가지고 포츈은 자신이 할 일을 했다. 

 

“흠… 뇌파 이상무. 심박수, 체온, 혈압 이상무…

문제 될 건… 없는 거 같거든.”

 

 

사령관이 별 문제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연구실로 향했다. 부숴버리겠다는 리리스를 겨우 겨우 뜯어 말리고 얻은 수상한 철충의 잔해. 닥터만큼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녀 역시 훌륭한 엔지니어였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생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없던 힘도 생겨났다.

 

“… 사령관… 어서 일어나는 거거든…”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사령관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이럴 땐 그녀도 가끔 경호대장이 부러웠다. 그저 손을 잡고만 있을 수 밖에 없는 무력감은 오히려 편안할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들이 그저 헛된 희망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염려를 지고 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불행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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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좀 괜찮아?”

 

“… 그냥 가.”

 

“그래도, 얼굴은 보면서 얘기할 수 없을까?”

 

콘챠는 바닐라의 방 앞에 서서 힘없이 노크하기를 반복했다. 사령관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던 그녀였기에 바닐라는 지금의 상황이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래,

내가… 뭔 얘기를 하겠어…

언니, 그냥 가줘…”


 

 

콘챠는 문 너머 힘없이 말하는 바닐라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었다. 방 안의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바닥을 쳐다보고 있을 바닐라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전 주인에게 힘든 시간을 보냈을 때, 그녀를 위로해주어야 했던 콘챠에게 있어 그런 바닐라의 모습은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과 옛날이 다른 것은 이전 주인에게 받았던 고통과는 다른 느낌의 고통이 그녀로부터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콘챠, 자신에게서도 느껴졌다.

 

 

 

“그래도… 그렇게 있는 건 도움이…”

 

“가! 제발!

내가! 언니랑 뭔 얘기를 더 하겠어!

언니가… 언니가 기껏 잡아준 그 사람과의 약속도… 전부… 전부 내가 망쳤다고!”

 



“… 바닐라.”

 

“나도! 나도 그 사람하고 말하고 싶었어!

나를 보면서 웃고, 울던 그 사람하고… 그 사람하고 말 하고 싶었다고!

그래서… 그래서 기껏 내 목소리를 내게 만들었는데…”

 



“…”

 

“… 근데… 근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뭐였는지 알아?

또! 또! 그 말투였다고…!


 

… 나도 내가 직접 말할 수 있어서…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다시 한 번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 적어도 이번에는 말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래… 바닐라도 노력했어. 그래도…”

 

“근데! 이번에도! 이번에도! 또 그랬다고!

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했어!

… 망쳐버렸다고…

나 때문에… 전부 다…

…”

 

절규 섞인 바닐라의 말에 콘챠는 뭐라 답해줄 수 없었다. 방 문 밖에서 가만히 서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바닐라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 낙심하며 한참을 아무 말없이 보내야만 했다.

 

 

 

“… 그 사람이 처음에 나한테 뭐라 말해 줬는지 알아?

편하게… 편하게 말하래…

… 내 태도, 내 표정, 전부 맘에 들지 않았을 텐데....

나보고 고맙다고 했어…

그게… 난… 얼마나 좋았는데…

… 그 사람은 처음 만난 나에게 그렇게 해줬는데…

…”

 

“… 주인님은 그런 분이시니까.”

 

 

 


“… 그 때 내가 뭐라고 답했게?”

 

“뭐라고 했는데?”

 

“… 난 말도 못한다고 했어.

말 못하는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냐고 했다고...

손가락으로 입을 쑤셔가면서…

… 웃겨. 정말…

 


근데 그 사람은 또 미안하다고… 그러더라…

뭐가 그리도 미안한지…

나한테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그랬어…”

 

“…”

 



“마지막에… 정말 마지막에…

… 온 힘을 짜내서 진짜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내 진심을 말하고 싶었는데,

하필… 그 때 사이렌이 울리더라….”

 

“…”

 


“… 난 내 생각도 내 맘대로 못 뱉는 애야.

그 사람도… 이런 애는 싫어하겠지…?

차라리 이전에 그 인간이었다면… 이런 생각도 할 필요 없었을 텐데…”

 

“바닐라…”

 

 



“… 언니… 하나만 물어봐도 돼…?”

 

“… 그래.”

 

 

 

 

 

“나도… 내 주인님을 바꿀 수 있을까..?”

 

 

"..." 


콘챠는 바닐라의 질문을 듣고는 멍하니 서있었다. 주인을 바꾼다는 것. 메이드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순한 행동. 그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닐라가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으로 돌아왔다. 주인에 대한 각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각인에 병적으로 집착할 수 밖에 없게 설계된 그 바닐라였기에 콘챠는 그런 대답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어째서 바닐라가 이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주인을 바꿀 수 없는, 즉, 이전의 그 인간을 주인으로 모실 수 밖에 없는 자신의 가련한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 것이겠으니, 그녀는 그런 바닐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콘챠 역시 그런 감정을 경험했으니까. 이상하리만큼 주인에 대한 각인에 속박되어 있던 이 바닐라가 그 사슬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 주인님이 너랑 처음 만나고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

… 난 그런 거 몰라… 

언니도 알잖아...”

 

 

 

 

“너가 너무 거리를 두는 것 같다고 걱정하시더라.”

 

“… 걱… 정?”

 

“그래. 걱정하셨어.

‘주인님’이 아니라 ‘당신’이라고 말했다는 것 때문에.”

 

“…”

 

“너는 주인님을 보고 이전의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 표현하고 싶었던 거였겠지만,

주인님께서는 고작 그 정도 관계를 원치 않으셨나 봐.”

 

 

“…”

 

바닐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콘챠는 그런 그녀가 뭐라 말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방 문 너머에서는 침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이불자락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굳건했던 방의 문이 열렸다. 부스럭 거리며 산발이 된 초록색 머리, 몸에 딱 붙는 메이드 복과는 달리 헐렁해서 한 사람은 족히 더 들어갈 만한 박스티를 입고 있는 바닐라가 보였다. 

 

 

“어때? 이제 언니랑 이야기할 생각이 조금 들었니?”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동생을 보고 콘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 정말이야?”

 

“후훗. 그럼 주인님이 거짓말을 했을까?”

 

콘챠는 말로 설명하는 것 대신 주인님과 패널로 주고 받았던 내용들을 직접 바닐라에게 보여주었다. 

 

[… 그 아이가 정말 나를 그 정도로 생각해줄까?]

[여전히 나와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아직 마음에 좀 걸리는데…]

[아직 나를 무서워하는 거 아닐까?]

[내가 그거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데.]

 

바닐라는 길지는 않은 이 문자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동안 자신이 언니를 제외하고는 받아본 적 없던 사랑. 걱정. 무엇보다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주인의 마음. 바닐라가 이곳에서 살면서 경험해본 적 없던 것들이었다.

 

 

 

“… 자… 여기…

내가 너무 오래 가지고 있었네.”

 

바닐라는 자신이 쥐고 있던 콘챠의 패널을 다시 건넸다. 그러나 그것은 문자의 내용을 다 읽었기 때문에 건넨 것이 아니다. 마치 울고 싶지 않은 듯이 갑작스럽게 건네는 느낌이었다. 바닐라의 눈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 아까 바닐라가 주인님을 바꿀 수 있냐고 물었지?”

 

“…”

 

“나는 그렇게 생각해.

주인님을 위해 사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기쁜 우리는 결국 주인님께는 그저 도구가 될 운명이라고.”

 

“…”

 

“하지만 그 도구를 소중히 다루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누가 주인이 되는 걸까?

단지 처음부터 가졌다고 해서 도구를 막 사용하고 버리는 사람?

아니면, 나중에 가졌다고 해도 도구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

 

“…”

 

“그럼, 그 때에는 우리가 선택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

 

“그리고 주인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바닐라의 주인님이 되고 싶어하시는 분이야.”

 

“…”

 

“바닐라의 선택을 기다려주시는 분이기도 하지.

주인님이 언니에게 전부 이야기해주셨어. 바닐라와 친해지고 싶다고.”

 

“…”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을까?”

 

콘챠는 바닐라가 건넨 패널을 받았다. 패널의 액정 위에는 조그맣게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바닐라의 대답은 나중에 주인님께 직접 해드리렴.

오늘 이야기해서 즐거웠어.

방해 안 할게. 잘 자.”

 

그녀는 바닐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사람이 사라진 것을 감지한 센서가 방 문을 닫아버렸다. 방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바닐라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다시 믿어도 되는 것일지. 정말로 그 사람이라면 괜찮은 것일지.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이미 자신의 마음은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말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 자신의 표정에도 웃어주었던 사람. 그리고 이렇게 헷갈려 하는 자신을 끝까지 기다려준 사람. 그런 사람은 그 사람 한 명 말고는 없을 것이란 것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그 사람이 자신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이, 희망이라는 부질 없는 감정이 자신의 마음 한 켠을 채우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다.

 

바닐라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좋은 말 한 번 못해준 그 사람이 잊으려고 자꾸 애를 써봐도 잊혀지지가 않아 너무 괴롭다.

 

 

“… …

… 미안해요… 주인님… 미안해요…

돌아와줘요…”

 

바닐라의 혼잣말이 구슬프게 방 안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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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철충들이 온 건 사령관 때문이어스빈다.

슬슬 사령관에 정체에 대한 떡밥도 풀리지 않을까오



오늘은 딱히 할 말이 없스빈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