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하하! 사령관! 수줍어할 필요는 없다네! 어서 나오게나!"


'...들키면 죽는다…'


하고 생각한 나는 숨을 죽이고 보급창고로 숨어들어갔다. 

업무가 밀려 몇일간 관계를 하지 못한 탓에, 

'섹스하고 싶다'고 혼잣말한 것을 아스널이 들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3일간 밤을 세고 아스널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특이 취향을 가진 몇몇을 제외하고는, 세상 그 어떤 남자도 알몸에 세발자전거까지 탄 채 돌진하는 여자를 반기지는 않겠지.


"여기면 안전하겠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자 안도감이 밀려온다. 

십년..아니 백년은 감수한 것 같다.

긴장이 풀린 나는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한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흠..여기서 사령관의 냄새가 끊겼는데..?"


아스널은 섹스에 관해서는 그 어떤 바이오로이드보다 예민해진다는 것이였다.

네가 개냐! 아스널의 초인적인 능력에 경악한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렇게 여유부릴 시간도 없었다.

문이 덜컹거리며 열리려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손톱을 물어 뜯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방에는 물자가 가득 담긴 보급상자들만이 있을 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이대로 정기를 빨린 채, 마른 오징어처럼 변하게 되는 것이 내 운명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한 순간, 기적처럼 방 한켠에 놓여있던 커다란 금고가 눈에 들어왔다.


“...!”


금고는 성인 남성 두명 정도는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널찍해 보였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아스널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비상구가 되어버린 금고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2




금고 속으로 힘차게 뛰어 들어간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금고 속에 의외의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에밀리가 있는거야! 하는 경악도 잠시, 

흥얼거리는 듯한 아스널의 목소리를 들은 내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령관~ 어디있나~? 후후후...어서 빨리 전력 확충을 해야하지 않겠나~?”


끝이 길게 늘어져 더욱 음흉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끼릭거리는 세발 자전거 소리까지 더해지니 왠만한 공포게임 저리가라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최대한 숨을 죽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에밀리가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령관도 숨바꼭질 중인거야?”


"...."


에밀리의 한마디에 모든 것을 이해한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스널을 피해 금고로 들어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숨바꼭질을 한다고 이런곳에 숨는 엉뚱한 녀석이 어디 있담. 

하지만 일단은 숨어있어야 하니 대충 장단을 맞춰주는게 좋겠지?


"응..그러니까 에밀리도 조용히 해줄레? 들키면 곤란해지거든."


눈을 찡끗하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자 위 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는 에밀리는 

이런 상황만 아니였다면 당장에 달려가 마구 쓰다듬어 주고 싶어질 정도로 귀여웠다.

잠시 뒤, 아스널이 방 밖으로 나서는 소리를 들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작고 흰 손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사령관? 아직 숨는 중이야...문 열면..들켜."


"어어..? 이만큼 오래 숨어 있었으면 앞으로도 못 찾을 걸? 이 정도면 그냥 술래가 진거야."


"아, 그럼 에밀리가 이긴거야?"


"그럼 그럼."


물론 말도 안되는 규칙이지만 사령관인 내가 바득바득 우긴다면 인정 해주겠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권력 만세다. 후후.


나는 다시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에밀리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문을 열 수 없었다.


"어? 뭐야,이거 왜 안 열려."


당황한 내 목소리를 들은 에밀리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무리 손잡이를 밀고, 당겨봐도 금고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대부분의 금고는 안에서 열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



"거기 아무도 없어요?!! 문 좀 열어줘!!!"


나는 미친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열어줘..줘..줘..하는 공허한 메아리 뿐.

하긴 안드바리를 제외하고는 이 음침하고 구석진 보급창고까지 일부러 찾아오는 바이오로이드는 없겠지.


게다가 3일 밤낮을 꼬박 세고 너무도 피곤했던 탓에 방해하지 말라고 말해두었던 터라, 

앞으로 하루 정도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즉 못해도 24시간 정도는 이 춥고 갑갑한 금고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소리. 


"망했네…."


털썩 무릎을 끓은 내 옆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에밀리가 중얼거렸다.


"사령관..나 배고파."


"...."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

힘없는 에밀리의 말을 듣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평소에 저런 말을 들었더라면 당장 식당으로 달려가 함께 소완 특제 햄버거를 먹었을텐데…


노릇하게 구운 번에 육즙 많은 고기 패티, 살짝 녹은 치즈와 곁들여진 싱싱한 채소를 생각하니 입안에 침이 고인다.

물론 옴짝달싹 못하는 이 상황에서 그런 상상을 해봤자 더 비참해질 뿐이다.


"나도…."


"...."


내 침울한 표정을 본 에밀리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코트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뭐 숨겨둔 사탕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꽤 큰걸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사령관, 이거...먹어."


쭉 내민 손에는 초코바가 하나 들려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심코 그것을 받아들려다 멍한 에밀리의 얼굴을 보았다. 


"같이 나눠 먹자."


나는 씩 웃으며 초코바를 반으로 갈라 내밀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고개를 젓고는 손바닥으로 초코바를 밀어냈다. 

답지 않은 진지한 눈빛이었다.


"배고프면 힘 없어..아스널 대장이 사령관이 힘 없으면 곤란하다 했어..그러니까 사령관이 먹어.."


순간 에밀리의 말투가 장어를 권하는 소완의 그것과 겹쳐 보인 것은 비단 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아스널! 애한테 대체 뭘 가르친거야!

나는 왼쪽 입고리를 씰룩거리며 석고상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냐..이거 하나 먹는다고 힘이 팍팍 나는 것도 아니고..그냥 같이 나눠먹자."


"...정말?"


"그리고 난 에밀리가 먹는것만 봐도 힘이 나는걸?"


"...응, 알겠어."


그렇게까지 말하자 에밀리는 그제야 초코바를 받아들었다.


볼을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이 마치 작은 동물 같아 귀엽다. 

한동안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남은 초코바를 한입에 털어넣고 씹어 삼켰다.


하아, 그나저나 이제 어쩐담.

나는 문득 이 기묘한 감금이 더 길어질 것 같다는 알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4




"추워…"


나는 이를 딱딱거리며 제복자락을 여몄다. 

온기 하나 없는 금고 안은 그야말로 가슴이 콱 막혀오는 어둠과 냉기뿐이다.

게다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착실히 체온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자세도 바꾸고 겉옷을 벗어 엉덩이 밑에 깔아도 보았지만 몸이 떨려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에밀리 역시 늘 풀어해쳐져 있던 코트 자락을 꼭 여미고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으드드드..이래도 엄청 춥잖아!"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마구 비비다 울컥 짜증을 냈다. 

대체 누가 이러면 몸이 뜨거워 진다고 한거야! 

역시 마이티R의 말을 믿는게 아니었는데…

몸을 격하게 움직였더니 땀이 나서 그런지 더워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추워지기만 했다.

게다가 배까지 고파진다. 최악이다.


“에휴...”


힘이 빠져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나는 뱃속에서 처량하게 꼬르륵 소리가 들리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런 내 서글프고도 추한 행동을 지긋이 바라보던 에밀리가 코트 자락을 슬쩍 열고 손짓했다.


"사령관..이리로 들어와.."


"응?"


"붙어있으면 따듯하다 했어.."


"..."


뭐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 체온을 나누며 살아남았다는 내용은 멸망전의 기록에도 종종 나왔으니까.

그래도 역시 상대가 에밀리라는 것이 좀 걸린다.

배가 드러난 캐미솔과 내 속옷보다도 짧아 보이는 핫팬츠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자 에밀리가 순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추워..사령관, 나도 따뜻하게 해줘."


"그럼...조금만 실례할게."


이대로 금고에 갇혀 얼어죽은 얼간이 사령관으로 기록 될수는 없지.

나는 애써 그렇게 변명하며 조심조심 에밀리의 코트 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5



그리고 다섯시간이 지났다.


"...."


나는 멍한 눈동자로 금고 벽에 붙은 먼지의 갯수를 세고 있었다.

에밀리와 붙어있던 덕에 추위는 조금 가셨지만 몇시간 동안이나 가만히 앉아만 있었더니 죽을 맛이다.


게다가 조금만 방심하면 닿는 에밀리의 살결 탓에 완전히 편한 자세를 취할 수도 없었다. 

나는 몸을 조금씩 비틀며 최대한 체온을 잃지 않으면서도 에밀리와 꼭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한참을 부스럭거리며 열심히 자세를 잡던 그때, 에밀리의 품 속에서 무언가를 본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에밀리!!그거!"


"응..?"


"그..그 부저..!!"


왜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걸까? 

나는 후다닥 손을 뻗어 코트 안쪽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방범용 부저를 낚아챘다.

에밀리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이 부저는 나로부터 미성숙한 에밀리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콘스탄챠가 선물해준 것이다.

평소에 이걸 누르면 야차처럼 변한 콘스탄챠와 비스트 헌터, 그리고 시티가드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만 

지금은 이게 우리를 이 지긋지긋한 금고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열쇠였다.


제발 먹혀라!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부저의 버튼을 꾹 눌렀다. 


“어라..?”


꾹꾹


“....이거 원래 소리 나는 거 아냐..?”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번을 다시 눌러봐도 마찬가지다.

내 의도를 눈치챈 에밀리가 손을 뻗어 직접 부저를 눌러보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설마...고장은 아니겠지..? 하필 이 타이밍에?’


미치겠네, 하는 일마다 이렇게 꼬일수가 있는거야?

뭔가 강대한 악의가 전력을 다해 나를 괴롭히고 있는것 같은 불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투덜거려봐야 달라지는건 없겠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부저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실수로 내 손이 에밀리의 가슴을 스쳤다.


“...아.”


나는 당황해서 황급히 손을 치웠다. 

하지만 에밀리는 놀란듯 조금 웅얼거릴 뿐 딱히 불평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에밀리의 순진한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 보았다. 

순간 닥쳐오는 짜릿한 느낌에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몸을 조금 웅크린 채 물기어린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수백명의 바이오로이드들의 유혹을 견뎌온 내가 봐도 묘하게 자극적이다. 이건 그러니까….


“미치겠네…”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앞에 두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도 바보 같아서 난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내가 멍하게 굳어 있자 에밀리는 ‘사령관, 어디 아픈거야?’ 하고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켜

내 얼굴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가깝게 다가온 에밀리의 얼굴에 내 몸은 더욱 더 딱딱하게 굳어오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곱게 뻗은 속눈썹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걱정으로 상기된 분홍빛 뺨, 늘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뽀얀 살결은 금단의 과실처럼 나를 유혹하고 있었고...


‘아냐! 에밀리는 아직 어린애라고!’


신이시여, 제발 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아, 솔직히 신이라도 이 상황을 보면 ‘에이, 그냥 질러 버려’ 라고 말했을 것 같긴 한데 말이지.

나는 무럭무럭 자라나는 음흉한 생각들을 간신히 털어버리고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밀리? 조금 가까운 것 같은데..”


“가까우면 안되는거야?"


맙소사, 에밀리는 떨어지기는 커녕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욱 가까이 붙어왔고 달콤한 소녀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려온다.

...솔직히 이렇게 되면 나도 더 참기는 힘들다.

나는 묘한 흥분에 취해 배고픔도, 방금 전의 다짐도 잊고 그대로 에밀리를 와락 안고 그녀의 옷자락 속에 몸을 묻었다.


“사령관..?”


이번에는 갑자기 껴안아진 에밀리의 몸이 불편한 듯 굳어왔다.

콘스탄챠와 헌터의 과보호 아래 놓여 있던 그녀에겐 확실히 낮선 경험이겠지.

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천천히 에밀리의 뺨에 입을 맞췄다. 

결코 익숙치 않을 자극에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으나 거부감은 들지 않은 듯 분홍빛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급할건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시간은 많았으니까. 


이번엔 입술, 동의를 구하듯 입을 마주 대자 부드러운 입술이 어쩔줄 몰라하며 오물거린다. 

놓치지 않고 벌린 틈을 따라 톡톡 혀를 두드리자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곧 조그맣고 말랑한 혀가 어색하게 마주 핥아온다. 

다른 아이들처럼 능숙하게 혀를 얽어오진 못했지만 이게 더 에밀리다운 느낌이라 좋다.

짧고도 긴 입맞춤이 끝나자,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던 에밀리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령관..나...가슴이 두근거려...이상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천진한 말투다.

그 말에 습관처럼 에밀리를 눕히려던 나는 손을 멈췄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자 차가운 냉기를 품은 벽이 보인다. 

쇠냄새가 섞인 공기는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섞여 눅눅하고 끈적하다.

농담으로라도 로멘틱하다고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나를 믿는 아이의 처음을 빼앗는건 사령관으로써도 남자로써도 실격이다.


순간 민망해진 나는 픽 하고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 금고가 열리며 환한 빛이 쏟아져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싸늘한 얼굴의 시티가드들과 헌터의 얼굴이 보인다.


"...."


"...."


설마 이거 농담? 하지만 피부를 찌를듯한 경멸의 눈빛은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이였다.

억울하지만 이럴때 절대적으로 욕을 먹는 것은 내 쪽이다.

게다가 반쯤 풀린 눈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에밀리의 멍한 한마디가 결정타를 날렸다.


"사령관...이제...나..아기 생기는거야?"


"....잡아."


그러니까 억울하다니까 그러네!! 

나는 몸을 바동거리며 항변했지만 켈베로스들의 무자비한 손길에 잡혀 질질 끌려나갈 뿐이었다.


억울해! 사령관으로서 이런말 하긴 좀 그렇지만...

다음에 이런일이 일어난다면 절대로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꼭 그럴거다!



6



폭풍이 지나간 지 이틀이 흘렀다.

나는 바쁘게 펜을 굴리며 밀린 서류를 처리하는 중이였고 임시 부관으로 온 콘스탄챠는 너저분해진 사령관실을 바쁘게 쓸고 닦고 있었다.


"하아…피곤해."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찍은 나는 의자에 기대 축 늘어졌다.

어쩌다 생긴 휴일을 홀랑 날려버린데다가 장장 6시간에 걸친 교육(을 빙자한 잔소리)를 듣게 되는 바람에 밀린 일거리가 한가득 이었던 것이다.


"사령관...들어가도 되는거야?"


항상 에밀리가 나타나는 것은 예상치 못했을 때다.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문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에밀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부스스한 긴머리와 멍한 눈동자 모두 며칠전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에밀리!"


한동안은 못 볼줄 알았는데…

헌터도 없이 혼자서 사령관실로 온걸 보니 오해는 어느정도 풀린 것 같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에밀리를 끌어안으...려다가 콘스탄챠의 눈치를 보며 그대로 손을 내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쳇, 이래서야 누가 사령관이고 누가 바이오로이드인지 모르겠네.


"사령관..보고 싶어서 왔어."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은채 내 손길을 즐기고 있던 에밀리는 그렇게 말하며 엷게 웃었다. 


"응..나도 에밀리가 보고싶었어."


그러자 내 대답을 기다린듯 반짝 눈을 뜬 에밀리가 까치발을 들고 내 볼에 입술을 부딪혔다. 


"이거..헌터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한테 하라고 한거, 나..역시 사령관이 정말 좋은 것 같아…"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와 콘스탄챠를 보며 헤헤 웃는 에밀리는 여러가지 의미로 좀 더 성장한 모습이였다.

정말 애들이 자라는 속도는 방심할 수 없다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밀리의 입술이 닿은 자리를 멍한 얼굴로 쓰다듬었다.





쓴 이유



쓴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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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