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회고록(1)


나비의 회고록(2)


나비의 회고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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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가문의 위광과 이름을 숨기는 일이었사옵니다. 필시, 고통스러우셨을 것이옵니다. 나으리의 생명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기꺼히 내놓으신 마님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전쟁의 포화속에서 사그라드신 주인어르신. 그 두 분께서 하사하신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 그렇기에 나으리께서는 더더욱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셨지요.


소첩은 그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사옵니다. 오히려 더 중히 여겨야 한다고 여기었사옵니다. 이름이란 생명이 태어나 받는 첫 번째 선물. 나으리께서는 언제나 그리 말씀하셨사옵니다.


그 날 이후 소첩은 나으리를 ‘주인님’이 아닌 ‘나으리’로 부르기로 하였사옵니다. 본래의 존함(尊銜)을 주인님으로써 따랐으니 가명(假名)을 사용하실 적에는 나으리로써 따르겠다고. 이 소첩의 기고만장한 앙탈에도, 나으리께서는 웃어주셨사옵니다. 언제나처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지요.


소첩으로써는 일종의 선언이었사옵니다. 다른 이들에게 나으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명칭으로써 말이옵니다. 흔치 않으면서도 애정이 담긴 호칭. 혹자는 이러한 것을 애칭(愛稱)이라고도 하였지요. 지금 회상하자면 소첩은 참으로 간사한 결함품이었사옵니다. 소첩은 나으리에게 특별한 ‘나비’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사옵니다. 그럼에도 타인에게 이 관계를 명확히 각인시키기를 바랬지요. 어쩌면 나으리께서는 그런 오만방자한 생각들을 알고 계셨을지도 모를 일이옵니다.


허나 이름을 가리고 가문을 등지었다 한들,세한송백(歲寒松柏)같은 그 고고함은 잃지 않으셧사옵니다. 선비로써의 기품과 행하여야 하는 행동에는 결심이 보였사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낱 결함품인 소첩을 위하여 가문을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으셧겠지요.


낙목한천(落木寒天). 그 시린 풍파를 지나온 나비와 선비는 어느덧 봄을 지나 은은한 난화(蘭花)향이 피어오르는 계절 앞까지 오게 되었사옵니다. 예. 주인님. 그 동안 무엇을 하였냐고 물으신다면... 그저 다른 연모하는 이들과 다를 바 없었사옵니다. 이른 바 낙화유수(落花流水)라는 것이옵니다. 겨울 밤 유성우들을 세며 하룻밤을 지새기도 하였고, 소첩의 붉은 뺨과 같은 저녁 노을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시며 웃어주시곤 하였사옵니다. 시련과 풍파가 지나 새로운 생명이 싹틀 때에는 벚꽃 나무 아래서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지요.


때때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의 근간’이라는 명분 하에 다른 이들을 구제하시기도 하였사옵니다. 종종 그 손길에는 폭력과 비도덕이 묻어있었다는 것은 소첩의 가슴을 아리게 하였사옵니다. 일례(一例)로, 작은 고아원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무뢰배(無賴輩)의 수장과 담판을 짓기도 하였사옵니다. 물론 그들의 말로는... 주인님의 상상에 맡기는것도 좋겠지요.


후훗. 주인님. 괴리감과 의아함은 언제나 양립하는 것이옵니다. 의구심이 드는 것도 당연하옵니다. 지금까지 풀어온 나으리의 모습은 자애로우신 분이었사옵니다. 그렇기에 단편적인, 일면(一面)이지요. 허나 나으리께서는 그런분이셨사옵니다. 외유내강(外柔內剛). 예로부터 한국에는 이런 글귀 하나가 있었사옵니다. ‘지나가던 선비는 건드리지 마라’. 또한 선비들은 예로부터 사(射)에 능하였지요. 나으리 또한 마찬가지셨사옵니다. 그 대상이 총이라는 점이 상이할 뿐이옵니다.


주인님. 감히 소첩의 의견을 고하자면, 나으리와 가장 닮으신 분은 주인님이십니다. 외유내강과 저와 같은 결함품에게도 손을 내밀어주시었지요. 다른 자매들에게도 멸시 없는 시선과 걱정을 내비추시는 것도 그렇사옵니다. 부끄러워마시옵서서. 그저 결함품의 시선일 뿐이옵니다.


... 그럼에도 세상은 참으로 야속하였지요. 주인님. 낙화유수(落花流水)라 함은 남녀간의 정을 뜻하기도 하지만, 보잘 것 없이 쇠퇴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사옵니다. 봄의 꽃들은 시들어 땅에 살포시 몸 뉘이게 되지요. 몇몇은 강에 몸을 맡기어 시간처럼 흘러가옵니다. 소첩과 나으리. 나비와 난은 겨울이 오면 서로를 떠나야 하옵니다. 난은 겨울을 맞이하지 못하고 시들고 나비는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남(南)으로 날아가야 하옵니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뉘이고 흘러가는 꽃 같이. 나비가 제 몸 뉘일 곳을 찾아 떠나듯, 소첩은 나으리를 떠났지요. 주인님. 감정이라함은 자의로 자르게 되면 회한(悔恨)이 되옵니다. 하지만 타의로 찢겨지게 되면 그것은 원망이 되지요. 소첩이 그러하였사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첩과 나으리를 갈라놓은것은 가문도, 이름도 아니었사옵니다. 오히려 인간님들이었다면 세상에 미련없이 제 심장을 검집으로 삼았을 것이옵니다. 주인을 잃은 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사옵니까.


허나, 간악(奸惡)한 철충들에 의한 천재지변(天災地變)은 소첩의 모든 것을 앗아갔사옵니다. 타의에 의한 단절. 원하지 않았던 감정 모듈의 과부하. 그것이 소첩이었사옵니다.


주인님. 소첩을 지금까지 움직이게 만든 것은 원망이었사옵니다. 다시는 나으리의 존안(尊顔)을 뵙지 못한다는 상실감. 나으리의 품에서 연모의 감정을 속삭이지 못한다는 비탄(悲歎). 연모하를 이를 지키지 못하였다는 절망. 결함품으로 태어나 행복을 맛보았기에. 원망은 의심암귀처럼 몸뚱아리를 집어삼키어 검을 움직이게 하였사옵니다. 


그 날은 유독 감(感)이 좋지 않았사옵니다. 몸뚱아리를 흝는 간사한 뱀같이, 직감은 소첩의 등을 타고 흘렀사옵니다. 이 모든 것이 기우(杞憂)이길 바랬지요. 그저 나으리와의 행복에 젖어들어 감사할 줄 모르는 결함품의 투정이라고 바랬사옵니다. 허나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사옵니다. 안락에 잠긴 도구의 판단은 언제나 어긋나는 법이었사옵니다.


바다내음이 향긋히 불어오는 날이었사옵니다. 해는 중천에 떠올라 모든 이에게 감사를 바라듯 따스한 햇살을 내려주었사옵니다. 그때의 소첩은 나으리의 향이 은은히 맴도는 침소에 홀로 남아 연모하는 이를 기다렸지요. 지난 밤의 격정(激情)을 억누르기 힘들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였사옵니다. 허나 해가 서서히 기울어짐에도 나으리는 돌아오지 않으셨사옵니다. 본래 일언반구(一言半句)없이 소첩을 놓으시지 않으셨던 분이었기에 소첩의 감정 모듈은 더욱이 진정할 수 없었사옵니다.


하늘은 청명(淸明)하였지만 소첩의 마음은 낙화처럼 사그라들었사옵니다. 오죽하면, 때가 되었음이 분명함을 속으로 몇번이고 되뇌이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그런 잡스러운 상념(想念)들은 이윽고 사라지고 말았사옵니다.


주인님. 타인에 의한 감정의 변화는 격정적이옵니다. 울타리 너머로 세워지는, 소첩에게는 그 무엇보다 익숙한 몇 대의 차가 보였지요. 그 사이로 고고히 걷는 은발의 자매. 첫째 도련님의 수행원이 분명하였사옵니다. 인간님들께서 종종 사용하시는 ‘심장이 내려 앉는다.’라는 표현을 그 순간 느꼈사옵니다. 결함품이었지만 느껴지는 직감은 이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지요. 소첩은 본능적으로 박차고 나아가 자매를 막아섰사옵니다.


본능적으로 이 곳에 이들을 들이면 아니된다는 생각이 앞섰사옵니다. 나으리와 소첩의 보금자리를 다른 이들이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사옵니다. 연모하는 이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지요. 그리고... 지금 돌아간다면 영영 나으리를 뵈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기에. 이 모든것은 소첩의 이기심이었사옵니다.


본래라면 이들을 들이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맞았을 것이옵니다. 가문에서 나으리를 찾는 이유는 그 다음 생각해도 될 문제였지요. 허나, 소첩은 나으리와 동행하며 이기적이고 감정적으로 변하였사옵니다. 소첩의 감정 모듈에 따라 행하였고 나으리를 지키기 위하여 검을 뽑아드는 것을 당연스레 여기었사옵니다.


“리리스 언니.”


“둘 째 도련님께서는 어디 계시니?”


“나으리께서는... 돌아오시지 않으셨사옵니다. 헌데 어떻게 이곳을 아셨는지...”


“주인님께서는 취할 수 있기에 행동하신단다. 그리고 언제나 손에 쥐시는 분이고.”


“......”


“다시 물을게. 둘 째 도련님께서는 어디 계시니?”


“나으리께 이를 말씀이 있으시다면 소첩에게...”


순간적인 굉음이 일었사옵니다.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들어 튕겨내는 것이 고작인, 살의가 담긴 한 발이었사옵니다. 검은 일격(一擊)에 제 울음을 토해내었고 미처 흘려내지 못한 힘이 소첩의 손을 무감각하게 하였사옵니다. 만약 쳐내지 못하거나 검이  부러지기라도 하였다면 필시 소첩은 대지에 뉘여 청천(淸天)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옵니다.


“언니...?”


“급하단다. 시간이 없어.”


리리스 언니는 언제나 목적을 중시하였사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중요치 않게 여기셨지요. 그 날도 마찬가지였사옵니다. 나으리를 모셔야하는 언니와 그곳을 지켜야 하는 소첩. 허나 그 일격으로 소첩은 다시금 마음을 다 잡았사옵니다. 나으리께서 오시기 전까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함과 이 보금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목적은 명확해졌사옵니다.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래. 안주인 행세를 하면서 바둥대는 꼴이 안쓰럽구나.”


“소첩은 그저 나으리를 지키는... 나비일 뿐이어요.”


“그거나 그거나. 다를 바 없는건 매한가지. 그리고, 둘 째 도련님께서는 반드시 가셔야만 해.”


소첩은 그 말을 듣고 검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사옵니다.


“큰 어르신께서 독에 당하셨단다. 자식된 도리로써 가존(家尊)의 존안(尊顔)을 뵈야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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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이 글이 내가 쓰고싶은 글인지 의심이 가더라...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지... 다른 글감을 찾아서 써봐야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