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집


06-4


'그 말은 즉슨.. 직접 데려온 인물이니 사령관 각하가 직접 처리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정확해.'


로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처리'를 할 뿐이라면, 남 모르게 죽일 수 있었을텐데, 아니. 애초에 데리고오지 않아도 되는 문제였을텐데, 굳이 번거로운 방식을 선택한 사령관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굳이 번거로운 방식을 선택하셨습니까. 그저 제게 맡기시면, 순식간에 살해했을텐데요.'


'함선 내 바이오로이드들과 AGS들은 모두 '인간의 명령이 없는 한' 인간을 직접 죽일 수 없단다. 그저 그 이유때문에, 그런 번거로운 방식을 선택한거지. 그렇게 했다가는 정말로 오르카 호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단다.


로크는 그 말을 듣고, 드디어 전 사령관이 왜 이런 계획을 꾸몄는지, 드디어 이해했다.


17


마리를 포함한 전 스틸라인 대원들은, 로크가 떠난 후 모두 얼어붙어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전 사령관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흔 앞에, 침묵을 지키며 한참을 서있었다. 그리고, 점점 주저앉기 시작했다. 처음 주저앉은 바이오로이드는 브라우니였다. 그 뒤를 따라, 점점 더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피닉스, 레프리콘, 노움, 레드후드, 실키. 그들이 모두 주저앉아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볼때, 마리 또한 주저앉았다. 그리고, 브라우니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


브라우니의 눈 뿐만이 아닌, 이 자리의 모든 이의 눈에, 눈물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왜 눈물이 맺혀있었을까? 

자신들이 오늘도 살아남았단 것에 대한 안도의 눈물이였을까? 아니면, 죽지 못했음에 대한 원통함의 눈물일까.


바이오로이드들은 자기 자신을 해하지 못한다. 그게 여태 그 끔찍한 지옥을 겪으면서, 자살이란 선택을 하지 못하게 제동을 걸었고, 그렇다고 오르카에서 탈출하기엔, 그 인간이 우릴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타살 뿐이였으나,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인간의 명령이 없는 한, 바이오로이드끼리의 팀킬은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을 죽이거나 할 수 있는 경우는, 인간의 명령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바이오로이드들은 그 인간의 명령을 가장 효율적으로 내리는 자를 한차례 버렸다. 아니, AGS를 포함한 오르카 호가 사령관을 버렸다. 그 책임은, 다름아닌 불굴의 마리 자신에게 있었다. 그리고, 마리의 눈 앞엔 따뜻하디 따뜻했던 전 사령관의 묘가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자.."


마리는, 이미 정갈하게 수습되어있는 무덤을 보고 나지막이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 사령관의 시신을 수습하려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리는 그의 장례를 치룰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됨은 갖추고 싶었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했다.

마리는 맨손으로 땅을 파헤치고, 파헤치고, 점점 더 거칠게 파헤쳤다. 그걸 보는 레드후드와 노움들은 마리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땅을 파는데 집중했다. 그러다..


"윽!"


너무 깊게 판 나머지, 뼈에 손가락을 박았다. 중지손톱이 빠져버렸다. 마리는 땅을 다시 파, 뼈를 꺼내려 했다. 그러자 부대원들이 황급히 마리를 제지했다.


"놔라! 놔! 사령관 각하의 시신을..시신을 수습해야한단 말이다!"


마리는 울부짖으며 자신이 파던 땅을 보았다. 허나,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령관이 묻힌 무덤이라 생각했던 땅은, 그저 평평한 땅이였고, 뼈라 생각했던 것은, 그저 평범한 돌에 지나지 않았다.


"하..하하.."


그리고, 절규가 울려퍼졌다.


18


"......"


로크는, 다시 철남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볼 일은 모두 해결했다. 석양은 이미 졌고, 밤하늘엔 달 하나와 별들이 휘황찬란하게 빛날 뿐이였다.로크는 밤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령관 각하의 진정한 목적은 과연 무엇이며, 저 은하수와도 같이 빛나는 사령관 각하의 용안으로 무엇을 보셨으며, 사령관 각하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계셨을까. 로크는 철남과 반년 넘게 지내왔으나, 아직 진정한 속내를 몰랐다. 계획이 정말로 그것 뿐일까?


그리 생각하며 철남이 있는 새로운 벙커에 도달하자, 로크는 착륙해 들어갔다.


"어서와. 날 찾아온 부대는 누구였어?"


"스틸라인 부대였습니다. 그 역겨운 불굴의 마리 4호도 있더군요."


"반응은?"


철남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로크를 바라보았다. 로크의 성격 상, 필시 어떤 말을 하고 왔을테니까. 로크는, 그 눈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그냥.. 별거 없었습니다. 철남님이 죽은 줄 알고 단체로 울고있더군요. 어미 잃은 양이였습니다. 그저, 도축당할 때를 기다리는.. 양. 제가 공격할 것 처럼 태도를 취했어도, 꼼짝하지 않더군요. 말 그대로 우매한 양떼였습니다."


"오호. 그렇다면.. 며칠 내로 용과 통신을 해야겠어."


철남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용이 무전을 걸어왔다. 무전 너머로 호라이즌 대원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소?! 그대, 죽은 건 아니오?!"


용이 평정을 잃은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워하는 철남은, 그대로 무전으로 현재 아주 잘 살아있단 걸 전했다.


"응, 난 괜찮아. 오르카 호 상황은 어때?"


"하아.. 다행이오.. 정말, 다행이오.... 만일 죽었다면 난.. 난..."


"미안, 벙커를 버렸단 사실을 말했어야했는데.. 걱정시켜서 미안해."


되돌아온 목소리는 세이렌의 목소리였다.


"사령관님? 함장님이 지금 무전을 받으실 수 없게 되셔서.. 제가 대신 답할께요. 현재 오르카 호 상황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에요. 모두 사령관님이 죽으신 줄 알고, 절망에 빠진 채 철충들의 본진에 돌격하며 하나 둘 죽어가요."


""!""


로크와 사령관은, 이 소릴 듣자마자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두 내가 죽은줄 알고 절망한 채로 자살에 가까운 자기희생으로 하나 둘 죽어가고 있었다. . 몸이던 마음이던 가장 지쳐있을 때, 한마디로 말해, 최적의 타이밍이다.



"좋아, 아직 그쪽 사령관이 신체를 바꾸진 않았지?"


"네. 아직 그 인간님은 신체를 바꾸시지 않으셨어요."


"그럼, 내일 신체를 바꾸라고 배틀메이드에게 말해봐. 그러면서 사령관한테 거울 비춰주고."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럼.. 곧 돌아오시는거죠?"


"당연하지. 돌아가면 여태 못해준만큼 잔뜩 안아줄테니 기대하고 있어. 이제 끊는다."


"네!! 꼭 기대하고 있을게요!"


세이렌은 행복한 목소리로 무전을 끊었다.


"이제 곧 오르카 호로 돌아가실 때가 되셨군요, 사령관 각하."


로크 또한, 이 날을 기다려왔단 듯이 말했다. 호칭도 사령관으로 돌아갔다.


"그래. 때는 몸을 바꾸고 난 직후 3일이야."


사령관은 아직도 몸을 바꾸고 난 뒤 3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펄펄 끓는 고열에 시달리며 정신을 잃고 차리고를 반복하는 끔찍한 경험을, 잊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인간의 몸일때보다,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몸으로 바꾼 직후가 더 힘들었었다. 바로 그 때를 노린다면 작전은 성공한다.


"생각해보니.. 사령관 각하, 아르망이라는 암컷 바이오로이드는 각하를 배신했었습니다. 그녀의 능력은 미래예지 수준의 예측능력이온데.. 그녀는 이것도 예측했을까요?"


"애초에 이런 걸 예측했다면 멍청하게 오르카의 사령관한테 붙지 않았겠지."


"아."


19


마리의 복귀 이후, 오르카 호는 정말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그나마 있던 희망조차 한줌 재가 되버린 상황, 모든게 나아지리란 희망은 크나큰 절망으로 바뀌어버렸고, 모든 지휘관기들은 그대로 졸도해버렸다.


바이오로이드들이 여태 인간처럼 대우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전 사령관 덕이였다. 그러나, 이젠 사령관에 의해 강제적으로 도구로서 삶을 살아가자, 자신이 인격체란 생각은 점점 머릿속으로 사라져만 갔다. 그러자, 마치 인간처럼 서로 회의를 통해 전 사령관을 축출해냈던 때와 달리, 마치 도구처럼 휘둘리기만 했다.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이제 수복실은 휑했다. 바이오로이드들은 전투에 나가면 부상이 아니라 죽어서 치료조차 못했으니까. 다프네는 점점 대체되어가는 자매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제는 큰언니인 레아와 리제가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 오베로니아 레아가 대체했다. 레아 언니가 죽고, 오베로니아 레아가, 리제 언니가 시저스 리제로 대체되었다. 


다프네는 자매들과 나누었던 추억을 기억한다. 하지만, 나눌 수 없는 추억은 추억으로서의 의미를 잃어만 갔다. 다프네는 이제 소중한 자매들도, 사랑하는 사람도, 자매들과의 추억조차, 모든 걸 잊고 살아갈 이유조차 잊어버렸다. 그렇다고 죽으려 하면 자해를 할 수 없게끔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 자체의 기능에 가로막힌다. 더이상 살 이유가 없는데, 없는데, 죽을 방법이 도저히 없어서, 다프네는 억지로 살게 되었다. 다른 비전투요원들도 다를 게 없었다. 소완은 애초에 단신으로 함선에 올라타, 전 사령관만을 보고 지금까지 살아왔었다. 


그의 행복을 위해, 다른 자매들의 요리를 가르치고, 

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가치관도 변화시키고, 

그의 행복을 위해, 그의 행복을 위해...

그와 만나기 위해, 요리를 해왔다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눈을 돌린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잠시 눈을 돌려서 사령관을 바라보았으나, 그 잠시 사이에 전 사령관은 없어지고, 그 자리엔 괴물이 들어차있었다.


매일같이 사령관에 의해 전장에 나가 죽기 직전이 되면, 사령관에 의해 강간당하고, 그대로 버려지거나 죽어서 다시 제조되어, 계속해서 이 순환이 반복되어갔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죽여버리는 때도 있었다. 어차피 도구니까, 다시 만들면 되니까란 생각으로 그랬을 것이다. 허나, 이젠 다시 만들 자원조차 동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키나한테 제발 자신을 가상세계에 넣어달라 애원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생겼다. 하지만 마키나의 답은 언제나 같았다.


"전.. 예전 사령관님과 메리를 따라 이곳 오르카호에 탑승한 거예요. 그걸 위해 제 가상현실 장치조차 다 버린지 오래랍니다. 그런데 그 사령관님을 축출해버리시곤.. 새로운 사령관을 데려와놓고서, 당신들이 그 지옥을 만들어놓고서...! 대체 왜! 왜그러셨어요!! 대체! 왜.. 이제와서 후회하시는 거예요? 그래놓고서 한다는 말이.. 가상현실을 다시 세워달라? 하! 있어도 안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지 말임다! 그저 마리님이 하신 짓인데 왜 저희까지 피해를 봐야하지 말입니다!"


마키나는, 아예 상관을 욕하며 남탓을 하는 브라우니를 보고, 하고싶은 말들을 한마디로 일축하며 방을 나갔다.


"그래요,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죠. 아무것도."


마키나도 사실은 알고있었다. 자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선 내 분위기를 잘 못읽었다 변명해도, 추잡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단 것도 잘 알고있었다.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말한 것들은 자기 자신에게 한 말과도 같았다. 그 사실을 알고, 마키나는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만


다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