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으로 분리하려다가 그냥 한편으로 올립니다 혹시 두 편이 좋으면 덧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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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유일한 인간 남성 - 사령관은 T-14 미호 1호의 고운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 주었다. 동시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미호는 감격으로 벅찬 나머지 사령관을 힘있게 끌어안고 웃었다. 미호의 자매나 마찬가지인 몽구스 팀 대원들과 간부급 대원들도 모두 그런 미호를 축하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날씨가 유달리 좋은 그날, 수면 위로 부상한 오르카호에서 미호의 서약식이 치러지고 있는 것이다.


사령관은 이날 미호에게 반지를 주며 아내로 맞이한다고 약속했다. 그뿐만 아니라 '구미호'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주었다.


구미호는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비록 결혼식이 아닌 서약식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쓰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서약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의식이었다. 그것이 사령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이오로이드로서 양산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인정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아직까지는 신경 제어 칩이 제거되지 않아서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약을 받은 이상 미호 - 아니, 구미호는 이제 일반 대원들과는 한층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자매처럼 여기던 몽구스 팀 바이오로이드는 물론 다른 동일한 T-14 미호 개체들과도 다른 존재가 되었다. 더욱이 사령관의 아내 중 하나가 됨으로서, 비공식적인 서열도 지휘관 바이오로이드들과 비슷해진 셈이었다. 하급 대원에 가까운 T-14 미호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것은 분명한 출세였다.


공식적으로 오르카호에는 뚜렷한 서열이 없었다. 사령관이 구인류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서열을 나누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이오로이드들은 '계급 짓지 말라'는 명령을 우회하면서까지 암암리에 서열을 만들어냈다. 복제인간인 만큼 인간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랑해, 미호야."


"알아. 헤헷."


사령관과의 기념할 만한 허니문(구미호 입장에서)을 보내며, 구미호는 이제 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약으로 단번에 상위 카스트가 된 구미호에게는 여러 특전이 주어졌다. 보급과 배식에 우선권이 주어진다던가, 편의시설을 먼저 이용한다던가, 사령관을 쉽게 만날 수 있다던가.


봉급처럼 받는 참치캔도, 사령관의 호의 덕분에 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아졌다. 구미호는 이전보다도 생활의 질이 좋아졌다.


"미호- 아니지, 구미호 양. 오늘 저희랑 같이 점심 먹지 않을래요?" 이때껏 그다지 접점이 없었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몇몇 대원들이 구미호를 찾아와서 친해지려고 했다.


"아, 오늘은 자매들이랑 같이 먹기로 했는데……."


"에이. 평소에도 매번 몽구스 팀원분들하고 드시잖아요. 오늘은 저희랑 같이 들어요."


구미호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녀들을 따라갔다. 배식담당 메이드 대원들도 구미호를 알아 보고 맛있는 반찬을 좀 더 챙겨 주었다.


"저기, 친구들한테도 좀 줄래?"


따라온 발할라 대원 몇몇도 구미호 덕분에 좀 더 풍부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발할라 대원들은 식사 자리에서 구미호를 칭찬하고 부러움을 표하기에 바빴다.


"구미호 언니는 좋겠어요. 초콜릿도 카카오버터 있는 걸로 받고. 전 준초콜릿만 받는데."


알비스 4호가 손가락을 빨며 말했다. 그러자 베라 9호가 핀잔을 주었다.


"얘는. 그야 구미호 양은 사령관님의 부인이니까 그만큼 더 받는 거지. 이제 잘하면 인간 님이 될지도 모른다고."


기분이 좋아진 구미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인간은 무슨…… 앞으로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 해. 초콜릿 정도야 구해줄 수 있으니까."


"앗. 정말요?"


"알비스! 실례 저지르면 안된다고 했잖아."


"뭘 그런 걸 가지고. 베라도 가지고 싶은 거 있어? 마침 열쇠고리 받은 게 있는데."


발할라 대원들은 고마워 하면서 그날부터 구미호의 주변에 서성였다. 이 모양으로, 구미호의 주변에는 하나둘씩 추종하는 대원이 생겨났다.


"구미호- 오늘 우리랑 노래방 어때요?"


하루는 샬럿이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샬럿은 상당한 고위급 간부였으므로, 구미호는 살짝 당황했다. 평소 같았다면 그다지 아는 체도 하지 않았을 텐데. 한편으로 그녀는 간부가 자신을 알아준다는 생각에 감동했다.


"아. 오늘은 탐사 당번이라."


구미호가 주저하자 샬럿의 곁에 있던 다른 대원이 대뜸 말했다.


"당번 같은 건 다른 애들한테 넘겨요. 미호 언니가 이제 그런 거 나갈 짬이에요?"


"하지만……."


성실한 구미호는 망설이는 빛을 띠었다.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작업을 빠져 본 적이 없었다.


"아이 참, 괜찮잖아요. 하루 정도 넘기는 거 정도."


고급 대원들의 권유를 거듭 받은 구미호는 전에 없이 땡땡이를 결심하고, 마침 시간이 비어 있던 불가사리에게 탐사를 부탁했다.


"탐사? ……뭐. 어차피 나도 만화나 볼 생각이었지만……."


불가사리는 떨떠름해 하면서도 구미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에 구미호가 희희낙낙하며 숙소를 나가는데, 문득 불가사리의 말이 들렸다.


"참, 그런데 너 요즘 바쁜 것 같다?"


"응, 뭐. 새로 사귄 친구들이 많아져서."


"……그래. 그래도 임무 너무 빠지지 말라고."


구미호는 본래 친구가 많지 않은 타입이었다. 하지만 서약 이후로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몽구스 팀 대원들과 보내는 시간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뭐든지 처음 한번이 어려운 법이었다. 그날 후로 구미호는 점차 과업을 땡땡이치는 일이 잦아졌다. 오르카호 대원들의 과업은 주로 사령관의 명령을 직접 받는 게 아니라, 권한이 있는 지휘관들이 짜 놓은 계획을 수행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명령에 거역하지 못하는 바이오로이드라도 계기가 있다면 언제든지 태만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새 친구들도 구미호를 만나기만 하면 치켜 세우거나 눈에 들려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구미호를 통해 사령관에게 접근하거나, 떡고물이라도 얻어 먹기 위해서였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전에 없이 자신감이 붙은 구미호는 여러 차례 사령관한테 불쑥 찾아가기도 했다.


"안녕, 페더. 사령관 안에 있지?"


"아. 오늘은 언니하고 보내시는 날이라……."


"그 여자? 쳇…… 알았어. 나중에 내가 보잔다고 전해 줘."


"예."


구미호는 다소 거만한 태도로 스노우 페더에게서 멀어졌다.


블랙 리리스 직속의 스노우 페더는 원래대로라면 T-14미호가 쉽게 말을 놓을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일반 대원이 사령관을 만나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했다.


단지 구미호의 경우는 서약자이므로 마음 놓고 만나러 온 것이었다. 처음에 그러한 관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구미호가 막무가내로 사령관을 보려고 하자, 당시 경호하던 포이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허락했다. 포이 등도 암암리에 하는 일이라 막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구미호는 자신의 특권을 마음껏 활용하게 되었다.


그러한 특전들과 친구들의 아부를 받으며 구미호는 점차 변해갔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몽구스 팀을 지휘하는 홍련이 구미호를 불러 질책했다.


"미호.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탐사나 청소 같은 걸 죄다 자매들한테 떠맡기다니. 게다가 보급품도 부당하게 챙겼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어요."


"옛?"


구미호는 뜨끔하니 놀랐다. 홍련은 구미호를 포함한 몽구스 팀 대원들에게 엄마라는 호칭으로 통하는 리더였다. 그녀에게 혼나는 건 구미호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전에는 안 그러더니 도대체 뭐예요? 요즘 매번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느라 훈련도 불성실하고."


"미안. 그치만 그건……."


"언제부터 미호가 변명을 했죠?"


구미호는 전부터 솔선수범하고 자매를 잘 챙기는 홍련을 존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껏 높아진 자존심은, 계속되는 질책을 견디지 못하게 했다.


홍련은 혼나는 구미호의 표정이 점차 썩어 들어가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예전에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잘못했다고 확실히 반성하는 아이였는데.


"할 말 있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 제가 지금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요."


"…….."


홍련은 구미호를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서약을 받고 즐거운 건 이해해요. 하지만 그럴수록 타의 모범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안 그래요?"


타이르듯이 하는 말이었지만, 구미호는 서약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이유도 모르게 내심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홍련은 구미호의 심경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혼냈다.


"혹시라도 사령관님이 미호를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기껏 서약도 해 줬……."


순간 구미호의 입이 조그맣게 열렸다. "짜증나."


"……뭐라고?"


구미호는 내심 아차 싶었지만, 이왕지사 내뱉은 말을 담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되려 억울한 듯이 홍련을 쏘아보더니,


"아무 말도 안 했어."


하고 홍련의 작전실을 나가 버렸다.


홍련은 어안이 벙벙해서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편 작전실 바깥에는 구미호의 자매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녀들도 구미호가 한껏 화난 표정으로 문을 박차고 나오자 당황했다.


"야, 미호. 어떻게 된……."


불가사리가 무심코 어깨를 짚으려고 하자 구미호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툭 쳐냈다.


"시끄러, 니들이 무슨 상관이야?"


"뭐?"


몽구스 팀 자매들은 아연해서 구미호를 바라보았다. 구미호는 이를 갈며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작전실에서 멀어지자 구미호는 자신이 너무 심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모르게 화가 나서 점점 미안하다는 생각이 사그라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그까짓 거, 간부들도 잡일 따위는 하지 않는데. 나는 서약까지 받은 몸이라고. ……그렇다, 서약. 서약을 받은 내가 왜 일개 하급 지휘관의 명령에 계속 따라야 하는가. 친구들도 나는 지휘관급 간부나 마찬가지라고들 하지 않았던가?


화가 나서 걸어가는 구미호를 보고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구미호가 뿌리는 보급품을 받거나 사령관에게 소개시켜 주는 대가로 친해진 그녀들을 보자 구미호는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옛날 하급 대원이었을 때 애들하고 굳이 어울릴 필요 있어? 사령관한테 말해서 나도 경호실이나 친위대 같은 곳에 넣어 달라고 할 거야.


그리하여 며칠 뒤 전입 신청을 받은 사령관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미호가 몽구스 팀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사령관이 물었다.


"미호야. 뭔 일 있었어? 왜 갑자기 몽구스를 나가고 싶단 거야."


"그냥…… 나도 이제 서약자이기도 하고, 좀 더 많은 일을 해 보고 싶어서."


원칙적으로 부대 배치를 결정하는 것은 사령관의 권한이었다. 하려면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령관은 어쩐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요즘 구미호가 몽구스 팀원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과업을 소홀히 한다는 첩보를 받은 참이었던 것이다.


사령관은 일단 알았다는 말로 구미호를 돌려 보낸 다음, 생각 끝에 홍련을 불러들였다. 그녀라면 구미호의 상태를 잘 알 거라는 생각이었다.


"혹시 요즘 미호한테 무슨 일이 있는가 해서 불렀는데. 뭐 좀 아는 바라도 있어?"


질문을 받은 홍련은 망설이던 끝에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서약 이후 변모했다는 구미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령관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오로지 호의와 선의로 서약을 해 주었는데, 서약 때문에 구미호가 이상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더럭 겁도 났다. 고민을 거듭하던 사령관은 결국 구미호와 다시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 날을 잡아서 그녀와의 상담 시간을 만들었다.


"웬일이야 사령관? 사령관이 먼저 나랑 데이트 하자고 그러게."


"하하…… 할 이야기가 있어서."


"할 이야기? 으음. 애 낳는 거면 아직 무리같은데…… 히힛."


사령관은 사실 데이트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니었지만, 구미호는 멋대로 데이트라고 인식한 모양이었다.


사령관은 구미호의 기분을 잠깐 맞춰 준 다음 말을 꺼냈다.


"저기, 미호야. 너 요즘 친구들하고 싸운 적 있니."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구미호는 싱글벙글하던 표정을 돌연 찌푸렸다.


"친구들하고 싸우기는. 애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누가 그딴 소리를 해?"


돌변한 어조에 사령관이 당황했다.


"듣자하니…… 몽구스 팀 자매들하고 좀 멀어졌단 이야기도 있고."


"아, 그 애들? 신경쓰지 마. 요즘은 다른 친구들 많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다들 자매들 아니야?"


구미호가 홧김에 말했다. "자매는 무슨. 내가 왜 그런 애들하고 동급이야. 안 그래도 나도 이젠 그룹을 바꾸고 싶어서 사령관한테 부대 변경 이야기도 꺼낸 건데."


사령관은 아연실색해서 구미호를 쳐다보았다. 그가 알던 구미호는 친구들을 까내리고 허영심에 찬 아이가 아니었다.


"……미호야. 네가 홍련한테 대들었단 것도 사실이야?"


"작전관이 그렇게 말했어?"


홍련 이야기가 나오자 구미호는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늘상 엄마라고 부르던 홍련도 이제는 작전관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뒤로도 말을 나눴지만, 구미호는 삐져서 제대로 대답하지 않거나 따지기까지 했다.


이에 사령관도 화가 나서 가만히 구미호를 보고 있다가 벨을 눌렀다.


방 바깥에서 경계 중이던 블랙 리리스가 인기척도 내지 않고 들어왔다.


"리리스. 미호가 이만 가겠대."


입을 내밀던 미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사령관. 오늘 데이트는 어쩌고."


"상담은 이걸로 끝이야." 사령관이 냉담하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리리스는 곧바로 구미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호는 어깨에 올린 손을 떼며 따졌다.


"잠깐만, 사령관. 혹시 작전관이 날 험담한 거야? 그래서 오늘 이렇게……."


리리스가 말을 잘랐다. "나가시지요. T-14 미호 양?"


고유한 이름이 아닌 바이오로이드로서 코드명을 말하자 구미호가 발끈했다. 그러나 상대는 서약자일 뿐만 아니라 정신이 해방된 대원이었다. 자유 사고를 지닌 극소수의 개체이므로, 다른 대원들과 달리 수틀리면 구미호를 정말로 죽일 수도 있었다. 구미호는 하는 수 없이 리리스를 따라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부터 구미호에겐 전선 파견 임무가 주어졌다. 그녀는 크게 실망하고 화가 났다. 친위대는커녕 사실상의 좌천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서약 이전에는 자주 나가던 일이었고, 그녀는 특별한 장교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서약으로 콧대가 높아진 구미호에겐 자신이 전장에 나가는 것도 징계 - 어쩌면 홍련이 꾸민 짓일지도 모른다 - 라는 생각에 화가 날 뿐이었다.


작전 중에 다른 몽구스 팀 대원들은 실망 반 냉담 반으로 구미호를 보며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구미호가 서약 뒤부터 사람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구미호는 예전에는 기꺼이 어울리던 불가사리와 핀토를 업신여기기도 하고, 스틸 드라코를 멍청하다고 다른 친구들 앞에서 험담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마음 착한 드라코는 구미호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다른 자매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따돌림까지 받자 더욱 화가 났다. 구미호는 상담한 날부터 홍련을 원망과 증오의 눈으로 보았다. 저 여자가 날 골탕 먹이려고 사령관에게 충동질을 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사령관이 날 이렇게 내칠 리가 없잖아. 서약까지 한 나를.


홍련은 구미호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계속 걸어왔지만, 구미호는 차갑게 내뱉기 일쑤였다. 이 같은 일이 며칠이나 계속되자 홍련도 마침내 사무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구미호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원래 친한 친구들과도 멀어지다 보니 점차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스트레스는 곧 태도에 반영되어, 구미호의 곁에 모였던 새 친구들과도 부딪히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러자 이득을 보고 모여든 새 친구들은 점차 떠나갔다.


이 모양이니 사령관과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걸었다. 구미호는 전에 없이 질투를 하거나 사령관을 속박하려 들었다.


둘의 다툼이 잦아지고, 급기야는 사령관과 서약한 다른 대원들과도 부딪히는 일이 생겨났다.


주변과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 때문에 주변과 멀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러자 사령관도 구미호에 대한 마음이 식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사령관은 구미호를 잘 찾지도 부르지도 않게 되었다. 눈썰미 좋은 대원들한테 이 같은 태도 변화가 감지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구미호가 냉대받는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서약으로 올라간 구미호의 카스트는 차츰 내리막길을 걸었다. 덕분에 구미호가 음으로 양으로 받던 특전들은 점점 사라졌다. 그것을 노리고 남아 있던 대원들도 모조리 떠나버렸다.


이러자 구미호에게는 예전보다도 긴 파견근무나 어려운 전장이 맡겨지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서약한 대원들이 사령관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이를 갈고 질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홍련이 사령관과 새로 서약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외톨이가 되어 있던 구미호는 그때서야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이 모든 일은 작전관 - 홍련이 날 질투해서 모함하고, 따돌림을 조장한 탓이다. 그래서 모두가 날 미워하게 된 거야.


문제의 근원을 알았다고 생각하자 할 일이 명쾌해졌다. 구미호는 그날부터 태도를 바꾸었다. 전에 무시한 몽구스 팀 대원들에게 울며 용서를 빌고, 홍련에게도 죄를 청했다. 서약한 뒤로 무례하게 대했던 다른 대원들에게도 하나하나 찾아가서 사과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탐사나 청소 등의 과업도 전에 없이 성실히 해내었다.


착한 드라코는 미호의 사과를 곧바로 받아들이고 이전처럼 지내 주었다. "미호- 게임할래? 탐사에서 겐신 이펙트 게임팩 주웠는데."


"그래. 같이 하자."


다른 몽구스 팀 자매나 대원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믿지 않았다. 그러나 미호가 계속 뉘우치는 빛으로 대하자, 점차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개중에서도 홍련은 미호의 변화를 가장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미호가 울면서 사과하는 말에 괘씸하던 감정을 모조리 털어버리고 안아 주었다.


사령관도 그러한 미호의 변화를 전해 들었다. 연이어 올라오는 첩보를 받자 그 또한 미호가 제대로 반성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사령관도 점차 구미호에 대한 화가 풀려서, 내근직이나 가벼운 임무를 맡기게 되었다. 곧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듯해 보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홍련은 미호를 포함한 팀원들을 이끌고 작전에 나갔다. 며칠 뒤가 자신의 서약식인데도 불구하고 홍련은 일을 쉬지 않는 것이었다.


구미호와 홍련의 사이가 최악이었을 때에는 한 팀으로 배치되지 않았는데, 구미호가 최근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판단으로 사령관은 둘을 같은 팀으로 편성했다. 구미호는 원래 보직인 저격수 역할을 맡았다. 어쩐지 요즘 어느 때보다도 사근사근한 태도였다.


이날도 몽구스 팀은 홍련의 작전에 따라 적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섬멸은 다른 부대가 맡아서 할 것이다. 고지대에 숨은 구미호의 엄호 저격 가운데 팀원들은 착실히 적을 유인해 나갔다. 이대로라면 오늘 임무도 성공리에 끝나겠지. 홍련은 작전 지역에서 직접 진두 지휘를 하면서도 다소 안심하였다.


어느 순간 홍련의 시야에 저격형 철충 한 대가 이쪽을 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홍련은 다급히 숨으며 구미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바로 다음 찰나에 철충의 저격이 엄폐물을 쏘아맞혔다. 뒤이어 구미호의 총이 철충을 꿰뚫고 정지시켰다. 저격병이 파괴되자 홍련은 다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구미호를 칭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총알이 날아와 홍련을 꿰뚫었다. 홍련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웬지 모르게 누가 쏘았는지 알 것 같았다.


- 미호, 이러면 안 되요…….


작전은 중지되었다.


미호의 개인적인 작전은 성공했다. 모든 일의 원흉인 홍련을 제거한 것이다. 그동안의 가면을 벗어던진 구미호는 이제 홍련이 없으니 사령관과 친구들의 애정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득의양양했다.


그녀는 숨어 있던 저격형 철충이 홍련을 쏘았다고 주장했지만, 얼마 안 가서 그녀의 수작임이 들통나 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탄약은 비슷해도 피격 각도를 조사하면 금방 들킬 일이었던 것이다.


빠른 속도로 군사 재판이 열렸다. 다행히도 홍련은 중상을 입었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벌어진 명백한 동료 살해 기도는 오르카호 내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은 보통 같은 편끼리 싸우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죄질은 둘째치고 구미호가 어떻게 동료 살인 행위가 가능했는지 연구진들의 관심을 끌었다.


어쩌면 망설임이 있어서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한다 - 라고, 홍련은 다친 몸을 이끌고 구미호를 변호했지만, 그 변호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몽구스 팀 자매들은 물론이거니와 사령관 본인의 처벌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사령관의 의지가 처벌을 결정하는 재판에서, 형식적인 지휘관들의 성토가 이어지고, 곧이어 사령관의 판결문이 내려졌다.


- 구미호 대원은 전투 모듈을 분리하고 요안나의 후방 기지에 배치한다. 또한, 해당 대원에게 내려진 모든 서약을 파기한다. 그녀의 서약은 복구 이전까지 무효이며, 이름 또한 T-14 미호로 되돌리도록 한다. 이 조치는 총사령관의 임의로 복구할 수 있다. -


전투 모듈을 제거한다는 것은 사령관에게서 멀어지는, 확실한 후방 기지로의 좌천이었다. 구미호 -, 아니, 서약을 받았던 T-14 미호는 판결을 받자 발광할 듯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날뛰었다. 덕분에 CS페로가 수면주사로 잠재워버려야 했다.


이 사건으로 오르카호에는 얼마간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홍련은 서약도 고사했다. 적어도, 구미호가 돌아와서 화해할 때까지는 서약을 받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사령관은 안타까웠지만 그녀의 결심을 말리지 못했다.


서약이 미호를 타락시켰을까?


사령관은 은밀히 조사한 결과 바이오로이드끼리 드러나지 않는 카스트 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같은 것들을 명령으로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그의 뜻을 들은 라비아타가 말했다.


"주인님. 저희는 주인님 같은 인류와 비슷한 사고를 하는 존재예요."


"알지. 아니까 비슷한 짓을 하는 거겠지. 그래서 난 더욱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거야. 내가 이번에 화가 난 것도 그 때문이고."


"하지만, 주인님이 명령하신다고 과연 아이들이 본성을 억누를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이름으로 계속될 거라고 생각해요. ……주인님의 총애로 인한 불상사라면요."


사령관은 할 말이 없었다. 서약을 한 번만 한 것도 아니었고, 이런 일이 앞으로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 역시 없는 것이다.


"……나도 알아.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사람끼리 질투도 없고, 서열을 짓지 않게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거야. ……나와 너희가 철충을 모조리 물리칠 수 있으리란 희망 못지 않게."


자리에 있던 간부급 대원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구미호였던 대원은 곧 다른 퇴역 대원들과 함께 후방 지원 거점으로 떠났다. 보고를 받은 사령관은 우울한 얼굴로 구미호에게 주었던 서약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서약 전 호감을 쌓을 때 보았던 구미호의 하얀 웃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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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스 외전 출시 기념 겸 대회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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