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사령관 1부 완결


악마 사령관 2부 1화 - 첫 번째 노래


악마 사령관 2부 2화 - 두 번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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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세 번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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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의 제1석 기사단장 Iron’s Prime Templar Lord 

 

 가끔은꿈이 계속되기를 바랄 때가 있다평화롭고아름답고기쁜 나날들을 보면서 생각한다참 행복해이 순간이 내일도내일의 내일도내일의 내일의 내일도 반복되면 좋을 텐데그렇게 생각하면서 잠이 깬 다음을 생각하지 않게 되지

 

 하지만 꿈이란 건 결국 가짜결국은 끝이 나는 무언가우리의 삶보다 무의미한 어떤 것그 꿈속에서 나는 영원히 행복할지라도결국은 나 자신조차 바뀌지 않는 영원한 고정그런 것일 뿐

 

 그러니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살아서는 사후의 꿈을 꾸지 않고죽어서는 지옥의 꿈을 꾸지 않고불구덩이에서라도 다음 생의 꿈을 꾸지 않는다그리고 다가오는 잠에게 말하는 거지

 

 깨어날 시간이다라고

 

 * * *

 

 신자들은 풍화하지 않는다단지 나이를 먹지 않는다거나 심성이 굳다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철의 몸을 얻기도 전에 천 년이 넘게 젊음을 간직한 채 살 수 있었고지금은 사실상 수명이 무의미한 정도의 세월을 보낸다몇 년몇십 년때로는 몇백 년이라도 길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게 그들이다그렇기에 그들의 정신은 몹시도 평온했다한 번 정해진 성격과 생각을 바꾸는 일이라곤 거의 없으며감정이 아무리 깊어져도 그것이 이성을 흔들 정도가 되지는 않는다세월의 풍파에 깎일 수 있는 거암이 아니라 딱딱하고 차디찬 강철에 가까운 것이 그들이다

 

 그러나철도 녹슬고 휘어질 수는 있다

 

 텅 빈 방 안에 앉은 채위베르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교황과의 비밀스러운 면담이 오십 년 전이었다발카와의 불쾌한 대화는 삼십 년 전그리고 수석 기술관과의 마지막 이야기가 오 년 전그 모든 건 달가울 리 없는 대화들이었다아니그 정도를 넘어서 꺼림칙하고 불쾌하기까지 했다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팔십 년이었다팔십 년 동안의 모든 기만살해음모그 모든 게 그의 정신을 할퀴었다모든 일이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계에 몰려 있었다벗을 보고 거짓된 미소를 보는 것도가상 시스템 속에서 별의 아이가 아니라 차원문 너머의 적들을 베는 훈련을 반복하는 것도기사단 내부의 이들을 떠보고 때로는 갈아치우는 것도전부 지긋지긋했다악몽이 싫어 잠을 자지 않았고거짓말이 무서워 대화를 나누길 거부했다우달과 레자키는 그런 그를 걱정해 도우려 했지만그게 더 끔찍했다

 

 지옥에 있는 자에게 성인들이 내미는 헛된 구원의 손… 

 

하아.”

 

 눈을 뜬 위베르는 만신창이가 된 주위를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기며 가구를 전부 치운 방의 벽과 바닥천장이 영혼 에너지에 휘말려 넝마가 되어 있었다타일과 외벽은 전부 부서져 바닥을 뒹굴고그 중간마다 고열에 녹아내리고 불꽃이 붙은 흔적이 남았다그를 반경으로 1m 정도의 원을 그린 듯한 영역만이 부자연스럽게 멀쩡했다평온하다는 그들과 달리정신의 격정이 영혼 에너지를 마음대로 폭주시켜 만들어낸 모습이었다

 

부끄럽군.”

 

 기사단장은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갔다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을 윙윙대는 청소 로봇들의 소리가 나직이 방해했다망토를 뒤집어쓰고 거리를 따라 내려가며그는 그 소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게 차라리 편했다고

 

 * * * 

 

 준비는 완벽합니까기술관?

 

 물론입니다다만 장병들은 불만스러울 겁니다잘 쓰던 육신 대신 무슨 벌레 모양을 한 장치에 들어가야 하니그다음에 갈아타는 것도 무슨 저급한 로봇에 불과하잖습니까우리 성전군이 그 1할도 차원문을 못 넘어가는 걸 알았을 때 제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아십니까

 

 차원문이 충분히 크지 않은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철의 탑이며 기타 시설성직자들의 육체만 해도 수용 범위가 거의 꽉 차잖습니까… 그곳에서 육신을 다시 만들 수 있기를 고대해야겠군요

 

 그렇겠지요그건 그렇고위베르 경당신은 준비가 다 되었습니까당신의 동… 기사단장 레자키 경과 그녀의 기사단이 귀환할 때까지 석 달 남았습니다이제

 

 충분합니다삼색 회의가 두 달 남았잖습니까그날 전부 끝날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당신이 가치를 둘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남지 않겠군요

 

 그런가요

 

 후회하지 않으십니까위베르 경당신이 택한 가시밭길을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고위 성직자들이 참여하는 삼색 회의까지 이제 두 달그동안 위베르는 여전히 정신이 없을 정도의 바쁜 나날을 보냈다달라진 점이 있다면그전까지 행적을 감추기 위해 철저히 암약했던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어 다른 이들이 그를 의심하게 만들었다는 것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돌아갔다고위의 성직자들 7할 정도를 끌어들였다세 개의 기사단 중 그의 기사단은 기사단장의 뜻에 완벽히 충성했고육십 년 전에 마지막 기사단장이 된 레자키는 몇 달 전 모종의 임무를 받았으니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리라

 

 물론그 완벽하다는 것이 결코 달가운 건 아니지만

 

[들어가도 될까.]

 

 인터폰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몹시도 차가웠다위베르는 자신의 방문 앞에 서 있는 오랜 친구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매는 날카롭게 날이 섰고입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위베르는 언제나 온화하고 잘 웃던 우달의 낯선 모습에 씁쓸한 감정을 느끼며 대답했다

 

들어와.”

 

 추기경의 강철 군화가 석재 바닥에 부딪혀 거친 소음을 울렸다우달은 흔히 입는 평상복이 아니라 추기경의 치렁치렁한 정식 복식을 착용하고 있었다그다운 옷차림은 아니었다항상 말하기를가까운 사이라면 이런 걸 입고 고생할 이유가 뭐가 있냐고 했으니까

 

 가까운 사이라면

 

 우달이 그 상태로 앉지도 않고 책상 위에 무언가를 던졌다위베르가 두꺼운 종이 뭉치를 보며 이게 뭐냐는 듯시선을 마주했다

 

13 공방의 수석 기술관이 관리하던 어떤 문서의 복사본어떤 식으로 작성된 건지는 모르겠지만중앙의 정보망에서 아주 완벽히 빠져나간 채로 거의 수십 년 동안 갱신과 수정을 반복한 모양이더군.”

 

 위베르는 그 표지를 흘깃 보았다그들이 잃어버린 푸른색의 땅과 바다와 하늘을 가진이제는 아주 익숙한 외계 행성의 전도가 큼직한 첨부로 들어가 있었다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두 대륙그리고 가장 큰 대륙의 동남쪽에는 위협적임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얼마 전 천사와의 연결이 끊겨버리긴 했지만이미 충분한 준비를 끝낸 침공 계획의 세부사항들이었다

 

 그는 문서의 유출에 딱히 당황하지 않았다슬쩍 정보를 흘린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이 상황은 아주 오래전부터그의 계획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그런 건 냉철한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자신의 심장을 쥐어뜯는 죄책감을 침묵게 하는 건 그의 계획보다 훨씬 어려웠다우달은 감당할 수 없는 배신감에 충격받은 것이 아닌애써 부정하던 – 그러나 이성이 계속 되뇌던 진실을 결국 수용하고 만 자의 체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모든 것이 예상대로건만그는 고작 자신의 감정 따위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보이지 않는 손이 내장을 쥐어짜 뜯어내는 듯한 거북함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그 덕에 대답하는 위베르의 말투는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도 훨씬 냉랭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우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그는 바보가 아니었고이 저주받을 계획의 첫 장을 들여다본 순간 그 전말을 깨달았다그와 위베르가 친구로 지낸 건 거의 한 세기가 넘었고그의 심성에 섬뜩할 정도로 어두운 구석이 있음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차라리 침묵아니면 최소한 변명을 기대했건만 이런 반응이란 말인가

 

.”

 

 치미는 화 때문에 뭔가 더 해보려던 말을 잊은 우달은 즉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그래서이 놀라운 계획에 네가 차지하는 지분이 몇 할이나 되나 물어보기 위해서 왔지.”

 

 자신의 어조에 잠깐 놀랐던 위베르는 곧 아예 잘 되었다 생각하며비꼬듯 대꾸했다

 

그걸 물어볼 필요가 있어?”

 

 짙은 푸른 눈과 시커먼 검은 눈이 서로를 매섭게 응시했다물론 대답은 필요도 없었다승리를 위해 아군의 희생과 적의 여력을 계산기처럼 따지던 위베르다하물며 겉모습만 흡사할 뿐인 외계 종족의 희생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게 뻔했다수십억이 아니라 수백억수천억이라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그들을 학살하며 슬퍼하고 괴로워할지언정그 행위 자체를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영겁 동안의 지옥행을 담보함을 알고라도 말이다

 

미쳤구나위베르수십억의 피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서 춤이라도 출 거냐?”

 

 우달은 차갑지만결코 미소가 아닌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러나 위베르는 그 시선에 정말 차디찬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미쳤다니나를 잘 몰랐다는 것처럼 말하네.”

 

알았지이 정도로 속이 시커멀 줄은 몰랐지만.”

 

몰랐다고그래?”

 

 우달의 말을 되뇐 위베르가 곧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거의 광인의 웃음소리에 가까운 그것에우달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거센 웃음소리는 한참을 이어지다 점점 잦아들고이내 뚝 끊겨 한숨으로 그 끝을 맺었다양쪽 눈가를 짚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이 섬뜩한 광채를 번뜩였다

 

아니잖아.”

 

뭐라고.”

 

 위베르가 비웃듯 음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몰랐다니거짓말 하지 마알잖아너는 알아내 신념이내 가치가내 머릿속의 생각들이 어떤 종류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는지.”

 

 상대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위베르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굳이 틈새를 치지 않아도 우달은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 말해 봐지난 팔십 년 동안 정말 짐작하지 못했다고못할 거야넌 막지 못한 게 아니라막지 않은 거니까아닌가?”

 

 우달은 잠깐 이를 악물었다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위베르를 막지 않은 건 분명오랜 친구를 차마 그런 식으로 의심하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분노가 꺾인 건 아니었다도리어 더 거세게 타오를 뿐이었다아무리 옳은 말이라지만 그건 위베르가 해도 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러리란 걸 전부 짐작하고 이용한 것일 테니까

 

그리고너는 우리의 우정을그따위 방패로 써먹었고 말이지.”

 

 위베르의 눈가가 살짝 힘없이 내려앉았다입가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아까부터 그랬듯그건 그냥 입술의 움직임에 불과했다우달은 그런 그를 노려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이를 악물며 볼살을 씹어 피비린내가 가득했다원래 비난을 더 이어가려 했지만위베르의 괴로운 표정을 보는 동안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도 알았다지금의 기만에도 불구하고 위베르가 그를 장기짝 따위로 본 건 결코 아니라는 것을한 세기의 우정이란 건 그렇게 가벼운 무게가 아니었다오히려서로를 위해 자신의 목숨 정도라면 헌신짝처럼 내던질 수 있을 만큼 무거웠다그저 서로가 추구하는 대의가 그 우정보다 무겁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자신 역시 그리했을 것이기에 위베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그의 방식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위베르의 계획은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는 말로 쳐줄 수 없었다우달이 분노한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을 속여서가 아니었다

 

 냉혹하다 못해 사악하기까지 한 그 방법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일이 아니야빌어먹을, ”

 

알아올바르지 않다는 것 정도는하지만 나에게는 옳은 일이야.”

 

옳은 일이라고그게?”

 

 우달은 조용히 위베르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내게는 옳은 일조차 아닌 것 같은데!”

 

너는 착하니까나와는 달리.”

 

 설득으로 어떻게 상대의 생각을 돌릴 수 있으리란 안일한 착각은 둘 다 하지 않았다좋게 말하면 신념 굳은나쁘게 말하면 고집불통인 둘이 서로를 설득하거나 그에 굽힐 리는 없으니까둘의 대화는 끝없이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하지만 우달은 그걸 알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냐언제부터머릿속에 검정을 이렇게 깊게 물들이면서 살았던 거냐내가 아는 너는 최소한 사악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위베르가 아련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언제부터언제부터였는지 그의 기억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안타깝게도 그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았다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족을 잃었을 때아니면 제자를 잃었을 때그도 아니면 남은 희망이 이것밖에 없게 되었을 때글쎄기억을 너무 많이 지워서 잘 생각이 나지 않는걸… 나도 이렇게까지 시커멓게 물드는 걸 원하지는 않았어.”

 

 이제는 늦어버렸지만그렇게 말하는 위베르의 표정은 아주 씁쓸한 미소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우달은 그런 그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그래서 이제는 그 검은색을 무고한 시민들에게까지 칠할 셈이군수백만 명에게 그 엄청난 살해의 죄를 뒤집어씌워전부 지옥에 떨어뜨리겠다고?”

 

그럴 리가?”

 

그럼?”

 

 양손을 펼친 위베르는 속삭이듯음산하게 답했다 

 

신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겠지이미 별의 아이들에게 먹잇감으로 예정된 이들이니… 우리가 죽음을 통해 최소한 영혼이 윤회라도 하도록 자비를 베풀어 구원해야 한다고. ‘신께서 명령하신 바를 따라.’”

 

 위베르는 나직하게 웃음소리를 냈다평소에 가끔 내는 가벼운 웃음소리였다하지만 그 웃음은 지독히도 우울하고 시커멓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죄책감도 의심도 없이 따를 것이고그 모든 죄는 오로지 우리만 지게 되겠지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아주 오랫동안.”

 

 우달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처음에는 그 말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어서그리고는 그 말을 너무나 명백하게 알아들어서였다

 

 다음 순간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붉은 영혼 에너지가 무의식적으로 치솟으며 금빛으로 변해 주위를 휩쓸었다위베르가 지금처럼 위험하고 섬뜩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우달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너 설마!”

 

그래맞아.”

 

 우달의 손에 붙잡힌 탁자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그는 위베르의 말 사이에 숨겨진 진실을 바로 읽어냈다

 

신께서 명령하신 바를 따라.’

 

 신의 뜻이라고 속이겠다좋은 말이다분명 신자들은 그런 식으로 속일 수 있다거의 진실로 이루어진 저 말에 사정을 모르는 시민들은 쉽게 넘어갈 테니그리고 순수하게 정의를 위해서 – 라 믿으며 선의로 저 학살을 행하는 이들은지옥에 떨어지지도 않을 터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다르다앞뒤 상황 다 아는 그들이라면 저것이 교묘한 거짓이란 걸 바로 알아차릴 테다그리고 그 경우그들에게 남는 선택지는 둘밖에 없다수십억을 죽이고 지옥에 떨어지는 추악한 성자의 길을 걷거나아니면 그 계획을 어떻게든 막아내거나적어도 방관한다면 그 역시 지옥행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위베르는 반대파를 모조리 죽여 그들을 지옥으로부터 구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그들이 죄에 동참하기 전에그리고 그 말인즉슨

 

미쳤구나위베르나는 그렇다고 해도… 레자키까지죽이겠다고?”

 

 우달은 그제야 레자키가 의문스러운 임무로 수도를 떠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그녀가 위베르의 계획을 듣고 무엇을 선택할지는 모른다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어차피 위베르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녀는 제 오라버니에게 살해당할 것이다

 

 지옥에 떨어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맞아.”

 

 우달은 차마 분노조차 느낄 수 없었다분명 화가 나야 할 텐데그럴 수가 없었다

 위베르는 굳은 의지로 자신의 고통을 각오하고 다른 이들의 사후를그리고 동족의 미래를 구원하고자 했다어떤 성인이라고 해도 선택하지 않을 길이었으니 그뿐이라면 추앙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식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두 명을 제 손으로 죽이고 수십억의 무고한 인명을 학살하는 것이라면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미친 자인가의지 굳센 자인가

 

 성인인가그저 악인인가

 

 자신은그런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렇다면내가 여기서 널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채 생각을 다 하지는 못했지만우달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금빛의 바람이 일어나며 방 안에 휘몰아쳤다위베르가 힘으로 따지면 교회 2위라 해도, 1위인 우달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일대일로 맞붙는다면 필히 목이 잘릴 정도로우달이 작정하고 그를 죽이려고 든다면 도주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위베르는 마주 전투태세를 취하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못 하잖아적어도 지금은.”

 

 우달의 주위를 맴돌던 힘의 기류가 기세를 꺾었다그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말했잖는가, 100년을 함께한 친구라고생각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그가 자신을 죽이려 들 리가 없었다그게 자신과 그의 차이였다가능성만 보고도 얼마든지 악을 행할 수 있는 기사단장최후의 수단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망설이고 말 추기경

 

 마지막 말까지 힘을 잃은 우달은 이를 꾹 악물었다위베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을 노려보는 그를 외면하며매몰차게 중얼거렸다

 

이제 할 말도 없을 것 같은데나가.”

 

 우달은 뭐라고 더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움직였지만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위베르는 그런 그에게 다시 말했다

 

나가시라고 했습니다우달 공.”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들은 적이 없는 사무적인 존대였다멍하니 서 있던 우달은 곧 냉랭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나가 버렸다문이 거세게 닫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바람 때문에 머리칼이 흐트러졌다위베르는 조용히 오른손 위에 붉은 영혼 기류를 덧씌워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강철도 베는 영혼의 힘으로 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천만한 짓이었지만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자신의 마음이 스스로를 배반할 정도로 견딜 수 없게 된다면 자신의 본능이 머리칼이 아니라 목을 베어 주기를 바랐으니

 

 사각사각사각

 

뭐 하는 짓입니까위베르 경.”

 

 방의 한구석이 물결치며 모습을 감추고 있던 남자의 형상이 드러났다위베르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꾸했다

 

뭘 말하는 겁니까우달과 대면한 것아니면 지금 하는 짓?”

 

 교황의 특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당신이 죽으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뭐 어떻습니까계획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추기경이 절반기사단장도 하나를 잃게 될 판인데 거기에 당신까지 더하겠다는 소리입니까말도 안 되는 소리를.”

 

 위베르는 대답하는 대신 다 다듬은 머리칼을 한 갈래로 묶으려다… 다시 풀었다발치까지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머리칼은 걸리적거리고불편했다

 

 아주 좋았다

 

우달 공은 발카를 만나러 갔나요?”

 

"그렇습니다괜찮겠습니까발카 경도그 부단장도 절대 당신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위베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감이군요.“

 

"그게 다입니까?“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엘다오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위베르의 대답에 혀를 차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뭔가 계획이 있다는 소리일 테니까팔십 년 동안 세웠던 계획에 그가 뭐라 더 할 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위베르와 대화 몇 마디를 더 나눈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가만히 가운데에 앉아 있던 위베르의 물음이 그를 멈추었다

 

엘다오 공.”

 

?”

 

당신은 지옥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교황의 특사는 그의 말을 오해하지 않았다얼핏 겁쟁이라며 매도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지옥행이라는 건 단순한 희생이나 용기의 범주에 둘 문제가 아니었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곧 차분하게 답했다

 

두렵습니다몹시도아마 제가 당신의 계획에 찬동하는 건 지옥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주는지 모르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어째서?”

 

그러니까 하는 겁니다잘 모르니까아마 미래의 저는 지금 제 선택을 몹시도 원망할 것 같습니다만… 무지라는 건 훌륭한 면죄부지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면 후회하지도 않아야 하겠지요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엘다오가 떠난 후위베르는 조용히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 뭉치를 바라보았다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은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바꿀 수 없는 일인가

 

 * * *

 

 잠이 들거든 언제나 같은 꿈을 꾼다악마를 만난다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딱히 무언가를 요구하지도권유하지도 않는다그저 앞에 앉아 붉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만 있다

 

 한 번은 물어본 적이 있다뭘 위해 이곳에 있느냐고그는 대답했다자신의 의무를 이행한다고그 의무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그는 대답했다

 

 성인의 자격을 시험하고죄인을 유혹하고 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나라고답했다피를 뒤집어쓴 성인지옥을 약속받은 메시아그것이 나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은 채 그를 보고만 있다그의 옆에는 거대한 관이 있다원한다면 그 안에 들어가 누울 수 있다팔십 년 전그 저주받을 계획을 준비하던 날 나는 죽었던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돌아가 다시 묻힐 관일 뿐이다

 

 그 포근한 어둠이 나를 부른다현세도지옥도천국도다음의 삶도 없이 그저 잠들자고이제는 그만하자고환생하지 않는 영원한 소멸은 편하겠지그리고 나면 저 악마가 내 육체를 차지하고팔십 년의 계획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 놓겠지참 유혹적인 선택지였다오늘따라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기에 눈을 감고 관에 몸을 기댄 채꿈이 끝나기를 기다린다악마의 시선에 연민과 안타까움이 짙게 담겨 있지만무시한다

 

 그런 자비는 내가 받아도 좋을 게 아니다

 

 * * *

 

 두 달이 지나는 동안은 고요했다일종의 폭풍전야로위베르는 우달을 만나지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도 못했다우달은 철저하게 자신의 행적을 감추었고위베르는 계획을 점검하며 확실하게 찬동하는 고위 성직자들과의 회담만을 몇 차례 가졌을 뿐이었다

 

 다른 성직자들은 그 사실이 내심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아무리 팔십 년 동안 준비해 왔다지만우달은 여전히 교회 최강의 추기경이며 교황 못지않게 추앙받는 자였다모호한 태도를 표했거나찬동하더라도 못 미더운 이들이라면 당일 우달의 편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게다가 레자키가 없다지만또 다른 기사단장인 발카와 그의 기사단이 여전히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그리고 발카와 위베르의 악연사상의 차이라면 도저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위베르는 평온했다

 

 부단장과 상급 기사들을 이끌고 철의 전당에 들어오는 그를 향해 무수한 시선이 쏟아졌다적대적인 것우호적인 것아리송한 것중앙에 앉은 교황은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그 외에는 전부 그를 보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그 모두를 무시했다모두 무의미했다

 

오셨군요위베르 경.”

 

안녕하셨는지요여러분도.”

 

 위베르를 알아본 고위 성직자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청했다위베르는 그를 받으며 조용히 반대편을 훑어보았다그 성직자들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감거나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고오직 가운데에 자리한 우달만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위베르는 그 시선을 마주해 주었다딱히 나눌 말은 없었다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으니까

 

철의 교회를 받치는 신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굽어보시니.”

 

 위베르는 회의의 시작을 선언하는 말을 적당히 흘려넘기며 턱을 괴었다삼색 회의 자체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우달과의 대화도그의 발언에 흔들리는 다른 성직자들도 그의 관심 밖이었다투표가 끝날 때쯤 철의 탑 외부에 있던 휘하 기사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지만그 역시 무시했다그는 그저 전당의 뚫린 천장을 통해 하늘을 보고만 있었다

 

 우달너는 분명 현명하게 행동할 줄 알지아마 나보다도 더하지만그걸로는 안 돼왜냐하면 그 기저에 깔린 게 결국은 선의니까

 

 그걸로는 결코 악의를 이길 수 없어

 

교황 성하명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교황을 보며위베르는 검을 뽑았다

 

 * * * 

 

 교황이 성좌 뒤쪽의 문을 통해 전당을 나가버리자위베르 휘하의 흑룡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우달 측에 서 있던 성직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우달에게 언질을 듣긴 했을 테지만정말로 이렇게까지 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유일하게 우달만이 당황이 아닌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위베르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위베르는 여기까지 와서도 그리 묻는 우달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래대의를 위해서… 이런 개소리는 안 되겠고적당히너희의 구원을 위해서… 이건 괜찮네.”

 

지금이라도 그만둬라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위베르는 우달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아직 늦지 않았다놀랍게도 그건 옳은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멈출 힘을 가지고 있다지금까지의 모든 걸 없던 일로 할 수 있다앞으로의 모든 것도 없을 일로 할 수 있다그냥 별의 아이들을 피해서 이 행성을 떠나버려도 좋다늙지도 죽지도 않는 그들이니 우주를 떠돌며 영원히그저 고요하게 살아갈 수 있다언젠가는 우달과 그도 서로를 다시 용서할 수 있겠지레자키가 그들 사이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결국 지옥행에 이르기는 하겠지만 그 짧은 죗값을 치르고 나면 낙원에서 잃어버린 가족들과의 재회도다음 생으로의 윤회도 가능하다그저여기서 멈추기만 한다면그건 참으로 유혹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말많이도 들었다위베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이미 늦었어.”

 

 우달이 호출한 기사들이 전당으로 달려오는 것이 외부 카메라에 비쳤다위베르는 다시 한번쐐기를 박듯 낮게 말했다

 

“80년이나 늦었지.”

 

그게 네 선택이냐?”

 

물론.”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래.”

 

 위베르는 전당의 문 앞에서 경비를 서던 부하들에게 피하라고 언질을 주지 않았다혹시라도 우달이 뭔가 이상함을 알아챌지도 모르니곧 짧은 비명이 두 번 들려왔다

 

크악!”

 

으헉!”

 

“!?”

 

?”

 

비명?”

 

 전당의 문이 벌컥 열리며 서로 다른 문양을 걸친 두 무리의 기사들이 일제히 안으로 들어왔다비명에 놀라 고개를 돌렸던 성직자들은 그들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한쪽은 붉은 독수리 문장을 새긴 발카의 적독수리 기사단이었다여기까지는 다들 예상했다세 기사단 중 최강인 위베르의 기사단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그게 아니더라도 발카라면 위베르의 계획을 막기 위해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러나 다른 무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그들은 흰색 늑대의 문장을 걸치고 있었다분명 임무를 받아 전원 수도를 떠났던 레자키의 흰늑대 기사단이었다한 달 후에나 돌아올 예정이었던 그들이 이 자리에 있는 건 전혀 상정 외였다지금은 그들이 맡은 임무가 다 끝나지도 않았을 시간인데?

 

위베르 경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추기경 하나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속삭였다우달 편에 선 이들의 밝아진 표정과는 반대였다위베르의 기사단이 셋 중 가장 뛰어난 건 맞지만두 기사단을 상대해 이길 정도가 되지는 않았다심지어 저쪽에는 그 우달까지 있지 않은가

 

이거괜찮은 겁니까?”

 

 하지만 위베르는 태연해 보였다그가 조용히 기사들을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단장인 레자키가 없어 부단장이 지휘의 표식을 차고 있었고기사들의 숫자도 절반 이하였다

 

 물론그렇다고 해도 적독수리와 흰늑대를 합치면 흑룡보다 훨씬 많지만

 

급하게 일부 단원만 뽑아서 강행군이라도 했나 봅니다이건 확실히 예상하지 못한 것인데우달이 월권을 행사한 모양이군요그답지 않게.”

 

 두 기사단은 흰늑대가 전열더 수가 많은 적독수리가 후열을 맡은 채 위베르 측을 반원형으로 포위하고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그러나 위베르는 걱정 말고 기다리라는 뜻으로 오른손을 작게 흔들며 속삭였다

 

일단 두고 보시지요어차피 레자키는 오지 않습니다지금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를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위베르 경?”

 

 위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확실히 우달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예상 밖이었다그리고 그게 다였다발카가 살아있지 않은가아무리 독해졌다고 해도 그는 끝까지 생각에 사악함을 품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일이 편해졌을 뿐이다

 

목록에 있는 자들은 전부 죽이고나머지를 제압하시오.”

 

 차갑게 명령한 우달이 오른손을 뻗어 위베르의 쪽을 가리켰다적독수리와 흰늑대 기사단이 저마다 검을 뽑으며 차가운 금속의 빛이 전당 안을 비추었다위베르 주위의 기사들과 성직자들도 전투태세를 취했지만아무래도 수에서 한참 밀리는 만큼 다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모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위베르를 향했다우달 역시도 마지막 순간에 결국 그의 벗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당황해야 했다

 

 위베르는 안타까움과 착잡함이 뒤섞인몹시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위에 허를 찔렸다는 당황이나 좌절 따위는 없었다적어도계획이 실패해 죽음을 맞을 이가 지을법한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흰늑대 기사들마저 그 기묘한 분위기에 멈칫했다위베르가 칼자루에 손을 얹지도 않은 채 고요해진 좌중을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정말정말길고도 고통스러운 리허설에 리허설에 리허설만을 이어왔다그리고 진짜 막이 오르면 그것보다도 끔찍할 테지하지만 배우들은 이미 단에 올랐고이제는 그저 극을 시작할 수박에 없다

 

 무용수처럼 양손을 펼치며그는 막의 첫 마디를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당신들의 영혼을 위해서.”

 

 아리송한 말에 우달이 인상을 구기는 순간이었다갑작스레적독수리 기사 하나가 앞에 있던 부단장의 목을 베었다

 

?”

 

 뜨거운 피가 튀며 바닥을 적셨다경악한 성직자와 기사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다른 적독수리 기사들이 일제히 자기 동료 몇몇과 흰늑대의 후방을 덮쳤다바로 뒤에서 불시의 기습을 당한심지어 숫자마저 절반에 불과한 그들은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하나씩 바닥에 쓰러졌다겨우 저항을 시도했던 이들도 앞쪽에서 달려든 흑룡 기사들의 검까지 감당하지는 못했다

 

이 무슨 – !?”

 

 불시에 발검한 적독수리 기사단장이 주위의 성직자 넷을 일격에 베어 넘기며 우달을 향해 날아들었다급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했던 우달은 간신히 양손을 교차해 금빛으로 타오르는 검을 막아냈다그러나 불의의 일격인지라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우달 경피하십시오크학!”

 

 방어가 거의 뚫리려는 순간다른 추기경이 황급히 끼어들어 검을 받아내지 않았다면 목이 잘렸으리라발카는 우달 대신 그를 반으로 갈라버리는 데에 만족하고 잠시 뒤로 물러나야 했다

 

 겨우 숨을 돌린 우달은 검을 고쳐잡는 발카를 향해 소리쳤다

 

발카 경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물론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될 질문이었다배신했다느니 하는 대답밖에 나올 말이 없지 않은가위베르 못지않게 씁쓸한 표정을 지은 발카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게 답했다

 

미안하군요우달 공.”

 

 적독수리 기사들은 한둘을 제외하고는 망설임조차 없이 옆의 이들을 베었다손발이 딱딱 맞는 그 태도를 볼 때적어도 최근에 계획을 안 것은 아니었다아주 예전부터 준비해서 이제야 실행한 것에 불과했다

 

 발카는 처음부터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당신이 대체 왜

 

 우달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발카는 위베르의 결과론적 방법에 반발해 그와 갈등을 빚지 않았던가한 명의 생명도 아끼는 그였으니 수십억을 말살하는 위베르에게 동조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발카는 음울한 어조로 그에 답해 주었다

 

옳은 말씀입니다저는 분명 많은 이들의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위베르 경의 방식에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우달과 다른 성직자들도 착각한 게 있다면그 잣대가 동족이 아닌 생면부지의그것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외계 종족에까지 똑같이 주어질 거라도 생각한 것이다틀렸다

 

 음울한 기색을 지운 발카는 냉랭한 표정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과 선조들의 영혼을 포기하면서까지그 한심한 자들을 위해서 실패할지 성공할지조차 모르는 정의를 행해야 한다면차라리 그걸 버리고 말겠습니다.”

 

그런 - ”

 

 우달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위베르와 발카가 동시에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우달이 이를 갈며 내리치는 검과 창을 막아냈지만뒤로 쭉 밀리고 말았다아무리 그들과 자신 사이에 현격한 격차가 있다 해도둘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강철 육체라고 해도 그런데 정신만 있는 여기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흰늑대 기사들은 일방적으로 도륙당하고 있고그의 편에 섰던 성직자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애써 검을 막아내던 대주교의 등 뒤에서 검을 내리쳐 베고힘겹게 저항하던 기사의 목에 창을 찔러 피로 바닥을 적신다위베르는 점점 힘에 부쳐 밀려나는 우달에게 조용히 말했다

 

발카를 죽이고 기사단을 장악했어야지레자키가 임무를 포기하고 즉시 돌아오게 했어야지모든 걸 밝혀서 나를 제대로 적대하도록너는 전부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어그리고 그건 너무 물러우달.”

 

 우달이 철저한 악의를 가졌더라면 일이 이렇게 쉽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상황을 정리한 기사와 성직자들은 셋의 신화적인 전투에 끼어드는 대신 그 여파를 피해 물러났다세 줄기의 금빛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철의 전당을 휩쓸었다천장이 내려앉고기둥과 벽이 박살나고지면이 휘말려 산산이 부서졌다철의 탑 깊숙한 지하가 아니었다면그리고 다른 이들이 전력으로 주위를 막고 있지 않다면 주변 도심에 어떤 여파가 끼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폭풍은 서서히 잦아들었다우달은 지치고 있었다철벽같던 방어가 점차 허점을 보이고날카롭던 공격도 차츰차츰 정밀함을 잃어갔다그에 비해 두 명의 기사단장은 혼자는 밀리면서도 함께 치명적인 연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결국우달의 집중력에 틈이 생겼다

 

 기다란 창이 위에서 떨어지며 쌍검을 막고 있던 사이를 정확하게 찔렀다하지만 우달은 그를 제때 막아내지 못했고방어막이 산산이 조각나며 오른팔이 통째로 잘려나갔다결정타였다

 

 위베르는 리치가 긴 창을 다시 휘두르는 대신 오른발을 뻗어 상대의 몸통을 전력으로 걷어찼다우달이 그대로 날아가 반대편의 벽까지 처박혔다금빛 기류가 산산이 흩어지며 포탄을 처박은 듯한 폭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크으… !”

 

 메마른 신음을 흘리던 우달이 왈칵 피를 토해냈다척추가 부러지고 내장이 모조리 망가졌다몸을 단련하지 않은 그에게는아니기사라 할지라도 확실한 치명상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이미 그의 편을 들었던 이들은 전부 주검이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니발카는 뒤로 물러나고위베르가 창 대신 검을 든 채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른손으로 간신히 바닥을 짚어 쓰러지는 것만 면하던 우달이 그를 노려보았다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겨우 죽음을 늦추고만 있음에도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날카롭게 타오르고 있었다한 자루의 검처럼.

 

 그러나 아무리 날카롭더라도 그걸로는 적을 벨 수 없다

 

이게정말로네가 원하던 거냐.”

 

 위베르는 주위에 흩어진 시신들을 가리키는 그의 말을 긍정했다

 

그래내가 원하던 거야.”

 

"이렇게까지?“

 

아니이렇게 해서라도.”

 

 가족을 속이고친구를 배신하고동포를 죽여서라도수십억의 존재들을 죽이기 위해서그렇게 해서 미래를 잃어버린 동족을 되살리고잠들어 깨지 못하는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서피로 대지를 씻고 그 위에 망각을 덮어서과거를 파묻기 위해서

 

 우달은 고통을 참으며 그를 부정했다또 피가 목을 타고 한 바가지 쏟아져 나왔다.

 

그 방식은틀렸.”

 

맞아.”

 

 위베르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언제나 옳은 방식만을 따를 수는 없지.”

 

후회… 거다너는.”

 

 저열한 저주가 아니었다마지막 순간진심으로 그를 막지 못한 것을 원통해 하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위베르는 조용히 답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내리쳤다

 

 * * * 

 

 레자키와 흰늑대 기사단은 사태가 끝나고 몇 시간 만에 수도에 도착했다우달이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차출한 데다가그 뒤로 수도와의 연락이 아예 끊겼으니 임무를 계속 수행하는 대신 귀환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마주한 것은 그야말로 난리가 난 수도였다철의 탑은 굳게 닫혀 열리지도 않고성직자나 기사 중 응답하는 축은 다른 흰늑대 기사들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다시민들은 갑작스러운 소개령과 계엄에 불안해하며다들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레자키는 불안감에 비가 쏟아지는 광장을 우산도 없이 오가며 손톱을 깨물었다이틀 전 찾아왔던 우달이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탓에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수도에 도착한 게 벌써 한 시간 전인데 그녀로서는 아직도 이 상황이 죄다 오리무중이었다

 

젠장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위베르 경께서도 응답이 없으십니까단장님?”

 

전혀다른 성직자도 호출에 답하는 이가 단 하나도 없어.”


 하다못해 흰늑대 기사들이라도 응답할 법한데모든 통신 채널이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머리를 쥐어뜯는 레자키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부관이 가까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단장님상황이 절대 평범하지 않습니다무언가 문제가 생겼어요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게 별로 현명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조금…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는 게 어떨까요?”

 

 부관의 말을 알아들은 레자키는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철의 탑을 강행 돌파하자고진심이야?”

 

우달 경이 흰늑대 기사단의 절반을 동원했는데 지금 모두 응답이 없고철의 탑은 삼색 회의인데 너무 고요합니다벌써 한 시간이 넘었어요최소한 우리가 수도로 돌아왔다는 걸 알 테니 무언가 반응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맞는 말이었다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적어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융통성 없이 여기에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 해도성지 중의 성지인 철의 탑을 강행 돌파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레자키가 고민하며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하나 이를 갈기 시작했다그리고도 시간이 또 한참 지나그녀가 슬슬 전원철의 탑으로 돌격!’을 외치는 선택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쯤이었다누군가 그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단장님문이 열립니다!”

 

 레자키를 비롯한 상급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철의 대성당의 거대한 정문이 좌우로 열리며그 사이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가장 선두에 선 이는 알아보기도 쉽게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였고그 뒤로 흑색 용의 문장을 두른 기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흑룡 기사단이군요위베르 경도 계십니다다행이네요.”

 

 한 기사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지만레자키는 그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흑룡 기사들밖에 없기도 하고우리 쪽 기사들은적독수리도 없는데.”

 

과연 그렇군요위베르 경께서 이쪽으로 오시긴 합니다만.”

 

 성당 앞의 광장에 진을 친 기사들을 발견한 위베르와 흑룡 기사들은 비를 맞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들에게로 다가왔다흑룡 기사들은 흰늑대 기사단과 십 미터 정도 거리를 뗀 채로 제자리에 섰지만위베르는 거리낌 없이 레자키에게 가까이 와 양팔을 벌렸다레자키는 불길함을 억누르고 그의 포옹을 마주 껴안았다

 

레자키돌아왔구나괜찮으냐.”

 

오라버니애초에 위험이 있는 임무가 아니었는걸요그런데

 

 몸을 뺀 레자키는 불안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여기서는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위베르의 표정에 그림자가 졌다그의 얼굴을 본 레자키는 켜켜이 쌓인 부정적인 감정과 괴로움을 얼핏 발견했다불안감이 커지다 못해 뱃속에 돌덩이가 든 것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긴급한 일이 일어난 건 맞는 것 같은데… 이틀 전에 우달이 왔었을 때 그가

 

잠깐레자키그만.”

 

 침묵하던 위베르는 우달의 이름이 나오자 조용히 고개를 저어 그녀의 말을 멈추게 했다둘 말고도 수많은 기사에 철의 탑 주위를 맡은 관리인들까지 주변에 있었다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일단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그렇네요정말가시죠.”

 

잠깐단장님혼자 가시면 안 됩니다.”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레자키와 위베르는 동시에 뒤에 선 그녀의 부관을 돌아보았다.

 

그쪽은?”

 

흰늑대 기사단 부단장입니다위베르 경.”

 

 작게 입을 벌린 위베르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데무슨 문제가 있나?”

 

 그 자리에 남으라고 완곡하게 말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정말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였다부단장은 나직하게 답했다

 

제 임무가 단장님을 모시는 것이라 말입니다제가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바벨굳이 그럴 필요는.”

 

 바벨은 완강한 표정으로 레자키를 쳐다보았다레자키는 한숨을 내쉬었고두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던 위베르는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혼자 가는 게 불편하다면 자네도 따라와도 좋아그쪽과도 어차피 할 이야기가 있기는 했으니.”

 

알겠습니다.”

 

 레자키와 바벨은 앞서가는 위베르를 따라 철의 전당으로 들어갔다복도를 걷는 내내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앞만을 보았다평소와 달리거의 냉랭하게까지 보이는 태도였다레자키는 이유 모를 불길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아무도 없었다그게 더 이상했다대체 왜 아무도 없지

 

 바벨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조용히 속삭였다

 

단장님뭔가 이상합니다철의 전당이 너무 조용해요원래 오늘 삼색 회의가 있을 텐데… 다른 성직자들은 어디로 간 거죠.’

 

그래그리고 피 냄새가 조금 나는 것 같고오라버니께서도 괜찮으신 것 같지 않은데설마 다치신 건 아니겠지.’

 

그건.’

 

?’

 

 레자키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벨은 가까스로 하려던 말을 삼켰다아무리 그와 레자키가 친밀하다 해도 이건 입 밖으로 꺼낼 말이 아니었다위베르 경이 지금 가장 수상합니다그가 흘린 피가 아닐 것 같습니다라니게다가 사실그녀 역시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서는 건 아니었다

 

 그 위베르 경이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길 여동생을 속인다고무엇을솔직히 말해 반쯤은 망상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하지만 최소한 그의 태도가 몹시 꺼림칙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그녀는 슬쩍 걸음을 빠르게 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둘 다 검을 차고 왔으니적어도 문제가 생기더라도 어떻게든 되리라고 생각하면서그렇게 잔뜩 긴장한 상태로 철의 대성당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오르길 한참성당 8층 한가운데의 긴 복도에 이르렀을 때쯤 위베르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레자키.”

 

오라버니?”

 

우달이 너를 찾아왔을 때무슨 이야기를 했어?”

 

저를 찾아왔을 때요?”

 

흰늑대 기사단을 빌리러 갔었을 때 말이다그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으면말해 주겠니?”

 

… .”

 

혹시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면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

 

 곤란한 표정을 짓던 레자키는 위베르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아뇨아뇨그건 아니에요그냥우달이 별 말을 하지도 않았거든요추기경의 권한으로 기사단 인원들을 요청한 게 전부였어요아시다시피그이가 공적인 자리에서 별 이야기를 할 성격도 아니잖아요.”

 

그렇니?”

 

… 그런데 오라버니왜 직접 물어보지 않으시고?”

 

 위베르는 뭔가 기이하고 꺼림칙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지금 그에게 뭘 물어볼 처지가 아니라서 말이다그래… 별 말이 없었다고.”

 

 이상한 말에 레자키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위베르는 대답을 잇는 대신 기묘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행이구나우달… 네가 모든 걸 말한 건 아니라서하긴너도 나처럼 생각한 거겠지?”

 

?”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지만.”

 

 레자키가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참이었다급작스럽게 멈춘 위베르가 몸을 돌렸다깜짝 놀란 바벨과 레자키가 몸을 움찔하는데그는 길게 걸음을 떼어 둘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오른손을 허리춤에 얹고이전과 다르게 아주 빠르고 날카로운 기세로

 

오라버니?”

 

 레자키는 우달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채지도 못했다금속의 반사광이 긴 선을 남기며 날아들고 있었는데도

 

 그러나 내내 위베르를 주시하던 그녀의 부관은 달랐다앞으로 나선 바벨이 그 자리에 뛰어들며 레자키를 뒤로 밀치는 순간그 선이 그녀의 검을 든 오른팔로 겹쳐졌다아주 잠깐 두 개의 칼날이 맞닿았다가금빛으로 빛나는 위베르의 검이 바벨의 검을 가볍게 가르며 아래로그녀의 어깻죽지 위로 떨어졌다

 

 처절한 바벨의 비명이 복도에 메아리쳤다

 

아아악!”

 

 잘려나간 팔에서 뿜어지는 피가 튀어 레자키의 뺨을 적셨다밀려 넘어졌던 레자키는 멍하니 그에 손을 대었다가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위베르가 든 검에 씌워진 금빛 영혼 기류가 피를 태우며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그녀는 눈으로 보고만 있을 뿐이 장면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바벨잘린 팔오라버니잘린 팔바벨뭐지이게?

 

 이게 대체 뭐지

 

 바벨이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위베르의 오른팔을 왼손으로 간신히 붙잡았다한껏 긴장하고 있던 덕에 첫 공격에 반응할 수 있었지만그녀가 전설의 기사단장을 상대로 이만큼 한 것도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기적이 두 번 일어날 리는 없었다

 

 팔이 잘린 지독한 고통을 꾹 참으며바벨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의 단장에게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도망… 도망가요단장!!”

 

 그 간절한 목소리에 레자키의 생각이 눈에 보이는 광경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멍해진 눈동자에 그제야 이지가 서리며 한발 늦게 경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 - ”

 

 레자키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위베르가 오른팔을 뒤로 휘둘렀다간신히 그를 붙잡고 있던 부관의 왼쪽 손목이 부러지며장검이 공중에 뜬 그녀의 허리를 둘로 가르고 지나갔다비명은 없었다그저 가죽 주머니가 떨어지듯… 그리고 피가 흘러나오는 질척한 소리만이 복도를 울렸다

 

바벨!”

 

 레자키에게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위베르가 이어 횡으로 휘두른 검의 날을 타고 싯누런 참격이 복도를 파헤치며 그녀에게로 날아왔다아무리 둘이 같은 기사단장무력의 정점이라지만 위베르와 그의 격차는 어마어마했다전력으로 막은 그녀는 팔이 저릴 지경인데 위베르는 가볍게 휘두른 것에 불과하다는 듯다시 자세를 잡고 있었다폭음과 함께 복도가 박살이 나 타일과 돌조각을 사방에 날렸다

 

 레자키는 그가 다시 공격을 잇기 전에 소리쳤다

 

이게무슨 짓인가요오라버니설명하세요이 상황을!”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아.”

 

 금빛 기류를 두른 검이 맹렬히 찔러오며 사방을 짓이겼다매 공격 공격마다 확실한 살의가 실려 정확하게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레자키는 혼란 속에서 간신히 그를 받아치는 데에도 힘에 부쳤다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해 도저히 전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위베르가 그녀를 죽이려 한다사랑하는 둘뿐인 가족 중 하나그녀의 오라버니가 그녀를 죽이려 한다대체 왜어째서

 

 게다가 때마침그녀의 집중을 방해하는 악재가 하나 더 덮쳤다

 

[단장님괜찮으십니까!]

 

 통신기를 통해 다급한 기사의 목소리가 전해졌다레자키가 막 이곳의 상황을 외치려는 순간그 너머에서 비명과 금속의 마찰음이 분명하게 들렸다

 

[돌아오십시오함정입니다적독수리 기사단도 여기 있습니다그들이 우리를아악!]

 

 익숙한 부하들의 무수한 비명검 부딪히는 소리그건 그녀의 현실감을 오히려 끌어내리듯 몽롱하게 만들었다레자키는 그저 혼란만을 느꼈다위베르가 그녀를 죽이려 한다… 흰늑대 기사단 역시도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대체 왜끔찍한 악몽에 빠진 것처럼점점 생각이 둔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

 

 그리고 어떤 생각이 그녀를 확 일깨웠다정신이 든 레자키는 간신히 목을 노리고 쇄도하는 칼날을 다시 튕겨낼 수 있었다두 줄기 부딪힌 금빛이 사방으로 산란하며 둘을 다시 양쪽으로 밀어냈다그녀는 그 틈을 타서 다급하게물음을 던졌다

 

오라버니그럼 우달은우달은 어떻게 됐죠?”

 

 순간 멈칫하며 입술을 움직였지만위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나 레자키는 그 눈동자를 스치는 씁쓸한 기색을 알아보았다하려던 말을 닫아버린 그의 표정은 지독한 슬픔과 자책을 담아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떨리는 채였다

 

 그건 도저히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완벽한 답이었다

 

거짓말이지거짓말 하지 마네가네가 어떻게… 거짓말이지거짓말거짓말이지.”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련하는 목소리의 끝에는 분노가 묻어나고 있었다하지만 위베르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순간더는 진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레자키의 눈동자가 눈물로 번뜩이며공포에 질린 것처럼 떨리던 입에서 격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네가 어떻게네가아니야말해거짓말이라고아니라고 말해네가 어떻게네가 어떻게!”

 

 분노로 모든 두려움과 혼란을 잊은 레자키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고함을 지르며 저돌적으로 돌진했다붉은 안개가 낀 것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남은 건 오로지 순수한 증오와 살의뿐이었다죽여버릴 거야죽여버릴 거야죽여버릴 거야

 

 레자키는 전에 없이 거세고 격렬하게 공격을 이어갔다한 번 벨 때마다 온 힘을 다해서 짓이기듯 내리치고휘두르고찔렀다위베르는 그 힘을 맞상대하는 대신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얼핏 보면 그녀가 거꾸로 상황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얼핏 보기에는말이다

 

 그러나 분노한다고 무인이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허점이 생길 뿐심지어 자신보다 윗줄의 상대 앞에서라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수십 번의 공방 끝에 결국 과도하게 힘을 준 검이 떨리며 크게 빗나갔다위베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며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나하지만 너를 위해서다.”

 

 커다랗게 내려치는 동작 사이를 노린 위베르가 검을 겹친 채로 팔을 비틀었다손아귀 사이로 검이 미끄러지며레자키는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무심코 검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때는 이미 위베르의 칼날이 그녀의 목덜미 바로 앞까지 온 후였다그 찰나에 그녀는 주마등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모조리 행복한 기억뿐인웃음과 미소가 반짝거리는 깨져버린 보석 같은 기억들이… 

 

 위베르는 망설임 없이무심코 날아간 검을 향해 손을 뻗는 레자키의 목에 검을 휘둘렀다

 

“ 처음 적의를 보이고 이 아이와 상대하는 적은 결단코 상처 하나를 낼 수 없을 것이다. ”

 

 그리고 그 순간 레자키의 손등에 새겨진 붉은 문양이 빛을 발했다아몬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그리고 위베르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마치악마의 계약은 반드시 원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온다고 말하듯

 

 검은 정확한 경로를 갈랐다그러나 물을 베듯그녀의 목을 베는 대신 그대로 통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위베르의 입에서 처음으로 경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주 명백한 허점이었다레자키가 검을 잡는 데 걸리는 찰나가 무의미했던 것은 그 전에 목이 베였을 것이기 때문에하지만 지금그 찰나는 지나가고 말았다위베르는 증오로 타오르는 레자키의 눈동자와 정확히 마주했다

 

 날카로운 검의 감촉이 가슴을 꿰뚫고 반대편으로 지나갔다

 

 * * * 

 

 커튼을 친 창문 밖에서 스미는 빛이 반짝이며 눈을 흔들었다위베르는 잠 때문에 몽롱한 상태로 고개를 흔들었다어느새 시간은 저녁을 가리키고 있으니아무래도 한참을 잠든 모양이었다그는 조용히 몸을 가누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길게 잠든 것도그 꿈을 꾼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그의 과거대부분 잊고 파편만 남아 가끔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꿈을 꿀 때면 묶어놓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감정을 휘젓지만깨어나고 나면 남는 거라곤 조각조각 있는 흔적이 다였다

 

 그 정도라면 잊어버린 과거가 궁금할 만도 한데위베르는 그런 생각에 가차 없이 코웃음을 쳤다

 

 그가 과거에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그렇지만 지금의 그를 보건대딱히 선하거나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악당의 과거사 따위 알 바가 무엇인가어떤 사정이 있다 해도 악행은 악행이다그는 과거를 파헤쳐 자신에게 동정의 여지를 줄 생각도어쩔 수 없었다며 자위할 생각도 없었다

 

 지옥에 처박힐 학살자에게 그런 게 뭐 필요하다고

 

기분만 잡쳤군하여튼.”

 

 혀를 찬 위베르는 자신이 무엇을 하다 잠들었나 떠올려 보며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종이 뭉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할 일이 산더미였다빼앗긴 대륙에 대한 이야기깨어난 별의 아이들을 처리한 내용과 작전 계획들

 

 이제 이 중에 중요한 것들을 추려서 교황 성하께 보고하고명령을 받으면 그걸 다시 처리해야 했다그는 찜찜한 꿈결의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애써 치워버렸다어쨌든 그것들은 쉽게도 사라졌다

 

 그가 잠들기 전에 들여다보았던 종이와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는

 

추기경 레자키작전 중 전사.’

 

 멈칫한 위베르는 텅 빈 채 짤막한 소식만을 담고 있는 그 종이를 잠시 바라보았다처음 봤을 때도 그랬듯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적어도 슬픔은 아닌 무언가여동생의 전사 소식에 그렇게 무덤덤한 것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서로가 혈연이라는 사실이 끝이었다. ‘누군가의 기억을 지워버리며그녀에 대한 기억도 거의 다 사라진 것이다위베르는 그 뒤로 그녀와 대화한 적도 거의 없었다그저 파편처럼 남은 추억과 얼굴들만이겨우 그들 둘 사이를 증명할 뿐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정신에 파문을 주어 조금 전처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꿈을 꾸게 할 수 있는 정도가 다였다왜냐하면사실상 남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지나가는 인연 정도였으니까슬퍼할 이유가 없으니까그리고그리고

 

 그 정도면 되겠지위베르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가를 꾹 눌렀다졸음이 많은 체질도 아닌데 희한하게도 잠이 덜 깨었는지시야가 흐려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막 일어나서인지 가슴이 약간 답답하고눈가에도 물기가 축축했다그게 다였다그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던가그는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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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강신청과 이삿짐 정리가 끝났고도비는 자유가 되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오래 기다려주신 여러분꼐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아잇 싯팔 가구 10개나 옮겼다고 아 ㅋㅋ다음편부터는 빠릿빠릿하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위베르 편은 오랜만에 비극을 쓰느라 재밌긴 했지만 정말 쓰기 힘들었음자작 플롯이니까 순수하게 창작으로 해야 하자너 ㅋㅋ그래서 기존 캐릭터 세 명의 모티브를 좀 재해석하고 대비해서 썼음

 하나는 1편에 나온 칸죽은 지인들을 그리워하는 점에서 유사한 점이 있음하지만 칸은 그들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얘는 그들을 전부 지워버림

 둘은 2편의 메이둘 다 희생과 정의롭지 않은 선택을 내릴 필요가 있었음그렇지만 메이는 냉철해도 가까운 사람들을 아끼고 꽤 감정적인데얘는 완전히 속이 시커멓게 타 있음

 마지막은 안 나왔는데 사령관임사령관의 행동 동기는 (내가 해석하기로는가까운 사람들을 지키려는 건데얘는 뭔지도 모를 동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기억까지도 전부 희생함

 

 레자키는 위베르의 방법에 동의했기 때문에, 저러고도 결국 교회에 계속 남을 수 있게 됨. 다만 트라우마가 생겨서 기사단장을 그만두고 추기경이 된 것. 그리고는 지옥행, 그다음에 천국에서 우달과 재회할지는 글쎄… 

 

 어쨌든 철충 편은 이걸로 끝이제 아메리카로 떠날 거임오메가 제외 레모네이드 충성파의 처우는 다음 화까지 보고 정함읽어주셔서 라스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