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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페이아가 나의 집으로 온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첫 번째 아침에 각자의 솔직한 감정을 서로에게 어느정도 털어놓은 후, 나를 대하는 하르페이아의 태도가 조금 편해진 것이 느껴진다.


역시 시작이 반이라는 옛 현인들의 말씀은 틀린 것 하나 없다.


물론 나는 그녀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더 많지만.


나는 지금 하르페이아를 품 속에 안고 그녀와 함께 책을 읽고 있다.


하르페이아가 내 집에 온지 며칠 안 되었을 무렵, 그녀는 아직도 불안한지 구석에서 넋 놓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려왔다.


대부분의 하르페이아 모델들은 책을 좋아하니까.


별 생각 없이 빌려온 책들을 보고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귀여운 얼굴이 떠오른다.


아, 내 품 속에서 하르페이아의 손가락이 꼬물거린다. 책 페이지를 넘기고 싶다는 신호다.


나는 페이지를 한 장 넘겨준다. 정말 손이 많이 간다니까.


오른쪽 팔이 없고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하르페이아는 집에서의 일상생활조차도 많이 힘겨워했다.


한쪽 팔이 없어서 옷을 입고 벗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한쪽 눈이 없어서 거리계산이 잘 안되는지 자꾸만 넘어지거나 어딘가에 머리나 발가락을 세게 박고 낑낑거리면서 주저앉곤 했다.


게다가 하르페이아의 복부를 가득 채운 커다란 흉터들 때문인건지, 그녀는 허리를 굽히는 것조차 고통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곤 했었다.


그런 그녀를 보다못한 나는, 조금씩 그녀 옆에서 그녀의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물론 하르페이아는 인간인 내가 자신을 돌봐주는 것이 몹시 어색하고 미안한지 한사코 나의 도움을 사양하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식사도 제대로 못해서 미트볼 스파게티를 볼따구에 치덕치덕 바르고 있는 하르페이아를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결국 나는 억지로라도 하르페이아에게 도움을 주곤 했고, 처음에는 미안함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던 그녀도 이제는 좀 나아졌는지 은근히 먼저 내 도움을 기대하는 눈치를 보내기도 한다.


방금 전의 꼬물거림이 그런 신호 중 하나다. 또 그러네. 페이지를 한장 더 넘겨준다.


보다시피 하르페이아는 말을 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녀는 나랑 대화하는 것이 아직은 좀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감으로 알아채야만 했었다.


음, 뭔가 좀 호구잡힌것 같은데. 흐으음...


문득 떠오른 그 생각을 애써 털어내며, 나는 시계를 확인한다. 시침과 분침이 지금 막 서로 지나치며 황혼이 되었음을 알린다.


밖에서 아름다운 오렌지빛 노을이 하르페이아의 금빛 머리를 눈부시게 빛내고 있다.


나는 책을 책갈피로 표시한 후 천천히 덮는다. 그걸 본 하르페이아가 시계로 시선을 옮긴다.


"밥 먹자. 하피."


"앗.. 네 주인님..."


주인님. 그녀가 나를 부르는 새로운 호칭.


그녀가 우리 집에서 보낸 두 번째 밤, 하르페이아는 혼자 자는 것이 무섭다며 내 옷깃을 잡고 때를 썼다.


벌벌 떨리는 손. 몸만 돌려도 털어낼 수 있을만큼 내 옷깃을 힘없이 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겠다는 그 상기된 표정. 


"인간님... 제가 조금만.. 조금만 곁에 있으면 안 될까요..?"


"주무실 때 절대 방해하지 않을께요.. 네...?"


"아 침대 밑 괴물은 못된 어른들이 지어낸 거라니깐. 안심하고 그냥 자렴."


"......"


"..끄응... 그래.. 어째서인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 너무 어두워요..."


"??.. 당연히 어둡지. 밤인데. 불 켜고 잘래?"


"거.. 거기도 무척이나 어두웠어요.. 그 차가운 방 안에 그림자들이... 어두울 때 인간님이 안 계시면.. 그 생각이 자꾸 나서.. 무서워요....."


날 바라보는 그녀의 예쁜 푸른 눈이 금방 울망울망해진다.


아잇, 이 요망한 것이.


"그래.. 뭐 같이 안고 자면 따뜻하긴 하겠네. 자, 알았으니 들어가자."


하르페이아가 내 손길을 따라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곤 그녀 옆에 누운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몸을 맞댄다.


..? 방해 안 한다며...?


나의 팔을 부드럽게 압박하는 하르페이아의 커다랗고 푹신푹신한 가슴이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여자와 밤을 보내본 것이 10년도 더 된것같은데.. 역시 이런건 홀아비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어둠 속에서 그 야릇한 감촉만이 느껴지고, 못된 생각이 스멀스멀 내 머리를 타고 오를 때, 그녀가 작게 말을 꺼낸다.


"인간님...?"


"어으..?! 어.. 어, 응. 왜,ㅇ,왜 그러니?"


시팔 죽어라 나새끼. 제발 죽어.


"정말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것 알지만.. "


실례되는 행동인 거 알면 부디 이러지 마렴..


"인간님을.. 제가 주인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 이건 또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야. 오늘 밤은 갈고리 수집이 참 풍년이여.


"하하.. 주인 등록도 안했는데 주인님이라니.."


"그래도.. 인간님께서 제 주인님이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그녀가 또 불쌍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본다.


"안되나요..?"


얘는 아무리 봐도 요물이 맞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 이 요물에게 단단히 홀렸었나 보다.


"... 그러렴."


마지못해 승낙하는 나의 말에 그녀가 아주 조금, 정말 눈치채기 힘들 만큼 아주 작게 살풋 미소짓는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주.. 주인님..."


그 말을 끝으로 하르페이아는 내 팔에 이마를 대고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머릿속을 가득 채운 복잡한 감정에 오랜 시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다음날부터, 그녀가 나를 인간님 대신 주인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마 하르페이아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그녀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내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뭐, 나중에라도 들을 기회가 있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갈색으로 변한 고기가 음식이 완성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저는 스테이크에오!


내가 음식을 접시에 담는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하르페이아가 식탁으로 쪼르르 다가가서 앉는다.


나 역시 접시 두 개를 들고 그녀 바로 옆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고기를 가위로 조금씩 잘라준다. 그녀는 원래 오른손잡이였는지 포크질 말고는 식기도 잘 다루지 못한다.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하르페이아에게 스튜를 한 숟갈 떠서 입에 가져다준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부드럽게 숟가락을 문다. 입술 위로 조금 흐르는 액체를 본 나는 휴지로 그녀의 입 주변을 살살 닦아준다.


하르페이아가 눈을 살짝 감고 입술을 나에게 맡긴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도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빵빵한 그녀의 볼을 가만히 보고있으면 내 마음이 다 편안해지는 것 같다.


하르페이아와 함께 식사를 마친 나는 곧 그녀를 씻길 준비를 해야 한다.


처음으로 우리집 화장실을 본 그녀의 모습이 생각난다.


경기를 일으키며 넘어진 후 엉금엉금 기어와 날 붙잡는 그녀. 내게 죄송하다고, 제발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흐느끼던 그녀.


물론 대체 무슨 일인지 알 턱이 없던 나는 그녀를 달랜 후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테마파크에서의 '업무' 전에는 항상 이런 곳에서 깨끗이 몸을 씻어야만 했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저 잘못했다고 되뇌이며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있는 하르페이아를 외면하지 못한 나는,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그녀를 씻겨주게 되었다.


이거야 원... 대체 누가 주인님인 거지..


그녀의 옷을 벗겨준 후, 온수를 틀어 하르페이아의 나신을 천천히 적신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감고 가만히 물을 맞아 준다.


나는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 같이 민감한 부위에 손이 닫지 않게 주의하며 하르페이아의 몸에 거품칠을 하고 머리를 감겨주었다.


하르페이아의 몸은 정말 환상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나는 그 상처투성이 몸에게 내 욕망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행히 화상자국과 흉터를 제외한 몸의 피멍과 까진 상처는 거의 다 없어졌다. 일주일만에 그 많은 상처가 이정도나 낫다니. 그녀들의 예쁜 외형 때문에 잊고 살기 쉽지만, 역시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는 초인이 맞음을 다시 한번 체감한다.


샤워를 끝낸 하르페이아의 몸을 수건으로 꼼꼼히 닦이고 밖으로 내보낸다. 가슴이랑 엉덩이는 너가 좀 닦아. 어허, 씁.


나 역시 하르페이아를 씻기느라 홀딱 젖은 옷을 벗은 후 대충 씻고 나온다. 밖에 나오니 그녀가 몸의 물기를 마저 닦고 속옷만 입은 채 소파에 앉아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엉덩이가 다 드러난 작은 속옷. 아무래도 그녀의 전투복이 하이래그인 만큼 평소에도 저런 속옷이 편한가 보다.


나도 트렁크 팬티랑 티셔츠만 빠르게 찾아 입은 후 그녀 옆으로 가 드라이기로 하르페이아의 그 길고 풍성한 금발을 말려 준다. 이게 제일 오래 걸린다.


뽀송뽀송해진 그녀에게 잠옷을 입히면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있다. 나는 아까 읽던 책을 하르페이아에게 조금 더 읽게 해준 후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방의 불을 끄면 그녀의 보석같은 푸른 눈이 희미한 거리의 빛에 반짝인다.


그런 그녀를 침대 안으로 밀어넣는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하르페이아가 내 코트를 껴안고 몸을 동그랗게 만다.


내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입혀줬던 내 가을 코트는 그렇게 그녀의 곰인형이 되고 말았다.


오늘도 그녀에게서 내 코트를 구해주지는 못할 것 같다. 미안해 코트야. 하르페이아의 품 속에서 강하게 살아가렴.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고맙구나. 하피. 너도 좋은 꿈 꾸렴."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나 역시 눈을 감으며 상념에 빠져든다.


최근 들어 나의 하루가 부쩍 빨라졌음이 느껴진다. 그녀가 없을 때는 밤 늦게까지 술처먹다 잠드는 일이 많았는데...


어둠 속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던 그곳을 회상한다.


그곳에서 만신창이의 소녀를 본 순간 느꼈던 측은지심. 처음엔 오직 그것만이 전부였었는데.


이 작은 소녀는 어느새 나의 일상의 대부분이 되어 있다.


나의 무료한, 하지만 실패한 삶 속에 선물처럼 들어온 이 작은 금발머리 소녀.


나는 그저 그녀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어떻게 할지 정하겠다. 오직 그 목표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그녀는 그런 못난 나를, 주인이라며 대접하고 의지해 주었다. 그런 내가 그녀 자신의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 덕분에 나도 다시 한번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소녀가 오직 실패와 절망 뿐이었던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면, 절대로 이전과 같은 결말만은 맺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다시 본다.


하르페이아의 뺨에 있던 멍자국이 거의 다 사라진 것이 보인다.


그래. 그녀가 바라듯, 나 또한 바란다.


다시는 그녀가, 멍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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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개강 준비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 실수로 글쓰기 탭을 지워버려서 머리가 하얘졌었어요.. 하루 전에 갑자기 기숙사를 옮기라고 하면 어떡하냐구. 그러면서 돈도 더 달래. 나쁜 놈들.

개강 전까지 최대한 진도 뽑고 싶었는데 그것도 못했어요. 와타시 정말로 분충이 따로 없는 데스..

오늘껀 사건과 사건 사이의 쉬어가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좀 재미없을 듯.. 심지어 분량도 짦아요.

남자는 그냥 이름 없이 할꺼에요. 아 남자놈 이름 따위 안 궁금하다구 ㅋㅋ 다들 그렇죠?

남자의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로 생각중. 좀 나이들었지만 대령 치고는 젊은 나이. 묘하게 틀딱체인 이유가 있었슴미다.

빠른 시일 내로 다음편을 올릴테니 용서해 주세오..

대신 오늘은 그림이 두배! 와! 할페가 깔끔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