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3월 13일 2335시, 오르카호 치장창고

[그 앞 여섯 번째 블럭까지는 인기척이 없습니다. 그대로 쭉 가주세요.]
“네에~.”

무선 리시버를 통해 들려오는 탈론페더씨의 지시에 따르면서 심야의 복도를 걸어갑니다. 품 안의 PP박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목소리에 기운이 없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하아, 일일히 CCTV를 확인해주지 않으셔도 탑돌이mk.2를 데려오면 충분한데요.”
[…확실히 탑돌이의 탐색능력은 저도 인정하지만, 만에 하나 탑돌이를 대동한 채 복도에서 누군가와 조우할 경우 그렘린씨의 취급이 한밤중의 배회자에서 괴한으로 변해버리니까요.]
“외로운 사람의 말동무에서부터 가사전반까지. 각 가정에 한 대씩은 필요한 탑돌이mk.2의 매력을 왜 다들 몰라주는 거죠?”
[장비시연회 때 일으킨 사고때문이 아닐까요? 나이트 앤잴 대령은 메이 대장님이 아직도 종종 악몽을 꾼다고 푸념하던데.]

서류심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만능 이족보행로봇이 시연때 조금 오작동을 일으킨 것 만으로 모두에게 핵폐기물 취급이라니. 납득할 수 없습니다.

“물리적인 피해는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그저 주인의 귀가를 반기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메이씨에게 다가간 것 뿐인데.”
[글쎄, 양 손목에서 무지갯빛으로 발광하는 딜도를 꺼내든 채 믹서기같은 기세로 상체를 회전시키면서 달려오는 로봇이라… 저도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데요.]
“……”

확실히, 서류심사 통과로 너무 흥분했던 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커다란 유모차에 부딪쳐 쓰러진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주긴 커녕 변기에서 튀어나온 독사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이트 앤잴씨에게 울며 매달리던 메이씨의 반응이 얼마나 상처가 되던지. 역시 잘못된 건 제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덕분에 실패할리가 없다며 양산한 2개 소대급 탑돌이mk.2들은 AGS격납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요. 판매된 건 단 한 대. 팬텀씨가 말연습 상대로 구입해 간 78번 뿐입니다만, 그 녀석은 최근 고전명작영화에 대단한 흥미를 가진 것 같습니다. 그런 기능을 넣어준 기억은 없지만 이 엄마도 자식의 성장에 가슴이 벅차요.

[아쉬운 건 알겠지만 도착적인 수집품을 운반하며 탑돌이의 팔꿈치에서 드러난 볼베어링을 엿보는 플레이를 즐길 생각은 이만 접어주세요.]
“크윽, 가끔씩은 서로 너무 잘 아는게 싫어지네요.”
[별 말씀을요. 거기에서 왼쪽으로 돌면 치장창고의 뒷문입니다. 출입기록을 확인하는동안 기다려주세요.]

잠시 문 앞에 서서 지갑에 입은 피해를 곱씹는 동안 리시버 너머로는 탈론페더씨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안전을 확인합니다. 이 창고는 오전에 막 우리 발할라가 수색을 마친 상황. 이틀 뒤 호드가 수색할 때까지 아무런 예정도 없는 곳이지만 수집품이 노출되었을 때의 리스크를 생각하면 확인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19시를 끝으로 출입기록은 없어요. 들어가도 좋아요.]
“네에~.”

탈론페더씨에게 대답하고 미리 빼둔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불을 켭니다. 이미 오전에 수집품을 숨길만한 장소는 파악해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김이 빠지네요.

“F-14, F-14, F-14… 여기네요.”

창고 바닥에 수집품이 담긴 박스를 내려놓습니다. 남은 건 위쪽에 공간을 만들어 PP박스를 넣어두고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식료품 상자들이 보관되고 있는 칸으로 손을 뻗어 박스 하나분의 공간을 확보합니다. 아니, 확보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렘린 언니?”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돌아보니 멸망전의 유산을 담은 상자, 그 위에 덮힌 모포 한 장이 꾸물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렘린 언니, 맞아요? 이젠 언니까지 훔쳐먹으러 온 거에요?”
“아니! 아니아니아니!”

모포 아래에서 이제 막 고개를 내민 발할라 보급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커다란 눈물방울이 맺혀있습니다. 황급히 안드바리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 추측을 부정합니다.
여기에서 안드바리가 울음이라도 터뜨렸다간 몰려든 바이오로이드들에 의해 비밀리에 사령관을 애호하는 사조직의 실체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구성원 전원의 사회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설마, 잠복근무라니. 안드바리 보급관이 거기까지 몰려있었을 줄은….]

어안이 벙벙한 탈론페더씨의 말을 들으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짜냅니다. 이렇게 된 이상 탈론페더씨와 직접적으로 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단을 생각해내야 합니다.

“아니야. 언니는 식료품을 훔치러 온 게 아니라 그냥 탑돌이의 부품들이 잘 자고있나 확인하러 온거야.”
“정말요…?”

코를 훌쩍이면서도 안드바리는 눈물이 잦아든 얼굴로 저를 올려다봅니다. 외관상 LRL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우리 막내 보급관조차 아직 완성품도 아닌 톱니바퀴나 베어링의 숙면을 제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을거라고 믿는 눈치입니다. 처음으로 저 자신의 사회적 신뢰도에 의문이 생겼지만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리시버 너머에서는 분주하게 타자를 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마도 대화를 엿들은 탈론페더가 장비관리시스템에 들어가 가짜로 붙여둔 바코드에 정보를 채워넣는 중이겠지요.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사이라 정말 다행입니다.

[완료 했어요.]

차마 대답하지는 못하고 마음 속으로 탈론페더씨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습니다.

“언니가 내려놓은 박스, 패드로 확인해볼래?”

안드바리의 손을 마주잡고 상자 앞으로 인도합니다. 상자의 내용물을 생각하면 위험부담이 큰 행위지만 이대로 두고 간다고 신뢰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제 눈에 보이는 곳에서 확실하게 확인시켜주는게 낫겠지요.
안드바리는 망설이면서도 패드에 전원을 키고 조회를 시작합니다. 카메라로 상자의 바코드를 스캔해보면 확실히 탑돌이의 부품목록이 화면에 표시되었습니다. 이걸로 우선 한 시름 놓았네요.

“그렘린 언니.”

완전히 선잠에서 깨어났는지 좀 더 맑아진 보급관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고막을 두드립니다.

“응? 왜 그러니?”
“전에 알비스 언니랑 LRL 언니한테 속은 적이 있어요.”
“어, 어떻게?”
“두 명이서 식료품 상자의 바코드를 위조해 빈 상자를 가져다 놨었거든요. 제가 그 가벼운 무게감에 눈치챘을 때는 이미 설산에서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초코바가 언니들의 뱃속으로 사라진 뒤였어요.”

분대 하나가 전멸했네요. 하고 배시시 웃는 안드바리의 사랑스러운 표정을 배경으로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흐릅니다.

“아앗, 무슨 짓이에요!”

보급관이 손을 뻗기 전에 박스를 안아올려 머리 위로 치켜듭니다. 일단 이렇게 들고 있으면 키 차이때문에 안드바리는 상자에 손댈 수 없어요. 폴짝폴짝 뛰어오르는 안드바리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안 그래도 바보 사령관님때문에 물자가 부족한데 이 이상의 약탈을 허용할 순 없어요! 여기서 자백하시면 제 선에서 봐드릴 테니까!”
“용서하렴! 언니는 지금 안드바리를 어른들의 추악한 실체에서 보호하고 있는거야!”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봐요!]

10분 전까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수라장이 펼쳐집니다. 방금 수신을 끝으로 더 이상 탈론페더씨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해요!
어어?!
순간, 안드바리가 덮고있던 모포가 발에 밟혀 미끄러집니다. 몸이 기울면서 박스 안의 내용물이 쏠리고 포장이 뜯어져서…!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건 비교적 가벼운 트럼프 세트들과 액자.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어차피 떨어진다고 크게 손상될만한 것들도 아니고, 액자는 깨지면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유미씨의 술병은.

“흐읍!”

넘어지고 있는 몸을 더욱 더 기울여 힘을 줍니다. 발목에 기분나쁜 통증이 내달리지만 무시하고 손을 뻗습니다. 유미씨가 저 술병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콧김을 뿜으며 사령관님의 양말을 벗기던 그녀의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그 도덕관념에 곁눈질도 주지 않는 순수함을 제 실수로 빼앗아버릴 수는 없어요!

“아야야…….”

시간으로 따지면 찰나.
발목은 욱신거리고 바닥을 미끄러진 등쪽은 쓰라리지만 품 안의 술병은 무사합니다. 저는 새는 곳이 없는지 내려다보고 안도의 한숨을….

쿵!

한 박자 늦게 떨어진 PP박스가 사랑스러운 보급관의 앞에 착지합니다. 무심코 상자 안을 들여다본 안드바리가 돌처럼 굳어버렸습니다.
낙하의 충격으로 스위치가 들어간건지 모터음이 굉장해요. 점 하나까지 완벽재현된 사령관의 하반신이 저질스러운 허리놀림을 피로하며 금방이라도 상자 안에서 기어나올 듯 격렬하게 날뛰고 있습니다. 그 생동력, 갓 잡은 참치에도 뒤지지 않네요.

“하아아…….”
“안드바리!!”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가는 보급관의 이름을 부릅니다. 제 손이 닿을리가 없는 거리였지만 다행히 기절한 안드바리의 어깨를 붙잡아주는 손이 있었습니다.

“휴우,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안드바리를 안아든 탈론페더씨를 보고 이번에야말로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안심할만한 상황은 아닙니다만.

“안드바리 보급관은 제가 수복실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렘린씨는 뒷정리를 마친 뒤 저희 호드의 I-11에 박스를 올려놔주세요.”
“고마워요. …안드바리는 괜찮을까요?”
“밤새 간호해야죠.”

잠시 둘 다 침묵에 잠겨 주변을 둘러봅니다. 쏟아진 트럼프 카드가 몇 세트, 봉인이 뜯어진 PP박스와 아직도 날뛰고 있는 실리콘 덩어리…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어, 온갖 감정을 담아 내뱉은 뒤 다시 눈을 뜹니다. 정리가 끝나면 저도 병문안 찾아갈게요.



                                                                                               

- 2021년 3월 16일 1640시, 오르카호 통신창고

“우우, 설마 이 시간대에 옮겨야 할 줄은 몰랐는데….”

오르카 호의 통신창고에서 문을 살짝 열어 복도를 살펴봅니다. 설마 수색종료 하루 전에 수집품들을 끌어안은 채 한 낮의 복도를 가로지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최대한 마주치는 인원이 적은 동선으로 짰어요.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태연하게 나가주세요. 이럴 때는 오히려 당당한 편이 괜한 의심을 사지 않습니다. 그렘린씨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면 곤란하니까요.]

무전기 너머로 잠시동안 괴괴한 침묵이 흐릅니다. 3일 전 치장창고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의 전말은 저도 전해들었습니다. 충격적인 경험으로 안드바리씨의 단기기억이 날아간 덕에 사건수습 자체는 간단하게 끝났다고 합니다만, 역시 언니로서 죄책감을 느꼈겠지요. 오랜만에 장비들을 챙겨서 자원수집에 나선 그렘린씨의 다크서클은 안드바리씨의 함박웃음과 비례하는 추세로 점점 짙어지고 있습니다.

“…우연에 기대지 않아도 확실하게 기억을 날려버릴 수 있는 장비가 있는데도요?”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장비백 안에 손을 뻗어 전기충격기를 작동시켜봅니다. 성체 하마도 실신시킬 수 있는 위력의 푸른 전광이 믿음직스럽네요. 아직 어디선가 나타나 매번 전선을 갉아놓는 친칠라를 해치우는데는 이르지 못했습니다만 인간 정도의 크기라면 노리는데 문제는 없습니다.

[흉기의 사용은 허가할 수 없어요. 이것도 유미씨의 사회성을 회복할 기회라고 생각해보는게 어때요? 아는 사람과 마주치면 밝게 인사하기. 웃는 얼굴이라면 괜찮을 거에요.]
“우우….”

오지에 처박혀 수십 년. 대화상대는 안테나와 발전기와 상사뿐이라는 환경에서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됩니다. 오히려 지금 이 정도도 많이 회복한 건데….

“…알았어요. 그러면 확실하게 모니터링 해주세요.”

심호흡을 하고 한 걸음, 박스를 끌어안은 채 문을 나섭니다. 일과가 끝난 덕분인지 복도는 활동복을 입은 부대원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부딪치지 않도록 최대한 벽에 밀착한 상태로 걷다보니 의외로 저를 의식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차점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거기까지 도달하면 성공한거나 마찬가지에요. 3층 AGS격납고에 박스를 넣어주시면 오늘의 작업은 끝입니다.]
“의외로 간단하네요.”
[다 끝나기 전까지는 그런 말 하는거 아닌데….]

? 왠지 모르게 탈론페더씨가 낙담한 것 같지만 걱정할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회수를 제외하면 마지막 작전이니만큼 모두들 백업으로 대기중이고, 괜찮겠지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3층을 누릅니다. 잠수함이니만큼 무소음으로 설계된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있기도 잠시, 미닫이식 철문 너머로 한 발 내딛은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은 호러영화의 세계였습니다.

“…저, 탈론페더씨? 왠지 모르지만 복도의 조명이 절반정도 꺼져있는데요.”
[……, ….]

리시버 너머로는 노이즈밖에 들려오지 않습니다. 통신병으로서도 연약한 소녀로서도 악몽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불길한 느낌에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는 찰나, 두꺼운 철문까지 눈 앞에서 닫혀버렸습니다. 층수를 표시하는 액정에도 불이 꺼집니다.

“탈론페더씨! 탈론페더씨!”
[…, ….]

눈 앞에서 저를 비웃는 친칠라의 환각은 피해망상이겠죠. 하지만 고립지에 들어선 순간 무선통신이 차단되는 타이밍에 악의를 느끼지 말라는 것도 무리에요.
다시 복도를 돌아보아도 인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원을 기다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애초에 제 위기상황을 저쪽에서 눈치챘을지도 불명입니다.

“…콧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덮쳐오는 귀신은 못 봤어요.”

등을 따라 타고 올라오는 오한을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아무도 없는 복도를 나아갑니다. 기분 탓인지 발소리가 메아리치며 제 뒤에 따라붙는 것 같습니다. 그에 지지않을 정도로 크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반 쯤 지나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탕!
“히익!”

폭음과 함께 공기덩어리같은 압력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어서오세요. 커넥터 유미.”
“아, 브, 블랙 리리스씨?”

어둠 속에 녹아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하얗고 검은 사령관님의 경호대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철충을 향하고 있을 때는 한 없이 믿음직스럽던 총구를 저를 향해 겨눈 채.

“이,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블랙 리리스씨도 장비를 살펴보러오신 건가요?”
“시치미 뗄 생각 하지 마시죠. 이미 여러분의 통신은 모두 들었답니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비상주파수로 통신량이 늘었다 싶었더니 이런 깜찍한 계획을 짜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 뭐에요? 유미씨도 다시 봐드려야겠네요.”

입술을 핥는 리리스씨의 동작은 왠지 모르게 뱀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습니다. 덜덜 떨리는 발로 무심코 뒷걸음질치다가, 그 총구가 다리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멈춰섭니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는데. 저도 선체에 구멍을 뻥뻥 뚫을 정도로 생각없지는 않거든요. 이거, 고무탄이에요.”

기뻐할만한 정보를 들어도 전혀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리리스씨와 저는 운동능력이 너무 달라요. 여기에서 방향을 틀어서 전력질주한다고 해도 분명 인적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박스, 순순히 내놓으신다면 상처는 입히지 않을게요. 여러분들이 고생해서 모아주신 수집품인걸요. 오늘의 리리스는 비교적 착한 아이….”
[…씨! 유미씨! 지금 지원병력이 가고 있어요! 조금만 버텨주세요!]

아마도 리리스씨는 회복된 통신내용보다 먼저 선체를 두드리는 발소리들을 들었겠죠. 순식간에 제 앞에서 거리를 벌리고 여기저기에서 열리기 시작한 격납고 문을 빈틈없이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일사분란하게 오와 열을 맞춰 뛰어나온건….

“탑돌아!”

합쳐서 네 개 대열, 저와 리리스씨 사이를 가로막은 건 그렘린씨가 개발한 탑돌이mk2들이었습니다. 2개 소대규모라고는 해도 블랙 리리스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그들의 듬직한 뒷모습에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습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건지 리리스씨도 당장 발포하는 대신 여러 개체를 한 번에 노릴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해 상황을 보고 있네요.
그렇게 대치상태가 유지되는 와중에, 왠지 유일하게 흰색 양복을 입고 두꺼운 구두를 신은 개체가 대열 앞으로 나섭니다. 그 녀석은 기묘한 각도로 다리를 벌리고 멈춰서서, 한쪽 손을 하늘을 향해 뻗고, 검지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켜서….

“토, 토요일 밤의 열기!!”

지휘개체가 디스코 댄스로 유명한 명작영화의 포스터를 재현한 순간, 탑돌이들이 일제히 손목에서 딜도를 꺼내 맹렬한 기세로 상체를 회전시키며 리리스씨에게 달려듭니다. 어둑어둑하던 복도가 순식간의 일곱 빛깔의 조명으로 물결치며 어딘가에서 음악이 들려올 것 같은 분위기로 변합니다. 건카타로 대응하는 리리스씨의 뺨을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크윽. 뭐죠, 이것들은?! 새로운 철충인가요?!”

리리스씨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탑돌이들을 향해 총을 연사합니다. 하지만 고무탄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74쌍의 흉기를 방어하기에는 저지력이 부족합니다. 화려한 조명에 감싸인 채 상체를 360도 회전시키는 모터의 구동음에 밀려 리리스씨는 점점 복도 너머로 사라져갑니다.

“고마워요, 존 트라볼타!”

흰 양복을 입은 탑돌이가 한 순간만 몸을 돌려 손을 치켜들어 주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요. 리리스씨가 수세에 몰린 틈을 타서 어디론가 도망치지 않으면…!

“이쪽임다!”
“어?! 브라우니씨, 어떻게?!”
“팬텀씨의 광학미채후드를 빌렸슴다! 이쪽으로 오십셔!”

허공에서 나타난 브라우니씨에게 이끌려 모르는 길을 정신없이 뛰어갑니다. 자세히 보면 발 밑을 따라 비상계단을 가리키는 표시등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일단 이 골목으로. 전달사항이 있슴다.”
“허억, 허억. 그냥, 이대로, 도망치면 되는거, 아닌가요?”
“리리스씨는 그렇게 약하지 않슴다. 이대로 도망쳐도 금새 따라잡힐검다. 게다가…….”

브라우니씨가 PP박스의 포장을 거칠게 뜯으며 말을 잇습니다.

“격납고에서의 교전으로 곧 비상경보가 울릴검다. 그렇게되면 수집품의 발각은 피할 수 없슴다.”
“!”

절망적인 상황에 숨을 들이킵니다. 패닉에 빠질뻔한 순간, 브라우니씨가 양 손으로 제 뺨을 붙잡았습니다.

“걱정마십쇼. 모두의 수집품은 제가 지켜드리겠슴다.”
“어, 어떻게요?”
“술병, 액자, 탈론페더씨의 시제품은 제가 확보해서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숨어있겠슴다. 유미씨는 박스를 챙겨서 도망치다가 따라잡힐 것 같으면 트럼프 카드를 허공에 흩뿌리십셔.”
“그럴수가! 이건 브라우니씨가 안그래도 적은 월급을 반년이나 모아서 제작한…!”
“돈은 그냥 하수구에 빠뜨린 셈 치면 됨다. 그보다 민간인을 끝까지 보호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함다.”

아아, 덧없이 웃는 브라우니씨의 얼굴이 눈부십니다. 저도 그렘린씨도 지금까지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브라우니씨가 무사히 다시 합류하는 날에는 반드시 제 비장의 담금주를 맛보여 드릴게요.

“큭, 어디로 간 거죠, 커넥터 유미!”
“빨리 가십셔. 총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슴다.”

후드를 뒤집어쓰는 브라우니씨의 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집니다. 저는 눈물을 훔치며 가벼워진 박스를 끌어안은 채 비상계단을 뛰어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쓰고나서 너무 오래된 밈인것 같아서 레퍼런스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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