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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좋았다.

 

나는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모자라지만 견실하고,

 

궁상맞지만 진실한 인간이었다.

 

가난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감사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나의 모습이 무엇인가 한다면,

그건 바로 소중한 사람을 아낄 줄 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중한 사람을 상처 주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미호야.

 

눈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저 목소리.

 

가늘게 떨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네 앞에서 약한 모습 따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6년 동안 대단한 연기를 했다. 

 

나는 작고 가난하고, 그리고 약한 애새끼일 뿐인데, 

 

무엇이 날 너의 앞에만 서면 수퍼맨으로 보이고 싶게 했을까.

 

그런 내가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다니.

 

확실히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너에겐.

 

나는 눈물을 닦고 미호와 시선을 맞추었다.

 

"괜찮다면서."

 

"괜찮아."

 

"울었잖아."

 

"눈에 먼지가 좀 들어가서."

 

"거짓말좀 하지 마 이철남. 누가 먼지 좀 들어갔다고 그렇게 울어?"

 

"너 거짓말이 제일 싫은 거 아니었어?"

 

"여긴 왜 왔어?"

 

"아까 밥 먹고 집에 들어가는데, 니가 뛰어가는 걸 봤어. 

그런 걸 보여주고 왜 물어봐 그딴 걸..."

 

"야, 거짓말 해서 미안해. 사실 좀 힘들었어. 근데 이제 울고 나니까 개운해."

 

"그럼 왜 밥 먹으러 안 왔었던 건데? 힘들었잖아? 거짓말은 왜 한 건데? 응?"

 

"밥은 먹은 거 맞아? 설마 계속 뛰엇던 거야 지금까지? 아빠는 어디 가셨는데?"

 

"왜 그랬어... 나 정말 신경 안 쓰는데, 뭐가 그렇게 불편했는데?"

 

"니네 집이 가난해서 나 신경 써 준거야? 불편할까봐? 응? 말 좀 해봐"

 

두근. 하고, 순간 가슴이 크게 뛰는 듯했다.

 

그 누구에게 듣더라도 미호에게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지는 안다. 

 

미호가 날 비웃을 리가 없다는 것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그 말을 태연하게 받아넘길 수가 없었다.

 

그냥, 이제는 한계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어디엔가 풀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미호의 말이 송곳같이 내 가슴을 쑤시고 나자, 갈 곳 없던 압력이 내 가슴의 구멍을 타고 터져나왔다.

 

"..."

 

"야. 김미호."

 

"누가 여기 와 달랬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데? 내가 불쌍하냐? 만만하냐?"

 

잘 알고 있다. 이건 화풀이일 뿐이라는 것을.

 

미호의 표정을 보면, 그딴 건 일목요연하다.

 

"엄마 없는 새끼 챙겨주니까 좀 착해진 거 같냐? 거지새끼한테 동전 하나 던져준 기분이라도 들었냐?"

 

엄마가 죽은 것과 미호는 아무 상관도 없다. 미호는 우리 엄마를 정말 좋아했다.

 

"같이 거지 동네 사는 것들끼리 잘 지내자고 친한 척 엉겨붙는 새끼 보고 속으로 비웃으면서, 응? 재미있었어?"

 

자기도 나처럼 가난하다고, 미호가 그런 말을 한 적 따위는 없었다. 내가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뿐이다.

 

"...집에 가라.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멋대로 쏘아붙이고는 뒤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바지에 똥이라도 지린 듯이 찝찝했다.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고 말았다.

 

나는, 그 표정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 해도 난 내가 좋았다.

 

가난하고, 모자라고, 궁상맞은 이철남.

 

성실한 이철남. 견실한 이철남. 솔직한 이철남.

 

.....김미호를 누구보다도 아끼는 이철남.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좋아할 수가 없다.

 

난 대체 왜 그딴 소리를 한 거지.

 

나는 그저 쓰레기다.

 

돈도 없고, 재주도 없고, 잘생기지도 않아.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이었는데.

 

너를 정말로 아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실제로 건네 준 것은, 그저 똥 덩어리였지 않은가.

 

 

 

 

 

"하하..."

 

 

너랑 걷던, 꽃이 피는 오르막길.

 

너랑 걷던, 슬레이트 지붕이 위태로워 보이는 골목길.

 

너랑 걷던, 담쟁이덩굴이 구부정한 울타리 길.

 

 

이렇게 어두운 데도, 가로등 빛만 받으면 이렇게 색깔이 화려한데.

 

이제는 너랑 같이 갈 수는 없겠네.

 

내 인생에 사랑한 두 명의 여자를 모두 잃어버렸다.

 

이철남의 세상은, 흑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