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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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르 따르르르. 따르르 따르르르.

고요한 방에 울리는 알람소리.


"으으으... 끄어어..."


새학기가 시작하는 날.

짧은 봄방학의 기상시간에 그새 적응한 것인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운다.


"학교... 가야지."


이불 밖으로 나오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님이 해외출장을 가시고 혼자인 지금, 배 째라는 식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숨긴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고... 걱정하시겠지.'


혼자서 잘 생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같이 가자는 제안을 거절한 입장에서 할 짓은 아니다.

학교를 가지 않은 사실이 알려진다면, 화내는 것보다 걱정부터 하실 분들인지라 오히려 마음을 다잡게 된다.


"아침이나 먹자."


이불을 대충 개어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오렌지 주스에 탄산수를 섞어 유사 오렌지에이드를 만든 뒤 빵을 꺼낸다.


"역시 식빵은 리리쮸사의 부정형 식빵이지."

"쮸우웃..."
 
리리쮸사의 빵들은 맛도 좋고 포장을 뜯을 때 나는 소리가 독특해서 인기가 많다.


식빵에 토마토 소스를 바르고 햄과 치즈를 얹어 에어프라이어에 돌리면 간단히 아침준비가 끝난다.

토스트가 익는 동안 오렌지에이드를 마시며 휴대폰을 보는데 확인하지 않은 메세지가 와 있었다.


'슬슬 반찬 떨어질 때가 됐지? 이것저것 만들 예정이니까 오늘 학교 갔다오면서 가지고 가렴.'


어머니 친구분께서 보내신 메세지는 구원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해외출장을 가면서 걱정되었는지 평소 교류가 잦았던 친구분께 어머니가 반찬을 부탁 드리고 가셨던 것이다.

저번에 받았던 반찬은 다 먹었지만, 얻어먹는 입장에서 먼저 달라고 부탁하기가 민망한지라 요 며칠은 간단하게 때우고 있었다.


"빵식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네."


리리쮸 빵은 물론 맛있지만, 한국인이라면 밥심이다.

답장을 보내고, 다 익은 토스트를 먹어치웠다.


"맛있는... 리리쮸는... 위장으로... 가욧..."


잠이 덜 깼는지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어서 씻고 등교할 준비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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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정도만에 다시 온 학교는 여전했다.

달라진 것은 2학년이 된 내 자신 뿐.

물론 그것만으로도 신선함을 느낄 여지는 충분했다.


'2학년 2반...'


닫힌 교실 문 앞에서 괜스레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보다 일찍 온 아이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런 아이들의 면면을 훑으며, 혹시 아는 얼굴들이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아직 안 왔나보네.'


모두와 허물없이 친한 인싸는 못 되기에, 한 명 쯤은 먼저 온 친구가 있어주었으면 했는데... 기대가 빗나가버렸다.


'오, 나이스. 창가자리가 남아있네. 이게 머선 일이고.'


자리배정을 다시 하겠지만 그래도 창가자리에 앉는 것은 무언가 이득인 느낌이다.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인공영웅을 켰다.

요즘 안하는 친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남녀노소 인기있는 게임이다.


'피드백 빠르지, 유저 존중해주지, 무엇보다 게임 자체가 너무 재밌어.'


그렇게 갓겜에 집중하며 몇 분이 흐르고...


"흐어억! 차가워!"

"히히, 바보 발견!"


뒷목에 닿는 차가운 물체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돌아보자, 그 곳엔 익숙한 얼굴이 장난스런 미소를 듬뿍 머금고 있었다.


"아아... 이 서늘한 감각, 오랜만이군."

"그래, 그 말대로 오랜만이야 사영관. 얼굴보기 힘들다? 어떻게 방학 중에 얼굴 한 번을 안 비출 수 있는거야?"

"방학 때 한 번 너네집에 반찬 받으러 갔었어. 구미호 네가 외출해서 없었던거지."

"그럼 나한테 얼굴 안 비춘거 맞잖아! 에이잇, 빵!"


소꿉친구인 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하면, 총 쏘는 척을 했다.

어울려주지 않으면 토라지기 때문에 당해줄 수 밖에 없다.


"크윽, 비겁한... 분하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책상에 쓰러지는 척을 하니 녀석은 흡족하다는듯 웃으며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음? 여기 앉게?"

"응. 왜? 누가 먼저 앉았어?"

"아니 그런건 아니고, 그냥, 이유가 궁금해서?"

"왜냐면 말이지이..."


미호가 말 끝을 늘이며 내 눈을 바라보자, 살짝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어 눈을 슬쩍 피했다.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건 기분 탓일까.

달아오른 귀가 아직 서늘한 3월의 공기에 맞닿는게 느껴진다.


"왜냐며언...... 비어있는 창가자리가 여기 밖에 안 남았기 때문이지!"

"아...... 그러고보니 그렇구나."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대부분의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와 앉아있었다.

곧 선생님도 들어오시겠지.


"어차피 자리 바꿀텐데."

"그러니까 미리 기운을 받아 놓는 거야. 창가자리에 앉고 싶거든"

"너도 요괴의 후손이었냐? 웬 기운 타령?"

"말이 그렇다는거지. 혹시 모르잖아? 내가 대요괴나 신의 후손일지. 능력으로 제비를 조작하는거야."

"글쎄다..."


요괴.

신비의 존재였던 그들은 인간의 세가 늘어나자 대부분 함께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고 한다.

그 영향은 아직까지 전해져서, 요괴의 특징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존재한다.

물론 능력의 사용은 제한되고, 대부분 인간의 피가 많이 섞였기 때문에 큰 문제를 일으키긴 어렵다.


"네가 대요괴의 후손이면, 나도 창가자리에 앉게 해주라."

"흐응...? 내 옆에 앉고 싶다는 소리?"

"무슨... 창가자리가 다 네 옆자리냐?"




사실은 앉고 싶습니다.

얼굴, 빨개지진 않았겠지.


미호와는 아기 때부터 만나 초등학교까지 항상 같이 놀았다.

그러나 중학교를 각각 남중, 여중으로 가며 학교에서 볼 수도 없었고, 아무래도 사춘기가 오게 되자 각자의 집으로 놀러가는 빈도 역시 줄게 되었다.

그래도 부모님들끼리 자주 만나셨기에, 크게 어색해지지 않고 어울릴 수 있었다.


덕분에 유치원 때부터 좋아하던 미호가 점점 예뻐지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두근거림도 점점 커져서,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빠져버렸다.

같은 고등학교를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너무 기쁜 나머지, 샷건을 쳐서 책상을 부숴버린게 작년.

반은 달랐지만 관계 진전을 위해 노력해서 다시 어렸을 때처럼 장난도 치고, 시간이 맞으면 하교도 같이 하는 사이로 돌아왔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올해 해외로 따라가지 않은 결정적 이유지.'


올해 같은 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책상 대신 허벅지를 때려 기물파손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허벅지에 멍이 심하게 들어 이틀 정도 고생했지만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호를 보자


"그렇네. 창가자리가 꼭 내 옆자리는 아니지."

"뭐... 그렇지."


다행히 내 생각을 들키지 않은 것 같지만


"하지만 뭔가 괘씸해. 사영관 너는 창가자리 꿈도 꾸지마!"

"엑... 그게 뭐야. 대요괴의 저주 같은거냐?"

"흥! 빵이다! 빵! 빵빵빵빵빵!"


왠지 모르게 토라진 미호가 연발을 쏘며 옆구리를 찔러대서


"흐갸악! 잠시만! 히이잇! 잠시만! 끼요옷!"


결국 중파된 옆구리를 부여잡고 책상에 쓰러진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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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오셨나요? 출석을 불러 보겠어요."


오르카 고등학교 2학년 2반의 담임선생님은 알렉스트라 선생님이 맡으셨다.

사각안경이 잘 어울리는, 보자마자 딱 '선생님'이란 생각이 드는 분이다.




"구미호."
"네."

"네오딤."
"네."



"사영관."
"네."

"불가사리."
"네."



"다들 출석했군요. 자, 1년 동안 동고동락할테니 서로 잘 지내길바래요."


아마 잘 지내지 않을까.

나름 진학으로 유명한 학교라서 그런지, 아니면 중학교에 비해 철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난 1년 동안 질 나쁜 녀석들을 본 적이 없다.

나 역시 모두와 두루두루 친한건 아니지만, 소외된 채 겉도는 것도 아니니 무난하게 학교 생활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미호는 귀여운데다 활달해서 남녀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다.

다만 고백은 단호히 거절해서, 많은 남자애들이 -일부 여자애들도- 눈물을 삼켰다.


'나도...'


오랫동안 좋아해왔지만, 거절 당한다면 더는 미호를 보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마음을 숨기고 있다.

소꿉친구 포지션이 이제는 유리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도 아직은...


"그럼 자리를 정하도록 할까요. 방식은 제비뽑기로 할거에요."

"사영관,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거야? 이제 자리 정한대."

"아, 잠시 딴 생각에 빠졌네. 제비 잘 뽑아야 할텐데."


제비를 뽑는 순서는 복도쪽부터 순서대로 한 열씩 뽑기로 하였다.

창가쪽인 나는 제일 마지막에 뽑을 수 밖에 없다.


"나 먼저 뽑고 올게, 사영관."

"그래. 창가 자리 잘 한 번 노려봐."

"당연한 말씀."


어차피 다음은 내가 뽑을 차례기 때문에 미리 일어났다.

이윽고 미호네 줄이 다 뽑자 나는 미호 옆을 지나가면서 재빨리 미호의 제비를 확인했다.


'27번...'


2열씩 한 분단, 총 8열 종대의 책상구성.

창가는 8, 16, 24, 32번이다.

미호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쳐지나간다.

내가 제비를 본걸 들키지 않게 곧바로 뽑기함으로 갔다.


바닥을 보이는 뽑기함 안에서 손끝에 걸리는 제비 하나.

그래 너로 정했다.


[ 24 ]



'지금 앉은 곳 뒷자리잖아.'

홀리몰리. 뽑았다.

창가 제일 뒤에서 한자리 앞.

그야말로 로열석이다.



'일단 미호가 대요괴의 후손은 아닌걸로.'


대요괴의 저주라고 볼 수 없는 나약한 저주다. 바로 파훼당했다.



"사영관, 자리 어디야?"

"미안하지만 비밀이다."

"뭐? 그래~ 알았어! 흥!"


이런, 흥미삐 모드로 들어가버렸다...

미호에게 미안하지만 나에겐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자 그럼 각자 자리로 이동하도록 하세요."


좋아.

지금부터는 속도가 중요하다.

미호보다 먼저 27번 자리 근처로 가 스캔한다.


'28... 28... 28... 누구냐... 누구 손에 있냐...'


찾았다.

보라색 머리에 푸른색 브릿지를 한...


'윽, 여자애잖아.'


남자애였다면 더 쉽게 말을 걸었을테지만, 시간이 없다.


"저기..."

"응? 나? 왜?"

"혹시 자리 바꿀 생각 없어? 난 저기 창가자리야."

"창가자리? 좋은데~ 근데 왜 바꾸려는거야?"


반응이 좋다.

7부 능선은 넘은 것이겠지.

하지만 이유까지 깔끔해야 성공이라 부를 수 있다.

생각해라.

굳이 대부분이 선호하는 자리를 넘기는 이유를!


"아... 자리는 좋은데, 내가 눈이 안 좋아서 햇빛을 좀 피하는 편이거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순수한 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과연 깡으로 도전한 제안이 잘 통할까?


"풉. 너 표정이 좀 이상하다. 흠... 그래~ 난 손이 차서 따뜻한게 좋거든. 고마워~"

"나야말로 고맙지. 자, 여기 제비."



꾸러기 표정은 플러스 요소가 아니구나. 기억해두자.

그렇게 제비를 교환하고 미호를 보자 아직 자리를 바꾸지 않고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틈에 스르륵 28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이야기를 마친 미호가 다가오더니 내가 앉은 자리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어? 뭐야, 사영관? 네가 왜 여기있어?"

"내 자리니까 여기 앉아있지."


드르륵


"후ㅎ... ㄱ여ㅇ..."

아직 자리를 옮긴다고 주변이 부산스러워 미호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뭐라고? 못 들었어."

"히, 아무 말 안 했어 바보야."


대답을 하며 미호가 가방을 걸고 자리에 앉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


"결국 둘 다 창가자리는 놓쳤네."

"그렇네. 그런데 사영관~ 넌 결국 내 옆자리가 될 거면서 제비를 숨겼겠다아?"


눈이 무섭다.

이건 빵야를 쏴대기 직전이다.

나는 빠르게 변명을 떠올렸다.


"아니아니, 창가자리가 아니더라고. 뽑을 것처럼 행동했는데 아니니까 뭔가 보여주기 좀 부끄러웠어."

"흐으응... 좋아~ 넘어가줄게."


조잡한 변명이었지만 어떻게든 넘어간 것 같다.

자리 배치가 끝나고 알렉산드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한학기 동안, 자리는 이렇게 갈거에요. 자리가 자주 바뀌지 않는게 다른 선생님들이 여러분들을 기억하기가 쉽기 때문이죠."


'뭐? 그럼 미호랑 한학기 동안 짝이라고?'


나에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만 다른 아이들은 조금 불만이 있는지 웅성거렸다.

그러자...


파직!


선생님 주위로 전기가 튀어 올랐다.


"어머나~ 따끔한 교육을 받을 나쁜 아이는 누구일까요?"

'허미!'

효과는 굉장했다!

웅성거렸던 교실은 튀어오른 전기를 보자마자 조용해졌다.

아니, 난 좋긴한데... 능력은 반칙이지.


"후후후. 여러분들께 제가 가르칠 것이 많아 보이는군요. 앞으로 즐겁게 수업하도록 해요."


참고로 검은 막대기를 들고 웃는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여왕님 같았다.




******



개학 첫 날의 수업이 모두 끝났다.



"아, 드디어 끝났네."


"개학 첫 날부터 시간이 너무 안 가는 느낌이야."


"아, 맞다. 나 오늘 너네집 가는데 같이 갈래?"



내 말을 들은 미호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내가 우리집 가는데, 사영관 네 허락을 받아야 하는거야? 질문이 이상한데?"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하교를 같이 할건가 물어본거지."


"난 오늘 다른 일 없어. 같이 가자 그럼."



그렇게 결정하고 가방을 챙기는데, 누군가 미호에게 말을 걸었다.



"미호, 집에 가는거야? 같이 갈래?"


"아, 불가사리구나. 난 좋은데, 이미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사영관, 넌 괜찮아?"



미호에게 말을 건 친구는 보라색 머리에 푸른 브릿지를 한... 아까 나랑 자리를 바꿨던 여자애였다.



'이런, 둘이 아는 사이였나?'



낭패다. 이러면 내가 자리를 바꿨다는걸 미호가 알게 될 가능성이 높다.



"뭐야. 미호, 얘랑 친한 사이였어? 집에 같이 갈 만큼?"


"응. 사영관이랑 나랑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거든. 근데 불가사리야, 너도 사영관하고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는 아닌데... 오늘 처음 봤어. 다만 아까 전에 잠깐 이야기했던 정도?"


"이야기?"



안돼, 이 흐름은 막아야한다.



"아, 넌 불가사리라고 하는구나. 반갑다. 난 사영관이라고해. 들은대로 구미호랑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어. 부모님끼리 친하시거든."


"아~ 응. 반가워."


"나는 오늘 구미호 어머니께 받을 것들이 있어서 같이 가는거거든. 그래서 당연히 너도 같이 가는거 괜찮아!"


"아, 고마워."


"아냐 아냐. 피곤할텐데 다들 빨리 집에 가서 쉬자. 구미호 너도 가방 다 챙겼어?"


"어? 으응."


"좋다. 그럼 가면서 이야기하자"



셋이서 하교를 하는 길. 하늘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아, 그럼 너희 둘은 같은 여중 친구구나?"


"응. 중학교 때, 미호랑 같은 반도 두 번이나 했는걸. 이야~ 올해까지 포함하면 이제 세 번이네."


"작년에 같은 반이 아니라서 아쉬웠지~ 그러고보니 사영관 너하고 같은 반인건 엄청 오랜만이지 않아?"


"음... 마지막으로 같은 반이었던게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걸?"



내가 모르는 미호의 이야기를 듣거나, 옛날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아, 미호는 알고 있겠지만 난 저기 주택가에 살고 있어서 여기서 헤어져야해~"


"그렇구나. 나도 오늘 이야기해서 재밌었어. 내일 학교에서 보자."


"그래~ 영관이 너도 잘들어가고 오늘 자리 양보해줘서 고마웠어! 내일보자!"



그렇게 말하고 불가사리는 주택가로 가는 골목으로 사라졌다.


...... 잘 피했나 싶었는데 마지막에 툼스톤 파일 드라이버를 꽂고 가는구나.



"흐으응...? 사영관아, 저게 무슨 소리일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옆에서 시선이 몸을 꿰뚫는 것 같다.



"글쎄... 무슨 소리일까?"



나는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미호는 딱히 더 언급을 안하고, 나는 옆구리를 지킨 채로 미호네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와. 엄마, 다녀왔습니다!"


"실례합니다."


"둘 다 어서오렴."



붉은 머리를 단정히 묶은 미호의 어머니가 우리를 맞이했다.


미호는 분홍색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 어머니의 붉은 머리가 연해진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안녕하세요, 홍련 이모. 반찬 받으러 왔어요."


"영관이가 교복입은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 반찬은 다 챙겨놨으니까 들어와서 저녁도 먹고 가렴."


"아, 그래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역시 홍련 이모는 자비로운 바디를 소유하신 분답게 마음도 자비로우시다.


사춘기 남자에게는 너무 자극이 강한게 문제지만



"사영관 너... 우리 엄마 이상한 눈으로 보는거 아니지?"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럴리 없잖아."



살짝 찔렸다.



"둘 다 와서 밥 먹으렴~!"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저녁을 얻어먹은 보답으로 설거지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찬을 챙겼다.



"이모, 잘 먹고 가요. 반찬도 잘 먹을게요."


"반찬 달라는게 미안해서 대충 때우지 말고 언제든지 와서 밥도 먹고 반찬도 가지고 가렴."


"아하하... 네, 감사합니다. 미호야 나 간다."


"그래 잘 가~"



그런데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자 갑자기 미호가 가까이 오더니 조용히 말했다.



"사실 나... 오늘 자리 정할 때 불가사리가 너랑 자리 바꿨다고 말해서 이미 알고 있었어."


"뭐...?"


"난 우리 영관이가 햇빛에 약한지 오늘 처음 알았네? 히힛."


"아니 그게..."


"나랑 앉고 싶었던거지?"



그 말을 하는 미호는 조명을 등지고 있는데도 

살짝 상기된 채로 싱긋 웃는 얼굴의 미소가 너무 잘 보여서 

너무 예뻐서

얼굴이 터질 듯 뜨거워졌다.



"히히, 어디 아파? 얼굴이 빨간데?"


"... 마음대로 생각해. 난 간다."


"잘가~ 내일보자~"



그렇게 도망치듯 미호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집에 오는 몇 분 동안의 기억이 없었다.


반찬 정리를 할 겨를도 없이 찬물 샤워를 하며 열을 식히는 내 머리는 이미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미쳤다... 미쳤다... 미쳤다... 너무 예쁜거 아니야?'



아무래도 오늘 밤에 일찍 자기엔 그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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