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하지만 나팔꽃은,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을 것이다. - 어느 시인의 마지막 기록



"대답해줘. 이 인간님은 누구야?"

노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돌렸다.


"내가 닮아서 그랬던 거야?"

"씨발 그 입 다물어!"

그는 거칠게 지팡이를 바닥에 던졌다. 첫 물리적 폭력이었다.

'일부러 맞추지 않았어.'


"이 가짜 새끼가 뭘 안다고 지랄이야! 노트고 나발이고 나가, 당장 나가!"

시뻘개진 얼굴 아래로 목에 다시 핏발이 올라왔다. 하지만 핀토는 유례없이 침착했다.


"가짜라고 했지? 역시 이 인간님은 내 원본인 거야?"

"그래 이 새꺄! 이제 속이 시원하냐? 이 엿같은 늙다리에게 엿 하나 크게 먹여서 기쁘냐? 이 쥐만도 못한 것. 넌 욕도 아까워. 당장 꺼져!"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힐 정도로 이성을 잃은 그는 억지로 핀토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몸은 그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했다.


3분 뒤. 그는 거센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말해줘. 난 당신을 돕고 싶어."

핀토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마주친 눈. 한 쪽에 담긴 건 무력감, 다른 한 쪽에 담긴 건 진심.


그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그걸 받아들어 일어섰다. 침대에 풀썩 앉은 그 모습은 화를 내던 것과 비교하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 아이는, 하나뿐인 내 딸이다."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자기가 기억하는 걸 전부 털어놓았다.


"어릴 적에 사고로 어미를 잃어서 홀아비 손에서 컸다. 늘 따돌림 당하던 친구들을 감싸주던 착한 아이였지."


"무식한 아비였지만 부족한 것 없게 키우고 싶었다. 조선소부터 공장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어."

화상 자국으로 얼룩진 팔과 잃어버린 왼쪽 새끼 손가락.


"그렇게 스무살에 입영 통지서를 들고 공군이 되었다고 했을 때 얼마나 혼을 냈는지 몰라.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우울한 넋두리. 핀토는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스물 넷, 그 사진을 마지막으로 다신 옆에 설 수 없었다."

사진 찍는 게 어색해 미묘하게 웃던 딸, 굳은 얼굴의 아버지.


"돈이 없었어. 그놈의 빚 때문에, 내 손으로 혈연을 끊어버렸다고."

그를 좀먹던 질병들과 쇠약해진 몸.


"그런데 뭐? 그런 쓰레기 짓거리까지 했는데 남은 게 하나도 없다고?"

냉동 인간 실험에 자원하고 100년이 넘게 잠들었건만.


"..."


"네놈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죄인인 것도 참을 수 없지만,"

노트에 있던 사탄의 하수인들, 좆같은 새끼들이라고 쓰인, 깨끗하지 않은 필기.


"난 내 딸을 닮은 가짜들이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어느새 눈물 한 방울이 주름을 타고 손등을 조금 적셨다.


그 젖은 거죽 위로 부드러운 손이 올라왔다.

"난 당신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상상할 수 없어. 난 기껏해야 제조된 지 3년도 채 안 됐으니까."

손은 위로 올라가 흰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건 말할 수 있어. 너무 자기를 채찍질하지 마. 비관적으로만 보지 마. 그러는 건 우리도, 당신도 상처 입히는 거잖아?"


어릴 적 딸과 핀토가 겹쳐보였다. 그 아이를 위로할 때마다 그가 손을 잡아주고 머리를 쓰다듬곤 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이의 복제품이 그에게 그러고 있었다.


"넌, 내가 혐오스럽지 않은 거냐?"

힘겹게 나온 한 마디.

"솔직히 싫어. 어떨 땐 철충보다도 더 악당 같아."

돌아온 건 솔직하다 못해 대놓고 때리는 대답.


"그래도,"


핀토 710호는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최고의 영웅은 누구도 버리지 않는 법이니까."



오르카 호의 맨 아래층, 가장 구석진 방에는 세상에서 가장 성질 더러운 늙은이가 있다. 그는 늘 욕을 입에 달고 살고, 성치 않은 몸으로 쉬지 않고 피아노를 친다.


"식사시간입니다. 평소대로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알겠으니 당장 꺼져. 지금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바뀐 게 하나 있다면,


"저기, 그 부분은 좀 더 세게 하는 게 좋지 않아?"

"개소리 마라. 그러면 매끄럽게 연결이 될 것 같냐?"


방문이 반 정도 열려 있다는 것.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하지만 나팔꽃은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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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저찌 1막이 끝났다. 다음 2막은 좀 더 분위기를 가볍게 해볼 생각임.

오늘도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