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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비번에 몰아서 볼 생각으로 히어로물 BD를 품에 한가득 안고 즐겁게 몸을 일으키던 핀토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저번 작전 때 시티 가드의 경정과 대거리를 하다가 혼난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존대도 없이 바로 험한 소리가 나갔을 것이다. 워울프는 핀토의 험한 표정에도 아랑곳않고 여유있게 미소를 지으며 디스크 케이스를 손가락 위에서 빙빙 돌렸다. 워울프가 쓰고다니는 것과 비슷한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남자들이 잔뜩 나와서 총을 들고 있는 그림이 인쇄된 케이스였다.


"매번 볼 때마다 그런 것만 빌려가길래~ 우리 꼬맹이 아가씨도 그런 수준낮은 것들보다 슬슬 진짜 영화를 봐야 하지 않겠어? 로망, 모험, 그리고 느와르! 괜찮다면, 이 언니가 한 편 추천해 줄 수도 있는데?"


가끔 기록물 보관소에서 자신처럼 영화를 대여하던 워울프와 마주쳤던 핀토였지만, 예의상 목례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같은 부대원들 외에는 은근히 벽을 만드는 그 성격 때문이었다. 비록 구면일지라도, 핀토에게 워울프는 생판 남과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오지랖 넓은 워울프는 그렇게 몇 번 마주친 것만으로도 핀토를 꽤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소심하지만 다가갈 용기가 없는 바이오로이드에게는 고마운 기질이었겠지만, 핀토처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바이오로이드에게는 상극이었다. 무엇보다 편하게 대화를 트겠답시고 선택한 주제와 말투가 최악이었다. 그녀 나름대로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며 재미있는 것을 추천해주려는 심산이었겠지만, 눈앞에서 히어로물을 '그런 수준낮은 것'이라고 비하당한 핀토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저기요. 저는 그런 거 관심 없거든요? 그리고, 남이 뭘 보건 무슨 상관이시죠? 참견 말고 하던 거 하세요."


당연히 핀토에게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리고 핀토의 매몰차면서 가시 돋힌 거절은, 스스로는 좋은 의도로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워울프의 속을 살살 긁어놓았다.


"허, 허어~ 꽤 당돌한 아가씨네? 그래, 원래 애들한테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 꼬마 아가씨도 머리가 조금만 굵으면 이 중후한 멋을 알게 될 걸? 한번 보고 나면 그런 단순하고 유치찬란한 매체는 눈에도 안 들어올 텐데~"

"뭐, 뭐라?"


핀토는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서 숨을 삼켰다. 원래는 서부극에 별 감정 없었지만, 이런 말까지 듣고 나면 없던 감정도 피어오르게 될 것이다. 분노에 어깨를 벌벌 떨던 핀토는, 역으로 되받아쳤다.


"제가 그딴 걸 왜 봐요? 원래 살던 원주민들 내쫓고 거기에 깃발 꽂은 날강도들 미화한 프로파간다물 아닌가요? 그런 거에 속아서 좋다고 박수치는 걸 보니, 소문대로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신가 봐요?"

"...후우..."


워울프의 한숨이 무거워졌다. 명백히 열 받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는 너는, 그 영화도 결국 프로파간다랑 다를 게 없다는 건 아냐? 어차피 다 까봐도 진부한 스토리에 결말이 담은 메시지도 이런 강한 영웅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만세~ 같은 것 밖에 없잖아? 악당도 보나마나 적국을 인종차별적으로 묘사한 스테레오타입들 뿐이고. 너같은 어린아이들을 세뇌하려고 만들었다는 점에서 훨씬 악질적이지. 안 그래?"

"말 다했어요?"


핀토는 워울프에게 한발짝 다가서서 고개를 치켜들고 노려보았다. 워울프도 차가운 눈빛으로 응수했다. 두 시선이 교차하는 곳에서 불꽃이 튀는 듯 했다.


물론, 둘의 주장은 처음부터 전제가 잘못되고 엇나가 있었다. 초기에 제작된 서부극이 다루기 쉬운 소재를 쓰다 보니 그런 점이 두드러졌어도, 이후에는 그런 기조를 반성하며 자기고백적이고 비판적인 명작들이 훨씬 많이 나왔다. 슈퍼히어로물도 마찬가지였다. 출발은 적국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한 선전물로써 이용되었어도, 이후에는 사회에 대한 고찰과 정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 등의 무거운 주제를 가진 수작들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애초에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지금의 둘에게는 다 의미없는 말들일 것이다.


그렇게 둘의 거리가 한층 더 좁혀지고,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야, 워울프! 그쯤 해!"

"핀토! 여태 안 나오고 뭐 하나 했더니, 또 일 내겠다!"


퀵 카멜과 불가사리가 으르렁대고 있는 둘 사이를 떼놓고 뒤에서 붙잡았다. 두 보호자는 여전히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워울프와 핀토를 뒤로 밀어내면서 연신 사과하기 바빴다.


"죄, 죄송합니다! 우리 핀토가 또 폐를 끼쳤죠? 저번에도 그렇게 시비 걸고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제가 잘 타일러둘게요!"

"아잇, 이거 놔 봐! 애초에 저 사람이 먼저..."

"그래, 그랬겠지! 원래 워울프 이 바보녀석이 좀 눈치가 없어서 입에서 나오는 건 말이라고 막 뱉거든! 내가 진정시킬 테니까, 먼저들 나가 봐!"

"...쳇!"


발버둥치는 핀토를 질질 끌고나가는 불가사리가 점점 멀어져가자, 워울프는 고개를 홱 돌리며 혀를 찼다.


둘이 완전히 기록물 보관실을 나간 것을 확인하자, 카멜은 손을 들어 워울프의 등짝을 후려쳤다. 팡! 소리와 함께 워울프가 신경질을 내며 얻어맞아 아릿한 등허리를 문질렀다.


"어휴, 내가 못 살지... 잠깐 눈 돌렸다고 또 싸움을 벌여?"

"에이씨, 누가 싸웠다고 그래. 그냥 세상물정 모르는 꼬맹이한테 조금 가르침을 준 것 뿐이야."

"얼굴까지 시뻘개져놓고, 말은 잘하네! 다 골랐으면 나가기나 해!"

"에이, 참. 알겠다니깐... 너는 다 골랐고?"


워울프는 카멜의 손에 들린 케이스를 흘끗 보았다.


"...너도 그런 거 좋아하냐?"

"네가 멜로 말고 딴거 좀 보라고 해서 딱 니 취향에 맞을만한 걸로 가져왔다! 뭐 불만있어?"

"...하아~"


방금 전까지 잡아먹을 듯이 싸운 원인이 된 그 장르를 보니, 워울프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



"카멜 녀석, 보지도 않을 거면 왜 빌려온 거야..."


워울프는 반납 기한이 다 돼가는 BD를 집어올렸다. 그때 기록실 안에서 한바탕 했던 것을 생각하면 거들떠도 보기 싫은 케이스였다. 하지만, 대여하는 데에 지불한 참치캔은 땅을 판다고 나오지 않았다. 디스크의 주인은 현재 불침번을 서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좀 본다고 해도 뭐라 하진 않을 것이다. 워울프는 반쯤 의무감으로 플레이어에 원판을 밀어넣었다. 그래, 얼마나 재밌는지 보자. 하는 마음가짐도 없잖아 있었다. 언제건 마음에 안 들면 물어뜯을 생각으로 워울프는 흠을 잡아내기 위해 화면을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


그리고, 영화가 전개되면서 마음가짐처럼 삐딱했던 자세가 점점 고쳐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서부극 역시 따지고 보면 슈퍼히어로물의 원조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워울프의 감성과 맞는 부분이 많았다. 덴세츠 쿨랜드 미디어가 세계를 지배하기 이전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랜차이즈의 작품이어서 충분히 보증된 퀄리티였던 것도 있었다.


"..."


처음에 주인공이 자신의 적국과 싸우기 위해 허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군에 입대해 생체 실험에 자원한다는 전개에, 워울프는 '그럼 그렇지.' 하며 코웃음을 쳤었다. 하지만 워울프의 예상을 비웃듯 주인공은 선전 프로파간다에 이용당하는 원숭이와도 같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히어로답게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워울프는 그런 주인공의 성장을 지켜보며 이미 스크린에 매료되어 있었다.


주인공의 활약이 계속되며 이야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고, 주인공은 마침내 자신의 숙적을 만나게 되었다. 마치 서부극에서 정오에 뜬 태양을 마주한 두 결투자처럼, 히어로와 그의 아치 에너미는 서로 일생일대의 승부를 앞두고 있었다. 


"...!"


손에 땀을 쥐는 승부 끝에 주인공은 악당에게 승리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했다. 히어로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인공은 악당과 자신이 결투를 벌인 비행기의 조종간을 바다로 향했다. 자신 한 명을 희생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워울프는 어느새 자신의 가슴 속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 전율이었다. 바로 이것이 로망이었다.


워울프의 손이 다음 편을 담은 케이스로 향했고, 그녀는 그렇게 밤을 새게 되었다.



**



"하암~"

"불침번 선 건 난데, 왜 니가 죽으려고 하냐?"


카멜은 자신 앞에 줄을 서고 있는 워울프에게 핀잔을 주었다. 곯아떨어진 워울프가 조식을 거르지 않도록 두들겨 깨워서 억지로 밥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야간 근무를 서고 온 자신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아이~ 결식한다고 했잖아..."

"그래놓고 애매하게 일어나서 배고프다고 칭얼댈 거잖아! 차라리 배에 뭐라도 우겨넣고 자는 편이 낫지!"


졸린 눈을 비비며 식당을 둘러보던 워울프의 눈에 갑자기 밝은 금발이 들어왔다. 자신의 앞줄에 서서 몽구스 대원들과 쾌활하게 잡담을 나누는 핀토를 보고 워울프의 잠이 확 달아났다. 워울프가 화들짝 눈을 크게 뜨자, 무슨 일인가 하며 워울프의 시선을 따라가던 카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 너 설마...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오늘 메뉴가 맛있어 보여서 잠 깬거야."

"고순조에 해빔소스인데...?"

"시끄러."


카멜의 말을 대충 흘려보내는 워울프의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들이 거품처럼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자신이 오만방자하게 다른 영화를 평가하며 핀토를 상처입혔던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고, 다시금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재밌는 서부극을 추천해주고픈 마음도 있었다. 새로 접한 영화에 대해 관심사를 공유하며 즐겁게 이야기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쪽팔리게...'


그랬다. 그렇게 유치하고 애들 보는 거라고 매도했던 슈퍼히어로 영화를 재밌게 봤다고 뻔뻔하게 얘기할 만큼 워울프의 낯짝은 두껍지 않았던 것이다.


"야, 고순조에 해빔소스가 어떻게 맛있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지만, 새로운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점점 핀토의 뒷모습이 멀어지기 시작하자, 조바심이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나서야 해, 말아야 해? 무안함과 설렘이 뒤섞여 워울프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워울프의 입이 방정맞게 먼저 단어를 토해냈다.


"하루 종일도 먹을 수 있어."


그 말은 분명히 핀토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동시에 핀토의 고개가 180도 꺾일 기세로 홱 돌아갔다. 그곳에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우는 워울프가 있었다. 


"휘휘~"

"...?"


핀토가 급작스럽게 몸을 돌려 뒤에 있던 워울프를 쳐다보자, 그때까지 같이 얘기하던 몽구스 대원들이 그녀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핀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스윽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몸을 돌려 자매들과 잡담하기 시작했다.


"야, 너 어디 아파? 갑자기 웬 헛소리를..."


진지하게 자신을 걱정해 주는 카멜을 뒤로 하고, 워울프는 밀려난 줄을 채우기 위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젠 핀토에게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콜록, 어흠! 아, 가래가 자꾸..."


워울프는 헛기침을 하는 척 하며 몸을 살짝 기울였다. 영문도 모르고 자매들과 사담을 나누는 핀토의 귓가에 워울프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헤일 하이드라."


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한 워울프의 속삭임을 들은 핀토의 몸이 흠칫, 하고 굳었다. 핀토가 이번엔 확신을 갖고 워울프를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당신, 혹시...!"

"어어~ 나 화장실 좀 갔다올게~"

"야! 줄 서다 말고 어디 가?"


카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워울프는 식당을 나섰다. 워울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핀토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드라코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핀토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핀토, 자꾸 어디 보는 거야?"

"..."


핀토는 잠시 서서 망설이다가, 대원들에게 활기차게 말했다.


"나, 잠깐만 갔다 올게!"

"어? 너는 또 어디 가!"


식당을 달려나가는 핀토의 허리춤에 매달린 멋들어진 보안관 뱃지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