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십니까?


당신과 처음 만나 얼마 지나지 않았던 날.


어리숙하던 당신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나온 가시 돋힌 말에도 당신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그저 웃어보였습니다.


사람의 손에서 태어났지만 사람을 믿지 못하는 저였기에 그런 당신의 웃음도 가식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억나십니까?


당신은 저희들을 사랑해주었습니다.


사람과 닮았으나 사람이 아닌 저희를 사람처럼 바라봐주었습니다.


당신이 힘들어 쉬고싶을 때 어느하나 기댈 곳 없음에도 저희가 기댈 수 있도록 있어주었습니다.


뿌연 안개 같은 세상에 홀로 남은 미아인 당신이면서 과거의 잔재 속에 길 잃고 방황하는 이들의 빛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보며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도록 태어났기에.


어쩌면 이 마음도 진실되지 않은 것일까 하는 두려움에게 도망치며 그렇게 어설픈 사랑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좋았습니다.


책상 앞에서 끙끙대는 당신을 보는 것도, 어쩌다 저와 눈을 마주쳐 짓는 헤픈 웃음을 보는 것도 마냥 좋았습니다.


일에 지쳐 푸석해진 그 손을 제 손등에 올리며 뺨을 붉힐땐 그리 간지러울 수 없었습니다.


처음 당신의 입술에 닿은 날은 그 감촉이 하루종일 머릿 속을 헝클어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다른 기억들이 켠켠히 쌓여갔건만 그 날들은 여전히 가슴 안에 남아 먼지쌓인 서랍 속 앨범처럼 가끔씩 꺼내보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추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눈 앞에 머무른 슬픔이 앞을 가린 탓일까요.


그 날들을 떠올리는 것이 행복하여 거멓게 타들어간 지금을 보고싶지 않아 눈 감은 탓일까요.


당신의 얼굴에 손을 올려봅니다.


마뜩찮아 뺨을 가져다 댑니다.


맞닿은 뺨에선 여전히 당신의 살내음이 나는 것 같건만 날도 따스한데 어찌 이리 차가운 걸까요.


그 차가움이 언젠가 당신을 대하던 저와 같아 가슴이 섬뜩해옵니다.


당신에게 더 따뜻 했었더라면 이리 마음 아프지 않았을까요.


당신이 준 사랑에 반이라도 보답을 했었더라면 덜 슬펐을까요.


당신의 사랑은 영원할테지만 당신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걸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전 아직도 도망치고 있습니다.


차라리 당신을 미워하면 나아질까 애먼 당신의 가슴을 투닥거립니다.


언제나 곁에 있어준다고 해놓고 이리 저를 홀로 버려두고 떠나십니까.


당신보단 제 손가락에 잘 어울린다며 반지를 끼워두시곤 이젠 안 보시렵니까.


이렇게 투정부리면 항상 받아주었으면서 지금은 왜 아무 말이 없으십니까.


그러다 행여나 두드리던 당신의 가슴이 상할까 멈춘 손을 들어 당신을 부여잡습니다.


지나간 것이 되돌아 오지 못하기에 다시 찾아가는 것을 후회라 합니다.


이제는 멈춰선 당신이 더이상 저에게 오지 못하니 제가 당신을 잊지 않기 위해 후회해야겠지요.


그 대가가 이런 아픔일지라도.


미처 들려주지 못한 말을 이제야 그을린 쇳소리로 모아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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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이유로 사망한 사령관과 그 시체를 보며 후회하는 바닐라를 모티브로 짧게 써보았어요.


바닐라의 평소 말투와는 다르지만 독백이라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썼어요.


이런 내용은 대회취지에 맞지 않는다면 아쉽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