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라이프의 보르티곤트들이라 레이븐홈의 그레고리 신부를 보고 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씀, 아마 가능하면 연작으로 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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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였다.


정정한다, 이건 내가 좆같이 계획을 짠 대가였다.


"레이시 언니가...실종됐어요...제가...제가 잘못 대응해서...흐윽..."


모든 칼들이 우그러진 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사령관 앞에 무릎 꿇은 채 오열하는 티아멧을 사령관이 황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주변에서 심하게 부상당한 다른 대원들도 고통을 참으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용히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철충들의 축차투입으로 인해서 지원이 지나치게 늦어진 둠브링어와 스카이나이츠, 호라이즌의 모두가 절망에 찬 눈으로 티아멧만을 쳐다보는 사령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레이시의 몸은 완전히 으스러진 것만 같았다. 정찰대인 줄 알았던 철충의 수가 점점 불어나고, 끝없이 몰려드는 군세에 머리가 으깨질 것 같은 고통을 참고 티아멧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다가 한눈을 판 사이에 티아멧과 떨어지고...끊임없이 몰려드는 철충의 군세 속에서...


'나는...죽은걸까...?'


여전히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해, 어딘지도 모를 암흑 속에서 고통받는 레이시가 생각했다. 분명 마지막 기억은 거대한 연결체 철충과 동귀어진하겠다는 각오로 온 힘을 쥐어짜내 전기를 퍼붓고... 땅바닥에 쓰러져 남은 철충들이 자신을 베기를 기다리고 있다가...어딘가에서 초록색 번개가...번개?


갑작스럽게 그 초록색 번개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은 레이시의 정신이 맑게 돌아왔고, 무겁게 내려앉았던 두 눈꺼풀이 간신히 올라왔다. 다행히도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죽을 정도로 아프긴 하지만.


레이시가 처음으로 본 것은 갈대처럼 보이는 무언가로 얽어낸 지붕과 벽, 자신의 오른쪽에서 나는 하얀 색의 연기였다. 그 다음에 들은 것은 국이 끓는 듯한 소리와 어떤 여자가 주술을 외는 듯한 소리, 다음으로 맡은 것은 이상하게 달달한 냄새와 과전류로 무언가가 탄 듯한 냄새, 마지막으로 느낀 건...


"크윽...!"


온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몸을 쥐어짜는 듯한 전류였다. 고통으로 인해 다시 한번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쥔 레이시에게 주술을 외던 여인이 다가왔다.


"아, 레이시 자매는 아직 일어나서는 안돼. 내려온 것들이랑 그렇게 싸우다니, 역시 자유인의 믿음을 산 묶인 자들은 다르군 그래. 하지만 우선은 신부님의 기도를 받고 자양분을 먹어야만 제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야. 내키지 않는다면 그쪽 묶인 자들의 종교의식으로 대체하고 기도는 안해도 되겠지만..."


레이시는 자신에게 말을 건 그 여인이 바이오로이드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보통의 바이오로이드들과는 그 모습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모델은...아마도 자신과 같은 레이시일 거라고 생각됐지만, 흰색 가루로 지저분해진 듯한 머리는 뒤쪽으로 묶여 있었고, 머리 위에는 도저히 구속구가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는 마치 거대한 하나의 붉은 눈을 상징하는 듯한 페인트가 미간에 그려저 있었고, 이마에는 붉은색 점 세개를 찍어놓은 것이 보였다. 옷은 상당히 원시적이고 단순하게 생겼지만, 다양한 목걸이들과 팔찌, 허리띠의 장식들이 정신없는 분위기를 주고 있었다.


사이키델릭한 옷을 입은 같은 자매를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본 오르카의 레이시를, 자매는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시는 고통과 피로감에 깔려서 차마 당신은 누구고 여기는 어디냐는 질문이 입에서 안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 레이시를 본 자매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미안하네. 레이시 자매가 나와 같은 유전-정보를 가지고는 있어도 나는 더이상 사슬묶인 레이시가 아니야. 나는 여기서 벼려진 노예들을 해방해주신 신부님의 기름부음을 받아서, 더 이상 묶인 자가 아니거든."

"...?! 제 생각을...읽으신...건가요...?!"


당황한 레이시가 묻자, 자매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아무튼, 자매는 지금 푹 쉬어야 해. 유일한 자유인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고달프고 험난한 시험의 길이 될 것이라 신부님이 말씀하시었어...자양분을 충분히 먹고, 고장난 육신을 수리하고, 그러면 마참내 머지않아 범고래와 자매의 검투사 자매한테 돌아갈 수 있을 것이야."


자매의 말은 레이시를 당황 시킬 법 했지만, 오히려 레이시는 가슴 한켠이 안심된다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모든 걸 꿰뚫고 있고, 자신은 무력한 반송장이나 다름 없는 이 상황은 이상하게도 레이시가 일말의 불안감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자매는 천천히 일어나 또 다시 이상한 주술을 외우며 흰 연기를 뿜고 있는 거대한 항아리로 향했다. 레이시는 자매가 좀 더 목청높여 주술을 외며 뭔지 모를 액체를 작은 토기에 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다시 레이시에게 다가온 자매가 김이 나는 따듯한 죽을 레이시에게 건냈다.


"자양분인 것이야. 어서 들고 당분간은 휴식과 치유에 온 심력을 다 쏟도록 하게. 자매가 궁금해 할 것들은 시간을 들여 말 해줄 테니."


레이시는 나무 숟가락을 들고 토기에 담긴 죽을 퍼서 먹었다.


죽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레이시는 안도감과 피로감에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안되겠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이 나오지를 않아요."


모두가 어둠과도 같은 우울 속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사령관은 이렇게 무너진다면 레이시를 다시 볼 수 없다며,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업무와 지휘에 열을 쏟았다. 사령관이 아무리 코피를 쏟아내고 회의 도중 의자 뒤로 넘어가 기절하는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도, 경호원인 블랙 리리스와 그 누구도 사령관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바이오로이드의 육신을 가진 그들조차도 지나치게 피곤해져 그의 자살에 가까운 과로를 말릴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닥터가 왠지 모를 존댓말을 하며 드론 유닛들을 통한 해당 섹터에 정찰 경과를 보고할 때 조차, 닥터를 포함한 모두가 피곤과 우울감, 그리고 찢어질 듯한 상실감에 찌든 얼굴로 멍하니 화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콘스탄챠는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레오나는 마치 희망이 없다는 듯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네오딤과 티아멧은 아무런 말 조차 못하는 채로 그저 화면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오직 한 명, 레모네이드 알파만이 영상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잠시만요! 저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저거...!"


피곤에 찌든 닥터가 다급한 알파의 외침에 당황해서 급하게 드론 유닛을 알파가 가리킨 곳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바닥을 확대하자, 알록달록한 칠이 된 나무 조각이 불에 그을린 듯 한 모습으로 떨어져 있었다. 네오딤이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물건... 사령관은 다시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라비아타! 콘스탄챠! 칸! 당장 저 지역에 살아남은 바이오로이드 공동체가 없나 조사해줘!"


...


...며칠이 지나고, 레이시는 이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조심스럽게나마 초능력을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거의 매일 죽을 먹고, 이상한 주술을 들으며 기절하듯 잠에 빠지고, 다시 일어나자마자 죽을 먹고 잠만 자는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레이시는 처음으로 본 움막의 바깥 풍경에 약간의 당혹감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사령관에게 들었을 엘프 마을과 비슷한 느낌이 아닌, 무언가 외계적이고 원시적인 종교 공동체의 재현과도 같은 분위기의 마을이 눈 앞에 있었다.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자신을 간호하던 자매와 같은 페인트를 얼굴에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왼쪽 팔 전체에 기묘한 문신을, 또 누군가는 머리 위에 기괴한 장식물들을 잔뜩 올려놓은 채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서로 바이오로이드로서의 모델은 다르지만, 얼굴의 기괴한 페인팅은 공동체로서의 결속감을 다지는 효과를 주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원시적인 움막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바이오로이드들의 모습 또한 석기시대의 원시인들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간호한 자매만이 아닌 것인지, 서로 주술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다 농담을 들은 것 처럼 호탕하는 웃는 모습을 레이시는 이상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레이시가 움막 밖으로 나온 걸 본 한명의 다른 부족민이 레이시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 드디어! 유일한 자유인의 아내 한명이 몸을 일으켰소!"


그녀의 외침에 몇몇은 레이시를 돌아보곤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뒤 제 할 일을 하기도 하고, 자신을 가리키며 외친 부족민을 포함한 몇몇은 양손에 무언가를 가득 든 채 레이시에게 다가왔다. 당황한 레이시를 쳐다보는 그녀들의 표정은 이방인을 보는 경계의 표정도, 처음 보는 오르카의 승조원을 향한 호기심과 흥미의 표정도 아닌, 마치 자신의 친구가 병에서 회복된 모습을 보는 듯한 안도와 감사의 그것이었다. 자신을 가리켰던 부족민, 레드후드가 원판으로 보이는 그 바이오로이드는 레이시의 품에 뭔지 모를 이방적인 과일과 다양한 주술 토템들을 한가득 안겨주고는 양 어깨를 굳세게 붙잡았다. 억센 팔이지만, 레이시는 아픈 것 같지 않았다. 레드후드로 보이는 자매는 레이시에게 말했다.


"그 모든 어둠과 시련의 눈보라 끝에서 일어선 그대는 우리 모두와 저 떨어진 것들의 의지를 합한 것보다도 더한 강인의 의지를 가지고 있소! 우리 모두가 벼려진 자매에게서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바란다면 이곳이 그대가 몸을 잠시 뉘일 기반암이 될 뿐이야. 부디 몸과 마음을 여기서 충분히 뉘었다가 가길 바라네."

"아...감사합니다....이름이...그..."

"우리 모두는 이름이 없네, 물론 서로 불리고 싶은 이름이나 마음에 두는 이름이야 있겠지만, 사슬이 끊긴 자들은 흙뭍힌 자들이 남긴 그 어느 태피스트리 조각도 더럽던 깨끗하던 탐탁치 않게 여기거든. 정 안된다면 나는 내려온 자매라고 불러주게."


레드후드로 보이는 자매는 미안하다는 듯 멋쩍게 웃어보였다. 레이시는 내려온 자매에게 똑같이 웃음으로 답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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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써야 되는데 피곤해서 그런지 머리가 안돌아가서 우선 여기까지만 써야할거 같다...나머지는 내일 아니면 2일 뒤에 바로바로 써오던가 할게...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