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로니아 레아는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시저스 리제를 노려보았다. 리제의 눈 주변은 맞아서 시퍼렇게 멍이 든 채였고, 그 옆에서 다프네는 약상자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고만 있었다.


"리제, 다른 자매들한테 또 시비를 걸었다면서요?"


"그년은 자매가 아니야. 주인님께 달라붙는 해충이라고."


"같은 오르카호의 동료니까 자매인 거죠! ……그거야 아무래도 좋지만, 왜 싸움을 해요. 싸워서 이기기라도 하면 또 몰라. 왜 이기지도 못할 애들을 건드려서 맞고 오는 거예요? 전에도 그러더니."


"그 고양이 해충이 주인님을 귀찮게 했단 말야. 난 주인님을 위해 해충을 떼어낸 거라고."


리제는 자기딴엔 당당했다. 그것을 보고 레아가 이마를 짚었다.


컴패니언의 포이는 주인을 향해 교태를 부리고 집착하는 면이 강한 특성이 있었다. 그날도 포이가 들러붙다시피해서 사령관이 곤란해하는 걸 본 리제는, 순간 눈이 뒤집혀 포이의 머리채를 잡고 싸움을 걸었던 것이다.


"경호 중인 포이 양을 건드려서 리리스 양이 제게 얼마나 따져댔는 줄 알아요? 게다가 이번엔 주인님도 조금 실망하신 것 같았다고요. 한두 번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사령관에게 집착하는 리제는 순간 저도 모르게 발끈했지만, 잘못이 있는지라 큰 소리를 칠 수가 없었다.


"……어휴. 어떻게 잊을만 하면 이렇게 타 부대 자매들과 싸움을 벌이는 거지? 누굴 닮어서 이러는 건지……."


레아는 그 뒤로도 리제가 최근 저지른 실수 등을 꾸짖었다. 다른 자매보다 가사 능력이 떨어지는 리제는 작업 중 접시를 깨거나 하는 실수를 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리제는 레아의 말이 끝날 무렵 불쑥 중얼거렸다.


"쳇. 결국 주인님한테 잘 보이려고 혼내는 거면서."


"뭐라고요? 리제,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저도 모르게 마음속의 말을 내뱉은 리제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녀는 한발 더 나아가서 말했다.


"그러니까 레아 언니는 내가 부끄러운 거 아니야?"


"뭐? 그게 무슨."


"다른 메이드 바이오로이드와 다르게 가사도 그렇게 신통하지 못하고, 뻑하면 싸움이나 하고. 주인님한테 집착하고. 안 그래도 우리 페어리 부대는 주인님과 접점이 별로 없는데, 자꾸 나 같은 문제아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거잖아? 그래서 주인님께 부끄럽고. 그렇지?"


리제는 될 대로 되란 마음으로 소리치듯 말했다. 안 그래도 평소에 쌓였던 응어리가 혼이 나면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시 멍해져 있던 레아는 이내 노여운 표정을 지었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한 줄 아니?"


"결국 사실이 그런 거 아니야?"


날카롭게 말한 리제가 방안에 있던 자매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다프네건, 드리아드건, 아쿠아건, 저기 티타니아 언니건 결국 내가 귀찮고 골칫덩어리인 건 맞다고 생각하잖아. 안 그래?"


자매들은 숨을 죽였다. 안 그래도 불편했던 방 안의 공기가 더욱 내려앉았다.


한동안 어이가 없이 바라보고 있던 레아는, 이윽고 차가운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지만, 그딴 식으로 생각할 거면 페어리를 떠나버려. 나 원참."


리제는 화도 나고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아무 말이나 되받아쳤다.


"흥, 그래. 누구네 자매들은 언니부터 정말 잘해주던데. 걔들은 편하게 주인님도 매일 만날 수 있는데, 나는 맨날 한심하게 밭이나 관리해야 되고……."


"!"


"그까짓 농사 지도 해봐야 누가 알아준다고 그래? 맨날 흙만 묻히고. 아무도 공을 알아주지도 않고. 쳇."


순간, 방 안에 정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전기를 일으키는 능력자인 레아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는 뜻이었다.


"뭐…… 라고?"


해선 안될 말이었다. 신경질이 잔뜩 나 있던 리제도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주변의 다른 자매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둘을 살펴보기만 했다. 티타니아만 별일 아니라는 듯 책을 읽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계속 리제를 마주 노려보던 레아는, 자매들이 겁에 질려 있음을 깨닫고 그제서야 전기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어느 때보다도 쌀쌀맞게 내뱉었다.


"그래, 그러면 가 버리렴. 동생들 잘 돌보는 네 친구 있는 컴패니언으로 가든, 그렇게 좋아하는 주인님한테 가든, 페어리를 떠나! 네 마음대로 해 버려."


레아는 그 말을 남기고 휙 등을 돌렸다.


리제도 눈을 질끈 감은 다음 방을 나가버렸다.


"알았어. 가 버릴 게. 가면 되잖아?"


다프네가 다급히 리제를 붙드려 했지만 리제의 몸이 더욱 빨랐다. 순수한 몸놀림만으로 따지면 여기서 리제를 이길 자매는 없었던 것이다.


한바탕 말다툼에 자매 중 막내인 아쿠아는 슬퍼서 훌쩍거렸다. 드리아드는 어쩔 줄 몰라하며 눈치만 살폈다.


레아는 리제가 나가고 나자 다시 돌아서서는, 가만히 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리제가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사령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실수 때문에 자책할 때도 많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다른 자매들보다도 불안정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했다.


언니 노릇은 힘들구나. 레아는 재차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리제의 말마따나 컴패니언 아가씨한테 배우기라도 해야 되는 걸까.


태연한 듯이 책을 보고 있던 티타니아가 중얼거렸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그래. 저애가 예의없이 행동한 건 맞으니까."


"……."


레아의 쌍둥이 격인 티타니아는 냉정하고 거만한 성격이었지만, 반대로 전략적인 면에서는 자매 중 가장 뛰어났다. 레아는 다시 한숨을 쉬며 자매들을 둘러보았다.


페어리 시리즈의 숙소는 한동안 티타니아의 책 넘기는 소리, 아쿠아가 훌쩍이는 소리만 우울하게 들렸다.


한편, 무작정 숙소를 뛰쳐나온 리제는 잠시 고민했다. 막상 나와 보니 갈 만한 데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통로에서 로비까지 리제와 마주친 일반 대원들은 다들 슬금슬금 피하고 있었다. 언제나 공격적인 태도를 자주 보이는 리제와 친한 바이오로이드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싸우면서 친해진 컴패니언의 블랙 리리스가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상대였다.


리제는 고민하던 끝에 컴패니언의 숙소가 있는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아 언니가 한 말마따나 지금은 리리스 외에는 기댈 상대가 없었다.


때마침 자매들과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리리스는, 리제가 찾아오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스토커 네가 여긴 웬일이야?" 리리스는 리제를 보고 스토커라고 부르곤 했다.


한판 싸움을 벌였던 포이는 리제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해충씨. 사과라도 하려고 오신데스까."


리제는 포이가 빈정대는 말을 못들은 척하고 이렇게 말했다.


"리리스. 전에 나보고 컴패니언에 들어오라고 했잖아. 그 말 지금도 유효해?"


"뭐?"


리리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컴패니언 자매들의 시선이 리제 쪽으로 쏠렸다. 티타임을 지루해 하던 펜리르마저도 귀를 쫑긋 세웠다.


리제는 머뭇거리면서 아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컴패니언 자매들은 서로 마주보기만 했다. 리리스도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살짝 긁었는데, 때마침 리리스의 단말기가 울렸다.


발신인은 레아였다.


- 안녕하세요, 리리스 양. 휴…… 거기 리제 있죠?


"안 그래도 그쪽한테 전화를 드리려고 했어요."


레아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 음, 죄송하지만 리리스 양. 오늘 하루만이라도 리제를 조금 맡아줄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해 리제를 맡길 곳이 안 떠올라서요. 지금은 좀 거북해서.


"그야, 뭐. 하지만 저희도 천년만년 같이는 못 지내요."


- 알아요. 저도 화해할 방법을 찾는 중이니까.


리리스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이어갔다.


"자매 싸움을 해결하는 것도 일이긴 하죠…… 뭐. 부대 이동은 주인님의 권한이니, 제가 말씀을 드려보겠어요. 네, 네. 저야 상관없으니 참치캔이나 챙겨주세요. 네."


단말기를 끈 리리스가 리제를 바라보았다. 리제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싸움 때문에 감정이 남아 있던 포이는 리리스의 전화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반대했다.


"안 돼요. 제가 저 해충 때문에 언니한테 혼난 거 생각하면."


"내가 너한테 부탁한 줄 알아? 이 검은고양이 해충."


"뭐? 너 진짜 죽지는 않고 죽을만큼 맞고 싶니?"


리리스가 험악한 분위기의 둘을 제지했다.


"포이야, 아직 결정난 건 아무것도 없어. 언니가 주인님한테 가서 상담할 거니까."


리리스는 일단 리제를 숙소에 들어오라고 한 뒤 자리를 떴다.


포이는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리제와 서로 노려보았고, 다른 자매들은 둘이 싸우지 못하게 붙들어 놓았다.


얼마 뒤, 사령관은 리리스와 레아를 불러 놓고 일의 전말을 들었다.


사령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리제가 좀 불안해 보였는데."


"죄송해요, 주인님." 레아가 눈을 수그리고 사과했다.


"레아를 책망하고자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해결할 일을 자꾸 뒤로 미루느라 이런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니까."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사령관이 리리스를 돌아보았다.


"리리스는 리제를 잠깐이라도 데리고 있어줄 수 있겠니? 리제가 뭔가 깨닫는 바가 있도록."


리리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주인님을 위해서라도 스토…… 리제 양을 잘 선도해야겠죠."


레아는 난처한 듯이 거듭 말했다. "미안해요, 리리스 양. 저희 애가 실례를 저질러서."


"레아 씨도 그렇게 자꾸 사과하지 않으셔도 되요. 리제가 그런 거 때문에 속앓이를 했던 걸수도 있으니까."


"……." 레아는 가만히 수긍했다. 그간의 일로 미뤄보아 자매를 다스리는 일은 리리스가 한수 위라는 느낌을 받은 그녀였다.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임시적으로 리제를 컴패니언 경호대에 배치하는 인사 이동을 실시했다. 사령관의 경호를 총괄하는 리리스는 경건하게 그 조치를 받아들였다.


리리스가 돌아와서 사령관의 결정을 전하자, 포이가 일어서서 반대했다.


"언니! 저 쌈질만 하는 해충이를 우리 자매로 들여보내자고?"


"영구적인 조치는 아니야. 그냥 체험학습 같은 거니까…… 포이는 요즘 산책 못했지? 내일 애들하고 탐사 갔다 와. 주인님께서 명령하셨어."


사령관은 포이와 리제가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의도적으로 떼어 놓은 것이다. 포이는 투덜거렸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조치를 받아들였다.


다른 컴패니언 자매들은 사령관과 리리스의 조치를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우울해 있던 리제도 주인님을 근접 경호할 수 있다는 말에 뛸듯이 기뻐했다. 리리스는 그런 리제를 보고 주의를 주었다.


"스토커. 너 혼자 경호하는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내 경호 보조로 있는 거니까 그리 알아."


"어? 어째서?"


"그야 너는 전문 경호원이 아니니까. 이건 주인님의 명령이기도 해."


리제는 항의하려고 했으나 진지한 리리스의 눈빛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포이와 리제는 그날 밤을 불편하게 같이 자야 했다.


다음날이 되자, 리제는 리리스와 같이 경호 임무를 시작했다. 리제는 싱글벙글하며 사령관에게 다가왔다.


"주인님- 리제가 왔어요. 안심하세요! 벌레들은 제가 있는 한 다가오지 못할 테니."


사령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스는 리제에게 주의를 주었다.


"리제 양, 잡담은 거기까지. 주인님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한 이제부터는 말을 걸지 마세요. 아까 제가 교육한 대로."


리제는 댓발에 입을 내밀었지만, 사령관 앞에서 반발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사고를 치면 끝이라는 위기감이었다.


이날 사령관은 소규모 전투 지휘부터 서류결제 작업까지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리제는 처음에는 군기가 바짝 들어서 사방을 경계했지만, 곧 익숙치 않은 일에 졸음이 몰려왔다. 조용한 사령실에서, 이른 아침부터 긴장한 채로 가만히 서서 호위를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리제가 저도 모르게 눈이 풀려가려는 순간 잽싸게 다가온 리리스가 옆구리를 쥐어짜듯이 꼬집었다.


리제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파서 소리칠 뻔했다.


(야!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졸 거면 당장 때려쳐.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리리스가 무섭게 노려보자 리제는 저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면서 내심 컴패니언의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체감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다소 바쁜 일이 줄었다. 덕분에 사령실에 일반 대원들의 접근이 허가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날은 사령관이 오르카호 여기저기를 시찰하는 날이기도 했다.


사령실에 찾아오는 이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공적인 일을 보고하거나 허락을 맡으러 오는 대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사령관을 유혹하거나 심심해서 만나러 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왓슨- 뭐 해?"


"폐하. 오늘 저녁에 추기경씨가 볼일이 있다는데. 소신과 먼저 볼일을 치르지 않으시겠어요?"


"저 머리 빈 금발보다는 전략 병기인 저를 케어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후훗."


"주인님. 라비아타 통령께서 이따가 만나자고 하셔서……."


사령관을 만나러 오는 이들은 그 위치가 낮은 것도 아니고 하나같이 쟁쟁한 대원들이었다. 특히 사령관이 시찰을 나갈 때마다 접근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리리스와 리제는 미리 몸 검사를 하거나 감시를 했지만, 그녀들을 막지는 못했다.


그것이 오르카호의 경호 원칙이었다. 사적인 대화 없이, 공기처럼 신경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사령관을 편히 해주기 위해 리리스가 세운 정책이었다.


그래도 리제는 연적인 대원들을 볼 때마다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등에 맨 쌍검으로 요절을 내버리고 싶었지만, 곁에서 무섭게 제지하는 리리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로서는 가장 가까이에서 사령관이 다른 여자들과 썸씽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일은 가히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눈 뜨고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기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인간 여성이었으면 벌써부터 칼춤을 추고도 남았을 터였다.


리제는 혀를 내둘렀다. 자신도 이렇게 속이 끓어오르는데, 이런 일을 매일같이 겪어야 하는 리리스와 그녀의 동생들은 얼마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일까 하고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와 동시에 컴패니언의 일이 절대로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후 늦게 시찰을 마치는 사령관에게 문득 보고가 올라왔다. 페어리 시리즈의 지도 덕분에 잠수함내 수경 재배는 물론, 요안나의 섬에서도 농축업 수확량이 대폭 증가했다는 보고였다.


사령관은 그 보고를 받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정말이야? 하하. 이거 대단한데. 페어리 자매들 덕분에 우리 대원들 먹을 거는 전혀 걱정이 없겠어. 안 그래, 리리스?"


리리스도 싱긋 웃었다.


"그러네요. 후후후. 그녀들 덕분에 오르카호가 항상 굶지 않고 배부르게 지낼 수 있는 거지요. 고마워, 리제 양?"


리제는 그 말을 듣고 불현듯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과 자매들 - 페어리 시리즈의 과업이 전혀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오르카호의 바이오로이드도 생명인만큼, 먹어야 싸우고 살아남는 게다. 후방 지원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리제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한 채 사령관을 졸졸 따르기만 했다. 이에 리리스와 사령관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저녁 타임이 되어서 경호를 교대할 때가 오자, 리제는 순순히 CS페로에게 바톤을 넘겼다.


그때 사령관이 조용히 떠나려는 리제를 불러세웠다.


"리제."


리제는 흠칫하고 놀라서 돌아보았다.


"주, 주인님?"


사령관은 리제의 앞에 다가왔다.


"오늘 경호 수고했어. 힘들었지?"


"아, 아니에요. 별로."


리제는 괜시리 안절부절했다.


사령관은 빙긋이 웃으면서 그런 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제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사령관의 손길을 느끼었다.


"리리스. 리제한테 맛있는 거 사줘."


"그럼요. 저희 일일 막내인데."


리제는 리리스의 말에 반발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리리스는 피식 웃으며 리제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둘이서 거하게 저녁을 먹고 보니 곧 포이가 돌아올 때였다.


그러자, 저녁 내내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리제는 리리스를 보고 말했다.


"저기, 있잖아……."


리리스는 리제가 부끄럽게 하는 말을 듣고 미소지었다.


"벌써 체험학습 끝이야? 그건 상관없지만, 네 언니의 용서를 받아야겠지?"


"그건……."


리제의 얼굴이 다소 흐려졌다. 어제 말다툼하고 도망쳐 버린 주제인 것이다.


리리스는 눈을 감았다.


"가 봐. 가서 네가 먼저 잘못했다고 빌어."


"……."


"네 언니는 이미 화가 풀려 있을 거야.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해. 그러면 일은 저절로 풀리게 되어 있으니."


"정말 그래도 될까?"


"내가 동생들하고 하루 이틀 살아본 줄 아니? 나도 자매싸움은 겪어 봤다고."


리제는 리리스의 말에 용기를 얻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부리나케 페어리 숙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리리스는 흐뭇한 얼굴로 리제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어느새 돌아온 포이가 말했다.


"에이. 와따시를 피해서 도망친 데스? 그러나 훌륭한 선택인데스요. 언니한테 대드는 못된 스토커는 참교육을 시켜줄 거니까."


"까불지 말고."


리리스는 포이와 마주보고 웃었다.


리제는 달려가면서도 망설였다. 레아 언니가 아직도 화가 안 풀렸으면 어쩌지.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쩌지.


그래도 사과는 해야 되리라. 어제 못했던 말을 하기 위해 달려온 리제는 뜻밖에도 숙소 근처에 자매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멈춰섰다.


"레아 언니?"


레아는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왔다. 리제는 그녀가 가까이 오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언니. 그, 저."


"경호하느라 고생했어."


리제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레아는 자애롭고 따스한 눈으로 리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제가 살짝 입을 벌리고 있자, 레아는 웃었다.


"어때? 경호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


"……으, 응. 그리고…… 우리 자매가 하는 일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어."


"후후. 알아서 다행이네."


"그리고…… 미안해요, 언니. 말을 아무렇게나 해서."


"괜찮아. 자매끼리 싸울 수도 있는 거지, 뭐. 나도 앞으로 혼은 적당히 낼게."


"엑?"


다들 까르르 웃었다.


다프네와 아쿠아, 드리아드가 반가워 하면서 리제에게 뒤따라 다가왔다. 언니, 언니. 컴패니언 애들은 어땠어? 거기 숙소에서 자 보니까 어때? 애들 정말 동물처럼 행동해? 동생들이 웃으며 리제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


겨우 하루 넘게 외박한 정도였지만, 리제는 자매들의 환대를 받자 조금 목이 메었다.


티타니아는 그런 자매들의 화해를 지켜보다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어디 가?" 레아는 용케도 티타니아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싸우지도 않고, 재미없으니까 가서 책이나 더 볼 거야."


"후후. 계속 재미없길 바랬으면서, 무슨."


티타니아는 쳇 하면서 멀어져 갔다. 레아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리제와 티타니아를 번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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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대회때 문학을 이것도 올릴까 생각중

문학



소설 모아둔 픽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