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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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종교 활동 시간이다. 교회 갈 놈들은 왼쪽, 성당 갈 놈들은 가운데. 법당 갈 놈들은 오른쪽.”

 

 훈련병 시절, 주말마다 있는 종교 시간에 갈 곳이 없다는 이유로 교회에 들어선 적이 있었다. 교회에서 나눠주는 부식이 햄버거였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종교 활동을 안 하면 조교놈들이 일 시킨다는 이야기가 돌아 어딜 갈지 고민하다 교회를 선택했다.

 

 지루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생각하며 들어선 그곳은, 생각보다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너는 하나님의~사랑! 아름다운~하나님의~열매!’

 

‘오 주여! 당신께~감사하~리라! 실로암~내게 주심~으으을!’

 

 성당의 성가대를 떠올리며 들어선 교회의 찬송가 시간은 내 예상과 달리 경쾌한 노래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와 나는 그 분위기에 취해 옆 동기 놈들과 어깨동무를 하고선 열심히 그걸 따라불렀다.

 행군 때마다 불러대던 군가는 그렇게 안 외워지더니, 이놈의 찬송가들은 들은 지 2분 만에 전부 외워버렸다. 그렇게 찬송가 시간이 끝나고 예상했던 설교 시간이 시작되자 앞전의 흥분으로 인해 또 잠자기는 글러 먹었었다.

 

“여러분,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입니까? 그것을 알고 계신 장병분 혹 계십니까?”

 

“훈련병! 113번! 최진우!”

 

“오. 최진우 훈련병. 어떤 것입니까?”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입니다!”

 

 저 어디선가 동기 녀석이 당찬 목소리로 제 의견을 내뱉자 목사 할아버지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는 죄입니다. 십계명에서도 말하듯 강도, 살인, 강간, 불륜. 이런 것들은 죄가 됩니다.”

 

“..당연한 소릴.”

 

 바깥세상에서도 중범죄인데 그게 뭔 대수인가. 심드렁한 얼굴로 그 목사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목사 할아범은 우리의 반응을 예상키라도 한 듯 뒤에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훈련병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밖에서도 이런 행위는 매우 엄중한 처벌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합니다.”

 

“...”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요구하는지 아십니까?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 할아버지는 제 단상 앞에 놓인 두꺼운 성경책을 한 장 넘기며 중후한 목소리로 그 책의 내용을 찬찬히 읊기 시작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 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허.”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존나 극단적이네..”

 

 천국 가려다 먼저 저승 가겠는데요. 당시 열심히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숭고한 노력을 설파하는 저 목사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또 한 귀로 흘렸다.

 애당초 부식을 위해 찾아갔던 곳인 만큼 내게 그 내용은 별로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왜 그때가 떠오르는가.

 

“헤헤. 우선 숙소로 들리기 전에 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괜찮지?”

 

“...예. 혹 그런데 여기는..”

 

 작전 회의실이라는 감방에서 탈출하는 줄 알았더니 이 사령관은 날 놓아줄 생각을 안 한다. 심지어 숙소로 안내해주겠다며 날 끌고 오더니 도착한 곳은..

 

“아우로라! 커피는?”

 

“다 끝나가! 사령관!”

 

“여기 커피가 정말 괜찮거든. 아, 여기는 우리 함의 카페테리아야. 어때? 분위기가 썩 괜찮지?”

 

“...예. 사령관님. 정말..”

 

 죽을 맛입니다. 난 뒷말을 혓바닥 아래로 꾹 숨긴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가며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테이블 주위를 둘러보았다.

 

‘...씨발. 진짜..진짜!’

 

 복도와 같은 새하얀 벽면이지만 내부 디자인은 아무 장식도 없던 바깥과 사뭇 달랐다. 간소하지만 갈색빛의 고정 테이블들과 의자들이 비어있는 공간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었고 간단하지만 바 시설도 한 켠에 설치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카페테리아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공간, 들어서는 사람에게 바쁜 일상 속 작은 안식을 제공하는 내가 알던 카페테리아다. 그런데 왜 여기서 나는 이렇게 다리에 힘을 빡 주고 있나.

 

“사령관. 여기 사령관이 주문한 특제 아우로라 커피.”

 

 양다리를 최대한 오므리고 있자니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와 쓰디쓴 커피의 향이 동시에 내 콧구멍을 간질였다. 또각대는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동시에 나는 눈길을 휙 테이블 위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들려오는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내 코앞에 간단한 장식이 돋보이는 커피잔이 나타났다.

 

“아우로라 특제 커피! 대령이오~” 

 

“응! 고마워. 아우로라.”

 

“헤헤. 아냐. 이렇게 새로운 인간님이랑 가장 먼저 찾아와 준 게 난 더 고마운걸?”

 

“내가 아는 곳 중에 마음 놓고 쉴 만한 곳은 여기뿐이거든.”

 

“-응. 고마워. 정말.”

 

‘이 새끼 혀놀림 기가 막힌 거 보소.’

 

 작전 회의실에서는 어린애처럼 굴던 녀석의 목소리가 돌변하자 나는 푹 숙인 고개를 살짝 들어 사령관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썹을 살짝이 오므리곤 눈매를 누그러뜨린다. 동시에 전에 내게 보여줬던 어색한 웃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변성기에 접어든 남성이 내는 중저음으로 곁으로 다가온 여성에게 칭찬을 건넨다.

 

‘주인공은 주인공이구나. 근데 나한테는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이 인간이 작전 회의실의 그 양반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레 테이블 곁에 서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건네는 그 모습에 내 눈썹이 찌푸려졌다. 저것도 가면인가, 아니면 주인공의 본연의 모습인가. 스토리를 전부 읽은 나로서도 작전 회의실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어느 쪽이 그의 본모습인지 쉬이 결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어..근데 혹시 새로운 인간님의 이름이..”

 

“라붕이. 라붕씨라고 난 부르고 있어.”

 

“아하! 굉장히 특이한 이름이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야.”

 

‘...씨발. 괜히 라붕이라고 했나.’

 

 내가 내 입으로 뱉은 수이지만 들을 때마다 자괴감이 목구멍 위까지 물씬 올라온다. 그냥 내 이름 석 자를 읊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가 심문실로 끌려가면 내 인생은 어떻게 돼?

 

‘차라리 이해하지 못할 이름을 내던져야 이렇게나마 숨을 쉬지.’

 

 지휘관들의 반응으로 보았을 때, 그녀들은 지금 내 정체를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당장에 펙스와 대치 중인 그녀들에게 내 존재는 절대 반가울 리 없을 터. 그러니 하다못해 내가 내 설정을 정하기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때, 내 눈앞에 여태껏 보지 않으려고 애쓰던 것이 쑥-하고 들어왔다.

 

“라붕씨? 라고 나도 그렇게 불러도 될까?”

 

“..예?”

 

 무지개빛 머리카락과 별을 눈 안에 박아놓은 듯한 천상의 미모에 나는 결국 입을 허-하고 벌린 채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서울 홍대에서도, 부산 해운대에서도 보지 못한 천상의 미모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그 얼굴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예..그러셔도 됩니다.”

 

“..헤헤! 응! 만나서 반가워! 라붕씨!”

 

 내가 한발 늦은 대답을 하고 있자니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와씨, 미쳤다. 눈이 돌아-

 

출렁!

 

“...끄으으윽!”

 

 눈을 돌리지 마라! 씨발! 정신줄 꽉 잡아! 나는 재빨리 눈이 훤히 드러난 그녀의 쇄골 아래로 향하려 들자 재빨리 내 왼 허벅지 위를 꼬집었다. 후끈거리는 감각과 함께 척추 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고통에 온 정신을 집중한 채 나는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저도! 저도 반갑습니다. 아우로라씨.”

 

“어..혹시 어디 안 좋아? 얼굴색이..”

 

“아, 그는 좀 전에 병상에서 일어나서 그래. 혈액이 부족한 것 같다고 다프네가 그랬어.”

 

“으응..꼭 완치되길 바랄게? 라붕씨?”

 

“가..감사합니다.”

 

 어깨가 부들거리려 드는 것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극복하려 들자 이번에는 내 고간에 힘이 들어가려 한다. 씨발. 이럴 때 고개 세우는 거 아냐!

 

‘동해물과백두산이마르고닳도록! 하느님이보우하사! 우리나라씨발!’

 

 속으로 연신 애국가를 부르고 있자니 몸에 힘이 축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느냐? 그건 바로..

 

‘가슴을! 씨발! 좀! 가려주세요!’

 

 이 동네의 패션 센스를 내가 너무 얕봤기 때문이다. 레모네이드 알파 때야 사방이 암사자들의 송곳니이었으니 미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도 어려웠지만 지금 현재는 상황이 달랐다.

 내 후각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아우로라 특유의 채취와 따뜻한 커피의 김이 제공하는 노곤함, 작전 지휘실처럼 냉담한 분위기보다는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카페테리아의 환경.

 

‘아우로라 디자이너 누구야! 세상에 저렇게 흉부를 훤히 강조하는 의상이! 씨발! 너무 좋긴 한데요! 아니! 씨발!’

 

 그리고 이 미친 세상의 복장. 그 때문에 내 소중이는 카페테리아에 들어서 아우로라를 확인한 순간부터 계속해서 고개를 쳐 들려고 하고 있었다.

 남성을 매혹하다 못해 유혹하는 그녀의 몸짓과 목소리, 거기에 채취까지. 3박자가 고루 갖추어진 이 여성 탓에 잠깐 아차하는 순간에 내 허벅지 사이가 통제불능에 들어서려 하는 것이다.

 

‘차라리 소완이나 만나러 식당으로 데려가던가! 왜 하필!’

 

 게임 속 모습을 그대로 입고 있는 아우로라를 보고 있자니 나는 한층 정갈한 옷매무새를 지닌 소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리리스나 소완, 리제는 정말 정상적인 패션이었어. 이 미쳐도는 동네에서 가장 정갈한 애들이었다고!

 

‘나..나 좀 내버려 두면 어디가 덧나냐? 이게 고문이지! 씨발!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 아냐?!’

 

 무슨 성인남성이 갓 성에 눈을 뜬 중딩 새끼처럼 굴고 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나는 총을 맞고 실려 와 병상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작전 지휘실로 갔다가 여기 왔다. 그래서 지금 내가 뭘 말하려고 하냐고?

 

‘씨발! 내..내 바지 돌려줘! 이 사령관 새끼야!’

 

 나 병원 환자복이야. 원래 입고 있던 바지처럼 꽉 조이는 바지가 아니라 사타구니가 헐렁하다 못해 내 암스트롱포를 세웠다가는 내 낭심만 툭 튀어나온다고. 그것도 사방이 전부 여자인 환경에서!

 

‘주님. 제 눈알 좀 뽑아 가 주십쇼. 제발요. 죄를 짓다 못해 쪽팔려서 지옥 밑바닥 가게 생겼습니다!’ 

 

17)

 

‘어..바로 개인실로 안내할 걸 그랬나?’

 

 사령관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라붕이의 모습에 제 입술에 침을 묻혔다. 그냥 개인실로 데려가려다 조금 전 마시다 뱉어낸 아우로라의 커피가 떠올라 일부러 그를 이곳으로 이끌고 왔으나 그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부터 계속해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으음. 괜히 원하지도 않는 걸 권유했나? 화..확실히 커피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다른 음료를 원하는지 그것도 확인 안 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골라서..아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 함에서 사령관은 다른 이들이 좋아하는 걸 물어본 기억이 적었다. 대부분 컨셉따라 확실히 좋아하는 것이 정해져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그에게 자기가 무월 원하는지 또 좋아하는지를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다녔다.

 

‘아우로라는 디저트를 만드는 걸 좋아하고, 슬레이프니르는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고.’

 

 LRL은 제 또래 바이오로이드들과 떠들고 노는 걸 좋아했고, 샌드걸과 워울프는 담배를 태우는 걸 좋아했다. 발키리는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고, 불굴의 마리는 커피를 선호했다.

 당초에 그가 굳이 뭘 물어보기도 전에 그녀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아끼는 걸 어필해왔고, 또 사령관이 좋아하는 거라면 그녀들 역시 스스럼없이 그걸 받아 들여왔다.

 그런 환경 속에서 3년을 살아온 사령관에게, 갑작스러운 동성. 그것도 동일한 인간과의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하씨. 이렇게 보니까 나 대인관계에는 한없이 무지하네. 알렉산드라한테서 배운 건 죄다 이성관련이었으니..’

 

 사령관이 그렇게 자책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입을 꾹 닫아버린 두 남성 사이에 끼인 아우로라는 올 때와 달리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헤헤. 나는 그만 일하러 가볼게. 사령관. 라붕씨. 즐기다가 가.”

 

“응. 아우로라. 커피 잘 마실게.”

 

“..잘 마시겠습니다. 아우로라양.”

 

“...응!”

 

 조금 긴장한 듯한 목소리지만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하는 라붕이를 보자 아우로라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왔던 길로 다시 돌아섰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자리를 뜨자 어디선가 석연치 않은 한숨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후우..”

 

 그 한숨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라붕이였다. 그는 아우로라가 자리를 뜬 것을 확인하고선 지친 눈으로 제 앞에 놓인 커피잔을 빤히 내려 보다 곧장 제 입술로 커피를 기울였다.

 

“-달다.”

 

“..! 그렇지? 아우로라가 내린 커피지만 원두는 그 회의실의 마리 지휘관이 제공한 거야. 정말 괜찮지?”

 

“...예. 사령관님.”

 

 그의 입에서 짧으나 이곳에 오기 전까지 들어본 적 없는 편안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사령관은 제 혓바닥을 주체하지 못한 채 또다시 그에게 몸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돌변하자 사령관은 또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뭐가 문제인지, 그에게는 주어진 정보가 너무나 적었다.

 

‘우선 한국어를 사용하는 거나 외관만 봐서는 나랑 똑같은 한국인일 텐데..이걸 좀 어필해볼까? 아냐. 나도 한국어를 쓰긴 하지만 애당초 한국태생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는데.’

 

 사령관은 자신이 콘스탄챠와 그리폰에 의해 구조받기 전의 기억이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거라고는 철충의 약점들과 전술 전략 지식, 그리고 제 이름뿐이었다.

 그렇기에 자기가 누구의 아들인지, 형제가 있는지 없는지. 심지어 태어난 날도 몰랐다.

 

‘..혹시 이 사람은 내가 모르는 것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저기. 라붕씨.”

 

“예. 무슨..”

 

“혹시 자기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라던가, 아니면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을까?”

 

 사령관의 물음에 라붕이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커피잔을 쥔 그의 오른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면서 딸그락-딸그락거리는 마찰음이 아무도 없는 카페테리아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자 사령관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민감한 주제를 꺼냈음을 깨달았다.

 

“괘..괜찮아?! 라붕씨?”

 

“아..아. 괜찮습니다. 사령관님.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내..내가 너무 아무 생각없이 물었나? 대답하기 힘들면 대답 안 해도 괜찮아!”

 

 사령관이 재빨리 흔들리는 그의 손을 쥐려 하자 라붕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옅지만 확실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오늘 갑자기 그 폐허 위에서 눈을 떴습니다.”

 

“...”

 

“눈을 떴을 때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이 있나 싶어 폐건물 내부를 이리저리 걸어다녔죠.”

 

“...”

 

“그리고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뛰쳐나갔을 때 그 철충을 마주쳤습니다. 철충은 제게 기관포신을 들이밀었고 저는 그 괴물의 공격을 피해 폐건물 안 이곳저곳을 뛰어다녔고..”

 

“허..”

 

“결국 도망치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그 괴물과 마주했습니다.”

 

 라붕이는 제 이야기를 담담하게 읊조리다 다시 커피잔에 입을 대었다. 호록-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떨림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사령관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철충은 마치 제게 도망칠 테면 더 도망가보라는 식으로 기관총의 총열을 굴려대더군요. 저는 그 괴물의 행태에 분노했고, 결국 총상으로 인해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습니다.”

 

“..그만. 그만하면 됐어. 라붕씨.”

 

 사령관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테이블 아래로 숨긴 제 오른손을 손톱이 손바닥 살갗을 파고들만큼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자기가 만약 그와 같은 상황에 놓였으면 어땠을까, 자신이 일어났을 땐 콘스탄챠와 보리, 그리고 그리폰이 함께였다. 심지어 현재 자신이 있는 함으로 곧장 인도된 이후로 그처럼 철충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어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그녀들 뒤에 숨어서 전장으로 걸어나가 본 게 다였지.’

 

 그것을 그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철의 왕자와 대치했을 때도, 오메가와 대치했을 때도.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들의 앞으로 나가 홀로 제 몸을 내세워 적들과 온전히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강하구나. 그런 경험을 겪고도 작전 회의실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굴 수 있다니.’

 

 만약 자신이 그 철충과 마주쳤다면, 아마 곧장 죽을 거라고 포기했겠지. 하지만 이 남성은 달랐다. 분노했다고 한다. 살려주어서 고맙다고 한다. 섬뜩한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비쳤다.

 

‘정말..내가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라붕씨.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당신이 실려 온 것만 봤지, 당신이 총상을 입은 계기에 대해 무지했어.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사령관의 진심 어린 사과에 라붕이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사령관님. 제가 이렇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도 사령관님과 사령관님의 부하분들 덕분입니다. 어떻게 제가 사령관님께 사과를 듣습니까?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오히려 제가 숙였어도 더 일찍 숙였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이해심이 넘치다니! 정말 모범이 따로 없구나!’

 

 사령관은 눈가가 시큼해지는 것을 꾹 참은 채 커피잔의 손잡이를 잡은 그의 오른손에 제 양손을 얹으며 침통한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일전의 제안을 건네었다.

 

“라붕씨. 정말 내 옆에서 부 지휘관을 맡아줄 생각이 없을까? 난 정말 당신이 맡아줬으면 해. 당신이라면..”

 

“...전 제 자신이 미숙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령관님. 부디 절 후방으로 보내주십시오.”

 

“하지만! 후방이라고 하면..”

 

“하다못해 후방에서라도 사령관님의 은혜에 보답해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결초보은이라는 말만큼은 이루고 싶습니다.”

 

‘크흐으윽! 라붕씨!’

 

 결초보은, 죽은 후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 사령관은 그의 말에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결심이 확고한 남자를 제 욕심으로 이곳에 남길 수 없었다.

 끝끝내 그의 의지를 흔들 방도가 없던 사령관은- 

 

“..알겠어. 라붕씨의 결심이 그렇게까지 확고하다면 내가 최대한 라붕씨가 앞으로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자리를 물색해볼게. 하지만 언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만 해. 그것도 그럴게 우리는 이 세상에 남은 단 둘뿐인 사내잖아!”

 

“...은혜를 갚기도 전에 은혜를 더 받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나, 사령관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라붕이의 확답을 들은 사령관은 그의 오른손 위에 얹은 제 양손에 힘을 꽉 쥐었다. 지휘관들이 무어라하든 이제 그에게 그런 것은 하등 상관이 없었다.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붙이고 존중할 줄 아는 사내가, 힘든 경험을 겪고도 굳건하게 서 있는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이상적인 형제가 눈앞에 있는데 이 꿈을 어찌 놓칠 쏘랴.

 

“우선 커피를 마저 들까? 다 마신 이후에 바로 개인실로 이동..”

 

후-루룩!

 

“...응?”

 

“가시죠. 사령관님. 제 개인실이 어딥니까?”

 

18)

 

삑-!

 

 닥터는 CCTV 영상의 녹화를 끝마치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서로 다른 얼굴로 제 테이블 위에 배치된 모니터들의 화면을 보는 6명의 지휘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모두 이곳으로 불러 모은 소녀, 닥터는 담담하게 그녀들에게 질문을 건네었다.

 

“어때? 이래도 언니들 계속 저 오빠에 대해 추궁할 생각이야?”

 

“...허.”

 

 철혈의 레오나는 눈썹을 씰룩이다 허탈한 목소리를 내며 팔짱을 풀곤 제 제복 아래에 숨겨진 홀스터에 권총을 집어넣었고.

 

“크흑..”

 

 불굴의 마리는 제 눈 사이에 손가락을 짚은 채 솟아오르려는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으며.

 

“음..소인의 불충이오. 주군처럼 제대로 된 인간이 또 있었다니. 아직도 멸망 전 인류와 그를 비교하고 있었구려.”

 

 무적의 용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난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떼지. 할 거면 그대들끼리 하게.”

 

 로열 아스널은 심드렁한 얼굴로 제 오른손을 휘저으며 닥터의 시선을 피했으며.

 

“...나도 아스널 준장과 같은 생각이다.”

 

 신속의 칸은 아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너희들 미쳤어?! 저거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멸망의 메이는 제 주변 지휘관들의 반응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이 언니. 언니는 그 성격 좀 어떻게 해야 해.”

 

 닥터는 차가운 눈초리로 계속해서 씩씩대는 멸망의 메이를 흘겨본 후 제 테이블에 올려진 머그잔에 입을 대었다. 제 주변의 반응과 닥터의 차가운 목소리에 멸망의 메이는 이마의 열을 식후지 못한 채 소리를 빽 내질렀다.

 

“아니! 저 인간이 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 그걸 왜 저 대화로만 유추해!”

 

“다시 한번 들려줘? 언니? 아무리 공감 능력이 떨어져도 그렇지. 저 새로운 오빠가 얼마나 진심인지 몰라서 그래?”

 

“그걸 어떻게 아냐고! 인간이면 거짓말도 할 줄 알잖아! 저게 뱃속에 시커먼 구렁이를 키우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아!”

 

“하아..다시 보여줘?”

 

삑-!

 

 닥터는 반박하는 멸망의 메이가 못마땅한지 일전의 영상을 다시 틀었다. 그러자 모니터의 한족에 사람의 심박 수와 음역대를 해석해주는 표가 떠올랐다.

 

-눈을 떴을 때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이 있나 싶어 폐건물 내부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죠.

 

삐-!

 

-그 철충은 마치 제게 도망칠 테면 더 도망가보라는 식으로 기관총의 총열을 굴려대더군요. 저는 그 괴물의 행태에 분노했고, 결국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습니다.

 

삐-!

 

-하다못해 후방에서라도 사령관님의 은혜에 보답해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결초보은이라는 말만큼은 이루고 싶습니다.

 

삐-!

 

“보여? 거짓말 테스트 전부 통과야. 심박 수도 안정화되어 있고, 음역대도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내 분석이지만 철충에게 공격받았을 때를 이야기할 땐 트라우마로 인한 흔들림도 보이고. 결초보은이라는 말을 할 때는 강한 의사를 표현하는 듯 심박수가 증급했어. 저 오빠는 단 한마디의 거짓말도 안 했어. 우리 오빠한테.”

 

“야! 그걸 어떻게 확신해! 거짓말 테스트라는 것도 결국 속일 수 있는 거잖아!”

 

“우리 080기관이 만든 거짓말 테스트 프로그램보다 더 완벽한 걸 만들어오면 내가 인정해줄게. 언니. 물론 이 테스트기는 내 발명품이다?”

 

“...”

 

 닥터의 엄포에 멸망의 메이는 허탈한 얼굴로 제 키만한 당돌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다른 지휘관들은 저 결과를 이해하곤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참회하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멸망의 메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저 남자의 정체에 대해 알아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그럼 저 남자의 이름은?! 내 머릿속에 라붕이라는 기괴한 명칭은 없어! 심지어 케스토스 하마스도..”

 

“언니. 딱 잘라서 이야기할게. 우리가 쓰는 공통어가 뭐야?”

 

“? 한국어잖아.”

 

“잘 아네. 저 오빠도 한국어를 쓰지?”

 

 뭘 당연한 걸 되묻냐는 듯 눈썹을 찌푸리는 멸망의 메이에게 닥터는 다시 키패드 위에 손을 얹었다.

 

삑!

 

“이게 한국, 정확하게는 남한과 북한의 지도야. 어때? 언니가 보기에는.”

 

“..삼면이 바다잖아? 그게 뭐 어때서?”

 

“하아. 삼면이 바단데 바다 너머에 뭐가 있어?”

 

“..중국 대륙이랑 일본도네.”

 

 닥터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멸망의 메이는 도무지 제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닥터는 천천히 자신의 분석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우리가 쓰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썼던 대표적인 멸망 전 국가는 남한과 북한이야. 그런데 이 땅의 역사는 꽤 길거든?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 때 연변지방에 있었다고 하는 고조선을 자신들의 시초라고 읽고 있어.”

 

“...”

 

“고조선 시대 때부터 꾸준히 중국 고대국가와 조공 관계를 유지해오면서 문화와 무역을 통한 기술 공유를 해왔고 동시에 세 대륙의 교통적 요충지라는 위치상의 중요도로 인해 중국, 북방, 일본으로부터 잦은 침략을 당해왔다는 역사를..”

 

“대체 뭔 소리야! 짧게 말해!”

 

“..이 한반도라는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소리야! 중국! 북방 이민족! 심지어 옆에는 일본! 어족이야 알타이 어족이지만 잦은 외부 침략으로 피가 이리저리 뒤섞인 민족이라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름 자체가 라붕이라고 해도 한자 독음으로 읽으면 그만인 이름이라는 소리야! 뜻이야 한자로 써주지 않으면 모르지만! 별달리 이상할 게 없는 이름이라고! 행여 모르잖아! 저 오빠의 이름에 돌림자가 있다던 가 해서 좀 이상한 이름이 나와도 이 동네는 원래 좀 있어! 그런 이름은!”

 

“...”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천재소녀의 기백에 멸망의 메이는 조금 뒤로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서는 것이 멸망의 메이에게는 자기 자신의 자존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지막 카드를 내던졌다.

 

“그럼 필승은! 그 필승이라는 구호! 그걸로 저 녀석의 정체를..”

 

삑-!

 

 이제 닥터는 아예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듯 자신이 조사한 자료 영상을 말없이 모니터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 모니터에 올라온 영상에는-

 

-필승!

 

 건장한 군인들이 디지털 군복을 입은 채 경례를 올리는 장면. 그들의 뒤로는 다수의 전차들이 구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군하고 있었다.

 

“이건 육군이고.”

 

삑-!

 

-필승!

 

 또 다른 영상 속에서는 흰 해군 제복을 입은 장병들이 경례를 올리는 모습. 한눈에 보아도 군함 위에 서서 경례를 하는 장면.

 

“이건 해군이고.”

 

삑-!

 

-필승!

 

“이건 해병대고.”

 

삑-!

 

-필! 승!

 

“이건 공군이야. 자! 언니. 골라 봐! 저 오빠가 어느 군대를 나왔을까? 아! 참고로 한반도는 2000년대까지 남북한 휴전 상태였거든? 그래서 양 국가 남성들은 대부분 군대 갔어야 했다?”

 

“...아..아니! 그러면 저 인간이 대체 몇 살이라는 건데! 그건 안 이상해?!”

 

 멸망의 메이의 마지막 발악에 이제 다른 지휘관들마저 눈살을 찌푸릴 때, 닥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매우 차가운, 아주 차갑고 매서운 눈으로 멸망의 메이를 노려본 채 그녀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언니.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뭐..뭐?”

 

 이전까지 보여준 적 없던 닥터의 살벌한 분위기에 지휘관들마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들이 미처 이해했으나 덜 이해한 것. 이 소녀는 단순히 오빠 바래기 천재 소녀가 아니다. 첩보와 정보조작에 능한 080기관 소속의, 천재. 마치 그 사실을 오늘 이 자리에서 각인이라도 시키겠다는 것처럼 닥터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아껴가며 뒷걸음질을 치는 멸망의 메이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오빠가 그렇게 수상해? 그럼 이건 어때? 이런 사람도 있거든.”

 

“..뭔데! 왜 이러..”

 

“인류 멸망 70년 이후, 갑자기 우리 앞에 툭 나타나서는 우리는 손도 못 써본 철충들을 하나둘 쉽사리 파괴하면서 심지어 연결체들마저 하나하나 제 앞에 무릎을 꿇린 남자가 있거든?”

 

“...”

 

“아는 거라곤 한국어를 쓴다는 것과 자기 이름뿐. 태생도, 출신도,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 남자. 어때? 언니. 저 새로운 오빠보다 더 이상한 인간이 있는데, 그것부터 우리 080기관이 풀어봐야 하지 않을까?”

 

딱!

 

 랩실의 문 앞까지 뒷걸음질을 친 멸망의 메이는 제 등에 차가운 벽면이 느껴지는 것보다 눈앞의 살벌한 기백을 내뿜는 자기 덩치만한 소녀의 매서운 물음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사령관 역시 출신이 불분명한 인간, 저 새로운 인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저 새로운 오빠를 의심하려거든 우선 언니가 우리 오빠의 의문부터 풀어봐봐. 어때? 해볼래? 우리 080기관의 숙원인데.”

 

“..이씨! 알겠어! 알겠다고! 내가 졌어! 씨이잉!”

 

 멸망의 메이는 결국 눈물을 글썽이며 천장을 향해 항복선언을 내뱉었다. 그러자 닥터는 언제 자기가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응! 항복은 빠를수록 좋은 거야! 언니.”

 

“..히이잉.”

 

“아!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물론 우리 역시 저 새로운 오빠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라서. 경과를 두고 행동할 거니까!”

 

“..그런 건 빨리 말하면 좋았잖아.”

 

 닥터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려 다시 테이블로 걸어가자 멸망의 메이는 제 자리도 잊은 채 문에 기대어 스르륵 무너져내렸다. 그런 그녀를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지휘관들은 곧장 의자에 다시 앉은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닥터 중위. 그럼 저 남자를 요안나 아일랜드로 파견한다는 건 어떻소?”

 

“나쁘지 않네! 거기에는 우리 오르카 1호 출신의 요안나 언니도 있고, 또 우리가 파견을 보낸 인원들도 있으니까.”

 

“음. 그렇다면..”

 

 닥터의 대답까지 들은 무적의 용은 뒷말을 흐리며 곧바로 고개를 돌려 다른 지휘관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지휘관들은 그녀의 암묵적인 동의 요구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저 라붕이라는 청년의 의지를 시험하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아직 성장 가능성이 남아 있는 남자네.”

 

“사령관의 부족한 기백을 채워 줄 인물로 적합하다.”

 

“하하! 저 남자가 침대 위에서는 어쩔지 궁금하군.”

 

“..좋소. 우선 저 남성을 요안나 아일랜드의 장교로서 파견하겠소. 총 책임자로 우선 임명해두고 경과를 보도록 하지.”

 

 각 지휘관의 희망 사항을 읽은 무적의 용은 제 검자루를 랩실 바닥에 내리찍으며 그녀들의 의견을 통일시켰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음. 그런데 저 남성이 휩노스 병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신체를 바꿔야겠네.”

 

“으음. 닥터. 그대의 소견은 어떻소? 즉시 바꾸어도 되겠소?”

 

 휩노스 병. 심해에 깊이 잠든 별의 아이라는 불분명한 적이 계속해서 내뿜는 FAN파로 인해 발생하는 불치병. 이 때문에 인류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닥터는 무적의 용의 질문에 제 볼펜을 빙글 돌리며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으응. 우선 총상을 입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갑자기 뇌와 척수를 뽑아내는 수술을 하려고 들었다간 심정지가 올 수도 있어. 먼저 안정된 상황에서 수술을 감행하는 게 좋을 거야.”

 

“사령관은 휩노스 병 말기 상태에서도 감행했었다. 그때의 그는 저 남자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았잖나.”

 

“그거야 우리가 있으니까 심적으로는 안정된 상태지. 근데 저 오빠, 지휘관 언니들 앞에서도 그렇고 아우로라 언니가 가까이 오니까 제 무릎을 꼬집어 평상심을 유지하려 드는 것을 봤을 땐 우리를 아직 신뢰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바이오로이드가 가까이 올 때 심박수가 급격하게 오르는 게 그 증거야.”

 

“음. 우리가 낳은 불신인가. 이제는 우리가 그에게 신뢰를 주어야 할 때인가.”

 

 불굴의 마리는 작은 자책을 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것은 지휘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겠소? 휩노스 병을 피할 방도 말이오.”

 

“...극소량의 오리진 더스트를 주기적으로 투여받으면 한참 미룰 순 있어. 그 사이에 우리가 저 오빠에게서 신뢰를 얻어야겠지.”

 

“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중장님. 아무리 각하가 있다지만 그 역시 중요한 인간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면 요안나 아일랜드에 따로 연고를 넣어두어야겠소.”

 

 그녀들의 회의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설 무렵, 멸망의 메이가 등을 기대고 있던 닥터의 랩실 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기-이잉!

 

“어?!”

 

 닥터에게 당한 정신적 데미지를 회복하고 있던 멸망의 메이는 갑작스러운 개폐에 화들짝 놀라며 무너지는 제 몸을 가누려 들었으나 쉽사리 중심을 찾지 못해 앞으로 팔을 허덕였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제복 아래로 얇지만 넓은 손이 기우뚱거리는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메이? 괜찮아?”

 

“어..? 어! 사..사령관!”

 

 자신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는 사령관의 등장에 멸망의 메이는 화들짝 놀라 바닥에 얹혀 있던 제 엉덩이를 펄떡 일으켜 세웠다.

 

“닥터가 심했지? 그래도 너무 상처받진 마.”

 

“어어?! 아..아냐! 괘..괜찮아. 난. 으응..”

 

 방금까지의 까칠함은 온데 간데 없이 사랑에 빠진 십 대 소녀처럼 제 보조개를 붉게 물들이는 멸망의 메이의 모습에 사령관은 싱긋이 미소를 짓고는 자신을 향한 이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 이야기는 끝난 모양이네?”

 

“각하..?”

 

“주군. 설마 다 듣고 있었소?”

 

“물론. 내 여동생이 얼마나 유능한데?”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제 계획을 밝힌 사령관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지휘관들은 모두 뒤통수를 얻어맞은 얼굴로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남성을 바라보았다.

 

“닥터. 수고했어.”

 

“헤헤! 오빠의 부탁이라면 모두 이 몸에게 맡기라는 말씀!”

 

 엄지를 척 치켜세우는 천재 소녀의 확답에 지휘관들은 피식 웃으며 모두 하나같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자신들 앞에 멈춰 선 남성에게 저마다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도 많이 성장하셨군요. 이렇게 계산적으로 움직이실 줄도 아시고.”

 

“칭찬 고마워. 마리.”

 

“사령관? 앞으로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해. 아무리 그 남자를 챙기려고 해도 그렇지. 우리까지 의심하면 어떡해?”

 

“물론이야. 레오나.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언제부터 080기관을 움직였나? 사령관.”

 

“그에 대한 정보를 슬레이프니르에게서 들었을 때부터. 내가 괜히 몸만 바꾸려고 닥터를 찾은 건 아니야. 칸.”

 

“호오. 그러면 함 내의 정보 통제까지 끝냈나? 그대.”

 

“그에 대해 아는 인원은 여기 우리와 080기관. 그리고 아우로라뿐이야. 그의 개인실까지 가는 동안의 모든 통로는 차단해뒀지.”

 

“주군의 빠른 행동에 감탄했소. 소인은 이제 주군의 발끝에도 못 미치겠구려.”

 

“너무 그렇게 안 띄워줘도 돼. 용.”

 

 라붕이의 앞에 있을 때와 달리 느긋하고 안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사령관의 모습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오르카 1호의 사령관, 백전불패의 신화를 써 내려가는 그녀들의 사랑이자 주인이었다.

 

“주군. 라붕이라는 남성을 오르카 1호가 아닌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요안나 아일랜드 책임자로 파견하려 하오만. 어떻소?”

 

 무적의 용은 자신들이 내린 최선의 결과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사령관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렇게 해 줘. 용. 나도 라붕씨의 의지를 꺾진 못하겠어.”

 

“각하. 외람되오나 자고로 남성이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한 시간 역시 중요합니다. 각하께서도 그러하셨듯 말입니다.”

 

“..오르카 요리대회 한 번 더 열어볼까?”

 

“그랬다간 내 총에 맞을 줄 알아. 당신.”

 

“하하하!”

 

 일전의 숙연한 분위기가 사령관의 등장으로 한층 풀려가자 모두 환한 미소로 이 시간을 즐겼다. 멸망의 메이 역시 얼굴을 붉힌 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의 등에 따라붙었다.

 

“사..사령관. 내가 한 말은..”

 

“메이. 괜찮아. 모두 날 걱정해서 한 말이잖아. 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 고마워.”

 

“..헤헤헤. 그..그래?”

 

“그대는 그 남자 앞에서만 웅크리는군. 어째서 라붕이에겐 그러지 못하지?”

 

 라붕이 앞에서와 너무나 상반된 사령관의 모습에 로열 아스널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그에게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사령관은 제 볼을 긁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 박력에 압도된다고 할까, 제일 큰 문제는 내가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모르겠어.”

 

“그 남성은 분명 군인이었을 겁니다. 각하. 앞으로 각하께서는 그쪽에 방면으로 연구하셔야겠군요.”

 

“알렉산드라한테 간만에 과외를 신청해볼까 해.”

 

“..책상 밑 과외?”

 

“레오나! 너무 날 괴롭히진 마!”

 

 입을 가린 채 쿡쿡 웃는 철혈의 레오나를 향해 성토하던 사령관은 곧장 제 목을 가다듬으며 이번에는 그녀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읊으려 들었다.

 

“먼저 모두의 의견을 수용할 테니 이번에는 내 의견에 대해서도 들어줬으면 해.”

 

“그를 부 지휘관에 임명하시겠다는 건 여전하십니까?”

 

“아니. 마리. 난 해줬으면 하지만 라붕씨의 의견을 듣고 따라주는 것이 그에게 다가가는 첫걸음이라 생각해.”

 

“다행이군. 사령관. 그래도 그 짧은 사이에 성장했어.”

 

“...그렇게 이상했어? 칸?”

 

“물론. 너무 안쓰러울 정도였지.”

 

 신속의 칸의 눈웃음에 사령관은 제 오른손으로 뒷목을 긁으려 들었다. 그러자 그가 숨기고 있던 오른 손바닥의 혈흔이 여실히 그녀들의 눈에 들어왔다.

 

“각하! 손바닥이! 어서 지혈을!”

 

“아, 그거라면 괜찮아. 그를 개인실로 보내고 리리스가 연고를 발라줬거든.”

 

“..뭔가 배웠어?”

 

“응. 레오나. 그의 이야기에 크게 감명받았어. 그래서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해.”

 

“말해봐라. 그대.”

 

“먼저 라붕씨를 요안나 아일랜드 총 책임자로 임명하는 거야 찬성이야. 하지만 그를 그렇게 보내는 것으로 난 충분하지 않다고 봐.”

 

 사령관은 한층 진지한 얼굴로 제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들어 보였다.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그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사령관은 담담하게 제 의견을 뱉었다.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준비하고 싶어. 그의 의향에 따라 요안나 아일랜드로 오늘 초고속 이동정으로 보낼 거야. 하지만 동시에..”

 

 사령관의 설명이 이어지자 지휘관들은 그의 검지와 중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곤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각하. 전 찬성입니다.”

 

“..나야 그에게 총을 들이밀었으니 할 말도 없네. 찬성.”

 

“좋다. 사령관. 찬성하지.”

 

“하하하! 나는 상관없네! 하지만 그로서는 복인지 독인지는 모르겠군!”

 

“나..나도 상관없어. 응..”

 

“좋소. 소인도 죄가 있으니 주군의 요망에 의의는 없소. 소인이 직접 행정처리를 해두도록 하겠소.”

 

 각 지휘관의 찬성행렬이 이어지자 사령관은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그가 알던 오르카 1호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들어왔다.

 

‘..라붕씨의 합류로 우리 저항군은 더 강해질 거야. 정말로 이제 그 펙스나 철충, 그리고 별의 아이까지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몰라!’

 

“자! 그럼 얼른 움직이자! 칸! 탈론 페더의 카메라는 전부 부순다?! 라붕씨에 대한 정보는 그가 요안나 아일랜드에 내리고 알릴 예정이거든!”

 

“그렇게 해도 좋다. 어차피 그 아이 관물대에는 예비 카메라가 넘쳐나니.”

 

“오케이! 닥터! 시라유리에게 신호를!”

 

“예쓰-써!”

 

 이후 오르카 1호의 어느 이름 모를 장소에서 목청이 찢어진 듯한 여성의 비명이 들려왔다는 문구가 오르카 8대 미스테리 위에 한 줄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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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이 나갈 것 같아! 내 손목! 5일동안 몇 만자를 쓴 거야! 가볍게 쓰려니까 그건 또 그것대로 고생이네.

ㅇ어흐흐그흑 분량 조절이 안 되네 진짜 씨부우앙. 얼른 소완 리리스 리제 아르망을 출현시켜야 쓰던 철혈을 마저 쓸 텐데.


내일 보자! 망할! 프롤로그 끝낼 때까지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