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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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전등 하나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 노을의 주홍빛이 옅은 창문 유리 사이로 들어와 그나마 그 어둠의 반편을 거두어낸 그 공간에 두 여성이 한 남성의 얼굴이 올라와 있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주군. 알겠소. 하하! 이것 참. 내 요청이 이렇게 크게 돌아올 줄은 내 꿈에도 몰랐소.”

 

-그가 거기에 도착하면 부디 복귀 전까지 그에게 많은 조력을 해주길 바랄게. 요안나.

 

“물론이오. 주군. 내 성심성의껏 그를 모시겠소. 다만 내 주군은 그대이니 잊지 말아 주시게나.”

 

-응! 고마워!

 

“그럼 나도 이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겠네.”

 

-응응!

 

삑-!

 

“후. 주군께서 저리 환하게 웃는 모습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방 중앙에 놓여있던 남성의 홀로그램 통신이 끝을 맺자 방금까지 환하게 웃던 갈색빛 피부 위에 은빛 체인메일을 입은 여전사는 창문 밖에 펼쳐진 노을빛을 머금은 해수면을 응시했다.

 

“..흠. 그 남성분. 이름이 라붕이라고 했나. 특이한 이름일세.”

 

“...그런가요. 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체인메일 여성의 말에 그녀보다 한참을 멀찍이 떨어져 창문 너머에서 흘러들어오는 노을빛으로부터 제 몸을 숨기고 있던 작달막한 체구의 여성이 한걸음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진중한 목소리로 제 의견을 내비쳤다.

 

“라붕이. 저는 그 이름에 담긴 힘이 느껴집니다.”

 

“호오. 아르망 추기경. 그대는 벌써 큰 기대를 거는 것 같네만.”

 

“...아니라면 거짓이겠죠. 요안나양. 저는 그분이 언제 올지 지금 계산 중이랍니다.”

 

또각-

 

 이제는 어둠 속에서 제 본모습을 드러낸 아르망이라 불린 소녀는 창밖에서 들어오는 노을의 붉은빛에 제 살구색 피부를 붉게 물들였다.

 

“그분이 이곳에 온다면, 많은 것이 바뀔 테죠.”

 

“벌써 그가 온 이후에 벌어질 미래까지 계산했나?”

 

“아직 완전히 다는 아니지만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답니다. 저는 예지가 아닌 확실한 정보를 통해 계산하는 것뿐이니까요. 하지만..”

 

 조금 말을 뜸을 들이던 소녀는 아무것도 없는 제 왼손의 약지 위를 매만지며 어딘가 아련한 눈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저는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왔답니다. 제가 성심성의껏 모실 폐하를 말입니다.”

 

“하긴 그대는 오르카 1호 소속이 아닌 저항군 소속이니 내 주군을 오래 뵙지도 못했겠구려.”

 

“..후훗.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두죠.”

 

 요안나는 아르망의 뒷말에 왼 눈썹을 이마 쪽으로 올렸다. 그녀가 여기에 배치받은 지도 벌써 1주일이나 되었건만, 그녀는 여태까지 자신의 능력을 봉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예지에 가까운 연산능력을 선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현장 감독 및 현장 측정을 맡아주어야 할 그녀가 언어 모듈에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말수도 최대한으로 아끼려 들어 요안나는 별수 없이 사령관에게 지휘관급 개체의 필요성을 요청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어떤가. 행동도, 말수도 갑자기 봇물이 터진 것처럼 넘쳐흐르지 않나.

 

“이제야..이제야 오시는군요.”

 

또각-또각-

 

 노을빛을 따라 저 지평선 너머로 갈 듯이 아르망은 창문의 앞까지 다가가 유리 위에 그 작은 손바닥을 올렸다.

 

“흐음. 우선 아르망 추기경.”

 

“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후훗. 정말로 기쁜 모양이군. 우선 그 총 책임자분이 오시기 전까지 무얼 해두는 게 좋겠나?”

 

 마치 말문이 트인 어린아이처럼 술술 입술 밖으로 목소리를 내는 아르망의 모습에 요안나 역시 환한 웃음을 그렸다. 그런 요안나의 물음에 아르망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필요 없답니다. 저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어요.”

 

20)

 

기-이잉!

 

“...후우우.”

 

 뜨거운 온수의 감촉이 아직 남아있는 머리카락 위에 에어 드라이기를 가져다 대자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야 샤워다운 샤워를 했네.’

 

 방에 들어설 때 곧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몇 벌의 옷가지들. 그걸 보자마자 냉큼 헐렁한 환자복을 벗어 던지고 샤워실로 직행해 뜨거운 온수에 여태껏 묻어있던 먼지와 핏자국들, 그리고 식은땀을 흘려보냈더니.

 

“..살 것 같다.”

 

 아직도 온수의 김이 빠지지 않은 화장실 겸 샤워실의 문을 열고 개인 방안으로 들어서자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한 물건들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냉장고네?”

 

 찬장에 있던 수건으로 대충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고 있자니 방 한 켠에 있는 냉장고가 그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내 원룸에 있던 작은 놈이 아닌 일반 가정집에서나 쓸 법한 크고 기다란 놈으로.

 

자박-자박-

 

슈-웅

 

 발바닥에 묻은 물기의 감촉과 차가운 실내 바닥의 감촉을 동시에 느끼며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손잡이에 손을 넣자 냉장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스르륵-하고 열렸다.

 

“오..무소음.”

 

 역시 미래세계. 이렇게 자연스럽게 열리는 물건을 개인실 한구석에 배치하다니. 원래 내가 살던 세계였으면 이놈 하나로 2~3백은 했겠는데.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냉장고의 문을 연 원래 목적을 떠올리고는 차가운 김이 흘러나오는 냉장고 안의 물건들을 유심히 살폈다.

 

‘..저건 대충 과일 음료수 같고. 저놈도 그런 것 같고. 이놈도 아닌 것 같고.’

 

 냉장고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음료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처음 보는 로고와 상품명. 무엇 하나 내가 알던 놈이 없다. 그래도 그 녀석은 뭔가 다른 것들과 달리 어딘가 톡-하고 튈 터.

 

“..이건..”

 

 내 직감이 말한다. 이 녀석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딱 이놈이다. 나는 다른 음료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는 딱 한 캔만 냉장고에서 꺼내 들었다.

 

“...”

 

칙-!

 

 캔 따개를 올리자 은색의 겉면에서 탄산이 새는 그 특유의 소리가 들렸다. 오케이. 탄산 확인. 그럼 맛은-

 

“-크으!”

 

 그래! 이놈이야! 맥주! 맥주구나! 역시! 혀끝을 맴도는 쌉싸름한 맛이 퍽 괜찮은 이 세계의 맥주 맛에 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카페테리아에서는 죽는 줄 알았는데..역시 살고 봐야 해.’

 

 카페테리아에서 나오기 전, 사령관 녀석이 내게 내 정보에 대해 넌저시 물어올 때 얼마나 두려웠었나. 이렇게 돌직구로 나올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만 나는 어쨌든 그 녀석한테 거짓말은 안 했다.

 

‘..대충 그 녀석 설정에 묻어가기만 하면.’

 

 꼴초뱀. 댁 덕분에 살았어. 만약 이 세계관 설정을 몰랐으면 나 진짜 좆될 뻔했던 거 같아. 대충 내 오기 전의 이야기를 읊으니 그 사령관 녀석은 마치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

 

꿀꺽-꿀꺽-

 

“-크으으으!”

 

 칼칼한 목구멍과 입을 다시 보리향으로 가득 적시는 음료의 달콤함에 움츠러들어 있던 목 주변이 뚜둑-하고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맥주 한 캔을 입안에 탈탈 털어놓고 있자니 슬금슬금 배 아래에서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좋아. 알코올은 대충 채웠고. 이제 어쩐다?’

 

 후방지원에 대해서는 사령관과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태. 그렇다면 지휘관들의 재가가 문제일 터. 아마 그녀들은 옳다구나 싶겠지. 하마터면 나라는 국적불명, 신원불명인 인간이 부 지휘관에 앉는 것보다야 저 한적한 후방에 던져두는 편이 불이 나도 진화하기 쉬우니까.

 

‘요안나 아일랜드를 연상해서 섬이라고 했지만. 바다에 섬이 한두 개는 아니니.’

 

 잘못했다가는 인프라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섬에 툭-하고 던져놓고 갈 수도. 아냐. 그래도 나는 세컨드 오리진인데 그렇게까지 막 대하진 않겠지. 

 

‘어디든 좋으니 맘 놓고 잠 좀 잘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자고로 후방은 장교에게는 진급 연기의 원인이지만 병사들에게는 전투도 없고, 훈련도 밍기적거릴 수 있는 최고의 파견 장소다. 내가 시발 아래에 한 번 내려갔다가 그 동네 군기보고 얼마나 얼이 빠졌던가. 존나게 부러웠었지.

 

‘이제는 내가 꿀을 빨 차례지. 어차피 이 동네 정리는 사령관 녀석이 다 할 텐데.’

 

 나는 엑스트라다. 엑스트라. 천부적인 지휘 실력과 더불어 온 바이오로이드들의 지원에 힘입어 결론적으로 펙스와 별의 아이, 거기에 철의 교황이라는 미확인 적까지 모두 그 사령관 녀석은 이겨낼 테지.

 좀 어벙해 보이는 게 그 띨띨한 후임놈 같아서 마음에 걸리지만.

 

 그동안 나는 후방에서 느긋하게 살면 그만이고. 그 녀석 곁에는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와..

 

‘..리제나 리리스. 소완부터 아르망까지. 전부 그 녀석의 곁에 있겠지.’

 

 이곳으로 오는 동안 바이오로이드라곤 아우로라밖에 못 봤지만, 그녀도 사령관에게 헤실거리는 모습을 보니 삼얀과 아르망은 안 봐도 뻔했다.

 

‘..조금. 그건 부럽네.’

 

 레모네이드 알파까지 있는 걸 보면 이미 그 녀석과 3년은 동고동락한 그녀들일 테니, 나로서는 다가가고 싶어도 아마 그녀들로부터 나는 거부당할 터.

 

‘..제조한다고 해서 그녀들이 그녀들이진 않을 거고.’

 

 꼴초뱀처럼 과몰입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렇게 이 세상으로 넘어오니 하기 싫어도 과몰입을 하게 된다.

 그 인간이야 리제 전장까지 캐겠다던 날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지만 난 진심이었고 그리고 이곳에 넘어오기 전에 그걸 해냈었다.

 

‘이제 앞으로 걔들은 못 보겠네. 쯧.’

 

꿀꺽-

 

 이제는 휴대폰으로라도 그녀들을 보지 못한다는 착잡한 마음에 캔 밑바닥에 남아있던 맥주를 다시 목구멍에 넘겼다. 그리고 다 마신 캔을 가볍게 그걸 우그러뜨리곤 침대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넣고 나니 내 두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료하지는 않지만 내가 뭘 해야 하지? 결국에는 또 무료한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으로 끝날까? 이곳에서도?’

 

 모르겠다.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저 사령관과 지휘관급들의 눈치를 평생 봐가며 살아야 하나. 그건 차라리 지옥이다.

 

‘천국으로 둔갑한 지옥이라. 후.’

 

 어찌 보면 그 양반이 제일 현실적이던가. 로망은 로망일 뿐인가. 속이 쓰린 감각이 몰려오자 나는 침대 위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다.

 

‘..사령관 녀석.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건가..’

 

 몸도 마음도 한결 나아지니 천장 위에 갑작스럽게 내 신상정보를 물어온 그 녀석의 모습이 그려졌다. 처음에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어서 최대한 이곳에 넘어오기 전의 이야기는 감춘 채, 넘어오고 나서의 이야기만 내뱉었는데.

 

‘..짜식이 울기는.’

 

 눈망울을 글썽이며 찢어진 손바닥을 내 손 위에 올리는 모습에 그만 내 경계심이 허물어져 내렸었다. 그런 모습까지 보니 차마 그 손을 뿌리치긴 어려웠다.

 최대한 장교들한테 써먹던 미사여구를 그대로 써먹긴 했는데, 그녀석. 끝까지 날 부 지휘관으로 쓰려 했지.

 

‘진짜 그냥 나랑 친해지려고 그러는 건가. 그럼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 같은데.’

 

 애당초 달아본 거라곤 분대장 딱지 하나인 나한테 장교와 같은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했다간 내가 더 곤란하다. 더군다나 곁에는 지휘 모듈을 탑재한 여자들이 즐비하고.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애들 갈구는 방법이 다다.

 

 그리고 본래 사람이라는 게 함부로 믿어서도 안 되고, 더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양반일수록 멀리해야 하거늘. 생각해보니 그 녀석, 남자라고는 내가 처음인가. 그래서 그런 건가.

 

‘후. 모르겠다. 우선 녀석이랑 좀 더 이야기를..’

 

 조금씩 그 중학생 같은 사령관 녀석의 모습에 내 마음의 벽이 아예 무너질 때쯤, 누군가 내 개인 방의 문 너머에서 똑똑-하고 노크가 들려왔다.

 

21)

 

삑-!

 

 저녁놀이 거두어지고 해 대신 어둠을 밝게 비추는 샛노란 달이 뜨는 시간, 사령관과 지휘관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한 남자의 배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음. 시간이 됐는데.”

 

“사령관. 그렇게 안달복달해봤자 그가 여길 떠나는 건 확정 사안이잖아. 여기까지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아는데. 응.”

 

 철혈의 레오나의 일침에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시에 눈썹을 찌푸렸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되어 그를 떠나보내려니 여러 가지로 속이 착잡했던 탓이었다.

 

“각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안나 아일랜드는 저희 군의 최중심부. 설령 펙스가 공격하려 들어도 먼저 저희 해군 함대와 결전을 벌여야 할 겁니다.”

 

“마리 소장의 말이 맞소. 주군. 내 함대 역시 그를 끝까지 지킬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오.”

 

“헤헤. 둘이 그렇게 말해주는데 내가 여기서 더 미룰 이유는 없지?”

 

 불굴의 마리와 무적의 용의 다독임에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결심을 굳혔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한 남자를 기다릴 때, 멸망의 메이가 무언가 떠올렸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데 혹시 여기 누구 요안나 아일랜드에 대해 아는 사람 있어?”

 

“?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모르겠군. 들어본 적은 있다만. 그대. 그곳은 어떤 곳인가?”

 

 멸망의 메이와 로열 아스널의 물음에 사령관은 머쓱한 미소와 함께 제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나도 잘은 모르겠네. 분명 우리 보급기지 중에 제일 먼저 인프라가 구축된 곳이긴 한데.”

 

“사령관. 그런 건 당신이 똑바로 챙겼어야지.”

 

“하지만 거기에 잔뼈 굵은 요안나도 있고. 대다수 전문인력 배치는 계속 시켜뒀어. 전투 모듈을 제거한 친구들도 그곳에 배치해뒀고.”

 

“음. 저도 멸망 전 개체인 이프리트들과 노움들이 크게 다쳤던 탓에 전역시킨 후 그곳으로 보내주었죠. 그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파견 나갔던 인원들은 꽤 만족하는 얼굴로 돌아오더군. 그리 나쁜 환경은 아닌 것 같다. 사령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주군. 매번 꾸준히 우리와 각 대륙으로 보급을 보내는 곳 아니오. 별다른 문제는 없을 터이니.”

 

“응! 그렇겠지? 요안나도 꽤 좋아하는 눈치였고.”

 

 그들이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외부 사출 포트로 들어서는 문이 기-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에서 두 사람이 또각대는 발소리와 뚜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

 

“주인님. 라붕이님을 모시고 왔어요.”

 

“필! 승!”

 

 그들의 앞으로 걸어온 두 사람은 은발의 머릿결을 휘날리는 사령관의 경호 실장, 블랙 리리스와 사령관과 지휘관급들을 향해 각진 경례를 올리는 라붕이였다.

 

“어..음. 필! 승!”

 

착-!

 

 라붕이의 경례에 사령관은 마리에게 배운 대로 자신도 라붕이와 같은 구호로 경례를 받아주며 라붕이의 눈치를 살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하지만 눈매는 어딘가 좀 풀려있는 얼굴. 사령관은 이전보다 나아진 라붕이의 모습에 싱긋이 미소를 지었지만 동시에 그가 왜 경례를 내리지 않는지에 의문을 가졌다.

 

‘어..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다시 그가 경례구호를 외치려는 순간, 사령관의 곁으로 걸어온 불굴의 마리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령관님. 경례를 올리는 건 병사가 먼저지만 내리는 건 장교가 먼접니다.”

 

“...아차.”

 

착-!

 

 불굴의 마리의 지적에 사령관은 재빨리 올렸던 오른손을 내렸고 그제야 라붕이 역시 오른팔을 다시 옆구리에 붙였다.

 

‘으으. 제식 같은 건 애들한테 대충 해도 된다는 식으로 해뒀더니 정작 내가 까먹고 있었어.’

 

 사령관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모질지 못한 인물이었다. 브라우니들이나 레프리콘들이 경례를 올리면 손을 들어 반겨주었고 그 사인이 결국 함 내의 경례 사인으로 자리 잡았다.

 거기다 자신이 먼저 경례를 해본 적도, 나눌 사람도 없었기에 사령관은 그만 라붕이에게 실수를 하고 만 것이었다.

 

‘제식도 다시 배워야겠다. 앞으로는. 하아..’

 

 불굴의 마리의 말마따나 그는 기억을 잃기 전 분명 군인이었을 터. 그렇다면 자신 역시 거기에 맞춰 주어야 그와 가까워질 것이라고 사령관은 잠정 결론을 내렸다.

 

“라붕씨.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러내서 미안해.”

 

“아닙니다. 사령관님.”

 

 사령관은 후의 일은 후에 생각하고 우선 그와 마지막으로나마 이야기를 더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전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걸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라붕씨의 강한 건의를 오늘 당장 이루어주려고 그래서.”

 

“..후방. 배치, 말씀이십니까?”

 

“응. 저기 보이는 고속정이 라붕씨를 요안나 아일랜드라는 최후방 지역으로 보내줄 거야. 물론 조타석은 안 만져도 돼. 도착할 때까지 자동으로 갈 테니까.”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사령관의 이야기에 라붕이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파르르 떨리는 모양새가 어딘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사령관은 이전처럼 그의 손을 맞잡곤 이 대화를 어떻게든 길게 늘어뜨리려 했다.

 

“난 라붕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

 

“..과한 평가입니다. 사령관님.”

 

“다음에 만날 때는 꼭 날 편하게 대해줬으면 해. 이렇게 상하관계보다는 친구 관계로.”

 

 제 본심을 힘겹게 드러낸 사령관은 빠르게 라붕이의 안색을 살폈다. 행여 자신을 이상한 놈이라고 취급할까 노심초사하던 그였으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라붕이의 얼굴에서 힘이 점차 풀려가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속으로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좋아! 칸이 말한 대로 침착하게 다가가니까 조금 나은 거 같네!’

 

“..친구 관계는 어려울 수 있으나, 그와 비슷하게나마 다가서 보겠습니다. 사령관님.”

 

‘예에에에에쓰으으으으!!’

 

“응응! 부디 그렇게 해줬으면 해! 응응!”

 

 어눌하지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희망이 보이는 라붕이의 대답에 사령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붙잡은 그의 손을 아래위로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당사자인 라붕이는 어색한 눈웃음을 지었고 그걸 바라보던 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만난 지 반나절 채 되지도 않은 두 남자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그녀들의 눈에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광경이었고, 이 분위기에 힘입어 무적의 용이 정갈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섰다.

 

“라붕군. 일전의 우리가 그대에게 너무 무례했구려. 내 지휘관들을 대표해 귀하에게 사과하겠소.”

 

“..아닙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의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참으로 이해심이 깊은 남자구려. 앞으로도 우리 주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줬으면 하오. 주군의 말마따나 남성끼리의 친목도 좋은 일이라오.”

 

 라붕이의 대답에 지휘관들의 미소가 더욱더 커졌다. 사령관과 다른 방향으로 좋은 남자라고. 이 정도라면 사령관의 고집들쯤이야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그녀들은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라붕씨. 우선 가기 전에 이야기해줄 게 있어.”

 

“..어떤?”

 

“먼저 라붕씨는 요안나 아일랜드의 총책임자로 내가 지명했어. 이건 내가 무를 생각이 전혀 없어.”

 

 라붕이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바이오로이드들의 컨트롤 타워로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령관이 그런 것처럼 라붕이 역시 어딘가의 컨트롤 타워가 되어주어야 했다.

 

 사령관은 전방에서 전투를 도맡는 타워를. 라붕이는 후방에서 보급기지 구축과 여타 장병 관리들을. 지휘관들 역시 이 사안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사령관은 맞잡은 라붕이의 손을 꽉 잡으며 제 강한 의사를 전달했다.

 

 그리고 라붕이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보다 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 자리 역시 제게는 과분한 자리지만. 그 자리에 걸맞게 노력해보겠습니다. 사령관님.”

 

“..응! 그리고 저 고속정에 타면 제일 먼저 홀로그램 패널부터 확인해 줘. 거기에 요안나 아일랜드 간부진 및 우리 저항군 관련 자료들이 있거든! 그리고 라붕씨가 꼭 봐야 할 게 있어!”

 

“..알겠습니다. 제일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되었다. 사령관은 라붕이의 확답을 듣고나서야 그의 손을 자유로이 풀어 주었다. 그리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탄복하며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거기 가서도 종종 연락해. 라붕씨.”

 

“..예! 사령관님.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 꼭 갚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르카 1호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음! 좋은 기백이다. 라붕이.”

 

“..뭐. 결심하는 모습은 사령관보다 낫네. 후훗.”

 

“흥! 말만 번지르르한 녀석만 아니었으면 좋겠네.”

 

“..다음에 만날 때를 기대하지.”

 

“하하! 그때까지 거기서도 몸 건강히 지내게나. 라붕이.”

 

“소인도 다시 만날 때의 성장을 기대해보겠네. 후후. 그때는 입장이 지금과 정반대일 수도 있지만.”

 

 저마다의 작별인사를 건네받은 이들은 이제 라붕이가 고속정에 올라타는 모습과 그의 작별 경례를 다 같이 받아주는 것으로 그를 송별했다.

 짧은 시간, 반나절도 되지 않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가 이 함에 남기고 간 것은 참으로 많았다. 특히나 사령관이 그러했다.

 

철컥! 쿠-구구구!

 

 사출 포트가 개방되고 그를 실은 고속정이 눈앞에서 어두운 밤바다를 가로지르며 오르카 1호를 떠나간다. 올 때도 금세더니 갈 때도 금세다. 이별이라는 게 이리도 슬픈 일이던가.

 사령관은 고속정이 이제 지평선 저 끝자락으로 들어가는 광경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저기 타고 가면..안 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사령관?”

 

“꼭 만날 때가 또 올 것이오. 주군.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허나 반대로 이별이 있으니 만남도 있는 법이오.”

 

“각하. 다음에 만났을 때의 그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지 않습니까?”

 

“흥! 어차피 통신망은 다 구축되어 있는데 무슨 평생 절교하게 된 사람처럼 굴어.”

 

“그대여. 그대도 그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더 성장해야 하지 않겠나. 그대가 도리어 그를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되네.”

 

“아스널 준장의 말이 옳다. 사령관. 어차피 그곳에 우리 함 장병들도 자주 파견하지 않나. 통신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니 내가 뭐라 반박을 못 하겠네. 응.”

 

 저마다의 격려를 보내는 지휘관들에게 사령관은 힘 풀린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복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휘관들과 블랙 리리스 역시 그런 그를 따라 복도로 걸어나갔다.

 

뚜벅-뚜벅-

 

“이제 나머지 하나가 문젠데.”

 

 사령관은 그에게 두 가지의 선물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나는 이미 그의 고속정에 준비해뒀지만 다른 한 가지는 여기서 해결해 보내야 할 선물이었다.

 

‘그 사람은 바이오로이드들을 꽤 경계하는 듯하다고 닥터가 그랬으니..’

 

“으음. 군인 바이오로이드보다는 좀 더 친근한..”

 

 사령관이 어떤 선물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 그의 곁으로 블랙 리리스가 한 걸음 다가와 그에게 질문을 건네었다.

 

“..주인님. 혹시 그분이 저에 대해 아시고 계셨나요?”

 

“응? 아니. 너는 계속 환풍구에서 지켜보고 있었잖아. 내 손에 연고를 발라 줄 때도 그가 개인 방으로 들어간 이후였고.”

 

“그런데 좀 뭔가 이상하던데요? 그 라붕이라는 분.”

 

“뭐가?”

 

“절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시더라고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꽤 당황했어요.”

 

 턱에 손을 덮은 채 고민하던 사령관은 제 경호 실장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휘관급들 앞에서도, 아우로라 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던 라붕이가 블랙 리리스를 보고 감정을 드러냈다? 이건..

 

“...혹시. 혹시..”

 

“뭔가 짚이는 게 있으시오? 주군.”

 

“레오나! 안드바리에게 중제조로! 제조식은 경장 보호기! 빨칩은 100개!”

 

“..알겠어. 오늘은 내가 걜 달래야겠네.”

 

 레오나가 안드바리에게 통신을 거는 사이, 사령관은 마치 어둠 속에서 빛 한 줄기를 찾은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블랙 리리스를 보고 감정을 드러냈다는 건 기억도 없는 그에게 그녀는 소중했던 이를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라는 것.

 

‘소설도! 영화도 많이 읽어봐서 알지! 이건..플래쉬 백이라는 거야! 분명 그에게 리리스 개체는 꽤 인연이 깊은 바이오로이드일수도! 그래서 바이오로이드들한테도 친절했던 게 분명해!’

 

 사령관은 지레짐작하며 발걸음을 더욱 빨리 놀리기 시작했다. 점차 자신의 발에 힘이 들어간다. 드디어 라붕이와 자신의 연결고리가 되어 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은 것만 같은 기분에 그는 떠나보내기 이전처럼 한창 들뜨기 시작했다.

 

“헤헤헤. 라붕씨에게 아주 뜻깊은 선물이 될지도.”

 

“주군. 얼굴이 음흉하오.”

 

“..얼굴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사령관.”

 

22)

 

 딱 한 사람이 들어서면 넉넉해 보이는 공간의 중앙에 비치된 거대한 등받이 가죽 의자. 나는 무거워진 엉덩이를 그 위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렸다.

 

끼-이익

 

“...후우.”

 

 푹신하고 딱딱한 질감이 동시에 내 꼬리뼈와 척추에 닿자 나는 폐 속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아주 천천히, 길게, 가슴 속에 남아있던-

 

‘예에에에에에에! 쓰으으으으으으!’

 

 예스! 예스! 예에에에에ㅔ! 다 꺼져! 철충이건! 펙스건! 전부다! 다 꺼져! 난 이제!

 

“으아아아아아!!”

 

 이 작은 고속정 내부에 내 목소리가 쩡쩡 울려 퍼지도록 나는 온 힘을 다해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사령관 녀석의 입에서 요안나 아일랜드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그 순간부터 나는 이 비명을 속으로만 참고 있었다.

 

‘드디어..드디어 저 지옥에서 벗어났어.’

 

 흑흑.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꾹 참고 있자니 방문을 열고 들어온 오르카 1호의 블랙 리리스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우로라와 같이 게임속 모습을 그대로 하고 내 앞에 나타난 그녀를 보는 순간, 이 함에 남아있으면 나머지 애들도 보게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으아아아아아아!”

 

‘그래도! 난! 해방이다아아아아!’

 

 자고로 자유라는 것이 더 눈에 밟히는 법. 광복절의 선조들도 그러했을까, 나는 계속해서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그녀들에게서 벗어났다는 기쁨으로 이 섭섭한 마음을 달래었다.

 

“하아! 하아! 너무 소릴 질렀나.”

 

 이 기쁨이 조금씩 진정되자 그제야 나는 조금씩 돌아오는 이성으로 날 떠나보내는 사령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녀석, 정말 외로워서 그랬구나. 이제는 혹시나 했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긴 남정네 하나 딸랑 이 세계에 있다고 하면, 심심해 죽겠지. 아니. 압박감에 죽으려나.’

 

 자고로 성비라는 단어가 왜 중요했겠나. 50:50였던 비율이 45:55만 되어도 국가적 차원에서 난리를 쳐대는데 여긴 1:..얼마야? 가늠도 안 가네.

 

‘부 지휘관을 주겠다는 게 날 후회물 주인공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었구만. 하긴. 그 녀석이 후회물을 알긴 알랑가 몰라.’

 

 괜한 걱정만 해서 손해만 잔뜩 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라붕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내 이름이나 댈걸. 이이, 티셔츠에 달린 명찰을 봐라. 또박또박 라. 붕. 이. 라고 재단되어 있지 않나.

 

‘씨발. 꼴초뱀이 이걸 봤다가는 아주 그냥 자지러졌겠네.’

 

 아 몰라. 그 양반이야 저쪽 지구에서 잘 살아가고 있겠지.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양반도 아니고. 나는 내 걱정이나 하는 게 맞아.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눈앞에서 어두운 밤바다가 고속정의 속도에 갈라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네. 이 정도면..’

 

 언제 도착하는 거지? 잘못해서 하루 이틀은 여기서 자야 하나? 여기 화장실이 있긴 있던가. 지옥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별의별 쓸데없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탈출은 했지만 결국 나는 그들의 손아귀 안. 이렇게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녀들과 사령관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읽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사령관..님이 홀로그램 패널을 확인하라고 하셨는데.”

 

 익숙하지는 않지만 이제 그 청소년을 두고 항상 님자를 붙여야겠지. 나도 이제 오르카 저항군 소속일 텐데 어쭙잖게 말실수를 했다가는 호의적으로 돌아선 것 같은 지휘관들이 다시 이빨을 들이밀 수도 있을 터.

 

“이..이게 패널인가?”

 

 나는 가죽 의자에서 등을 떼고는 내 앞에 착 달라붙은 패널로 유추되는 물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아서 움직이는 조타수 사이에 놓인 스크린. 이건가?

 

삑-!

 

 그 패널의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눈앞에 거대한 홀로그램 영상이 쫙-하고 펼쳐졌다. 이제보니 이거, 스크린에서 영상을 사출하는 물건이었다.

 

“와..진짜 기술이 이렇게 발달했구나.”

 

 새삼 내가 미래세계에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홀로그램에 손을 올리니 이게 내 손가락을 인식하곤 알아서 움직이는 게 아닌가. 이건 뭔 기술이야?

 

“..우선 요안나 아일랜드 간부진이랑 오르카 저항군 계급표를 보라고 하셨지.”

 

 사령관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홀로그램 패널 위에 계속해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가져다 대었다. 생각보다 허공에 대고 손짓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 여기서 수여 분을 소모하고 있자니 드디어 내가 찾던 것이 눈앞에 주르륵 펼쳐졌다.

 

“분명 요안나 아일랜드 총책임자 신분이니 계급이 그렇게 낮지는 않을 거고. 또 그렇게 높진 않겠네.”

 

 장교들은 후방 배치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이유야 뭐, 진급이 누락되거나 밀리는 일이 허다하니까. 그래서인지 대충 자기가 후방배치다 싶으면 조용히 지내면서 인사이동만을 기다린다.

 

“나야 뭐. 계급 같은 건 별 상관 안 하지만.”

 

 후방 배치에 총책임자니까 대충 대위나 중령 사이쯤 아닐까. 병장에 분대장 딱지나 달아본 내가 장교계급을 받다니. 얼떨결에 출세했네. 나 놈.

 

‘라붕이 대위. 라붕이 중령. 크큭.’

 

 호명되는 이름이야 좀 걸리기는 하지만 부 지휘관이라는 미친 자리보다야 딱 이 정도가 좋다. 어느 정도 가라도 치고, 적당히 자원 생산이나 하면서 제 할 일만 처리한다. 바이오로이드들까지 배치해뒀다고 했으니 자세한 일들은 그녀들이 알아서 할 거고.

 

‘캬! 지옥 다음에는 천국인가요?!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건가!’

 

 교회 목사님의 말이 옳았다. 봐라. 알아서 눈을 깔고 다니니 죄를 범하지 않았잖아. 그 덕분에 이 천국행 티켓도 챙겼고. 앞서 걱정했던 무료한 나날을 소비한다는 것보다야 이런 감투라도 있으면 딱 할만큼만 하고 어! 사건사고 없이! 어! 세상 편해지는 것만 남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홀로그램 위에 표시된 계급표를 읽어 내렸다. 그리고-내 뇌가 잠깐 시동을 멈추었다.

 

“...어?”

 

 뭔가 이상하다. 잠깐 내 눈이 잘못된 것 같다. 리리스를 보고 찔끔 눈물을 흘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떠나기 전 마셨던 맥주 탓인지. 아니면 사령관 녀석이 외롭다는 얼굴로 배웅해서 그런지. 아니. 아니!

 

“이...이게 뭐야?”

 

 허공에 손을 댄다. 그런데 이놈의 홀로그램 영상은 더 이상 움직이기 싫다는 듯 아예 고정된 채 내려갈 생각을 안 한다.

 

“자..잠깐. 이거 오류..오류 아냐?!”

 

 사령관 녀석이 꼭 보라고 신신당부하던 오르카 1호 계급표. 거기에 내 새로운 이름, 라붕이 석 자가 떡하니 박혀있다. 그래. 그것만 박혀있으면 이렇게 지랄을 안 하지. 문제는..

 

<오르카 저항군 사령부 소속>

 

 총사령관. <최고기밀:열람 불가>. 계급: 원수

 호라이즌 총지휘관 겸 참모총장. 무적의 용. 계급: 중장

 스틸라인 총지휘관. 불굴의 마리 4호. 계급: 소장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총지휘관. 철혈의 레오나. 계급: 소장

 ..

 ...

 ...

 

<오르카 저항군 요안나 아일랜드 소속>

 

 후방 보급대대 총지휘관 및 요안나 아일랜드 특수작전관. 라붕이. 계급: 대장

 후방 보급대대 수색 임무 총책임자. 프레스터 요안나. 계급: 없음.

 요안나 아일랜드 현지 부품 생산 총책임자. 아르망 추기경. 계급: 없음.

 ..

 ...

 ....

 

“대..대...대대..대! 뭐?!”

 

 난 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계속해서 이 별 거지 같은 이 미친 계급표를 반복해 읽었다. 대위? 대령? 아냐. 대자 돌림 같은 게 아니야. 아니. 잠깐. 아니. 사령관님?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

 

“씨..아니. 잠..아니..”

 

 분명 나한테 부 지휘관 자리를 안 주겠다며. 근데 저거 뭐냐? 후방 보급대대 총지휘관? 아니 옆에 및은 뭔가요? 요안나 아일래드 특수작전관? 아니. 부 지휘관에서 관자만 빼돌리면 다인가요?

 

“..허..허허허허허! 허허허허! 허허허허헣!”

 

 웃음밖에 안 나온다. 손이 덜덜 떨리다 못해 아예 허공에서 춤을 추고 앉아있고 힘이 턱 풀린 팔로 홀로그램 영상이 떠오른 허공 위를 휘적거렸으나 이 지옥의 명부와도 같은 계급표는 내 눈앞에서 사라질 생각을 안 한다.

 

“대장..내가? 내가 대장이라고? 대..대애애애애!”

 

 <계급: 대장>. 허! 허허! 허허허! 그 개사기 캐릭터인 무적의 용 계급이 중장인데. 내가 원수 바로 아래인 대장이라고요? 제가? 불굴의 마리도 존대를 박는 무적의 용이 중장인데?

 

“허..허허허! 사령관님. 이러려고..절 후방으로..허허허허! 허허허허!”

 

 허탈한 웃음으로 계속해서 저 개 같은 계급을 보고 있자니 문득 오르카 1호를 떠나기 전 무적의 용이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후후. 그때는 입장이 지금과 정반대일 수도 있지만.’

 

“이게..이게 그 뜻이었어?”

 

 대장이라니. 아. 해본 적은 있는 위치네. 앞에 분자가 하나 더 붙었던 게 차이지만.

 

“분대장이나..대장이나. 비슷하지. 응. 비슷...하긴 개뿌우울!”

 

‘씨발..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왜 씨발..’

 

“내가..내가 대장이라니이이이!”

 

 모든 환상이 무너졌다. 나보고 작전관에 보급짱을 먹으란다. 분대장 출신인 나보고 원스타도 아니고 포스타를 하란다. 장교들도 꿈에 그리는 자리에, 나보고 앉으란다.

 

‘무적의 용도..계급상 내 아래..허허허...허허허허허!’

 

 응애. 나 라붕이. 오르카 대장이야. 응애. 응애! 응애애애앵!

 

“...킥..키키킥...킥! 키키키킥! 키킥! 키키키키키!”

 

 영화 조커처럼, 아니면 실성한 또라이처럼. 나는 그저 온몸을 부들거리며 헛웃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키키키...키..으아아아아아아아! 사령과아아아아안! 아아아아아악!”


쿵! 쿵! 쿵!

 

 옅어지던 사령관에 대한 내 마음의 장벽이, 다시 겹겹이 쌓이는 소리가 가슴 속에서 들려올 때. 그 소리와 함께 그 양반이 했던 말소리가 하나 다시 내 뇌리에 새겨졌다.


‘천국으로 둔갑한 지옥이라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 내 군생화아아알!”

 

꼴초뱀, 나 여기가 싫어졌어.

 

23)

 

기-이잉! 기-잉! 기-이이잉!

 

 사령관은 눈앞에 보이는 3개의 생체관 위에 표시된 시간대를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시간대는 좋네.”

 

“..안드바리가 3번만 하라고 했으니. 횟수는 지켜야 해. 사령관.”

 

“물론이지. 한 명의 시간대가 좀 아쉽지만. 두 명은 분명 최고급 바이오로이드야. 확실해.”

 

 곁에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철혈의 레오나에게 사령관은 상큼한 웃음을 보내었다. 하지만 끝끝내 못 미더운지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저번에도 우리 애 몰래 중제조 돌리다가 큰일 날 뻔했던 거 기억하지?”

 

“..진짜 권총 들고 뛰어올 땐 조금 무섭긴 했어.”

 

“그래. 그럼 어서 내 눈앞에서 마무리를 지어줄래?”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에 사령관은 큼큼-목을 가다듬고는 재빨리 가속 장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도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찰-칵!

 

구-우우우웅!

 

 레버가 돌아간 순간, 익숙한 구동음이 그와 그녀의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제 3초 후면 저 생체관이 열리면서-

 

콰직! 쿠직! 으직!

 

“...어?”

 

“...응?”

 

-열려야 할 생체관 위에 금이 가자 사령관과 철혈의 레오나는 동시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그들이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 세 개의 생체관이 동시에 자신들의 눈앞에서 터져나갔다.

 

콰-앙! 쾅! 째-앵!

 

“사령관!”

 

“-주인님!”

 

 생체관의 금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철혈의 레오나가 그를 감싸 안으려 하자 그보다 빨리 천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블랙 리리스가 그들의 앞에 착지해 로자 아줄을 꺼내 들었다.

 

팅-! 티-잉! 팅!

 

“...어? 이게 대체..”

 

 생체관의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광경에 사령관은 제 눈을 의심했다. 수백 번도 더 돌렸던 바이오로이드 제조. 설마 자기가 너무 막 굴려서 노후화가 진행된 것이었나.

 

삐-삐-삐-!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주군! 이게 도대체!”

 

 갑작스러운 소란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휘관들이 일제히 제조실 안으로 황급히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들 역시 희뿌연 연기로 자욱한 제조실 내부의 광경에 정신을 못 차릴 때.

 

자박-자박-

 

“..흐음. 이곳의 공기는 조금 색다르군요.”

 

“시끄러워요.”

 

“햇츙!”

 

자박-자박-

 

 그 희끄무레한 허연 연기 속에서 3명의 인영이 자박-자박-하고 깨진 유리 조각을 밟으며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들이 누군지 확인하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입을 떡-벌렸다.

 

“..여기가 소첩의 부군께서 계신 곳이오?”

 

“..부군이라니 여전히 주제를 넘는 소리를 하고 있군요.”

 

“..햇츙!”

 

 오르카 1호에서도 유명한 견원지간, 불구대천, 빙탄지간. 소완. 블랙 리리스. 시저스 리제가 동시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나신의 모습으로 등장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시저스 리제만 제 고유무장인 거대한 가위를 들고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아예 빈손의 상태였다.

 

“...사령관. 당신 노린 거야?”

 

“그..그럴 리가. 아니. 블랙 리리스는 노린 거긴 한데..”

 

“..주인님. 제 뒤에서 나오지 마세요.”

 

“주군!”

 

“음!”

 

 가뜩이나 예전 오르카 1호의 저 세 명 때문에 골치를 썩인 적이 있던 이들이 제각기 무장을 들고선 그녀들이 앞으로 피울 난동에서 사령관을 급히 빼내려 들었다.

 

“...”

 

“...”

 

“...”

 

 하지만 그런 그들의 우려와 달리 그 셋은 지휘관들을 한번, 그리고 자기들끼리 한번. 시선을 나누더니 그들 사이의 나신으로 서 있던 블랙 리리스가 싱긋이 웃으며 희뿌연 가림막을 거두며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사령관님’. 블랙 리리스라고 해요. 이미 아시겠지만요.”

 

“...으응. 만나서 반가워.”

 

“후훗. 환대에 감사해요. 그런데 혹시 저희의 옷가지를 좀 구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아차! 어어! 잠깐만!”

 

 생체관에서 걸어 나온 블랙 리리스의 부탁에 사령관은 그제야 그녀들이 나신의 상태임을 뒤늦게 인식하고선 황급히 오르카 1호의 재단사, 오드리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사이, 블랙 리리스와 블랙 리리스는 서로의 호박색 눈동자를 맞댄 채 대치해 섰다. 서로의 눈빛만을 응시하던 둘 중, 말문을 튼 것은 나신의 블랙 리리스였다.

 

“..당신이 여기의 블랙 리리스?”

 

“그런데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후훗.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체관에서 걸어 나온 블랙 리리스가 샐쭉이 눈웃음을 짓자 오르카 1호의 블랙 리리스는 더욱더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와 똑같은 얼굴, 하지만 어딘가 불길한 기운이 맴도는 것이 그녀의 경호 모듈을 찔러대었다. 이 여자, 뭔가 이상하다. 위험하다고, 그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철-컥!

 

“제 주인님께 더 다가왔다가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아니 저희는.”

 

 블랙맘바의 총구가 제 이마를 향함에도 블랙 리리스는 여유로운 얼굴로 담담하게 뒷말을 이어갔다.

 

“저희의 주인님을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것 뿐이랍니다?”

 

“...?”

 

24)

 

“햇츙!”

 

“..넘어올 때 언어모듈이라도 다치셨습니까? 왜 말을 그것밖에 못 합니까?”

 

딸-깍

 

 곁에서 연신 똑같은 구호만 외치는 리제의 모습에 소완은 제 제복의 단추를 잠그며 그녀에게 싸늘한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비꼼에 응답하듯 리제는 홍채가 옅은 제 보랏빛 눈동자를 그녀에게 돌렸다.

 

“-주인님. 주신 이 가위를 챙겨올 수 있을 줄이야. 그러는 너희야말로 왜 다 빈손이야?”

 

“..후. 당신도 반지는 유실했잖습니까? 부군께 받은 물건 중 그것이 가장 중요할 터인데.”

 

 자신의 가위를 사랑스럽다는 듯 매만지는 리제의 물음에 소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을 회피했다. 

 

“..빈손이긴 회로랑 OS는 전부 장착된 상태, 그대로야. 전투 레벨도 그대로고. 괜히 힘 자랑하지마. 우린 여기서는 갓 제조된 신입이니까.”

 

 그런 그녀의 모습에 리제가 킥킥-하고 비웃음을 날릴 때, 제 정복을 다 차려입은 블랙 리리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들을 중재해 나섰다.

 

“너희들이 싸우든 말든 나랑은 별 상관없지만 하다 못해 주인님의 앞까지 갈 때까지만 좀 얌전히 있어. 여긴 우리가 지내던 오르카 1호가 아니야.”

 

“..햇츙!”

 

“흐음. 리리스양의 말이 맞사옵니다. 제가 허투루 혀를 놀렸나이다.”

 

 리리스의 싸늘한 호박빛 눈동자에 리제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고, 소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면 됐어. 우선 상황을 보니 우리는 여기에 오래 머물 것 같진 않네.”

 

“..후후후! 하늘이 우릴 도우시는군요.”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아아. 리제가 주인님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어요. 아아. 주인님이 주신 이 가위도 함께요. 히히히! 히히히히!”

 

“..리리스양. 저보다는 저 리제양부터 어떻게 하는 게 낫지 않겠사옵니까?”

 

“...뭐. 우리 중에 주인님께 전용 장비를 받은 게 쟤뿐인데 어떡해?”

 

 리리스는 그렇게 말하곤 리제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탈의실 문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따라 뒤의 둘 역시 각자의 장비를 들고 나섰다.

 그리고 탈의실 문을 열기 전, 리리스는 제 입술과 뺨 위에 손가락을 얹은 채, 황홀경에 빠진 소녀와 같이 광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주인님. 이 착한 리리스가 주인님을 만나러 가요. 아아!”

 

“..부군께 드디어 제 진수성찬을 진정으로 대접해드릴 수 있게 되었군요. 후후후!”

 

“히히히! 히히히! 주인님 곁의 해충들은 다 죽일 거야! 히히히히! 주인님이 주신 이 가위로!”

 

25)

 

촤-아아아악!

 

“음. 무사히 도착하셨군.”

 

퉁-!

 

 거친 파도가 요안나 아일랜드의 항만의 방파제 위를 휩쓸며 그 파도에 실려 온 고속정이 방파제의 인근에서 속도를 멈추었다.

 그리고 고속정의 천장이 딸-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열리자 그 구멍에서 한 사내가 빼꼼히 햇살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

 

 사내는 이곳이 어디인지 둘러보는 듯하더니 곧장 방파제 옆에 놓인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받은 여성은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여기오! 만나서 반갑군. 라붕이 대장님.”

 

“...라붕이 대..장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붕이라 불린 사내는 재빨리 방파제 위에 뛰어내려 그녀가 서 있는 항만 구조물 턱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가 턱 위로 올라오자 요안나는 곧장 그의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그대가 오기 전까지 책임자로 있었던 프레스터 요안나일세.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총책임자라 하나 이곳에 대해 무지하기에 많은 조력을 기대 하겠습니다. 요안나씨.”

 

“요안나라 불러도 되네! 하하하!”

 

 요안나는 화끈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 위를 탁탁 두들겼다. 라붕이는 그것을 딱히 쳐내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흐음. 바이오로이드들을 겁낸다고 들었다만.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네만. 그리고 안색이 안 좋군. 오는 동안 멀미라도 하였나?’

 

“그대의 호칭에 대해서 말이네만. 대장이라 부르도록 할까, 아니면 작전관? 또는 총책임자도 있다네. 개인적으로는 작전관이 괜찮다 보네만.”

 

“..좋을 대로 해주십시오. 저는 잘..”

 

“음! 눈이 풀려있군. 작전관. 우선 숙소로 안내하는 게 도리다만. 먼저 소개해줘야 할 인원이 있다네.”

 

“..누구?”

 

 고속정에서 눈도 잠깐 못 붙인 듯한 라붕이의 힘 빠진 물음에 요안나는 안쓰러운 눈치로 그를 살피다 곧장 등 뒤로 고개를 돌리고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르망 추기경! 어서 와서 라붕이 작전관님께 인사를 드리게!”

 

“..아르망?”

 

 요안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여성의 이름에 라붕이 작전관 역시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던 금발의 소녀가 항만의 크레인 철골 뒤에서 빼꼼히 고개만 내미는 게 아닌가.

 

“하하! 우리 추기경님이 많이 낯을 가려서 말이네. 2시간 전부터 그대를 기다리고 있더니만, 정작 본인이 도착하니 부끄러운 모양일세.”

 

“...아르망 추기경..”

 

“음? 혹 오르카 1호에서 동형기를 만난 적 있나? 아쉽지만 그녀는..”

 

타-다닥!

 

다다다-다다!

 

 요안나가 라붕이에게 설명을 이어가려 할 때, 그녀의 등 뒤에서 소녀의 다급한 구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라붕이와 요안나가 대화를 멈추고 뒤를 바라본 순간.

 

“-폐하!”

 

-와락!

 

“어어?!”

 

 아르망은 제 주인의 품으로 달려와 그의 허리춤을 힘껏 끌어안았다.

 

“아르망 추기경? 갑자기 왜 그러나?”

 

“-폐하! 폐하!”

 

“...?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둘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아르망은 제 금발을 이리저리 휘날리며 그의 티셔츠 위에 제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런 그녀의 행태에 요안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달달 볶기 시작했다.

 

“..라붕이 작전관. 혹 그녀에게 무슨 짓이라도..”

 

“아뇨. 전 어제 구조되어서 여기로 왔는데..”

 

 억울해요. 한눈에 봐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에 요안나는 콧김을 한번 내쉬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추기경의 흰 셔츠 위를 붙잡아 그녀를 그의 품에서 떼어내었다.

 

“-우웃!”

 

“추기경. 우선 진정하게. 그대가 폐하를 모시고 싶어하는 그 열성은 내 잘 아네만.”

 

“-놔요! 웃!”

 

 요안나의 강한 팔 힘에 이끌려 나온 아르망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공중에서 발버둥을 쳤지만 모두 허사에 불과했다.

 눈앞에서 콩트를 찍는 두 여성을 당황스러운 얼굴로 보던 라붕이 작전관은 요안나의 말에 질문을 던졌다.

 

“..아. 그녀는 오르카 저항군 소속 아닙니까? 그러면..”

 

“소속은 맞네만. 아무래도 지휘명령권이 내 주군께 있을 뿐이었네. 이제 그대가 이곳의 총괄 책임자니 이곳 소속의 바이오로이드의 지휘권은 그대에게 있네. 내 주군을 뵙지도 못한 그녀에겐 그대가 진정으로 모실 폐하인 셈이지.”

 

“..아하.”

 

“-웃! 우웃!”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에도 아르망은 제 얼굴을 붉게 달아 올리며 요안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탓인지 라붕이 사령관은 요안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만 놓아주셔도 됩니다. 요안나양.”

 

“후후. 그대도 싫지만은 않은 모양일세.”

 

탁-!

 

 요안나가 손아귀를 풀어주자마자 아르망은 또다시 라붕이 작전관을 향해 도도도-뛰어가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이 세계로 와 처음으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제 품에 파묻힌 그녀의 정수리에 대고 인사를 건네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르망 추기경.”

 

“-네! 저도요! 폐하!”

 

 라붕이 작전관의 해맑은 인사에 아르망 역시 품에서 고갤 빼내어 그에게 환한 웃음으로 회답했다.

 

 둘은 서로의 정체를 공유하지 않은 채, 이렇게 첫 만남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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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했다아아아아! 원작 스토리 거의 다 붙였다아아아! 끼요오오옷!


그러니 이제 1일 1연재는 스탑하겠다. 이러다간 내가 죽을 거 같으니까.

오타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