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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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남정네들끼리 모이면 가장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주제는 뭔가. 축구? 야구? 이런 스포츠는 좋아하는 놈들끼리 모이면 하는 이야기고, 게임도 같은 맥락이다.

 대한민국 남정네들이 가장 좋아하고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 주제는 우습게도 단 하나의 주제로 요약된다. 남정네들은 심심하면 그걸 떠들고, 여자들은 그걸 들으면 눈살을 찌푸린다.

 

쨍!

 

“건배!”

 

“건배!”

 

 오랜만에 친구 녀석들과 함께 술집에 들어와 흰 거품을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끌어올린 맥주잔을 집어 들곤 거침없이 허공에 부딪혀 쨍-소리를 내었다.

 바쁜 하루가 계속되던 어느 날, 녀석들이랑 날이 맞아 다 같이 건배를 갈기며 하하호호 하고 있자니 어느새 홀로 자취하던 나날의 외로움이 가슴 위에서 배 아래까지 싹-내려갔다.

 

꿀꺽-꿀꺽-

 

“-크으! 죽인다!”

 

“야야. 천천히 마셔.”

 

“저저, 주당 녀석. 또 혼자 달리는 거 봐라.”

 

“나보다 못 마시면 쉿. 나는 혼자 천당 갈 테니. 쉿.”

 

 능청스러운 연기 톤으로 말하며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니 녀석들 껄껄 웃기 바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즐거운가. 바쁜 21세기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한 주점 안이 더욱더 소란스러워졌다.

 

“너희 요새 뭐 하고 사냐?”

 

“뭐 하고 살긴. 그냥 하루하루 일하고 자고 일하고 자고.”

 

“야야. 말도 마. 난 어제 팀장님한테 깨지고 부장님한테 깨지고.”

 

“뭘 또 실수했냐?”

 

“..씨발. 프레젠테이션 자료 배경이 이게 뭐냐고 하시더라. 내가 씨발 대학교수들한테도 그런 소리 안 들었는데.”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친구의 고통을 이해해 주지 않냐고? 응. 나도 힘들어. 나만 힘들기 싫어. 우리 모두 서로 그런 눈빛을 주거니 받거니하고 있자니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다들 어떤 일인지를 몸소 체감하고 있던 탓에 서로의 이야기가 곧 자기 이야기였다.

 

“안주 더 시킬까?”

 

“야. 나 맥주랑 소주.”

 

“? 섞으려고?”

 

“뭘 벌써 달리려고 해? 천천히 가자. 밤은 길다.”

 

“달리긴. 그렇게 마셔야 좀 취하는 기분이라도 들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굳이 맥주와 소주를 하나씩 더 시켰다. 내가 다른 건 안 튼튼해도 간 하나는 타고났다.

 

쪼르르륵-

 

“어어. 저거. 저거. 또또또.”

 

 종업원이 새로 가져다준 유리잔에 소주를 반.

 

“이 미친 새끼. 네가 다 해 먹어라.”

 

 샛노란 맥주를 반. 오케이. 5:5 완벽해. 재빨리 안 쓴 수저를 꺼내 유리잔 밑바닥을 내리치니 거품 한점 올라오지 않는다. 크.

 

꿀꺽-꿀꺽-

 

“미친 새끼...”

 

“술고래..이 새끼 내일 오프라고 저저.”

 

“-크으!”

 

 이 맛이야! 맛은 밋밋하지만 알코올 비율만큼은 최고다. 가득 따른 소맥을 원샷을 때리고 나니 친구 녀석들의 눈총이 느껴져 거기로 고개를 돌리자 한 놈은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다른 한 놈은 마시던 잔도 내려놓은 채 날 빤히 보고 있었다. 

 

“왜?”

 

“..보통 소맥은 소주잔 1~3잔이야..미친 놈아.”

 

“대학 다닐 때 다들 이렇게 마셨잖아.”

 

“..그땐 씨발 젊었으니까. 뒤도 안 보고 마셨지. 너 그렇게 먹고도 눈이 멀쩡하냐?”

 

“야야. 군에 있을 땐 이거보다 더 마셨어. 물론 선임 양반도 날 미친놈처럼 보긴 했는데.”

 

 내 입에서 익숙한 단어 하나가 테이블 위에 툭 던져지자 녀석들의 어이가 없다는 얼굴 위에 생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이제야 우리들의 술자리는 시작된 것이다.

 

“야. 요새 군대 존나 빠진 거 같지 않냐?”

 

“맞지. 암. 우리 때는 상상도 못 하던 걸 지들 꼴리는 대로 하더만.”

 

“내 전역하고 나니까 뒤에 남은 후임 녀석이 뭐라는 줄 아냐? 나 빠지고 애들 군기도 다 빠졌다잖아.”

 

“어. 씨발. 나 때는 말이야. 어.”

 

 이 새끼들 벌써 취했나. 시작부터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고 앉아있다. 매번 같은 패턴, 매번 같은 주제. 그래도 이야기할 껀덕지는 차고 넘쳤다.

 

“야. 너도 분대장 딱지 달아봤다며?”

 

“어. 씨발. 동기들이 지들은 죽어도 싫다고 지랄해서 내가 달았다.”

 

“쯧쯧. 그거 뭐가 좋다고 다냐?”

 

“이 새끼, 달고 나서 일주일 만에 뒤질 뻔했던 거 아냐? 그거 듣고 존나 웃었는데.”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친구 놈의 말에 후임 놈 총알이 스쳤던 구레나룻 위에 시원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으으. 지금 와서 생각해도 끔찍하다.

 에라이. 술이나 마시자. 나는 아까와 같이 유리잔 안에 소주 반, 맥주 반을 넣은 뒤 그걸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크으!”

 

“야. 그럼 너 분대장 수첩 같은 것도 썼겠네?”

 

“썼지. 대충.”

 

“애들 막 간식 사줘야 하는 돈으로 삥땅치고도 그랬냐?”

 

“아니. 난 우리 애들 잘 챙겨. 다 같이 고생하는 놈들인데, 얼마 안 되는 푼돈을 왜 내 주머니에 넣냐?”

 

 무슨 수억 원 해 처먹을 수 있는 쓰레기 장교들도 아니고. 나는 대충 녀석들의 말에 대답하며 빈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 이 영롱한 색들 보소. 사랑한다. 알코올.

 

“요샌 애들 손도 못 대니까 자기들끼리는 아주 살맛이겠네.”

 

“그것도 마냥 그렇지만은 않을걸. 선임들이 알려줘야 하는 걸 자기들 알아서 해야 하니까.”

 

“..애들 손을 왜 대냐? 그냥 이거 하나만 있으면 갓난아기 시절로 돌려보낼 수 있는데.”

 

 나는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혓바닥을 앞으로 쭉 내밀며 그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러자 그 모양새가 웃기긴 했는지, 녀석들은 또 실실 웃기 시작했다.

 

“맞지. 유격 때 조교들한테 잘못 걸리면 씨벌 몸이 아니라 귀가 힘들었는데.”

 

“..그때 이야기는 하지 말자. 나도 PTSD 올 거 같으니까.”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그 양반들 덕분에 이 세상의 별의별 갈굼이 다 있다는 걸 깨달았었다. 발 한번 삐끗하는 순간 내 귀에 대고 아주 그냥. 어우. 술이나 마시자. 두 번 다시 볼 양반들도 아닌데. 어. 술 떨어졌다.

 

“여기요! 소주 한 병 더요!”

 

“..오늘은 네 카드로 긁어라. 아 그러고 보니 요새는 싸지방 가긴 가냐? 휴대폰도 맘대로 쓰는데.”

 

“덕분에 간부들 대가리 좀 깨질걸? 휴대폰 허용하고 나서부터 내부고발 심심하면 터지잖아.”

 

“뭐, 너희들은 안 썼냐? 누가 들으면 너흰 뭐 군번 기수가 한 10년 전인 줄 알겠다.”

 

“잘 썼지~근데 전역하고 나면 뒤에 애들 편하게 지낸다는 말에 반응하게 되는데.”

 

“원래 내가 있을 때 편한 건 편한 게 아닌 거 아니냐. 선임들이 보기엔 우리도 죄다 빠진 놈들이지. 뭐.”

 

 자고로 군대는 자기가 나온 곳이 제일 험하고 힘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지사다. 육군 나온 놈은 육군이 빡세다 하고, 해군 나온 놈은 바다에서 반년 살아볼래? 하고 넘어오는 게 정상.

 해병대도 공군도 그냥 자기가 나온 군단부터 심지어 중대까지. 거기가 제일 빡세고 힘든 법. 내가 보기엔 군기가 풀려 있어 보여도 자기들 딴에는 제일 빡센 곳이 자기 사는 곳이다.

 

“뭐, 그건 맞긴 하지. 야, 그래도 요새 애들은 좀 다르다니까?”

 

“아주 지랄을 한다. 야, 마셔. 마셔.”

 

“네 페이스 따라가다간 우리 걸어서 못 가.”

 

“어쭈? 잔이 비었는데 안 채워? 들어. 들어.”

 

 어서 이놈들 혀가 베베 꼬이게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이 이야기로 3시간은 거뜬하다. 그리고 술자리 나와서 걸어갈 생각을 하다니. 걸어가는 건 나 하나고 너흰 택시행이야.

 다시 채운 술잔을 들고 이번에는 가볍게 짠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알코올 흡입. 음! 최고야.

 

“-크으. 야, 저거 봐라. 저거.”

 

“? 뭔데?”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근래 군대의 간부 비리나 상황이 TV에서 보도되고 있었다. 뭐, 평소 대한민국 군대네. 요샌 휴대폰도 다 쓰니까 숨기려고 해도 못 숨기지.

 내가 담담하게 그걸 보고 있자니 친구 놈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어갔다.

 

“저게 군대냐? 괜히 요즘 군대가 당나라 군대 소리 듣는 게 아니야.”

 

“당나라 군대가 얼마나 쎈 줄 알고는 알고 하는 소리냐. 시끄럽고, 어서 마셔.”

 

“..우리 원샷 한 지 20초 지났는데? 야! 야! 왜 채워!”

 

“오늘 마시고 죽는다. 이게 우리가 모인 목적 아니냐.”

 

“뒤지긴 너 빼고 우리만 죽어! 야!”

 

 캬아! 좋다!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이놈들 빨리 보내고 집에 가서 라오 일퀘나 돌리고 자련다! 안 그래도 제조 개폭망해서 기분도 꿀꿀했는데. 잘 되었다.

 

“군대 이야기는 또 군복 입을 생각 아니면 하지 마라. 확 그냥 전문하사나 하지 그랬냐.”

 

“...미친.”

 

“듣기만 해도 소름이다. 진짜. 으으.”

 

“..난 우리 행보관이 왜 갑자기 나보고 내기하자고 했는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지면 임관시키려고 그랬다더라.”

 

“시발..미친..”

 

 그렇게 나와 그 녀석들은 군대 이야기 80%, 직장 이야기 10%, 일상 이야기 10% 비율로 신나게 떠들다가 나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잘 먹었다. 친구야. 카드 내역서는 네 폰에 넣어둬. 넣어둬.

 

31)

 

 적도 인근 해상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거대한 섬, 요안나 아일랜드. 전투모듈을 제거한 바이오로이드들이 가장 먼저 배치받는 곳이며 또 동시에 그 인원들로 섬의 인프라를 구축, 그리고 전방지역과 해저를 돌고 도는 오르카 1호의 보급까지 도맡는 생산시설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인 이곳.

 

 여름이 아직 가깝지도 않은데 날씨는 이미 한여름에 가까운 이 섬의 한가운데 위치한 산의 중턱, 군대 연병장을 연상시키는 널따란 야외 연설장 위에서 수백은 족히 넘어 보이는 여성들의 시선이 교단 위에선 남성에게로 고정되었다. 간소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남성은 교단 위에 놓인 단상 앞에서 담담하게 발표문을 읽어내리고 있었다.

 

“...이상. 이곳, 요안나 아일랜드의 현장 지휘 권한을 사령관님께 위임받은 라붕이 대장이었다. 모두 날도 더운데 듣느라 수고했다. 필! 승!”

 

“와-아아아아!”

 

짝-짝-짝-

 

 그가 말을 끝맺으며 그녀들을 향해 경례를 올리는 순간,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여성들은 저마다의 목청을 세우며 그의 경례에 응답해주었다.

 

“라.붕,이! 대장님! 라.붕.이! 대장님!”

 

 오른쪽에 선 여성들은 그를 향해 만세삼창을.

 

짝-짝-짝-짝-

 

 왼쪽에 선 여성들은 그를 향해 박수 세례를 보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환호를 한껏 받는 남성, 라붕이는 최대한 딱딱하게 굳힌 얼굴 아래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임관..임관했네. 씨벌. 그것도 장교, 대장으로. 허..허허허.’

 

 눈앞의 상황에 최대한 눈을 돌리려 시선은 연설장 뒤에 놓인 우거진 수풀로 고정한 채, 라붕이는 재빨리 경례를 올린 팔을 내렸다.

 

‘장교가 경례하는데 만세삼창으로 대답하는 동네구나. 여긴. 여기가 임관식인지 아니면 체육대회 개막식인지 구분이 안 되네.’

 

 사령관이라는 양반부터가 경례를 똑바로 못하는데, 부하들이라고 다를까. 라붕이는 앞으로 자기도 경례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푸르른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날씨 좋다. 진짜.’

 

“수고하셨습니다. 폐하. 이제 내려오셔도 됩니다.”

 

 한창 자기 앞에 들이닥친 현실을 부정하던 차, 교단의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에 라붕이는 자신을 향해 환호성을 보내는 여성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며 교단의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불쑥-시원한 냉기를 머금은 수건이 튀어나와 라붕이는 그 수건의 의미를 찾아 제 곁에선 금발의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더우시죠? 폐하?”

 

“고마워요. 아르망 추기경.”

 

“..아르망이라고 불러주세요. 폐하. 저는 그게 더 좋답니다.”

 

 라붕이가 수건을 받아 올리자 아르망은 환한 눈웃음을 지으며 제 품에 들린 두꺼운 책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모습에 라붕이 역시 긴장이 풀린 얼굴로 헤실헤실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아르망이 여기 있어서 살만하네.’

 

 철충의 총에 맞아 곧 뒤질 것만 같았던 그때, 라붕이는 제발 한 번이라도 좋으니 휴대폰 너머에서나 보던 그녀들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꿈은 반절이나마 제 눈앞에서 이루어졌기에 라붕이는 차가운 수건 아래 감춘 손을 꽉-움켜쥐었다.

 

‘꿈은..이루어진다. 물론 내가 키우던 아르망은 아닐 테지만.’

 

찰그락-

 

“음. 작전관. 괜찮은 임관식이었네.”

 

 속으로 단물과 쓴 물을 동시에 들이마시던 라붕이의 귀에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라붕이는 이번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임관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중세시대의 체인메일을 걸친 여전사가 싱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요안나양. 감사합니다.”

 

“하하하! 나도 이제부터 요안나라 불러주게나! 아무래도 그대가 상관이니 말일세!”

 

“..하하하.”

 

‘씨벌. 진짜 대장이네. 이제.’

 

 정다운 웃음을 짓는 요안나의 확인사살에 라붕이의 속은 점차 썩어만 들어갔다. 당장에 대장이라고는 하는데 대체 자기 자신은 뭘 해야 할지 감이라곤 일도 잡히는 게 없었기에 제 이름에 걸린 중압감이 연신 제 어깨를 눌러대는 탓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의 화살은 자신을 이곳에 앉힌 어느 남성을 향해 있었다.

 

‘사령관 그 자식, 도대체 뭘 믿고 나한테 이런 중직을 맡긴 거야. 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날 부려먹으려고 아주 작정하고 보냈구만.’

 

 그런 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요안나는 단상의 밖으로 그를 안내하며 군용으로 보이는 지프차의 위를 툭툭 내리쳤다.

 

“숙소로 가겠나? 아니면 섬을 한번 둘러보겠나?”

 

“..한번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네. 아무래도 이제는 내 담당구역이니까. 뭐라도 봐 두는 편이 낫겠지.”

 

“말 놓는 게 빨라서 좋군. 하하하!”

 

‘사실 한숨도 못 자서 뒤질 맛이긴 하지만.’

 

 이것도 이유 없는 업보다. 라붕이는 시원한 수건으로 땀이 흘러내린 목과 쇄골 부근을 닦아내며 제 정신줄을 붙잡았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 썩을 녀석의 마수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

 

 분명 떠날 때만 해도 귀여운 동생처럼 느껴졌던 사령관의 얼굴이, 점차 라붕이의 머릿속에서는 거대한 구렁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총책임자라고는 해도, 대장직이라니. 대체..대체 뭔 생각으로 날..으으으!’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는 계급 체계에 라붕이의 머릿속은 작전 지휘실에 갇혔을 때보다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그래도 해야 할 건 해야 문책을 안 당할 터, 운전대에 앉은 요안나의 뒤를 따라 라붕이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엉덩이를 앉혔고 아르망 역시 그의 곁에 조심스레 다리를 올렸다.

 

 백금발의 머릿결을 찰랑대며 붉은색 원단으로 만든 수단을 흰 셔츠 위에 걸친 미소녀가 제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광경에 라붕이는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래도 아르망이 내 옆에 앉는 꿈만 같은 상황이니..뭐. 대충 둘러보고 문제없으면 사령관 녀석도 꽤 괜찮은 곳으로 날 박아준 게 아닐까.’

 

“출발하겠네! 안전 벨트는 꽉 매게나!”

 

부-릉!

 

부-우우웅!

 

덜컹! 덜컹!

 

‘..하필 지프차야. 이건 왜 군대야.’

 

 고급 세단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건만, 연신 덜컹거리는 승차감에 라붕이는 자연스럽게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모습이 백미러로 비친 것인지, 요안나는 그녀다운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직 도로 정비가 덜 끝나서 말일세. 하하하! 이해해 주게나!”

 

“...어쩔 수 없지. 하나하나 개선해가는 방향으로..”

 

덜컹!

 

“..보통 도로 공사가 제일 먼저 아냐?”

 

“하하하! 시작부터 달달 볶는걸세?!”

 

“폐하. 쿠션을 더 드릴까요?”

 

 곁에서 들려오는 아르망의 권유에 라붕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로 하나하나 주변인들을 피곤하게 만들기는 싫었다.

 

“괜찮아. 아르망 추..음. 아니. 아르망.”

 

“..후훗. 네. 폐하.”

 

“사이가 유독 좋아 보이는구먼. 좋은 일일세. 앞으로의 일은 그녀와 함께 해나가야 할 터이니. 이 몸은 이곳에서 오래 머물진 않는다네.”

 

“..여기 네 땅 아니었어?”

 

“그건 착각일세. 내가 먼저 개척한 섬이기에 요안나 아일랜드라는 명칭이 붙은 것뿐. 나는 기본적으로 정박지로 쓸만한 섬들을 찾아 이동하고 다닌다네.”

 

“으흠..”

 

‘요안나 아일랜드라길래 요안나가 짱 먹은 곳인 줄 알았더니.’

 

 라붕이는 간밤 동안 내내 보았던 계급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계급이 없던가. 분명 스토리에서 나름 21스쿼드의 한 자리를 차지한 주역이 아닌가.

 

‘..스토리 비중이 적어서 그런가? 흐음. 아르망도 없고. 여기 애들은 왜 계급이 없지?’

 

 라붕이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동안, 그들을 실은 지프차의 오른편, 산 중턱에서만 볼 수 있는 환한 햇빛과 그 햇빛을 반사하는 짙푸른 바다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오! 보게나! 작전관. 정말 진풍경이 아닌가?”

 

“-오. 경치 좋은데?”

 

“하하하! 내 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찾았네!”

 

“아르망. 창문 열어도 될까?”

 

“물론이죠. 폐하. 모든 건 폐하가 원하시는 대로.”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대답을 평온한 얼굴로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라붕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르망이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나는 아직 친밀도도 안 쌓은 것 같은데.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기-이이잉

 

“-오우!”

 

 흙먼지가 눈앞까지 올라오기는 하지만, 창문이라는 투명한 벽이 사라진 요안나 아일랜드의 광경은 그의 입에서 감탄사를 터트리기에는 충분한 광경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중심으로 위로는 푸르른 도화지에 놓인 새하얀 구름과 아래로는 짙푸른 해수면 위가 내리쬐는 햇볕에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비록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흙바닥이라고 할지언정 이 비포장도로의 절벽 아래로는 우거진 녹음이 가득했고 자세히 보니 고층 건물의 뼈대가 잡혀있는 백사장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요안나, 저기는 리조트라도 건설하려는 거냐?”

 

“음. 본래는 그럴 생각이었다만. 아무래도 차질이 좀 생겨서 말일세.”

 

“..차질?”

 

 무언가 뒷말을 흐리는 것 같은 요안나의 말에 라붕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런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듯 요안나는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작전관! 그것은 좀 있다가 이야기해주도록 합세. 먼저 우리가 갈 곳은-”

 

“-오! 저긴가?!”

 

“그렇다네!”

 

 라붕이는 부둣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공장 건물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한눈에 보아도, 산 위에서 보아도 수두룩한 공장 건물들과 창고로 보이는 건물들이 해안 절벽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그가 앞으로 자주 드나들게 될.

 

“-부품 생산시설일세! 하하하! 거기에 인부들을 얼른 만나러 가세나!”

 

“아, 인부들이라고 하면..”

 

“..저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을 말하는 거랍니다. 폐하.”

 

 비포장도로의 흙먼지와 푸르른 녹음이 선사하는 공기를 마시던 라붕이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르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위에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다가 아니야?”

 

“..그녀들은 파견 인원들이 반이었네. 오른편으로 갈라선 이들을 보았겠지.”

 

“왼편에 서 있던 분들은 인근 풍력발전 및 제초작업과 목책 작업을 하던 분들. 그리고 오늘은 휴무이신 분들이었습니다.”

 

“..허어.”

 

 그녀들의 설명을 들은 라붕이는 그때야 가운데가 비어있는 이유를 눈치채었다.

 

‘환호성을 내지르던 녀석들이 파견 인원, 박수를 치던 녀석들이 여기 애들이었구나.’

 

“..잠깐. 그 소리는 여기 애들 제법 머릿수가 된다는 소리 같은데?”

 

“물론! 전투 모듈도, 계급도 없지만 바이오로이드들의 머릿수만큼은 오르카 1호에 비견된다네! 하하하!”

 

“..와..”

 

 씨발 좆됐네. 라붕이는 속으로 앞으로 자신이 관리해야 할 병사들의 머릿수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요안나와 아르망은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32)

 

 자고로 보급병이란 무엇인가. 부대 내 필요한 보급품들을 발주하고 또 그걸 나눠주는 녀석들이다. 이렇게만 들으면 뭐 적당한 보직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이 녀석들이 군대에서 최고 권력자다.

 

“이..이게 대체 뭔..”

 

 왜냐고? 상상을 해봐라. 만약 훈련을 나갔다가 수통이 아주 작살이 났다고 치자. 얼떨결에 흙탕물이 그득히 들어간 수통은 아무리 안을 씻어내어도 물을 담을 때마다 흙맛이 난다. 이걸 어떻게 쓰냐.


 자, 그럴 때 보급병에게 가서 수통 하나만 달라고 말해봐라. 만약 네가 그 녀석한테 미움을 샀다? 그러면 넌 까딱하다간 그 수통을 전역 때까지 계속해서 써야 한다. 수통뿐만이 아니다. 군복도, 군홧줄도, 고무줄도. 군대에서 쓰는 대부분 물건을 그놈들이 꽉 쥐고 있다.

 

“..요..요안나. 얼른 설명해 봐. 이게 대체 뭔..”

 

“대..대장니임. 대장님 맞으시죠? 중대장도 아니고 대대장도 아니고! 대장님이 맞죠!?”

 

“흐에에엥. 진짜..진짜 장성급, 장성급이 오셨어. 그것도 인간님이..흐아아앙!”

 

 그래서인지 우리 동기 중에 누구 하나 보급짱 먹는 순간, 그 기수 전체가 혜택을 봤다. 물론 그녀석에게 미움받는 놈은 빼고. 그래. 보급병, 내가 알고 있던 최고의 꿀빨러들. 최고의 권력자들.

 

“방송이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갑자기 저희 후방 보급대대에 장성급, 그것도 인간님이 임관한다고 하시길래 파견 나온 녀석들의 장난인 줄 알았어요오..”

 

“요안나!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설명! 설명해!”

 

“..음. 할 말이 없네! 하하하하!”

 

“웃지만 말고! 이 애들 좀 말려봐!”

 

 근데, 왜 그 최강 보급병들이 지금 내 청바지를 붙잡고 두 눈을 글썽이며 날 올려다보는가. 왜 창고 안쪽에 진열된 컨테이너 사이로 내게는 익숙한 얼굴의 병사들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엉엉 울어 재끼는가.

 

‘이..이게 뭐야! 대체!’

 

 무언가 심상치 않다. 왼편의 요안나는 제 머리 위를 긁적일 뿐, 나와 시선조차 맞추려 들지 않았기에 나는 해답을 찾아 오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내 당황스러움을 읽은 금발의 소녀는 담담하게 제 손에 들린 책을 펼치며 날 올려다보았다.

 아 아니다. 애도 자세히 보니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앉아있다. 나는 최대한 간결하고 침착하게 그녀에게 딱 두 마디만 내뱉었다.

 

“아르망. 설명.”

 

“..네. 폐하. 지금부터 이 요안나 아일랜드에 만연한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대장님! 저희..저희 좀 도와주세요!”

 

“시..실키! 그만! 내 바지! 바지가 벗겨진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실키들의 악력에 벨트까지 쭉쭉 내려가려 하자 나는 억지로 바지춤을 힘껏 끌어올렸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실키던 안드바리던, 익스프레스건. 모든 보급계 바이오로이드들이 휑한 비축창고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씨..씨발. 어쩐지 여기 오기 전부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니!’

 

 이제는 아예 내 가슴께까지 올라오려는 실키들의 뺨을 밀어내며 나는 방금 내가 거쳐온 곳들에 대한 인상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래. 뭔가 이상했어! 젠장! 최후방인데 애들 눈이 죽어있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고!

 

‘사령관 이 새끼, 후방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해 먹은 거야!’

 

“라붕이 대장니이이임!”

 

“그..그래! 나..나 대장이다! 놔라! 놔! 대장님 바지를 놓으라고!”

 

“흐에에엥! 저흴 버리지 마세요! 제발요!”

 

“아..안 버린다! 내가 무슨 이유로 너흴..야! 잠깐!”

 

찌-이이익!

 

“-바지 찢어졌잖아아아아!”

 

 나는 그렇게 임관 첫날, 새로운 청바지 하나를 보급받았다. 씨발! 뭐냐고!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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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30번 플룻은 좀더 차근차근 진행해가면서 정제된 광기로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삭제함. 본 애들한테는 또 보게 될 거다.

그리고 왜 이번 편이 짧냐고 묻는다면, 졸려서. 졸려. 눈 감겨.

내일은 이거 안 올라옴. 다른 거 올려야 해. 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