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티타니아 복원 전 시점의 이야기임. 그래서 티타니아가 없는 건 고증임. 제조랑은 상관 없음. ㅠㅠ



오르카의 시간은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즐거운 일도, 괴로운 일도, 치열한 싸움도, 격렬한 사랑도 사령관의 몸과 마음에 자신이 존재했었던 것을 증명하는 증표를 새기고는 과거라는 이름의 물결이 되어 추억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하지만 지나가서 흘러버린 흐름이 있다면 눈앞에서 앞으로 닥쳐오는 물결도 있는 법. 사령관의 침실에서 사령관과 독대하고 있는 레아의 눈은 강렬한 결의를 품은 채 사령관에게 그렇게 달콤하지만은 않은 새로운 흐름이 닥쳐올 것을 예견하듯 빛나고 있었다.


"주인님. 제 말대로 티타니아의 복원을 연기해주시고 자매들을 위해 많이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려요."

"음. 지난번에 말했던 준비는 모두 끝냈니?"

"네. 적어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끝냈어요. 이제 저를 비롯한 페어리 모두는 하나로 뭉친 거나 마찬가지고, 티타니아가 힘들어하더라도 저희 모두가 노력하면 충분히 안정시킬 수 있을거에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역시 걱정이 심한 모양이네. 평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사실...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티타니아를 다시 복원시키지 않고 싶어요. 티타니아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통받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아이니까요. 하지만 주인님이 원하신다면...어쩔 수 없겠죠."

"나도 자료는 충분히 읽어보고 검토했지만...오르카의 사정은 그렇게 녹록치 않으니까. 너희들에게는 정말 미안해. 하지만 모두를 위해서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어. 그저 닥터와 너희들을 믿을 뿐이야."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는 레아와 그런 레아의 기분을 이해하면서도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령관. 지금 이 순간 둘에게 대화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실을 가리려 해도 결국 가면을 쓰고 평정을 가장하는 그녀와 그녀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물러설 수 없는 그가 있을 뿐.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침묵 속에서 서로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그저 침묵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침묵이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는 사령관은 적절한 선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휴우~ 무거운 이야기만 해서 뭐 하겠어? 자, 레아. 이거라도 한 잔 마시고 잠시 한 숨 돌리자. 막상 닥치고 나면 생각보다 잘 풀릴지도 모르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식은 맥주를 두 캔 가져와서 하나를 레아에게 밀어주는 사령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생존을 위한 사투에서 살아나온 몸. 아직 백전노장이라는 칭호는 이르겠지만 적어도 삶에서 전투를 떼어놓을 수 없는 현실에 이미 적응해버린 그는 짧은 평화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남자다. 어차피 곧 주사위는 던져질 예정, 자신과 레아가 우거지상으로 자리에 앉아있는다고 뭔가가 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조금이라도 이 순간을 즐기자는 마음이 소리없는 외침이 되어 사령관의 손에서 맥주캔을 타고 레아에게 전해졌다.


"어머나? 주인님도 차암~~ 이런 시간에 단 둘 뿐인데 분위기있게 와인이라도 주셔야죠~"

"뭐야, 평소에는 소녀 타령하면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건 좀 비겁하지 않아?"

"후후훗. 장난이에요. 잘 마실게요~"

 

레아 역시 페어리의 맏언니이자 요정여왕의 이름을 받은 지휘개체. 사령관에게는 못 미치지만 항상 자신을 따르는 자매들을 통솔하는 입장에서 사령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천진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사령관의 소리없는 위로를 장난스럽게 받아주는 레아. 비록 억지스럽게 이어진 미소였지만 적어도 사령관의 침실은 방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로 변해갔다. 그리고 사령관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흐르기 시작한 흐름을 가속시키기 위해 화끈하게 자신을 내던졌다.


"그건 그렇고, 페어리 자매들은 어떻게 전보다 사이가 좋아진 거야? 내가 몇 가지를 돕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레아의 아이디어잖아? 내가 모르는 요령 같은게 있었어?"

"어머나, 주인님 모르는 척 하시기에요? 리제에게 변화를 불러일으킨 건 전적으로 주인님이 해내신 거잖아요. 어휴, 정말. 저는 리제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실 줄은 상상도 못했다니까요."

"리제야 뭐...사실 충격요법이 조금 필요하기는 했지? 다프네도 별달리 연기를 지시한 것도 아닌데 내 생각대로 잘 움직여줘서 편했어."

"주인님은 짐승. 처음인 아이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대하면 어떻게 해요? 리제가 주인님 공포증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방법이었다구요."

"나도 좀 심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서 다프네에게 도와달라고 한 거잖아. 실제로 잘 풀리기도 했고 말이지. 그리고 리제가 날 무서워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겠어?"

"으음...생각해보니...그런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주인님이 도와주신 덕에 제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니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감사 인사를 그냥 말로 끝낼 셈은 아니지? 흠, 본격적인 감사 인사는 이따가 침대 위에서 받기로 하고, 레아가 세운 계획이 뭐였는지 천천히 설명해줄 수 있어? 사실 그게 굉장히 궁금했거든."


리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전적으로 사령관에게 짐을 안긴 것, 그리고 리제에게 더없는 행복을 느끼게 만들어서 그녀를 극적으로 변화시켜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레아의 말을 사령관은 능글맞게 받아넘기며 자신이 정말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후후훗~ 응큼한 주인님~ 알겠어요~ 감사 인사는 천천히 몸으로 풀어가도록 할게요. 아...제 계획이요? 거창한 건 아니었어요. 좋은 결과가 나온 건 자매들 모두가 각각의 위치에서 노력한 결과인걸요. 저는 뒤에서 약간 손을 쓴 것 뿐이랍니다."

"에이. 그렇게 빼지 말고, 원래 윗사람일수록 아랫사람들 돌봐주는 방법을 공유해야 하지 않겠어?"

"후훗.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조금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시작해볼까요? 사실...동생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의 핵심을 해결하는게 가장 중요했어요. 우선은 리제가 변화하지 않으면 모두가 사이좋아지는 건 힘든 일이었고, 리제는 주인님의 사랑이 자신이 혼자서 독차지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충분히 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도움을 요청드렸죠. 거기까지는 알고 계시죠?"

"응. 그건 쉽게 짐작할 수 있지. 하지만 다른 자매들은 어땠어?"

"리제는 조금 다른 케이스지만 다른 동생들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서로에게 제공할 수 있는 상태였어요. 먼저, 다프네는 남들을 돕는 걸 좋아하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너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서 거리를 좁히는 걸 어려워 했답니다. 그리고 스스로는 티를 별로 안 내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남들에게 사랑받는 것에 목말라있었죠. 아쿠아와 친해지는 건 방법을 조금 달리해야겠지만, 드리아드와 조금 더 친해질 여유가 생긴다면 다프네에게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프네에게는 동생들을 챙겨줄 여유와 동생들과 더욱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죠." 


사령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자매들을 분석하고 있는 레아에게 마음 속으로 감탄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비록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따르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이해하고 챙겨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스스로를 다시 한 번 채찍질한 사령관은 티내지 않고 다시 레아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오. 그건 좀 알 것 같아. 내가 리제를 변화시키면서 다프네에게 영향이 컸을 것 같은데?"

"후훗. 주인님 말씀이 맞아요. 그 다음으로 드리아드의 부정적인 성격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 모두가 자신을 떠나더라도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않을 누군가가 있다는 강한 믿음을 주어야 했어요. 평소에는 주인님께 의존하지만 저는 약간의 계기만 만들어주면 자매들끼리 충분히 드리아드를 안심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정확히는, 여유가 생긴 다프네가 그 역할을 충분히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으음...하지만 실제로는 주인님이 안 계셨으면 해결이 안 되었을테니 좀 잘못된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그 정도 쯤이야. 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즐긴 것 뿐인걸.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린 건 페어리 자매들이 애썼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뻐요. 다른 자매들도 주인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많이 기뻐했을 거에요."

"에이, 공치사는 거기까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어디보자. 드리아드가 다른 자매들과 친해지는 이야기까지 했으니...드리아드와 친해진 다프네는 드리아드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겠네?"

"정확하시네요. 그렇게 한 번만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드리아드는 충분히 안정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다프네 역시 긍정적인 피드백을 계속 받을 수 있으니 둘 사이가 다시 멀어질 가능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구요."


자매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진지한 표정을 짓는 레아. 당연한 일이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결국 자매로서가 아니라 요정 여왕으로서 배후에서 자매들을 조종해서 억지로 친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설령 좋은 의도로 한 일이라도 마음 착한 레아에게는 자책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령관은 이 쯤에서 너무 심각한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가볍게 레아를 흔들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개괄적인 설명이 아니라 어서 세세한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어서 레아의 시선을 돌리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호오. 이번 건 좀 정치적인 느낌이 드는데? 나중에 우리 레아 여왕님이 정치의 여왕이 되는게 아닌가 몰라?"

"주인니임~ 더 놀리시면 화낼거에요~"

"아하하. 알겠어, 알겠어. 장난 안 칠게. 계속 해줘." 

"어휴...정말. 주인님은 가끔 장난꾸러기 같다니까요. 마지막으로 아쿠아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열등감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언니들을 멀리하고는 했어요. 정확히는 리제와 함께 있는 것은 무서워하고, 다프네를 자신도 모르게 질투해서 멀리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드리아드와는 상성이 최악이었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다른 페어리 자매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걸 강하게 실감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어요. 아쿠아의 문제는 사실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운이 무척 좋았어요. 안드바리 양에게는 감사해야겠네요."

"호오. 그건 꽤 어려운 일이잖아? 자각하지 못하는 문제점이라니, 해결하는게 엄청 어려웠을 것 같은데? 말해봐. 동생들을 어떻게 조종한거야?"

"아이 참, 주인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 같잖아요. 저는 그냥 계기를 만들어주고 자매들을 믿어준 것 뿐이에요. 사실 제 계획이 좋았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운이 좋았죠."

"흐음~우리 레아 여왕님의 용인술이 점점 궁금해지는데?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줄래?"

"기왕 말씀드리기로 했으니까...가장 처음 부분부터 이야기할게요."


가벼운 장난을 치는 사령관의 말에 대꾸하며 잠시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는지 편안한 미소를 띄운 레아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고 사령관은 그런 레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레아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된 시점은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었다. 드리아드의 꾀병 사건, 그것이 바로 레아가 페어리 내부의 불안요소를 자각하게 만든 사건이자 동시에 레아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만드는 마지막 퍼즐이었다. 이야기는 드리아드가 꾀병으로 드러눕고, 레아가 사령관에게 티타니아의 복원에 대한 재고를 부탁하는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다프네의 제안에 의해 닥터와 1:1로 정밀 검진을 받게 된 드리아드는 결국 지금까지의 발열이 꾀병이라는 사실을 닥터에게 들키게 되었다. 출격 횟수가 워낙 많았으니 꾀를 부릴법도 하다고 생각하는 닥터의 생각도 모른 채 주인님께 이 사실이 알려지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공포에 떨던 드리아드. 점점 가속하는 공포에 질려서 폭주할 뻔한 드리아드를 구원해준 것은 혹시나 싶어서 정밀검사 장소에 들렀던 레아였다. 우연히 상황을 파악하게 된 레아는 적극적으로 드리아드를 변호하며 닥터를 설득했고, 레아의 언변과 적절한 거래에 닥터는 다음에 사령관과 레아가 함께 밤을 보낼 기회가 있을 때 같이 참여하는 것을 댓가로 드리아드의 발열의 원인은 과도한 출격에 의한 스트레스 및 칼로리 섭취 부족이라는 형태로 사령관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사실 100% 틀린 말도 아니었다. 드리아드가 스스로의 발열상태를 만들어낸 방법은 끝없이 내면의 불안감을 되새기는 동시에 식사량을 줄이는 방식이었으니 '발열의 원인'에 대해서라면 닥터의 보고서는 0.1%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내용이 맞았다. 단지 조금 더 안쪽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드리아드? 잠시 이야기 괜찮겠어요?"

"레아 언니. 오늘 일은 주인님께는 제발 비밀로..."

"걱정 말아요. 그러려고 닥터 양과 이야기 한 거니까요. 그보다도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어요?"

"네..? 꾀병의 이유라면..."

"아, 그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해하니까요. 제가 묻고 싶은 건 좀 더 근본적인 거랍니다."

"근본적인...거요?"

"네. 주인님께 사랑받고 싶은 건 모두가 마찬가지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드리아드는 왜 자매들에게 더 의지하지 않는 건가요? 같은 페어리 자매들은 드리아드를 아낀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요?"


잠시 드리아드를 멈춰세우고 대화를 시도한 레아는 적당히 둘러서 드리아드를 타이를 생각이었다. 사령관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이라는게 있지 않은가? 특히 자매끼리 힘을 합친다면 사령관의 애정을 받을 기회도 늘어날 터. 모두가 노력해서 정정당당하게 애정을 쟁취하자는 말 등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대화를 이어나가려던 레아는 이어지는 드리아드의 대답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사실대로.....말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저는 사적으로는 드리아드의 큰언니이기도 하지만 공적으로는 페어리 전체를 이끄는 역할이기도 하답니다. 드리아드가 솔직히 말해주면 문제를 해결하는 걸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을 거에요."

"리제 언니는...주인님이 얽히면 독점욕과 질투심이 폭발한다는 건 잘 아실 거라고 믿어요."

"네.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다프네와 아쿠아는..."

"다프네 언니도, 항상 리제 언니를 챙기느라 저는 뒷전이잖아요. 리제 언니와 저에게 동시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틀림없이 리제 언니를 위해 행동할 거에요."

"그럴리가요. 다프네는 항상 모두를 아끼잖아요."

"저를 돌보는 와중에도 리제 언니가 다른 부대의 분들과 말싸움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리제 언니에게 갔던 걸 잊으셨나요?"

"으음...그건...리제가 갑자기 폭주할까봐......휴유...하긴...드리아드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제가 리제를 잘 챙기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해주세요. 하지만 아쿠아는요?"

"아쿠아가 자매들보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건 언니도 잘 아시지 않나요?"


여기까지 드리아드의 말을 들은 레아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자신도 페어리와 항상 붙어서 그녀들을 아끼기보다는 비록 전반적인 페어리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서라는 핑계가 섞여있기는 하지만 다른 부대의 인원들과 더욱 자주 함께하면서 그녀들과 어울리고는 했으니까. 아쿠아에 대한 드리아드의 평가는 그녀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흠흠...알겠어요. 미안해요. 드리아드. 저라도 좀 더 드리아드를 챙겨줬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무리해서 절 챙겨주시려고 하시지 않아도 돼요. 그냥......제가 잘 하면 되는 거니까......"

"드리아드. 저는 드리아드를 탓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에요. 외롭고 불안할 때는 적어도 혼자 괴로워하지 말고 자매들에게 이야기를 해줘요. 자매들은 드리아드가 생각하는 것보다 드리아드를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알겠어요...앞으로는...주의할게요."


알았다는 대답을 돌려주면서도 눈 속 깊은 곳에서는 '큰언니조차 페어리 자매보다는 남들을 더 챙기는 경우가 많잖아요?' 라는 물음을 표하는 드리아드. 그 것이 레아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에서 우러난 착각인지 드리아드의 진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레아는 지금 와서야 자신의 자매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동시에 그 문제의 원인이 상당 부분 자신에게서 기인한 것이라는 책임감을 느꼈다. 페어리의 여왕에 어울리는 포커 페이스로 드리아드에게 자신의 정신적 동요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꽉 쥐여진 주먹 안을 채우는 땀을 느끼며 레아는 티타니아의 복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고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드리아드를 떠나보내고 레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신이 직접적으로 나서봐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로 페어리 자매들은 레아의 말에 순순히 따른다. 설령 그 리제조차도, 순간 폭발할 때는 모든 걸 잊지만 적어도 제정신일 때는 자신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매 사이의 관계가 이렇게 비틀릴 때까지 레아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 레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해봐야 앙금이 남은 채 겉으로만 화기애애한 결과가 나올 것은 뻔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일정 부분은 사령관에게 도움을 청하고, 무엇보다도 자매들이 레아나 사령관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일을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레아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 시점까지의 레아는 몰랐다. 드리아드가 꾀병을 피운 이유를 좀 더 자세히 들어뒀어야 했다는 것을. 그리고 드리아드가 '솔직히'라고 표현했던 것이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불만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일단 여기에서 이야기를 잠시 멈춘 레아와 그를 차분하게 듣던 사령관. 사령관은 기억을 되새기며 이제야 이해가 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타니아의 복원을 반대하던 레아가 바로 다음 날 티타니아의 복원을 조금만 연기하고 페어리 자매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던 것에 대한 의문이 이제야 풀린 것이다.


"흐음, 어쩐지. 티타니아의 복원 문제로 이야기를 하자마자 다시 돌아오길래 뭔가 있다고는 생각했었지."

"후훗. 사실 제가 생각했던 해결책은 조금 불완전했어요. 주인님께서 리제를 제 상상보다 훨씬 극적으로 변화시켜주신 덕에 일이 쉬웠죠."

"칭찬은 계속 들어도 질리지 않지만, 지금은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한 걸? 이제 왜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이해했고 본격적으로 방법에 대해서 알려줄 차례인가?"

"아이 참~ 급하시긴~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사령관의 재촉에 레아는 우아하게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레아의 목울대를 타고 맥주가 넘어가는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사령관은 당장 레아를 침대에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느꼈으나 지금은 레아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과 자신이 노리는 노림수를 위해서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레아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길지 않은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 스카이나이츠의 아이돌 활동이 끝난 뒤, 오르카에서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여러 가지 변화들이 있었다. 많은 대원들이 비록 작은 한 걸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변화를 추구하며 한 발자국씩 내딛기 시작했고 그런 작은 시도들이 모여서 오르카는 더욱 활기차고 떠들석한 분위기로 가득차갔다. 페어리 역시 오르카를 감싼 변화의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리제가 사령관과 하룻밤을 보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이었고, 사령관에 의해 몸도 마음도 녹아내려버린 리제의 변화는 페어리 전체에게 극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리제가 항상 행복에 취해있는 탓에 다른 오르카의 대원들에 대한 공격성이 줄어들자 리제가 벌이는 사고를 수습하던 다프네에게 여유가 생겼고, 업무와 리제 챙기기에 바빠서 드리아드와 아쿠아에게 소홀했던 점이 미안하던 다프네가 둘에게 좀 더 많이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드리아드, 오늘 간식은 먹었니?"

"아뇨. 언니. 너무 많이 먹으면 살 찔 것 같아서..."

"그러면 안 돼. 넌 몸도 약한데 많이 먹어야지. 지난 번에 아팠던 것도 식사량이 부족한게 원인이었다고 닥터 양에게 들었어. 부식으로 과일을 좀 챙겨왔는데 사과랑 참외 중에 어떤 걸 줄까? 언니가 깎아줄게."

"아...아뇨...약간 피곤해서 소화가 잘 안 될 것 같아서요..."

"어머나, 피곤하니? 하긴, 오늘도 출격 다녀왔었지.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 피곤하면 좀 누울래? 숙소 불 꺼줄까?"

"아하하하......언니...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아냐. 평소에 드리아드 네가 그렇게 무리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내가 미안한걸.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불편한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알겠지?"

"아...으...그게......으음.....고마워요. 언니..."


여유가 생긴 다프네가 가장 먼저 챙기기 시작한 것은 드리아드였다. 원인 불명의 발열로 인해 한 동안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자매. 당시에 드리아드의 간호를 주로 담당했음에도 드리아드가 도통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것에 자책감을 가지고 있던 다프네는 두 번 다시는 드리아드가 앓아눕게 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드리아드에게 부담이 갈 만한 모든 것을 자신이 먼저 처리해가기 시작했다. 업무의 차이로 인해 드리아드가 출격하는 것까지는 대신해주지 못하더라도 페어리 숙소에서 서로가 나누어 담당하고 있던 일들을 대부분 자신이 떠맡듯이 맡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다프네의 생각과는 달리 드리아드는 오히려 이런 다프네의 호의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꾀병을 핑계로 누워있는 동안 다프네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으며 미안한 감정이 쌓이기도 했고, 레아와 대화하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프네가 더욱 살갑게 자신을 챙겨주었기 때문에 레아가 다프네에게 뭔가 말을 했나 하는 불안감이 겹쳐서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따스한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음에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드리아드를 점점 괴롭혀갔다.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드리아드와 아직 드리아드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헌신적으로 드리아드를 챙기는 다프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엇갈린 선의는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채 공허하게 흘러갈 뿐이었고 다프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는 다프네의 의도와는 다르게 드리아드의 스트레스를 더욱 성장시켜가고 있었다. 드리아드가 단순히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넘어서 피해망상에 가까운 증세로 발전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결국 폭발해버린 건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후후훗~ 다프네~ 어때? 이번에 향수를 조금 바꿔봤는데 괜찮지?"

"어머? 라벤더 향으로 바꾸셨네요? 조금 강한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무슨 일 있으셨어요?"

"흥, 해추...흠...리리스가 자꾸 자기 향수를 주인님에게 묻히려고 들잖아. 나도 질 수는 없으니까 좀 더 강한 향으로 주인님을 내 향기로 감싸고 싶어서..."


사령관과 불타는 밤을, 정확히는 다프네와 셋이서 함께 보낸 뒤로 급격히 다프네에게 살가워진 리제는 사령관과의 관계 진전을 위해 다프네와 자주 대화하고는 했다. '그 날'의 충격요법 때문에 자기 혼자서 사령관을 독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뼛속까지 깨달은 리제는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고, 그 첫 발자국으로 남에 대한 질투를 줄이는 한 편 다프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면서 보다 사령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사령관을 독차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으음~ 리리스 양을 너무 의식하시는 건 오히려 역효과에요. 주인님은 원래 언니가 쓰던 향에 익숙하시고 좋아하시기도 하니까 기존의 향이 좋을 것 같아요."

"응? 그럴까? 그보다......주인님이 원래 내 향기를 좋아하신다고.....말하신 적 있어?"

"아...그...지난 번에....언니가 먼저 기절하셨을 때........그.....저랑...언니 둘 다 향이 좋다고.........."

"후후후후후후훗~ 주인님께서 좋아하신다고 말하셨다면 당연히 원래 향을 써야지. 고마워. 다프네. 네가 아니었다면 괜히 향수를 바꿔서 주인님을 실망시킬 뻔 했어."


출격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누가 문단속을 제대로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린 문틈 사이로 리제와 다프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친 몸으로 숙소에 들어가려던 드리아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 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도......나도 주인님께 사랑받고 싶었는데......리제 언니도, 다프네 언니도 말로만 나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주인님께 사랑받는 걸 방해하기만 하고......! 자기들끼리만 주인님의 사랑을 받다니 치사해!'


실제로 그녀가 내세웠던 꾀병 작전으로는 사령관과 찐한 하룻밤을 즐기기는 무리였겠지만 지치고 스트레스에 마음이 닳아버린 드리아드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그녀를 괴롭혔던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감정. 시시각각으로 그녀를 덮쳐오는 떼어놓을 수 없는 절망감을 '친애하는 척'하는 자매들이 후벼파듯이 자극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나마 마지막 이성을 긁어모아 폭발하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숙소에 발을 들이는 드리아드. 그런 드리아드의 속도 모른 채 그녀를 발견한 다프네가 환한 미소로 드리아드를 맞이했다.


"드리아드 돌아왔니? 많이 힘들었지? 잠시만 기다려, 마실 것 가져다줄게."

"어. 왔네. 고생 많았어."

"아뇨. 됐어요."


살갑게 드리아드를 맞아주는 다프네와 최근 들어서 자매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색하게나마 말을 건네는 리제. 하지만 드리아드에게 이미 그녀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적에 불과했다. 가시돋친 말투로 쏘듯이 다프네의 제안을 거절한 드리아드는 억지로 두 사람의 눈을 피하며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전투복을 벗어서 자신의 세탁물 바구니에 넣으려던 드리아드는 어제 입었던 전투복이 세탁물 바구니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히 내일쯤 세탁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어제는 따로 세탁을 안 했을텐데?


"아. 오늘 세탁기 사용에 좀 여유가 있다고 해서 세탁할 옷들은 빨아서 잘 정리해뒀어.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옷은 옷장에 넣어뒀으니 신경쓰지 말고 편히 쉬어도 돼."


객관적으로 들었을 때 다프네의 어투는 자상한데다 자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유를 모두 잃어버린 드리아드에게는 다프네의 말이 마치 타박처럼 들렸다. 실제로는 입에 담지도 않은 '네가 그렇게 지저분하니 주인님께 애정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니겠니?' 같은 환청까지 섞여서 말이다. 드리아드는 눈을 들어 적의가 담긴 눈으로 다프네를 노려보며 씹어뱉듯이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어....어...? 미....미안해..."


영문 모를 드리아드의 반응에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는 다프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드리아드의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사과하는 다프네였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리제의 반응은 달랐다. 자신이 보기에도 최근 다프네의 드리아드 돌보기는 극진하다는 표현을 붙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자신도 자매들을 잘 대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지만 위아래도 모르는 자매의 건방짐을 용인해주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이 햇....흠흠.....드리아드 너! 널 위해서 애쓰는 다프네에게 무슨 건방진 소리를 하는거야! 당장 사과하지 못해?!"


잠시 레아에게 혼났을 때의 기억을 되새긴 리제는 요정 여왕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언니의 위엄있는 모습을 따라하듯이 드리아드에게 쓴소리를 했다. 레아가 위엄있게 한 마디를 하면 자신도 당장은 화가 나더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드리아드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프네에게 사과할테고, 다프네도 자신을 더욱 우러러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는 우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문제라면 요정 여왕이 아닌 리제의 말은 드리아드에게 강제력이 없다는 점과 지금의 드리아드는 평소와는 다르게 한계를 넘겨서 과충전한 배터리와도 같은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리제 언니는 끼어들지 마요! 어차피 겉으로만 자매를 위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생각뿐이잖아요!"


자신의 꾀병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사령관과 관계를 가지는데 성공한 리제. 진실이야 어쨌든 드리아드의 안에서는 리제는 자신이 받을 사랑을 도둑질해간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남아있었고, 리제가 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들도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닌 주인님께 점수를 따기 위한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짜증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 속에 쌓여있던 감정의 일부를 토해낸 드리아드. 하지만 자매싸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뭐야?! 이...해충...으으...드리아드! 기껏 잘 대해주려고 했더니 날 뭘로 보고! 그 말 당장 취소해!"

"제 말이 틀렸어요? 예전에는 자매들은 신경도 안 쓰더니, 주인님께 완전히 빠져버린 이후로 헬렐레 하면서 그제서야 자매들을 위하는 척~ 이제와서 착한 척 해봐야 언니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거든요! 주인님도 그런 언니에게는 금방 질려버릴 걸요?"

"어...언니, 드리아드. 둘 다 말이 심해요. 제발 진정하고......"

"뭐야! 이 햇충! 감히 나와 주인님의 사랑을 모욕해! 무기를 들어! 지금 당장 죽여버리겠어!"

"언니! 안돼요! 진정하세요! 드리아드! 제발 그만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드리아드의 말에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아서 자신의 무기를 찾으러 가려는 리제와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온 몸으로 매달려 둘 사이를 중재하려는 다프네. 하지만 드리아드의 폭발은 시작에 불과했다. 리제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지금까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드리아드는 자신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던 모든 것을 일거에 토해내려 하고 있었다.


"레아 언니도! 리제 언니도! 다프네 언니도! 말로는 저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저 따위는 주인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발판으로 쓸 뿐이잖아요! 다 알고 있어요! 언니들 모두 주인님과 밤을 보낸 것 말이에요! 자기들끼리만 주인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어때요?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 같나요? 주인님과 함께할 때는 제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 하는 주제에! 그러면서도 제 앞에서는 저를 아끼는 척 하다니 가증스러워요. 언니들이 정말로 절 위한다면 제가 주인님께 사랑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게 아닌가요? 탈론허브에 언니들 영상이 올라온 거 보기는 했어요? 리제 언니는 천박한 암캐처럼 주인님께 들러붙어서 사랑해달라며 꼬리나 치고 있고, 다프네 언니도 주인님이 한 마디만 하면 못 이기는 척 주인님을 물고 빠느라 정신이 없죠! 그 순간에 제 존재에 대해 단 1초라도 생각이나 해봤나요? 언니들이 정말로 저를 위한다면 제가 제일 필요로 하는 걸 조금이라도 나누어달란 말이에요! 쓸데없이 절 위하는 척 힘이나 빼지 말고요!"

"......너.......알고....있었어.......?!"

"...드...드리아드..."


드리아드의 울분섞인 울부짖음에 리제도 한 순간 머리가 식어버리며 그대로 굳어버렸고 다프네 역시 리제에게 매달린 채로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 채 말을 아꼈다. 아직 사령관과 밤을 보내지 못한 드리아드에게 밤일에 대한 것을 들켰다는 충격도 있지만...실제로 자신들에게 기회가 왔을 때 드리아드를 챙겨주지 못했던 사실이 그녀들의 가슴을 찔러왔다. 사령관과 함께하는 순간 머리속에서 사령관을 제외한 모든 게 날아가버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 감각을 맛보지 못한 드리아드는 전혀 납득하지 못할 것임이 뻔했다. 게다가 정말로 자신들이 스스로가 사랑받는 것을 원하는 만큼 절실히 드리아드를 위했다면...드리아드를 먼저 챙겨서 사령관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있을 터, 천천히 다시 생각해봐도 이 부분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전투에 쓸모가 있어서 남아있지만 저보다 강한 자매들이 많이 나오면 저는 잊혀지고 쓰레기처럼 버려지겠죠. 주인님께 사랑받지도 못하는데 살아서 뭐하겠어요. 리제 언니. 저는 대항할 생각이 없으니 죽여주세요. 어서요."

"......미안.......내가 말이 조금 심했......"


불같이 화낸 게 언제냐는 듯이 완전히 절망에 찬 어조로 죽여달라는 말을 입에 담는 드리아드. 찬물을 맞은 것 같이 굳어버렸던 리제도 지금의 드리아드의 상태는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일단은 화를 풀어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화를 달래고 천천히 드리아드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방법을 찾자.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리제는 먼저 굽히기로 결정했다. 과거의 리제라면 선택할 가능성이 제로인 행동. 그 선택만으로도 리제가 과거보다 훨씬 드리아드를 챙겨주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임이 드러났지만 이미 선을 넘어 스스로를 불태우기 시작한 드리아드의 화는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의 파멸을 바라듯이 거세게 폭발했다.


"그딴 사과 같은 거 필요없으니 죽여달라고!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죽여! 죽이란 말야!"

".........."

"드리아드...미안해...미안해..."


이번에는 반대로 리제에게 거칠게 다가가 멱살을 잡는 드리아드와 광기마저 서린 드리아드의 눈을 맞받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리제. 그리고 드리아드에게 달라붙어 사과하면서도 드리아드를 반드시 말려야겠다고 마음먹은 다프네.


"왜! 나같은 쓰레기는 혼자 조용히 죽어버리는게 좋겠어? 손을 더럽힐 가치도 없다는 거야?! 어서 죽여! 죽여달란 말야! 죽..........으으응............"

"드리아드...정말 미안해...네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일단 잠시 자고 일어나렴...언니들이...무슨 수를 써서든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드리아드의 목소리 외에는 죽은 듯이 고요한 페어리의 숙소. 그 소란스러운 침묵을 깨듯이 초록빛의 빛무리가 드리아드의 목 근처로 향했고 격정에 휩싸인 드리아드는 전혀 반응하지 못한 채 다프네의 마이크로 봇이 자신에게 수면 효과가 있는 진정제를 주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감겨오는 눈과 스르르 무너지는 몸. 의식을 잃은 드리아드의 몸을 받쳐 침대에 눕히는 다프네를 바라보며 리제는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프네. 이제 어쩌지...? 지금은 재우는게 최선이었지만...다시 깨어나면 더 화낼텐데 그 때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언니...사실...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저와 함께 컴패니언 숙소에 가지 않겠어요? 언니에게도 부탁드릴게 있어요."

"컴패니언? 리리스를 보려고?"

"언니는 리리스 양에게 내일 주인님의 스케쥴에 대해 물어봐주세요. 저는......하치코 양을 만나야 할 것 같아요."

"강아지? 음...뭔지는 물어보지 않을게.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테니까. 자, 어서 가자."

"고마워요. 언니."


긴급사태를 맞이해 빠르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은 두 자매는 서둘러 컴패니언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문을 노크하자 리리스가 나와서 싫지 않은 표정으로 왜 이런 시간에 와서 쉬는 걸 방해하냐며 리제에게 틱틱거렸고 리제 역시 악의 없는 표정으로 지금 시간부터 퍼져있으면 돼지가 될 거라고 리리스를 도발했다. 겉보기에는 사이가 나빠보이지만 그것이 두 사람만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다프네는 조용히 목례로 인사하며 리제와 자신을 안내하는 리리스의 뒤를 따랐다. 금새 현황 토크부터 시작해서 둘 만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한 리리스와 리제를 뒤로 하고 컴패니언 숙소를 둘러본 다프네는 금방 하치코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치코 양,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다프네 언니~ 오랜만이에요~ 하치코는 지난 번 이후로 크게 다치는 일도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다프네 언니도 잘 지냈나요?"

"네. 하치코 양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네요. 사실...오늘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응? 하치코에게 말인가요? 뭐든지 말해주세요~ 하치코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힘낼게요~"


사실 다프네가 하치코를 찾은 이유는 알고 보면 간단했다. 몇 달 전, 하치코는 전투에서 크게 다쳐서 수복실 신세를 졌었다. 거의 반신이 날아가버릴만큼 위험한 상태였던 그녀는 오르카의 의료시설과 다프네의 헌신적인 간호 덕분에 한 달 가까이 정양한 뒤에 완벽하게 나아서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에 다프네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 하치코는 신년 행사 때 컴패니언이 받았던 사령관과의 일일 데이트권을 보답이라는 명목으로 다프네에게 주었지만, 다프네는 하치코를 간호한 건 당연한 일이니 이런 보답을 받는 것은 과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막무가내로 데이트권을 넘기는 하치코의 기세에 밀린 다프네가 데이트권을 받으며 일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정작 다프네는 언젠가 하치코에게 돌려줄 생각으로 데이트권을 고이 간직해둔 채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드리아드와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프네에게 남은 비장의 한 수는 데이트권 뿐.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하치코에게 데이트권을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구하기 위해 그녀를 찾은 것이다.


"그...지난 번에 저에게 주셨던 데이트권 있잖아요..."

"아! 그거요? 주인님과 데이트 재미있게 하셨어요? 우웅~ 저도 데이트권은 그 때 드린 거 말고는 없는데...어쩌지....?"

"데이트권을 추가로 부탁드리려는 게 아니라......실은...그 때 주신 데이트권을 하치코 양에게 다시 돌려드릴 생각이었는데...저희 자매를 위해서 사용하고 싶어져서...죄송하지만 제가 써도 될까요?"

"웅? 아직도 안 쓰고 계셨어요? 헤헤헷. 그 데이트권은 하치코가 다프네 언니에게 주고 싶은 고마운 마음을 듬뿍 담아서 드린 거에요. 그러니까 하치코에게 다시 돌려주시면 오히려 실망할거에요! 부디 다프네 언니가 필요로 하는 곳에 써주세요~ 그리고 저희 컴패니언은 데이트권이 아니라도 주인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으니까요~"

"아...하치코 양,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신...다음에 제가 하치코 양을 위해 좋은 선물을 준비해 올게요"

"후후훗~ 다프네 언니가 기뻐하면 하치코도 기뻐요~ 하지만 너무 부담가지면 싫어요~ 그냥 하치코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부담없이 써주세요~"


다프네가 아직도 데이트권을 사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걸 돌려줄 생각이었다는 말을 듣고는 귀가 축 쳐졌던 하치코지만 자신의 말을 듣고 크게 안심하며 고마워하는 다프네의 미소를 보자 기운을 차린 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미소띈 얼굴 그대로 다프네의 품으로 다가가 다프네를 꼬옥 끌어안는 하치코.


"어머...하치코 양? 갑자기 왜...?"

"다프네 언니, 오늘은 표정이 조금 어두워보여요. 하치코가 아프고 힘들 때 다프네 언니가 안아줬던 거 기억나세요? 그 때 하치코는 정말 기쁘고 행복했어요! 그래서 하치코도 다프네 언니를 기운나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하치코 양...정말 고마워요. 사실...오늘 조금 힘든 일이 있었는데...하치코 양 덕분에 행복해지는 것 같네요. 저도 힘낼게요. 하치코 양이 힘냈던 것 처럼요."

"헤헤헤~ 아, 오늘 놀러 오셨으니 미트파이 드실래요? 다프네 언니가 놀러와서 하치코는 너무너무 기뻐요~"

"후후훗~ 조금만 먹을게요. 사실 리제 언니와 함께 금방 숙소로 돌아가봐야 해서 오늘은 오래 못 있거든요. 다음 번에도 놀러와도 될까요?"

"다프네 언니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리리스 언니도 리제 언니가 놀러오면 기뻐하니까 함께 놀러오세요~"


따스한 하치코의 포옹에 자신의 가슴 속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감정들이 조금씩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정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미소로 답하는 다프네. 하치코에게 받은 미트파이 한 조각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면서 하치코와 작별인사를 마치고 리제에게 향하던 다프네는 불현듯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머......내가......드리아드나 아쿠아를 마지막으로 안아준 적이 언제였지...? 수복실을 이용하는 환자 분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끌어안고 위로해주고 싶었었는데...정작 자매들에게는 무심했나봐......나도 언니 실격이구나...'

'아냐.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적어도 지금 깨달았으니까, 앞으로 자매들을 더 잘 대해주면 되는 거야. 우리는 자매니까...조금쯤 서먹해지더라도 내가 노력하면 더욱 사이좋아질 수 있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힘내자.'


일순간 씁쓸한 표정이 얼굴에 감돌던 다프네였지만 하치코에게 받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스스로를 북돋우며 의지어린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마침 리제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중이던 리리스가 그런 다프네의 모습을 보고는 리제에게 말을 건넸다.


"흥, 너희 청순비치 동생은 뭔가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인데. 우리 귀여운 강아지에게 도움을 받고도 실패하면 실망할거야."

"우리 사랑스러운 다프네가 행동에 나섰으니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쓸데 없는 걱정은 필요없어."

"헤에. 주인님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많이 성장했네? 동생들을 믿어줄 줄도 알게 되고 말야."

"난 원래부터 다프네는 믿고 있었거든? 여유부리고 있다가는 우리 자매들이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테니 긴장하도록 해."

"푸핫. 그 실력으로? 너 주인님이랑 하는 거 봤는데 완전 코미디가 따로 없더라. 너무 웃겨서 쓰러질 뻔..."

"야! 그 때는 처음이라 당황한 것 뿐이거든! 두고 봐! 나중에 주인님이 나한테 푹 빠져서 너는 기억도 못 하게 될 테니까!"

"아아~ 알겠어. 그 날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하고 있을게. 뭐, 그 전에 내가 주인님을 뇌쇄해버릴지도 모르지만 네가 약해빠진게 문제인 걸 어쩌겠니~"


제352회 리리스와 리제의 투닥거림은 리리스의 판정승으로 끝난 듯 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투덜대던 리제는 목례하는 다프네의 인사에 맞춰 기어가는 목소리로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는 리리스의 따스한 미소를 뒤로하고 다프네와 함께 컴패니언의 숙소에서 나와 수복실로 향했다. 리리스를 통해서 들은 사령관의 내일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한 리제는 이제 다프네가 이야기할 차례라는 듯이 다프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다프네는 그런 리제의 의도를 눈치챈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저녁식사 이후로 주인님의 일정이 비어있다니 다행이네요. 사실...저에게는 하치코 양에게 받은 비장의 카드가 있답니다."

"이...이건......설마......!"


수복실에 있는 다프네의 물건들을 보관하는 공간. 그 곳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보관되어있던 작은 상자를 열자 오르카의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탐내는 바로 그 물건이 리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1:1 데이트권, 사령관은 어지간하면 밤일은 신청하는 족족 받아주지만 워낙 바쁜 터라 무드 있는 데이트를 하는 것은 사령관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지휘관급에게도 요원한 일이다. 비록 신년 행사로 몇 개의 데이트권이 뿌려진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 데이트권의 가치가 감소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니, 오히려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은 기대도 할 수 없는 것을 적어도 잡을 수는 있는 거리까지 당겨오는, 그야말로 지고의 가치를 지니는 마법의 열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제는 다프네가 이 데이트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나 하치코가 다프네에게 데이트권을 넘겼다는 사실보다도 다프네가 드리아드를 위해 데이트권을 포기할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율했다. 과연 데이트권이 자신의 것이었다면 드리아드를 위해 포기할 수 있을까?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당당하게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리제는 존경심 반, 대견함 반이 섞인 눈으로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너...정말로 드리아드를 위해 뭐든지 다 할 생각이구나..."

"이걸로 부족할지도 모르지만.....드리아드가 행복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이걸로도 행복해지지 못하면 그건 주인님에 대한 배신이야. 드리아드가 그렇게 나오면 자매고 뭐고 없어. 감히 주인님의 사랑을 받고도 불행을 입에 담아? 절대 용서 못해."

"후훗...언니 말이 맞네요. 그럼 지금부터는 드리아드가 최고의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보조할 방법을 생각해보죠."

"마침 오르카가 정박해있는 지금이 최고의 기회야. 함께 아이디어를 짜보자. 다프네."


드리아드의 마음을 풀어줄 대책을 세우는데 성공한 두 사람은 대책의 완성도를 더욱 올리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시간이 촉박하니 오드리에게 부탁해서 새로운 옷을 받는 것은 무리지만 최선의 코디네이션 방법을 찾거나 데이트 장소의 물색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애쓴 끝에 두 사람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뽑아낼 수 있었다.


"후우...후우...콘스탄챠에게는 말해뒀어. 내일 일정은 자기가 추가로 확인해서 잘 조율해줄테니 걱정 말래."

"하아....하아....오드리 양에게 하이힐을 빌려왔어요. 평소에 드리아드에게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한 재고품이 있다고 해서 그걸로 받아왔어요."

"후아아...힘드네...그럼 준비는 끝인가?"

"네에......일단은요...이제...우리도 좀 자둬야 할 것 같아요. 아침에 드리아드 화도 풀어줘야 할거고..."

"그러게...피곤하다......그럼 잘 자 다프네. 아침에 나도 좀 깨워줘."

"네. 언니. 안녕히 주무세요."


오르카 내를 분주하게 오가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른 둘이었지만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기쁨은 그녀들의 얼굴에 미소가 계속 남아있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마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계획의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드라이드의 설득. 아직 화가 식지 않았을 드리아드를 차근차근 설득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체력회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둘은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짧지만 달콤한 휴식 시간이 지나가고 드리아드가 깨어날 걸로 예상되는 시간보다 1시간 정도 먼저 일어난 다프네는 리제를 깨우고 드리아드를 달래기 위해 준비했다. 그리고 다프네가 예상한 시간이 되자 침대에 누워있던 드리아드가 눈을 떴다.


"......"

"드리아드...? 일어났니...? 정말 미안해...어제는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 억지로..."

"후우......혼자 있게 해주세요...어제 제가 했던 말 중에서......제 진심이 아닌 말은 없었으니까....단순히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는 것만.....?!!! 이...이건...?!"


리제와 함께 드리아드의 화를 풀어줄 방법을 논의한 다프네는 그녀답지 않은 강경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리제 왈 '기분을 봐가며 풀어주는 건 댓가가 충분하지 않을 때 이야기고, 그거 보기만 해도 홀랑 넘어올걸?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나. 최초 생산지가 한국이라 그런지 묘하게 구수한 어구가 인상적인 말을 들은 다프네는 어떻게 할지 고민했었다. 솔직히 다프네 역시 말로 드리아드를 잘 달랠 자신은 없는 상황. 리제의 말을 믿고 화끈하게 지르기로 마음먹은 다프네는 조용히 드리아드에게 데이트권을 건넸다. 그리고 데이트권을 보자마자 하던 말도 잊고 두 눈을 데이트권에서 뗄 줄 모르는 드리아드를 보면 리제의 말은 꽤 잘 맞는 것 같아 보였다.


"언니들이 드리아드를 위해서 할 수 있는게 뭐가 있는지 생각해보다가...이게 최선인 것 같아서 어떻게든 준비해봤어. 지금까지 잘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드리아드. 앞으로는 언니들이 잘 할테니까 용서해줄래? 응?"

"이....이건.......! 흑......흑......."

"드...드리아드...? 갑자기 왜 울어? 뭔가 맘에 안 드니...?"


충분히 괜찮은 타이밍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진심을 담아서 드리아드에게 용서를 비는 다프네. 이 정도면 드리아드도 화를 풀고 화해해주지 않을까 싶었던 다프네였지만 갑자기 드리아드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자 당황해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자신에게는 안 어울리는 강경책을 사용한 게 잘못됐나? 하는 생각을 시작으로 다프네가 한창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무렵. 드리아드가 생각하는 것은 다프네의 걱정과는 꽤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굉장히 속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다프네가 데이트권을 드리아드에게 건네는 순간. 드리아드의 화는 마법처럼 사라졌다. 옛 말에 아무 것도 없이 말하면 잔소리지만 10억을 건네며 같은 말을 하면 진심어린 충고라 했다. 그리고 지금의 오르카에서 바이오로이드에게 이 데이트권의 가치를 뛰어넘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드리아드가 가장 원하고 갈망하는 사령관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는, 그야말로 드리아드에게는 무가지보 그 자체. 드리아드를 위한 선물로서 이것을 뛰어넘는 것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너무 효과가 좋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이 데이트권이 바로 드리아드의 꾀병 때문에 페어리 자매들이 모으지 못한 오르카 달란트의 보상이라는 사실이 드리아드의 죄책감을 건드렸다는 점. 이 때문에 드리아드는 오히려 다프네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프네 언니...미안해요...제가 잘못했어요."

"아...괜찮아. 드리아드. 화가 나면 말이 격해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언니도 이해해."

"아뇨...그것보다도...언니들이 이렇게나 저를 생각해주는데 그걸 몰랐던 제가 바보였어요. 미안해요. 언니."

"아냐...언니들도 어제 네가 해준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는걸. 미안해. 앞으로는 언니들도 드리아드를 위해서 힘낼테니까. 좀 더 언니들에게 의지해줘. 응?"

"그리고...제가 꾀병으로 알아눕는 척 한 것 때문에 언니들이 오르카 달란트를 모으지도 못했는데......제게 이런 선물을 주시다니.....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요..."

"어...? 아.....으응......."


'어라...? 꾀병...? 그럼......그 때 열 났던게......?'

'뭐야? 꾀벼엉~?! 내 이럴 줄 알았어! 바이오로이드가 감기에 걸릴 리가 없지! 그 때 끝까지 따져봤어야 했는데...!'


화기애애한 자매의 화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주던 다프네와 드리아드였지만 다프네에게 지나치게 감동한 드리아드가 자신도 모르게 폭탄발언을 입에 담아버린 순간 다프네는 과거의 일을 차분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드리아드를 간호하는 동안에 조금 더 챙겨주고 싶었지만 약간이지만 평소보다 미진하게 간호할 수 밖에 없던 환자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천천히 기억을 되새기다보니 드리아드가 계속 주인님을 보면 기운이 날 것 같다는 말을 반복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제서야 무엇을 위한 꾀병인지 눈치채고는 한 층 깊어진 눈빛을 보내는 다프네.


마찬가지로 다프네의 등 뒤에서 그런 둘을 따뜻하게 바라보던 리제 역시 레아와 단 둘이 오르카 달란트를 모아보겠다고 고생하던 기억을 되새기며 이마에 핏줄이 슬그머니 드러났다. 말없이 다프네의 옆으로 돌아가 드리아드가 볼 수 없는 사각에서 '얘를 어떻게 조질까?' 라는 표정을 보이는 리제. 다프네는 그런 리제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저은 뒤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리제 역시 다프네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자매, 다프네의 의도를 눈치챈 리제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팔짱을 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다프네는 자신의 말을 들어준 리제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낸 뒤 드리아드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드리아드. 우리는 자매니까. 다소 허물이 있더라도 서로 감싸주는 거 아니겠니?"

"아.....언니......"


자애로운 미소로 드리아드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용서하는 태도를 보이는 다프네. 그런 다프네를 본 드리아드는 마치 다프네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로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그치만 꾀병은 안 된단다. 드리아드. 앞으로 또 주인님이 보고 싶다고 꾀병을 부리면 주인님께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말씀드릴테니까 꼭 주의해주렴."

"어....언니.....? 화난 거 아니죠...?"

"그럴리가~ 언니는 드리아드를 정말 사랑하는걸. 이런 일로 화낼리가 없잖니. 그치만 남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앞으로는 그러면 안 돼. 알겠지?"

"네...네! 앞으로는 절대로 안 그럴게요!"

"응~ 우리 드리아드 착하지~ 언니랑 약속~"

"네...! 야...약속이에요! 도장찍고! 복사하고!"


다프네의 얼굴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방금 전과 아주 조금의 차이도 없는 자애롭고 따스한 미소. 하지만 드리아드는 다프네의 말이 이어지는 순간 등골에서 찌르르한 느낌을 받으며 몸을 잠식하는 오한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방금 전까지 다프네에게서 비치던 후광은 어느새 무시무시한 오라가 되어서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기로 가장 착한 바이오로이드 셋을 뽑으라면 반드시 들어가는 그녀의 셋째 언니의 눈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푸른 빛의 눈동자는 일체의 거짓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을 품고 있었다. 지금 다프네가 하는 말에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면 뭔가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할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드리아드를 덮쳤고, 자신의 예감을 믿은 드리아드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프네의 말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홀린 듯이 다프네가 가볍게 내민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을 꾹 누른 뒤 손바닥끼리 비비고 나서야 점차 사그라드는 압박감에 제정신을 차리는 드리아드. 아주 짧은 시간 느껴졌던 무시무시한 오라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자애로운 다프네의 미소만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후훗~ 드리아드가 앞으로 약속을 잘 지킬 거라고 믿고 그럼 정말로 용서해줄게."

"아...네...감사합니다..."


그제서야 아까보다도 더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드리아드를 가볍게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 다프네. 다프네의 '용서'라는 말과 자신을 바라보면서 '아, 아깝네. 조금만 실수했으면 완전 끝이었는데' 같은 표정을 짓는 리제의 모습으로부터 드리아드는 자신이 죽다 살아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강하고 약한 것과는 별개로 세상에는 절대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다프네. 그 정도로 해두고 원래 하려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 쳇. 진작에 알았으면 이렇게 고생할 것도 없었는데."

"아. 그러게요. 언니들이 드리아드를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해뒀으니까 일단 씻고 오렴. 주인님과 데이트인데 최대한 예쁘게 준비해야지."

"아...네! 얼른 다녀올게요!"


드리아드가 열심히 몸에 광을 내는 사이에 어제부터 준비해왔던 물품들을 쭉 정리해두고 다시 검토에 들어가는 다프네와 리제. 그렇게 오늘은 비번인 드리아드를 정성껏 꾸며서 데이트에 어울리는 복장으로 만들어준 둘은 업무시간이 되자 드리아드에게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조언을 남기고는 페어리 숙소를 나섰다. 그렇게 혼자 남은 드리아드는 앞으로 사령관과 데이트까지 8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며 이런저런 망상에 빠졌다.


"후후후훗......주인님 앞에서 살쪄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오늘 밥은 다 굶기로 하고..."

"아...주인님과의 데이트라니...정말 꿈만 같아..."


자신의 손에 들린 데이트권을 바라보며 꿈꾸는 소녀의 표정으로 사고회로를 점점 가속화시키는 드리아드. 그녀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우후후후......달빛 아래에서 입맞춤을 한 뒤에......"

"밤에는 주인님의 방에서......."

"몸에 잔뜩....."


분명히 사랑에 빠진 소녀의 표정이었던 드리아드가 침을 뚝뚝 흘리는 늑대의 표정으로 변해가는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페어리의 비번은 그녀 뿐이었기에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저녁식사를 마친 뒤 드리아드와 사령관의 데이트 장소까지 배웅하기로 한 다프네와 리제. 마지막으로 드리아드의 건승을 비는 그녀들의 대화는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복도를 울렸다.


"드리아드, 정말로 식사 안 해도 되겠어? 무리하면 몸에 안 좋아."

"괜찮아요. 언니. 하루 쯤이야 충분히 버틸 수 있어요! 주인님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날씬해보이고 싶은걸요."

"으음...마음은 이해하지만..."

"다프네. 너도 너무 과잉보호야. 바이오로이드가 하루 쯤 굶었다고 어떻게 될 몸이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데이트 약속 장소인 오르카의 갑판에 도착한 세 사람. 데이트 장소는 사령관의 안전을 위해서 충분한 원거리 감시 인력이 동원된 상태에서 정박중인 오르카의 근처를 벗어날 수 없는 수준의 범위로 한정되었지만 잠수함 내부를 산책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무드있는 장소라는 것은 세 사람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마지막으로 다프네와 리제를 향해 몸을 돌린 드리아드가 그녀들을 꼬옥 끌어안았다.


"언니들...정말 고마워요.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후훗. 드리아드를 위해서 준비한 거니까 마음껏 즐겨. 그리고 마음 속에 남아있는 모든 걸 털어내버리고 오렴."

"흥, 알면 앞으로 잘 해. 어쨌든 오늘은 우리가 양보하는 거니까 우리는 잊고 주인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봐. 실패하고 울면서 돌아오면 숙소에서 내쫒아버릴거야."

"후후훗. 언니들 몫까지 잔뜩 사랑받고 올게요. 그럼...내일 봐요."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사령관을 기다리기로 약속한 위치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드리아드.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프네와 리제는 그녀들의 동생이 오늘 하루의 기쁨으로 그녀를 짓누르는 불안감을 모두 해소하기를 빌었다. 그렇게 드리아드를 배웅하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다른쪽 입구에서 사령관의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주인님 오시나보네. 어때, 다프네. 주인님 맞지?"

"네. 드리아드와 데이트하기 위해서 잘 차려입으셨네요. 후후훗. 정말 너무 멋져요. 드리아드도 만족할 거에요." 

"주인님은 평상복만 입어도 너무 멋진데 옷까지 신경쓰셨다니 드리아드가 정말 부럽네. 눈이 좋아서 주인님의 옷이 보이는 다프네도 부럽고"


사령관이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리제에게 좋은 눈을 가졌기에 사령관의 복장을 똑똑히 볼 수 있는 다프네가 사령관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해주자 드리아드와 다프네가 부럽다는 듯 가볍게 투덜거리는 리제. 과거였다면 이미 지금 시점에서 제정신을 못 차리고 드리아드를 썰어버리겠다며 날뛰었음이 분명한 그녀의 변화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것이라 할 만 했다.


"아. 드리아드도 주인님을 봤나봐요. 언니, 그럼 슬슬 돌아갈까요?"

"응? 왜, 내가 질투해서 데이트를 방해할까봐 그래? 나도 이제는 그런 것까지 일일히 신경쓰지는 않는다니까."

"아뇨...그게 실은...조금 더 보고 있으면 제가 드리아드에게 질투심이 생길 것 같아서요..."


다프네의 제안을 장난스럽게 받아낸 리제였지만 이어지는 다프네의 대답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어머...? 왜 그러세요...? 저도 주인님과 다른 분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 정도는 하는 걸요."

"흠...뭐...하긴. 보통은 그게 정상이지? 근데 질투하는 게 정상이라면 딱히 자제할 필요가 없는 것 아냐? 네가 부러워한다고 드리아드의 데이트를 방해할 성격은 아니잖아?"

"으음...그...뭐랄까......드리아드가 행복하게 데이트하는 것까지 보면......드리아드에게 데이트권을 주지 않았다면 저 자리에 있는 건 저일텐데...하는 생각을 해버릴 것 같아서요. 동생에게 선물로 준 다음에도 미련을 못 버리다니...저도 참 언니 자격이 부족한 것 같아요."

"푸후후훗. 주인님과의 데이트권을 공짜로 남에게 주고도 아쉬운 맘 하나 없으면 네가 성녀지 보통 사람이니? 나도 하루 동안 생각해봤지만 나였다면 드리아드에게 그것만은 절대 안 넘겼을거야. 그러니 다프네 너는 충분히 훌륭한 언니란다. 아니면...내가 너무 부족한 언니거나. 다프네, 설마 내가 언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요! 그럴리가요. 언니가 알게 모르게 저희들 챙겨주시는 건 전부터 잘 알고 있었는걸요. 그래서 저도 언니를 최대한 돕고 싶었던 거고요."

"흐응~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네. 좋아! 슬슬 돌아가자! 주인님을 빼앗긴 대신 오늘은 이 언니가 치킨 사줄게! 소완 그 해추....으음....여하간 나한테 빚진게 있으니까 그 정도는 들어주겠지."

"후후훗~ 주방 출입만 허락받으면 저도 만들 수 있으니까 여차하면 맡겨주세요. 자, 돌아가죠. 언니."


둘 모두 의식적으로 드리아드와 사령관이 즐겁게 데이트하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쓰며 주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서로의 손을 가볍게 잡은 두 자매는 손에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러움을 느끼면서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는 사령관에 대한 애정과 사랑받고 싶은 갈망을 자매에 대한 사랑으로 조금씩 식혀가며 발걸음을 맞춰 나아갔다.


다음 날 점심. 드리아드는 아예 입이 귀에 걸린 채로 페어리 숙소에 복귀했고 다프네와 리제는 그런 드리아드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특히 다프네는 간만의 비번일임에도 드리아드에 대한 축하와 컴패니언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 카페가 한산한 시간을 빌려 케이크를 구워왔고, 컴패니언에 감사의 케이크를 전달한 뒤 간만에 페어리 5명이 모두 모인 저녁에 케이크를 꺼내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드리아드 언니. 어제 주인님이랑 데이트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진짜야?"

"응. 후후훗. 아~ 정말 행복해서 날아가버릴 것 같은 하루였어. 이제 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드리아드도 참, 앞으로는 더더욱 행복해질텐데 벌써부터 그런 말 하면 못 써요~"

"쿡쿡쿡...엊그저께 했던 말...이 언니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아...아하하....어...언니....그건 영원히 잊어주셨으면....."

"어머? 드리아드랑 리제 사이에 뭔가 있었나요?"

"그게...사실은..."


갑자기 물어오는 레아에게 당황한 드리아드는 엊그제 있었던 일의 전말을 간략하게 추려서 레아와 아쿠아에게 설명했다. 물론 크게 혼날만한 부분은 적당히 잘라서 포장했지만 옆에서 코웃음치는 리제도 별 불만은 없었는지 드리아드의 말을 끊거나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드리아드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레아는 옆에 있던 리제를 꼭 끌어안았다.


"으응?! 언니...? 갑자기 왜...?"

"우리 리제도 많이 성장했네요~ 역시 주인님의 사랑을 받은 보람이 있어요~"

"뭐야, 그거. 말이 이상하잖아."

"자, 다음은 다프네도 이리 오세요~ 언니가 꼬옥 안아줄게요~"

"아...언니...약간 부끄러워요..."

"둘 다 힘내줘서 고마워요~ 드리아드가 힘들어하는 걸 잘 챙겨주다니 훌륭한 언니들이네요. 앞으로도 모두 사이좋게 지내줘요? 후후훗."


레아의 적극적인 칭찬에 쑥스러워하는 리제와 다프네. 그런 둘을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드리아드와 왠지 뚱한 얼굴로 바라보는 아쿠아. 행복으로 가득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듯이 아쿠아의 질문이 이어졌다.


"웅~ 그러고보니 왠 케이크야? 드리아드 언니가 주인님한테 받아온 거야?"

"아, 드리아드를 축하할 겸 해서 내가 만든거야. 크게 만들었으니까 많이 먹으렴. 아쿠아."

"어...다프네 언니가 만든 거야?"


처음에는 설렘이 섞인 눈빛으로 케이크를 바라보던 아쿠아였지만 다프네가 만든 케이크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에 띄게 기운이 없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다프네는 그런 아쿠아의 모습을 사령관이 페어리 자매들끼리 나누어먹으라고 준 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한 것이라 생각하고 아쿠아를 달래줄 겸 케이크를 잘라서 가장 큰 조각을 아쿠아에게 나누어주었다.


"후훗. 주인님이 주신 게 아닌 건 아쉽겠지만 많이 먹으렴."

"우웅...맛있네......"


여전히 기운을 차리지는 못했지만 억지로나마 미소를 돌려주며 맛있다고 말해주는 아쿠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다프네는 나머지 케이크도 자매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드리아드의 무용담을 들으며 깊어가는 페어리의 밤. 드리아드는 케이크를 먹으며 언니들에 대한 신뢰를 더욱 키웠고, 다프네 역시 그런 드리아드의 마음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눈빛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그리고 은근히 틱틱거리면서도 섬세하게 드리아드를 챙겨주는 리제와 그런 3명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레아.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기쁨으로 가득 찬 4명과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재미있는 이야기로 스스로를 달래는 한 명의 부조화를 눈치챈 사람은 하나 뿐이었지만 그녀 역시 곧 5명 모두가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하지만 낙관적인 마음을 품은 레아도, 정작 케이크를 만들어온 다프네도 이 때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 다프네가 선의로 만든 케이크 하나가 어떤 결과로 돌아오게 될지를.



며칠 후


"언니, 다녀왔습니다."

"아, 드리아드 왔구나~ 고생 많았어~"

"헤헤헤...요즘은 다프네 언니가 안아줘야 집에 왔다는 실감이 나요~"


출격을 마치고 돌아온 드리아드를 맞이해서 꼬옥 안아주는 다프네. 드리아드와 화해한 이후로 다프네는 자매들을 향한 스킨십을 의식적으로 늘리려고 노력했고, 그런 다프네의 변화를 가장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 드리아드였다. 못 이기는 척 받아주면서도 기뻐하는 리제나 마지못해 안기기는 하지만 썩 기뻐하지는 않는 아쿠아보다 훨씬 좋은 반응을 보여주는 드리아드를 위해 다프네는 매일같이 출격에서 돌아온 드리아드를 포옹으로 맞이했다.


"킁킁. 드리아드. 땀냄새 나. 어서 가서 씻고 오는게 어때?"

"우으으...! 리제 언니는 섬세함이 없어요! 그런 언니에게는 벌로 꼬옥~"

"후후후훗..."


다프네에게 안겨있는 드리아드의 겨드랑이 근처에서 냄새가 난다는 듯 킁킁거리는 리제와 짐짓 화난 척 포옹의 대상을 리제로 바꿔서 그녀를 끌어안는 드리아드. 처음에는 냄새나는 몸을 치우라며 바둥거리던 리제였지만 그것도 잠시, 나름대로 드리아드를 쓰다듬으며 고생한 동생을 위로하는 리제의 모습에 그녀들을 지켜보던 다프네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후훗. 장난은 이 정도로 하고 정말로 씻고 올게요."

"아. 그래. 얼른 다녀와."

"다녀왔습니다."

"아쿠아도 왔니? 어머, 손에 든 건 뭐니?"

"응! 오늘 카페에서 일하면서 내가 만든 초콜릿이야! 아우로라 언니가 꽤 괜찮게 만들어졌다고 해서 언니들이랑 나눠먹으려고 가져왔어!"


샤워실로 향한 드리아드 대신에 카페에서 밝은 얼굴로 돌아온 아쿠아. 아쿠아가 선심쓰듯이 내민 초콜릿을 들어 입에 넣은 리제는 맛을 보고는 솔직한 감상을 들려줬다.


"헤에. 꽤 잘 만들었네. 아쿠아도 실력이 많이 좋아졌구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다프네처럼 맛있는 케이크도 만들 수 있겠네."

"아........으응.......아쿠아. 힘낼게."


하지만 리제의 기대와는 달리 칭찬이 담긴 리제의 말을 듣고는 급격히 기운이 빠진 아쿠아. 리제는 속으로 당황해서 다프네에게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지난 번의 케이크에 대한 아쿠아의 반응과 오늘 리제의 말에 대한 아쿠아의 반응의 공통점을 깨달은 다프네는 자신이 끼어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아꼈다. 실망한 표정을 짓던 아쿠아는 리제와 다프네의 낌새를 느끼고는 앗차 하는 얼굴이 된 채 말을 꺼내며 몸을 돌렸다.


"다음에는 아쿠아가 지금보다 훨씬 맛있는 걸 선물해줄테니 기대해 언니들. 그럼 아쿠아는 씻으러 갈게!"

"흠흠. 어쨌든 이 초콜릿도 맛있으니까 무리하지 마. 잘 먹을게."

"응...기대할게 아쿠아. 초콜릿 정말 고마워."


다프네는 오늘에서야 아쿠아가 왜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드리아드 때처럼 실수해서 서로가 아픈 일을 겪지 않도록, 사랑하는 막내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가 혼자서는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생각에 레아와 의논해봐야겠다고 결론지으며 아쿠아의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져나가는 달콤한 맛과 그 달콤한 맛을 부각시키는 씁쓸함. 자신들의 자매관계도 이 초콜릿처럼 작은 씁쓸함이 달콤함을 더욱 값지게 만드는 디딤돌처럼 쓰일 수 있기를 바라는 다프네의 생각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멀지 않은 훗날에.


- 끝 -



원래는 드리아드 이야기가 1부, 아쿠아 이야기가 2부 구성으로 둘이 합쳐서 완성되는 소설을 구상했는데...도저히 일상대회 끝나기 전에 완성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1부만 제출함. 


평소랑 다르게 오랜만에 각잡고 써본 소설인데 잘 묘사가 됐는지 모르겠음. 특히 얀끼 빠진 리제는 레퍼런스가 없어서 이미지가 잘 안 잡히는게 아쉬웠고, 나름 설득력은 줬다고 생각하지만 드리아드가 너무 싸보이는 여자가 된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함. 레아는...원래 1부보다 2부에 분량이 좀 더 있고 어쨌든 배후의 협력자라는 느낌이라 본편에서는 부각이 안 되는게 정상이긴 한데 다들 어떻게 봐줄지 궁금하다. 재미있게 읽어주면 기쁘고, 감상을 들려주면 더 기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