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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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구-우우웅!

 

쿵!

 

 해가 점차 해수면 위로 가까워지는 시간대, 요안나 아일랜드의 산 중턱에 자리를 잡은 벌목장의 나무들이 쌓여있는 공간 사이로, 흰색의 토끼 귀가 쫑긋-솟아올랐다.

 

“-하아암. 잘 잤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기만의 아지트에서 한숨을 돌린 이프리트는 제 후드에 묻은 나무껍질들을 이리저리 털어내며 마치 외적의 모습을 찾는 미어캣처럼 사주경계에 돌입했다.

 

‘응. 주변에 아무도 없고. 엘븐들은..아차!’

 

 이리저리 토끼 귀 장식을 흔들어가며 주변 상황을 파악해 나가던 이프리트의 두 눈에 흰 소와 검은 소가 들어오자 그녀는 재빨리 반듯하게 깎여나간 나무 틈 사이로 고개를 훅-숙였다.

 

“엘븐. 통신 받았어?”

 

“어. 그런데 무슨 일이길래 우리를 전부 소집하는 거야? 우리 귀여운 대장님이?”

 

‘..소집?’

 

 그리고 미처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못 알아챈 그녀들의 대화가 통나무 너머로 들려오기 시작하자 이프리트는 가만히 그 대화를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상세한 내용은 중앙 회의실에서 이야기해주신다고 했으니까. 가보면 알지 않을까?”

 

“헤헷. 다크엘븐,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뺨이 벌겋다?”

 

“뭐..뭐라는 거야! 그냥 생산 인원들 전원이 모이는 건데. 내가 무슨..”

 

“에게? 오늘 낮부터 대장님 사진 찾느라 채널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놓고~”

 

“그..그건 그냥 궁금해서! 대장님한테 딱히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게..”

 

“네네. 알겠어요. 그렇게 말을 해봐야 별로 설득력도 없네요. 럼버 제인! 나무 깎아내는 건 그 정도로 하고 내려가자! 오늘은 저녁 일찍 먹으래!”

 

“어-!”

 

타박-타박

 

 멀어지는 그녀들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이프리트의 토끼 귀가 다시 그림자 밖으로 쫑긋 솟아올랐다. 저 멀리 산길 아래로 걸음을 옮기는 세 명의 여성들, 그녀들의 대화 내용을 곱씹던 이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산 인원들만 따로 집합? 우리도 집합을 안 시키던 대장님이?’

 

“뭔가..심상치 않은데.”

 

 오르카 저항군에 합류하기 이전부터 군 생활이라면 오랜 시간 겪어온 이프리트의 직감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그런 미약한 불안감을 지닌 채, 이프리트는 엘븐들과 럼버 제인이 내려간 숲길을 따라 내려가며 주변의 돌덩이들을 하나씩 걷어차며 본인이 본래 근무를 섰어야 할 초소로 걸음을 옮겼다.

 

“흐음. 단순히 생산 시설 관련 문제로 집합하신 걸 수도 있잖아?”

 

‘오늘부터 보급 수송량도 늘었고. 뭐, 별 문제는..’

 

“이..이뱀! 돌아오셨네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구상을 하던 이프리트의 귓가로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후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프리트는 머리를 굴리던 것을 멈추곤 자신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오는 레프리콘을 바라보았다.

 

“응? 뭔데. 무슨 일..”

 

“네! 무슨 일 생겼어요! 어서 초소로 와 봐요!”

 

“...엉?”

 

 그저 매일 내뱉는 허례허식 같은 물음이었는데, 후임의 다급한 얼굴과 목소리를 들어보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한참은 일어났다는 불안감이 그녀의 등줄기를 싹 훑어내렸다.

 

“뭐..뭔데?! 이야기나 좀 해줘 봐!”

 

“그..그게 우선 그냥 와 봐요! 이뱀!”

 

타-닥 탁!

 

“...뭐야. 아무 문제 없잖아?”

 

 초소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싶었는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별다른 이상 현상이 이프리트의 날카로운 검색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초소의 건물 중 허물어진 곳도, 피격을 받은 곳도 없다. 그러면 별로 이상할 껀덕지가 없을 거라 여겼던 그녀의 눈에 구석에 처박힌 막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브라우니. 너 왜 그렇게...”

 

“저..이뱀. 저 일낸 것 같슴다”

 

“..제발. 대장님이 관련된 이야기만 아니라고 해줘.”

 

 두 눈의 초점이 잡히지 않는 후임의 모습에 이프리트의 안색 역시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이 평온한 동네에서 무슨 사고를 쳐도 친단 말인가. 그렇게 브라우니의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을 듣기 시작하던 이프리트는 결국 후임의 마지막 대목에서 제 머리카락 위를 붙잡으며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쿵-!

 

“이..이뱀! 머리 괜찮으세요?!”

 

“..이..이건 악몽이야. 이건 악..허억! 서..설마 아까 그거..”

 

 그녀의 다년간의 군 생활 센서가 지금의 이 요안나 아일랜드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경보를 울려 대자 그녀의 머릿속에 아까의 엘븐들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어. 그런데 무슨 일이길래 우리를 전부 소집하는 거야? 우리 귀여운 대장님이?’

 

‘서..설마. 아니야. 우리를 처벌하는데 생산 인원들을 모을 이유가..아니야. 그 대장님이라면 무슨 이상한 짓을 꾸밀지도 몰라.’

 

 만약 본대에 있는 그 착한 사령관님이라면 그녀들을 문책하지 않을 터. 오히려 웃으면서 브라우니에게는 새 전투복을 선뜻 내어주고 더치걸에게는 사탕 하나를 내어주며 달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새로운 인간님, 대장님은 어떤 인물인가. 자기들이 삥땅치는 것을 직접적인 방식을 피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압박해오며 또 사령관님과 달리 자신들의 행동에 제약을 거는 것을 서슴지 않는 인물.

 부하와 장성이라는 계급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행동에 막힘이 없는 거친 분위기를 동시에 지닌, 한마디로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 아닌가. 이프리트는 설마설마하며 황망해진 두 눈동자로 초소의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으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제..제발. 앞으로 2주밖에 안 남았는데..제발 조용히 지나가게 해주세요!’

 

“이뱀! 이뱀! 정신 차리세요!”

 

 믿음직한 후임의 얼굴이 천장을 주시하던 제 앞을 가로막자 이프리트는 두 눈을 번뜩 뜨며 레프리콘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레후! 이..이 이야기, 누가 더 알고 있어? 응?”

 

“어...저희만 알고 있기는 하는데..”

 

“그..그럼. 더 이상 이 이야기는 밖에서도! 우리끼리도 이야기하지 마! 절대! 알겠어?!”

 

“네...네! 그렇게 할게요!”

 

 행여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자기 후임의 행동이 그 시발점이 되리라 직감한 이프리트는 다급한 마음에 두 후임에게 함구령을 내리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그제야 초소의 벽 위로 등을 뉘었다.

 차가운 초소 벽의 감촉에 다시 한번 천장을 멍하니 주시하니, 낮에 보았던 사진 속의 라붕이 작전관과 그 곁에서 꺄꺄호호하는 생산 인원들의 얼굴이 천장 위에 그려졌다. 그 속에는 전역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갈굼을 받아가며 일하던 또 다른 이프리트의 얼굴 역시 함께였다.

 

‘...정말. 내가 입장이 역전될 줄은 몰랐는데..’

 

“...전역하고 싶다.”

 

50)

 

 요안나 아일랜드의 최중심부, 그곳에는 이 땅에 설비들을 들여놓을 때 가장 먼저 세워진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물이 우뚝 솟아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오르카 본대와 통신할 수 있는 통신 설비부터 모든 이들의 숙소와 또 이 땅에 부임한 라붕이 작전관의 침실과 업무실 역시 함께였다.

 평소에도 다수의 인원이 북적대던 이 건물 내부의 생활관에는 평소와 달리 적막만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 어떤 때보다 북적대는 공간이 있었으니, 그곳은 다름 아닌 건물의 지하시설 중 하나, 중앙 회당이었다.

 

똑똑-!

 

“네. 어디 분들이신가요?”

 

“아..그게. 산 중턱에 있는 목장 시설이랑 벌목장 시설에서 왔는데..”

 

 중앙 회당의 거대한 문을 두드린 다크엘븐은 살짝 열린 틈 사이로 호박빛의 눈동자에 어깨를 들썩이며 뺨을 긁적였다.

 혹 자기가 잘못 통신을 받았던 것인가 하고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자니 호박색의 눈동자가 다크엘븐과 그 곁에 선 엘븐, 그리고 뒤에선 장신의 여성을 확인하고선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완전히 열어 재꼈다.

 

끼-익!

 

“엘븐 분들이셨군요. 뒤에 서 계신 분은 럼버 제인양이시고요.”

 

“할로! 만나서 반가워! 당신이 소문으로만 듣던 블랙 리리스 개체구나?”

 

“..풍기는 분위기가 확실히 심상치 않은데? 럼버 제인이라고 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후훗. 활발한 분들이시네요. 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자, 어서 들어오세요. 다른 분들도 기다리고 있답니다.”

 

 블랙 리리스의 손 인도에 따라 중앙 회당의 내부로 걸음을 옮긴 엘븐들과 럼버 제인은 평소에는 잘 사용되지도 않던 회당 내부를 가득 채운 인파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븐! 여기야!”

 

“오. 그녀들도 왔나요? 후훗. 정말 오늘은 여기 소속분들의 모든 얼굴을 다 보는 날이네요.”

 

 회당의 왼쪽 아래에는 부품 생산시설에서 일하는 오드리와 그 곁을 둘러싼 더치걸들이 그녀들의 등장에 손을 흔들었고.

 

“언니. 오늘 무슨 일 있었나요? 대장님이 이렇게 다 불러 모을 정도면..”

 

“나도 잘 모르겠는데, 파견 애들이랑 우리 애들끼리 마찰이 있었다는 것 같아.”

 

“에엑! 그 녀석들, 아직도 깽판치고 댕긴 담까?!”

 

“후우..내 말이 그 말이야.”

 

 그 위쪽으로는 이 동네 고참인 이프리트와 노움을 중심으로 한 전 스틸라인 소속 대원들이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며.

 

“졸린 데 얼른 회의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길래 누가 밤새 설비를 만지라고 했습니까? 덕분에 본대 분들이 마련해둔 발전기기가 먹통이 되지 않았습니까?”

 

“샌드걸. 너무 그렇게 타박하지 않는 거거든? 우리도 헤헤..나름 노력한다고 해본 거거든?”

 

“대장님이 그것 때문에 문책하려고 부른 거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아..”

 

 오른쪽 아래에는 전력 생산시설의 책임자인 이곳의 포츈과 그렘린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타박하는 샌드걸이 자리를 잡은 채 떠들고 있었고.

 

“언니. 혹시 더우시거나..그러시지는 않으시죠?”

 

“해..아..아니. 괜찮아. 난.”

 

“헤헤. 아쿠아는 새로 큰언니가 생겨서 너무 좋아! 리제 언니! 무릎 위에 앉아도 돼?!”

 

“아쿠아. 너무 그렇게 새언니를 못살게 굴지 말고, 자. 드리아드 언니 무릎 위로 오렴.”

 

“히잉. 난 새로 여기에 온 리제 언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앉아도 돼. 대신 날뛰지만 마.”

 

“정말? 헤헤! 앗싸!”

 

 오른쪽 위로는 영양 생산설비를 담당하는 페어리 자매들이 새로운 맏언니를 중심에 두고 서로 하하호호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각 방면에서 근무를 서는 소녀, 여성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높여가며 주변의 이들과 떠들고 있는 광경에 엘븐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시끌벅적한 회당 내의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와..이쯤 되면 여기 근무하는 애들 대부분 모인 거 아니야?”

 

“어머. 아직 취사장 분들이 안 오셨으니. 다는 아니랍니다?”

 

“...이렇게 많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나야 맨날 산장에서 자니까, 여기 올 일도 적었고.”

 

“가끔은 혼자서 맥주 홀짝이지 말고 나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어때?”

 

“난 조용한 걸 즐기는 편이야. 믿든 말든 네 자유지만.”

 

 너털너털 걸음을 옮기는 럼버 제인의 등을 따라 엘븐들 역시 회당의 빈자리에 한 자리를 잡고 앉으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시 보아도 이렇게 많은 생산 인원들이 있었을 줄이야, 생소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얼굴들. 그렇게 엘븐들이 사방을 확인하던 때에, 누군가 그녀들의 앞으로 걸어와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븐. 어서 와. 헤헤.”

 

“더치걸?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너 혹시 알고 있어?”

 

“..잠깐 둘러만 봐도 이거 심상치 않은 일 같은데.”

 

 그녀들의 맞은편으로 와 앉는 더치걸에게 엘븐과 다크엘븐의 질문이 쇄도했다. 그녀들의 물음에 더치걸이 그저 배시시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일 뿐, 별다른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자 그런 그녀의 뒤로 다른 더치걸들이 다가와 그녀들의 대화에 합류했다.

 

“얘가 오늘 파견 애들이랑 마찰이 있었거든.”

 

“걔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응. 그게..사실은..”

 

 더치걸은 머쓱한 미소와 함께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그녀들에게 말해주었다. 대장이랑 같이 길 터는 작업을 하고, 생산시설로 복귀해 대장의 말대로 대충 설비 점검만 해둔 채 자리를 뜨려던 사이, 몰래 새로운 전투복 한 벌을 챙겨 떠나려는 브라우니와 힘싸움을 한 것.

 그리고 그것을 라붕이 작전관이 목격했다는 것까지. 자신 때문에 이렇게 일이 크게 일어난 것 같아 어색한 미소를 지우지 못하는 더치걸의 이야기에 엘븐의 두 눈이 삼백안으로 돌변하며 그녀는 자신의 오른 주먹을 왼손바닥 위로 강하게 내리쳤다.

 

콱!

 

“이-자식들이! 아직도 우리를 물로 보고 있다 이거지!”

 

“..헤헤. 라붕이 대장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더치걸, 어깨는 괜찮아?”

 

“응. 곧장 의무실로 가서 수복제를 소량 맞았어.”

 

“..우리 대장, 열 받은 건 확실하겠네. 성격이 대충 눈에 드러나는 사람이니.”

 

 럼버 제인은 평탄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약 그 브라우니만 처벌한다고 하면 이렇게 자신들을 모두 이 회당에 모을 이유는 없을 터. 이 땅에 온 지 4일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인간 양반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인가. 럼버 제인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에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그녀들이 떠들고 있을 때, 뒤에서 또 한번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여성들이 회당 안으로 들어섰다.

 

“..제법 늦었네? 요리사.”

 

“소첩이 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옵니다.”

 

“헤헤..식기를 정리하느라 조금 늦었어요.”

 

“미안해. 검문소장님.”

 

“어머. 저는 검문소를 임시로 맡고 있을 뿐이랍니다. 아우로라양. 후훗. 어서 들어가세요.”

 

 한껏 들뜬 목소리와 함께 회당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은 근래 요안나 아일랜드에서 가장 핫한 인물들, 주방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한 급양 인원들이었다.

 그녀들의 시끌벅적한 등장에 회당 내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은발의 주방장, 소완을 필두로 한 급양 인원들에게 쏠렸다.

 

“주방장님! 밥 너무 잘 먹고 있어요!”

 

“우리 짬밥이 최고임다! 맛나 죽겠슴다!”

 

“파견 애들 엉엉 우는 모습이 얼마나 즐거운지, 급양 애들 힘내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중앙 회당의 계단을 내려가던 아우로라들과 포티아들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화색이 동시에 맴돌았다. 이렇게 대규모의 칭찬세례를 받을 줄이야, 그녀들은 누가 무어라 할 것 없이 뺨을 긁적이며 담담하게 앞에서 걸어 내려가는 쉐프의 뒷모습을 쫓았다.

 

“헤헤헤..이렇게 주목받는 건 처음인 거 같은데. 안 그래? 포티아?”

 

“그..그러게요. 다 주방장님 덕분이에요.”

 

“응응! 우리 주방장님 덕분에 요새 웃음이 마를 날이 없어!”

 

“..다들 정숙하시옵소서. 비단 저만의 공이 아니오니.”

 

 자신을 향한 부하들의 칭찬 돌리기에 소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들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소완의 입장에서야 주변의 인사치레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괜히 주눅이 들려는 그녀들에게 되돌린 것이지만, 다른 급양 인원들에게는 그녀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여태껏 고생해온 그녀들의 심금을 울리는 찬사였다.

 

“에..그 말은..”

 

“..우리 주방장님도 참 겸손하시네요. 그쵸?”

 

“그러게요. 헤헷.”

 

 소완의 말에 포티아들은 서로를 바라보곤 눈물을 감추었다. 조금은 성숙하게 셋팅된 그녀들이었기에 주방장의 호의를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았던 포티아들이었지만, 반대로 아우로라들은 그렇지 못했다.

 

와락!

 

“..주방자앙니이임...”

 

“이..왜 이러사옵니까? 놓으십시오! 아우로라양!”

 

“흐에에엥..주방장님 덕분에 우리도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흐에에엥!”

 

“이..이러지 마시옵소서! 주인님이 그대들을 보시면 제가 뭐가 돼옵니까! 어서 놓으십시오!”

 

“하하하! 쟤들 갑자기 왜 저런대?”

 

“아우로라가 요새 눈물샘이 마를 날이 없네!”

 

“주방장님이 애들 울렸다! 와아아!”

 

“어..언제! 제가 울렸다고 그러십니까!? 아우로라! 얼른 비키십시오!”

 

 중앙 회당의 한가운데서 소완의 허리를 붙잡은 채 엉엉 울어 재끼는 아우로라들과 그녀들의 육탄공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소완, 급양 인원들의 한바탕 난리에 회당의 인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사이, 9시 정각을 알리는 발걸음 소리가 회당의 뒷문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이..이런! 아우로라양! 주인님이 오시고 계시나이다! 얼른 자리로 가시옵소서!”

 

“...좀만 더 붙어 있으면 안 돼? 주방장님?”

 

스-릉!

 

 아우로라들의 계속되는 칭얼거림에 소완은 눈매를 부라리며 제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날이 아주 잘 벼려진 중식도 한 자루를 꺼내 들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옥빛 눈동자와 회당의 전등 아래서 반사광을 흩뿌리는 중식도의 모습에 그녀의 허리춤을 붙들어 매던 아우로라들은 일제히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들의 안색에도 소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까까지의 다급한 음성 대신, 중식도의 날처럼 싸늘한 음성으로 아우로라들에게 마지막 통첩을 날렸다.

 

“...제 중식도 맛을 보시겠나이까?”

 

“..넵. 떨어질게..요.”

 

“주방장님. 아우로라. 여기에요.”

 

 어느새 회당의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포티아들을 모습에 소완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돌렸고 그녀의 뒤를 따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아우로라들이 일제히 걸음을 따라 옮겼다.

 

뚜벅-뚜벅-

 

“...대장님 발소리지? 이거.”

 

“응. 뇌파도 점차 가까워지시는데.”

 

 중앙 회당은 아까의 떠들썩한 분위기 대신 모두가 입을 다문 것처럼 숙연한 분위기로 뒤바뀌었다. 그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않은 채, 회당의 제일 아래에 놓인 교단의 뒤에 있는 문으로 모두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뚜벅-뚜벅

 

끼익!

 

“...오셨다.”

 

 더치걸의 중얼거림과 함께 교단의 뒤에 있던 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자 제일 먼저 어둠을 걷어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빨간 수단을 걸친 금발의 소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갈색의 탄탄한 피부를 자랑하는 중세 체인메일을 걸친 여기사가 교단의 위에 올라와 교단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두 눈을 감았다.

 여기사와 달리 교단의 계단 앞에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던 금발의 소녀는 감겨있던 두 눈썹을 열어 푸른빛의 눈동자를 드러내며 아직 닫히지 않은 교단의 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회당 내의 인원들에게 그의 등장을 알렸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꿀꺽.”

 

뚜벅-뚜벅

 

“대장님이다..”

 

 교단의 뒤편의 가림막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성을 향해 수백 개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혔다. 당당한 걸음걸이와 오른팔에는 서류 뭉텅이를 든 채 기분이 별로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영상으로만 보아왔던 오르카 1호의 사령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뚜벅-뚜벅

 

자신을 향한 수백 개의 시선에도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교단의 중앙으로 당찬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 이프리트들은 미소를 지었고, 블랙 리리스와 함께 회당의 문 앞에서 서서 그를 바라보는 보급대원들의 얼굴에는 환희가 떠올랐다. 아무리 저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한들, 그는 이 땅의 유일한 인간이자 4일이라는 짧은 시간 내로 그녀들의 숙원을 풀어준 인물. 그녀들의 영원한 우군,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이 회당에 모인 인원들은 그의 모습에도 도리어 미소를 지은 채 입술을 꾹 다문 채 그가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힘찬 발걸음이 멈춘 곳은, 교단의 정중앙에 있는 단상의 앞이었다.

 

툭-!

 

 오른팔의 겨드랑이에 꽂아두었던 서류 뭉텅이를 아무렇지 않게 단상 위에 내던진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회당 내에 있는 인원들의 얼굴을 훑기 시작했다.

 마치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인원들이 다 있는지, 또 없어야 할 인원이 있는지를 체크하던 그의 눈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회당의 문 앞에서 그를 바라보는 호박색의 눈동자였다.

 

‘전부 확인했답니다. 주인님.’

 

 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블랙 리리스는 살짝 온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향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냈다. 그리고 그 회답을 확인한 라붕이 작전관의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살짝이 열리기 시작했다.

 

“모두-”

 

“....”

 

 입술 사이로 들려오는 성인 남성 특유의 굵게 깔린 목소리에 그 자리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라붕이 작전관의 굳어있던 얼굴 위로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밥은 모두 잘 챙겨 먹었냐아아?!”

 

“예! 대장님! 와아아아아!”

 

“라붕이 대장님! 배식 좀 늘려주세요!”

 

“대.장.님! 라붕이! 대.장.님!”

 

 그의 호쾌한 목소리에 호응하는 것처럼 회당의 전체를 가득 메운 여성들의 목소리에 회당의 천장이 들썩대기 시작했다.

 라붕이 작전관, 이 세계에 떨어진 제2의 인간이자 요안나 아일랜드의 총책임자인 그를 향한 이 열렬한 환호성이 곧 그의 노력의 결실이자 그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증거, 그 자체였다.

 

51)

 

“와아아아아!”

 

“대.장.님! 라붕이! 대.장.님!”

 

 자신을 향한 무수히 많은 여성의 호응, 일순간 그녀들의 목소리에 압도될 뻔했던 라붕이 작전관은 오른손에 흥건히 묻어나오는 식은땀을 매만지며 입꼬리를 더욱더 위로 올렸다.

 

‘좋아. 첫 반응 괜찮고.’

 

 자고로 연설이나 발표를 할 때, 어떻게 관중의 관심과 호응을 끌어모을 것인가가 발표 전체의 평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본래라면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시작해야 했을 일이었으나, 이곳은 타지가 아니다. 그의 홈그라운드면 홈그라운드지, 절대 그에 대해 호응하지 않을 곳이 아니었다.

 

‘..근데 눈을 둘 곳이 썩 마땅치는 않네.’

 

 라붕이 작전관은 제 앞에서 흔들리는 흉부의 파도에 눈썹을 좁혔다. 회당의 중앙 좌석에 앉은 아우로라들과 포티아들, 거기에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엘븐과 그 곁에서 수줍게 박수를 치는 다크엘븐. 이 회당의 모두가 하나같이 전의 세계에서는 말을 붙여볼 용기조차 내기 힘든 미녀들이었기에 라붕이 작전관의 오른손의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이럴 게 아니지. 응. 우선 분위기를 더 고조시켜 볼까.’

 

“-배식은 우리만 자율이다! 잊었냐!”

 

“와-아아아아아!”

 

“대장님 최고임다!”

 

“밥 많이 먹어야 일을 하지! 안 그러냐!”

 

“와-아아아아아! 맞아요! 대장!”

 

“그래도 너무 먹진 마라! 급양 애들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니까!”

 

“아하하하!”

 

 한껏 고조된 분위기를 농담으로 또 한 번 일으켜 세운다. 꼴초뱀이 하던 걸쭉한 입담을 따라 제 속에도 없던 이야기를 연신 내뱉던 라붕이 작전관은 그녀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바라보곤 피식-코웃음을 쳤다.

 이런 분위기라면 이제 앞으로의 자신의 계획은 반절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4일간 삽질하고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다는 생각에 라붕이 작전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 주먹을 들어 단상의 위를 가볍게 내리쳐 한껏 달아오른 그녀들의 이목을 다시 자신에게로 모았다.

 

탕-탕-

 

“자자. 이제 서론으로 들어가 볼까? 다들 얼른 이야기 듣고 자야지. 안 그래?”

 

“맞아요! 대장님! 저희 너무 졸려요!”

 

“-그렘린! 대장님이 이야기하는데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아하하하!”

 

 제 말에 호응하는 여성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라붕이 작전관은 재빨리 그 자리의 주변 인원들을 머릿속에서 물색해내었다. 산의 꼭대기에 있는 풍력발전소와 태양열발전소를 관리하는 전력 생산 인원들, 그녀들의 얼굴을 전부 확인한 라붕이 작전관은 동시에 오늘 올라온 보고서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렘린! 너희들 보고서는 잘 봤다! 우선 너희는 자기 전에 고장 낸 발전기부터 고치고 와라!”

 

“에엑!?”

 

“하하하!”

 

 그렘린들과 포츈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샌드걸은 아차하는 얼굴로 제 이마 위를 덮었고, 그 광경에 회당 내의 인원들이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좋은 분위기다. 라붕이 작전관은 이제는 자기 집 안방과 같은 분위기에 한층 풀어진 얼굴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뭐. 서론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다. 혹 오늘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들은 이가 있나?”

 

“저요! 저요!”

 

“..엘븐! 우선 가슴골 좀 숨겨라! 눈 둘 곳이 없다!”

 

 라붕이 작전관의 물음에 재빨리 오른팔을 들며 허리를 흔들어대는 엘븐을 향해 라붕이 작전관은 눈썹 위에 손바닥 가림막을 올린 채 저거 봐라-저거, 하는 식으로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해대었다. 그리고 그의 숫총각 같은 반응에 엘븐의 얼굴에 장난기가 솟구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어머! 우리 대장님은 상당히 귀여운 분이시네? 제 가슴의 단추, 이것 좀 직접 잠가주세요!”

 

“너 손이 없냐?!”

 

“헤헷. 손은 있는데~제 흉부가 너무 무거워서요. 요새 어깨결림도 심하고~”

 

“시꺼! 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나 떠들어라!”

 

“네에~”

 

“아하하하!”

 

 그와 그녀의 농담 따먹기에 대다수 인원이 웃음소리를 내었으나, 리제와 리리스. 그리고 소완만큼은 날카로운 눈으로 엘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거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무색하게 엘븐은 한껏 어깨를 들썩이며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목청 높여 읊기 시작했다.

 

“먼저 우리 부품 생산시설에 더치걸이 파견 인원 중 한 명인 브라우니가 새로운 전투복을 훔쳐가려는 걸 봤죠.”

 

“음. 그래서.”

 

“그걸 본 우리 더치걸이 용감하게 그 브라우니를 붙잡았고!”

 

“음음.”

 

“둘이 힘 싸움을 하던 중에! 대장님이 등장해서! 파박! 하고! 브라우니를 해치우셨죠!”

 

“...엉?”

 

 끝이 왜 저래. 라붕이 작전관은 마치 권투를 하는 시늉을 부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엘븐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자유분방한 동네, 인간이 묻는 말에도 농담을 섞는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그에게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제 소속 식구들이 이 정도 장난을 치는 것쯤이야. 파견 녀석들의 발톱 끝에도 못 미친다. 라붕이 작전관은 살짝이 보조개를 올리며 연신 스트레이트, 훅을 날려대는 엘븐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래. 그래. 뒷이야기는 내가 하마. 수고했다.”

 

“헤헷. 나중에 목장으로 놀러 오세요~시원한 우유 한 컵 대령할 테니!”

 

“...생각해보고.”

 

“자매품으로 초코 우유도 있어요!”

 

“야! 엘븐!”

 

 엘븐의 불필요한 사족으로 곁에 가만히 앉아있던 다크엘븐의 새까만 피부가 붉게 타오르자 그것을 바라보던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라붕이 작전관이야 단상 아래서 제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으며 염불을 외기 바빴지만.

 

‘이 동네는 섹드립이 무슨 기본 탑재야! 진짜! 저런 얼굴과 몸으로 섹드립치지 말라고!’

 

 후끈해진 허벅지의 감각에 기대어 라붕이 작전관은 턱 아래를 매만지며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엘븐이 뭉그러뜨린 뒷이야기를 세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 그래. 엘븐의 이야기대로 파견 인원 중 하나인 브라우니 한 개체, 물어보니 북부 전선 출신이라 대답한 브라우니 하나가 몰래 전투복을 들고 떠나려다 더치걸에게 발각되었다.”

 

“...”

 

“더치걸은 그 자리에서 그녀를 제지하려 했으나, 브라우니는 쉽사리 전투복을 포기하지 않았고. 내가 자리에 도착했을 때, 몸싸움으로 발전한 둘 사이에서 더치걸이 옆으로 넘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

 

“..그래.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더치걸은 넘어졌고, 브라우니는 결국 그 전투복을 들고 임무로 복귀했다. 어떻냐? 꽤 재미없는 이야기지?”

 

“-우우우!”

 

 라붕이 작전관의 이야기가 끝맺음을 짓자 기다렸다는 듯 스틸라인 출신의 일동으로부터 야유가 쏟아졌다. 물론 그것은 그를 향한 야유가 아닌, 사건을 일으킨 브라우니를 향한 것이었다.

 

“우우우! 저도 그런 짓은 안함다! 뭠까!”

 

“진짜 군기가 빠져도 한참 빠진 놈들일세..삥땅을 못 치게 하니까 강탈을 해?”

 

“마..맞아요. 이건 저라도 못 참겠어요!”

 

 브라우니부터 이프리트, 거기에 평소에는 제 의견을 내비치지 않던 노움까지 두 눈썹을 부라리는 광경에 모두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전투 인원들이라 하지만, 감히 인간이 부임한 이곳의 인원들을 이렇게 막 대하다니.

 생산 인원들의 눈썹이 일제히 굳어가는 것을 확인한 라붕이 작전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분위기 형성 좋고. 배경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꼴초뱀의 말마따나 자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배경과 명분이 필요하다. 여기는 자신이 살던 세상보다 더 단순하고 일률적인 사회 속이니 그만큼 행동 하나하나가 중요한 곳, 라붕이 작전관은 그러한 생각으로 지금 회동을 모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둘 중, 이 회의 자체가 그에게는 행동 배경이었다. 라붕이 작전관은 깔깔 떠들어대던 회장 내의 분위기가 엄숙해진 것을 피부로 느끼며 이제 본론을 그녀들에게 슬며시 꺼내었다.

 

“..그래. 분명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이자마자 한 게 무엇인 줄 아나?”

 

“...”

 

“임관식을 했지. 그때부터 여기는 내 총책임구역이다. 내가, 사령관님께 직접 부여받은 이 직함에 걸린 임무를, 완벽히 성사시키기 위해서. 사령관님께 직접 하사받은 곳이다! 이 말이다!”

 

“옳소! 옳소!”

 

“그런데 내가 임관하자마자 무슨 일이 터진 줄 아나? 바로 보급 탈취행위가 내 눈앞에서 터졌다! 그것도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

 

 라붕이 작전관의 분기 어린 고성에 회당 내의 분위기가 점차 엄숙을 넘어선 고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분노가 사방으로 뻗어가듯 평소 화를 내지 않던 이들조차 눈썹을 부라리며 주먹을 꽉 쥔 채 라붕이 작전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그 녀석들을 터치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

 

“보급 탈취가 만연한 이곳의 1년이라는 시간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비단 북부, 남부, 동부 전선 인원들뿐 아니라. 오르카 본대에서 온 이들조차도 우리의 사정을 본대에 알리지 않고 도리어 보급 탈취를 다른 부대에까지 전염시켰다! 내 말이 틀렸나!”

 

“아니오! 오르카 본대 녀석들! 발단이 그 녀석들이었어요!”

 

“맞아요! 한번 봐주니까 우리를 아주 호구로 봤어요!”

 

“걔들 탓에 다른 애들까지 다 같이 그러잖아요!”

 

“햇츙! 버러지들! 쓰레기들! 주인님을 괴롭히는 나쁜 벌레들!”

 

 그의 물음에 사방에서 오르카 본대를 향한 분노어린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일순간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라붕이 작전관이 이곳에 당도하기 전까지 그녀들이 겪었던 무시와 천대는 그녀들의 가슴에 못 자국을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한껏 목청을 세워가며 본대와 전방 전선을 향한 비난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회당의 맨 윗자리에서 사방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무게감을 느끼던 한 소녀의 눈물샘이 그만 터지고야 말았다.

 

“훌쩍..”

 

“안드바리양. 너무 그렇게 울지 마요.”

 

“하..하지만..이게 전부 제가..”

 

“응응. 안드바리양의 호의를 권리로 받아들인 그녀들이 잘못인 걸요? 자자, 착하죠?”

 

“흐윽..리리스 언니..”

 

 이 모든 사태가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훌쩍대는 안드바리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주던 블랙 리리스는 제 품에 안긴 소녀의 등을 토닥이며 당당하게 단상에 선 제 주인의 모습에 눈웃음을 지었다.

 

‘아아. 주인님. 사랑스러운 저의 주인님. 어쩜 저리 당당하신지. 리리스, 너무 행복해요. 주인님의 이런 모습을 두 눈으로 보다니. 아아!’

 

“너희들의 분노는 곧 내 분노다! 나 역시 이곳의 총책임자! 파견 인원들의 농땡이를 막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보급 탈취를 멈추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헛수고였다!”

 

“와-아아아아!”

 

“그 녀석들! 인간님이 왔는데도! 정말 후안무치한 녀석들입니다!”

 

“맞슴다! 우리가 왜 삽을 들고 일함까! 원래라면 걔들이 해야 했던 일 아님까!”

 

“그..브라우니. 우리에게 삽을 주신 분은 대장님이에요..”

 

“아차. 실수했슴다.”

 

“-결국에는 탈취가 아니면 강탈! 이런 곳에서 대체 무얼 하란 말이냐! 아무리 내가 인간이라지만! 이건 선을 넘었다! 안 그런가?!”

 

“와아아아! 옳소! 옳소!”

 

“그 녀석들은 아주 매운 맛을 봐야 해요!”

 

“누나도 더 이상 못 참겠는 거거든! 왜 매일 산까지 올라와서 태양열 발전기 위에 누워 쉬는 거냐는 거거든!”

 

“맞..맞아요! 왜 저희한테 와서 매일 초코바를 내놓으라는 거죠! 맡겨 둔 것도 아니면서요!”

 

“왜 중간에 보급을 탈취해가?! 그러고도 당당하기까지 하다못해 우리보고 자기들 초소로 뭐 좀 배달해달라고 하지 않나! 우리가 날아다닌다고 해서 여기서까지 택배 배달을 하러 온 줄 알아!?”

 

“정말 엘레강스하지 못한 친구들이에요! 옷 수선을 무슨 잡일로 알고! 새로운 전투복을 굳이 받아갈 필요도 없으면서 우리 아이들을 매일 달달 볶았어요!”

 

“자기들 탄약을 왜 여기서 찾아! 기껏 열심히 정리해둔 탄약 박스들이 이리저리 뒤섞일 때, 그거 정리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나무를 베는데 왜 시끄럽다고 난리야?! 당연히 나는 걸, 굳이 벌목장까지 찾아와서 난리 치다 내 별장을 무단으로 사용하지를 않나! 아주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

 

“맨날 배식이 맛없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저희 주방장님이 오시고 난 이후로는 아주 더 달라고 아우성이야! 우리가 무슨 바보인 줄 알아?!”

 

“우리가 무슨 젖소인 줄 알아? 심심하면 우유 한 잔 내어달라고 찾아오질 않나! 우리는 방목하는 애들을 키우는 거지! 직접 우유를 짜내는 건 아니라고! 물론 가능은 하지만!”

 

 라붕이 작전관의 고성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올 때마다 사방에서는 그의 고성에 열렬히 환호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회장 전체가 메워졌다.

 그것은 그녀들이 1년이란 시간 내내 묵혀온 서러움과 분노의 환희, 그리고 그 1년이란 시간 동안 가슴 속에 숨겨왔던 분노가 담긴 원성으로 가득 찬 이 회당에서 라붕이 작전관은 속으로 침만 꿀꺽 삼키고 있었다.

 

‘씨발. 좆됬네. 무슨 제보가..끊이질 않네. 거기다 나도 분위기를 너무 탔는데. 이거..어떻게 수습하지?’

 

 설마 이렇게까지 열렬한 환호를 받을 줄이야. 자신이 무슨 대선 후보도 아닌데, 이 분위기를 어떻게 타파하란 말인가. 그리고 가만 들어보니 자기가 몰랐던 별의별 이야기가 제각각의 여성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니, 라붕이 작전관의 오른팔이 부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이걸 잠재울 방법이..아씨. 그 양반한테 괜히 정치니 뭐니 이상한 소릴 쳐들어서..’

 

 등줄기 사이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라붕이 작전관은 두 눈을 꾹 감은 채 들어 올린 오른손은 가만히 내버려 두고선 등 뒤로 숨긴 왼손으로 그의 부관에게 다급하게 SOS 신호를 보내었다.

 

‘아르망! 도와줘!’

 

“...폐하. 이제..”

 

 속으로 그녀의 도움을 기다리던 라붕이 작전관의 모습에 아르망은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 그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왔다.

 그리고 아르망의 제지에 라붕이 작전관은 왼손의 엄지를 척-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아르망!’

 

“..후훗.”

 

“작전관도 아직 서툴군. 후후.”

 

 아르망과 요안나의 웃음소리에 라붕이 작전관 역시 웃음을 만면에 건 채, 아직도 화를 식히지 못하고 있는 관중들을 향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제군들. 이제는 알았겠지. 우리가 아무리 좋게 나아가려 해봐야, 이 파견 분대원들은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말이다.”

 

“? 그렇다면?”

 

 라붕이 작전관이 점잖은 말투로 뒷말을 흐리자 분노로 아우성이던 여성들이 그의 뒷말을 듣기 위해 들어 올렸던 오른팔을 내리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그녀들의 반응에 라붕이 작전관은 여전히 사악한 미소를 유지하며 중지와 엄지를 손바닥 위에서 튕겼다.

 

딱-!

 

슈우우욱!

 

“...이건?”

 

 라붕이 작전관의 핑거스냅과 동시에 그녀들의 좌석에 달려있던 홀로그램 스크린 사출 장치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백색의 화면을 비추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타난 백색의 홀로그램에 그녀들은 이 스크린을 띄운 남자에게로 다시 일제히 시선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은 흥겨운 목소리로 그 홀로그램의 목적을 읊었다.

 

“이 홀로그램이야말로 우리의 첫 번째 한 걸음이다. 모두 거기에 자신의 소속과 개체명, 그리고 고유번호까지 기입한 후. 자신들이 어디서, 무얼, 언제, 누구에게 당했는지를 서술해라.”

 

“어..그걸 써서 어쩌려고?”

 

 아우로라의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의 얼굴이 한층 더 사악하게 일그러졌다.

 

“어쩌긴. 본대에 있는 우리 착하디착하신 사령관님께 보낼 거다. 한마디로 그건, 일종의 탄원서라는 거지.”

 

“..아! 탄원서!”

 

“그래. 우리 사령관님의 성격은 잘 알고 있겠지? 너희를 괴롭힌 건 본대 애들도 있겠다만 하지만 사령관님은 그 실태를 모르고 계실 거다. 전방은 그만큼 바쁜 동네거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라붕이 작전관의 모습에 이 홀로그램 스크린의 의미를 깨달은 이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홀로그램 타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직 이것이 무엇인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이들은 계속해서 라붕이 작전관의 설명에 집중했다.

 

“전방이 바쁜 거야, 별수 없는 일이다.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사령관님은 하루에도 수십 번의 전투를 소화하시고 또 병사들의 육성에 여념이 없으시지. 이런 후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야 전방의 나날에 비하면 별 볼 일 없을 터.”

 

“...”

 

“하지만 동시에 사령관님이 이 이야기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앞의 이야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사령관님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인간으로 대하신다. 그렇기에 더욱더 후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실 분이지.”

 

“응응. 안 그러면 우리 대장이 여기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어.”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더치걸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그램 스크린 위에 무언가를 써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사령관이 정말 전방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이렇게 자신들의 앞에 새로운 인간을 보내줄 리가 없었다. 아직 희망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 이들은 재빨리 홀로그램 스크린 위에 각각 겪었던 불상사들을 적어 내렸다.

 

“모두 작성하는 것은 진실만 포함된 내용이어야 한다. 절대, 단 한 줄의 거짓도. 단 하나의 허투루 과장을 섞어서는 안 된다!”

 

“네!”

 

 행여 다른 방향에서 꼬투리가 잡힐까 걱정하는 그의 말에 여성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상세히 서술해 내려갔다. 그런 그녀들을 빤히 바라보던 라붕이 작전관은 여전히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팔뚝으로 훔쳐내었다.

 

‘..사실 부 지휘관 받고 나도 전방에 있을 뻔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전부 내 공으로 돌렸다가는 큰일 나지. 암.’

 

 자기가 원해서 후방으로 왔다는 이야기는 그녀들에게 하면 안 되겠다. 라붕이 작전관은 속으로 진실을 깊이 감추어 두기로 한 채, 하나같이 열심히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여성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건 일종의 청원이나 마음의 편지 같은 거지. 청와대 양반들이야 제 입맛대로 골라 먹는 녀석들이었지만, 사령관이 제 설정대로 가는 녀석이라면 이 아이들의 고생을 무시하지 못할 터. 이 동네에서도 마음의 편지는 효과가 죽이겠네!’

 

 라붕이 작전관은 자신이 그려가는 배경이 점차 완성되어 가자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돌려 제 뒤에 서 있는 두 여성을 바라보며 오른 엄지를 척-올렸다.

 그런 그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아르망과 요안나 역시 씨익 미소를 지으며 제각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렇게 그녀들이 탄원서를 쓰는 것을 기다리길 십 여분, 모두가 저마다의 탄원서를 교환해 읽어가며 서로 고개를 끄덕이는 광경에 라붕이 작전관은 침묵을 깰 타이밍을 읽었다.

 

“모두 작성이 끝났나? 그렇다면 저장 버튼만 누르도록. 누르는 즉시, 너희들의 사연은 내 업무 컴퓨터로 전송된다.”

 

“응! 대장!”

 

“헤헤. 어디 매운맛 좀 봐라! 이 파견 녀석들!”

 

‘좋아. 이제 명분은 내게 있다.’

 

 행여 실수로 취소 버튼을 누를까 전전긍긍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제 계획의 반이 완수되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제 컴퓨터에 그녀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쌓일 터.

 드디어 원하는 것 중 하나를 얻었다. 그 사실에 그의 오른뺨에 보조개가 솟아올랐다.

 

“좋다. 너희들의 이야기는 내가 사령관님께 직접 올리도록 하겠다.”

 

 라붕이 작전관의 말에 회당에 모인 이들의 얼굴에 이제는 분노 대신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정말이지, 1년간 묵혀왔던 문제가 쉽게 해결되다니, 그녀들의 마음속에선 이제 얼굴밖에 모르는 사령관보다 눈앞에서 자신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라붕이 작전관에게 더욱더 마음이 쏠렸다.

 그런 그녀들의 열성어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붕이 작전관은 잠깐 턱을 짚고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로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리제의 곁에 앉아있던 갈색의 머릿결이 인상적인 시골 소녀가 손을 들어 질문을 요청했다.

 

“음? 드리아드. 질문해라.”

 

“그..그러면 이제 파견 인원들이 더는 저희를 괴롭히지 않을까요?”

 

“물론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후우.”

 

“하지만 말이다. 너는 그것으로 만족하나?”

 

“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드리아드를 향해 라붕이 작전관은 어딘가 분기가 서린, 아니면 짜증이 서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을 내던졌다. 그의 갑작스러운 되물음에 드리아드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그녀의 곁에 있던 다프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음. 다프네.”

 

“대장님. 그럼 저희가 받아온 1년의 고통은, 누가 풀어주는 거죠?”

 

“...”

 

“그저..이제부터 그냥 예전처럼 그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끝인가요?”

 

“...그래. 그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서러움이 가시지 않은 다프네의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것만큼은 그가 나서서 선동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들이 직접 나서서 제의를 해와야 뒤에 벌어질 일들에 대한 그의 정당성이 살아나기에, 라붕이 작전관은 드리아드와 다프네가 던진 불쏘시개를 들고선 이 회당의 내부를 다시 한번 분노의 불길로 휘감아 들도록 만들었다.

 

“모두! 아까의 다프네의 물음에 어떻게 생각하나!”

 

“싫슴다! 그 녀석들이 이제부터 자기들은 달라졌다고! 살갑게 구는 건 상상도 하기 싫슴다!”

 

“맞아! 결국에 고통받은 건 우린데! 왜 자기들도 혼났다면서 헤실헤실거리는 꼴은 보기도 싫어!”

 

“누나도 그건 싫은 거거든!”

 

 그의 외침에 크게 호응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라붕이 작전관은 여전히 비릿한 미소를 유지한 채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래!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 녀석들이 제 두 다리로 이 섬을 떠나는 모습 따위! 죽어도 보기 싫다!”

 

“응! 대장! 나도! 나도 그래!”

 

“맞아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함성에 라붕이 작전관은 재빨리 눈을 굴려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아르망의 푸른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런 그의 무언의 신호에 아르망은 제 책을 촤르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펼치며 교단의 위로 거대한 원형 홀로그램을 투사했다.

 그리고 홀로그램 위에 펼쳐진 각종 일과 계획표,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계획표인지를 눈치채지 못하던 이들의 두 눈에 D-9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지게 들어왔다.

 

“D...9?”

 

“제군들의 요망은 이미 예측했었다. 어차피 전부를 처벌하지 않는 한,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파견이니까,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 가겠다는 녀석들도 있을 것이다.”

 

“...이뱀. 저게 대체 뭠니까?”

 

“언제까지? 이 끝없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그 녀석들의 고충 때문에 우리의 고충을 늘려야 하나?”

 

“나도..잘 모르겠는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홀로그램 위의 일과표. 빽빽이 놓인 일과표들을 하나하나 훑어 읽어가던 이들의 두 눈에 이번에는 D-day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의 일과표를 읽어내린 이들의 얼굴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경악스러움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이건.”

 

“대..대장님?”

 

“약속하겠다. 이 작전이 끝나면, 더는 우리 동네에서 깽판을 칠 녀석들은 없을 거다.”

 

“...오. 지저스..”

 

“쯧쯧. 오드리. 틀렸다.”

 

 D-day라는 날짜의 일과표를 읽어내리던 오드리의 입에서 환한 미소와 함께 예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라붕이 작전관 씨익-웃으며 제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앞으로 이 땅에 예수는 9일 밖에 없을 거다. 작전명, 나락 떨구기. 어때? 다들 나와 함께할 테냐?”

 

52)

 

 회동이 끝난 직후, 라붕이 작전관은 아까의 패기는 온데 간데 없이 제 업무실의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린 채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곁에 서 있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했다.

 

“폐하. 모두가 폐하의 의견에 찬성했습니다. 앞으로 9일간 요안나 아일랜드의 업무 시간을 늘리고, 또 본래 설치해두었던 폐하의 간판 중 취사장의 것은 치우기에 협력한다고 했습니다.”

 

“좋아. 앞으로 9일간 자율배식으로 전환한다. 내일부터 보급계 애들한테 비축해두었던 영양 자원의 일부를 소완 쪽으로 넘겨두라고 지시해둬.”

 

“작전관, 그리고 임시로 설치해두었던 검문소 역시 폐기해야 할 것 같군. 그녀들의 행동에 제약이 걸릴지도 모른다.”

 

“음. 블랙 리리스에게..음. 아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라붕이 작전관은 갑자기 말을 끊곤 발을 걸쳐두었던 책상의 위를 아예 밟고 올라섰다. 그리곤 그는 아무도 없을 천장의 아래를 툭툭-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여기에 누가 있다면, 얼른 다른 방의 환풍구를 통해 나와서! 내 업무실로 오도록!”

 

“? 작전관. 천장에 대고 무슨..”

 

쿠-당탕! 쿵! 쿠-당!

 

“...이게 무슨 소린가 대체?”

 

 라붕이 작전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요안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옆방으로 옮겨가는 굉음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라붕이 작전관은 한숨을 푹-내쉬며 곧 방에 찾아올 이를 위해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똑-똑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주인님. 부르셨는지요?”

 

“...응. 그래.”

 

 애써 태연한 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태연한 것인지 모를 블랙 리리스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이제껏 보여주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대신 정말 지친다는 얼굴로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를 한번, 아르망의 푸른색 눈동자를 한 번씩 번갈아 보며 또 한 번 한숨을 푹-내쉬었다.

 

“-하아”

 

“폐하. 한숨을 자주 내쉬면 복이 달아난다고 합니다. 후훗.”

 

“어머. 정말인가요? 아르망 추기경?”

 

“그렇답니다. 속설이긴 하지만요.”

 

“주인님. 얼른 숨을 훅-들이키세요! 복은 놓치면 아쉬운 거랍니다!”

 

‘..아니. 솔직히 지금 복이 넘치는 상황인지 아닌지 가늠도 안 가는데..’

 

 제 옆에서 만담을 나누는 두 이상형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너털웃음을 지어내며 등을 조금 일으켰다. 아까의 회의에서 너무 진을 뺀 탓일까, 그에게는 더 이상 무어라 반박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리리스라고 불러도 되겠지?”

 

“물론이죠! 주인님!”

 

“..응. 그렇게 할게. 리리스, 앞으로 네 근무지..”

 

“주..주인님이 제 이름을..하으읏!”

 

 앞으로의 계획을 간단하게 설명하려는 라붕이 작전관의 부름에 블랙 리리스의 어깨가 갑작스레 들썩대곤 그녀는 갑자기 심장마비가 온 환자처럼 명치 위를 움켜쥔 채로 옆으로 푹-쓰러져 내렸다. 그리고 그 황당한 광경에 그 자리의 모두가 폭신폭신한 카페트 위에 쓰러진 블랙 리리스를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아르망. 이거 연기야? 아니면 진짜야?”

 

“작전관, 내가 보기엔 진짜 기절이라네.”

 

“...”

 

탁-!

 

 제 이름을 한번 불렀다고 기절이라니, 라붕이 작전관은 눈앞의 비극에 어이없음을 넘어 머리가 쿡쿡-쑤셔와 손바닥으로 이마 위를 내리쳤다. 그리곤 왼손으로는 행복한 미소와 함께 기절한 블랙 리리스를 가리켰다.

 

“..요안나. 얘 좀 소파 위에 눕혀 놔줄래?”

 

“..정말 그대의 곁에는 개성 넘치는 친구들이 많군. 하하하!”

 

‘저걸 개성이라고 해야 하나?’

 

 가장 점잖을 줄 알았던 애가 저 모양이라니. 라붕이 작전관은 지친 눈썹으로 그나마 가장 믿을만한 똑똑한 금발의 소녀에게 눈을 돌렸다.

 

“아르망.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무엇인지요. 폐하.”

 

“배경도 있겠다. 호응도 얻었겠다. 다 좋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본대까지 처벌할 명분이 부족하다고 본다만..”

 

“..그렇군요, 맞습니다. 폐하.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애초에 내겐 군권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라붕이 작전관은 요안나 아일랜드의 총책임자지만 동시에 타 오르카 저항군의 직할 소속인 파견 부대를 지휘할 명목도, 권한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을 놓친 것 같아 그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불안에 할 때, 아르망이 싱긋이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불안 중 하나를 뒤집어주었다.

 

“폐하께서는 요안나 아일랜드의 총책임자이십니다.”

 

“..그래. 하지만..”

 

“예. 폐하. 하지만 그와 동시에..폐하께서는 특수작전관이십니다.”

 

“..아! 그래! 그게 있었구나! 특수 뭐시기!”

 

 미처 매일 대장이라고만 불렸던 탓에 그 자신도 잊고 있었던 또 하나의 칭호, 특수작전관. 칭호에서부터 느껴지는 무언가 특이한 네이밍을 보았을 때, 어쩌면 무슨 방도를 써서든 군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붕이 작전관이 한시름을 내려놓자 아르망은 또각-대는 구두굽 소리를 내며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명목, 분명 본대의 6대 지휘관님들이 이해하실만한 명분을 원하시는 것이겠죠?”

 

“..아니. 아르망. 그건 네가 틀렸다. 내가 원하는 명목은 사령관님이 내 행동을 이해할만한 명분이야.”

 

“...외통수군요. 후훗.”

 

 라붕이 작전관은 사령관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순진한 양반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를 고민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후회물 속의 금태양처럼, 그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그는 최대한 제 머리를 굴려 그 양반을 어떻게 설득할지를 고민했다. 자기가 뭣 때문에 이 이상한 명찰을 달고 사는데, 괜히 이번 일로 그의 눈밖에 났다가는 허사도 이런 허사가 없다.

 

‘그 녀석이 설정대로 가면 내 행동을 가만 보고 있지는 않을 거 같은데. 탄원서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흐음..그래도..’

 

 그렇게 라붕이 작전관이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또 바라보고 있을 때, 책상 위에 얹힌 그의 팔 사이로 무언가 물건이 하나 쏙-하고 들어오자 그의 시선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이건..”

 

“폐하의 단말기입니다.”

 

 아르망의 짤막한 설명에 라붕이 작전관은 제 손에 들린 단말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퍽 귀여웠는지 아르망은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으며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고민을 풀어주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그 안에 폐하의 고민을 해결해줄 단서가 들어있답니다?”

 

“...단서? 잠깐만..음. 그러니까 이게 전원버튼 같고..응. 켜졌다. 그리고..”

 

 라붕이 작전관이 단말기의 조작법을 하나하나 익혀갈 때, 순간 그의 두 눈썹이 위쪽으로 휘어져 들어갔다.

 

“이..이게 뭐야?!”

 

“음? 작전관. 무슨 일인가?!”

 

“-주인님! 무슨 일이죠?!”

 

 라붕이 작전관의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그의 테이블로 걸어오던 요안나와 소파에 누워있던 블랙 리리스가 동시에 그의 등 뒤로 날아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들 역시, 라붕이 작전관이 손을 부들거리며 보고 있는 장면들을 목격하고선 자신들의 입 위를 훅-가렸다.

 

“..이..이게 씨발...이게 씨발 뭐야! 이게!”

 

“어떠신가요? 폐하. 이제..사령관님을 위한 명분도. 생긴 게 아닌지요?”

 

“..이건 내 주군이 차마 몰랐으면 하는 거롤세..”

 

“와..진짜 이건..주인님. 더 안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 썅것들! 내..내 기필코 지옥을 보여준다! 꼭!”

 

 그렇게 엑조디아 파츠를 전부 모은 라붕이 작전관의 얼굴에는 기쁨이라던가 환희 대신 마치 물이 끓는 주전자와 같이 분개함만이 그의 뻥 뚫린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 썅것들아아아아!! 9일..9일 뒤에! 두고 보자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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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허! 100..109개 씨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장난치나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장편 문학에 추천수 100개 시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추천수에 압박 받는다고 했더니 아예 그냥 날 눌러 죽이려고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 시발 죽여라 응 죽여. 이제 라붕이의 심시티가 시작하려는데, 나 먼저 죽겠다. 응. 24시간 이내로 두 편 올렸으니 아무튼 1일 2편했다. 아무튼 그런 거다. 누가 내 손목 좀 뜯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