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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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알겠죠? 알비스! 절대로 다른 분들한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면 안 돼요!’

 

‘응! 알겠어. 베라 언니! 초코바 먹을래?’

 

‘초코바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절대! 절대 명심해요!’

 

“하악..허억..베라..베라 언니..”

 

 정오가 지난 오후, 하늘의 정중앙에 걸려있던 태양이 조금씩 지평선을 향해 내려와 뜨거운 햇볕이 조금 누그러진 시간대, 사방이 푸르른 해수면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섬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우거진 녹음 사이로 남성의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훈련생! 정신 못 차리겠나! 앞이 어두워? 어! 이렇게 햇볕이 쨍쨍한데! 왜 초점을 못 잡나!”


“-악!”

 

“악! 악! 악! 좋다! 좀 더 정신을 잡아라! 너희들이 그토록 원하던 초코바가 산을 이루는 영양 생산 설비까지 2km 남았다! 어떤가!”

 

“-아아악!”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성의 고함에 등 어깨 위로 비료 포대를 들고 산길을 내려온 여성들이 비지땀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들의 이마 위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앞으로만 시선을 고정해 걸어나갔다.

 

‘초..초코바..’

 

 대열의 후열, 언제나 천진난만하던 은색의 단발머리 소녀는 남성의 외침 속에서 들려온 단어 하나에 힘을 얻은 듯 땀방울이 흘러내리던 뺨 위로 웃음기를 머금었다.

 

‘헤헤..초..초코바..’

 

“너 왜 웃어? 응? 내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니까 그렇게 좋아?”

 

“-에에?”

 

 기다랗고 검은, 마치 라붕이 작전관의 손에 들린 지휘봉처럼 아주 기다란 초코바를 머릿속에서 그려가던 알비스는 갑자기 제 귓가에 바람을 훅 불어넣는 조교의 등장에 턱 아래로 땀방울을 뚝뚝 흘려대었다.

 하지만 그녀의 곁으로 걸어온 갈색 장발의 조교, 리제는 자신의 목소리에 덜덜 떨어대는 알비스들과 그 주변인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그녀 특유의 낮게 깔린 목소리로 주변의 열기를 식후었다.

 

“너희들이지? 계속해서 드리아드가 기껏 이쁘게 포장해서 정리해둔 초코바를 서리해가던 애들이? 맞지?”

 

“-에..아앗!”

 

“왜? 또 웃는 걸 보니 가서 또 서리하려고? 응? 대답해볼래?”

 

“얏!”

 

“히히히! 왜? 저번처럼 또 밤 중에 몰래 들어와 봐. 이번에는 그 귀여운 머리띠가 아니라 좀 더 아래를 잘라줄게! 히히히!”

 

“-야아아앗!”

 

 분명 듣기에는 제 자매 중 베라 언니와 비슷한 목소리라고 알비스는 그렇게 리제의 목소리를 품평했다. 하지만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도 느껴지는 저 두 눈에 담긴 푸르딩딩한 기백이란, 알비스들이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순수한 적의였다.

 아까까지 머릿속에 초코바를 그리던 순백색의 토끼들은 초코바보다 어서 이 기나긴 행군이 끝마치기만을 기대했다. 그리고 하염없이 앞을 먼저 걸어나가는 이들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만치서 라붕이 작전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저 영양 생산 설비의 인원들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처럼 그녀들의 눈가에 눈물을 머금게 했다! 그건 알고 있나!? 앙?!”

 

“...”

 

“시도 때도 없이 그 알량한 초코바 하나를 먹겠다고! 그녀들이 쌓고 있던 영양 자원에 손을 뻗었지! 마치 서리를 즐기는 꼬맹이들처럼!”

 

“...”

 

 처음에는 삥땅이라는 용어를 알비스들은 몰랐다. 애초에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고, 본대건 전방 지역이건, 알비스들이 원하는 것은 초코바와 편히 쉴 수 있는 즐거운 한때.

 그리고 이 땅 위에는 그 두 가지가 허용되는 공간이었다. 초코바를 하나 더 집어간다고 뭐라는 사람도 없었다. 탄입대에 초코바를 쑤셔 넣든, 초소에서 낮잠을 자든. 주변의 다른 파견 인원들이 더 챙겨주면 더 챙겨줬지.

 

“그렇게 훔쳐 먹은 초코바가 그리도 달 더냐! 동료들의 눈물이 그리도 시원하더냐!”

 

“...히..히잉..”

 

 그렇게 즐거운 한때를 만끽하다 보니 심심해졌었다. 그 때문인가, 매일 먹던 초코바가 조금씩 질려가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서리라는 걸, 그녀들은 직접 계획했다. 마치 본대의 안드바리에게서 몰래 초코바를 훔치는 알비스들처럼.

 

‘...히잉. 알비스가..잘못했어..’

 

 드리아드와 아쿠아, 그리고 다프네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생산 설비의 뒤로 도망가 훔쳐 먹던 초코바가 얼마나 그리 달콤하던지. 마치 일과 시간처럼 매일 밤이든, 낮이든. 그녀들은 저마다 작전까지 구상해가며 생산 품목들을 서리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이 귀신같은 교관의 등장 이후, 알비스들은 더 이상 서리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들의 숙소에는 아직도 저 교관의 날카로운 가위에 의해 두동강이 난 흰색의 머리띠가 덩그러니 방치된 상태였다.

 

“너희들은 단순히 초코바 하나, 과일 음료 하나. 거기에 더해 홍차 보관 설비와 같은 기호품들의 생산 설비까지! 들락날락! 왜 이런 일로 화를 내냐! 왜 못 들어가게 하냐! 이랬겠지!”

 

“-악!”

 

“본관의 말이 틀렸나!”

 

“아악!”

 

“이제야 목소리가 들을 만하군. 왼발! 왼발! 왼발!”

 

‘베..베라 언니. 알비스가..알비스들이 잘못 했어어..’

 

 그렇게 몇 시간이나 이 흙바닥을 걸어갔을까, 산속을 완전히 빠져나와 콘크리트로 닦인 도로 위를 걷던 그녀들의 시야에 바다를 등지고 있는 거대한 원형 돔과 익숙한 모양새의 생산 설비 공장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다.

 

삑-! 삑-! 삑-!

 

“악!”

 

삑-삐삐-삑!

 

“악!”

 

 이제는 리듬감까지 변화해가며 자신들을 저 거대한 돔으로 인도하는 호루라기 소리에 파견 인원들은 저마다의 목청이란 목청은 세워가며 한발, 한발. 그녀들이 그토록 좋아하던 영양 생산시설로 걸음을 옮겼다.

 

“이 자식들아! 고개를 똑바로 들어!”

 

“아...아악!”

 

“목소리가 그것밖에 안 나나! 본관이 임관했을 때처럼! 환호성을 질러-보란 말이다아!”

 

“아아아아악!”

 

“좋다! 앞에 인원부터 천천히!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비료 포대를 저 돔 입구 좌측에 두고 온다! 실시!”

 

“악!”

 

 어깨에 걸친 검은 장교 코트를 펄럭대며 여전히 지친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한껏 미간을 굳힌 채로 성을 내는 라붕이 작전관의 명에 따라 제일 선두를 나서던 그룹부터 천천히 돔 입구 좌측으로 비료 포대를 쌓기 시작했다.

 

“헤엑...헤엑..”

 

‘이..이제 살겠다.’

 

 제일 앞을 걷던 북부 전선의 이프리트는 한결 가벼워진, 정확히는 돔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으로 땀이 뭉쳐 있던 어깨와 등의 위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이마 위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들을 훑어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드러눕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저 귀신같은 인간이 무슨 꼬투리를 잡아 자기와 제 후임들을 갈굴지 모를 일, 이 지옥훈련의 시작이 제 막내의 실태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것만 숨길 수 있다면 이런 고난의 행군쯤이야 그녀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숨을 헐떡대며 땀을 훔치고 있자니 돔 너머로 펼쳐진 밀밭과 그 사이에 서 있는 드리아드들이 그녀들의 눈에 들어왔다.

 

“...”

 

 열심히 밀을 가꾸며 또 잘 읽은 밀들을 손에 들린 거대한 낫으로 세심히 거두어내는 드리아드들은 제 일에 얼마나 집중하는 것인지 돔 유리창 너머에서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는 파견 인원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우와.”

 

 어느새 파견 인원들은 저마다 비료 포대를 내려놓고선 드리아드들의 등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돔의 천장에 달린 인공환경 조성기, 그리고 그 위를 날아다니며 조작하는 페어리들. 매일 이곳을 찾을 때마다 보는 장면인데, 이렇게 자세히 그녀들의 뒤를 쫓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뚜-벅! 뚜-벅!

 

“..드리아드들은 여기서 밀을 가꾸기를 4시간, 벼를 수확해 탈곡기에 넣기를 3시간. 매일같이 늘어나는 작물들을 관리하느라 허리를 필 겨를도 없다.”

 

“...”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아까와 같은 고함이 아닌, 천천히 이야기를 읊어주는 선생님처럼 다감다감한 그의 목소리에 파견 인원들은 귀를 기울였다.

 

“오르카 저항군은 점차 규모를 늘려간다. 사령관님이 제조를 하든, 너희들이 새로운 인원을 구조하든. 그 수는 배로 불어나고 있다. 내 말이 틀렸나?”

 

“...악.”

 

“그런데 너희 파견 인원들은 저들을 돕지 못할망정 아무 스스럼없이 물자를 빼돌렸지.”

 

“...”

 

“내가 여기와서 제일 처음 본 브라우니, 둘. 기상!”

 

“-악!” “악!”

 

 라붕이 작전관의 호령에 200이 넘어가던 이들 중 두 명의 브라우니들이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 그녀들을 향한 매서운 시선들, 라붕이 작전관은 그 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쟤들한테서 물자 삥땅 받은 놈들도. 다 기상!”

 

“-아악!”

 

 그의 다음 호령에 무려 수십에 달하는 여성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러자 라붕이 작전관은 코웃음을 치며 제 손에 들린 위스키 병의 위로 지휘봉을 가져다 대었다.

 

뗑! 뗑!

 

“너희들이 지금 누굴 비난하고, 누굴 비판하냐? 엉? 다음에 내가 뭐라 할 것 같나?”

 

“...”

 

“여기서 삥땅 안 쳐본 새끼들. 나와. 이러면 몇 명이나 나올까! 아아?!”

 

“-아악!”

 

 그의 호통에 본대 소속 브라우니를 노려보던 인원들의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갔다. 여기와서 삥땅을 안 친 놈들이 정말 몇이나 있을까, 파견 인원들은 차라리 안 친 녀석을 불러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다시 그녀들의 귀로 땡땡!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 감지 말고! 자! 저걸 봐라! 저게 뭐냐!”

 

 라붕이 작전관의 지휘봉이 어딘가를 가리키자 그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어느 비닐하우스 모양의 건물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건물 앞에, 작은 팻말이 박혀 있는 것이 제각기 그녀들의 시선에 들어오자 그녀들은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것처럼 시선을 회피하려 들었다. 

 

“저게 뭔지 아는 훈련생 있나?”

 

 그의 짤막한 물음에 땀을 흘리던 인원들 중, 어느 백발의 소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알비스 훈련생, 저게 뭐냐?”

 

“..그..그게 홍차 생산 설비의 문을 열지 마시오. 라는..팻말이야..요.”

 

“...맞다. 너희들이 하도 궁금하다고 문을 열어 재꼈던 탓에 아쿠아가 울어대서 내가 달았다.”

 

“...”

 

“그 어린 소녀가 너희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울었다. 저걸 설치하고 나니 저기, 저것 봐라. 웃고 다니잖냐.”

 

“...”

 

“조금만 배려하고, 조금만 신경 썼어도. 본관이 이렇게 너희들을 굴릴 일은 없었을 거다.”

 

 낮게 깔린 남성의 말에 파견 인원들은 입술을 삐죽이기보다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들이 벌여왔던 일들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모습을 보던 라붕이 작전관은 조심히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며 뒷걸음질을 쳤다.

 

‘옳지. 옳지. 수련회 분위기 형성 완료.’

 

 아까까지의 진중한 얼굴 대신 처음처럼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뒤로 물러선 그는 저만치리 뛰어오는 다프네에게 쉿-하고 신호를 보내었다.

 

“다프네. 애들 참교육 중이다. 조용히.”

 

“..아! 네. 대장님. 후훗.”

 

“어때? 네가 보기엔? 만족하냐?”

 

 중앙 회당에서 당당하게 그녀들에 대한 강경처벌을 요구한 다프네에게 라붕이 작전관은 여전히 웃으며 무릎 사이에 고개를 숙인 파견 인원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광경에 다프네 역시 이전과 같은 쓴웃음보다는 해맑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장님. 오시기 전까지의 과정도 다 봤어요. 후훗.”

 

“내가 너희들 한은 풀어주겠다니까. 크큭.”

 

“...솔직히 지금 즐기시는 중이시죠? 저희보다 더 즐거워 보이시는데.”

 

“어어? 날 나쁜 놈 만들지 마라. 난 착해.”

 

 뒤에 남은 게 얼마나 많은데. 라붕이 작전관은 그렇게 뒷말을 남기곤 다시 생산 설비의 입구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몇몇 조교들 역시 다음 행군을 위한 몸풀기를 시작했다.

 

“언니.”

 

“...응.”

 

 검은 모자와 검은 선글라스를 꼈음에도 갈색의 장발을 늘어뜨린 리제를 향해 다프네는 발소리 대신 날갯짓을 해가며 그녀의 곁으로 날아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제 언니에게 건네었다.

 

“이거, 가시면서 드세요.”

 

“...”

 

 다프네가 내민 것은 영양 생산 설비에서 만들어내는 과일음료 캔 묶음, 정확히 라붕이 작전관까지 포함해서 6개가 담긴 작은 상자였다.

 

“해..익..아..아니.”

 

“..언니? 혹시 이거..싫어 하시나요?”

 

 리제는 다프네의 손에 들린 음료수들을 내려다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고개를 삐걱대었다. 제 언니의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에 다프네는 행여 자신이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닌지 눈앞의 언니처럼 볏짚 모자 아래로 식은땀을 흘리며 가느다란 자신의 손가락을 꼬물대었다.


"...언니. 언니가 가서 뭐라 좀 해봐요."


"..아니. 내가 간다고 저기서 뭔 말을 해?"


"...하아. 저 천치가 정말."


뚜벅-! 뚜벅-!


 본래 훈훈해야 할 광경이 무슨 얼음장처럼 변해가자 눈살을 찌푸리던 조교 중, 은발의 여성이 성큼성큼 자매들 사이로 걸어와 아직도 다프네의 손에 들린 음료캔 박스를 낚아채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다프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양? 정말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아..아! 네! 리리스씨. 뒷일도 잘 부탁드릴게요!”

 

“-햇츙! 네가 왜 받아!”

 

 블랙 리리스에게 음료캔 박스를 넘긴 다프네가 볏짚 모자를 살포시 집곤 고개를 숙이며 날아가자 조교들은 가벼운 손 인사로 그녀를 배웅했다. 그런 와중에 블랙 리리스는 제 답답한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린곤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쉿. 아직 목소리 높이지 마. 스토커. 그리고 좀 여동생한테 살갑게 굴어 봐.”

 

“..이익.”

 

“올 때는 그렇게 동생들 괴롭힌 애들 갈구더니. 왜 이렇게 또 애들 앞에 서면 딱딱하게 굳어? 온 지 10일도 넘었는데.”

 

“그..그게. 너도 알잖아. 아무리 자매라지만, 사실 나는 진짜로 다프네랑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는걸.”

 

“...그냥 게임 속에서 하던 것처럼..아. 너 게임 속에서도 대화는 영 별로였지?”

 

“-오늘 저녁에 조심해. 해충.”

 

“흐흥. 그렇게 노려봐도 전 아무렇지 않다네요~”

 

 선글라스의 짙은 썬팅 너머로도 느껴지는 살벌한 리제의 눈동자에 리리스는 능청맞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제 콧등에 걸린 썬글라스 다리를 으쓱 올렸다. 그렇게 그녀들이 떠들고 있자니 저 멀리서 앞서 걸어간 라붕이 작전관의 목소리가 하늘 전체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아아!

 

“? 이..이건.”

 

 어딘가 지직-거리는 소리가 같이 섞여 나오는 라붕이 작전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인 채 묵념에 잠겨 있던 파견 인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어느새 지나왔던 도로 위에 서 있는 라붕이 작전관을 바라보았다.

 언제 저기로 갔는지, 하지만 그 사실보다 더 이상한 것은 그의 뒤로는 지프차 한 대가. 그리고 위스키 병을 들고 있던 왼손에는 거대한 스피커 폰이 들려있다는 것이 그녀들의 주목을 이끌었다.

 

-전 훈련생들은 들어라! 지금 즉시 행군 코스 위로 8열로 선다! 실시!

 

“아...악!”

 

 잠깐의 휴식 후 또 행군하는 것인가. 이제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친 그녀들이 군홧발 소리를 내며 뛰어오자 라붕이 작전관은 뻥 뚫려있는 지프차의 뒷자석을 밟곤 일어선 채 운전석에 앉아있는 여기사에게 담담하게 말을 걸었다.

 

“요안나. 규정 속도. 알지?”

 

“하하하! 맡겨주게나! 이거, 가장 즐거운 드라이브가 되겠네만!”

 

“오우. 너도 즐겨. 나도 이제는 즐기련다.”

 

‘씨발. 사령관한테 뒤지든, 철충한테 뒤지든. 이제는 어떻게든 되겠지.’

 

 돌아오기에는 너무 깊은 강을 건넜다. 라붕이 작전관은 제 머리 위로 쨍쨍 내리쬐는 햇볕을 즐기며 잠깐 떼었던 스피커 폰의 확성기 위로 다시 입술을 대고선 천천히 제 앞에 8열로 줄을 서는 개구리 전투복을 입은 여성들을 향해 담담하게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읊으려 들었다.

 

-이제부터 본관과 함께 즐거운 오늘의 마지막 행군을 한다. 어떤가. 나쁘지 않은가?

 

“즈..즐거운?”

 

“무슨..소리지?”

 

 확성기의 기계음 사이로 흘러나온 그의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파견 인원들은 오와 열을 맞추어 가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마지막 행군이라니, 그것 하나만큼은 그에게 감사해야 할까 싶던 순간.

 

-지금부터 자유 행군이다. 목적지는 여기서 30KM 떨어진 너희들이 못 죽어 안달 난 백사장이다. 선착순 50명. 나머지는 남은 거리를 오리 뜀 걸음으로 온다. 본관의 말, 똑똑히 들었나?

 

“...예?”

 

 확성기의 지직거리는 소음 사이로 라붕이 작전관의 담담한 사망선고가 내려지자 파견 인원들의 시선이 지프차 위에 똑바로 선 그에게로 돌아갔다. 지금 저 인간이 뭐라 한 거지? 처음에는 멍-때리던 파견 인원들은 점차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두 눈을 크게 뜨기 시작했다.

 

“대..대장님! 그..그건 무슨!”

 

“라..라붕이 대장님! 그건!”

 

 이제는 악 소리조차 잊은 채, 그의 손에 들린 스피커가 부디 무슨 방식으로든 고장이 났길 바라던 그녀들에게 라붕이 작전관은 목을 좌우로 돌리며 다시 한번 스피커 폰 사이로 입술을 떼었다.

 

-훈련생들의 달리기는 본관과 조교들이 똑똑히 봐두겠다. 달릴 땐 옆 사람과의 간격에 유의해 추월하도록. 폭력적인 추월 시, 조교들의 지휘하에 남은 거리를 PT체조와 함께 행군할 것이다.

 

“..하..하하하!”

 

-음. 훈련생들의 웃는 모습을 보니, 본관과 조교들도 즐거워지는군. 안 그런가? 조교들?

 

“-네! 주인님. 후훗.”

 

“후훗.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소첩은 주인의 뜻대로 그대들과 함께 달릴 터이니. 외롭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아-주인님. 사랑스러운 주인님. 늠름하신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아아, 이 해충들은 제가 잘 관리할게요. 주인님.”

 

“히힛. 대장? 지금 솔직히 즐기고 있지?”

 

“...우리 열심히들 해봐요. 아, 대장님 말대로 만약 거칠게 앞사람 밀치면 바로 PT체조에요? 아시겠죠?”

 

 대체 이 조교들은 뭐가 그리 즐겁다고 해맑은 미소로 자신들을 바라보는가. 파견 인원들은 해맑은 조교들의 미소에 울상을 만들어가며 왜 하필 자신들이 이곳에 왔을 때, 저 귀신같은 인간이 부임한 것인지에 대해 하늘을 원망했다.

 

‘나..나만 삥땅친 것도 아닌데! 왜!’

 

 북부 전선 출신의 이프리트는 작디작은 제 양 주먹을 꽉 쥔 채 환한 햇빛을 검은 장교 코트와 모자, 그리고 선글라스로 한껏 흡수해가는 지프차 위의 악마를 한껏 노려보았다.

 

-본관 역시 기쁘군. 선두 그룹은 나와 함께 달린다. 아, 미안하지만 본관은 지프차에서 훈련생들을 관리하도록 하겠다. 아무래도 인간이라서 바이오로이드인 너희들의 속도는 못 맞출 듯싶다. 훈련생들의 넓은 아량에 기대도록 하지.

 

‘이..뻥 치시네! 땀방울 하나 안 흘리면서!’

 

-이 행군이 끝에는 시원한 바닷물과 맛있는 저녁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물론 본관의 소속 인원들이 그대들을 위해 리조트 건물에 막사와 간이 샤워실까지 설치해뒀다. 어떤가? 본관의 배려심에. 훈련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

 

“...”

 

-음? 반응이 없군. 좋다. 지금부터 오리 뜀..

 

“-아아악!”

 

“악! 악! 악!”

 

“아아악! 악!”

 

 라붕이 작전관의 오른손에 들린 스피커폰 너머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 들려 오려 하자, 워울프들과 브라우니, 그리고 샌드걸과 앨리스까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의 명령을 묻어버리려 들었다. 그녀들의 열성어린 악 소리에 제 말이 묻힌 라붕이 작전관은 선글라스 사이로 비치는 미간을 꾸기곤 짧고 옅은 소리를 스피커 폰 너머로 흘려보냈다.

 

-쯧. 알겠다.

 

‘저 인간, 혀 찼다. 지금 혀 찼어...자기 할 거 못했다고. 혀 찼다고..’

 

‘저..저 무슨 끔찍한 인간인가요! 이게...이게 멸망 전 인류인가 뭔가! 그건가요? 저런 인간이랑 동침하려 했다니..으으!’

 

‘..가..가라친 게 후회되기는 하지만..이..이건 그 이상입니다. 다른 애들도 여기 왔어야 했는데..꼭 부디! 다 오길 빕니다! 저만 고통받다니!’

 

‘아..알비스 돌아갈래. 그냥 철충들이..더 쉬워..베라 언니..어딨어? 알비스가 잘못 했어..’

 

-좋다. 이제 바다로 향한다. 가는 동안 부디 부상자가 없길 빈다. 나와도 곧바로 수복제를 박아줄 테니, 다치거든 조교를 불러라. 다행히 조교 중 한 명이 간호사 업무도 하니까 말이다.

 

“히히히! 다치면 바로 말해? 시원하게-주사 한 방 놓아줄 테니까!”

 

‘죽어도 안 다칩니다. 절대로. 차라리 엎어지겠습니다.’

 

‘하필 저 여자인가요? 으으! 바..반드시 선두에 서겠어요!’

 

‘..오늘따라 사령관님이 그립다.’

 

-...음. 본관을 바라보는 너희들의 강렬한 시선, 잘 알겠다.

 

‘오, 애들 눈 봐. 날 죽일 듯이 보네.’

 

 한껏 비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파견 인원들의 매서운 눈초리에 라붕이 작전관은 여태껏 훈련생들 앞에서 굳혀 왔던 제 뺨 근육을 슬며시 올려 보였다. 지금 그녀들의 눈에는 자기가 금태양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라붕이 작전관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맞지. 조교는 그렇게 바라봐야지. 후, 씨발. 내가 미친 새끼다. 그래. 너희도 죽고. 나도 죽자. 오늘.’

 

-자! 뜀박질 준비! 팔 각도는 90도! 무릎 각도도 90도다! 이 새끼들아! 알겠냐?!

 

“-아악!” “악!” “아아악!”

 

-목표는 백사장! 먼저 도착한 녀석들은 시원-하게 바다로 입수! 알겠나!

 

“아아아아악!”

 

-준비!

 

 그의 스피커 폰 너머에서 준비 신호가 터져 나오자 운전석에 앉아있던 요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지프차의 시동을 걸고선 뒤에 서 있는 그에게 그녀들의 목소리에 대한 소감문을 내놓았다.

 

부-릉!

 

“하하핫! 작전관. 그대는 지금 도망쳐야 할 몸인 것 같네! 그녀들의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하네만!”

 

-좋다! 날 죽이고 싶으면 따라와라! 이 자식들아! 알겠냐!

 

“-아아악!”

 

‘어우. 진짜 날 죽이려고?’

 

 분개하다 못해 독기가 서리기 시작하는 파견 인원들의 살벌한 눈빛에 라붕이 작전관은 도리어 뺨 위에 올린 보조개를 더욱더 크게 피우며 썬팅으로도 감출 수 없는 새파란 도화지 위에 펼쳐진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어쩌다 이 짓거리를 하게 되었더라? 왜 기억이 안 나지? 왜 어디에 데려다놔도 남자들의 눈을 돌게 할 미녀들이 날 죽일 듯이 바라볼까.’

 

 여기는 필시 라스트 오리진 세계일 텐데, 왜 여기서 자신은 연에도 없던 조교를 하고 있나. 그런 상념에 잠깐 묻혀있던 라붕이 작전관은 시꺼먼 선글라스 아래서 자신의 정신줄을 잠깐 내려놓았다.

 

‘이제는 모르겠다. 그래. 차라리 나도 돌아버리자. 하늘 참-푸르다!’

 

-출발이다! 뛰어라! 이 새끼들아아아!

 

 그렇게 찢어지는 스피커 폰의 소음 사이로 기나긴 행군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요안나는 재빨리 엑셀의 위를 밟았다. 그리고 그 지프차를 쫓는 여성들의 거친 군홧발 소리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아아악!”

 

70)

 

철-썩!

 

“안드바리! 여기 이 건물, 안 무너지는 거 확실해?”

 

“네? 예! 리리스 언니가 확인했다고 했어요!”

 

“..와. 진짜 아무것도 없다. 그치?”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한적한 요안나 아일랜드의 백사장 인근, 페인트도 바르지 못한 채 그저 건물의 뼈대만 간신히 맞춰 유리창 하나 없이 사방이 뻥 뚫려있는 회색빛의 폐건물 위로 여러 여성이 저마다 양손에 무언가를 든 채 열심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쿵-! 쿵!

 

“읏쌰! 여기에 간이 샤워기들 설치하면 되겠지?”

 

“으음. 뭐, 어차피 다시 지어야 할 건물인데. 대충 하자.”

 

 가녀린 체구에 비해 강인한 팔뚝을 지닌 더치걸들은 어깨에 여러 철골 구조물들과 천막을 짊어진 채 휑한 폐건물 아래층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그 위로 대충 철골들을 박아대었다.

 

쿵! 쿵! 쿵!

 

“여기에 이렇게 하고..실키! 수도는 어떡해?”

 

“아-! 그건 내가 할게! 너무 신경 쓰지 마!”

 

“응! 그럼 우리 내려간다?”

 

“수고했어~”

 

 저만치서 들려오는 실키들의 목소리에 더치걸들은 서로를 바라보곤 싱긋이 웃으며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들었다. 오늘은 이곳이 그 얄미운 파견 인원들의 숙소로 쓰일 공간, 더없이 괜찮은 취침자리라면서 그녀들이 시시덕거리며 내려가려 하자 어디선가 하늘을 찢을 듯이 째져가는 남성의 고함 소리가 그녀들의 귀퉁이를 두들겼다.

 

-겨우 그 정도 속도로 본관을 잡겠는가! 앨리스 훈련병! 엘리트의 근성은 어디 갔나?!

 

“-당시이이인! 두고 봐요! 꼭 내 발아래서 울게 만들어 주겠어요!”

 

-안타까운 일이군! 본관은 우는 법을 잊었다! 그건 다른 남자한테서나 바래라! 뛰어라! 뛰어!

 

“-꼭이에요! 당신만큼은 내가아아악!”

 

-그 기세다! 이프리트! 선두를 추월당할 테냐! 네 뒤에서 미친 여자가 뛰어온다! 본관을 죽게 만들 셈이더냐! 앙?!

 

“-아아아악!”

 

“...이게 무슨 소리야?”

 

“..대장님 목소리..맞지?”

 

 파도가 철썩대는 소리가 무색해지는 남성의 고함과 어느 성인 여성의 노기가 가득 찬 목소리에 더치걸들은 속눈썹을 크게 뜨고는 리조트의 발코니로 이용되었어야 할 뻥 뚫린 바깥으로 몸을 쑥 내밀었다.

 

두-두두두두!

 

부-우우웅!

 

“...와. 저게 전부 뭐래?”

 

“대장님이다! 저기!”

 

 백사장의 입구로 들어서는 지프차와 그 위에 벌떡 서 있는 라붕이 작전관의 모습을 확인한 더치걸들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더치걸들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 그를 부르려던 순간, 그 뒤로 따라 들어오는 무리의 모습에 그녀들은 곧장 눈살을 찌푸리며 그 무리를 바라보았다.

 

-골인 지점이 코앞이다! 이 새끼들아! 더 뛰어! 더!

 

“-아아아악!” “당신! 반드시 당신 뒤통수에 미사일을!”

 

“쟤들..파견 애들 맞지?”

 

“...저거 대장님이 쫓기는 거 같은데?”

 

“응..대장님 잡히면 죽을 거 같아.”

 

 백사장의 끄트머리까지 달려가는 지프차의 뒤로 족히 수십은 넘어 보이는 여성들이 줄지어 등장하자 더치걸들은 이 광경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비단 그녀들뿐 아니라, 막사를 설치하던 실키들과 안드바리, 그리고 오드리마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백사장에 수놓은 푸른 물결 앞에서 요안나가 모는 지프차가 컷을 때리자 라붕이 작전관은 스피커 폰을 백사장의 금빛 물결 위에 내던지고는 푸른빛이 맴도는 바다를 향해 가리켰다.

 

“자! 이제 입수! 그냥 뛰어들어라! 전원 입수!”

 

“-아아악!”

 

풍덩! 풍덩!

 

촤-아아악!

 

 백사장을 향해 들어오던 바닷물을 마치 역류시키겠다는 듯 수십에서 수백에 이르는 여성들이 일제히 파도의 물결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장관에 더치걸들은 할 말을 잃었다는 듯 멍한 얼굴로 땡볕 아래서 제멋대로 헤엄치는 파견 인원들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잠깐 눈 돌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대?”

 

“으응..모르겠어. 대장이 무슨 짓을 한 거 아닐까?”

 

“헤헤. 뭔지 몰라도 속 시원하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허우적대며 시원한 바닷물에 온몸을 담그는 파견 인원들의 모습에 실키든, 안드바리든, 더치걸이든. 아니면 이 광경을 담고 있는 익스프레스들이건 그걸 단말기 너머로 보는 생산 인원들이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1년간 묵혀왔던 체중이 싹 내려간다는 걸 이런 걸 두고하는 말일까. 그렇게 해맑은 미소로 그녀들이 돌아서려 하니, 아래서는 아직도 라붕이 작전관이 고성이 내지르고 있었다.

 

“전원! 옆에 있는 전우와 어깨동무 실시!”

 

“헤엑! 헤엑! 아악!”

 

“본관의 구령에 따라 천천히 입수한다! 알겠나!”

 

“아악!”

 

“...저기서 뭘 더한다고?”

 

“우리 대장이지만, 이렇게 보니까 진짜 독하다. 응.”

 

“앞으로 취침!”

 

“-아아악!”

 

풍덩! 풍덩!

 

“뒤로 취침! 여기는 너희들 잠자리가 아니다! 어깨 풀지 마! 이 새끼야!”

 

“아아악!”

 

풍덩! 풍덩!

 

 허리춤에 양손을 얹은 라붕이 작전관의 구호에 색색의 머릿결을 휘날리는 미녀들이 말없이 바닷물 아래로 쑥-내려가 얼굴을 감추자 상층에서 그걸 내려다보던 오드리가 양 손뼉을 맞부딪히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짝-! 짝-! 짝-!

 

“엑셀런트! 완벽해요! 라붕이 대장! 그래요! 그렇게 입어야 빼숀이 살지요!”

 

“하하하! 오드리 언니도 참!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마요! 같은 저항군 언니들인데요!”

 

“그렇게 말하는 안드바리도 오랜만에 너무 이쁜 미소를 짓는걸요?”

 

“헤헤헤. 아! 리리스 언니다! 언니!”

 

 뒤늦게 검은 셔츠의 여성들이 백사장 안으로 들어서자 리조트에 모여 있던 부품 생산 인원들과 보급 인원들, 그리고 몇몇 지원 인력들이 그와 그녀들을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다.

 

“-언니! 너무 잘 어울려요!”

 

“라붕이 대장! 더해요! 더! 몰! 원 모올!”

 

“하하하! 저게 뭠니까! 레후 언니! 우리 왕언니들 모습 좀 보십쇼!”

 

“잘 어울리기만 한데요! 뭘! 이프리트 언니! 노움 언니! 파이팅!”

 

“우리 주방장님! 너무 잘 어울린다! 안 그래? 다크엘븐?”

 

“...저 리제라는 아가씨도 잘 어울리네. 응! 모두 힘내라!”

 

“...”

 

 저만치 보이는 폐건물 위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라붕이 작전관과 그의 뒤에 서 있는 조교들은 그녀들을 향해 팔을 흔들어 주고는 시선을 다시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자. 본관과의 첫날, 어땠나? 만족했나?”

 

“-아..아악!”

 

 여전히 지친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라붕이 작전관의 모습에 바이오로이드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허리 아래서 느껴지는 시원한 물결에 정신을 맡긴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 훈련은 여기서 종료하겠다. 내일부터는 새로운 훈련이 너흴 기다린다. 어떠냐. 또 가라치러 가보겠나?”

 

“-아..아니요오오오!”

 

“호오. 아니요라. 뭐, 됐다. 이제는 여기서 밥 먹고 저기 생산 인원들이 준비하고 있는 리조트 건물 안에 준비된 간이 샤워시설과 텐트에서 자도록한다.”

 

“-아아악!”

 

 밥이다. 라붕이 작전관의 입에서 나온 밥이라는 말에 오늘 하루 내내 달리기만 했던 파견 인원들은 거친 숨소리 사이로 입가에 미소를 피워 올렸다. 배가 꼬르륵거리다 못해 등가죽이 달라붙었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실감하던 그녀들은 오늘 아침 메뉴를 떠올리며 며칠간 누렸던 천상의 식단을 떠올렸다.

 

‘밥...밥..’

 

‘헤헤..이제..쉰다아...’

 

 당장 내일을 예고하는 그의 섬뜩한 말보다 눈앞에 찾아올 화려한 메뉴들을 떠올리던 그녀들을 향해 백사장 저 끝에서 어떤 이들이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며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대장님! 저녁! 말씀하신 대로 준비했어!”

 

“음. 전원 물 밖으로 나와 백사장에 앉도록.”

 

“아아악...”

 

 항상 단정하게 정돈하던 머릿결을 바닷물에 한껏 적신 그녀들이 힘없이 물 밖으로 걸어나와 백사장에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에 철푸덕 주저앉자 라붕이 작전관은 그 광경을 멀찍이 내려보다 지프차에서 내려 식기 카트를 들고 달려오는 아우로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우로라. 내가 시키는 대로 준비했다고?”

 

“응! 그런데 진짜 이거면 돼?”

 

“아암. 물론이고 말고. 아우로라, 내가 너희한테 했던 말 기억하냐?”

 

“? 무슨 말?”

 

 뜬금없는 라붕이 작전관의 말에 식기 카트를 들고 온 아우로라들과 포티아들은 저마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들을 향해 라붕이 작전관은 검지를 까닥이며 일전에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여기서 실천해 보이겠다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과거의 제 말을 다시 읊었다.

 

“시장이 곧 반찬이라는 말. 여기서 오늘 보게 될 거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어.”

 

 라붕이 작전관의 입에서 과거에 들었던 말이 또 한 번 나오자 아우로라들과 포티아들은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팻말을 걸어둘 당시에 했었던 이야기, 그녀들은 잊고 있었으나 그는 잊지 않고 제 말을 기억해둔 것이었다.

 그리고 선글라스 아래로 사악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 아우로라들과 포티아들은 저마다의 감상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와. 대장! 진짜 악당 같아!”

 

“하..하하하. 대장님. 조금 무서워요.”

 

“아니. 오늘 보는 애들 전부 날 나쁜 사람 만들어?”

 

“..헤헷! 그럼 우린 뒤에서 보고 있을게! 아! 주방장님! 옷 잘 어울려요!”

 

“맞아요! 주방장님! 최고!”

 

“...뭐. 그렇게 말해봐야 국물도 없사옵니다.” 

 

 그렇게 바쁜 하루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간이 그들에게도 찾아왔다.

 

71)

 

“자, 오늘 저녁 메뉴는 여기 있는 것들이다. 훈련생들은 잘 봐두도록.”

 

“...예?”

 

 예는 무슨 예야. 나는 예라고 말하는 지니야 개체를 한번 째릿 노려보고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내 뒤에 서 있는 소완에게 신호를 보내었다.

 

“..후훗. 어디, 제 주인께서 당신들을 위해 직접 고안한 식사이옵니다. 부디 만족하셨으면 좋겠나이다.”

 

따-그락!

 

 음식을 감추고 있던 뚜껑들이 일제히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내 눈앞에 떡하니 자리 잡은 200명의 파견 인원들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부릅떠졌다. 그래. 내가 오늘 아침을 괜히 주상님 식단으로 준비한 줄 아니?

 

‘어디 천당에서 나락으로 가 봐라.’

 

“저..저 대장님. 그..식판도..없는데요?”

 

 어찌 저찌 용기를 내서 손을 드는 탈론 페더의 물음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올렸던 오른손의 손바닥을 하늘 위로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프리트가 내 손 위에 비닐을 한 장 얹어주었다. 음, 이 감촉. 오랜만이네.

 

“자, 오늘 너희들이 사용할 식판은 이거다.”

 

“...예?”

 

 또 예란다. 애들 진짜 군인 맞아? 이런 거 진짜 한 번도 안 먹어봤냐? 그녀들은 내 손에 들린 비닐의 정체를 도대체 알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대었다. 그나마 몇몇 스틸라인 애들이 뭔지를 직감하고 얼굴을 감싸 쥐는 것이, 스틸라인은 아는가 보네.

 

“본관이 먼저 시범을 보이겠다. 전원 주목하도록.”

 

“아악.”

 

“...배고프나?!”

 

“악!”

 

 그래. 시장이 반찬이다. 나는 대충 이 녀석들의 대답을 듣고선 소완이 열어놓은 반찬 가판대로 걸어가 비닐 안으로 밥 한 주걱, 양념 소스 한 스푼, 그리고 김 가루와 잘게 자른 스팸 조각들을 집어넣곤 오른손으로 비닐의 입구를 틀어막곤 왼손으로 비닐의 안에 담긴 음식들이 잘 섞이도록 돌려대기 시작했다.

 

“...엉?”

 

“저..저게 뭐에요?”

 

 뭐긴 뭐야. 대한민국 군인들의 영원한 완벽 식단, 먹기 간편하고 맛도 괜찮은 비닐밥이다. 이 당나라 군대 녀석들아. 너흰 이런 거 처음 보냐?

 

“자, 이렇게 음식들을 비닐에 담는다. 그리고 입구를 잡고 빙글 돌려준 뒤, 바람을 한번 쭉 뺀다.”

 

“...저거 그냥 짬통..아니야?”

 

 그래. 짬통이다. 워울프. 너희들이 제일 잔반을 많이 버렸다며? 일부러 정량 배식에서 자율 배식으로 바꿔줬더니 이 눈앞의 폐급들은 정말이지 내 예상을 한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행동했다.

 

‘밥은 먹을 만큼만.’

 

 군대 취사장에서는 쉽사리 반찬도 못 버리는데, 이 녀석들은 맨날 원하는 만큼 푸고, 또 원하는 만큼 남기고. 그러고 또 삥땅친 부식들을 열심히 먹어 재꼈다. 9일간의 행복, 어땠냐?

 오늘은 우리 급양 애들이 쉬는 날이다. 너희는 짬통 비스무리한 이거나 먹어라. 나는 그렇게 두 눈을 글썽거리는 워울프들의 시선을 느끼며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이렇게 바람이 빠지고 나면 입구를 묶어 내용물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한다.”

 

“자..잠깐만요. 그걸 저희보고 오늘 저녁으로 먹으란..”

 

“그런 다음 안에 내용물이 잘 섞이게 눌러준 다음. 비늘의 끄트머리를 이렇게-!”

 

찍!

 

“..찢고 본관처럼 찢은 비닐 구멍에 입을 대고 내용물을 쭉 빨아먹는다. 알겠나?”

 

“...”

 

“...”

 

“-알겠나!”

 

“악!”

 

 내 행동을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던 파견 인원들에게 또 한 번 고함을 지르곤 나는 재빨리 비닐밥을 입에 집어넣었다. 나도 배고팠다. 진짜. 맛만 좋은데, 음. 오랜만이다. 이 식감.

 

“각자 배부받은 비닐로 식사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정량이다. 알겠나?”

 

“-아아악!”

 

 당장 오늘 아침 밥상 같은 것을 기대했던 그녀들의 원통함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곁으로 걸어오는 소완에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들 밥 좀 넉넉히 넣어줘. 알겠지?”

 

“...후훗. 주인의 넉넉한 마음씨에 소첩 역시 기쁘기 그지없나이다. 하온데, 정말로 아우로라들의 음식으로 만족하시겠나이까?”

 

“...나중에 내 텐트로 밥상 하나만. 응.”

 

“얼마든지요. 주인께서 원하신다면 술도 대령하겠나이다.”

 

“...한 병만,”

 

 왜 소완이 매일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나 했더니, 이제는 소완의 아침 밥상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게 된 내 혓바닥 탓에 나는 이제 그녀의 밥상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왠지 사육 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비닐밥도 좋지만 아무래도 밥은 밥처럼 먹어야지.’

 

 방금까지는 마냥 그립기만 했던 이 비닐밥이 어느새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먹는 편의점 주먹밥 같아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비닐의 구멍을 쭉쭉 빨아대며 백사장의 뒤편에 있을 내 임시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 진짜 아프네. 목도 아프고.’

 

 조교들은 그렇게 악 질러대도 괜찮아 보이던데, 이것도 나름 특기라 하던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네. 최고급 오리진 더스트를 소량이지만 맞았음에도 다리 무릎이 아차하는 순간 꺾이려 들자, 나는 최대한 맨정신을 유지해가며 백사장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주인님. 힘드시면 들어가시는게..”

 

“? 리리스. 언제 왔니?”

 

“후훗. 주인님. 저는 언제나 주인님 곁에 있답니다?”

 

 모래사장을 밟는 소리도 안 났는데, 군화를 신고 있어도 그녀는 블랙 리리스가 맞긴 맞나 보다. 게임 속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그녀의 옷차림이 조금 웃기긴 하지만, 나는 내 리리스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오늘의 마지막 일을 끝마쳐야 한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사령관님이 기다리신다.”

 

“...그분께는 따로 이야기를 하고..”

 

“어허. 내 상관이신데, 여태껏 통신 거부해왔으면 잘 참아주신 거야.”

 

“...상관...상관.”

 

 어딘가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그녀의 말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선글라스 탓에 눈매를 읽기는 어렵지만, 어딘가 조금 섬뜩한 얼굴을 하는 리리스의 모습에 나는 먹던 비닐밥을 떼고는 그녀의 행동을 빤히 주시했다.

 

“? 왜 그래?”

 

“...아니에요! 주인님. 주인님, 그럼 착한 리리스는 그만 저희 소속 애들 보러 갈게요! 힘내세요! 파이팅!”

 

“...응. 애들한테 나 착하다고 전해주고!”

 

“물론이죠!”

 

 어느새 리조트 건물로 달려가는 리리스의 뒷모습에 나는 무언가 석연찮음을 느끼며 다시 비닐밥을 입에 물었다. 가끔 리리스나 아르망들이 모여서 무언갈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대체 뭘 이야기하는 걸까. 삼얀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아르망까지 모여선 무얼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까. 물어보면 회피하기 바쁘고.

 

‘...설마 아르망도 얀데레라던가. 그런건..에이. 설마!’

 

 괜히 리리스의 안색이 어두워진 걸 봐서 그런지, 나는 착잡한 마음에 우거진 수풀 사이로 보이는 간이 막사로 걸음을 빨리 했다.

 

뚜벅! 뚜벅!

 

“아르망. 나 왔다.”

 

“..어서오세요. 폐하.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간이 막사의 커튼을 열어 재끼자 생각보다 환한 내부의 모습과 간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금발의 소녀가 날 맞이해주었다.

 

‘...왠지 뭔가 머쓱한데.’

 

“폐하. 코트는 이제 제게 주세요.”

 

“..어..어.”

 

“식사는 그걸로 되시겠습니까? 뭐라도 다른..”

 

“아니. 소완이 나중에 준비해준다고..”

 

“..후훗.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서 보고하고 쉬지요. 폐하.”

 

“...”

 

 꿈에도 그리던 광경, 아르망이 직접 옷도 챙겨주고 밥도 걱정해주고 내 몸도 걱정해주고. 아, 이 세계 떨어져서 정말 다행이다. 다정다감한 아르망의 목소리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한껏 느끼고 있자니 아르망은 싱긋이 미소를 짓고선 간이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제 손에 들린 두꺼운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후우.”

 

‘탄원서들은 준비 됐어. 아르망이 곧장 보내겠지. 그리고 그 자료도 닥터가 정리해서 줬고. 아, 이거 진짜 안 먹히면 좀 머리 아프긴 한데.’

 

 사령관도 남자라면 화..내겠지? 애초에 그 사령관이라는 녀석이 스토리에서 화를 낸 적이 있긴 하던가? 그렇게 열심히 변명과 정당성, 당위성이든 명분이든. 뭐든지 가능한 한 있는 데로 긁어모았는데. 막상 변명이든, 설명이든 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오자 나는 알아서 텐트의 중앙에서 열중 쉬엇 자세로 몸을 고쳐잡았다.

 

‘제발. 금태양 취급만 아니어라.’

 

 애초에 여기 애들 오늘 하루 굴려보니 알겠다. 이런 짓거리를 한 거, 내가 처음이거나 아니면 없거나 하다시피 한가 보다. 하긴, 여기 넘어오기 전에 봤던 이야기가 오르카 아이돌 프로젝트였는데, 전시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평화로운 동네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우리 애들 건드는 건 못 참아.’

 

 나도 참 여기에 정이란 정은 그 짧은 시간에 많이 들었나 보다. 처음 보지만 익숙한 얼굴들이라 그런 걸까, 안드바리가 콧물을 훌쩍여 대고, 실키들이 바짓가랑이 잡아끌고, 아쿠아가 엉엉 울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는 저 양반이 날 죽이던가, 봐주던가. 그것만 남았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령관의 행동들을 찬찬히 떠올리며, 제발 금태양처럼 비명횡사 엔딩만이 날 기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나는 아르망의 책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삑-! 삑-! 삑-!

 

“...”

 

 통신을 알리는 비프음과 함께 점차 책의 위로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오르자 아르망은 옆으로 한걸음 물러서며 내 정면으로 홀로그램을 온전히 비추게 하였다. 이제 곧 그 녀석이 나온다. 내 목숨줄을 쥔 녀석, 이 세계의 유일한 주인공이자 최강자. 떨리는 목젖을 억지로 꾹 누른 채 나는 내 일생일대의 가장 큰 목소리로 경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우렁찬 경례로 그 중학생 외모의 사령관을 기선제압..

 

삑!

 

“-필!”

 

-흐아아아아앙! 라붕씨이이이! 흐어어엉! 미안해애애애!!

 

“...-승?”

 

 댁은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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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눈 감고 쓴 거라 오탈자 나올 거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검수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