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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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중천에 걸린 뜨거운 태양, 정오를 알리는 후덥지근한 열기가 부둣가의 회색빛 콘크리트를 데우려 들었으나 이내 시원한 바람이 푸르게 펼쳐진 해수면 위를 지나쳐 그 열기를 몰아내었다.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푸르른 해수면이 만나는 회색빛의 공간의 한가운데 붉은빛을 머금은 겉옷을 걸친 금발의 소녀가 제 앞에서 철썩대는 파도보다 더 파란빛을 머금은 눈동자로 넓게 펼쳐진 지평선 너머를 응시하고 서 있었다.

 

“...지금쯤 오실 때가 되었을 텐데요.”

 

 금빛 머릿결 위에 제 겉옷과 같이 붉은 모자를 쓰고선 누군가를 기다리는 소녀, 아르망의 중얼거림에 마치 그녀의 부름을 들었다는 듯 저만치서 물살을 가로지르며 회색빛의 몸체를 햇빛 아래서 반짝대는 거대한 물체가 쨍쨍한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었다.

 

촤-아아악!

 

뿌-우우우!

 

“...”

 

 거센 물보라를 하단부에 일으키며 요안나 아일랜드를 향해 나아오는 손님, 아르망은 그녀들을 맞이할 준비를 위해 정갈히 양손 위에 책을 얹고선 수송함의 갑판 위로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세일러복 소녀들을 향해 싱긋이 눈웃음을 지었다.

 

“-봉쥬르!”

 

“안녕! 아르망!”

 

“...”

 

 자신을 향해 한껏 팔을 휘적대는 금발의 소녀와 주홍빛 머릿결의 소녀의 해맑은 미소에 아르망 역시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어주며 점차 부둣가의 방파제로 나아오는 수송함의 거대한 몸체에 한 발자국 물러섰다.

 

뿌-우우우!

 

“-이얏호!”

 

“앗! 네리!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떡해!”

 

“어서 오세요. 네레이드양.”

 

“헤헷! 굿-에프터눈! 아르망!”

 

와-락!

 

“후훗. 언제나 활기차 군요, 네레이드양.”

 

 갑판 위에서 그대로 부둣가를 향해 뛰어내린 세일러복 소녀, 네레이드의 갑작스러운 포옹에도 아르망은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받아주었다. 그런 그녀들의 인사에 갑판 위에서 기동장치를 이용해 천천히 내려오던 금발의 소녀, 운디네는 입술을 삐죽이며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짓는 네레이드를 향해 검지를 까닥였다.

 

“-노농! 숙녀가 그렇게 함부로 몸을 놀리면 안 돼!”

 

“응? 나는 아르망이 반가워서 그런 건데. 운디네는 안 그래?”

 

“아..아니! 내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닌데..”

 

 뜨거운 햇볕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한껏 들뜬 대화를 나누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듣던 아르망은 부둣가에 정박한 수송함에서 간이 계단을 통해 뚜벅뚜벅 내려오는 함장을 향해 이전과 같이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세요. 세이렌양. 언제나 수고가 많습니다.”

 

“아니에요. 아르망씨. 제 임무를 완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저도 알고 있어요.”

 

 아까와 다른 정돈된 대화를 나누는 두 금발의 소녀는 서로를 바라보고선 쿡쿡 웃어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치 서두르라는 듯 아르망의 곁에서 컨테이너 수송을 위해 크레인들이 자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르망은 제 품에 안겨 있던 책에서 서류 몇 장을 이 함대의 함장, 세이렌에게 건네었다.

 

“오늘도 대리로 왔습니다. 자, 오늘치 물자 수송량입니다.”

 

“오늘도 대장님은 바쁘신 가보네요.”

 

“폐하께선..후훗.”

 

사락-

 

 서로 알고 있는 문답을 나누며 두 금발의 소녀는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닷바람, 그리고 곁에서 연신 무언가를 떠들어 대는 세일러복 소녀들의 활달한 대화를 들으며 평안한 한때를 만끽했다. 그러던 중, 그녀들의 머리 위에서 어느 까칠한 소녀의 목소리가 이 정적을 깨부수었다.

 

“..뭐야? 오늘도 대장님은 안 내려왔어?”

 

“테티스! 너도 그렇게 있지 말고 내려와!”

 

“...싫-어!”

 

 부둣가에 서 있는 네레이드의 손짓에도 연한 금빛을 머금은 머릿결의 소녀, 테티스는 그 특유의 얄미운 얼굴은 치워둔 채, 뾰로통한 얼굴로 네레이드의 손짓을 고갤 홱 돌려 회피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디네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왼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였다.

 

“테티스, 너 라붕이 대장님이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삐졌지?”

 

“...아니거든! 그런 심술 맞은 인간이 있든 없든 내가 뭐!”

 

“아니긴~대장님이 오늘을 위해서 바빴던 탓에 아르망이 대신 나오니까 숙소에서 풀 죽어 있던 게 며칠이더라?”

 

“-씨이! 운디네! 너 이리 와!”

 

“메-롱! 어디 쫓아올 테면 쫓아 와보시던지!”

 

 앙증맞은 혓바닥을 쏙 내밀며 부둣가 위를 내달리는 운디네의 뒤를 따라 어느새 회색빛의 아스팔트 위로 내려온 테티스는 그녀의 뒤를 뒤쫓으려 들었다. 그러나 일순간, 하늘을 뒤흔들기 충분한 남성의 고함이 우거진 수풀 산림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훈련생! 힘드나! 엉?! 여기서 본 조교와 함께 PT를 받고 가겠나!”

 

“-아악!”

 

“...”

 

 저 멀리서 메아리가 치듯 산 아래까지 울려 퍼지는 남성의 목소리에 혓바닥을 죽 내밀던 운디네나, 그녀의 뒤를 쫓으려던 테티스나, 양 허리춤에 손을 얹고 서 있던 네레이드나.

 그 자리의 모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섬의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장님 목소리지?”

 

“...히끅.”

 

 확답을 원하는 운디네의 물음에 테티스는 짧은 딸꾹질로 응답했다. 이미 오기 전에 그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실제로 그의 노기 섞인 목소리를 들어보니 보통이 아니었던 탓에 세일러복 소녀들의 시선이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알고 있을 금발의 소녀를 향했다.

 

“...어머. 여러분들은 폐하의 일면을 보고 오셨던 게?”

 

“후훗. 아무래도 매일 장난기 넘치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대장님의 저런 모습이 익숙하지는 않네요.”

 

 그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아르망의 되물음에 세 명의 세일러복 소녀들이 그녀의 앞으로 후다닥 뛰어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목청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르망! 정말 라붕이 대장이 파견 애들을 혼내고 있는 거야?”

 

“노농! 그런 것보다, 저거 연기야? 진심이야?”

 

“나..나도 저기 대열에 합류하는 거 아니지?! 그치?!”

 

“...테티스양. 잘못 한 건 아시고 계셨군요?”

 

 울먹임이 섞인 테티스의 물음에 아르망을 쓴웃음을 지었다. 항상 라붕이 작전관에게 장난을 치던 그 알량한 꼬마는 어디 가고 안쓰러운 눈망울을 글썽여 대는 소녀가 제 수단을 끌고 있는가.

 

“하..하지만! 언제나 가볍게 넘겼으니까!”

 

“그만큼 폐하께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단 말이겠죠. 너무 심려치 마세요.”

 

“저..정말? 정말이지?!”

 

“예. 그..그러니 제 수단을 좀..”

 

 팔꿈치까지 끌려 내려온 수단을 있는 힘껏 끌어올리는 아르망의 모습에 테티스를 제외한 주변의 소녀들은 저마다의 미소를 입가에 걸은 채 저 푸르른 하늘 아래 솟아오른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렸다.

 

“평소의 대장보다는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저런 얼굴로 돌변한 줄은 몰랐네.”

 

“그래도 대장님은 대장님인걸! 헤헤! 얼른 다시 여기 오셨으면 좋겠다.”

 

“네레이드의 말대로 이제는 조금 그립긴 하네요.”

 

 저마다의 목소리로 저 산 너머에 있을 라붕이 작전관을 찾는 소녀들의 말을 아르망은 귀를 쫑긋 세우며 하나하나 들어넘겼다. 제 말에 어느 정도 안심한 테티스의 정수리를 매만지며 아르망은 여전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산을 바라보는 소녀들의 등에 대고 입을 다시 열었다.

 

“제 폐하의 모습이 겁나지는 않으십니까?”

 

“응? 아니! 오히려 신선하고 좋은데! 사령관님도 재밌는 분이시지만, 저렇게 화를 내는 인간님도 처음 보니까. 히히!”

 

“소녀에게 너무 무례하다는 점만 빼면 좋은 인간이죠! 채널 게시물들 보니까 여기 파견 애들 너무 했어요! 정말!”

 

“맞아요. 이상하리만큼 생기가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후방 애들을 경시했다는 건..”

 

 오르카 라이브 채널은 지금 포화 상태이다 못해 초당 한 개의 게시물이 올라오는 둥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눈길을 끄는 게시물들은 자신들의 만행을 낱낱이 밝혀대는 마치 누군가 일괄적으로 배포하는 것 같은 요안나 아일랜드의 실상에 대한 정보글들. 그리고 라붕이 작전관의 광기 어린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과 영상들이었다.

 

“폐하께서는..본인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심을 걱정하지 않긴 했습니다.”

 

“헤헤! 라붕이 대장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사령관님이랑 다른 방향으로 격이 없으신 분이니까요.”

 

“가끔 보면 장관인지 병사인지 헷갈렸다니까.”

 

 자신을 향한 이 박한 평가를 알기나 할까, 소녀들은 저마다 2주간 봐왔던 그에 대한 이미지를 여실 없이 드러내었다. 그녀들의 만담을 찬찬히 듣고 서 있던 아르망은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아까와 같은 밝은 어투가 아닌 조금 진중한 목소리로 돌아서서 그녀들의 대화 사이에 제 질문을 끼워 넣었다.

 

“..그런 폐하가 만일, 얼굴이 바뀌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응? 얼굴이 바뀌다니? 아? 저거!?”

 

“..아닙니다. 네레이드양. 외관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일전에 무적의 용 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저희 사령관님처럼 신체를 바꾸지 않으면 휩노스병에 노출되실 거라고요. 그거 맞죠? 아르망씨.”

 

“네. 세이렌양. 제 폐하의 얼굴이나 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으음. 어차피 우리는 뇌파로 인간님을 구별하니까. 별로 상관없을지도?”

 

 운디네는 곰곰이 라붕이 작전관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다른 소녀들 역시 매한가지인 듯 그녀들도 잠깐 생각하는 얼굴로 서 있다 어깨를 으쓱였다.

 

“대장님의 얼굴이 바뀌셨다 한들, 대장님이시니까요.”

 

“내용물은 같은 인간이잖아. 혹시 그 시술 받으면 저런 모습만 남는 거 아니지?”

 

“헤헤. 테티스. 너는 그게 제일 걱정이야? 걱정하지 마! 라붕이 대장님이 그렇게 깐깐한 사람은 아니잖아!”

 

“아..아니거든!”

 

“..그렇군요.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폐하께도 일러두겠습니다.”

 

“정말? 그러면 라붕이 대장님은 언제 내려올까?!”

 

 제 말에 두 눈을 반짝대는 네레이드와 그녀와 같이 조금씩 서로 눈치를 봐가며 흥미를 보이는 수송함대 대원들의 시선에 아르망은 제 머릿속에 박혀 있는 연산 모듈을 가동해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을 답변을 찾아내었다.

 

“다음 파견 인원분들이 오실 때, 아마 여기 오실 겁니다. 후후.”

 

“으음. 그럼 이틀 뒤네? 아닌가? 3일 뒤인가?”

 

“네레이드. 그런 것쯤은 꼭 기억해 둬..3일 뒤잖아.”

 

쿵-!

 

 소녀들의 만담이 끝나갈 때쯤, 그 타이밍에 맞춘 듯이 마지막 컨테이너가 크레인 위에 옮겨져 수송함 위로 떨어지자 소녀들은 저마다의 얼굴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이시군요.”

 

“네. 라붕이 대장님이 고생하시는데 저희라고 편하게 있을 수는 없죠.”

 

“...저 대장님, 분명 즐기고 있다에 한 표.”

 

“아! 나도 찬성!”

 

“후훗. 다음에 만날 때 어떻게 놀릴지 고민이나 해둘게!”

 

“...내일도 다시 뵙겠습니다.”

 

 손을 흔들며 부둣가 위를 박차고 떠나는 소녀들을 향해 아르망은 천천히 손바닥을 들어 그녀들을 배웅했다. 언제 봐도 활기찬 호라이즌의 수송함대 대원들은 그렇게 라붕이 작전관이 없는 부둣가에서 발걸음을 돌려 자신들이 왔었던 지평선 너머로 다시금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배웅하던 아르망은, 그녀들의 환호성이 멀어지자 제 눈썹 사이로 푸르른 눈길을 쏘아붙였다.

 

“..폐하의 신위를 어지럽히는 이들은, 저들이 아닙니다.”

 

 지평선을 따라 모습을 감추는 회색빛의 수송함, 분명 저 푸르른 바다 위에는 저 수송함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을 터인데, 아르망의 푸른 은하수가 펼쳐진 눈동자 안에는 이미 그녀의 미래 예지에 가까운 무언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폐하의 옥체에 손을 대려는 자들이 이 세계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저 허허벌판과 같은 지평선을 뚫고 올라오는 수십 척의 군함이, 그리고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과 푸른 표면과 달리 아래로는 끝도 모를 심연이 펼쳐진 심해의 괴물들이 잠에서 깨어 이 태양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폐하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시지요. 세상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저흴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아르망은 알고 있다. 이 세계는 제 주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다. 본래라면 그가 왔어야 할 곳은 이 세계가 아니었을 터. 하지만 그는 이곳에 왔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그를 이곳에서 그녀는 만났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희는 지켜내 보이겠습니다. 저희의 신이자 유일하신 폐하를 이 땅에서.”

 

 일찍이 그가 처음 이 부둣가에 왔을 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아르망은 햇빛의 열기 탓에 붉게 달아오른 뺨을 푸르른 바다로부터 숨기려는 듯이 금발의 머릿결을 휘날리며 부둣가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각-!

 

“-저의 손으로. 그리고 그녀들의 손으로.”

 

또각-!

 

 금발의 소녀는 그렇게 짤막한 각오를 계속해서 철썩거리는 파도에 내던진 채 구두굽 소리를 내며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75)

 

“...!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흐흐흐! 이 정도야. 뭐. 우선 수고했어! 다음에 또 봐!

 

 녹색의 간이 천막 사이에 달린 주홍빛 라이트 아래, 내 주변을 둘러싼 간이 텐트의 한가운데에 놓인 아르망의 책 위에 올려진 홀로그램 너머로 보이는 성인 남성에게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퇴장 인사를 건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령관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여러분.”

 

-들어가~

 

삑-!

 

“-후우우!”

 

 가벼운 비프음과 함께 언제 거기 있었냐는 듯 홀로그램이 아르망의 두꺼운 책장 위에서 모습을 감추자 나는 힘이 이미 풀려도 옛적에 풀린 양다리의 무릎을 꺾으며 그 자리에 곧장 풀썩 주저앉았다.

 

쿠-당!

 

“...끄..끝났다아아..”

 

“수고하셨습니다. 폐하.”

 

 지옥의 염라대왕 앞에서 제 죄를 읊던 죄수와 같이, 드디어 길고도 길던 작전 회의가 끝마쳤다는 안도감에 나는 주홍빛의 간이 전등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곤 그간 참아왔던 숨줄기를 입술 밖으로 내뱉었다.

 

“-후우우우우!”

 

“...”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시작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어느새 중학생스러웠던 청소년의 신체에서 건장하다 못해 쇄골과 승모가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건장한 성인남성이 제 콧구멍과 눈동자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그리고 있었던 것부터가 이상했다.

 

‘진짜 저 자식, 신체를 막 바꿀 수 있었나..’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실제로 보니 몰라보겠다. 분명 내가 봤던 녀석은 경례 기합 하나에 엉덩방아를 찍던 놈인데, 홀로그램 너머로 등장한 놈은 헬창도 저런 헬창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건장한 놈이었다.

 

‘..이거 씨발. 처음에 만만해 보인다고 대충 말대꾸했었다간..나 진짜 저놈 손에 죽을 뻔했던 거네.’

 

 그냥 반사적으로 후회물을 떠올리고는 경례부터 식은땀까지 뻘뻘 흘려대었던 것인데, 나중에는 괜히 혼자 지레 겁먹었나 싶었지만. 그때는 그거 안 했으면 진짜 이미 오르카 1호의 영양 자원 중 일부를 담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역시..신중해서 손해보는 건 없다! 이씨, 어떤 놈이 너무 신중해서 손해를 본단 말을 만들어?’

 

 이 라붕이라는 가명이 날 살렸다. 정말로 그렇게 내 과거의 행동들에 대해 하나하나 칭찬하고 있자니, 아까 울먹대던 사령관의 입에서 나왔던 한 마디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라 나는 눈썹을 좁히며 그때의 공포를 다시 되새겼다.

 

“...죽는 줄 알았다. 진짜.”

 

 농담이 아니라 사령관 녀석의 입에서 ‘멸망 전 인류’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때, 내 심장도 함께 갈빗대를 부수고 튀어나오는 것 같아 반사적으로 그 녀석에게 허리를 굽혔었다.

 행여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지지는 않을까 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더니, 정말로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이야.

 

‘..이건 익스프레스 덕분이다. 진짜.’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내어준 주홍빛 캡을 쓴 짙은 남색 머릿결의 여성에게 경례를 올리고 있자니, 천장의 전등을 바라보던 내 시야로 아르망이 금발의 머릿결과 푸르른 눈동자를 한껏 그림자 사이로 빛내며 날 내려다보았다.

 

“...폐하. 그렇게 앉아만 계실 겁니까?”

 

“응? 아아. 응.”

 

“..바닥이 그리도 좋으신지요?”

 

 샐쭉이 눈가를 내리는 소녀의 얼굴을 빤히 감상하고 있자니, 일순간 아까 전의 그녀의 돌발행동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을 치는 아르망에게 팔을 쭉 뻗으며 일갈을 토해내었다.

 

“아, 야! 잠깐! 아르망! 너! 보고 중이었는데 갑자기 책을 던지면 어떡하냐!”

 

“..폐하의 얼굴이 풀어지려는 것을 저는 잡아준 것뿐입니다.”

 

“풀어지긴! 덕분에 정강이 잡고 쓰러질 뻔했는데!”

 

“그렇게 여성의 흉부를 빤히 바라보시는데, 부관된 저로서 폐하를..”

 

“안 봤거든! 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었거든!”

 

 솔직히 알파의 출렁대는 유방과 그 사이의 가슴골에 혹할 뻔했던 건 맞지만! 힘 풀린 다리 탓에 엉금엉금 뒷걸음질 치는 아르망을 쫓고 있자니 내 손길을 피하던 소녀는 갑자기 양볼을 부풀리며 내 허우적거리는 손바닥에 거센 발차기를 내던졌다.

 

따-악!

 

“-아악! 아르마앙!”

 

“...그리도 가슴이 좋으시면 저 말고 포츈양을 부관으로 두시지요.”

 

 저저, 상관의 손바닥을 구둣발로 걷어찬 귀여운 소녀를 봐라. 나는 손마디가 작살날 뻔한 내 손바닥을 부여잡고선 그녀의 질투 어린 목소리를 쫓아 자연스레 그녀의 갈빗대 위로 시선을 살짝이 돌렸다. 음, 이유는 알겠다.

 

“..괜찮다. 아르망. 나는 여성을 흉부 크기로 차별하거나..”

 

휙-!

 

“-읏차.”

 

 바람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내 왼 귓가를 간질이자 나는 재빨리 앉은 채로 등을 뒤로 눕혔다. 그러자 천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책이 내 머리가 있던 자리를 스쳐 가는 것이 아닌가.

 

쿠-당탕!

 

 본디 내 머리를 노리고 온 거대한 갈색의 책이 아까까지 자기가 올려져 있던 간이 책상에 부딪히자 이번에는 오른편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하나둘 들려왔다. 저거 맞았으면 아마 내 두개골이 부서졌을 것 같은데.

 

“..이 정도는 가뿐하다!” 

 

“...폐하께서도 저와 같은 모듈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책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려보니 제 빈약한 흉부를 가린 채 살벌하기 짝이 없는 푸르딩딩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부관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좀 말을 심하게 했나 봐, 진심으로 화가 난 아르망의 모습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천천히 무릎을 짚고 일어서며 그녀에게 한층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난 진심이다. 아르망.”

 

“...정말요?”

 

‘-크으으!’

 

 내 진지한 거짓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한 아르망의 귀여운 되물음에 하마터면 간신히 일으켜 세운 무릎의 힘이 풀릴 뻔했다. 항상 싱긋이 웃는 정도로 제 감정을 표시하던 그녀가 이리도 흥분한 모습이라니,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점차 눈에 담긴 살기를 푸는 아르망을 향해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자자-아르망. 아르망의 폐하가 여깄습니다.”

 

“...뭐..뭣!”

 

“응?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확-하고 안겨 올 타이밍이 아녔나?”

 

“-폐하!”

 

 나와의 첫 대면을 떠올린 그녀를 향해 처음과 같이 팔을 벌려주자 이제는 옛적처럼 안겨들지 않는 그녀를 향해 나는 테티스와 같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좀 이상하리만큼 처음 보는 나에게 살가웠지.

 

‘...호감도 그렇게 팍팍 올릴 만큼 선물도 안 준 것 같은데, 왠지 이미 맥스치는 찍은 기분인데.’

 

 알파가 뭐라 했더라, 아르망들에게는 맹목적인 면모도 있다고 했던가. 나는 나를 향해 연신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는 아르망에게서 양팔을 거두곤 짐짓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넘어진 간이 책상과 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그녀의 책을 향해 걸어갔다.

 

뚜벅-뚜벅

 

‘...생각해보면 저 아이는 내가 키우던 아르망이 아니지.’

 

 매일 1인 부관으로는 항상 설정해뒀던 아르망이었는데. 눈앞에 놓인 아르망은 그 아르망이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가슴 속이 어째 쓰린 것을 참기 힘들어졌다.

 

‘호감도 맥스니 뭐니, 아직도 게임 속 세상인 걸로 착각이나 하고.’

 

 애당초 게임 속 세계였으면 저 아르망은 내게 호감도란 없을 터. 전투를 보내거나 초콜릿을 주든, 케이크를 줘야 오를 텐데. 나는 아직 2주간, 나를 위해 노력한 저 아르망을 위해 준비한 것이 없었다.

 

‘..리제도 있고.’

 

 열심히 키운 내 게임 속 리제, 승급은 승급대로. 또 레벨은 레벨대로. 거기에 전용 장비까지 구해다 풀강해서 줬는데. 막상 쓰려니 또 쓸 데가 좀 없긴 했다.

 나는 곰곰이 2주 전까지만 해도 내 손에 있었던 그녀들을 떠올리며 무너진 책상을 일으켜 세웠다.

 

“폐하?”

 

덜-커덩!

 

‘리리스도 있고.’

 

 처음 보고 딱 아, 얘는 정말 좋구나. 라고 생각했던 블랙 리리스. 대사야 뭐, 호감도가 낮아도 제 주인을 향한 광적인 애정에 꼴초뱀은 조금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나는 달랐다. 이쁘면 용서도 되는데 대사까지 좋으니 금상첨화였지.

 책상을 일으켜 세우고 한 걸음 더 멀리 떨어진 아르망의 귀중한 책을 집어 들곤 어느새 먼지가 묻은 갈색 가죽 겉면 위를 털어내었다.

 

탁-! 탁!

 

‘소완도 있고.’

 

 리제와 리리스하면 또 소완을 빼놓기 힘들었지. 괜히 삼얀이라고 불린 게 아니다. 상당히 지능적인 면모도 있으면서 주인을 향한 삐뚤어진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이 나에게는 호감으로 다가왔다. 그녀들처럼 한 남자만을 바라봐 주는 이들이 세상에 어디 있나.

 

‘...여기 애들에게 내 망상을 들이미는 건 그녀들에게 실례지.’

 

 하루 내내 위스키를 쉼 없이 들이킨 탓일까, 아니면 방금까지 사령관에 의해 달구어진 위 탓일까. 속이 쓰리다 못해 불타는 것만 같다. 내가 알던 그녀들은 저 먼 깊은 바닷속에 있는 오르카 1호의 안에 그 사령관과 함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새로..시작할까.’

 

 이제는 돌아갈 길도 없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어도 안 가. 2주간의 요안나 아일랜드의 여정, 그 시기 동안 나는 이곳 아이들에게 정이 너무나 들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런데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 것일까. 꼴초뱀이 좋아하던 철혈의 레오나의 말마따나, 한껏 매서운 눈매에 워페인트를 덧칠한 신속의 칸 말마따나. 내가 여기에 있는 게 오히려..

 

“주인이시여. 소첩의 식사가 그리도 그리우셨나이까?”

 

“-히익!”

 

 점차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지려 들던 내 머릿속이 갑자기 내 가슴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손길에 일순간 모든 생각을 멈추고선 내 가슴 위를 더듬대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 오른쪽으로 내 시선이 휙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눈에 봐도 음흉하기 짝이 없는 옥빛 눈동자의 여성, 소완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내 눈길을 즐겁다는 듯 받고 있었다.

 

“소첩이 늦은 탓에 주인께서 속상하셨나이까? 후훗.”

 

“소..소완! 이렇게 갑자기 막 나타나지 말라니까 그러네!”

 

“이 정도의 접촉은 괜찮지 않사옵니까? 소첩도 오늘 주인을 따라 고생했사오니.”

 

 여전히 차가운 손길로 내 가슴께를 더듬던 소완은 내 어깨가 계속해서 들썩대는 것을 보고선 마치 즐거운 듯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건 채 내 눈길을 받아내었다. 어째, 왼편에서는 향긋한 고기 냄새가 퍼지는 것으로 봐선 내 부탁에 저녁 밥상을 차려온 듯싶다.

 그 냄새에 반응하는 것처럼 아까까지 쓰리던 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몸속에서 들려오자 나는 애써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여전히 내 등에 푹신하고 딱딱한 무언가를 들이미는 소완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부탁했다.

 

“그..바..밥 먹어도 될까?”

 

“물론이옵니다. 주인. 제 식사는 오로지 주인을 위해-”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소완.”

 

 내 부탁 아닌 부탁에 소완이 한층 제 가슴을 내 가죽 코트 위로 들이 미려할 때, 무언가 내 등과 그녀의 가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나와 소완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르망양. 소첩이 무슨 결례라도 했사옵나이까?”

 

“폐하께서는 쉬셔야 합니다. 그러니 물러나주시지요.”

 

“흐음. 그럼 주인께서 제게 부탁한 이 식사는 어찌하오리까?”

 

“..책상이 있으니 올려두십시오.”

 

“..저기, 애들아?”

 

 어느새 내 곁으로 달려온 아르망의 제지에 소완은 아까까지의 눈웃음은 온데 간데 없이 마치 꽁꽁 얼려둔 얼음장과 같은 옥빛 눈동자로 아르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잘만 모이던 애들이 왜 이렇게 싸우는 걸까. 나는 내게로 등을 보이는 아르망을 양어깨 너머로 그녀의 책을 쓱 밀어 넣으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애써 괜찮다는 얼굴로 소완을 바라보았다.

 

“소완. 저녁 고맙다. 괜한 부탁이었을 텐데.”

 

“..훗. 소첩이 더 감사하옵니다. 주인이시여.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주인을 위해 소첩이 괜찮은 술을 찾아왔나이다.”

 

“-술?”

 

 소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단어 하나에 나는 여태까지의 피로가 싹 가시는 걸 느끼며 재빨리 아르망의 품에 책을 밀어 넣곤 내가 일으켜 세운 탁자 위로 걸음을 돌렸다. 아까 사령관이 준 위스키를 다 마셔서 입이 심심했던 차였는데, 잘된 일이다. 응응.

 

“후훗. 소첩의 승리이옵니다.”

 

“...”

 

“소완! 술부터! 술부터!”

 

 자고로 힘든 노동을 끝냈으면 한 잔의 술만큼 또 귀한 것이 없다. 오늘 하루 내내 얼마나 고생했던가. 당나라 군대 데리고 PT체조를 시키다 내 목이 먼저 나갈 뻔했다.

 재빨리 오드리가 짜준 코트 옷자락을 짚고선 먼지가 묻어있는 책상을 닦아내니 내 앞에 가느다랗고 새하얀 손에 들린 새하얀 유리 접시와 그 위에 얹혀있는 은빛의 덮개가 내려왔다.

 

“-잘 먹겠습니다!”

 

“어서 드시옵소서. 오늘 힘껏 땀을 흘리셨으니, 원기회복에 좋은 음식으로 준비했사옵나이다.”

 

 접시를 들고 있던 소완의 왼손이 천장에 달린 전등빛을 한껏 반사해내는 은 덮개를 들추어내자 새하얀 접시 위에 아직도 열기를 머금은..

 

“..이거 장어?”

 

“이 근방에서 낚인 바다장어이옵니다. 소첩이 먼저 시식해보았는데 꽤 풍미가 좋았사옵니다.”

 

“...으응. 뭐, 맛은 보장..”

 

 술부터 마시고 싶었는데. 하긴 배도 좀 고팠던 참이다. 나는 접시 위에 놓인 장어구이들과 그 아래에 깔린 쌀밥을 내려다보았다.

 원기 회복에 바다장어가 좋던가. 하긴 없어서 못 먹는 놈인데, 맛이나 봐야지. 나는 새하얀 접시에 한가득 놓인 장어구이 한 점과 새하얀 쌀밥, 그리고..

 

“얜 뭐냐? 처음 보는데?”

 

“..전복이옵니다. 잘게 썰어두었으니 쌀밥과 함께 드시는 걸 추천하옵니다.”

 

“오오..”

 

 맨날 그 괴기한 모양새만 보다가 이렇게 잘게 썰려있는 전복을 보자니 나는 곧장 소완의 말대로 윤기가 좔좔 흐르는 쌀밥을 한 숟갈 퍼 올리곤 그 위에 잘게 자른 전복, 그리고 한눈에 보아도 여러 양념을 바른 채 잘 구워진 장어를 한 점 올려 조심스레 내 입에 가져갔다.

 

“-하압!”

 

“...”

 

“으음!”

 

 그리고 나는 이윽고 입안에 퍼지는 향긋한 바다 내음과 쫄깃한 전복의 식감, 그리고 반들반들한 쌀밥과 여러 가지의 양념이 곁들여진 바다장어 구이의 부드러운 맛에 얼굴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맛 있다아아...”

 

“후훗. 과찬이옵나이다.”

 

“진짜..맛있다아아..”

 

 이런 밥을 매일 매 끼니 때마다 먹을 수 있는데 이전 세계가 별 대수냐?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이런 밥 한 끼 하려면 수십은 깨질 텐데? 소완의 말마따나 원기회복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리진 더스트의 잔재로 한껏 굳혀져 있던 근육들이 입안에서 퍼지는 이 달콤 쌉싸름한 맛에 풀려 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 숟갈을 들어 올렸다.

 

“-으음!”

 

“..폐하. 그리도 좋으십니까?”

 

“아르망! 너도 한 입 할래?”

 

“...”

 

 어느새 내 오른편으로 걸어온 아르망은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내가 내민 숟가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차, 이거 내가 쓰던 숟가락인데. 아직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무신경한 짓거리를 해버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왼편에 서 있는 주방장을 올려다보았다.

 

“소완. 혹 식기가 하나 남는게..”

 

“..잘 먹겠습니다.”

 

“응?”

 

 잠깐 소완에게로 시선을 돌린 사이, 어느새 아르망은 내 숟가락 위에 얹혀있던 음식물을 한껏 입안에 넣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새로운 식기로 줬을 텐데, 굳이 무리한 것은 아닐까 싶던 사이, 내 눈앞에 소완의 손이 훅-하고 들어섰다.

 

“이 식기로 교체하시지요. 주인.”

 

“어..어. 알겠다.”

 

 소완이 내민 새로운 숟가락을 얼떨결에 받아들곤 나는 다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려 오늘의 MVP에게 늦게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아르망. 네 계획 덕분에 오늘 살았다. 정말.”

 

“...”

 

 아직 입안의 내용물을 다 씹지는 못했는지 아르망은 조금씩 오물대는 뺨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눈웃음으로 내게 회답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천사가 따로 없구나. 나는 그녀의 회답을 받고선 다시 접시의 위로 시선을 돌린 채 그녀의 작전에 대해 찬사를 내놓았다.

 

“정말이지. 설마 오르카 라이브 채널에 훈련 내용을 송신하자는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나는 상상도 못 했어.”

 

“...폐하. 오늘부로 폐하는 이 오르카 저항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이가 되셨습니다.”

 

“그..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다.”

 

 본래는 비밀리에 진행하려 했던 작전이었는데, 내 유능한 부관이 오르카 라이브 채널로 이 훈련 내용을 저항군 전체에 송신하자고 해왔다. 그걸 듣고 처음에는 얼마나 기겁했는지.

 

‘보통 군대에서는 군 내부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으니까.’

 

 장교들이 휴대폰 도입이 이후부터 얼마나 눈치를 보던가. 그 국방부 장성들도 골치를 싸매었는데 이걸 역으로 내 행동의 정당성을 살리는 것으로 쓰다니. 나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오늘, 날 역경에서 구한 것은 바로 그 상상하지도 못한 일 덕분이었다.

 

‘아르망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구나.’

 

“얌-!”

 

 다시 한번 입안에 퍼지는 향긋한 바다 향기와 쌀밥을 오물거리고 있자니 머리 한 켠에 내던져두었던 사령관의 명령 아닌 명령이 떠올랐다.

 

‘..좋아. 난 앞으로 라붕씨를 라붕이 형이라고 부를게.’

 

‘...이이. 군 위계 관계 다 씹는 소릴.’

 

 솔직히 앞날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못해 미칠 지경인 이야기. 하지만 그 녀석은 제 고집대로 강행하겠다는 듯 뜻을 굽힐 생각도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그 녀석 발언에 지휘관급들도 별 반대 의사도 안 보였고, 대체 왜지?’

 

 여기 처음 떨어졌을 때만 해도 날 죽일 듯이 바라보던 여성들이 오늘은 따스하다 못해 한껏 신경 써주는 모습에 내가 해온 행동이 그리도 그녀들의 눈에 보기 좋았나 싶다. 끽해야 불굴의 마리 정도나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전원으로부터 호응을 얻을 줄이야.

 특히나 내 관자놀이에 대고 총구를 겨누던 철혈의 레오나의 풀어진 미소는 확실히 그 꼴초뱀이 말했던 갭이라는 게 엿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그 주제가 다시 입에 오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마터면 그 부 지휘관 자리에 다시 앉을 뻔했네.’

 

 설마설마했던 부 지휘관 재검토, 덕분에 사령관에게 정당성을 입증할 자료로 내려던 탄원서들을 내 위치를 확고히 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이마저도 아르망의 서포트가 있었으니 알아차린 거지만. 어느새 반절도 남지 않은 저녁을 재빨리 해치우려 들자 다시 한번 제일 머리 아픈 문제가 내 머리 위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령관 녀석, 정말로 날 형이라고 부를 건가? 아씨. 골 아프게, 진짜.’

 

 처음 봤을 때처럼 억지로 살갑게 다가오려던 것보다는 한층 느슨하게 다가온 사령관의 말에 다시금 골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차라리 내가 동생하면 동생했지, 왜 자기가 동생하겠다고 하는가. 병사들이 보면 어떻게 하려고. 생각만 해도 속 아픈 상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뭐. 그래도 나쁘진 않네.’

 

 어딘가 띨빵한 일병처럼 보이던 사령관의 이미지가 점차 그 능글맞은 선임 놈의 이미지로 덧씌워지자 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처음부터 좀 당당하게 굴 것이지, 그랬으면 나도 한층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사령관 녀석의 말마따나 어차피 인간이라고 해봐야 우리 둘이고, 이 땅에 오기 전에 짐작했던 것처럼 이 녀석은 꽤 혼자서 힘냈던 모양이라 더욱더 그럴 수 있고.

 

‘금태양은 피했고, 지휘관들도 내 행동에 찬성하고. 사령관은 날..형은 좀 철회해주면 덧나나?’

 

 차라리 내가 먼저 동생하겠다고 할 걸 그랬나. 내 어딜 보고 형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전처럼 어벙하게 굴면 그냥 싫습니다 라고 했을 것을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할 말도 없다. 그리고 나 역시 변명할 말도 없는 건 마찬가지고.

 

“뭐. 비슷한 관계를 맺어보겠다고 한 건 나니까.”

 

“? 폐하. 무슨..”

 

“하하하! 아냐. 그냥 혼잣말이야.”

 

 내 머리의 꼭지를 돌게 했던 오르카 라이브 채널의 BL 게시물은 그 사령관이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아르망이 내게 명분이라면서 던져준 그 그림을 보고 그날 잠은 다 잤는데. 덕분에 더 필요도 없던 명분을 그 녀석과 지휘관들에게 내던졌다. 어떻게든 이 녀석들을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거 그린 녀석 대체 누구야?

 

‘부디 여기 오길 빈다. 지옥을 보여주마.’

 

 누군지는 몰라도 나중에 닥터에게서 관련 인물들 자료를 건네받기로 한 이상, 여기 파견 오면 반드시 개별번호까지 샅샅이 찾아내서 굴려줄 테다.

 

딸-각

 

“음. 이제는 다 먹었네...”

 

 이제는 싹 비워진 접시 위를 한번, 왼편에 서 있는 주방장을 한번 보자니 검은 셔츠를 입은 은발의 주방장은 내 무언의 요구에 응하듯 허리 뒤편에서 새빨간 술병을 전등 아래로 꺼내 보였다.

 

“소첩이 준비한 술이옵니다. 드시지요.”

 

“응응!”

 

딸-그락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소완이 내민 유리잔에 병의 은은한 붉은빛의 겉면과 같이 진홍빛의 술이 한가득 채워지자 나는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향과 알코올에 입가를 빙그레 올린 채 그 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크으! 이거 복분자였네!”

 

“후훗. 마음에 드시옵니까?”

 

 마음에 들다마다. 나는 입안에 가득 퍼지는 복분자의 향과 달달한 술맛에 소완을 향해 고개를 흔들어대었다.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에 온몸을 맡기고 있자니 어딘가 시야가 조금 뿌옇게 보이는 듯했다. 처음에는 눈에 무엇인가 끼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리 눈을 비벼도 이 뿌연 안개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응? 왜 이렇게 빨리 취하지?’

 

 분명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단 한잔에 취할 리도 없을 텐데, 무언가가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감각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억지로 맨정신을 찾아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쉽사리 겨누어지지 않자 나는 억지로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내게 이 술을 건네어 준 주방장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이거 이렇게 독한 술도..

 

‘잠..소와아안..!’

 

76)

 

“-푹 주무시옵소서. 주인이시여.”

 

 방금까지 자신이 먹던 식사가 올려져 있던 접시에 하마터면 얼굴을 들이박을 뻔한 라붕이 작전관을 소완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이마와 턱을 잡아 그의 얼굴을 허공에서 고정했다. 그녀의 양손에 붙잡힌 라붕이 작전관은 아까까지의 기세는 어디에도 없이 그저 두 눈을 감고선 입 밖으로만 새근새근대는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금세 깊은 잠이 든 그의 모습에 그의 오른편에 서 있던 금발의 소녀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 무슨 약물을 쓰셨나요?”

 

“별 것 아니옵니다. 근육 이완제와 피로 회복제를 좀 섞어 넣었을 뿐이옵니다.”

 

찰-랑

 

 금발의 소녀가 라붕이 작전관의 얼굴을 부여잡은 요리사를 향해 쏘아보자 살기가 등등한 푸른 눈을 받은 요리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머리를 제 위치에 두고는 왼손으로 새빨간 병을 들어 올려 흔들어 보였다.

 

“소첩이 부군께 이상한 약물을 탈 리가 없지 않사옵니까.”

 

“..폐하께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닌지요.”

 

“단순히 오늘 내내 오리진 더스트의 효력으로 버티신 부군을 위해 제가 준비한 약주에 불과하옵니다. 이대로 하루 푹 주무시면 내일 역시 거뜬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소첩이 부군을 옮기겠나이다.”

 

덜컹!

 

 금발의 소녀가 내린 허가 아닌 허가를 받은 요리사는 이미 쿨쿨-거리는 소리와 함께 꿈나라로 떠나버린 제 부군을 양팔에 들어 올리곤 막사의 한 켠에 자리를 잡은 침대 위에 그를 천천히 얹혀두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그가 누운 침대 한켠에 엉덩이를 걸치곤 잠든 그의 얼굴을 마치 보물을 보듯 빤히 내려다보았다.

 

“...부군께서 이리도 편히 주무시는 얼굴을 보다니 감격이옵니다.”

 

 세상모르고 잠든 라붕이 작전관의 이마 위를 자신의 왼 검지로 쓸어내리며 옥빛의 눈동자를 빛내는 요리사는 이윽고 이마에서 콧등, 콧등에서 인중, 인중에서 입술 위로 천천히 그의 얼굴을 왼 검지 하나로 쓸어내렸다.

 

“항상 봐왔던 얼굴일 진데, 어찌 이리도 새로운지. 부군께서는 제 맘을 아시나이까.”

 

“...폐하의 잠든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소완씨. 우리는 우리끼리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요. 어서 가지요.”

 

“..후우. 어차피 앞으로의 시간은 부군과 저의 것. 서두를 필요도 없을 것이니..”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뺏긴 탓인지, 소완은 제 행동에 제재를 가하는 금발의 소녀를 향해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막사 밖으로 걸어나가 이제는 밤하늘이 되어버린 이 세상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잠드셨습니다. 모두 내려오시지요.”

 

“-어머. 저희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요?”

 

“흥. 이 해충이. 너만 왜 주인님의 곁에 항상 고정이야? 야. 너 혹시 주인님을 독점하려고 드는 건 아니지? 응?”

 

 분명 어두운 밤하늘만이 가득하던 하늘 위에서 두 명의 여성이 어둠을 등진 채 하늘에서 내려오자 금발의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의 행정 사무에 도움이 되는 작업하기에 부관을 맡은 것뿐이에요. 리제씨.”

 

“그래. 스토커. 네가 아르망 추기경처럼 행정과 보급을 도맡아 할 수 있겠어?”

 

“-못할 게 어디 있어? 주인님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뭐든..”

 

 달빛 하나 들지 않은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도 호박빛의 눈동자를 빛내는 여인의 목소리에 보랏빛의 눈동자의 여성이 그녀의 물음에 반박하려 들자 그나마 전등빛이 새어 나오는 막사의 입구 천이 들려지며 안에서 옥빛 눈동자의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보랏빛 눈동자의 여성의 말에 반박해 나섰다. 

 

“소첩은 그리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그대에게는 무리옵니다.”

 

“이익! 너, 단칼에 썰려 볼래? 응?”

 

“소첩의 칼이 더 잘 드는지, 그대의 가윗날이..음. 생각해보니 그대의 가위는 부군이 내리신 물건이 아니 옵니까?”

 

“히히힛! 맞아. 주인님이 나를 위해 주신 나만의 가위야. 이걸로 주인님의 곁으로 오는 모든 해충들을..”

 

 어느새 한 손에 거대한 가위를 꺼내어 그 겉면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는 보랏빛 눈동자의 모습에 호박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아르망을 상체를 기울이며 조용히 그녀의 생각에 끼어들었다. 

 

“..우선 아르망 추기경? 회의를 시작하는 게 어떤가 싶네요. 여기서 오래 떠들었다간..”

 

“좋습니다.”

 

“...”

 

“...”

 

 아르망의 대답이 그들밖에 없는 어둠 속을 떠돌자 아까까지의 소란은 마치 없었다는 것처럼 일순간 적막에 휩싸였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할 뿐, 그 자리의 세 여성의 저마다의 눈빛은 오로지 한 명의 소녀, 아르망을 향해 고정해 있었다.

 그런 그녀들의 매서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아르망은 가만히 제 책을 펼치며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5회, 진(眞)오르카 1호 멤버의 회의를 개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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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동안 글을 안 썼더니 손가락도 머리도 굳었다. 시발..이제 이 에피소드도 두 편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