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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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먹구름이 낀 어두컴컴한 하늘, 언제나 그림자가 내린 세상을 비추던 달님과 검은 하늘 사이사이 박혀있던 별빛마저 미약헌 이 하늘 아래 마치 자신들을 이 어둠 속에 감추려는 듯한 네 여성이 사박대는 발소리와 함께 우거진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겨들었다.

 

사박-사박

 

사박-

 

“..여기쯤이면 괜찮을 겁니다.”

 

 선두로 앞서가던 이의 목소리에 뒤따라 숲속을 헤쳐 올라오던 세 명의 인영은 저마다의 눈빛을 어둠 속에서 빛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누구의 인기척도 없는, 심지어 야생 동물의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만이 가득한 어두운 숲속. 선두로 나아가던 앳된 목소리의 여성은 그녀들을 향해 등을 돌린 듯, 어둠 속에서 찰랑대는 금발을 휘날리며 자신과 세 여성의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

 

툭!

 

 소녀의 행동을 가만히 주시하던 세 명이 그녀의 손에서 책이 흙바닥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저마다 희끄무레한 나무에 등을 기대거나 딱딱한 돌덩이 위에 엉덩이를 앉혔다. 그리고 잠시 뒤, 소녀의 손을 떠난 책장이 촤-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빛 한 줄기 없던 숲속에 환한 푸른 빛을 내뿜었다.

 

촤-르륵!

 

“...이렇게까지 멀리 올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르망 추기경.”

 

 환한 홀로그램의 빛에 따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네 명의 여성들, 그중에 호박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은발의 여성의 물음에 아르망은 가만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예. 요안나양의 행방이 묘연하니, 저희 역시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겠죠.”

 

“그런 해충 따위의 눈치를 왜 봐야 하는 거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아르망의 작은 목소리 속에 묻어 나온 한 여성의 이름에 홍채가 옅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는 여성, 리제는 한껏 불만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반박해 나섰다.

 하지만 리제의 물음에 답한 것은 아르망이 아닌 돌덩이에 허리를 앉히고 있던 옥빛 눈동자의 여성, 소완이었다.

 

“소첩의 생각은 다르옵니다. 이 땅은 엄연히 제 부군의 것이 아닌, 사령관의 것이니.”

 

“..눈치를 봐야 하는 건 우리 쪽이겠죠.”

 

“칫. 왜 우리가 걔들 눈치를 봐야 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리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숲속에 모여든 세 명의 여성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러자 나무에 기대어 있던 리리스는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 그러면 우리 주인님의 정체를 저들에게 우리 입으로 폭로할까? 스토커.”

 

“..우리 주인님이 아니라 내 주인님이야. 해충.”

 

“그거나 그거나. 하여튼 한 가지 먼저 확인해야 하는 건,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오늘은 좀 줄었을까요? 아르망 추기경.”

 

 제 친우의 태클에 리리스는 가볍게 흘려넘기며 대화의 주체를 돌려 여전히 두 눈을 가만히 감고 앉아있는 아르망에게로 턱을 돌렸다.

 오늘 그들이 이 어둠 속에서 비밀리에 집회를 가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녀들의 주인의 안전에 관한 것 때문이었다.

 

“..예. 폐하의 오늘 행동을 저쪽에서는 이해해주었습니다.”

 

“호오. 듣던 중 다행이옵니다.”

 

“후훗. 하긴 저 사령관이라는 유약한 남성은 상상도 못 할 작전을 저의 훌륭한 주인님은 가볍게 해내셨으니까요.”

 

“주인님의 안배를 위협하는 해충들 따위, 어찌 되든 알 바 없어.”

 

“어머.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네 귀여운 동생들 때문에 너도 꽤 열성이었잖아. 스토커.”

 

“후훗. 참으로 보기 좋은 자매애이옵니다. 부군께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사옵니까?”

 

“....햇츙들..너희 애들이나 신경 써. 오지랖 부리지 말고.”

 

 한순간에 자신으로 돌아선 이목에 리제는 아까까지의 분기 서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제 갈색의 머릿결을 매만졌다. 나름대로 제 감정에 충실한 여성이기에,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정도는 신경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그녀의 맹점이었다.

 

“후훗. 제 눈으로 못 본 게 아쉽네요. 리제씨도 여기에 적응한 듯하니,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아르망 추기경?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죠?”

 

“...”

 

“저에게 일부러 영양 생산시설에서 오는 브라우니를 붙잡고 겁을 주라니, 덕분에 꽤 감정을 누르느라 고생했다고요.”

 

“고생하셨습니다. 리리스씨. 덕분에 이 일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예측대로이옵니까?”

 

“...모든 것은 예측이 아닌 그저 연산에 불과합니다.”

 

 자신을 쏘아보는 두 여성의 눈빛에 아르망은 천천히 꾹 감고 있던 제 두 눈썹을 들어 올리며 푸른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 빛내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부둣가 업무를 마치고 부품 생산시설로 갈지 모른다는 확률, 브라우니 개체가 리리스씨의 살기를 느끼고 실례를 할지도 모른다는 확률, 그리고 더치걸 개체든 다른 생산시설 인원들이든 실례를 저지른 브라우니가 몰래 전투복을 훔쳐가려는 것을 보고 언쟁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확률.”

 

“...”

 

“모든 것은 우연히 발생할 수도 있는 모든 것을 계측해 그저 행여 폐하께 동기를 부여할 만한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발생하는 것. 만약 그날, 눈치가 빠른 이프리트 개체가 수송 임무에 동행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흐응. 너 머리를 굴리는 것 치고는 되게 우연에 집착하네?”

 

“리제씨.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 또한 우연의 일치입니다.”

 

“...흥!”

 

 맹점을 찔러오는 아르망의 회답에 리제는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르망은 리제의 물음 탓에 끊긴 제 말을 천천히 이어갔다.

 

“모든 것은 저쪽에서 보았던 폐하의 성향과 또 이곳 이들의 관계성에 대입해 일어난 것. 저 또한 폐하께서 이리도 착착 일을 진행 시킬 줄은 몰랐습니다.”

 

“아아, 주인님. 어쩜 이리도 훌륭하신지.”

 

 아르망의 의외의 말에 리리스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호박색의 눈동자를 그림자 속에서 한층 빛내었다. 귀 끝까지 닿으려는 그녀의 입꼬리 사이로 새하얀 이빨들이 가지런히 드러나자 그것을 보던 소완 역시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살을 덧붙였다.

 

“후훗. 부군께서 심히 신중한 성격인 것은 일찍이 알았으나, 중앙 회당에서 소첩들을 선동하는 모습은 아직도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사옵니다.”

 

“주인님의 리더쉽이라는 거야. 그게. 아아. 주인님께서 이런 이상한 세계가 아닌 우리가 있던 곳으로 오셨으면 너무나 좋았을 텐데.”

 

“...그것은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닙니다. 리리스씨.”

 

“? 그게 무슨 소리죠?”

 

 설마 제 의견에 반대하는 이가 있을 줄 몰랐다는 듯, 리리스는 아까의 미소를 싹 지우고선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제 말에 토를 다는 푸른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자신을 향한 희번덕거리는 눈에도 아르망은 제 의견을 찬찬히 읊었다.

 

“폐하께서는 일반인이십니다. 따라서 저 오르카 1호의 사령관과 같이 전술 및 전략에 어둡습니다.”

 

“..그런 건 배우면 그만 아니야?”

 

“리제씨.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배운다 한들, 이 세계의 적에 대항할 이는 사령관뿐입니다. 그와 같이 세계의 축복을 받은 이가 아니라면..”

 

 뒷말을 흐리는 아르망의 목소리에 세 여성은 저마다의 눈을 빛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들 중에서 가장 앞날을 예지하기에 있어 훌륭한 이는, 저 소녀뿐.

 

“..폐하께서 큰 화를 당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있는 거랍니다. 아르망 추기경.”

 

자박-자박

 

 아르망의 씁쓸한 뒷말을 들은 리리스는 여전히 부릅뜬 눈썹 사이로 제 호박색의 눈동자로 소녀의 이마를 쫓으며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굽히곤 그녀의 푸른색의 눈동자와 맞대었다.

 

“주인님께서 직접 육성한 저희를 너무 무시하는 발언 같네요?”

 

“...”

 

“주인님의 오르카 1호에는 100레벨의 대원들이 몇이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장비가 잠들어 있는지. 당신은 잊으셨나요? 이곳에 온 지 저희보다 한 달이나 일렀으니, 잊을 만도 했지요. 그쵸?”

 

 리리스는 웃고 있다. 입가는 여전히 어두운 장막 아래서 웃고 있지만 깜박일 생각도 하지 않는 그녀의 두 눈은 여전히 아르망의 푸른빛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살벌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말과 행동이 다른 그녀에 비해, 아르망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이 한 달이 일렀든, 아니든. 폐하께서 저희의 세상에 오는 것은 반대입니다. 오히려 이곳에 오셨기에 다행이라고 저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

 

“리리스양은 제 동생들이 이곳에 함께 하지 못했기에 불만이시겠지만, 본래 폐하께서 짊어졌어야 할 무게를 이곳의 사령관이 대신 맡고 있으니 저희가 이리도 평안한 일상을 보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후훗. 정론이옵니다. 리리스양, 이제 물러서시지요. 저는 지금이 불만스럽지 않사옵니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네요? 좋아요. 어차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주인님을 그곳으로 모시고 갈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곁에서 들려오는 요리사의 찬동에 리리스는 굽혔던 무릎을 펴며 다시 자신이 원래 서 있던 나무의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듯 이번에는 물러선 그녀의 친우가 질문을 이어받았다.

 

“흥! 어차피 네 말대로라면 서약하지 못한 애들은 이곳에 오지도 못한다는 거 아니야? 해충.”

 

“서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저희가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는 것도 제 추론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건 기적이라고 밖에..”

 

“스토커. 그녀라고 해서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법 아니겠어?”

 

“애당초 아르망양이 여기로 처음 왔을 땐 부군도 안 계셨으니, 꽤 곤란하셨을 것이옵니다.”

 

“...부정은 못 하겠네요. 그 말.”

 

 라붕이 작전관이 오기 전부터 먼저 이 땅에 떨어진 아르망, 당시의 혼란스러움과 좌절감에 무릎을 꿇었던 그녀는 한동안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이 땅에서 아무 일에도 임하지 못했었다. 당시 이곳 책임자였던 요안나가 그런 그녀를 한껏 걱정하기까지 했으나 아르망은 그것에도 신경 쓰지 못했었다.

 

‘폐하를 더는 뵐 수 없는 건가요.’

 

 작은 화면 너머로나마 뵈던 그를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하던 그녀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말문을 트게 해주었던 것은 새로이 등장한 인간과 그 인간의 이름.

 

‘..흠. 그 남성분. 이름이 라붕이라고 했나. 특이한 이름일세.’

 

 라붕이라는 기괴한 이름에 요안나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였으나, 아르망은 달랐었다. 필시 저 괴상한 별명은 제 주인이 종종 보던 인터넷 사이트의 유저를 일컫는 이름, 행여 그가 정말로 이곳에 왔을까 싶어 하루 내내 발을 동동 굴려대던 그녀는 부둣가에 도착한 고속정에서 튀어나온 인간 남성의 모습에 숨을 헉 들이쉬었었다.

 

‘...라붕이 대..장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잠이 들지 못한 것처럼 비틀거리는 남성이 환한 햇빛과 함께 등장하니, 그것이야말로 가히 그녀에게 있어서 신이 강림한 것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1달 가까이 숨어있던 제 감정이, 실로 드러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껴안았었다.

 

‘그때는..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조금 부끄러운..’

 

‘자자-아르망. 아르망의 폐하가 여깄습니다.’

 

 장난스러운 미소로 양팔을 벌리는 그녀의 폐하,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린 아르망은 더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폐하께서 여기 있다는 사실이.”

 

“? 당연한 소릴 하시고 계시옵니다.”

 

“주인님이 계신 곳이 그 어디든, 이제 공간의 주박에서 벗어난 우리에게 있어 갈 곳이 따로 있을까요?”

 

“흥. 해충들이 없는 곳이었으면 주인님은 나만의 것이었을 텐데. 너희들은 왜 따라오고 난리야.”

 

“..그러고 보니 여러분들은 어떻게 폐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저마다 한 소리를 늘어놓는 여성들에게 아르망은 스스로 찾을 수 없는 답을 그녀들에게서 직접 구했다. 그리고 세 여성은 금발의 소녀가 환한 홀로그램 빛에 어리벙벙한 얼굴로 자신들에게 답을 구해오자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음흉한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대답을 내놓았다.

 

“직감이에요. 주인님이 계신 곳이 곧 제가 있을 곳이니까요.”

 

“직감이옵니다. 애당초 부군이 아닌 사령관이라는 허우대만 좋은 남자를 따를 바에야,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나이다.”

 

“히히히!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 주인님이 계신 곳이 내가 있을 곳인데. 주인님이 주신 반지는 잃었지만, 주인님께서 직접 착용해주신 가위만큼은 챙겨서 왔다고.”

 

“..우리도 주인님이 끼워주신 회로와 OS는 가져왔어! 스토커!”

 

“그런 거랑 내 가위가 같아? 응? 해충. 부러우면 부럽다고 이야기해도 돼. 히히힛!”

 

“...차마 부군께서 저 여자를 위해 준비해 주신 것이니 비하도 하기 힘든 것이옵니다.”

 

“...”

 

 대화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 그녀들의 대답에 아르망은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저마다의 황홀경에 빠진 여성들을 빤히 응시했다.

 

“...사담은 이 정도로만 할까요?”

 

“어머. 그렇네요. 저희 주인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부군의 상황은 정리된 것이옵니까? 아르망양.”

 

“정리 안 된 거라면 내일 저 리조트에 있는 해충 중 절반은 내 손에 날아갈 거야.”

 

 마치 한 몸처럼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여성들의 모습에 아르망은 지끈거려오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그녀들과의 대화에 다시 한번 정직하게 임했다.

 

“여러분들이 고생해주신 덕분에 오늘부로 폐하의 입지를 완고해졌습니다.”

 

“후훗. 그렇게 아르망 추기경이 고민하던 튀어나온 돌은 피했네요.”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럼 부군께서는 무엇이 되신 것이옵니까? 저희에게는 태양 그 자체이지 않사옵니까?”

 

 소완은 나긋나긋한 물음에 아르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먹구름으로 가려진 달빛을 찾아 푸른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형체도 보이지 않던 구름 사이로, 노란색의 빛을 내뿜는 선명한 달빛이 어둠이 내려 앉은 요안나 아일랜드의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폐하께서 태양이 될 수 없다면, 달이 되시면 그만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라는 전제 조건이 사라지니.”

 

“그러기 위해서 이런 작전을 벌인 건가요?”

 

“예. 폐하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화가 나시면 뒤도 없으신 분이니 이런 일을 벌일 줄은 예측했었습니다.”

 

“사령관이라는 남자가 하지 못 하는 일을, 부군께서 하신다면 확실히 불필요하고 의문투성이인 인간에서 이곳에 필요한 남성이라는 인식으로 변할 터. 제법 머리를 굴리셨사옵니다?”

 

“..칭찬은 달게 들을게요.”

 

“...대체 너희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셋이서 무엇이 즐거운지 서로를 바라보고 미소를 짓는 세 여성을 향해 리제는 혼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들을 돌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물음에 리리스는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그 물음에 답했다.

 

“이제 우리 주인님의 신변을 위협할 세력 중 하나가 우리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소리야. 스토커.”

 

“...주인님을 위협하는 것들은, 전부 내가 잘라버릴 거니까 애당초 없어. 해충.”

 

“어머. 적이 아군이 되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어.”

 

“리리스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흰 오늘 훌륭한 우군을 얻었습니다. 그 확답으로 폐하께서 오늘 사령관과 형제의 연을 맺었습니다.”

 

“...형제? 그 멀대 같은 남자와 우리 주인님이?”

 

 선선히 미소를 짓는 아르망과 달리 리리스는 한껏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째려보았다.

 

“제 주인님이 왜 그런 남자와 형제의 연을 맺어야 하는 거죠? 그것도 분명 제 주인님이 동..”

 

“폐하께서 형입니다. 리리스씨.”

 

“...예?”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다른 대답에 리리스는 고갤 돌려 자신처럼 황당하다는 얼굴을 짓고 있는 리제와 소완과 함께 눈빛을 교환했다. 그런 그녀들의 행동에 아르망은 여전히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폐하의 늠름하신 모습이 사령관의 마음을 돌린 듯합니다. 폐하께 형이라 부를 테니, 거부하지 말라고까지 하더군요.”

 

“...그 멀대..크흠. 아니. 사령관님도 뭘 좀 아는 분 같네요. 후훗. 주인님의 상관이래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부군의 모습에 흠뻑 빠지다니, 이거. 조금 위험한 것 아니옵나이까?”

 

“그 해충, 가운데를 잘라 버려야..”

 

 만족스러운 리리스와 달리 소완과 리제는 째릿한 눈매로 자신들이 오르카 라이브 채널에서 보았던 흉측한 게시물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당장에라도 저항군의 핵심을 노리려는 리제의 모습에 아르망은 고개를 가로저어 그녀를 말렸다.

 

“그 게시물의 주인공들은 곧 이곳으로 후송되어 올 것입니다. 폐하처럼 사령관 역시 꽤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그녀들이 올 때는 국물 한 방울도 없나이다. 감히..제 부군을 가지고 놀다니.”

 

“햇츙! 진짜 해충들은 그 녀석들이야. 히히히!”

 

“주인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만으로도 사형이랍니다. 후훗.”

 

 저마다 제 눈에 담았던 게시물들을 떠올리던 그녀들은 서늘한 눈빛으로 앞으로 다가올 진정한 범죄자들을 어떻게 굴려 먹을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과 달리 아르망은 검은 하늘에 올려진 달의 겉면을 빤히 바라보다 이번에는 새로운 주제와 함께 입을 열었다.

 

“행여 폐하께서, 모습을 달리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떡하시겠습니까?”

 

“..모습. 맞네요. 그 문제도 있었네요.”

 

“부군의 외관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난 싫어. 주인님이 얼굴이 바뀌는 거, 싫어.”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의 뇌파를 따라 그를 인식한다. 사령관의 뇌파와 라붕이 작전관의 뇌파는 다르다. 이것은 저항군의 대원들이 그와 그를 구별하는 방법. 하지만 이곳의 네 명은 달랐다.

 

“화면 너머로만 보던 주인님의 얼굴이 삽시간에 바뀌는 게 께름칙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스토커.”

 

“..정말 안 바꾸면 안 돼? 너도 싫잖아. 해충.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를 봐오던 주인님이..”

 

“리제양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부군께서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옵니다. 받아들이시지요.”

 

“..생각보다 두 분은 담담하게 받아들이셨군요.”

 

 그녀들은 화면 너머로만 보던 라붕이 작전관의 얼굴로 그를 인식하고 구별했다. 그렇기에 그의 외관을 한눈에 보자마자 그가 그인 것을 알아채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가 제 얼굴을 유지하게 두지 않았다. 그리 그와 그녀들에게 상냥한 세계는 아니었다.

 

“...주인님이 신체를 바꾸지 않는 한, 저 바닷속의 괴물에 의해 주인님은 언젠가 깊은 잠에 빠질 거야. 스토커.”

 

“...싫어. 싫은 건 싫은 거야.”

 

 한껏 침울해하는 리제를 토닥이는 리리스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르망과 소완은 서로 눈을 맞추며 그녀들끼리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아르망양께서도 별로 원치 않는 것으로..”

 

“예. 폐하의 얼굴은, 폐하를 상징하는 것이니까요. 저는..폐하께서 행여 모습을 바꿀지라도 따를 겁니다. 하지만..좀 더 오래 보고 싶어요. 좀 더 폐하께 다가서고 싶어요.”

 

 그게 제 꿈이었으니까요. 아르망은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이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시끌벅적한 낮이 아닌, 작은 달빛이 내리쬐는 조용한 숲이라 그런 것인지, 그녀의 작은 소망에 세 명의 여성은 귀를 기울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되었든, 부군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사옵니다. 너무 그리 심려치 마시옵소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 정도는 가져도 충분할 거에요. 아르망 추기경.”

 

“..해충.”

 

“...예. 고마워요.”

 

“어머. 같은 오르카 1호 소속인데, 고맙긴요.”

 

 자신을 격려하는 세 여성의 말에 아르망은 늘어뜨렸던 고개를 들어 그녀들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젠가 찾아올 그의 얼굴과의 이별, 허나 그것은 새로운 만남이라는 생각에 아르망이 배시시 눈웃음을 그렸다.

 하지만 아직 무언가 더 남았다는 듯 리제는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 입술 사이로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해충. 우리 언제까지 주인님께 정체를 숨겨야 해? 이제는 주인님이 우릴 그렇게 피하시지도 않잖아.”

 

“...아. 그 부분에 대해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군요.”

 

 리제의 볼멘소리에 아르망은 제 연산 모듈을 가동,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만일에 대비한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내었다. 그리고 예측 가능한 미래를 모두 그려낸 아르망은 다시 두 눈썹을 뜨며 그녀에게 희망적인 정보를 건네었다.

 

“이제는 숨기실 필요가 없어요. 폐하께서도 이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기에 적응하셨을 터이니, 무턱대고 의심하시지 않을 거예요. 반지가 없어도, 기억하고 있는 게임 속 이야기라던가, 아니면 리제양의 가위를 직접 보여주셔도..”

 

“정말? 그러면 지금 당장 주인님께 가서 내 정체를 밝혀도 돼?”

 

“후훗. 내일 아침에 하시는 편이..”

 

 반색하는 리제의 모습에 아르망 역시 밝은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최적의 타이밍을 건네주려 할 때, 갑자기 그녀 둘의 사이로 두 여성이 걸어와 그녀들의 대화를 막아섰다.

 

“난 반대야. 스토커.”

 

“저도 반대이옵니다. 리제양.”

 

“...응? 왜? 너희들 뭐야?”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두 은발의 여성들이 제 행동을 가로막아서자 리제는 언제 웃었냐는 듯 다시 두 눈썹을 부라리며 제 앞을 막아선 은발의 여성에게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야. 해충. 너 무슨 생각이야? 왜 주인님께 내 정체를 밝히면 안 돼? 너 여기 오고 나서부터 이상해. 뭐 잘못 먹기라도 했어?”

 

“어머. 난 여기의 귀여운 안드바리 덕분에 잘 먹고 잘 마시고 살았는데? 후훗.”

 

“그럼 왜 반대해? 너도 주인님께 네 정체를 밝히고 안기고 싶을 거 아니야? 그런데 왜 날 방해해? 미쳤어? 죽고 싶어?”

 

“소첩 역시 그런 생각은 마찬가지이오나, 리제양. 한 가지 물어보겠나이다.”

 

“...?”

 

 제 앞을 가로막아 선 이의 뒤에 서 있는 또 다른 은발의 여성이 입을 열자 리제는 그녀의 옥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 은발의 여성, 소완은 이제까지의 미소와는 어딘가 모양새가 다른 샐쭉한 미소를 지은 채 작은 목소리로 제 희망사항을 그녀에게 읊었다.

 

“부군께서 저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것은 리제양, 그대도 알 터이옵니다.”

 

“..알아! 당연한 소리를..”

 

“그렇다면 말이옵니다. 그런 부군께서 저희에게 다가오려는 듯, 말려는 듯한 모습. 꽤 즐겁지 않사옵니까?”

 

“..뭐?”

 

“후훗. 아아. 주인님께서 말이야, 만약에 우리가 자신이 키웠던 리리스인지, 리제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우리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모습. 너무 귀엽지 않아? 스토커?”

 

“...”

 

“행여 말 한마디 잘못할까 고심하고, 또 어떻게든 우리의 눈치를 봐가면서 쩔쩔매시는 모습. 나는 그런 주인님은 처음 봐.”

 

“...”

 

 제 앞에서 무언가를 늘여놓는 친우의 황홀한 미소에 리제는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 들어 올렸던 어깨를 낮추며 귀를 쫑긋거렸다.

 

“우리야 주인님이 무슨 일을 하시고,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만. 주인님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온 줄 모르시잖아?”

 

“..응응.”

 

“게다가 우리의 정체를 짐작도 못 하셔서 우리가 다가갈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마치 첫 연인을 사귀려 드는 모습 같아서 두근거리는 거 있지?”

 

“..응응.”

 

“어때? 스토커. 예전과 달라. 그저 바라만 봐야 할 게 아니라고. 이제는 주인님께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어. 이제는 굳이 정체를 밝히니 마니 한 문제가 아니야. 주인님의 마음을, 우리가 직접 가질 수 있다고.”

 

“..응응!”

 

“소첩 역시 부군께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굴뚝 같사오나, 어차피 다가가는 것은 밝히지 않아도 되옵니다. 허나 부군의 당황하시는 모습은, 이때가 아니면 언제 즐기나이까?”

 

“-오오!”

 

“주인님이 우리에게 반지를 주시는 그날, 그때 정체를 밝힌다면. 주인님이 얼마나 당황해하실까? 아니면 행복해서 우실까? 상상만 해도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스토커, 내가 이야기했지? 결국에는 주인님의 사랑은 나..아니. 우리에게 돌아올 거라고. 어때? 구미가 당기지?”

 

“응응!”

 

 얀데레란, 한 이성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여성 또는 남성 캐릭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사람에게 맹목적인 호감을 보이는 그 점에 어떤 이들은 환호하나, 실제로 그런 얀데레 속성을 보유한 실제 인물들은 마조히즘적인 성향보다 새디즘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다.

 한 마디로,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제 사랑을 표현하며 그 대상이 고통을 받든, 행복해하든 대상의 심정은 둘 째치고 제 욕구를 채우는 것에 크게 집착하는 사랑. 더 줄여서 짤막하게 표현하자면..

 

“...병에 걸렸군요. 모두.”

 

“앗! 아르망 추기경? 혹 저희의 플랜에 동의해주실 수 있을까요? 행여나 아르망 추기경이 먼저 정체를 밝힌다면 저희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거든요!”

 

“소첩들의 어필에 크게 당황해하는 부군의 모습, 그대도 보고 싶지 않나이까?”

 

“햇츙! 협력해!”

 

“...좋아요. 저도 폐하의 그 장난스러운 행동에 조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거든요.”

 

“후훗. 아르망양도 어찌 보면 저희와 동류이옵나이다.”

 

 그렇게 달빛이 내리쬐는 환한 요안나 아일랜드의 한적한 숲속, 그곳에서 네 여성이 저마다의 목표와 비밀을 간직한 채 한 남성을 향한 병적인 사랑을 맹세했다.

 

78)

 

쏴-아아아!

 

 시원한 물줄기가 사방에서 뿌려지는 어느 난잡한 샤워실, 그곳에 모인 수십 명의 여성은 저마다의 나신을 한껏 드러낸 채 천장 아래 아무렇게나 설치된 간이 샤워시설 아래서 서로의 어깨와 가슴을 맞부딪혀 가며 머리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샤워기를 차지하려 들었다.

 

“잠..! 곁으로 오지 마세요!”

 

“아니! 비좁은데 어떻게 안 부딪혀!”

 

“무..물줄기가 약함다..”

 

 환한 조명등과 달리 간이로 배치한 샤워시설이어서 그런 것인지, 수압이 약해도 턱없이 약한 간이 샤워기에 오늘 하루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제 몸을 씻어내려는 인원들이 저마다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물줄기에 들이댄 채 서로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들이 아옹다옹하기를 5분, 어느 짤막한 체구의 여성이 간이 샤워시설의 천막을 거두곤 수십의 여성들이 서 있는 샤워장 안으로 머리만 쏙 들이밀었다. 

 

“다 씻은 인원은 빨리빨리 나와!”

 

“아..악!”

 

 앙칼지다 못해 짜증이 서려 있는 이프리트의 명령에 아직 제대로 씻지 못한 인원부터 어떻게든 머리카락을 씻어내린 인원들까지, 그녀들은 저마다의 한숨을 푸푸-내쉰 채 찰박대는 소리와 함께 혼잡한 샤워장을 벗어났다.

 

사락-

 

“...이뱀. 저 샤워를 한 건지, 만 건지. 모르겠슴다.”

 

“시끄러워. 나도 마찬가지야.”

 

“이익! 그 썩을 인간, 저에게 이런 치욕을..”

 

 새하얀 나신에 묻은 물기를 손에 들린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던 그녀들은 저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저마다의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바뀔 것은 없었기에 이내 흰 티셔츠와 보급용 숏 츄리닝을 대충 입고선 간이 샤워시설의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례로 샤워시설로 들어가세요.”

 

“...악.”

 

 지치고 고된 하루, 생애 처음 겪어보는 고강도의 훈련에 오르카 저항군의 요안나 아일랜드 파견 인원들은 노움의 짤막한 명령에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또 다른 여성 무리가 혼란스러운 샤워시설로 들어가자 그녀들의 등을 보던 북부 전선의 이프리트와 동부 전선의 앨리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골조만 세워진 리조트 건물의 아래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 인간은 대체 뭐 하는 남자죠? 이렇게 우리를 막 부리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나요!”

 

“..누구긴 누구야. 새로 이곳에 부임한 라붕이 대장님이지.”

 

“죽는 줄 알았슴다. 라붕이 대장님, 정말 무서운 분이셨슴다..”

 

“그 대장님, 아마 후환이고 뭐고 두려울 게 없을걸.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세세한 플랜을 제맘대로 짤리도 없고.”

 

“흥! 꼴에 장성이라고 제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분명 본대의 사령관님은 이걸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겠죠. 반드시 여기서 탈출해 그의 만행에 대해 폭로..”

 

 여태까지의 불만을 연거푸 토해내는 앨리스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이프리트는 물기가 덜 마른 제 앞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힘 풀린 눈으로 두 층 아래에 있는 자신의 간이 막사로 들어섰다.

 

사락-

 

“나 왔어.”

 

“이..이뱀. 이것 좀 보세요.”

 

“? 왜?”

 

 먼저 씻고 내려온 제 붉은 머릿결의 후임이 손을 덜덜 떨어대며 제 단말기를 내밀자 이프리트는 또 뭐가 남았나, 싶어 눈살만 찌푸리며 후임의 간이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뒤따라 들어온 앨리스를 비롯해 브라우니, 그리고 탈론 페더까지 다수의 인원이 이프리트를 따라 레프리콘의 단말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요? 저도 볼래요.”

 

“뭔 재밌는 거라도 발견했슴까? 상뱀.”

 

“...허어!”

 

 앨리스와 브라우니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를 흘려들은 이프리트는 제 후임의 단말기 위를 쭉 읽어내리다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목소리로 한탄을 토해냈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다 폭로되었어. 이미.”

 

“예? 우리라뇨?”

 

“한 마디로 이곳 요안나 아일랜드에서 파견 인원들, 우리가 하던 삥땅이랑 가라 이야기가 이미 만연하고 있다고..”

 

“...오. 망했..슴다..”

 

 브라우니의 짤막한 감상대로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어졌음을 이프리트는 눈치채고는 제 손에 들려있던 단말기를 앨리스와 탈론 페더에게 건네었다. 그러자 앨리스는 자신의 커다란 가슴의 아래서 단말기의 화면을 읽어내렸다.

 

“..요안나 아일랜드의 기막힌 사실에 대해 폭로합니다. 하아? 어..어째서 저희의 이야기가..”

 

“어..언니. 우리 망..했네요?”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앨리스와 달리 쉽사리 자신들의 현 상황에 대해 직감한 탈론 페더는 이마를 부여잡곤 제 침상 위로 휙 몸을 내던졌다. 제 동료가 그러든 말든 앨리스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계속해서 단말기의 위를 읽어내리다 곧장 두 눈을 부릅떴다.

 

“뭐..뭔가요! 잠깐! 여기에 왜 우리 사진이..!”

 

 이리저리 게시물들을 읽어내리던 앨리스는 언뜻 보인 요안나 아일랜드의 사진 속의 자신의 모습에 얼굴을 새빨갛게 달구었다. 백사장을 향해 제 자랑인 분홍빛 장발을 헝클어뜨린 채 독기가 가득 서린 얼굴로 지프차 위의 라붕이 작전관을 쫓는 제 모습에 앨리스는 푸른 눈망울을 글썽대었다.

 

“왜..왜 이런 볼썽사나운 사진이!”

 

“익스프레스들이 뭘 찍나 했더니, 여기 오르카 라이브 채널로 생중계했다고 하네.”

 

“히에에엑..그럼 저희의 그 꼴사나운 모습이..”

 

“뭐..전 오르카 저항군에 퍼졌다 이거지.”

 

“그..그 남자아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 오르카 저항군 네트워크를 통해 퍼진 제 모습에 앨리스는 한껏 남성이 있을 어두컴컴한 숲으로 목청을 내세웠다. 그런다고 돌아오는 것도 없었지만, 앨리스는 제 암담한 현실에 멘탈이 강한 그녀답지 않게 한껏 찌푸린 얼굴 위로 지친 기색을 내보였다.

 

“이..이러면 제가 폭로하든 말든..”

 

“말했잖아. 그 철두철미한 인간이 우리가 뭐라 폭로하는 것쯤은 가볍게 흘려넘길 거라고.”

 

 설마 그렇다고 생중계를 할 줄은 몰랐지만. 이프리트는 이미 다 끝난 이야기를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 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제 침상의 이불을 쓱 거두어내었다. 그러자 군녹색의 시트 위에 그녀가 익숙히 봐 왔던 기다란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초코바잖아?”

 

“아, 이뱀. 여기 실키 분들이 하나씩 두고 가셨어요. 내일을 위해 열량 보충하라고요.”

 

“...난 두 개네?”

 

“오늘 마지막 행군 때 2등 하셨잖아요. 그 포상이라고 하던데요?”

 

“...헤에. 포상도 있긴 했구나.”

 

 이프리트는 제 침상의 시트 위에 얹어진 두 개의 초코바를 집어 들곤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를 따라 뒤늦게 들어선 이들도 제 침상의 이불을 후다닥 거두어내고는 자신들의 초코바를 찾아 환호성을 내질렀다.

 

“초코바임다! 안 그래도 저녁이 부족했는데!”

 

“흐으윽..이게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어요오..”

 

“초코바! 초코바!”

 

“...”

 

 다른 막사에서도 들려오는 환호성과 초코바를 향한 만세 삼창 소리에 이프리트는 제 손에 들린 초코바를 하나 뜯어 제 입안에 쏙 집어넣었다.

 

‘..달다.’

 

 새카만 초콜릿의 겉면을 물어뜯자, 그 안에 들어있던 수많은 견과류가 어금니와 송곳니에 걸려 으스러져 입의 중앙에 있는 혓바닥의 위를 거닐자 이프리트는 두 눈을 감고는 오늘 처음으로 느끼는 편안함에 침상 위에 몸을 풀썩 뉘었다.

 

‘..이렇게 초콜릿이 단 거였구나.’

 

 맨날 삥땅쳐서 먹던 녀석인데, 오늘따라 더 달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이프리트는 제 입에서 사르륵 녹아내리는 초코바의 맛을 음미하다 곧장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독기찬 여성의 목소리를 따라 눈을 떴다.

 

“두고 봐요..그 인간. 반드시 제 발아래서 엉엉 울게 만들어 주겠어요!”

 

“...”

 

 한 손에 초코바를 세 개나 든 앨리스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이프리트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제 막 초코바 하나를 찢어 입안에 집어넣으려는 그녀의 등에 대고 그녀가 잊고 있는 듯한 현실을 하나 내던졌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동부 전선이었지?”

 

“우물우물. 그런데요. 뭔가요?”

 

“...오늘 낮에 라붕이 대장님이 보여준 마리 대령님. 그쪽 지휘관님 아니야?”

 

“...아.”

 

 낮에 라붕이 작전관이 그녀들에게 보여주었던 동부 전선의 마리 대령이 보낸 영상 메시지를 떠올린 동부 전선의 에이스, 세라피아스 앨리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손에 들고 있던 초코바를 흙먼지가 가득한 콘크리트 바닥에 툭-떨구었다.

 

“..마리 대령님이 말한 앨리스 개체, 너지?”

 

“아아-! 아아!”

 

“돌아가서도 힘 내. 아마 무리겠지만.”

 

 이 지옥이 끝난다 한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불굴의 마리 개체 특유의 고강도 훈련이 머릿속에 떠오른 앨리스는 제 분홍빛 장발을 쥐어잡은 채 간이 침대 위를 미친 사람처럼 데굴데굴 굴려대었다.

 

“아악! 대체 제가 뭐 그리 잘못했나요! 본대들도 다 같이 한걸! 따라 했을 뿐인데!”

 

“..그게 우리의 잘못이겠지.”

 

‘그리고 우리 브라우니가 제일 문제였고.’

 

 차마 이 모든 일의 원흉으로 짐작되는 제 분대의 비밀을 밝히지 못한 이프리트는 침상을 무너뜨릴 듯 데굴데굴 굴러 대는 앨리스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간이 전등이 놓인 콘크리트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포상도 있고, 훈련만 죽어라 시키지만 나름대로 애들도 챙기고.’

 

 처음 봤을 때는 마냥 인간이 하나 늘었다고 좋았는데. 만나보니 병사들과 곧잘 어울리며 이 모든 일을 벌인 이유가 여기의 인원들을 위해서였다는 라붕이 작전관의 속내를 지레짐작한 이프리트는 아직 이 상층에 있을 자신과 같은 이프리트 개체에 대한 부러움으로 속을 달래었다.

 

‘부럽다. 나도 저런 인간님이랑 같이 지내고 싶은데..’

 

 사령관이 있는 본대로 가도 사령관과 대화나 얼마나 나눌 수 있을까. 레모네이드 알파의 휘하에서 수십 년을 싸워온 이프리트는 생애 처음 보는 인간의 다채로운 면모에 사령관과 다른 매력을 느꼈다.

 아마 본대의 인원들이 그만큼 강한 이유는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서겠지. 그렇다면 여기는 누가 누구를 지키고 있는 걸까.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가는 제 상념에 이프리트는 천장에서 눈을 떼고는 제 옆에서 초코바를 우물거리는 후임을 빤히 바라보며 그녀에게 속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 전역하면 여기 오겠지?”

 

“예? 아아. 예. 이뱀. 아마도요.”

 

“레후야. 내 다리 좀 분질러 봐. 시원하게 아예 박살.”

 

“네?! 무..무슨 소리예요! 언니!”

 

“의가사 전역, 아. 아니다. 다리가 박살 나면 내일 그 미친 조교한테서 수복제 맞겠네. 없던 이야기로 하자.”

 

 제 속 빈 강정 같은 말에도 질겁하는 후임의 모습에 이프리트는 킥킥-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알파님 휘하라 여기에 와서 이렇게 굴렀지. 만약 오메가나 감마같은 레모네이드 휘하였으면 우린 이미 송장이었겠지.”

 

“...”

 

“...”

 

 이프리트의 장난기 어린 말에 막사 안의 모두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침상 위에 퍼질러 누운 소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침상 위를 뒹굴던 앨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썩을 년들의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네요. 후우..”

 

“그 미친년들 손에 죽어 나간 애들이 철충들한테 죽은 애들보다 많을걸요.”

 

“..하긴. 필요 없다 싶으면 서슴없이 제 손으로 죽여버리는 여자들이었어요. 알파님이야 그런 분은 아니었지만, 다른 레모네이드들 역시 비슷했죠.”

 

 아까까지 침상을 부술 듯 헝클어대던 앨리스는 과거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끔찍한 여성들에 대한 이미지에 양다리를 모아 자신의 풍만한 가슴께 위로 무릎을 올렸다.

 

“...그 년들은 악마들이에요. 뭐가 좋다고 그 영감탱이들을 살리려 드나요? 그런 허황된 꿈에 의해 부려질 바에야..”

 

“..바에야 여기가 나아?”

 

“-그럴 리가요!”

 

 조금씩 충격을 씻어내리던 앨리스는 건너편 침상에서 들려오는 이프리트의 물음에 다시 그녀다운 날카로운 눈매로 그 물음에 격한 부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런 눈매에도 이프리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올리곤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오늘 훈련을 제일 열심히 받지 않았어?”

 

“우..웃기는 소리 하지 마요! 제가 왜요!?”

 

“왜긴, 너만 3개잖아. 자유 행군 1등님. 확실히 엘리트는 다르네. 나 나름대로 죽어라 달린 건데. 킥킥.”

 

“이..이건! 그냥! 그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예요! 두고 보세요! 결국에 이기는 건 저일 테니까!”

 

“네네. 나는 이만 잘게. 열심히 노력해 봐.”

 

“..흥!”

 

 독기 어린 목소리보다는 칭얼대는 소녀같은 느낌의 앨리스에게서 눈을 뗀 이프리트는 생각보다 푹신한 침상의 감촉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오늘 하루 힘낸 자신의 눈썹을 감아 내렸다.

 

‘내일 또 힘내야 할 테니. 얼른 자야겠다. 하아암.’

 

 하루 내내 뛰어다닌 탓일까, 평소보다 잠이 잘 올 것만 같은 기분에 이프리트는 완전히 감긴 눈썹 너머의 어둠에 온몸을 맡긴 채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전역해서 나도 여기 올 테다. 헤헤.’

 

 삶의 이정표가 생긴 북부 전선의 이프리트는 내일 있을 거친 훈련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나날을 생각하며 그렇게 하루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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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라오세계관에 떨어진 라붕이는 삼얀과 아르망, 그리고 아싸 사령관에게 고통받습니다

주제: 라오세계관에 떨어진 라붕이는 삼얀과 아르망, 그리고 아싸 사령관에게 고통받습니다

내용: 라오세계관에 떨어진 라붕이는 삼얀과 아르망, 그리고 아싸 사령관에게 고통받습니다


ㅇ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