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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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이거 어떻게 잡으라는 거지?”

 

 할 것 없는 평화로운 저녁 일과 시간, 하릴없이 이 지긋지긋한 군 생활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내기 위해 나는 내 선임에게서 할 만한 모바일 게임을 추천해달라 했었다.

 이제는 내무반에서 휴대폰도 쓸 수 있는 선진병영의 시대, 마땅히 하던 게임도 없어 매번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인지 한시도 휴대폰을 떼어놓지 않았던 선임이었기에 그가 대체 뭘 하나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씨발. 생긴 거 하나는 개 더럽게 생겼네..”

 

 그렇게 추천받은 이 게임, 라스트 오리진. 이름부터가 뭔가 심상치 않아서 추천을 받고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럴 거면 왜 추천해달라고 징징대는 선임의 우격다짐에 마지못해 며칠 전부터 내 휴대폰에 깔아두고 일과 시간마다 깔짝대고 있었다.

 

삑-!

 

-명령받습니다.

 

“...”

 

삑-!

 

-목표 확인.

 

“..대체 턴은 어떻게 돌아오는 거야? 이거.”

 

 막상 시작하니, 어떤 안경을 낀 메이드가 밑가슴은 훤히 드러내는 파격적인 패션과 함께 맞이해주질 않나, 주인공이 지내야 할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아예 폭유다 못해 앞으로 가슴이 터져 나오려는 분홍머리 여자가 나오질 않나. 하마터면 이 씹덕 감성이라는 것에 숨이 턱 막혀 삭제할 뻔했지만, 어차피 시간을 죽일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니 게임은 꾸준히 하게 되었다.

 

“꼴초뱀.”

 

“응?”

 

“이 3지역 보스, 이 새끼 자꾸 공격 회피해대는데 어떻게 합니까?”

 

“너 적중 안 맞췄냐?”

 

“적중..아. 그거 올려야 합니까? 레벨링만 해주면 되는 거 아녔습니까. 이런 게임은.”

 

“...게임이 좀 그렇긴 하지. 킥킥.”

 

 휴대폰 화면 속, 오른편에 자리 잡은 흰색 베이스에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를 한 괴물은 내 스쿼드 애들의 공격은 회피하면서, 내 공격은 죄다 쓱쓱-회피해대니, 내게 이 놈을 잡을 방도는 단 하나였다.

 

-모두 물러나세요!

 

“한 명 빼고는 죄다 공격이 안 먹히네요.”

 

“그러게 내 설명을 잘 들었어야지.”

 

“설명이라는 게 무슨 10분 동안 스토리를 읊는 겁니까. 모바일 게임 주제에.”

 

“야. 다~애정으로 키우는 거다. 이 말이야. 스토리를 알아야 또 몰입하기 좋지.”

 

“...”

 

 게임 화면 속, 왼편에 있는 5명의 여성 중 한 명이 날랜 몸놀림으로 3분 넘게 이어오던 3지역 보스 녀석과의 전투를 끝마치게 하니, 나는 곧장 결과창만 보고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별로 그렇게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내 휴대폰은 아주 그냥 뜨끈뜨끈한 뚝배기처럼 뜨거워져 나는 폰도 식훌 겸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오늘은 이거 안 하십니까?”

 

“응? 하고 있어. 통발 돌리는 중이야.”

 

“...”

 

 평소 같으면 화면 속의 금발 여성에게 헤벌쭉하던 양반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침상에 엎드린 채 베게 위에 책을 올려두곤 그것을 읽고 있었다.

 

“뭐 읽고 계신데 그렇게 재밌게 봅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 너도 어릴 때 본 적 있지 않냐?”

 

“..아. 그거 말씀이 십니까? 어디서 그 오래된걸..”

 

사락-

 

“저번 휴가 때 집에 갔더니 아직 안 버리고 있더라. 그래서 들고 왔지.”

 

사락-

 

 꼴초뱀은 그렇게 말하며 꽤 재밌는 것을 봤다는 것처럼 실실 웃어대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나 역시 그가 들고 있는 책에 고개를 들이밀려 하자 꼴초뱀은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내게 자신이 보고 있던 책을 쑥 내밀었다.

 

“...이거..”

 

“너도 알지? 이 장면.”

 

 꼴초뱀이 내게 들이민 만화책에는 여신으로 보이는 세 명의 여성이 가운데 금발의 남성을 둔 채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컷이었다. 이 세 여신, 분명..

 

“헤라, 그리고 아테나랑 아프로디테네요. 가운데 있는 녀석은..”

 

“파리스지. 트로이 전쟁의 주범.”

 

“황금 사과 파트입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대표하는 세 여신, 가정을 관장하는 주신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와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거기에 미의 여신이라 불리는 아프로디테. 이 세 여신은 가운데 금발의 남성을 둔 채 그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었다.

 

“내가 본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 중 제일 인생 씹창 난 녀석이야.”

 

“얘만 씹창 났습니까? 죄다 났지.”

 

 그리스 로마 신화, 다수의 영웅과 신이 등장해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별의별 이야기들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가 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가 많다. 나는 꼴초뱀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들고는 한 컷 한 컷, 내용을 눈으로 읽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황금 사과가 뭐, 별 것 있습니까? 이 멍청한 녀석 잘못이죠.”

 

“응? 왜 걔 잘못이야?”

 

“하필 선택해도 아프로디테 아닙니까. 사실상 주신 제우스마저 눈치를 보는 헤라도 아니고,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도 아니고. 이쁜 여자 하나 주겠다고 하니까 눈 돌아가서 아프로디테를 고른 멍청이죠.”

 

 파리스, 트로이의 왕자이나 어머니인 여왕이 그를 낳고 트로이가 불타는 꿈을 꾸었다 하여 목동이 된 이 미남자는 어느 날 세 여신에게서 황금 사과의 선택지를 강요받았다.

 

‘날 선택한다면 그 어떤 왕에게도 꿀리지 않을 권력과 재물을 내려주마.’

 

 주신 제우스의 아내이자 가정을 관장하는 여신, 헤라의 제안.

 

‘이 나에게 그 황금 사과를 건넨다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주겠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지식을 내리마.’

 

 전쟁의 여신이자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내리는 것이 곧 황금 사과이니. 반드시 내게 올 터. 네가 그 황금 사과를 나에게 준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신부로 맞이 하게 해주마.’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이렇게 세 여신 사이에서 황금 사과 하나를 두고 고민하던 파리스는 결국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었다.

 

“멍청하네요. 저라면 눈치 보면서 헤라에게 줬습니다. 어차피 헤라한테 줬다가 해서 깝칠 여신이 있습니까? 제 남편 머리끄댕이도 잡는데.”

 

“으음~맞지.”

 

“하다못해 아테나에게 줬어야죠. 그랬으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어도 그리스 연합군한테 이겼을 텐데. 아니, 애당초 그랬으면 전쟁도 안 났겠죠? 이 이후부터가 제일 문제 아닙니까.”

 

“아프로디테를 선택해서 데려간 여자가 하필 스타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였으니.”

 

“암만 목동으로 자랐다 한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자고로 인생은 눈치 싸움이다. 상대의 생각 정도는 못 읽더라도 분위기는 파악했어야지. 한 눈에 봐도 저희 여신이에요~하는 아줌마들이 와서는 황금 사과를 건네며 마치 백설 공주의 계모처럼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니~하는데, 어휴.

 

“여자가 뭐가 중요하답니까. 까짓것 돈과 권력만 있으면 옆에 낄 수 있는 여자가 수두룩할 텐데.”

 

“영웅 호색이라잖냐~”

 

“영웅은 개뿔. 저도 읽어봐서 압니다. 이 녀석 형인 헥토르가 영웅이지, 이 멍청한 금발 양치기는 트로이 전쟁에서 뭐 했답니까? 납치해온 유부녀 끼고 잉잉-거렸지.”

 

“맞지. 크크.”

 

“이 녀석 엄마 꿈이 맞았습니다. 이 녀석은 멍청해서 제 나라를 멸망시킨 병신입니다.”

 

 결국에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내미는 금발 멍청이를 내려다보며 욕하고 있자니, 침상에 드러누운 채 휴대폰을 만져대던 꼴초뱀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저 양반, 이번에는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눈을 초롱초롱 뜨는 거야.

 

“야. 근데 그거 아냐?”

 

“뭘요. 또.”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냥 운명놀음이라는 거.”

 

“? 운명? 아, 운명의 세 여신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정확히는 이 신들조차도 피하지 못하는 게 바로 운명이라는 거다~이 말이지!”

 

“...간단하게 설명하십시오. 머리 아파지려니까.”

 

 이 양반의 이야기가 또 길어질 듯 보여 나는 재빨리 그의 말을 중간에 가로채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의 혓바닥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크로노스가 제 아비와 같이 자기 자식에게 왕위를 찬탈당한다니까 어떻게 했냐?”

 

“올림푸스 신들을 먹었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되었지? 그렇게 열심히 자기 자리를 지키려 들었는데 아내가 빼돌린 아이 하나가 결국 자기 자리를 빼앗았지.”

 

“그게 뭐 어때서요?”

 

“그게 바로 운명이다! 이 말이야! 불멸의 신조차도 피하지 못하는 것!”

 

“....그럼 이 파리스가 이런 선택을 한 것도 운명이라는 겁니까?”

 

“애초에 아프로디테한테 줄 운명이니까 걔 엄마도 파리스를 낳을 때 트로이가 불타는 꿈을 꾼 거지. 뭐.”

 

 운명에 따라 행동한다니, 마치 운명론자들이나 할 법한 소리를 하는 꼴초뱀을 째릿 노려보고 있으니 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내 눈빛을 읽은 것처럼 부연 설명을 덧대었다.

 

“자자.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어차피 이 신이라는 게,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현상을 인격화시킨 거잖냐. 그런데 운명이라는 게 또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과 달리 비시각적인 요소다 보니 신들조차 피하지 못하는 것으로 서술된 거지.”

 

“...운명이라..”

 

“만약 전역까지 2달 앞둔 내가 갑자기 어! 전쟁이 나서 전역은 꿈도 못 꾸게 된다던가!”

 

“...그건 볼만..아. 저도 못 하잖습니까.”

 

“인생은 길고 얇게 가야 한다고 하는 네가 갑자기 턱-하고 감투를 쓰고 생고생을 한다던가.”

 

“...끔찍한 소리. 감투는 고사하고 스트레스로 죽습니다.”

 

“아니면 이세계 소설처럼 갑자기 이세계로 날아간다던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그래. 말이 안 되는 게 인생 아니냐? 파리스 역시 매한가지지. 평생 목동으로 살아오던 애한테 갑자기 세 여신이 두둥-하고 등장해서 황금 사과를 누구한테 줄지 선택하라니. 어휴.”

 

꼴초뱀의 설명을 귀담아듣고 있으니 조금 이 파리스라는 녀석이 불쌍하기도 한 것 같네. 하긴 이 동네가 어디 평범한 동네던가.

 

“..헤라클레스도 인생 망했고, 테세우스도 망했고. 오이디푸스도 망했고. 대체 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멀쩡히 살다 간 영웅들이 없긴 하네요.”

 

“아. 그건 또..그 고대 그리스 양반들이 취향이 좀 독특해서 그래.”

 

“? 고대 그리스요?”

 

“그 인간들 하루가 멀다하고 신화를 바탕으로 한 희극을 즐겼는데, 약간 그 뭐라냐. 영웅들이 잘 살다가 처참히 무너지는 걸 즐겼던가.”

 

“...독특하긴 하네요.”

 

“오이디푸스가 제일 인기가 많았다던데.”

 

“씨발. 진짜 더러운 취향이네요.”

 

 제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하게 되는 비극을 즐기는 녀석들이라니. 고대에도 멀쩡한 대가리가 없었네. 근데 이 양반이 이렇게 신화를 즐겼었나.

 

“고대 그리스 인간들이 제일 좋아하던 극 중 장치가 둘 있었는데. 하나가 영웅의 비극이고. 또 다른 하나가 흔히들 말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거든?”

 

“..데우스 엑스 마키나. 듣기만 하면 거창한 이름이네요.”

 

“그냥 어, 이거 너무 이야기가 급전개 되었는데? 어? 이거 어떻게 수습하지. 라는 식으로 서사가 진행되면 쨔-잔! 신님이 강림! 문제 해결! 이런 식으로 핍진성을 내다 버린 장치를 비꼬려고 만든 말이야. 누가 만들었더라. 기억은 안 나네.”

 

“흔히 막장드라마의 반전 전개 같은 거네요. 아니면 먼치키물의 주인공 같은 거라던가.”

 

“뭐. 둘 다 카타르시스가 없는 장치도 아니고. 또 시원시원하니. 보기도 좋고. 인기 많은 장치에는 다 이유가 있어. 먼치킨물도 인기 많잖냐.”

 

“전 별로 안 좋아합니다. 노력의 노자도 없이 그냥 강하다, 적이 나타났다. 이겼다. 이 세 개만 계속 써먹는데. 안 봐도 뒤 내용이 뻔하잖습니까.”

 

“취존해. 임마.”

 

“근데 꼴초뱀, 꼴초뱀 그렇게 신화 공부하던 인간이었습니까?”

 

“...아니. 철학과 교양 들으러 갔다가 배웠는데.”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나는 읽던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을 덮곤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이 양반 덕택에 군 생활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다. 내가 책을 돌려주니, 꼴초뱀은 베게 옆에 던져두었던 제 폰을 들고 와 내게 자기 폰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야. 그래서 너 어디서 막혔다고?”

 

“3지역 보스 막 깼습니다. 생각보다 대가리 굴리는 게임이네요.”

 

“그래. 그래. 짜식. 자자, 내 제대 봐라. 전부 90렙이지? 이거 들고 가서 쫘-악! 밀어. 7지까지만 가면 뉴비들의 친구님께서 널 기다리고 계신다.”

 

“뉴비들의 친구요?”

 

“응응. 무적의 용이라고 성능 죽이는 누님 한 분 계신다. 얼른 이거 들고 밀어버려.”

 

“..여기서 누굽니까? 이 금발 아가씨는 철혈의 레오나라 하셨는데.”

 

“응? 여기 없는데.”

 

“...성능 죽인다면서요.”

 

“시작부터 편하게 하는 게 어디 있냐. 자, 이 수동제대 쓰는 법 알려줄게. 따라서 써.”

 

“...”

 

 열심히 내게 레오나 제대라면서 가르치려 드는 꼴초뱀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다음 날, 라스트 오리진 갤러리로 가 뉴비 도움 글을 올렸다. 덕분에 친구 제대가 전부 무적의 용으로 도배되어 7지역을 밀기도 전에 그녀의 미친 성능을 맛봤다. 얼른 밀어야겠네. 이거.

 

83)

 

사박-! 사박!

 

“후욱! 후-우!”

 

 언제나 와 같이 하늘에서 쨍쨍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 한층 더 무더워진 기온을 체감하며 나는 계속해서 숲속의 장애물들을 하나씩 헤쳐가며 숲의 한가운데를 뛰어다녔다.

 

“읏-챠!”

 

 눈앞의 돌덩어리를 내 몸 답지 않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넘고는 이 뜨거운 태양열을 그나마 좀 막아주는 나뭇가지의 그림자 밑을 질주하던 찰나, 숲속의 어딘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재빨리 내 덩치보다 훨씬 큼지막한 돌덩어리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허억! 허억!”

 

 얼마나 이 숲을 내달린 걸까, 평소 자주 오고 가던 평탄한 흙길도 아닌 정말로 산림밖에 없는 이 거친 길을 오르고 내리기를 어느새 수십 분도 더 했을 거라는 판단을 내린 채 나는 거친 숨을 계속해서 토해내며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들을 아래팔로 계속해서 닦아내었다.

 

“후욱! 후-욱!”

 

웅성-웅성

 

사박-! 사박!

 

“...씨발!”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리 돌아서기보다 점차 가까워지자 나는 머리에 쓴 방탄모를 깊게 눌러쓰고는 고개를 들어 올려 우거진 나뭇가지들 사이를 주시하며 저 그림자의 어디에 있을 녀석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짬 타이거. 여기 있지? 제발 그렇다고 해!”

 

 내 속삭임에도 태양 빛을 가리는 나뭇가지들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닷바람에 흔들려 댈 뿐, 그 어떤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품에 꼭 끌어안은 자동 소총의 총구를 숲의 나뭇가지들을 향해 들어 올려 최후의 엄포를 내놓았다.

 

“안 나오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텨 나와!”

 

“..나..나는.짜..짬 타이거가 아니다.”

 

“-워메! 씨발!”

 

 머리 위에 있을 줄 알았던 녀석의 목소리가 땀을 뚝뚝 흘려대는 내 목젖 근처에서 들려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숲속에 울려 퍼진 내 목소리가 그녀들에게 닿았는지, 저편에서 들려오던 웅성거림이 점차 내 쪽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언니! 저기서 소리가 들렸어요!”

 

사박! 사-박!

 

“대장님! 이제 나오세요!”

 

부스-럭! 부스럭!

 

“주인님~! 어디 계세요? 착한 리리스는 주인님 편이랍니다!”

 

 등 너머에서 나를 찾는 익숙한 그녀들의 목소리. 평소 같았으면 오냐하고 다가갔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녀들로부터 몸을 숨겨야 한다. 나는 그 생각으로 분명 내 앞에 있을 녀석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씨..씨발. 야! 얼른 네 그거 내놔!”

 

“이..이러지 마라! 인간. 이건 내..”

 

“닥치고 얼른 벌려!”

 

“으..으으..”

 

 내 거친 협박이 먹히긴 한 것인지, 분명 나뭇가지의 그림자와 빽빽한 나무기둥만 있던 내 눈앞에 집중하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들 만큼의 작은 일렁임이 생겨났다.

 마치 격자가 생겨나듯 나뭇가지의 그림자 사이로 누군가의 인영이 햇빛에 비추어지자 나는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 인영의 아래로 몸을 집어 던졌다.

 

휘-익!

 

“힉! 드..들어 오지 마라!”

 

“야! 얼른! 닫아! 닫으라고!”

 

 일렁임 속으로 들어와도 풍경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이 망토의 탓에 숲의 풍경이 조금 흐려 보이는 정도, 도리어 밖보다 시원한 이 좁은 공간에 내가 몸을 비집고 들어서자 내 정수리 쪽에서 어느 여성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이..이렇게 달라붙지 마..”

 

 땀범벅이 된 내 등에 착 달라붙는 이 여성의 튼실한 허벅지에 잠깐 내 고간이 반응하려는 듯했으나 지금은 그런 성욕보다 내 생존이 더 문제였다. 나는 아직도 내가 들어온 공간의 틈을 닫지 않는 이 찌질이의 턱에 손에 들린 자동 소총의 총구를 가져다 대고선 날 내려다보는 홍색의 안구에 대고 얼굴을 한껏 찡그려 보였다.

 

철컥!

 

“죽을래? 아니면 닫을래?”

 

“...히잉.”

 

 제 턱에 닿은 총구에 지레 겁을 먹은 짬 타이거는 그제야 장막을 들어 올리던 팔을 내려놓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따라 나 역시 주변을 확인하기 위해 커튼의 반대편을 둘러보려 들었다. 그리고 그때, 희뿌연 인영이 갑작스레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탁!

 

“..여기서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렸었는데 말이죠.”

 

“-흡!”

 

 방금 내가 등을 기대고 있었던 돌덩이 위로 발소리를 내며 가볍게 착지한 은발의 여성은 나무 그늘의 아래서 호박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항상 눈꼬리를 낮추고 다니던 그녀가 오늘은 사냥감을 물색하는 매의 눈과 같이 동공을 크게 확장하며 내가 앉아 있는 숲의 바닥 이곳저곳을 훑어대니 축축하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혹시 그 암코양이와 함께 계신 건 아니겠죠? 주인님?”

 

“...”

 

“흐흥-뭐. 좋아요. 여길까나?”

 

찰-칵!

 

 은발의 여성, 리리스는 이리저리 둘러 보더니 제 양손에 들린 쌍권총 중 한 정을 아까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대고 겨누었다. 설마..

 

타-앙!

 

“-히익!”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짤막한 비명에 나 역시 입을 손바닥으로 가로막은 채 방금까지 내가 앉아 있었던 흙바닥을 빤히 응시했다. 만약 저곳에 그대로 숨어 있었다면 날 숨겨준 이 짬 타이거의 머리통은 최소 어딘가가 깨졌으리라. 

 

“...어머. 역시 어디로 도망가신 것 같네요? 흐음. 주인님~! 착한 리리스는 여기 있답니다~”

 

탁-!

 

 내가 주저앉아 있었던 탓인지, 다른 곳보다 살짝이 흙이 쓸려 내려가 있었던 자리에 리리스가 쏘아 재낀 페인트 탄의 안에 들어있던 물감들이 이곳저곳으로 퍼져있었다. 아무리 페인트 탄이라지만 영거리 사격이라니. 저거, 절대로 착한 리리스가 아닌데. 대체 내가 알던 리리스는 어디로 간 것인가.

 

“-주인니임! 어디 계세요~”

 

“-허억! 허억! 헉!”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가볍게 날아간 리리스의 옅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전신이 부들거리는 것을 꾹 참고선 허리춤에 둘러 묶은 탄입대의 안을 확인했다.

 

달-칵!

 

“...탄창은 3개. 남은 적은..90..은 넘겠지?”

 

“저..이..인간. 이제는 나가도 되지..”

 

“...씨발.”

 

“응? 아..아니! 꼭 나가라는 소리가..”

 

“내가 대체...무슨 죄를 지었다고..씨발..”

 

“...에? 이..인간. 우는..건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따위는 이제 신경도 안 쓰인다. 지금 당장 내 휘하의 아이들에게 총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매번 초코바나 찾아 다니던 짬 타이거 한 마리의 목소리 따위야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좋단 말인가. 아니, 애당초 이런 일이 왜 발생했지? 현실을 직시하려 해도 내 머리를 계속해서 이 기가 막힌 현실을 부정하려 들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여름이 그렇게도 사치스러운 것이었나.  

 

“그냥..그냥 나도 여름 이벤트라는 것 좀 즐겨보려 했더니..왜..”

 

 무더운 날씨의 연속인 7월, 생산 애들이 행여 일하다 더위를 먹을까 싶어 업무 이틀 정도는 놔두고 느긋하게 바다낚시나 하면서 꼬꼬마들이랑 떠들려던 것도. 백사장에서 애들 수영이나 좀 시키면서 야밤에는 캠프파이어나 좀 하고자 했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되는가. 그냥 하루 이틀 정도는 나도 하렘 분위기를 만끽해도 좋았잖아. 모처럼 라스트 오리진 세계까지 와서, 연에도 없던 장성까지 달고 유격 조교 짓도 했는데. 왜 이 세상은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나. 

 

‘..아니야.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건 세상이 아니라..’

 

 그래.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이 날 가만두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평화롭기 그지없던 후방에 폭풍을 몰고 온 그 녀석, 그 녀석이 이 모든 일의 재앙이었다. 지금 내가 애들에게 쫓기게 된 것도, 이 조용하던 땅에 총성이 울려 퍼지게 된 것도. 전부 그 녀석의 탓이다.

 

“...사령관...사령관.”

 

“어..그 인간. 그 사령관이라는 남자, 인간보다 윗사람..”

 

 지금 현 상황에도 밝게 웃고 있을 그놈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자니, 나는 속에서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무언가를 것을 꾹 참다, 결국 입 밖으로 그놈을 향한 내 적의를 입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씨발. 죽인다...사령관! 넌 내 손에 죽는다아아!”

 

“-히익!”

 

 한여름의 열기가 가득한 숲의 한가운데, 나는 그곳에서 나의 여름 계획을 전부 박살내버린 한 인간을 떠올리며 나뭇가지에 가려진 하늘을 향해 욕지기를 퍼부었다.


"꼭 죽인다! 넌 꼭 내 총으로 죽인다! 사령과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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