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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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뚜벅-! 뚜벅!

 

“아! 대장! 굿모닝!”

 

“구..굿모닝. 대장.”

 

 창문의 유리 너머로 환한 햇살이 한껏 들어오는 기다란 복도 위, 이 건물의 유일한 남성이자 이 건물의 실소유주나 다름없는 남성은 오른손에 들린 지휘봉으로 어깨를 두들기며 자신의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숲의 수호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 그래. 엘븐. 오늘도 아주 오픈 마인드구나.”

 

“어머, 그거 칭찬이야?”

 

“...앞섬을 좀 가리고 살자. 사이즈 바꿔줄까? 상의?”

 

“그..그렇게 말해도. 오드리가 이 이상 사이즈를 늘리면 외관이 흉하다고 했어.”

 

 언제나처럼 앞섬을 풀어헤치고 사는 그녀들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아랫눈썹을 꿈틀대다 억지로 시선을 그녀들의 가슴 골짜기에 떼어내려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이 도리어 지나치려던 금발 엘프의 장난기를 자극하고 말았다.

 

“흐흥-! 대장?”

 

“어..어? 왜. 뭔데?”

 

“-후우. 대.장.님?”

 

“어어?! 야! 너 왜 이래! 임마!”

 

“오늘 한가하지? 어때? 우리 숲속에 조용-한 산장이 있는데. 응?”

 

 지나칠 줄로만 알았던 거유의 엘프가 상체를 들이밀며 자신의 곁으로 점차 거리를 좁혀오자 라붕이 작전관은 눈에 띄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금발 엘프의 어깨너머의 다른 엘프에게로 헬프 사인을 보내었다.

 

‘다크 엘븐! 애 좀 말려봐!’

 

“...”

 

 어느새 창가까지 등이 떠밀린 라붕이 작전관의 헬프 신호에도 다크 엘븐은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 옅은 홍조만 피울 뿐, 동료의 행동에 제동을 걸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금발 엘프의 머릿결과 백옥같은 피부만이 제 시야를 가득 채우자 라붕이 작전관은 눈썹을 찡그렸다.

 

‘..다크 엘븐! 너도 한통속이었냐!’

 

“에..엘븐. 우선 대화로 하자. 대화로. 응?”

 

“무슨 대화? 몸의 대화? 우리 대장님. 예전부터 눈치챈 거지만 생각보다 대쉬에 약하구나?”

 

“..너 회당에서도 날 놀려먹더니. 이익..”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녀들을 선동하기 위해 중앙 회당에 집결시켰을 적 분위기를 타며 자신을 놀려대던 그 엘프가 오늘따라 더욱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오자 라붕이 작전관의 뺨 위로 더위 탓에 흘리는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물길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또각-! 또각!

 

“그때는 보는 사람이 많았지만~지금 여기에는 우리밖에 없네? 어때. 대장? 우리 한번 찐득하게~”

 

터억!

 

“-흐읍!”

 

“-놀아볼래? 응?”

 

 이제는 창틀에 양손을 얹은 채 뒷걸음질을 칠 공간조차 잃은 라붕이 작전관의 가슴팍 위로 엘프는 자신의 거대한 유방을 가져다 대었다. 푹신하면서도 뜨뜻한 그녀의 가슴이 얇은 면포 너머로 느껴지기 시작하자 라붕이 작전관의 식은땀이 멈출 줄 모르고 그의 턱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어. 그만해라! 제발!”

 

“히힛. 그만두라고 하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잖아~”

 

“다크 엘븐! 얘 좀 말려봐! 제발!”

 

“그..그만..음.”

 

 라붕이 작전관의 다급한 외침에도 다크 엘븐은 뺨을 긁적댈 뿐, 동료의 어깨에 손조차 올리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걸 포기할 때인가, 라붕이 작전관이 엘프가 아닌 서큐버스와 같이 자신을 음흉한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는 엘프의 대쉬에 서서히 자신의 몸의 제어권을 잃어갔다.

 

‘계곡에 땀방울이 하나..둘..’

 

 아침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자극해온 모든 여성의 자극적인 요소들을 떠올리며 모든 걸 포기한 그가 살색빛 계곡에 맺힌 땀방울을 셀 때쯤, 그녀와 그의 사이로 어느 한 소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쯤 해두세요. 엘븐양.”

 

“으응?!”

 

 라붕이 작전관의 질겁하는 얼굴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엘븐은 제 곁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날 선 목소리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푸른색의 눈동자를 번뜩이는 금발의 소녀가 아담한 구두로 복도의 타일을 밟으며 그들을 향해 올곧게 걸어오고 있었다.

 

또각-! 또각!

 

“...”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살과 같이 환한 금발의 머릿결을 찰랑대며 흰색의 민소매 티 위로 붉은색의 수단을 걸친 소녀, 아르망은 창틀에 매달린 라붕이 작전관과 그를 몰아붙이는 엘븐의 곁으로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르마아앙..”

 

“칫! 하필 이럴 때!”

 

 그녀의 등장에 상반된 반응을 내보이는 둘의 모습에 아르망은 후-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라붕이 작전관에게서 상반신을 떼어내는 엘븐을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았다.

 

“폐하께 무례한 행동은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엘븐양.”

 

“네네. 알겠어요. 저흰 이만 물러가 볼게요~가자. 다크 엘븐.”

 

“으응. 미안했어. 대장.”

 

 아쉬운 얼굴을 숨기지 않고 뒷짐을 지고 물러서는 엘븐과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라붕이 작전관을 향해 미안한 얼굴과 함께 손을 흔드는 다크 엘븐은 그렇게 아르망을 지나쳐 자신들의 숲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아침 댓바람부터 온갖 고난에 시달려온 남성은 퀭한 눈으로 창살 너머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의해 밝게 빛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탄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동네는 어떻게 되먹은 동네야.”

 

 이미 여러 차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왔던 라붕이 작전관이 제 처량한 처지에 눈망울을 글썽여대자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던 아르망은 입술을 삐죽였다.

 

“..폐하께서는 왜 도망을 안 치시고 창틀로 뒷걸음질을 치셨습니까?”

 

“..엉?”

 

“속으로는 그녀의 제안이 마음에 드셨던 것은 아닌지요?”

 

“아..아르망?”

 

 갑자기 자신을 향해 적의를 내세우는 부관의 눈빛에 식을 줄로만 알았던 라붕이 작전관의 땀방울이 더욱더 그의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혔다.

 

“아니. 쟤가 갑자기 들이대는데..”

 

“들이대면 앞으로는 피하십시오. 저는 먼저 갈 곳이 있어서 떠나보겠습니다.”

 

또각-! 또각!

 

“야..야! 아르망! 아니! 너 어차피 회의실 갈 거잖아!”

 

“폐하께서는 그녀들의 산장으로 가십시오. 지프차는 밖에서 대기 중이니.”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부관의 빠른 발걸음에 라붕이 작전관은 재빨리 바닥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서 그녀의 등을 따라 다시 복도 위를 걸어갔다. 평소보다 훨씬 냉랭해진 아르망의 뒷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그녀의 금색 정수리를 빤히 내려다 보았다.

 

‘인게임에서는 얘가 이렇게 질투 많은 애인 줄은 몰랐는데.’

 

 언제나 자신의 로비에서 1인 부관 자리를 꿰차고 있던 소녀가 그간 봐온 대사들과 다른 모습을 선보이자 라붕이 작전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만나보고 알 일이라니까.’

 

“...폐하.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

 

“응? 아아. 아무것도. 크크.”

 

“...”

 

따-악!

 

“-끄어억!”

 

 두 남녀의 발걸음 소리만 자욱하던 밝은 복도 위로 둔탁한 파쇄음이 울려 퍼지자 남성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꺽! 꺼억!”

 

쿠-당! 탕!

 

 이제는 그녀의 전매특허가 되어버린 정강이 까기에 라붕이 작전관은 점차 날카로워지는 그녀의 발차기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걷어차인 정강이를 붙잡곤 복도의 타일 위를 데굴데굴 굴러대었다,

 

“..아으윽...”

 

“...흥!”

 

 그리고 그의 발작을 내려다보던 금발의 소녀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향해 콧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해도 귀엽기만 한 그녀의 얼굴에 라붕이 작전관은 눈물을 찔끔 쏟아내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아..아르망 너 이..”

 

“그렇게 가슴이 좋으시면 엘븐양에게 가보십시오.”

 

“가..가슴이 중요한 게..어윽..”

 

 아직도 자신의 빈약한 몸매에 열등감을 가지는 듯한 그녀의 언동에 라붕이 작전관은 최대한 빨리 제 혐의를 벗겨내고자 했으나 차마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반대하지 못하는 자신이었기에 그는 아예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씨잉. 남자가 가슴을 어떻게 싫어해.’

 

 애당초 이 세계를 플레이하던 유저들의 성향이 전부 가슴이었는데. 자신만 아는 사실로는 해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라붕이 작전관이 옅어지는 정강이의 통증에 상체를 일으키려 할 때, 다시 한번 그에게 가슴의 파도가 들이닥쳤다.

 

“어머? 동생? 괜찮은 거거든?”

 

“...”

 

“라붕이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그. 조금만 떨어져..주세요.”

 

 어느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분홍빛 머릿결의 성숙한 여인과 회색빛 머릿결의 아담한 체구의 소녀가 바닥에 뒹굴고 있던 자신에게 허리를 숙여 자신들의 골짜기를 눈앞에 가져다 대자 라붕이 작전관은 눈썹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나 여기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여기가 지옥이라고 선포했던 선임의 목소리가 저 멀리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다고, 라붕이 작전관이 서서히 자신의 정신줄을 놓을 때쯤, 그의 머리 위로 양 볼을 부풀린 소녀의 분노가 담긴 책의 철퇴가 떨어졌다.

 

꽈-앙!

 

“-끄허억!”

 

“어머! 동생? 괜찮은 거거든?!”

 

“...흥!”

 

 일말의 자비도 없이 자신의 머리와 목을 강타한 충격에 라붕이 작전관은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메리는 그저 아하하-하면서 쓴웃음을 지으며 내려다보았고 포츈은 그의 머리 위로 책으로 내려찍은 부관을 향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동생이 잘못한 건 없는 거거든?”

 

“...저는 먼저 회의실로 가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알아서 하시지요.”

 

“-아르으으마아앙!”

 

 재빨리 책을 품에 안고는 짧은 발걸음으로 복도를 뛰어가는 금발 소녀의 등 뒤로,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오른 남성은 기다란 고함과 함께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두-다다다!

 

“거기서라! 아르망! 오늘 아주 혼쭐을!”

 

도-다다다!

 

“-싫습니다!”

 

 마치 늑대에게 쫓기는 빨강 모자와 같은 형국이 되어버린 둘이었지만 금발 소녀의 얼굴에는 전과 달리 미소가 한가득 맺혀있었다.

 

“어머. 후훗. 둘 다 아침부터 힘이 넘치는 거거든?”

 

 빠른 속도로 자신들의 앞에서 사라지는 두 남녀의 모습에 포츈과 메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매일 같이 평온하기 짝이 없는 일상, 그 속에서 언제나 폭풍을 몰고 다니는 것은 발 빠른 저 남성이었다.

 

“역시 동생은 부관한테는 쪽도 못 쓰는 거거든?”

 

“다른 생산 인원분들에게는 안 그래요?”

 

“우리에게는 상관과 부하 같은 벽이 있거든. 언제나 우리를 우선시해줘서 고맙긴 하거든. 하지만 부관인 아르망 동생이나 다른 몇몇 애들한테는 그렇지 않거든. 후훗.”

 

“헤헤..라붕이 오라버니는 참 얼굴이 여러 개이시네요.”

 

“메리는 사령관님도 봐서 아는 거거든? 우리 동생이랑 어떤 점이 다른 것 같거든?”

 

“음..아마 오라버니보다 더 감정에 솔직해 보인다는 정도일까요?”

 

 포츈의 물음에 메리는 머릿속에서 라붕이 작전관과 오르카 저항군의 사령관인 남성을 대조해보았다. 두 명 모두 공통점이라면 바이오로이드들을 인간처럼 대한다는 것이 비슷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루는 점에 있어 큰 차이를 보였다.

 

“저희 오라버니는 언제나 상냥하다는 점이 특징이지만 라붕이 오라버니는 상냥하다가도 뭔가 휴화산처럼 속에 품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다른 것 같아요.”

 

“후훗. 우리 동생만큼 얼굴이 시시각각 바뀌는 애도 잘 없는 거거든.”

 

“예. 그 점이 조금 달라요. 오라버니의 머리에는 언제나 꽃밭이 보이지만 라붕이 오라버니는 가끔...으으..”

 

뚜벅-뚜벅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는 사악한 미소를 그려내는 인간 남성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메리는 아직도 그때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 듯 양어깨를 부여잡고는 새파래진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지옥..지옥이었어요. 그건.”

 

“하..하하..우리 동생이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니거든..”

 

“마..맞아요. 잘못은 제가 먼저 했으니까..그런데..그런데..”

 

 점차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다 못해 햇빛마저 무색해질 정도로 검버섯이 되어가는 메리의 외관에 포츈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 소녀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그녀에게는 큰 난항이었다.

 

“우..우선 건물 설계 도면부터 다시 찬찬히 그리는 거거든?”

 

“배..배선도는 다 그려뒀어요. 이제 배선을 까시기만 하면 돼요.”

 

“으음. 그런데 동생이 부탁해서 하는 거긴 하지만 나도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거거든.”

 

“처..천천히 하죠! 아직 제가 복귀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리조트 건물의 완공이 늦추어지는 가장 큰 이유, 그것은 전문 인력의 부족이었다. 당장 배선을 깔고 자재를 옮길 인원은 많았으나 그걸 지도할 전문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생산 인원 숙소까지 파견 인원인 메리가 찾아올 정도였다.

 

또각-또각

 

“우선 밥부터 먹고 하는 거거든. 여기 식사는 정말 맛있는 거거든!”

 

“네..본대와 비교했을 때에도 손색이 없어요. 어떻게 본대 소완님과 비슷한 레벨의 소완님께서 여기에 계시는지는 정말 궁금하네요.”

 

“우리 주방장님 덕분에 급양 애들은 언제나 웃고 있거든!”

 

“헤헤. 여기도 오르카 1호와 같이 항상 행복한 미소밖에 안 보이네요. 옛날에 인간님들이 계실 적에는 안 이랬는데..”

 

“우리 동생이랑 사령관님이 대단한 거거든!”

 

 포츈과의 긴 대화로 라붕이 작전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낸 메리는 그녀의 환한 미소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검은 욕망만이 일렁이던 인간들 대신 언제나 열심히 일하는 두 남성 탓에 저항군의 바이오로이드들은 항상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밝은 그림만을 그렸으니.

 

“오늘은 급양 팀장인 소완이 무언가 쇼를 준비하신다고 급양 애들이 그랬거든!”

 

“정말요? 얼른 가봐요. 포츈 언니. 헤헤.”

 

“응응!”

 

 그렇게 두 여성마저 복도의 밖으로 빠져나가자 복도에는 밝게 빛나는 햇살만이 넘실거렸다.

 

91)

 

“...허억. 허억.”

 

 얼마나 달린 걸까, 괜히 아침 댓바람부터 복도와 계단을 거침없이 내달렸더니 아직 잠기운이 덜 가신 몸에 평소보다 더한 부담이 온 것 같다. 결국에는 노렸던 맹랑한 아르망의 수단 끝자락도 잡지 못한 채 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작전관? 안색이 좋지 않네만! 하하하!”

 

“폐하. 어찌 인간의 육신으로 저를 따라잡으려 하십니까. 후훗.”

 

“시..시꺼.”

 

 벽을 짚고 숨을 헥헥대고 있으니 내 꼴이 우스운 듯 먼저 회의실 문 앞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요안나는 내 모습에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와 반대로 내가 잡으려던 아르망은 샐쭉한 미소와 함께 내 땀방울들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내게서 반걸음 물러나 있었다.

 

‘이..이 아르망도 나보다 체력이 좋다니.’

 

 맨날 책상 앞에만 앉아있는 소녀보다 건장한 성인인 내가 더 체력이 후달린다니. 요새는 전의 세계에서 살 때처럼 야외활동을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닌데.

 

“폐하. 오늘치 오리진 더스트를 투여하겠습니다.”

 

 속으로 운동을 더 할까 싶어 삽자루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으니 내게서 잠깐 발길을 돌리던 아르망이 품에서 기다란 주사를 내게 꺼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나는 땀이 흥건히 묻어난 오른팔을 그녀 앞으로 쭉 내밀었다.

 

푹-!

 

“...이제는 예고도 없이 찌르기냐?”

 

 팔을 내밀자마자 곧장 내 혈관을 읽어낸 부관이 숨 고를 틈도 없이 기다란 바늘을 얇은 피부 위에 꽂아버리자 나는 신음을 꾹 참고는 파들파들 떨리는 눈동자로 그녀의 푸른빛 눈동자를 째려보았다.

 

“폐하께서는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하! 작전관도 참 고생이 많네만!”

 

“...”

 

 요안나의 호쾌한 웃음을 뒤로하고 나는 입술을 꽉 물어 맨 채 내 혈관 속을 타고 들어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이물질의 감각을 몸소 느꼈다. 매일 맞는 녀석이지만 확실히 맞고 나서 느끼는 이 들끓는 에너지는 이 물건의 효력을 실감케 했다.

 

“-후우. 이제야 살 것 같네.”

 

“작전관도 이제 오리진 더스트에 적응한 듯하네.”

 

“거의 한 달 넘게 맞고 다니는데 이제는 익숙하지.”

 

“음음. 좋은 이야기일세. 안 그래도 주군께서 작전관의 몸 상태를 걱정하니.”

 

“..사령관님이?”

 

 오리진 더스트를 투여받은 오른팔의 근육들이 세밀하게 숨 쉬는 것을 느끼며 손바닥을 쥐락펴락하고 있자니 요안나의 의미심장한 말이 내 귓바퀴를 간질였다.

 

“주군께서 언제 작전관의 육신을 바꿀지에 대해 고민하는 듯하네.”

 

“...흐음.”

 

“작전관이 먼저 나서서 이야기해주면 좋을 듯 하네만. 어떤가?”

 

“...흐으으음.”

 

 육신을 바꾼다. 이것은 이 세계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 중 하나였다. 당장에는 잘 자고 잘 일어나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심해에 깊숙이 잠들어 있는 별의 아이가 내뿜는 FAN파는 내 머릿속을 침투해 내 정신세계를 무너뜨리려 들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당장에 드는 거부감은 어쩔 수 없는데.’

 

 당장 오늘 아침에 만난 이프리트에게 내 외모에 관해 물어봤을 때도 그녀는 내 외모가 일변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로 이야기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 그녀들은 뇌파로 날 구분하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매일 아침 보는 내 얼굴이 확 변한다면 그건 정말 나일까, 아니면..’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성장 과정이 있다. 당장 3살 때의 기억은 나지 않더라도 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내 성장을 봐왔다. 그것이 이제는 20년이 넘었는데 이제는 새로 일변한 얼굴로 살아가야 한다니. 게임 화면으로 봤을 때는 제3 자였었기에 느끼지 못한 이 위화감에 내가 사로잡혀 있을 때, 누군가 내 검은 티셔츠 자락을 꽉 쥐어 당겼다.

 

쭉-

 

“? 응?”

 

“...”

 

“아르망. 너 왜 그래?”

 

 어딘가 애달픈 눈으로 날 빤히 올려다보는 아르망의 눈동자에 나는 내가 행여 무언갈 실수했나 싶어 그녀의 눈동자에서 쉽사리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가끔 그녀가 이렇게 굴 때면 내가 뭘 잘못 했나 싶기도 한데 그녀는 내게 자신의 고민을 읊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폐하.”

 

“...응. 그래. 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참.’

 

 내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가능한 그녀였지만, 나는 그녀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한다. 딱히 내 행동을 예측한다 해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이 소녀의 속내를 알아챌 방도가 없는 내 입장에선 조금 답답하긴 했다.

 

“자자. 이제 회의하러 들어가자.”

 

“흐음. 작전관. 그런데 내가 여기 있어도 되겠나? 나는 그대의 부하가 아니네만.”

 

“괜찮아. 고문관이라고 생각해. 우리 중에 이 동네를 제일 꿰차고 있는 건 넌데. 그리고 사령관님께 보고할 통로로도 써야지.”

 

“하하! 알겠네! 그리 말한다면 섭섭하지는 않네. 자, 다른 분들은 안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네!”

 

“소완양은 오늘 다른 임무가 있다 하여 후에 폐하께서 직접 취사장으로 와 주시길 부탁해왔습니다.”

 

“직접?”

 

“예. 폐하. 회의 이후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회의실의 문고리에 손을 얹고 있자니 예상치 못한 소완의 불참에 나는 자연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당장 아침에만 해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어느새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아르망에게 이유를 물으려 해도 그녀는 배시시 웃음을 그릴 뿐 별다른 대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뭐. 어차피 수송 애들 오기 전까지는 할 것도 없는데.’

 

“그러지 뭐.”

 

드-르륵!

 

 회의 이후 갈 곳을 결정 내린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회의실의 미닫이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쓸데없이 넓은 회의실에 앉아있던 몇몇 이들이 내 걸음에 맞춰 일어섰다.

 

“주인님. 오셨어요?”

 

“아아. 주인님. 리제를 보러 오신 거죠? 여기 해충들이 아니라 저를 보러 오신 거죠?”

 

“..리제 언니. 우리 아침에도 다 만난 사이 아니야?”

 

“시끄러워. 해충. 그리고 저기 쟨 안 만났어.”

 

“...아하하하..”

 

 오늘도 활기찬 요안나 아일랜드의 장교들 목소리에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까닥대며 ㄷ자 형태의 회의용 테이블의 정중앙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내 턱짓을 읽은 그녀들은 경례를 생략하고 다시 일어섰던 의자 위에 다소곳이 엉덩이를 얻혔다.

 

탁-!

 

“그래. 아침부터 죄-다 본 얼굴들뿐이네. 여기 이렇게 좁은 동네였냐?”

 

“주인님의 아침을 즐길 수 있는 저희들의 특권인걸요.”

 

“어우. 말하는 게 조금 소름인데. 리리스.”

 

“주인님. 저런 해충들이 없는 저와 주인님만의 낙원은 어떠세요? 히히. 저는 주인님만 있으면 어디든 좋아요.”

 

“리제야. 밖은 위험해. 섬이 최고다.”

 

“대장. 그렇게 말하면서 딱히 싫은 눈치는 아니다?”

 

“...내 화장실에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는 애들이 수두룩한데 안 혹할 수가.”

 

“...헤헤헤..”

 

 내 뒷말에 이프리트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회답했으나 노움은 여전히 시뻘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 어쩌냐. 노움.

 우선 이렇게 말해뒀으니 뒷일은 이제 내가 알아서 할 이야기이다. 내 부하들과 만담도 나누었겠다, 나는 일부러 들고 온 통칭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지휘봉’으로 목조 테이블의 위를 두들겨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탕-! 탕!

 

“자자. 우선 오늘 모이라한 이유는..뭐. 너희들은 다 알지?”

 

“여름 이벤트 건이지요? 주인님.”

 

“그래. 요새 날씨가 덥다 못해 죽을 맛이다. 내가 생산 애들 둘러보니까 한 곳도 빠짐없이 더위 탓에 땀을 무슨 샤워하는 것처럼 쏟고 있던데. 리제, 너희 영양 쪽 애들은 어때?”

 

“..아쿠아는 괜찮아 보여요. 주인님. 워낙 활발한 애라 더워도 더운 대로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다프네나 드리아드들은 돔 밖으로 나서기를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에요.”

 

 생각보다 세세하게 보고를 올리는 리제의 담담한 목소리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봤을 때도 그렇지만, 우리 리제는 동생들을 내 예상보다 끔찍이 아끼는 듯 싶었다.

 

“좋아. 훌륭한 보고였다. 리제.”

 

“...헤헷. 주인님께 칭찬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저는 정말 행복한 여자예요. 주인님.”

 

“? 내가 그렇게 칭찬에 인색했었나?”

 

“대장 본인은 모르겠지만, 대장이 맨날 입에 달고 사는 게 욕이랑 잡담뿐인걸. 히힛.”

 

 수줍게 미소를 짓는 리제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자니 내 물음에 이프리트는 언제나처럼 쓸데없이 한마디를 더 붙여대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정말 내가 그래왔던가 싶기도 하고.

 

“..흐음. 뭐, 아무튼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 리리스, 비축 쪽 애들은 어때?”

 

“음. 안드바리가 요새는 제복 상의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다니고 있어요. 주인님. 실키들은 아예 후드를 벗어던지고 다니고, 익스프레스들은 그늘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고요.”

 

“..대장님. 안드바리가 소매를 걷었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 덥다는 소리지.”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리리스와 달리 그녀의 앵두빛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보고는 생각보다 위험한 이야기였다. 그 깐깐하고 원리원칙대로 행하려는 우리 동네 막내가 자신의 자부심인 제복의 소매를 걷어? 원래 추운 지방에서 활동하도록 만들어져서 그런가.

 

“전력 쪽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아르망.”

 

“..예. 폐하. 근래 들어 파견 인원들이 전력 생산 시설이 있는 꼭대기로 올라와 바람을 쐬다 간다는 보고가 잦습니다. 그리고 전력 생산에 전담하는 그렘린들이나 샌드걸들 역시 더위 탓에 꽤 고생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흐으음.”

 

“대장. 부품 쪽은 말 안 해도 알지?”

 

“어. 이프리트. 그저께 가서 아예 장치를 꺼버렸으니. 내가.”

 

“헤헷. 그때 오드리씨가 얼마나 놀라셨는데요.”

 

 가뜩이나 거대한 기계장치를 대동해서 작업하는 부품 생산 설비 공장은 다른 곳보다 더 더우면 더웠지, 덜하진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시원한 에어컨 바람보다 거대한 생산 장치가 내뿜는 열기가 먼저 얼굴에 들이닥쳤으니.

 

‘...나중에 사령관 녀석한테 말해서 재점검이랑 환풍 설비 재정비를 부탁해야 하나.’

 

 아직 파견인원들이 돌아가려면 보름은 더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미리 말해둬서 손해 볼 건 없겠지. 나는 재빨리 지휘봉 대신 볼펜을 집어 들곤 내 생각을 까먹기 전에 수첩 위로 오늘 해야 할 보고를 하나 써 내렸다.

 

“좋아. 우선 애들이 더위를 엄청 먹고 있으니, 요안나. 사령관님께 여름 휴가라는 명목으로 잠깐 애들을 풀어줘도 되는지 물어봐도 거절당하지는 않겠지?”

 

“음. 주군께서도 이맘때쯤이면 수면 위로 부상하셔서 여름 휴가를 즐기곤 한다네. 작전관이 그렇게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네만.”

 

‘이맘때쯤이라 확실히..’

 

 요안나의 부가 설명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가 곧장 다시 펴내었다. 확실히 이쪽으로 갑자기 날라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라스트 오리진에서는 여름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을 터.

 

‘..뭐. 나는 나대로 여름 이벤트를 만끽하면 그만이야. 여기도 라스트 오리진 세계니까.’

 

 저쪽에서 무슨 일을 벌이든, 그건 일절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전에는 사령관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하긴 했어도 이제는 여기가 내 오르카 1호다.

 당장에 이곳에 내가 서약까지 해주었던 캐릭터들이, 아니. 정확히는 그녀들과 똑같은 여성들이 모두 모여있는 마당에 아쉬울 건 없다. 나는 속으로 재빨리 울컥대는 감정을 누그러뜨린 채 내 곁에 딱 달라붙어 서 있는 아르망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좋아. 그러면 파견 애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냐? 아르망.”

 

“..절반은 초소 경비 근무에 집중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절반은 교대로 백사장을 이용하게 해주면 불만은 없을 겁니다.”

 

“그럼 대장이 백사장을 이용하는 날짜를 구분해서 정해야겠네.”

 

“어머. 다 따로따로 쓰는 건가요? 저는 좋긴 한데.”

 

“..해충들이랑 동생들이 섞이는 건 별로야. 특히 주인님이 계신다면 더.”

 

“너..너무 그렇게 날 세우지 마세요. 리제님. 저희 모두 가족인걸요.”

 

“해충! 난 너흴 가족이라고 생각 안 해!”

 

“..이 멍청아! 주인님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아..마..맞다! 주인님! 이건 제 진심이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하하하! 언제나 소란스럽네만! 난 이런 분위기도 좋다네!”

 

 사방에서 들려오는 저마다의 음색과 대화 내용, 정말이지 본대의 작전회의실에 비하면 떠들썩하기 그지없지만 나는 이 분위기가 싫지 않다. 군기가 빠진 게 내 부대의 아이덴티티이니까.

 

‘우선 날짜를 좀..흠.’

 

“이프리트. 너희들 제식 수영복 있지?”

 

“응? 스틸라인 제식 수영복 말하는 거야?”

 

“그래. 너희는 그거 입어라.”

 

“-에엑?! 오드리가 새로 수영복 만들어준댔는데?!”

 

 내 통보 아닌 결정에 이프리트는 미간을 한껏 구기며 반대 의사를 표명해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드리가 무슨 만능 가제트냐. 안 돼. 아예 수영복이 없는 인원들부터 챙기는 게 먼저야.”

 

“어..언니. 저희 제식 수영복도 자세히 보며 이뻐요.”

 

“치잇. 그런 문제가 아닌데.”

 

 입이 댓 발 나온 이프리트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에도 나는 지휘봉을 들어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그녀들이 떠들 동안 내가 생각해낸 여름 이벤트를 줄줄 읊어대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백사장 사용 기간은 이틀로 가자. 첫째 날은 적당히 비치발리볼이나 각종 해수욕장에서 할 수 있는 이벤트로 가고, 잠은 대충 뒤에 수풀을 깎아서 만든 공터에서 텐트 치고 자거나 아니면 여기 중앙 건물에서 자고.”

 

“이틀? 이틀 밖에 안 해?”

 

“이틀이면 무진장 긴 거야. 이프리트.”

 

 당장에 우리는 쉰다할 지라도 전방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그러니 이틀의 휴가도 간신히 눈치를 보면서 얻어낼 터. 만약 사령관 녀석이 자기도 휴가를 보낸다면 좀 더 편하게 얻어내는 정도일 텐데.

 

“전방에 애들 눈치는 좀 봐야지. 싫어도 말이야.”

 

“...치잇.”

 

“주인님. 그러면 이벤트 내용은 저와 이 스토..아니. 리제가 맡아도 될까요?”

 

 짧은 여름 휴가 기간을 이야기하자 이프리트는 아예 아랫입술을 앞으로 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와 반대로 내 오른편에 앉아있던 리리스는 내 상상과는 거리가 먼 질문을 내게 해왔다. 

 

“?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지.”

 

“해충! 대체 무슨 생각이야?”

 

“쉿-넌 나중에 나랑 이야기 좀 해.”

 

“...폐하. 저 역시 이벤트에 참여하겠습니다.”

 

“...”

 

 뭔가 싸한데. 맨날 내 눈을 피해 만나는 4인방 중 3명이 갑자기 이벤트 제작에 열성을 올리다니. 나는 내게 배시시 웃음을 보내는 세 명의 환한 얼굴에 대고 차마 말을 거두지 못해 눈살만 찌푸렸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세 명의 여성들인데, 왜인지 몰라도..

 

‘믿음이 안 가!’

 

 믿음이 전혀 가지 않는 세 명에 대해 고민하고 있자니, 노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손을 들었다.

 

“저..대장님. 그러면 저희 언제부터 여름 이벤트를 가질까요?”

 

“...흐음.”

 

‘너무 멀어서도 안 돼. 안드바리나 더치걸들이 더위를 꽤 타는 듯싶으니까.’

 

 당장에 그녀들에게 쉴 틈을 줘야 한다. 나야 뭐, 맨날 안에서 반나절을 보내니 문제가 없지만. 이번 나만의 이벤트는 짧고 굵게 간다. 그러니..

 

“..3일. 3일 뒤로 우선 정한다.”

 

“제법 빠르네? 오드리한테 시간을 안 줘도 되겠어?”

 

“너희 스틸라인 애들은 제식 수영복이니까 괜찮고. 애들은 애들대로 통일한 수영복을 준비해달라고 하면 돼. 좀 특색있는 수영복을 입고 싶은 애들은 따로 추첨을 통해서 결정하도록 하고.”

 

 게임이라면 수영복이 중요한 사안이겠지만, 여기는 게임 속이 아니다. 다양성보다는 실용성을 중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편이 더 나을 테지. 나는 속으로 내린 결정에 토를 달지마라는 식으로 날 빤히 바라보는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우리는 짧고 굵게 간다. 백사장이 생각보다 넓으니, 생산 인원들만 쉰다면 전원이 쉴 수 있을 거다. 리리스, 안전 요원을 부탁하마.”

 

“으음. 이벤트 진행하면서는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주인님의 부탁이니까요. 알겠어요!”

 

“아..저도 거들게요. 리리스씨.”

 

“어머. 손을 덜어준다니 고마워요. 노움양.”

 

“좋아. 대충 이야기는 끝났네. 아르망. 지금 당장 오드리에게 연락을 넣어라. 우선 설비를 멈추게 하고 스틸라인 제식 수영복과 같이 일괄적으로 지급할 수영복 제작에 먼저 착수하라고.”

 

“예. 폐하.”

 

“간단한 이벤트 준비 도구들은 리리스와 리제, 너희가 직접 발로 뛰어서 챙길 거냐? 그러면 내 명령장을 내려주고.”

 

“네. 주인님. 한 장만 써주세요. 후훗.”

 

“..해충. 나중에 두고 봐.”

 

“그럼 우선 이 이야기는 끝났고. 자, 다음으로 뭔가 나눌 이야기는 없냐?”

 

 짤막한 여름 이벤트의 준비계획을 마쳤으니, 이제는 근황 보고 시간이다. 나는 앞에 있는 여성들에게 의례적인 질문을 내던졌다. 아마 이 조용한 동네에서 사건이 벌어져봐야 얼마나 벌어지겠는가.

 

“음. 우리 부품 애들 쪽에서는 별다른 이야기는 없던데.”

 

“예. 대장님. 다들 그저 덥다고만 해요.”

 

“파견 애들을 잡아둔 덕분이지. 뭐.”

 

 부품 쪽은 이상 무. 전력 쪽은 나중에 이야기해봐야겠지만, 그쪽도 별다른 소리가 없으니. 나는 왼쪽 장교들의 대답을 들은 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에 리리스와 리제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들의 갑자기 날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며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주인님. 사실 다름이 아니라 안드바리의 말로는 근래 또 한 번 누군가 생산 물자를 탈취한 흔적이 보인다고 해요.”

 

“...뭐?”

 

“주인님. 영양 생산 시설에 해충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위화감이 드는 때가 종종 있어요. 드리아드들의 이야기로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가끔 빵이나 곡류 제품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해요.”

 

“...씨발. 어떤 새끼야. 또?”

 

 리리스와 리제의 보고에 나는 콧등에 힘을 팍 주고는 그녀들과 같이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다. 설마하니 극기훈련을 받고도 여전히 보급 탈취 행위를 지속하는 얼빠진 놈들이 있었을 줄이야.

 

“빵이나 곡류라. 알비스들인가?”

 

“..대장. 알비스들은 초코바를 좋아하지. 다른 식품들에 대해서 별다른 집착을 안 보여.”

 

“브라우니들은?”

 

“어..저희 브라우니만 봐도 알지만 브라우니들은 개체상 상층부가 딱딱하거나 무서우면 많이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어요. 아마 파견 브라우니들은 아닐 거예요.”

 

“주인님. 저 역시 안드바리의 걱정에 종종 비축 창고를 들려보는데 별다른 흔적을 못 찾았어요.”

 

“...다프네가 하도 걱정하는 눈치라 저도 야간 경계 근무를 서 봤는데. 범인은 못 잡았어요. 주인님.”

 

‘리리스나 리제의 눈까지 피해 보급 탈취를 하는 녀석이라고?’

 

 생각보다 골치 아픈 사안이다. 만약 이게 또 한 번 저항군 네트워크에 퍼진다면 이제는 다들 한 번씩 도전해본다면서 달려들 것이 분명하다. 아예 유흥거리로 정착할지도 모를 일. 나는 눈썹을 여전히 부라린 채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 지를 고민했다.

 

‘이프리트나 노움의 말대로라면 알비스나 브라우니 같은 애들은 아니고. 그러니 단체로 기합을 줬다가는 되려 미움만 사.’

 

 공통성이 없는 연대책임은 불만만 증폭시킬 뿐. 정당한 수단이 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누구인지만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마땅히 누구인지 찾아낼 단서가 없다.

 

“아르망. 요새 애들 사이에서 무슨 이상한 이야기나 그런 건 없나?”

 

 이렇게 회의실에서 자문자답할 바에야 밖에 있는 애들의 이야기가 좀 더 단서가 될 수 있을 터. 나는 행여 무슨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싶어 믿음직스러운 부관을 바라보았으나 그녀 역시 정보가 없는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폐하. 근래 들어 이상한 보고는 없습니다. 불만 역시 없고요.”

 

“..씨발. 어떤 년이야. 대체.”

 

“히힛. 대장의 눈을 보니 누군지는 몰라도 잡히면 죽었네.”

 

“으으. 대장님이 가끔 저러실 때는 제가 여기 소속인 게 참 다행인 것 같아요.”

 

탁-! 탁!

 

 나는 이프리트와 노움의 평가를 흘려듣고선 차가운 지휘봉의 겉면으로 계속해서 내 승모근을 두들기며 곰곰이 이 맹랑한 탈취범을 잡을 방도를 떠올려보았다.

 

‘..일일이 소지품 검사라도 해볼까. 아니야. 이렇게 철두철미한 놈이 탈취한 보급품을 멍청하게 관물대에 숨길 리는 없고. 초소마다 근무 기록표를 조사해서..아. 씨발.’

 

“흐음. 그러고 보니 말이네. 작전관.”

 

“..?”

 

 아무리 고민해도 쉽사리 방도를 찾지 못하던 찰나,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입에서 무언가 미심쩍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장 어제 말이네. 야밤에 더치걸 하나가 화장실을 가던 도중 통신실의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더군.”

 

“..통신실?”

 

“그렇네. 분명 통신실 앞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작전관, 그대인 줄 알았네만. 실상은 아무도 없어서 놀랐다고 했네.”

 

“...아르망. 너 어제 통신실 갔냐?”

 

“아니오. 폐하. 애초에 통신실은 요안나양이나 폐하가 아닌 이상 사방이 잠겨 있는 밀실이라 그 누구도 가지 않습니다.”

 

 담담하게 통신실의 출입 인원을 읊어낸 아르망의 말에 나는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통신실에서 발소리? 귀신이라고 착각한 더치걸의 환청인가 싶기도 하지만 뭔가 찜찜하다.

 

‘보이지 않는 녀석. 흔적도 안 남기고 탈취해가는 녀석. 그리고 통신실의 복도에서 들려온 의문이 발소리.’

 

“...흐음.”

 

 뭔가 께름칙한데 아직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이럴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지. 나는 취사장의 다음으로 갈 곳을 정하고는 날 빤히 바라보는 리제와 리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리제. 곧 있다가 네 쪽을 방문하겠다. 리리스. 비축 창고도 마찬가지. 만일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곧장 보고하고.”

 

“네. 주인님. 주인님이 제게로 오신다니, 아아. 너무 행복해요. 히힛.”

 

“..스토커. 주인님은 사건을 조사하러 오시는 거지 널 보러 오시는 게 아니거든?”

 

“시끄러워! 해충! 너야말로 주인님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냐?”

 

“뭐?! 너 이..!”

 

탕-! 탕!

 

 격해지려는 두 얀데레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들보다 빨리 책상 위에 지휘봉을 내리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게 집중되는 이목에 우선 이 회의를 파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우선 오늘로부터 3일 후, 요안나 아일랜드의 생산 인원들을 대상으로 여름나기를 가질 거다. 리조트 건물은 미완공이니, 사용 불가라는 점을 알아두고.”

 

“그 건물은 대체 언제 완공된대. 치잇.”

 

“그리고 앞으로 이상한 일이나 이야기가 들려오면 재깍재깍 내게 보고해. 누군지는 몰라도 반드시 잡아서 내 손으로 족친다.”

 

“하하..누군지는 몰라도 차라리 전방으로 가는 게 낫겠네요.”

 

“전방은 무슨. 내 손으로 지옥으로 보내줄 건데.”

 

 이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지휘봉’만 있으면 어지간한 노장이 아닌 이상에야 내 손바닥 안이다. 나는 내 핵심장비를 손바닥에 두들기며 날카로운 눈으로 내 앞에 앉은 여성들을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이다. 마지막으로 질문할 인원은..”

 

휙-!

 

“주인님. 그런데 주인님의 수영복은 어떻게 할까요?”

 

“...”

 

 해맑게 손을 들어 올린 리리스의 물음에 나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제발 저 질문만 안 나오기를 빌고 있었는데.

 

“맞아. 대장은 수영복 없잖아? 오드리한테 따로 주문하면 바로 나오겠지?”

 

“주인님에게 흉측한 수영복을 입혔다가는 그 해충은 내 가위로 옷을 전부 구멍을 내버릴 거야!”

 

“폐하. 오드리양에게서도 폐하의 수영복에 대한 질문이 왔습니다. 사각형을 선호하시는지, 아니면 삼각형을 선호하시는지.”

 

 곁에서 들려오는 아르망의 나긋나긋한 질문에 나는 한껏 힘을 주고 있던 어깨의 힘을 풀어 내리며 날 초롱초롱한 푸른 눈동자로 바라보는 부관에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나 안 갈 건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가고 싶다. 부산 해운대는 무슨, 괌이나 하와이에도 비견되지 않을 미녀들의 낙원이 펼쳐질 텐데. 문제는 내가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우로라의 정복만 해도 내 눈길이 돌아간다고. 그런데 우리 애들의 수영복 차림이라니.

 

‘씨발. 하늘이 두 쪽 나도 가면 안 된다.’

 

 아침에만 몇 차례의 개고생을 했었던가. 소완에게 벌떡 세운 소중이를 보여주질 않나, 엘븐의 장난에 정신줄을 놓을 뻔하지 않았나. 여기 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란 남자. 마음이 갈대 같은 놈이었다. 

 

“폐하? 지금 무슨..”

 

“예?”

 

“어?”

 

 사방에서 들려오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들, 나는 재빨리 두 눈썹을 부릅뜬 아르망에게 손짓 발짓을 해 가며 내 입장을 무마하려 들었다.

 

“아..아니. 나 이래 보여도 대장이잖아? 응? 나 같은 녀석이 쉬는데 찾아오면 그건 방..”

 

“작전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보게나.”

 

‘싫은데. 정말 싫은데. 굳이 시선을 앞으로 안 돌려도 이미 날 향한 이 따가운 시선을 마주하기는 싫은데!’

 

“후우..작전관. 이미 그대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네.”

 

 머리 뒤에서 들려오는 요안나의 짧은 한숨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날 향한 그녀들의 뼈아픈 질타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주인님이 없는 휴가라뇨! 싫어요! 앞에 했던 발언들 전부 취소할래요!”

 

“마..맞아요! 대장님! 대장님이 안 쉬는데 저희가 어떻게 쉬어요!”

 

“대장! 생각을 좀 하고 말해! 우리가 언제 대장 싫다고 했어?!”

 

“주인님. 리제는 주인님이 없으면 어떻게 웃나요. 주인님.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폐하. 얌전히 참가하십시오.”

 

“...네.”

 

 씨발. 범인 잡기 전에 내 정기가 쭉 빨리는 건 아닐까. 훈련소 때처럼 콩나물국에 두부만 먹어대면 휴가 동안 내 소중이가 벌떡댈 일은 없어질까.

 

‘여기는 지옥일까. 천국일까. 꼴초뱀...’

 

 나는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낙원과 인내심의 극한을 맛보게 할 지옥을 머릿속에서 동시에 연상하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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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원하는 게 이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