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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화 요약

1. 샬럿의 간곡한 말로 모두가 설득당함

2. 마을에 귀환해 대표 요안나와 만남

3. 메리에게 그림으로 대가를 지불받기로 한 샬럿

4. 샬럿이 마을의 의뢰를 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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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다. 너무나 뜨겁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겁다.

피다. 피가 흐른다.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피가 흐른다.

무너진다. 건물이 무너진다. 우리가 쌓은 희망이 무너진다.


아이들이 쓰러져 있다. 동료들이 쓰러져 있다.

움직여야 한다. 힘을 내야만 한다.

실패했다. 모두를 구하지 못했다.


누구의 탓인가.


병력을 빼내간 재상의 탓인가?

아니다. 그들이 있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다.


수비군을 지휘한 무관장의 탓인가?

아니다. 용이 있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다.


지도자의 탓인가?

그렇다. 내가 더 강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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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


"샬럿 님, 정신차리십쇼!"


"에...? 헉! 다 오해요. 연회 중에 졸지 않았소!"


"연회라뇨? 지금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오늘 저에게 브리핑을 듣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약속 시간이 지났으니 서둘러 주십시오."


 임펫이 한숨을 쉬며 샬럿에게 말했다. 샬럿이 준비하는 동안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고 어제 일을 떠올렸다. 최근 들어 늘어난 철충의 습격으로 요안나는 타인의 모범이 되겠다며 휴가도 고사하고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행원의 입장에서 부지런한 대표가 자랑스럽기 이를 데 없으나 한편으로는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연히 막역한 사이였던 샬럿이 찾아와 요안나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으니 실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요안나 님도 그렇고 샬럿 님도 그렇고 엄청나게 마셔서 휴식이 된 건지 의문이지만... 샬럿 님이 저 모양인 걸 보면 요안나 님도 푹 쉬고 계시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나아진 임펫은 샬럿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급하게 준비하실 필요없습니다. 욕실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나도 아이가 아니니 너무 심려치 않아도 좋소."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 내민 샬럿이 볼을 살짝 부풀리곤 볼멘소리를 냈다. 이내 문을 닫고 다시 씻기 시작하자 임펫은 슬며시 미소를 짓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마을을 잃고 예전의 모습을 잃었다는 소린 들었는데, 그저 숨기고 있을 뿐인가. 베테랑 연기자 답군.'


 얼마 지나지 않아 몸단장을 마친 샬럿이 조심스런 걸음으로 방에서 나왔다. 쭈뼛거리는 것이 미안함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듯 했다.


"늦어서 미안하오, 무관장."


"괜찮습니다. 회의실로 가시죠."


 회의실로 가는 도중에 임펫은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요안나는 이미 업무를 시작한 듯 했다. 머리를 살짝 흔들고는 회의실로 향했다. 샬럿은 임펫의 행동이 자신을 책망하는 듯해 한층 더 고개를 숙이고 따라갔다. 임펫과 샬럿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메리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다들 이제 오셨군요! 간밤에 다들 잘 주무셨나요?"


"메리 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의뢰는 샬럿 님에게만 전달된 것일텐데요?" 메리의 환영이 황당하다는 듯 임펫이 되물었다.


"저도 계약에 묶여 있잖아요? 저 분이 어제 자세히 얘기하자 해놓고 술에 취해 제대로 말도 못했단 말예요." 메리가 볼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미안하오, 메리 양.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되겠소? 의뢰는 언제나 당사자들에게만"


"저도 따라가고 싶어서 그래요, 샬럿 씨!" 메리가 샬럿의 말을 자르고 당돌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메리 양. 둥지를 찾다가 교전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당신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단 말입니다!"


"임펫 씨가 우려하는 바는 알고 있어요. 저도 어제와 같은 일은 겪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그리고 싶은 게 생겼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만 됐소, 임펫 공. 메리 양, 반드시 지켜드리겠소. 내 목숨을 내놓더라도 말이오." 샬럿이 임펫의 말을 자르고 선언했다.


"하늘에 맹세컨데, 나 샬럿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메리 양을 살려 이곳에 돌아오도록 하겠소!"


 비장하게 자신의 맹세를 외친 샬럿은 자리에 앉아 브리핑을 재촉했다. 임펫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스크린 앞에 서서 의뢰 내용을 소개했다. 최근 2달 사이에 5~6기 정도의 철충이 인근 마을과 수송 팀을 습격한 것만해도 13건에 달했다. 이들은 교활하게도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는 병력이 재빨리 올 수 없는 곳만 골라서 습격하고 있었다. 동면기라 깨어있는 철충이 많지 않은 상태인데다 그나마도 제대로 기동하는 개체는 더욱 적다보니 이를 지휘할 개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행동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연결체나 제너럴 급의 지휘관 개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임펫은 다시 한 번 의뢰는 둥지를 찾는 것까지임을 샬럿에게 상기시키며 절대 무모한 짓을 하지마라고 재삼 다짐을 받아두었다.


"가장 최근에 습격이 벌어진 곳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78km 떨어진 곳입니다. 여러분이 습격당한 곳이죠. 조사팀이 조만간 결과를 가져올테니 기다렸다 보고를 듣고 가시죠."


"알겠소. 그들이 오면 우릴 불러주시오. 어제 신세진 식당에 가있겠소."


"알겠습니다, 샬럿 님. 나중에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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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는 샬럿이 자신의 억지를 들어준 게 의아했다. 임펫이 굳이 언급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끼어듦에 따라 임무의 난이도가 확 올라간 것은 눈치를 밥 말아먹은 자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왜 샬럿 씨는 내 억지를 들어준 걸까..."


"그게 궁금했소, 메리 양?"


"에에엑? 마음도 읽을 수 있으신가요?" 메리의 두 눈이 동그래지며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럴 리가. 입으로 나왔기에 알 수 있었소." 풋 하고 웃으며 샬럿이 대답했다.


"그..그런가요?" 메리는 뭔가 맥이 빠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 그리 대단한 이유는 아니오. 나도 당신과 같은 예술가라 마음을 헤아린 것 뿐이오. 나도 언젠가는 무대에 다시 서기를 고대한다오."


 샬럿이 아련한 눈빛으로 산 너머를 바라봤다. 한 동안 둘 사이에 침묵만이 흘렀다. 점심시간이 지난지라 식당 내에서는 오로지 라디오 소리만 울려 퍼졌다. 라디오에선 과거에 샬럿과 아르망의 대립을 주제로 한 연극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지 음성만 들림에도 메리는 그 상황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샬럿 씨는 유명 배우셨죠? 저도 미국에 살 때 작품 몇 개를 봤었어요. 제가 본 모든 작품이 명작이었지만 그 중에 삼총사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철충조차 반할정도로 멋진 연기를 선보이셨잖아요."


"하하, 과찬이오. 나도 메리 양의 그림을 본 적이 있소. 그 때는 몰랐지만 과거에는 가까운 곳에 있었지. 더 이상은 볼 수 없지만 말이오. 어쩌면 메리 양의 그림을 갈구하는 게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소."


 순간 샬럿의 표정이 아련해진 것을 메리는 포착했다. 뭔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으나 감히 물어볼 수 없었다. 그 찰나에도 눈은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큰 슬픔이 담겨 있는 눈동자가 더는 묻지 말아달라 청하는 것 같아 메리는 말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샬럿이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처연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결국 메리는 라디오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을 임무에 포함시킨 이유가 진실이 아님을 앎에도 입을 닫고 조용히 연극을 감상했다. 다시금 찾아온 침묵은 조금 더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