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먹고사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 삶과 책임이 뒤바뀌는 순간 - 2 . 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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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닐라 A1, 영원히 주인님을 모시겠습니다.


 바닐라 A1, 영원히 주인님을 모시겠습니다.


 바닐라 A1, 영원히 주인님을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어떤 인간이 내게 감정을 준 것일까. 어떤 인간이 내게 사유하는 법을 알려 준 것일까. 나는 그가 증오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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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 눈 뜬 곳은 한 저택이었다. 결코 저렴하다고 보기 힘든 물건들과 가구들로 가득찬 곳이었지만, 고풍스럽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가정부인 내게는 여러 대저택들에 대한 기본 상식정도는 있었기 때문일까.



 가정부. 내가 처음 눈을 뜨자마자 나 자신을 묘사한 첫 단어. 영혼에 새겨진 이름. 부자들의 전속 노예. 어쩌면, 노리개.


 ...


 조금 이른 시기에 눈발이 날렸다. 그 사이를 가로질러 가는 길에는 목련도 담쟁이도 모두 죽어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부의 경계를 지나자, 낡은 선반과 바퀴 달린 의자가 길가에 널린 듯 서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고, 모두 뱀눈을 치켜뜨고 나를 흘겨봤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저녁거리를 사서 돌아오자, 다른 가정부들이 챙겨서 부랴부랴 주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마 바이오로이드라고 생각이 들었다. 비둘기가 떠난 마을에는 부자와 기계들만 살고 있었다. 


 

 너, 바이오로이드 맞아? 


 네?


 빠트린 게 너무 많은데. 이거 야단났네.


 아..


 다른 건 몰라도, 주인님은 와인 없으면 밥 안 드셔. 무조건 보르도 와인. 마침 떨어졌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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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를 처음 본 곳은 주방의 문턱, 문틀에 한 쪽 팔을 걸치고 있었다. 삶의 목적이 내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러면 바이오로이드 가정부를 쓰는 의미가 없다며, 그는 노발대발 소리를 지르고는 그녀의 복부를 후렸다. 그녀는 뱀처럼 눈을 흘겨뜨고 나를 잠시 째려보더니 허둥지둥 어디론가 가버렸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맡은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제대로 일 할 수 없었다. 저택 안 모두가 나를 째려봤다. 나는 눈을 볼 수 없었다. 치맛자락을 꽈악, 쥐었다. 눈도 꽈악 감았다. 다리는 움츠러들었고



 행주를 들고 가구에 얹힌 먼지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이가 어딘가에 통화를 하고 있었다. 높은 언성으로. 아마도 나는 버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인데도, 버려지는 것이 가슴이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명령은 커다란 단지 외벽을 넘어, 적당한 거리에서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애원했다, 버리지 말아달라고. 싹싹 비는 것조차 일 만큼이나 초라한 솜씨였나 보다.



 나는 곧 허름한 벽 아래에 주저앉았다. 낡은 선반과, 바퀴달린 의자. 그리고 나. 사실 나와는 무엇하나 다를 것이 없는 것들이었다. 제 역할을 못 하면, 폐기된다는 것도



 아무리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도 따끔한 시선들이 살갖을 파고들었다.



 네 동네로 돌아가 ! 우리 일자리를 다 가져갔어, 저 망할 년이 ! 라고 귓가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듯 귀가 아프고 가슴이 먹먹했다. 


 ...


 그렇게 몇일을 주인을 기다렸을까, 왠 남자가 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자신과 함께 가자고. 가지 않겠냐는 권유도 아니었고, 가지 않아도 그에겐 별 감흥이 없다는 듯 속 빈 말투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왠지 명령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 남자는 눈을 찢겨 뜨지도 않았고, 그저 속이 텅 빈 듯 앞을 응시했다. 나를 보는 동시에 나를 통과해서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 공허한 눈빛이었다. 내가 보아왔던 인간들과 같은 탐욕도, 증오도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를 동질감. 인간 이하의 무언가와 로봇 이하의 무언가. 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었다. 나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를 평생 섬기겠노라고. 이런 생각조차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영혼에 새겨진 목줄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 거리에서는 어떤 발걸음도, 보도블록의 크기에 맞지 않았었다. 짐을 메고 걷고 또 걷고 발자국 수를 세며 걷고 시간을 세며 걷고



 그 남자처럼 차분하게 내리깔린, 공구리질이 겨우 끝난 바닥에는 흔한 빗금조차 없었다. 그 남자는 마음대로 걸었다. 나도 마음대로 걸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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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업로드때와 같이 2.5화랑 3화를 같이 업로드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