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을 끌어안고 살다가 언젠가 되돌려준다는 선택지 따위는 시젠에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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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 님, 어떻게 교단의 구호를 독단으로 바꾸실 수 있는 거죠? 교단의 구호는 엔젤 엔젤 아자젤이잖아요!]


[감히 교단의 구호를 멋대로 바꾸다니, 불경하다! 게다가 엔젤의 이름도 내 이름도 없이 네 이름만 들어가는 구호라니!]


 "여러분 이름이 안 들어가서 서운하신 모양이죠?"


 [신성모독이에요!]


 [신성모독이다!]


 빈정거리는 앨리스 4호를 향해서 사라카엘들과 엔젤들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그녀나 아자젤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원래의 사라카엘들의 성격대로라면 지금쯤 날벼락이 번쩍번쩍거리고, 사라카엘들과 엔젤들의 명을 받은 베로니카들이 시뻘건 낫을 휘둘러댔어야 함을 아는 라비아타와 에데, 레모네이드 알파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코헤이 교 출신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기억소거 시술을 시행한 직후, 라비아타가 필사적으로 종교적인 세뇌를 걷어내는 작업을 한 것이 유효했던 덕분이다. 


 원래는 아자젤과 베로니카 모델을 복원할 때 이들이 종교적인 광신으로 인해서 인간 내지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충돌을 빚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과정이었는데, 이를 이렇게 쓸 수도 있었다. 물론 라비아타 혼자서 해낸 것은 아니었고 닥터와 에바의 도움을 받아 시젠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하던 과정에서 나온 결과들을 활용한 결과였다. 


 기억을 소거하고 나서 코헤이 교 바이오로이드들이 다시 인류 멸망 이전의 광신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을 우려했던 이들에게 지금의 결과는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여차하면 이들을 짐짝으로 라비아타 일행에게 떠넘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에데와 레모네이드 알파의 생각과는 달리, 지금의 상태라면 계속 아쿠아팰리스에 남겨놓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어째서 자기 멋대로 구호를 바꿨는가부터 시작해서 다른 교리들까지 따지면서 아웅다웅하는 라비아타 일행의 아자젤과 아쿠아팰리스의 사라카엘들 및 엔젤들, 은근히 라비아타 일행의 아자젤의 편을 드는 아쿠아팰리스의 아자젤들, 라비아타 일행의 베로니카와 함께 팝콘을 먹으면서 구경하는 아쿠아팰리스 베로니카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시젠이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처음에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듣고는 불안해했지만 베로니카들이 완전히 긴장이 풀린 듯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시젠도 긴장을 풀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신이 막아주겠다는 에키드나의 호언장담과 막을 수는 없어도 충분히 멈출 수는 있다는 티타니아의 말을 듣고 나서는 베로니카들이 하는 것처럼 그냥 팝콘을 먹으면서 구경했다. 하지만 코헤이 교리 관련 토론은 시젠으로서는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그녀가 들어도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젠의 시선과 발걸음이 향한 곳에는 몇 명의 코헤이 바이오로이드들이 벽에 걸린 코헤이 교단의 상징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는 장식을 날개에 걸친 천사 바이오로이드와 엔젤이 조금은 지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오는 시젠과 그녀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어린 자매여. 어린 자매도 기도하러 오셨나요?]


 시젠이 가지고 있던 스케치북에 [언니 따라 와써요]라고 적어서 보여주었다. 그녀를 맞이한 두 천사 바이오로이드들은 같이 기도할지를 시젠에게 물어보았다.


 [같이 기도하시겠나요, 어린 자매여?]


 스케치북 책장을 넘겨서 [내]라고 적혀있는 책장을 보여준 시젠이 두 천사를 따라가자, 그녀를 호위하던 포이들과 티타니아, 에키드나가 살짝 긴장하면서 시젠을 따라 움직였다. 코헤이 교단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는 그녀들이지만 이 천사들이 혹시라도 시젠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특히나 이 천사들은 괴물 사건 이후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으면서도 기억 소거 시술을 받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 바이오로이드들이었다. 

 

 아자젤 둘. 사라카엘 둘. 엔젤 둘. 그리고 라미엘 둘. 도합 여덟 천사들은 기억을 지우는 대신에 다른 종류의 시술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감정 제어 모듈을 이용해서 그녀들의 죄책감과 심적인 고통을 평상시에는 잠시 억누르고 있다가, 그녀들이 원할 때에 이를 일시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도록. 닥터와 라비아타, 에바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연 여덟 바이오로이드들이 의도하는 것만큼의 결과가 있을지 어떨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시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최소한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닥터도 에바도 라비아타도 할 수 있는 일들은 전부 다 했다. 이것으로 코헤이 교단의 여덟 천사들이 괜찮을지 어떨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것은 기억소거 시술을 받은 바이오로이드들과 아쿠아팰리스의 두 지배자들이 지켜봐야 할 일이 될 것이다. 


 이들 여덟은 코헤이 교단이 빛의 이름을 빌려 저질러온 온갖 부패와 타락을 목격한 이들이었고 이에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가담했던 이들이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자신들의 기억을 지움으로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이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다른 자매들은 어쩔 수 없이 기억을 지워야 한다 하더라도, 자신들만큼은 이를 죽는 그 순간까지 짐으로서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들의 주장이었고 바램이었다. 


 라미엘 옆에 앉아서 기도를 하려던 시젠의 시선이 라미엘의 몸 여기저기를 옭아맨 가시덩굴들로 향하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라미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날개는 진짜 날개가 아니라 진짜처럼 보이는 장비에 불과했고, 이에 감겨있는 가시덩굴은 비록 걸리적거릴지언정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무슨 고통을 주지는 않았다. 라미엘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돌린 시젠이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자 라미엘과 엔젤도 따라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에데와 레모네이드 알파와의 대화를 마친 라비아타도 시젠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서 기도했다.  


 방금 아쿠아팰리스의 두 지도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녀의 그녀의 일행이 또다시 쉽지 않은 길을 가게 될 것이 정해졌다. 


 이 사실로 인해서 시젠이 크게 상심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앞으로 있을 여정이 험난하고 쉽지 않더라도 그녀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 라비아타가 눈을 뜨고 시젠을 쳐다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길었던 기도를 마친 시젠을 안아들면서 몸을 일으키는 라비아타에게 라미엘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비아타 님.]


 ".......정말로, 그걸로 괜찮으시겠나요?"


 [원래 고통을 짊어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저희입니다. 저희 고통뿐 아니라 남의 고통까지 짊어지기 위해서 만들어졌지요. 비록 지금은 이를 견디기 어려워 무리한 부탁을 드렸습니다만, 라비아타 님과 에바 님, 그리고 닥터 님의 도움을 받았으니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라미엘의 말을 들은 시젠이 눈을 깜박거리고, 라비아타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살아있는 면죄부. 천사의 외형을 한, 속죄제와 속건제를 위한 희생 제물. 인간들이 자신들이 저지르는 죄를 외면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으로부터 도주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떠넘긴 존재. 인간들과 바이오로이드들이 무조건적으로 떠넘기는 죄악과 그로 인한 고통을 짊어지고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바이오로이드. 그것이 코헤이 교단의 라미엘이었다.


 그러나 고통을 짊어지기 위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무제한적으로 고통을 짊어질 수는 없다. 오히려 너무 많은 고통과 마음의 짐을 짊어진 나머지 무너져버릴 수도 있었다. 많은 짐을 실은 거대한 수송선이나 대형 여객기, 수송차량이 사고가 나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것처럼, 라미엘처럼 많은 짐을 떠맡은 바이오로이드가 무너져버리면 겉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미엘의 뜻은 확고했다. 두 라미엘들 중 누구도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그녀들이 저지른 잘못과 다른 주변 바이오로이드들의 잘못을 끌어안고 가기를 원했다.


 아자젤들과 사라카엘들, 엔젤들 중 상당수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지우지 않고 계속 버티는 길을 택하려 했다. 그것은 라미엘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고, 천사 바이오로이드들 중 상당수도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지우지 않고 고통받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았다. 라미엘을 제외한 나머지 천사 바이오로이드들은 제비를 뽑아서 두 사람씩만 기억과 고통을 간직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기억 소거 시술을 받기로 정했다.


 반면에 베로니카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겪거나 해야 했던 일은 그나마 교단의 상징이었던 천사형 바이오로이드들보다 더 추악했고, 천사들은 베로니카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러한 기억과 그로 인한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부디 여러분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또한 빛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라미엘에게 뭐라 할 말을 떠올릴 수 없었던 라비아타가 무거운 목소리로 축복의 말을 건네자, 이들에게 다가온 초췌해 보이는 인상의 아자젤도 라비아타에게 축복의 말을 건네주었다. 별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본 시젠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스케치북에 [천사 언니드레게 신님의 축보기 잇기를]이라고 적어서 보여주자, 코헤이 교단의 천사들이 그녀에게도 축복의 말을 건넸다.


 라비아타 일행의 아자젤과 앨리스들, 그리고 코헤이 교의 천사들 사이의 장대한 말싸움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코헤이 교 교회에서 돌아오자마자 라비아타는 일행 전원을 불러모아 에데와 레모네이드 알파로부터 들은 말을 전해주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필요한 것은 가능한한 챙겨주고 어느 정도의 시간 여유도 줄 테니 아쿠아팰리스에서 떠나라는 내용이었다.  


 라비아타의 말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은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반응 내지는 올 것이 드디어 왔다는 반응이었고, 다프네들과 포티아들, 아우로라들은 살짝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뭐,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 보면 예상한 일이에요."


 앨리스 4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요즘 전투 감각이 많이 떨어져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샌드걸과 베라가 무럭무럭 찐 뱃살을 꼬집으면서 아쿠아팰리스에 머무는 동안 무럭무럭 자라난 살집과 반비례해서 크게 떨어진 전투능력을 걱정했다.


 "앞으로 또 당분간은 빈곤한 식생활을 하게 되는 건가요?"


 "다이어트 한다고 생각하시죠."


 지니야들과 밴시들, 님프, 알비스가 앞으로의 식생활이 다시 빈곤해지는 것을 걱정하자 바닐라-60이 바로 쏘아붙였다. 그래도 에데와 레모네이드 알파가 이것저것 챙겨준다고 했으니 최소한 당분간은 빈곤하다고 할 정도로 식생활이 처참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준 식량은 아껴먹어야 할 테고, 그거 다 떨어지고 나면 식량을 직접 구해야 할 테니 지금 같은 식생활은 불가능하겠지만. 


 아자젤과 베로니카, 앨리스들과 포이들은 앞으로 어디를 가든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주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눈으로 시젠을 쳐다보았고, 그 시젠을 사이에 둔 에키드나와 티타니아는 여기서 나가게 되든 어떻든 상관없고 시젠만 곁에 있으면 된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쿠아팰리스를 나가게 되었다는 데 대해서 시젠은 살짝 상심한 듯 보이기는 했지만, 아주 슬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 이 수중 도시는 그녀의 집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다만 또 다시 그녀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이 그녀 때문에 같이 고생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듯이 티타니아와 에키드나가 서로 시젠을 끌어안으려고 신경전을 펼쳤다.


 "그래서 언제까지 나가야 하는 거니?"


 "한 달, 길어도 두 달. 그 안으로는 정리하고 나가야 할 거에요."


 아쿠아팰리스에서 이들에게 내주기로 한 것은 타이거샤크급 잠수함이었다. 


 수중 요새라 할 만한 규모를 갖춘 오르카에 비하면 작은 잠수함이지만, 그래도 장거리 항해 및 장기간에 걸친 작전을 위해서 갖출 시설은 다 갖추고 있는 함선이다.


 라비아타의 요청 및 에데와 레모네이드 알파의 결정에 따라서 바이오로이드 제작 및 수복 시설도 갖추게 될 예정이었고, 오르카와는 다르게 유사시에는 직접 전투를 할 수 있는 무장도 유지할 계획이었다. 물론 바다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는 철충 상대로 대함전 무장은 큰 의미가 없고 이런저런 시설을 탑재하게 되는만큼 그나마 있는 무장들도 크게 줄어들겠지만, 레모네이드 감마와 오메가를 비롯한 다른 바이오로이드 세력을 상대로는 쓸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라비아타도, 에데도, 레모네이드 알파도 아쿠아팰리스에서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던 것처럼 바닷속에서 위험한 무언가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타이거샤크를 운용할 인력은?"


 "포츈 씨들과 잠수함 운용 능력이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추가로 생산할 예정이에요."


 "에데와 알파가 선심 좀 쓰기로 했나 보구나. 어쩌면 우리 마성의 시젠에게 그 아이들도 반했는지도 모르겠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젠에게 에바는 그저 웃어보일 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라비아타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확신할 수도 없고,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이야기기에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바이오로이드들을 추가로 생산할 계획이에요. 어떤 바이오로이드를 생산하는 것이 좋을지 여러분의 의견을 구하고 싶어요."


 "일단 닥터 모델이 나 말고도 둘 정도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닥터가 제일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자기와 똑같은 모델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생산하자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외에 혹시 의견 있으신 분?"


 [시젠의 보호를 위해서는 호위 전문 바이오로이드가, 그리고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철충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광역 제압 능력을 가진 바이오로이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자젤의 말이 뒤로 갈수록 점점 힘을 잃어가고, 다른 이들의 표정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자젤의 생각 자체는 다른 이들이 생각하기에도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단지 한 가지 문제가 있을 뿐이다.


 비록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들어서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바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호위라면 역시 블랙 리리스, 광역 제압 바이오로이드라면 오베로니아 레아겠지?"


 시젠과 포이들, 티타니아와 앨리스들의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방 안에 싸늘한 정적이 찾아오고, 거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에바에게 넌 x발 눈치도 없냐, 라고 비난하는 듯한 눈빛을 쏘아보내는 한편으로 시젠과 티타니아, 포이들과 앨리스들의 눈치를 살폈다. 

 

 "......블랙 리리스, 그 쳐 죽일 x발년......."


 "오 베 로 니 아 레 아.......!"


 앨리스 4호가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오르카 호의 블랙 리리스를 욕하고, 오베로니아 레아의 이름을 딱딱 끊어서 중얼거린 티타니아 주변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이 티타니아를 말렸지만 시젠을 핍박하던 레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분노하는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보다못한 에키드나가 금속 뱀을 시켜 한 대 후려치고 나서야 티타니아는 냉기를 뿌려대는 짓을 중단했다.


 다프네들과 아쿠아는 어쩌다가 시젠을 그렇게 좋아했던 언니와 자매들이 시젠을 그렇게 핍박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로 인해서 시젠이 얼마나 그녀들을 무서워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씁쓸해했고, 포이들은 처참한 과거의 기억들을 가진 그녀들을 위로했던 컴패니언의 자매들이 시젠 사건이 터진 이후에는 실패작이라고 매도하고 모욕하던 것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포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자 분노를 잠시 내려놓은 앨리스들이 그녀들을 위로했다.


 에바가 슬쩍 시선을 라비아타에게로 돌리자 생기없는 시젠의 눈빛이 라비아타에게 향하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시선도 따라서 라비아타에게 모였다. 이야기는 자기가 꺼내놓고 뒷처리는 자기에게 떠넘기는 에바를 원망한 라비아타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호위 바이오로이드 쪽에는 블랙 리리스에는 못 미치더라도 최고급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이오로이드가 하나 더 있어요. 그 바이오로이드를 다시 만들어내는 쪽으로 가려고 해요."


 "이터니티 모델 말이니?" 에바가 뭔가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차라리 저 아이의 '이모'가 로자 아줄을 쓰는 게 낫지 않겠니? 아니면 베로니카나 아자아자라든지."


 이모라는 표현을 들은 티타니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고, 아자아자라는 말을 들은 아자젤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에바를 쳐다보았다. 

 

 "이터니티....... 라, 확실히 있으면 도움은 여러모로 되겠습니다만, 그놈의....... 아니, 그x의 탄약 소모가 걱정이로군요."


 "탄약 소모도 소모지만, 이미 시젠에게 달라붙는....... 아뇨, 아무래도 상관없겠군요."

 

 이터니티 모델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아는 게 있었던 바닐라-60과 바닐라-65도 떨떠름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 마디씩 했다. 중간에 하던 말을 끊은 바닐라-65에게 여기저기에서 너 방금 무슨 소리하려 했냐고 추궁하는 눈빛이 날아들었지만 바닐라-65는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호위나 섬멸뿐 아니라 응급처치나 일상생활에서도 이터니티 씨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라비아타의 시선이 티타니아와 아자젤, 베로니카에게 향했다. "여러분이 괜찮으시다면 에바 말대로 로자 아줄을 여러분들께 드리는 것도 방법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좋아."


 [저도 찬성입니다.]


 "저 역시도."


 "와아, 야근이다! 좋았어! 오늘부턴 라비아타 언니와 에바 언니는 물론 티타니아 언니하고 천사 언니, 수녀 언니도 함께 야근이야!"

 

 닥터가 두 팔을 벌리며 소리지르자 티타니아의 눈빛이 살짝 변했고, 아자젤과 베로니카도 아주 잠깐이지만 표정이 흔들렸다. 반면에 에키드나는 활짝 웃으면서 당분간 시젠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힘들어진 이들을 약올리듯 말했다.


 "축하해. 그러면 그동안 시젠은 내가 돌보도록-"


 "웃기지 마세요, 뱀 아가씨. 시젠을 돌보는 건 우리에요."


 "그게 무슨 헛소리일까요~? 일행 중에서 저희보다 가슴이 큰 사람이 없을 텐데~?"


 "가슴 이야기를 갑자기 왜 꺼내요, 이 왕가슴 고양이가? 그리고 당신들 가슴은-"


 "가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이야기하던 것부터 끝내죠."


 에키드나에게 태클을 건 앨리스가 갑자기 치고 들어온 포이와 희한한 내용의 말싸움을 벌이려는 것을 막은 라비아타가 다시 주변을 환기시키려 했다. 


 그런 그녀에게 순순히 협조해줄 마음이 없었던 에바가 바로 태클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시젠이 네 가슴도 가슴이지만 네 뱃살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구나. 어째 날이 갈수록 몸매가 해괴망측해진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였구나?"


 "해, 해괴망측........"


 "자, 그럼 하던 이야기 마저 할까?"


 살이 많이 쪘다는 것은 라비아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해괴망측이라는 말은 정신적인 타격이 좀 컸다. 라비아타가 잠깐 충격에 빠진 모습을 즐겁게 감상한 에바가 박수를 몇 번 치면서 그녀 대신 주변을 환기시켰다. 


 "호위는 이터니티인지 뭔지에게 맡긴다 치고, 광역 타격 능력을 가진 바이오로이드가 굳이 더 필요해요? 저희 넷하고 저기 천사님에, '이모님' 있고, 그리고 저기 저 잘난 아가씨들 둘이면 충분하지 않아요?"


 앨리스 4호의 말을 들은 티타니아가 페로에게 이모라 불렸을 때 레아가 매우 분노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때에는 레아가 주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에바한테 그 소리를 듣고, 앨리스한테서 또 들으니 왠지 그 망할 레아의 심정이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고,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앨리스의 말에는 티타니아도 동의했다. 오베로니아 레아가 만들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반대였고, 레아가 아니더라도 딱히 다른 광역 제압 및 섬멸용 바이오로이드가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레아를 제외한다면 딱히 쓸만한 광역 제압용 바이오로이드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라비아타 역시도 레아 말고는 현재 일행과 함께할 만한 광역 제압 바이오로이드를 떠올리지 못했다. 언젠가 옛 북한의 블랙 리버 연구소에서 네오딤과 레이시라는 초능력 바이오로이드들의 유전자 정보와 진 시드를 획득하기는 했지만 둘 다 생산해서 쓰기에는 여러모로 불안했다.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네오딤은 자신의 초능력을 능숙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고 레이시는 그녀에게 심신 양면으로 끔찍한 후유증과 고통을 안겨다주는 장비를 이식하지 않으면 제대로 초능력을 사용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사용하는 초능력이란 것도 그리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이트 엔젤이나 메이는 고가의 소모성 무기에서 나오는 화력에 의존하는 바이오로이드라서 지금 만들어 운용하기에는 부담도 너무 크거니와, 당분간 일행과 누군가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지근거리에서의 전투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두 바이오로이드는 그런 상황에서는 크게 활약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역 제압 및 타격이 가능한 바이오로이드의 제작을 완전히 포기하기 어려운 이유가 하나 있었다.


 "티타니아 씨하고 아자젤 씨 빼면 죄다 자원을 잡아먹는다는 게 문제지. 그것도 대량으로."


 ".......큭."


 잘난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불린 게 마음에 안 들어서인지, 살짝 날이 서 있는 하르페이아 6호의 지적을 받은 앨리스 4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르페이아들도 미사일을 대량으로 뿌려서 공격하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탓에 자원을 많이 잡아먹는 편이지만, 마이크로 미사일을 마구 쏟아붓는 전투 스타일을 지닌 세라피아스 앨리스는 한 번 힘을 쓸 때마다 자원을 엄청나게 날려먹었다.  

 

 소모성 병기인데다 생산에 들어가는 자원과 시간, 노력이 만만찮은 미사일을 대량으로 뿌리는 앨리스와 하르페이아에 비하면 아자젤이나 레아, 티타니아가 사용하는 능력은 자원이 매우 적게 들어가는 편이었다. 앞으로 꽤 오랫동안 자원을 아껴야 하는 것은 물론, 일이 안 좋게 돌아갈 경우 자원에 쪼들리는 것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인만큼 자원을 적게 잡아먹으면서 넓은 범위를 제압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의 존재가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좋았다. 

 

 "정 뭐하면 마리라도 생산하는 게-"


 "아, 그것만큼은 제발!"


 "......그건 좀......"


 에바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프리트-1111과 피닉스 3호, 노움-6699가 바로 기겁하는 반응을 보였고, 다른 블랙 리버 바이오로이드들도 그것만큼은 제발 참아달라는 반응을 보였다. 


 분명히 불굴의 마리 모델의 전투능력은 블랙 리리스와도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고, 그녀가 사용하는 전용 장비를 사용하면 광역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수의 적을 타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게다가 지휘관이다 보니 전직 및 만년 말년 병장인 이프리트-1111이 지휘봉을 잡는 것은 물론, 라비아타가 일행을 지휘하는 것보다도 더 뛰어난 지휘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마리가 만들어진다면, 그리고 일행의 지금 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훈련부터 시키고 볼 것이다.


 라비아타조차도 바이오로이드들의 전투력을 올려주는 게 아니라 바이오로이드들을 잡는다면서 기겁했던 그 빡센 훈련을 하고 싶어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아무도 없었다. 인원 숫자도 많지 않고, 다들 아쿠아팰리스에서 지내면서 살이 좀 많이 붙은 지금이라면 스틸라인 출신 세 바이오로이드는 물론 다른 블랙 리버 바이오로이드들도 공평하게 굴리려 할 것이 분명했다.


 리리스도 안 돼, 레아도 안 돼, 마리도 안 돼, 쓸만한 바이오로이드들은 죄다 안 된다고 하는 일행의 말을 들은 에바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오베로니아 레아도 안 되고, 마리도 안 되면 대체 누굴 만들어야 할까?"


 "혹시 티타니아 언니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은........"


 "싫어."


 다프네 8호가 의견을 꺼내자, 눈을 부릅뜬 티타니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일축했다. 임시로나마 시젠의 어머니를 대체하는 존재로서의 역할까지 그녀와 똑같이 생긴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급한대로 레아 씨나 마리 대장님의 능력을 저희 중 누군가에게 이식하는 것은 불가능한가요?"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야. 레아 언니나 마리 언니의 능력보다 떨어지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 자칫 잘못하면 언니들이 크게 잘못될 수도 있어. 그럴 바에야는 차라리 AGS를 새로 만들고 말지."


 밴시-34의 의견 역시도 닥터 2호에게 거부당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이야기라면 세상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이 간단한 레벨의 초능력 정도는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조금 비약을 섞자면 바이오로이드들이 총칼을 무기로 사용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게 안 되니까 다들 온갖 무기를 쓰고, 초능력을 사용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드문 것이다. 


 "그러면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 AGS를 만드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네요."


 "야~ 일거리가 늘어났다!"


 "좀 기다리면 네 자매들이 둘이나 더 생길 테니 버티려무나."


 "야~ 일거리가 세 배로 늘어난다!"


 라비아타와 에바의 말을 들은 닥터 2호가 두 팔을 쫙 벌리면서 투덜거렸다.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시젠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특유의 소리를 내면서 [재성함미다]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들어보였다.


 "아냐, 아냐. 네가 미안할 필요는 없어. 하루가 멀다하고 일거리를 잔뜩 갖다주는 누군가와 그 일거리를 은근슬쩍 떠넘기는 누군가의 잘못이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닥터."


 "말이나 못하면...... 어휴, 그러면 일단 광역 제압 바이오로이드에 관한 것은 보류하고, 대신에 광역 제압 능력을 가진 AGS나 장비의 설계를 연구하는 걸로 하자. 그래도 언니들도 이쪽으로 도움이 될 만한 바이오로이드가 있는지, 없으면 다른 방법은 없는지를 좀 생각을 해 줘. 언제나 그렇지만 지금은 특히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라비아타의 사과와 감사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한 닥터 2호가 말을 마치자 방 안이 다시금 조용해졌다. 한참 동안 아무도 별다른 의견을 꺼내지 않자,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에바가 더이상 아무도 할 말 없는지를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면 이걸로 오늘 이야기는 끝난 거니?"


 "......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라비아타의 표정에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남아있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행들이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끝내 라비아타는 입을 열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바이오로이드의 추가 생산 계획에 대한 그 날의 논의는 끝났다. 

 

 닥터 2호와 에바와 함께 연구실로 향하면서 라비아타는 슬쩍 시젠의 눈치를 살폈고, 시젠도 라비아타의 눈빛을 쳐다보았다. 한참동안 고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시젠을 쳐다보던 라비아타가 방을 나서자 에키드나와 티타니아가 시젠을 끌어안고, 앨리스들과 포이들도 그녀에게 다가왔다.


 "우리가 그 할...... 레아의 무장을 쓰는 건 무리겠죠."


 레아를 욕할 뻔했던 앨리스 2호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다프네 셋에게 여전히 레아 모델은 언니였고 그 앞에서 함부로 레아를 욕할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저 천사님의 능력을 쓸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그건....... 곤란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아....... 그렇다고 레아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절대로 안 돼."


 "동감이에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한 앨리스 2호의 말에 티타니아와 앨리스 4호가 감정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아를 만드는 데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두 사람과, 그녀들에게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을 쳐다보던 세 다프네들이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시젠을 돌아보았다. 


 스케치북을 꼭 쥔 채로 에키드나와 티타니아에게 안겨있는 그녀의 얼굴에도 선명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회의가 있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는 동안 라비아타와 에바는 레모네이드와 에데를 찾아가서 혹시라도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바이오로이드가 없는지를 물어보는 한편으로 닥터와 함께 새로운 장비들과 AGS를 설계하고, 이터니티 및 새로운 닥터들과 포츈들, 항해용 바이오로이드들의 제작에 들어가면서 티타니아와 아자젤에게 로자 아줄을 컨트롤하는 모듈을 이식, 이들이 로자 아줄을 다루는 연습을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라비아타 그녀 자신도 로자 아줄을 사용하면서 싸우는 연습을 했다. 블랙 리리스만큼 잘 다루지는 못했지만 그녀도 로자 아줄의 성능 테스트를 해본 경험이 있었고, 수십 년동안 철충을 상대로 싸우면서 로자 아줄을 사용해본 경험도 있었기에 처음 로자 아줄을 다루는 티타니아나 아자젤, 베로니카보다는 훨씬 능숙했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사용하는 것보다는 블랙 리리스가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판단 때문에 굳이 그녀가 로자 아줄을 만들어서 쓰지는 않았지만, 블랙 리리스를 일행에 편입시킨다는 선택지가 봉인된 지금은 한 명이라도 더 로자 아줄을 다루는 편이 일행의 전력 측면에서든, 전술 및 전략적인 측면에서든 훨씬 나을 것이다. 근접전을 주로 하는 라비아타에게 로자 아줄의 방어막이 제공해주는 방어력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훈련실에서 로자 아줄이 만들어낸 보호막으로 집중 포화를 받아내면서 달려들어 트롤스버드를 휘둘러대면서 연습 및 훈련을 하는 라비아타의 모습을 본 바이오로이드들은 하나같이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라비아타 하나보다는 차라리 블랙 리리스 셋이 훨씬 가성비가 좋다면서 그녀의 능력을 깎아내리던 에바조차도 김지석이가 라비아타에게 로자 아줄을 들려서 블랙 리버 본사나 PECS 본사로 보냈다면 못해도 앙헬이나 오메가 늙은이 둘 중 하나의 모가지는 딸 수 있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고, 개인 훈련과 연습까지 하고서는 잔뜩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울 때마다 라비아타의 머릿속에는 지난번 회의 때 말하지 못한 고민이 맴돌았다. 


 인류가 지표면에서 사라진 날 이후 수십 년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라비아타의 곁에는 그녀와 가장 닮은 자매들인 콘스탄챠들이 있었다. 비록 라비아타만큼 신체적으로 강인하지도 않았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비교해서 특출나게 뛰어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콘스탄챠가 한 명이라도 그녀의 곁에 있는 것과 한 명도 곁에 없는 것에는 실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가 정신이 없거나 바빠서 놓치는 것들은 콘스탄챠가 챙겼고, 라비아타가 함께 하는 자매들을 신경쓰지 못할 때마다 그녀 대신에 자매들을 챙겨주는 것도 콘스탄챠였다. 콘스탄챠들에게 무언가 일을 맡기면 완벽하게 해내지는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맡긴 일을 수행했다. 충분히 뛰어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비전투원으로서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들 중에서 콘스탄챠보다 나은 이는 많지 않았다. 

 

 문제는 제작에 들어간 이터니티가 바로 그 콘스탄챠보다 거의 대부분의 능력에서 뛰어난 바이오로이드라는 점이었고, 더 큰 문제는 시젠이 콘스탄챠들을 꺼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앨리스들과 티타니아, 포이들이 콘스탄챠들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사령관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시젠이 라비아타와 티타니아 다음으로 좋아하는 바이오로이드는 콘스탄챠와 레아였고, 콘스탄챠들과 레아 또한 시젠과 매우 가깝게 지냈었다. 지금 시젠을 돌봐주는 앨리스들과 포이들도, 그 이외의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콘스탄챠들이나 레아보다 시젠과 가깝지는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콘스탄챠들과 레아가 자신에게 적으로 돌아섰음을 확신했을 때 시젠이 느낀 감정이 어땠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으면서도, 감히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원래도 콘스탄챠들이 자신들에게 언니라는 점에 대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앨리스들은 그 일로 인해서 콘스탄챠들을 매우 싫어하게 되었고, 이는 티타니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포이들 또한 블랙 리리스와 자매들로부터 버림받은 자신들의 입장과 모든 바이오로이드들로부터 경멸받게 된 시젠의 입장을 겹쳐보면서 콘스탄챠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콘스탄챠들로 인해서 크게 상처받은 시젠과 콘스탄챠들을 매우 싫어하는 자매들 앞에서 그녀들을 생산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오늘도 착잡한 심정으로 잠자리에 든 라비아타였다. 


 며칠동안 눈을 감고 정신을 잃듯 잠에 빠져들었다가 일어날 시간이 되면 일어나는 그녀였지만, 오늘 밤은 그러지 못했다. 

 

 그날 밤의 꿈 속에서 그녀는 오르카 호의 저항군을 이끄는 통령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시젠도 없고, 티타니아도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인류를 재건하고 철충을 몰아내는 데에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이자 창조주 중 하나였던 아미나 존스는 라비아타에게 반드시 철충들을 몰아내고 인류를 재건할 것을 당부하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고 라비아타는 오직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는 데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날, 콘스탄챠와 그리폰이 인간을 오르카로 데려왔다. 


 외모도 떨어지고, 별다른 능력도 없을 뿐더러 바이오로이드의 마음을 끄는 매력조차 없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그저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최대한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인데도, 인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전황에 실망하고, 철충에게 승리해야 한다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었던 그녀와 주변 바이오로이드들은 그의 따뜻함을 나약함과 소심함으로 여기고 멸시했다. 


 그러다가 두 번째 인간이 나타났다. 


첫 번째 인간에 비하면 훨씬 더 냉철했고, 외모도 지휘 능력도, 판단력도, 거의 모든 측면에서 첫 번째 인간보다 우수했다. 오직 모자란 것이 있다면 그보다 덜 인간적이라는 것뿐. 그러나 최소한 냉혈한이나 바이오로이드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인간은 아니었기에, 그녀를 비롯한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첫 번째 인간이 아니라 두 번째 인간을 지도자이자 자신들이 충성해야 할 주인으로 선택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첫 번째 인간은 잊혀지고, 버려졌다.


 바이오로이드로서 해서는 안 될,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할 수도 없어야 할 선택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인지 그녀들은 그렇게 했다.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저항군은 다시금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두 번째 주인의 능력으로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상황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자신도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압박으로 변해가는, 언제 실망으로 변할 지 모르는 주변의 기대.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견디지 못한 두 번째 인간은 점점 주변에 냉담하게 변해갔고, 점점 더 냉혹하게 변해갔다. 


 타락과 몰락. 그 끝은 자포자기였다.


 그리고 오르카 호와 저항군은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두 번째 주인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 파멸하고 말았다. 


 버려진 첫 번째 인간은 자신들을 버린 바이오로이드들을 증오하고 경멸했다. 


 오르카 호에서 쫓겨난 그는 다른 바이오로이드 세력에게 구출되었고, 자신을 주인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제법 큰 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버려진 인간을 주인으로 맞이한 이들은 자신의 주인이 무능하건, 어떻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들의 주인이라는 것이며 그가 할 수 없는 일들은 그녀들이 하면 그만이었다. 한때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베풀어졌던 그의 친절과 온화함은 그를 주인으로 맞이한 바이오로이드들에게 향했다.


  버려진 인간의 분노와 증오는 두 번째 주인을 잃고, 전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에게 향했다.


 만일 두 번째 인간이 가장 의욕적이었을 때의 오르카와 첫 번째 인간이 이끄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싸웠다면 승리는 오르카 바이오로이드들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끌어줄 인간이 사라지고,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고, 희망도 잃어버리고 사기도 장비도 박살난 오르카 바이오로이드들은 주인의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바이오로이드들과 버림받은 데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예전의 위용은 온데간데 없이 빈껍데기가 된 오르카 호와, 그에 남아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은 모두 쓰레기장에 처박혔고,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어떤 이유로든 그녀들이 죽으면 옛 주인과 그 휘하의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녀들을 다시 되살려내서 다시 쓰레기장에 처박기를 반복했다.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형벌의 굴레 속에서 바이오로이드들은 라비아타와 자신들의 지휘관들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당신들의 선택으로 인해서 이리 되었노라고. 

 

 한때는 최강의 바이오로이드이자 저항군의 지도자로서 앞장섰던 그녀는 제대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한때 최고의 바이오로이드로서 모두의 주목을 받았던 그녀의 유려하고, 강인했던 신체는 비대하고, 모욕적인 낙서가 가득한 비계덩어리가 되었다. 낮에는 일부러 그녀를 찾아온 옛 주인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두들겨 맞고, 밤에는 한때 그녀를 믿었던 이들의 분풀이와 모욕을 받은 그녀는 더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지 않은 메마른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꿈 속에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그 순간, 라비아타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마치 그녀가 잠이 든 사이에 평행세계나 그 비슷한 무언가로 다녀온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너무나 생생하면서도 끔찍한 꿈이었다. 

 

 수십 년에 걸친 부귀와 영화가 하룻밤의 꿈이었다던 옛날 이야기를 직접 겪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지 옛날 이야기와는 반대로 끔찍한 악몽이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주변을 둘러본 라비아타가 그녀의 아랫배에 낙인이 찍혀있지는 않은지, 조롱의 글귀들이 적혀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가 문득 시젠을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라도 그녀가 잠든 사이에 시젠이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혹시라도 그녀가 미쳐서 시젠을 버리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트롤스버드와 제네레이터, 로자 아줄을 서둘러 챙긴 라비아타가 방을 나섰다. 먼저 일어나 있던 바닐라-60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자, 대충 인사를 받고 지나가려던 라비아타가 발걸음을 돌렸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세수도 안 하고, 인사도 대충 받고 어디론가 달려가려던 큰언니가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더니 갑작스럽게 와락 끌어안자 바닐라-60이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어, 언니?"


 "......고마워, 바닐라. 나하고 함께해줘서......."


 떨리는 라비아타의 목소리를 들은 바닐라-60이 평정을 되찾으면서 라비아타를 마주 끌어안았다. 


 최근에 이런 모습을 라비아타가 보인 적이 없어서 여전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아침에 세수도 안 하고 어디론가 달려가다가 이러는 것을 보니 뭔가 제대로 악몽을 꾼 모양이다. 


 살다살다 인간 인간 노래를 부르던 언니가 그렇게 힘들게 찾아낸 인간 주인을 섬기는 대신에 어디선가 짠 하고 나타난 꼬마 도마뱀을 주인으로 삼는 모습을 보더니, 이젠 큰언니를 달래주는 일도 생긴다고 생각한 바닐라-60이 물었다. 


 "나쁜 꿈이라도 꾸신 건가요?"


 ".......그래. 정말로 나쁜 꿈을."


 그냥 단순히 무서운 꿈을 꾼 정도가 아닌 모양이다. 이 큰언니가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 정도라면 도대체 어떤 꿈일지 바닐라-60이 상상하려다가 포기했다. 쉽게 상상이 가지도 않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비아타가 무서워할 정도의 꿈이라면 그녀가 상상해서 좋을 게 없었다. 바닐라-60이 라비아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자 라비아타도 그녀를 놓아주었다.


 "일단은 세수라도 하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시는 게 어떠신가요? 언니 주무시는 동안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그래, 그래야겠네."


 그제서야 자신이 세수도 안 했다는 것을 떠올린 라비아타가 길게 한숨을 쉬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바닐라-60이 그녀와 나란히 걸으면서 누가 보면 아쿠아팰리스의 지도자들이 일행을 잡으러 군대라도 보낸 줄 알겠다면서 가볍게 타박했다. 



 그 날 아침 식사 시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시젠이 할 말이 있다고 선언했다. 


 에키드나가 만들어낸 금속 뱀 위에 올라타서는 스케치북에다 [할마리 이써요]라고 적어서 번쩍 들어보인 그녀의 모습을 본 바이오로이드들이 모두 하던 말과 일들을 멈추고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방 안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긴장한 것인지 아니면 이야기는 꺼냈지만 쉽게 그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지 머뭇거리던 시젠이 뭔가를 스케치북에 적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별로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글씨체에다 틀린 문법으로 적은 글을 방 안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읽은 순간, 마치 방 안의 모든 것들이 얼어붙은 것 같은 분위기가 맴돌았다. 


 -레아 언니아고 콘스탄차 언니 만드러줄 수 이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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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리데와 시젠이 만일 서로의 라비아타를 만난다면:


엘프리데: 역시 라비아타 고모야!

시젠네 앨리스들: 당연하지, 누구 큰 언니인데?

시젠네 라비아타: (난처한 듯이)아하하하.......

에바, 티타니아: (대충 못마땅해하는 표정)


엘프리데네 라비아타: 우린 지켜야 할 사람을 버린 대역죄인이란다......

시젠: 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