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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첫 일과는 어제보다 조금 빨랐다. 

눈꺼풀 너머를 간지럽히는 아침의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에,

레아가 대략 두 개의 물건을 들고 내 방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베로니아 레아 [잠시 실례할게요.]


그녀는 드디어 무언가를 얻어냈다는 성취감과, 그럼에도 감출 수 없는 당혹감이 뒤섞인 얼굴로 들고 온 물건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사령관 [뭔가 알아낸 거야?]

오베로니아 레아 [네...일단은요.]


대답을 애매하게 흐리는 레아에게 더 캐묻기 전에, 우선 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두 개의 물건에 먼저 시선을 돌렸다. 


하나는 대충 알 만 하다. 팔뚝 만 한 길이와 두께로 둘둘 말린 종이. 아마도 안에 쓰여진 내용이 중요한 거겠지.


다른 하나도 일단 보이는 건 비슷하다. 둘둘 말린 게 종이가 아니라 천이라는 점만 빼면. 안에는 좀 더 부피가 있는 물건을 싸고 있는 모양이다.


사령관 [이건 뭐야?]


일단은 종이부터.


오베로니아 제로 [이 숲의 지도예요.]


책상 위에 죽 펼쳐진 건 그 말대로 지도였다. 그보다, 여기도 지도란 게 있었구나.


사령관 [이 쪽은 대충 알 것 같네.]


세밀하면서도, 가급적이면 어지럽지 않은 그림으로 이 세계의 모습이 표현된 지도의 한쪽에는 넓게 펼쳐진 숲과 곳곳에 자리잡은 호수, 그리고 가운데에 자리잡은 예쁜 성이 묘사되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곳이겠지.


사령관 [그럼, 이 쪽은?]


그 반대편에 묘사된 곳은, 지도 상에서는 조금 짐작하기 어려웠다. 숲 쪽에서는 보기 힘든 등고선이 빽빽하게 그려진 걸 보면 산 같긴 한데.


오베로니아 레아 [...몰라요.]

사령관 [엥?]

오베로니아 레아 [전 몰라요, 이런 곳. 지금껏 숲을 다스리면서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요!]

사령관 [하지만 이 지도는...]

오베로니아 레아 [네. '이 숲'의 지도였죠. 하지만, 어느 새인가 모든 지도에 알지도 못했던 지역이 새로 그려졌어요. 이건...저로서도 설명할 방법이 전혀 없어요.]


레아의 얼굴에 서려 있던 당혹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던 듯 하다. 이 숲을 다스리는 여왕으로서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그녀조차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땅.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건 단서라고 할 수 있겠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답이 무엇이든, 전부 거기에서 찾게 될 테니까.


사령관 [그럼, 조만간 탐험해 봐야겠네.]

오베로니아 레아 [네...부탁드려요.]


이어서 다음 단서. 상당히 위험하거나 섬세한 물건인지, 그녀는 물체를 싸고 있는 천을 주의에 주의를 거듭하며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사령관 [이건-]


그 안에서 드러난 건 단서로써는 앞의 지도보다 더욱 직접적인 물건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와서 목격한 것 중 가장 이질적인 목적을 가진 도구이기도 하고.


오베로니아 레아 [검...이겠지요?]


아마도 그렇겠지만, 단언할 수는 없다. 전체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긴 손잡이와 한 쪽에만 세워진 날. 거기다 가운데에 용도를 알 수 없이 구부러진 둥근 부분. 분명 칼 이외에 용도를 설명할 수 없는 형태이지만, 확실히 기묘하다. 무언가 특수한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칼이거나 아니면-


사령관 [다른 파츠가 있는 건가?]

오베로니아 레아 [모르겠어요. 제가 발견한 것 이것 뿐이었어요.]


뭐 지금은 알 수 없나. 아무튼 지금으로선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 세계에서 탐험된 적 없는 새로운 지역, 티타니아를 해쳤을지도 모를 흉기와 그 사용자가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 오늘 낮 동안 해야 할 일은 명백하겠지.


가 보자. 어쩌면, 나에게도 아직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Side story <머나먼 요정들의 숲>




사령관 [저기 말이야...]


그렇게 해서 아침 식사 이후는 지도에서 새로 발견된 산악 지형을 탐험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곳에 갑옷 같은 것은 없지만 조경 작업을 할 때 쓰는 가장 튼튼한 옷을 빌려 입고, 무기로는 아까의 기묘한 칼날을 등 뒤에 매었다. 대량의 화기가 등장한다면 모를까, 이 정도면 웬만한 적 상대로도 자신이 있다. 


헌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드리아드 [주인님도 참. 저희를 너무 어린애 취급 하신다니까요?]


그래. 드리아드는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녀가 들고 온 곡식 수확용 대형 낫은 척 봐도 위력이 어마어마해 보이고, 솔직히 지금도 내 머리 근처에서 어른어른거리는 칼날이 조금 섬뜩하다.


오베로니아 레아 [저희의 도움 없이 이 숲 바깥으로 나가실 순 있겠어요?]


레아도- 약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침 '요정'이란 것도 있는 세상이니, 마법 정도는 쓸 수 있겠지. 


다 좋다. 부상당한 티타니아와 어린 아쿠아는 집을 보는 것으로 했다. 그렇게 되면 한 명?...한 명이 남는데- 


사령관 [난 딱히 전쟁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고.]

다프네 [...]


마지막 동행자는 묵묵히, 하지만 완강하게 나의 뒤를 지키며 따라 온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다프네는 바이오로이드일 때에도 전투력이 특출난 아이는 아니었다. 물론 어디서 싸움이 있을지 모를 상황에서 치료에 능숙한 인원이 있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녀 자신이 공격당하지 않을 거라곤 보장할 수 없다. 


오베로니아 레아 [분명 걱정되는 거예요, 이 아이도.]


그 마음은 백번 이해한다만...뭐 어쩔 수 없나. 이렇게 된 이상 전원 내가 확실하게 지킨다는 각오로 갈 수밖에. 용사 파티에 전사와 마법사, 치유사. 안정성이 높은 파티네. 이거 왠지 판타지 느낌이 물씬 나는 걸?


레아의 안내를 따라 숲 속에서도 발길이 닿지 않아 거칠게 남겨진 부분으로 점점 나아간다. 아마 옛날에는 이 너머가 정말로 세상의 끝이었겠지. 현실에서 스러진 이들을 품기 위한 이 요정향은 영원하더라도 무한한 곳은 아니었을 테니까.


오베로니아 레아 [이 너머로는...]

사령관 [...처음 가 보는 곳이라 이거지?]


드디어 숲의 끝부분에 다다르고, 마치 옛 세상의 끝을 알리는 것처럼 기묘한 안개가 눈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지도에 따르면, 이 너머에 확실히 존재한다. 미지와 공포로 가득한 새로운 땅이.


사령관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말해 둘게.]


위험할 것이 분명한 이번 모험에 참여해 준 그녀들의 각오는 인정한다. 능력을 얕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말은 하고서 넘어가야만 한다.


사령관 [이건 정찰 작전이야. 전투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모두 다 함께 돌아갈 거야. 특히-]


굳은 각오와 마음이, 반대로 그녀들의 발을 묶을지도 모르니까.


사령관 [혼자서 희생하겠단 생각은 절대 하지 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알겠어?]


오베로니아 레아 [예, 알겠어요.]

드리아드 [명심할게요.]

다프네 [물론이에요.]


다행히 어느 누구도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좋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사령관으로서 나의 주어진 책무를 다하자.


반드시, 모두와 함께 돌아가리라.


사령관 [...]


조심스럽게 안개의 장막으로 손을 뻗었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건만, 안개는 마치 형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감각과 함께 내 손을 빨아들인다. 위험한 느낌은 아니다. 용기를 내어, 그 너머로 크게 발을 디뎠다. 그리고-


사령관 [추, 추워?!]


커튼 뒤처럼 넘어 온 안개의 뒤편은 여러 가지 의미로 방금의 장소와는 전혀 달랐다.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우선 온 몸에 사무치는 싸늘한 냉기. 옷가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온화한 숲과는 달리 이곳은 정말로 얼어붙어 버릴 만큼 추웠다.


드리아드 [으읏!]


그녀들도 익숙할 리가 없을 추위에 잔뜩 몸을 움츠렸다. 그 와중에 무언가 준비되어 있던 것은 맏언니인 레아.


오베로니아 레아 [모두, 잠시 가만히 계세요.]


예상일 뿐이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두 손을 모으더니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었다. 불그스름한 빛이 일행의 몸을 감싸더니, 이윽고 몸에 다시 온기가 느껴졌다.


사령관 [대단한데? 고마워.]

오베로니아 레아 [천만에요. 이제 앞으로 나아가죠.]


추위가 일단 해결되고 나니 비로소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올 때 느꼈던 추위에 걸맞게 이곳은 산. 그 중에서도 눈부시도록 하얀 얼음의 결정에 뒤덮인 설산이었다. 


드리아드 [이건...]

사령관 [응. 확실히 쓸쓸하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온통 하얀 빛으로 싸인 산의 모습은 확실히 절경이었지만, 그 정상을 향해 걷는 동안 쓸쓸하다, 혹은 적막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눈과, 한때 어떤 구조물을 이루었을 잔해 뿐. 그 외의 어떤 나무도, 짐승도, 생활의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다.


오베로니아 레아 [주인님, 저기 좀 보세요.]


덩달아 말이 없어져 묵묵히 등산을 하던 와중에 레아가 우리의 뒤를 가리켰다.


다프네 [여기선 보이는군요...]


여태껏 우리가 있던 숲에서는 이 산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고독하고 차가운 산 위에서는 그 숲이 아주 선명히, 그리고 가까이 내려다 보이고 있었다. 만약 이 설산에 주민이 있다면-


사령관 [-분명 부러워하겠지.]


어째선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그저 살아가면서, 저 행복한 땅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면 그 몸이 강철보다도 단단하고, 마음이 얼음보다도 견고하더라도 언젠가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균열이 생기고 말겠지.


드리아드 [여기, 이것 좀 보세요.]


주변의 잔해를 조사하던 드리아드가 나를 불렀다. 조금 긴장한 목소리의 그녀는 언뜻 쌓여 있는 눈 더미로밖에 보이지 않는 물건을 나에게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제법 커다란 무언가가 눈에 덮여 있는 것이었고, 조심스레 눈을 걷어내자 그 아래에서 깊은 잠에 빠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리아드 [그건...]

사령관 [지금은 위험하지 않아. 그래도 조심해.]


AGS. 바이오로이드들 만큼이나 익숙한 형체의 강철 병사가 얼음 아래에서 영영 오지 않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얼어붙은 꼴 하며 동작부에 끼어 들어간 흙 따위를 보면 이것이 금방 다시 움직일 것 같지는 않다. 허나 기계라는 건 결정적으로 파괴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움직이게 마련이니, 긴장은 하고 있는 편이 낫겠지.


사령관 [여기에 뭔가가 있어...]


일대의 잔해에서 조금 더 눈을 걷어 내 보았다. 파편의 양을 보면 작은 건물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차지하는 면적은 상당히 좁고 구조물의 흔적도 바닥의 기둥 정도가 다였다. 보통 이런 형태로 지어지는 건물이라면...


오베로니아 레아 [일종의 탑일까요?]

사령관 [감시 초소겠지.]


마침 이 근처는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지형이고, 지반도 견고해 보인다. 여기라면 주변 설원에서 움직이는 웬만한 것은 빠짐없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곳으로 들어오려는 이방인이나, 


반대로 여기서 나가려는 죄수조차도.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듯,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우선 들고 온 수첩에 이 지점을 표시했다. 과거 이 지점에 출입을 관리하는 군사 지점이 있었고, 지금은 완전히 파괴되어 기능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생각이 가시기도 전에, 밋밋할 것만 같은 설원에서 새로운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프네 [이건-좀 더 직접적이네요.]

사령관 [응. 여기서 뭐가 있었는지 짐작이 가네.]


작은 눈보라를 몰고 다니는 거센 바람에, 이곳을 덮은 눈은 그리 두껍게 쌓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드러난 풍경은 아마 누가 오더라도 같은 답을 떠올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흉측하게도, 어떤 것은 겉면이 통째로 녹아내려 있었다. 또 다른 것은 회로 째로 구워져 안까지 새까맣게 타버렸고, 허리부터 싹둑 잘린 것, 난도질되어 완전히 해체 상태가 된 것 등 형태는 다양했지만 그 모두가 아까 보았던 것과 비슷한 AGS들이었다. 이곳 전체가 어떤 커다란 싸움에서 파괴된 금속 병사들의 무덤인 것이다. 


오베로니아 레아 [...누구일까요?]

다프네 [적어도, 한 명은 아니겠지요.]


그 말대로다. 강한 극성의 용액 분사와 고에너지 방출, 단면에서 빛이 날 정도로 예리한 절단기를 동시에 다룰 만한 존재는 아마도 없다. 허나 내가 다프네의 추측을 확신하는 건 단지 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모두 내가 아는 것이다. 이 모든 흔적은 다름아닌 '그녀들'의 것이다. 지금껏 충직하게 나의 곁을 지키며, 심지어는 본래 무기조차도 아닌 것으로 우직하게 적들을 쓰러뜨려 오던 '요정들'의 것이다.


그런 걸, 내가 잊어버릴 리가 없지 않은가.


드리아드 [네. 그런 것 같아요...]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드리아드가 무기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말이 단순한 맞장구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우리는 각자의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고요한 설원. 마치 이를 갈듯 소름 끼치는 소음을 주위에 흩뿌리며, 그들은 기척을 숨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드리아드 [저건...이제는 위험한 거지요?]

사령관 [어. 그래도 이렇게 금방일 줄은 몰랐는데.]


지금 우리 발 밑 잔해의 동료로 보이는 AGS들이 수십 체. 어느 쪽이든 이쪽에 우호적으로 다가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전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뻔하다. 단지, 지금 여기서 똑같은 한 겹의 과거가 눈밭 위에 눈이 내려앉듯 반복되려 하고 있을 뿐이다.


사령관 [모두-]


그리고, 우리 역시 익숙하기 그지없는 '업무'를 시작한다.


사령관 [전투 개시!]










드리아드 [히얏!]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그녀 앞을 막아선 적이 두 동강이 나 바닥을 뒹군다. 본래 전투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낫 자체의 질량과 절삭력은 무시무시해서, 금속으로 된 몸체가 무 자르듯 베어진다.


다프네 [...!]


다프네가 재빠른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날개를 쓰기 때문일까, 전장의 사이사이를 물 흐르듯 날아다니며 미세한 빛의 가시들을 적에게 뿌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시를 맞은 적들은 점차 몸체에 금이 가더니 스치는 공격에도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다프네 [아앗!]


열심히 싸우던 다프네가 돌연 공중에서 중심을 잃었다. 그녀의 날개에 엉겨 붙은 흰색 액체. 레기온 계열의 철충이 쓰는 점착액이다!


사령관 [위험해!]


가까스로 늦지 않고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것 같다.


다프네 [고마워요...]

사령관 [괜찮아? 더 싸울 수 있겠어?]

다프네 [물론이에요!]


마음만 같아선 우리 뒤에 숨으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건 힘들게 따라와 준 다프네에게 큰 실례겠지.


사령관 [그럼 엄호를 부탁해. 놈들이 한 데 뭉치지 못하게 해 줘!]

다프네 [네!]


다프네가 가시를 흩뿌리며 적의 진격을 늦추는 사이 나도 내 몫을 준비한다. 예의 '외날검'은 확실히 손에 익지는 않지만, 다루지 못할 것은 없다. 예전에 라비아타를 졸라 대검을 다루는 훈련을 할 때에 익혀 둔 것이 있다. 설마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그걸 여기서 써먹게 될 줄이야.


사령관 [으오오-]


오른손은 고정, 왼손 약지와 소지에 힘을 넣고 날을 던지듯 휘두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뻗어 나간 칼날은 이쪽을 향해 기관단총을 발사하려는 로봇의 팔을 쉽게 절단해 낸다.


사령관 [생각보다 쓸 만 한데?]


라비아타의 대검과 비교하면 질량은 부족하지만, 절삭력은 월등하다. 마치 거대한 면도칼을 휘두르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느낌. 가벼운 무게를 잘 살려 테크니컬하게 활용한다면 무시무시한 위력을 낼 수도 있겠지. 예를 들면, 칼 한 자루를 더 사용한다던가-


드리아드 [위험해요!]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거대한 로봇이 순식간에 눈 앞으로 육박해 왔다. 외형 상으로는 토미 워커인 녀석은 이상하게도 철충의 하베스터와 같은 공격을 해 온다. 지면이 통째로 울리는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 방패를 고정하는 로봇 팔을 잘라낸다. 무기를 겸하는 방패를 잃은 로봇은 동체를 무기 삼아 육탄 돌격을 해 오지만, 스피드든 정밀성이든 보잘 것 없는 공격은 손쉽게 회피해 반격 당할 뿐이다.


사령관 [어디 보자...]


제법 땀을 흘린 것 같지만, 적들은 그다지 줄어든 기미가 없다. 지금껏 나와 드리아드, 다프네가 해치운 적들은 기껏해야 열 체가 조금 넘는 정도. 생전에 봐온 싸움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그래도 냉병기와 소화기 정도의 무기로 여기까지 싸운 건 칭찬해 줬으면 한다. 게다가


이 정도면 이미 충분하다.


오베로니아 레아 [하아앗-]


우리의 마법사, 아니 요정 여왕이 마침내 주문 영창을 마치고 하늘로 떠올랐다. 머리 위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무거운 먹구름이 굉음을 내며 소용돌이친다.


사령관 [모두 이쪽으로!]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걸 느끼며, 드리아드와 다프네를 데리고 유일한 안전지대. 레아의 발 아래로 피신했다. 적들도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단 걸 알아채고 대응을 해 보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


귓속의 내용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엄청난 소리와 불빛. 그리고 가루처럼 빛을 뿌리며 흩어지는 플라즈마의 비릿한 냄새. 세상이 통째로 변해도 레아의 상징과도 같은 이 필살기만은 변하지 않는다.


오베로니아 레아 [...]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던 레아가 천천히 다시 지면으로 내려선다.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는 없다. 모두, 끝났다. 불과 1초도 되지 않는 번개 폭풍으로 적들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불타 쓰러졌다.


오베로니아 레아 [괜찮아요? 많이 놀랐지요?]

사령관 [어. 그나저나 대단하네.]

드리아드 [우와...]

다프네 [...]


나야 몇 번이나, 더 위험한 상황에서도 본 것이라 데면데면하지만, 나머지 둘은 꽤 놀란 모양이다. 본래 이 요정향에서는 보기 힘든 전투의 순간이기도 하고, 이런 대량 살상의 장면은 익숙할 리가 없으니까.


순간적인 고열로 눈이고 얼음이고 다 녹아버린 일대는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한층 더 살풍경해져 있었다. 빠짐없이 검게 구워진 로봇들이 영원한 정지에 빠져 있는 모습은 꼭 광기에 빠진 예술가가 만들어낸 조형 공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령관 [그럼...이동할까?]


아무튼 여기에 더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인 것도 아니고. 

그보다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째서 여기에 AGS들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거기다, 그 특징도 무언가 이상하다. 외형 상으로는 멀쩡한 램파트 모델이 철충 레기온의 점착탄을 쏜다던가, 감염되지 않은 토미 워커가 하베스터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던가. 무언가 맞는 듯 맞지 않는 듯, 뒤죽박죽이 된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다시 이동하던중에, 이번에는 다프네가 일행을 멈춰세웠다.


사령관 [왜 그래?]

다프네 [뭔가가 있어요.]


그녀는 우리가 걷고 있던 진행 방향의 조금 앞쪽을 가리켰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새하얀 눈 속에서 무언가 거무스름한 것이 살짝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다프네 [먼저 보고 올게요.]

사령관 [조심해!]


말릴 새도 없이 다프네가 훌쩍 날아올라 물체가 보인 지점으로 향했다. 방금 전 약간 실수를 한 탓일까, 스스로 조바심을 내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다프네 [이것도 잔해인 것 같네요...괜히 신경을 쓰게 해서 죄송해요.]


조심스레 지점을 수색해 본 다프네가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위험한 상황이 되지 않아 천만 다행이다. 그래도 일단은 주의를 줘야-


오베로니아 레아 [아앗!]


그 때였다. 이 쪽을 바라보는 다프네의 등 뒤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다프네 [꺄아악!!]

사령관 [다프네!]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그녀는 그것들과 뒤엉켜 바닥에 쓰러졌다. 튀어나온 적은 두 개의 펍 헤드 모델...젠장, 매복이었나!


다프네는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애초부터 구속, 제압이 주 업무인 그들은 곧바로 포승용 체인으로 그녀의 몸을 칭칭 감았다.


다프네 [주인님...저는...]

사령관 [말 하지 마! 금방 구해 줄게!]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았지만, 다프네는 그대로 구속되어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뒤엉킨 상태에서는 나와 드리아드는 손을 쓸 수 없다. 힘은 그렇다 쳐도 정밀성이 문제다. 그리고 레아도...


오베로니아 레아 [여기는 제게 맡기세요.]

사령관 [에? 할 수 있는 거야?]


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두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오베로니아 레아 [다프네.]

다프네 [언...니]


레아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에서 아주 조금, 엄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오베로니아 레아 [이번엔 경솔하게 행동한 네 잘못이야. 그러니까, 아파도 조금 참도록 해.]

다프네 [네에...]


울먹거리는 표정의 다프네에게 레아는 좀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작지만, 여전히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전류를 쏘아 보냈다.


다프네 [으으으으윽!]


고통을 참는 다프네의 비명이 잠시, 이윽고 그녀의 몸을 구속하던 펍 헤드가 동체에서 연기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전기로 회로 부분만을 태운 모양이다.


사령관 [다프네, 괜찮아?]

다프네 [저...]


치명적이진 않아도 어느 정도 데미지는 있었겠지. 그녀는 아직 바닥에 주저앉아 저리는 몸을 부여잡고 있었다.


다프네 [전...두 번이나...]


일어나지 못하는 원인은 그것만이 아닌 모양이다. 두 번이나 자신의 실수로 위험에 빠지고, 일행의 발목을 잡았다는 자책감.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 것이다.


사령관 [확실히 그렇네.]

드리아드 [주인님...!]

다프네 [...]


마음이 아프지만, 여기선 어설프게 위로를 하는 쪽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아직 우리는 적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구역 한 가운데에 와 있고, 잠깐이나마 복귀한 사령관으로서 다소의 채찍질은 불가피하다.


사령관 [돌아가면 따끔하게 혼내 줄 테니까. 오늘은 더 실수하지 마. 알겠지?]

다프네[...네.]


질책을 받은 다프네는 아직도 저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다시 일행 쪽으로 향했다. 비틀거리면서도, 똑바로 발을 딛고 서 다시 자세를 잡는다. 잔인하더라도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몸에 상처가 없더라도, 전장에서 마음이 꺾인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 하나는 나라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사령관 [그나저나 이상하네.]

오베로니아 레아 [뭐가 말인가요?]

사령관 [매복 말이야. 정말로 이게 끝인가?]

오베로니아 레아 [그러고 보니-]


아까의 기습에는 솔직히 놀랐다. 다프네는 손 쓸 도리도 없이 그 자리에서 제압되었고, 뒤에 숨겨진 후속 병력이라도 튀어나왔다면 우린 아마 꼼짝 없이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는 건...


드리아드 [주인님...저거...] 


드리아드가 파래진 얼굴로 쓰러진 펍헤드의 잔해를 가리켰다. 분명 레아의 전격으로 회로가 타 쓰러졌던 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움직이는 건 아니지. 하지만, 분명한 가동음을 내며 녀석들의 뭔가가 가동이 되는 것이었다. 이건-


사령관 [모두 피해!]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는 즉시 나는 그녀들에게 외쳤다. 시간은 많지 않다. 근처에 있는 적당한 바위 그늘. 충격을 막아 줄 만한 그 곳에 나는 모두를 데리고 몸을 피했다. 잠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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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두 개의 굉음이 일대를 크게 뒤흔들었다. 엄폐물 뒤에 있음에도 머리 속까지 흔들리는 충격에 서 있는 것도 힘들 만큼 어지러웠다.


사령관 [...끝났나?]


충격이 끝나고, 겨우 바위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들도 다친 곳은 없어 보이지만 아무래도 가까이서 터진 탓인지 아직도 귀가 먹먹하다.


드리아드 [으으-아직도 땅이 흔들리는 것만 같아요.]

사령관 [그러게, 나도-응?]


사고가 정지한다. 그리고


단서가 이어진다.


우리가 지금 있는 장소. 처했던 상황, 그 모든 것을 잇는 하나의 키워드


폭발.


이곳은 몇 년인지도 모를 눈들이 쌓인 설산의 한복판. 그리고 그 비탈길에서 일어난 무언가 어색한 매복과 그리고-


사령관 [도망쳐.]

오베로니아 레아 [...주인님?]

사령관 [빨리!]


발밑으로부터 느껴지는 진동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매복이라던가, 자폭 같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신경 써야만 할 것은 그 다음, 엄밀히는 그 폭발의 충격이 몰고 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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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로 날린 먼지와 수증기로 자욱한 저편. 더욱 자욱하고, 비교할 수도 없이 위험한 무언가가 멈출 수 없는 속도로 이쪽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저건, 달려서는 따돌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베로니아 레아 [주인님, 손을!]


공포로 굳어버리려는 내 손을 레아가 재빨리 붙잡고 날아오른다. 아, 확실히 그렇다. 원래도 그렇고 그녀들의 주 무대는 언제나 하늘이었다. 이거면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다프네 [으아아아-]

드리아드 [조금만 더 빨리!]


쏟아져 내리는 눈사태가 다리를 스치며 소름 끼치는 냉기를 빠르게 불어넣는다. 다프네와 드리아드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빠르게 벗어나지만, 나를 안고 있는 레아는 아무래도 조금 느리다.


다프네 [언니!]

오베로니아 레아 [! 알았어!]


레아가 다프네의 사인을 알아듣고는 날 안고 있던 양 팔을 풀고는 한 쪽 손으로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른 쪽 손은 다프네가. 총합 두 배가 된 추진력으로 우리들은 조금이나마 더 빨리 눈사태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령관 [되...된다! 멀어진다고!]


다리에 닿는 차가운 느낌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끼며 기쁨에 찬 탄성을 질렀다. 그렇게 점점 고도를 높여, 설산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던 순간-


오베로니아 레아 [아악!]

드리아드 [? 언니?!]


레아가 비명과 함께 급작스럽게 중심을 잃었다. 두 명이 이루던 편대의 균형이 급격히 무너지고, 이윽고 훨씬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다프네 [언니이이!!!]

드리아드 [주인님!]


시야가 회전하며 머리 위로 눈의 지옥이 난폭하게 덮쳐드는 것이 보였다. 혼란스러운 시야에 잠시 날개가 부서져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레아가 보였고,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눈과 바람의 무더기가 나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아픈지, 아니면 추운지도 미처 느끼지 못한 채, 나의 의식도 덩달아 어둠 속으로 휩쓸려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