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에키드나는 불만이 가득 담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에키드나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최근에 설계도를 입수하여 제작한 한 기의 AGS였다. 전고 3.5m, 전장 5.2m, 중량 72t의 위풍당당한 존재감은 해변 저편에서도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에키드나도 지지 않을 기세로 노려보았지만, 몸을 담고 있는 금속 뱀을 제외하면 1.7m라는 작은 신장은 감히 그녀로 하여금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그녀가 일개 AGS에 이토록 적개심을 품은 것은, 그 개체에 이름붙여진 칭호 때문이었다. 별별 이상한 날파리들이 여왕이라는 이름을 칭해도 다툼을 좋게 여기지 않는 사령관을 보아 넘어갔는데, 이젠 저런 쇳덩어리까지 여왕을 자칭하다니! 에키드나는 어이가 없어서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요즘은 개나 소나... 거미나... 여왕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가 보네?"


여왕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하지만, 여기서 분노를 쏟아내는 것은 여왕의 이름에 걸맞지 않는 품위 없는 짓일 것이다. 에키드나는 금속 뱀에 몸을 싣고 해변에 정박된 오르카 호로 향했다.



**



"어...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다고?"

"음... 아읍... 구러니까... 여앙이라는 이름을... 우물우물..."

"천천히 해도 좋으니까, 입에 있는 거 다 삼키고 말해."


사령관은 어딘가 잔뜩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에키드나가 함장실로 들어오자마자 곁에 선 아우로라에게 급히 눈짓했고, 짧은 시간임에도 나름 훌륭한 퀄리티의 크레프 수크레가 오래지 않아 여왕의 앞에 대령됐다. 공물을 마지못한 척 받아들인 에키드나는 볼이 빵빵해지도록 크레이프를 물고 입가에 온통 크림을 묻혀가며 만족스럽게 간식을 즐기고 있었다.


"...꿀꺽."

"다 먹었어?"

"그래. 그러니까 내가 하려던 말은..."

"아우로라, 냅킨 좀."

"어, 아! 여기!"


사령관이 에키드나의 입가를 닦아주느라 다시 한 번 말이 멈추었다. 에키드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사령관의 손길이 멈출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주었고, 냅킨을 다시 접어 아우로라에게 건네자 그제야 거칠 것 없이 말을 쏟아내었다.


"당신, 여왕이라는 칭호를 너무 쉽게 허락하는 것 아니야?"

"음... 딱히 내가 허락했다기보다는... 그냥 그 아이들의 이름이나 유래가 그런 건데?"

"그런 하찮은 이유로 함부로 쓸 수 있을 만큼 여왕은 쉬운 이름이 아니야."


에키드나의 머리칼이 곤두서며 엷은 정전기가 흘렀다. 순간, 함장실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며 에키드나를 중심으로 온 주의가 수렴되었다. 아우로라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출력에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며 뒷걸음질쳤고, 뒤에서 무심하게 자료를 정리하던 레오나도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시선을 향했다. 그녀가 내뿜는 공간을 압도하는 위압. 여왕의 존재감이었다.


사령관은 소름이 돋은 팔을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쓸어내렸다. 에키드나는 모두가 자신을 다시금 주목하게 만들어 대화의 주도권을 쥔 것에 만족해하곤,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부담스럽다면서 부정하겠지만... 누가 뭐라 하든 지금 이 세상의 왕은 당신이야. 그리고 그런 당신과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내가 아니면 누가 감히 여왕이라는 칭호를 쓸 수 있겠어? 당신도 자신의 무게감을 자각한다면, 옆에 대등하게 설 사람은 신중하게 골라야 할 거야. 나에게는 당신이, 그리고 왕에게는 여왕이 필요한 법이니까."


등골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 사령관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레오나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이건, 안 좋았다.


"그, 그래도... 너무 그런 것에 의미부여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레아가 요정 여왕이라고 해서, 진짜로 그만큼의 지위를 가진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잖아? 그리고 비슷한 이름의 아이들도 많이 합류했는데 왜 이제 와서인지... 싶기도 하고."

"그래. 지금까지는 몇몇 곁다리들이 여왕을 자처해도 관대하게 넘어갔었지. 허울 뿐인 이름만 가진 그들에 비해서, 나는 경쟁자들을 밟고 서서 능력으로 나를 증명해 냈으니까. 그래서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모두가 날 우러르는 것으로 알 수 있었거든. 하지만..."

"하지만?"


사령관의 얼굴이 살짝 갸우뚱했다. 에키드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격정에 사로잡혀서 쏘아붙이듯 말했다.


"오, 오냐오냐해주니까... 이젠 고철덩어리까지 내 이름을 넘보잖아!"


멍청하게 에키드나를 마주보던 사령관은, 곧 깨달았다. 아차! 그런 거였나? 에키드나의 울분 섞인 목소리는 계속 쏟아졌다.


"이젠 못 참아! 나 빼고 여왕이라는 이름을 쓰는 녀석들은 다 뺏어버리겠어! 눈감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이젠 AGS 따위랑 같은 이름을 공유해야 해?! 당신이 여왕은 나 뿐이라고 확실히 못박아두지 않으면... 내가 일일이 찾아가서 정정해주겠어... 일찍이 내가 경쟁자들을 배제했던 것처럼..."


에키드나의 강철 뱀이 위협적으로 쉭쉭거렸다. 사령관은 손을 내뻗어 에키드나를 진정시키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까지 화날 일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 나름대로는 중요한 자존심이 걸린 모양이었다. 적잖이 난처해진 사령관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아."


그리고, 어떤 착상에 사로잡혔다. 사령관을 오래 봐온 레오나는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느끼고 사령관을 멈추려 했다.


"사령관, 잠깐만-"

"오르카 여왕 대회를 시작한다!"


이번엔 에키드나의 표정이 멍청해질 차례였다.



**



"진심이신가요? 폐하..."

"응, 아르망! 도와줘서 고마워!"

"하아... 이건, 대체... 제 미천한 두뇌로는 폐하의 모든 뜻을 헤아릴 수 없겠지만, 부디 대책 없이 무작정 벌이신 것이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괜찮아. 내가 다 생각이 있어."


아르망은 자신 있는 사령관의 옆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분명 자신의 예지가 맞다면, 이 대회가 끝나고 폐하는... 거기까지 예측한 연산 모듈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앞에 붙여진 대진표를 올려다보았다.





"하아아..."


아르망의 한숨을 뒤로 하고, 대회의 막은 그렇게 오르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