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먹고사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 삶과 책임이 뒤바뀌는 순간 - 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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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샘. 대학교를 뛰쳐 나와서 막일을 해도, 내 방 안에서 먼지를 걷어내는 너는 아무래도 너무 어려. 네가 낡아빠져서 바스라질 때까지도 나는 뜬눈인 채 담배를 태운다. 약속이란 건 대개 그런 느낌이니까.


 약속보다도 더한 걸 네게 주겠다. 약속보다도 질척이는 걸 네게 주겠다. 그러니 내게 안겨. 부드럽게. 샘 안으로 들어가게 해줘.  



 삶에, 더없이 행복한 아침을 맞았다. 몇 개 못 들일 좁은 방 안에는 맹목적인 헌신도, 타인에게서 찾는 삶의 이유도 없었다. 언젠가 금세 변해버릴 역겨운 위선도 없었다. 인간도 기계도 없었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한 선택으로서, 서로를 선택한. 이런 세상에는 몇 없는 자유의지의 위상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나란히 누워있다. 인간 이상의 무언가와 인간 이하의 무언가. 나체로 끌어안았다.  


 창밖으로 고개만 뻐끔 내밀며 담배를 한 개비 꼬나물고는, 이미 중천까지 떠 버린 해를 보고 안심했다. 이렇게도 비참한 햇살이 또 있을까. 나는 도무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구나. 하고.


 맞은편 문턱 언저리에는 타고남은 연탄잿가루가 길거리를 희게 하고 있었다. 이미 거뭇해진 눈보다도 흰 색. 그렇게 몇 날동안 몇 번 해가 떴는지 그 숫자를 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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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닐라, 오늘은 좀 늦게 들어올 수도 있을 거 같으니까. 왠만하면 먼저 밥 먹고 있어. 일찍 자고.


 기다리는 건 자신 있는데요.


 그럼 빈말로라도 알겠다고 해줘. 너 밥 먹이려고 빨리 들어와야 되잖아.


 그래서 기다리는 건데요.


 꽤, 성가신 메이드네. 알겠어. 맛있는 거 사서 들어올게. 



 혼자서 외투를 입는 법을 까먹었는 지도 모르겠다. 밥상을 치우는 법을 까먹었는 지도 모르겠다. 먼지 쌓인 찬장을 바라보는 법을 까먹었는 지도 모르겠다. 구역질나는 어제를 곱씹는 법을 까먹었는 지도 모르겠다.



 다만, 외진 어둠이 남긴 흉터를 모질게 쓰다듬었다. 늙은 어부 하나 없는 유골로 넘실대는 바다, 의 섬. 그곳이 내가 온 곳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내가 돌아갈 곳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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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 왔는가. 하고 현장 책임자가 반겼다. 다행히도 나를 퍽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었다. 생에 굴곡이 꽤 있었던지, 눈가의 주름살과 정말 작은 오지랖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 사람대함이 내겐 썩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내 관물대로 가려던 그때였다. 나를 불러세우고는 긴밀히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일과 후에 천천히 하시죠, 했으나 만만한 사안이 아니더라며 곧바로 손목을 붙들고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


왠걸, 아까 멀끔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와서 나를 찾다가 갔다고 했다. 그리곤, 자신에게 내가 오면 전해달라고 당부를 하고 갔다더랜다. 


 그게, 정말인가요. 누군가에게 쫓길 만한 짓은 한 적이 없는데.


 그렇다니까. 아직 말한 건 무엇도 없으니까, 빨리 이사 가게. 



 제가 이사 가려던 걸 어떻게 . . .


 지난번에 아가씨가 도시락 싸들고 한 번 와주시지 않았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원동력이 있기 마련이지. 자, 그리고. 




 아뇨, 이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신세 진 게 많은데 어찌.


 자네에게 배운게 많지. 서글서글하지 못 한 자네지만 자네를 싫어할 사람은 아마 없을걸세. 나는 언제나 고압적인 관리자였지. 그게 현장을 안전하게 하고 목숨을 구한다고 믿었으니까. 


 ..


 그런데, 그게 그렇지도 않더군. 현장이 안전하고 말고는 순전히 관리자의 능력 탓이었어. 자네는 나이에 맞지 않게 사람을 잘 다뤘고, 섬세한 사람이었어. 그 지혜에서 많은 걸 배웠지. 이런 세상에서 이런 젊은이는 찾아보기 어려운 법이야. 나하고 또 몇이 조금씩 모은 돈이야. 우리 신임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받아줘.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도 모르면서 받기에는 부담되는 액수였다. 그러나, 다들 선뜻 돈을 모았다는 건 분명 누가 보아도 위협을 느낄만한 인물이 내 신상을 묻고 있었다는 것. 아마 바이오로이드를 회수하려고 기업에서 보낸 이들일 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 의미라면 정말 감사히 받겠습니다. 언젠가 한 번 꼭 찾아뵙겠습니다.


 이 사람이, 내가 그걸 왜 주는지 아직도 모르겠냐. 곧 기초공사가 끝나면 여기 사람들 다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내가 자네 연락처를 가지고 있어봐야 그놈들 도움주는 꼴밖에 더 되겠나. 찾아뵙지 말라고 주는 돈이야. 그 돈으로 뭔가 하면, 그때 한 번만 기억해주면 될 일이야. 


 ..


 제가 어렸을 때 어르신같은 분이 주위에 계셨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


 고개 푹 숙여 인사를 드리고 나는 관물대에 들렀다. 이 일을 시작할 때 받은 것들만 그곳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내게 꼭 필요한 것들 몇 가지만 챙기고 나머지는 두고 떠났다. 갑자기 텅 빈 관물대도 남보기 이상한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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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터에서 집으로, 일터도 집도 사라져버린 내게 이 길을 목적 있는 채로 걷는 날은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지. 그 길은 애써 보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빈부는 눈에 보이는 악취를 몰고 다녔다.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몇 년을 굴렀는가, 흰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텅 빈 거리를 지나면 시장 골목이 나왔다. 그 평상에선 항상 흘린 알코올내가 진동했다. 뜨겁고 맵고 짠 것이면 무엇이건 쇠주와 함께 내놓아 그 숨결이 되려 제정신인 사람마저 비틀대게 했다. 닦이지 않는 끈적함이 테이블에, 또 그 위로 끈적한 무언가가 값을 받고 제공됐다. 


 도시 내 슬럼가인 이곳은 법률적 경계선 한 줄을 사이로 극빈과 극부의 단면을 띄고 있다. 그런 덕에, 나의 대학시절의 구 할은 이 시장길과 골목에서 보냈다. 몇 친구놈들과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골목길을 쏘다니며 놀았다.


 녀석들은 공사판을 지나며 주순 스프레이러 벽에 라카칠을 했다. 정신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패악질이었지만 그날, 그날.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왠지 모르게 우리는 행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건 나뿐만의 것이 아니었다. 


 불행은 예고도 없이 떨어지는 선고를 외사랑했다. 배고픈자의 기염이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음을 숨기려는 자들이 내뿜은 매연은, 공기가 탁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셋에 한 놈은 목을 매달아버렸고 한 놈은 생기를 잃고 졸업만을 기다리며 매일 부모가 준 돈으로 술을 마신다. 한 놈은, 휴학계를 내고 방 구석에 훔쳐둔 폐기 예정의 고장난 바이오로이드와 사랑에 빠졌다.


 그 하숙집의 올해 기수는 모두 한 해가 가기 전에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가 꼭 나 때문인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일상을 박살내어 버리고 마는 나이기에, 내가 그들의 평범한 대학생활을 또 빼앗아 버린 것이 아닌가. 그런, 또 후회 따위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평범한 삶을 살고자 발버둥 치는 이들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부유하고 가난하고, 유능하고 무능하고. 나태하고, 근면하고. 누구던.


 형용 가능한 단어로 일단락되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역마살같이 이 숨통을 드나드는 지독한 저주를 오로지 나 홀로 품고 살겠다. 어떤 흉내를 내도 기어코 불행을 안겨주는 내 손길을 건네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휴학계를 쓰던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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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님. 진짜 일찍 오셨네요. 무슨 


 바닐라. 짐 싸. 지금 이사 갈거야. 



 네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도 자세한 건 하나도 몰라. 누군가 나를 찾으러 직장에 왔었다고 하더라.



 

 그건, 아마.




 그래, 너를 찾으러 온 걸지도 모르지. 






 역시, 평범한 삶은 제게 허락되지 않는 걸까요. 



 ..



 가슴 한편으론 알고 있었어요. 저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저는 결코 순수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다만, 이렇게라도 그 응어리 진 마음의 한을 풀어주신 당신에게 감사해요. 해보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았을까 상상하다 눈을 감았겠지만. 이젠 알고 있으니까. 



 .. 



 출발선이 달랐던 게 그들에겐 그렇게도 중요한 걸까요. 바이오로이드가 삶을 살아가는 게 문제일까요 ? 아니면 바닐라의 불량 소식이 주가에 영향을 주는 게 문제일까요 ? 어느 쪽이던 그건 그들에겐 저를 데려갈 타당한 이에 유에 불과한 것. 당신과 무관한 불행에 당신은 또 말려들고 마네요. 미안해요.





 입 닥쳐, 바닐라. 말 조심해.


 .. 네 ?


 방금 그 말에 꽤 실망했어. 


 주인님.




 누구를 섬길 지는 네가 골랐다면서. 넌 날 사랑하는 거 아니야 ? 그럼 조금 더 사람답게, 질척이라고. 삶의 끈을 그렇게 쉽게 놔버리지 말라고.


 넌 고장난 바이오로이드냐, 아니면 바닐라냐. 어느 쪽이던 그건 네가 내게 헌신할 필요가 없다는 타당한 이유지. 그치만, 넌 내게 그냥 바닐라야. 네 옷을 벗긴 날부터 나는 평범하게 살 생각은 진작에 관둔 상태였어. 내게 그런건 불가능해, 난 그런 사람이거든. 어떻게든 그 행복 속에서 불행을 끄집어내어 버리는 종류의 사람이거든. 태어날 때부터. 



 .. 



 내게서 삶의 이유를 찾았다며. 넌 네 삶의 이유를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리냐 ? 끝까지 날 붙잡으라고. 멍청하게 굴지 말고, 이 썅년아. 더 추잡하게 내일을 구걸하라고. 어줍잖은 가치와 삶을 맞바꿔버리는 제 편할대로의 헌신보다 생에의 의지가 훨씬 고귀해. 훨씬 아름다워. 훨씬, 인간다워.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간다면, 제가 눈 감아도 제 삶은 끝나지 않는 게 ..



 이 여자는 항상, 이러지. 나는 그녀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날과도 같이.



 지랄하지마. 너, 바보냐 ? 니가 죽으면 니 삶은 거기서 끝이야. 삶의 이유는 삶이 있고, 그 다음인거야. 그런 애매한 철학관으로 살지 말라고. 그딴 삶은 가치가 없어. 죽여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어. 그딴 소리나 지껄이면서 잡혀갈 바엔 그냥 내 손에 죽어. 







 . . 그럼ㅡ







제발데려가주세요주인님저여기서죽고싶지않아요다시또상품이되고싶지않아요저도다른사람들처럼평범한가정을꾸리고살고싶어요서로를책임져주기로했으니그약속끝까지지키라고요중간에힘들다고버리면가만두지않을거에요꼭찾아내서복수할거에요 . . .












 

 뭐, 그 멍청한 부분이 내 여자친구 다운 부분이기도 해. 우린 항상 이런 식이지. 짐이나 빨리 싸. 난 곧바로 차를 부를 테니까. 어디로든 가자. 어디여도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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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닐라는 대부분의 새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최소한의 간소한 짐만 싸서 나왔다. 바닐라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한 장, 빠트리고 말았다. 새로 사온 쪽이 아닌, 가지고 있던 쪽의 마일스 데이비스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했다. 지극히 인간다운 실수. 


 비일상의 경계 너머에서 일상을 갈구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쫓기는 지도 모른 채 도망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