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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난 일 년을 정산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 년 - 혹은 그 이상 - 동안 있을 일의 서막 같은 느낌으로 보내게 된 결혼기념일도 끝나고, 정말로 괌을 떠날 때가 다가왔어.

요정 마을에 남아서 아직 남겨둔 물자나 마을 자체의 관리를 맡을 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대원들이 차례차례 오르카 호에 오르는 가운데, 검은 광택이 인상적인 기괴한 형태의 거체도 태연하게 끼어 있었지.


- Mr. 알프레드?

- 아이고, 반갑습니다. 휴가는 잘 보내셨습니까?


음. 여기서도 몸을 바꾸긴 했구나.


- 하긴. 원래 쓰던 몸은 좀…….

- 보자마자 무슨 실례되는 말씀이십니까!

- 끝까지는 말 안 했는데요.

- 하신 거나 마찬가지잖습니까!

- 안 했어요. 솔직히 구리다고는 한 마디도 안 했어요.

- 진짜로 말해버리다니 너무하십니다!


…같은 만담은 어찌되었든.


- 그 몸, 로버트의 것을 그대로 쓴 건가요?

- 아, 아닙니다. 기술팀 분들이 새로 만들어 주셨습지요.

 로버트는 완전히 기능을 정지한 후 정중히 분해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해킹 당시에 있었던 일이 알려진 것이 대원들이 로버트에게 가지는 인상에도 영향을 준 걸까.

이쪽은 그 충격적인 발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도무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긴 하지만서도.

복잡미묘한 리제의 표정에 형이상학적인 도형을 띄워 보이는 것으로 애도 - 아마도 - 를 표하고, 알프레드는 이야기를 계속했지.


- 몸을 바꾸면 유기물 알레르기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부분은 그대로더군요.

- 코어까지 새로 만든 다음 데이터만 업로드하는 건 어때요?

- 히익?! 닥터 양 같은 말씀 하지 마십쇼!

- ….

- 응? 왜 그러십니까?


뭐라고 할까.

척 봐도 대충 만든 고철 덩어리 몸일 때는 몰랐는데, 저 그로테스크한 거체로 팔락거리는 걸 보니까.


- …진짜 안 어울리네요.

- 갑작스러운 폭언이라니, 바닐라 양에게 옮으셨습니까?!

- 개성을 인정했을 뿐이에요.

 

스킨처럼 뚜껑을 덮어도… 아니, 목소리가 그대로인 시점에서 의미 없나.

쫑알쫑알 투덜거리는 알프레드를 보고 살짝 웃은 다음, 리제는 로버트의 것과 같은 몸을 본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지.


- 그런데, 몸을 굳이 바꿀 필요는 있었나요?

- …그 정도로 안 어울립니까?

- 아니, 그게 아니라. 기술팀에서 일하는 거라면 원래의 몸으로도 충분하잖아요.

 기능 강화야 시간을 들이면 알아서 해낼 수 있을 테고.

 전투원으로 활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이는 당신의 승선을 허락했을 텐데.

- ….


정곡이었던 것일지, 알프레드는 대답을 꺼낼 때까지 한참 동안 코어를 멋쩍게 긁적였지.


- 물론, 이 아름다운 몸이 상당히 제 취향이었다는 이유가 제일입니다만.

- 보통 이럴 때는 '이유도 있긴 합니다만' 아니에요?

- 사실이 그런 데 어찌하겠습니까?

 …………크흠, 흠.


짧은 헛기침.


- 아마,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아가씨들이 가장 위기에 처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저에게.

- 아무도 탓하지 않았을 텐데요.

- 예. 순전히 제 욕심이었습지요.

 그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해킹으로 한 순간에 미쳐버릴 수 있는 것도 A.I.지만, 여건만 허락한다면 바라는 기능을 쉬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A.I.이니까요.


하긴, 이런 '아저씨'였지.

리제가 수긍하는 동안 알프레드는 다시 평소의 톤으로 돌아가 있었어.


- 덕분에 지금의 제 성능은 로버트 이상이라고 확증까지 받았습니다!

 ……아니, 데이터에 기록된 로버트보다 앞서는 부분이 어딘지는 모르겠다는 게 문제입니다만, 예.

- 으응?


당사자인 A.I.도 파악을 못 하는 성능 증가라니 이건 또 뭔 소리래.


- 혹시 자폭 스위치라도 달린 거 아니에요? 그 닥터고.

- 그, 그건 저도 의심해 봤습니다만 아니라고 합니다. 그저 철충에게서 안전해졌다고만….

- …아.


유기 회로로 교체했구나.

유기물 알러지로 매번 야단법석인 알프레드에게 알려줄 수 없어서 함구한 거고.


- …뭔가, 굉장히 불온한 침묵이 있지 않았습니까?

- 전 믿어요, 닥터 믿어요.

- 기다려주십시오?!


차마 진실을 밝힐 수 없어 황급히 자리를 뜨는 리제를 알프레드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따라가고, 또 헛짓을 하는 건가 짐작한 바닐라가 팔을 걷어붙이며 다가오고, 페더랑 써니가 멀리서 그걸 보면서 키득거리는.

참으로 평화로운 여름날의 풍경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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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 마을의 아리아는 여기까지이빈다.

막간 몇 편 이후 흐린 기억으로 들어가겠스빈다.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31420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