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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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요안나 아일랜드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거대한 석조 건물에는 수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다수의 방이 널려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추가 인원들을 위해 마련된 빈 생활관의 안에는 아직 주인이 없는 침구와 관물대들이 즐비했다.

 

사락-사락

 

“...”

 

 한적한 방의 천장에는 아직 한 번도 켜본 적 없는 에어컨과 전등이 가득했다. 그리고 천장의 아래로 얇은 비닐로 포장된 침구 세트와 먼지가 한가득 내려앉은 관물대들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들반들한 외관을 뽐내었다.

 그 햇빛조차 들지 않는 어느 빈 생활관의 한구석에서 어느 연보랏빛 머릿결의 여성이 조용히 혼자만의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조차 옅은 어느 한구석, 그녀는 그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은 채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말없이 자신의 입속으로 가져갔다. 언뜻 보아도 조촐하기 짝이 없는 식사였으나 그녀는 자신의 새빨간 눈동자 빛내며 입안의 내용물을 열심히 씹어대었다.

 

“우물-우물..”

 

 그 어느 이도 찾지 않는 방, 모두의 관심사 밖에 있을 이 공간에서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보다는 열심히 이빨을 움직여 조용히 자신의 아침 식사를 마무리했다.

 

“..잘 먹었습니다.”

 

사락-사락

 

 누구에게 들으라는 것인지 모를 감사 인사를 끝마친 그 여성은 자신의 어깨 위에 두른 옅은 회색빛의 망토 안으로 샌드위치의 빵을 포장했던 비닐랩을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망토의 안을 주섬대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어 들었다. 그것은 옅은 햇빛 속에서도 은은한 외관을 뽐내는 작은 음료수 캔이었다.

 

따-악!

 

“...이크.”

 

 새로이 꺼내든 물건의 윗 뚜껑의 따개를 넘기려던 그녀는 조용한 방 안에 울려 퍼지는 강렬한 타격음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대었다. 하지만 방문 너머 복도조차 썰렁한 마당에 그녀가 낸 소리를 들을 이는 만무했다. 인기척이 없는 것을 다시 확인한 이 여성은 그제야 손에 들린 캔의 입구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

 

꿀꺽-꿀꺽

 

“...하아. 좀 더 시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다.”

 

 망토 안에서 오랜 품은 탓인지 조금 밍밍해진 음료의 맛에 여성은 고개를 살짝이 떨구며 입맛을 다셨다.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캔 내부에 조금 남은 음료를 찰랑대던 여성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옅은 햇빛에 반짝거리는 캔을 멍한 시선을 바라보며 제 신세를 한탄했다.

 

“어쩌다 내가 이런 신세가 된 건가..”

 

찰랑!

 

“..갑자기 이 녀석들이 들이닥쳤을 땐 무엇인가 했는데. 차라리 그때 접촉할 걸 그랬다.”

 

 눈썹 끝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여성은 연보랏빛으로 빛나는 자신의 앞머리를 매만지며 자신을 둘러싼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 하지만 그 탓에 그녀는 외톨이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나도 밥 먹고 싶다.”

 

 당장 오늘 아침에 떠들던 소녀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아침밥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지 여성은 양 볼을 천천히 부풀리며 이 건물에 사는 이들에 대한 질투심을 조용히 표출했다.

 

“나도 다른 이들과 어울리고 싶다. 혼자는..쓸쓸하다.”

 

찰랑-!

 

“하지만..어렵다. 애당초 내가 여기 온 목적도 이제는 기억도 안 난다. 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찰랑-!

 

“본대와 연락할 방도도 없다. 애초에 본대가 날 기억이나 하고 있기나 한 것인가..후우..”

 

찰랑-!

 

“..차라리 그 인간에게 말을..으으. 그건 더 안될 일이다. 그 인간은 너무 악랄한 인간이다.”

 

 뭔가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을 떠올렸는지 여성은 눈썹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며 앞서 떠들어 댄 자신의 해결책 중 하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려 들었다.

 

“아무리 잘못한 이들이라지만 그녀들을 괴롭히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무서운 인간이다. 행여 그 인간이 내 존재를 눈치채었다가는 날 가만두지 않을 테지.”

 

 별달리 자신의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한 듯 여성은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은빛의 음료수 캔에 자신의 동공을 고정했다. 그러기를 수여 분, 여성은 쭈그린 채 고개를 양다리와 흉부 사이로 파묻으며 이전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중얼대기 시작했다.

 

“...외롭다. 이렇게 옆에 사람이 많은데, 대체 왜 난 이렇게 외로운 것인가...”

 

찰랑-!

 

 얼마 남지 않은 음료수 캔의 내용물을 힘없이 흔들어대던 여성은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인 채 망토의 후드를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선 이른 낮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무도 찾지 않던 방안에는 다시 한번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96) 

 

매앰! 맴! 맴! 

 

"작전관. 도착했네." 

 

"..어. 그래. 그런데 요안나.." 

 

 언제나 화창한 날씨의 연속인 한적한 어느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그곳에는 푸르른 물결에 둘러싸인 거대한 섬 하나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본래 그 어떤 이의 발길도 닿지 않는 대륙과는 동떨어진 장소였으나 어떤 한 여성이 이곳을 발견한 이후, 이 땅에는 수백에 달하는 이들의 새로운 터전이 되어주었다. 

 

"왜 그러나? 작전관.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여기..영양 생산 시설이..맞냐?" 

 

"무얼. 저 거대한 돔 시설을 그새 잊었나! 하하하!" 

 

"폐하. 더우시면 저 혼자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후훗." 

 

"...아니. 지금 내 질문의 의도는 그게 아니거든?!" 

 

 천혜의 자연으로 둘러싸인 이 섬에 수백에 달하는 이들이 급작스럽게 들어옴에 따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이 땅에는 여러 철골 구조물들이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했다. 

 

"작전관은 이곳을 관리하는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잊고 있었나보네만! 하하하!" 

 

"그녀들이 괜히 페어리 시리즈라 불리는 건 아닙니다. 폐하." 

 

"..." 

 

 사방이 끝없는 지평선으로 가득한 이 땅에 철골 구조물들이 들어섦에 따라 이 땅의 풍경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이들도 있었으나,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 이들도 있었다.

 지금 눈앞에 거대한 화원을 직시하며 입을 떡 벌린 이 남성은 전자에 속한 이였다. 

 

"..대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예전에는 이런 꽃밭이 없었는데." 

 

 사람이 사는 곳에는 그들만의 향취가 남는다. 라붕이 작전관에게 있어 그것은 당연한 소리였다. 아무리 엘븐들이 산림을 보호하는 것에 집착한다 한들 결국 산림의 일부분은 럼버 제인에 의해 벌목된다.

 누군가는 보호하려 하나, 결국 산림 자원은 채취가 필요하니 그것을 두고 라붕이 작전관은 무어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저 푸르른 바다는 변함이 없으나, 땅은 다르다. 일찍이 산업화가 불러온 아파트 숲에서 살아온 이 땅의 유일한 남성, 라붕이 작전관에게 있어 자연파괴니 산림 보호니 하는 소리는 먼 세계의 이야기에 가까웠다. 

 

"...하루아침에 여기가..꽃밭이 된다고? 이게 뭔.." 

 

 그러나 지금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새로운 풍경은 그의 두 눈을 휘둥그레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푸르른 바다의 지평선을 배경 삼아 거대한 돔 시설을 중심으로 펼쳐진 꽃들의 향연에 라붕이 작전관이 입을 다물지 못하자 그의 얼빠진 모습을 바라보던 여성들은 싱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 작전관이 부임한 이후로 그녀들에게도 여유시간이 늘어난 모양이네만." 

 

"폐하께서 보급 탈취건을 해결한 이후로 산업 인원들에게도 여가를 즐길 시간이 생겼습니다. 아마.." 

 

"...어어.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아르망. 우..우선 내리자." 

 

 라붕이 작전관은 곁에서 조곤조곤 상황 설명을 해오는 두 여성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황급히 지프차의 문 걸쇠를 열어 재꼈다. 

 

달-깍! 

 

"...와우." 

 

맴! 매앰! 맴! 매앰! 

 

쏴-아아 

 

 등 뒤로 들려오는 여름의 소리, 그리고 정면에서 불어오는 짭짤한 바닷바람의 사이로 향긋한 꽃향기들이 그의 비강으로 스며들어오자 라붕이 작전관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던지며 수백 송이의 이름 모를 꽃들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가까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딸-깍! 

 

"그럼 나는 이만 중앙 건물로 돌아가 보겠네." 

 

"넌 안 갈 거냐?" 

 

"나는 주군께 앞으로의 여름 계획을 미리 알려두고자 하네만."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그래. 부탁한다." 

 

"하하! 비축창고까지 열심히 걸어가게나!" 

 

부-우웅! 

 

 여태껏 그래왔듯 호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지프차를 몰고 자리를 떠나는 요안나의 뒷모습을 배웅한 라붕이 작전관은 어느새 자신 곁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금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자. 아르망." 

 

"예. 폐하." 

 

 그의 무뚝뚝한 부름에 부관은 싱긋이 미소를 머금은 채 화원의 한가운데로 나 있는 보도블록으로 그와 함께 걸음을 맞추었다. 

 

뚜벅-뚜벅 

 

“...이야. 이게 진짜..다 뭐냐.” 

 

쏴-아아아 

 

 해수면을 타고 날아오는 바람에 맞추어 살랑살랑 흔들리는 꽃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던 라붕이 작전관의 입에서는 감탄이 쉴 틈 없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감수성이 메마른 현대인이라지만, 이렇게나 변해버린 주변 환경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정도로 호기심이라는 것이 그에게도 없진 않았다. 

 

“폐하. 그 질문을 받을 이는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응?” 

 

 무릎까지 굽혀 만개한 이름 모를 꽃들의 봉오리를 눈으로 훑는 라붕이 작전관의 물음에 그의 부관은 여전히 입가에 걸린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녀의 언동에 라붕이 작전관이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으려 들 때에, 그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하나 내려앉았다. 

 

“주인님. 오셨어요?” 

 

“...어?” 

 

 어느새 그의 머리 위까지 날아온 한 여성의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의 시선이 꽃봉오리를 떠나 드높은 하늘로 향했다. 

 

“히힛. 제가 가꾼 정원이 마음에 드시나요? 주인님?” 

 

 강렬한 햇빛의 아래서도 해맑은 미소를 머금곤 등 뒤에는 거대한 날붙이를 들고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정원사, 리제의 등장에 라붕이 작전관은 그제야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짓하였다. 

 

“이게 네 작품이었냐? 왜 아침 회의 땐 이야기 안 해줬냐?” 

 

“..주인님께 드리는 저의 깜짝 선물이니까요. 히힛.”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말투로 응답하는 리제의 모습에도 라붕이 작전관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반색하는 얼굴로 그녀를 향해 내려오라는 식으로 손짓을 계속했다. 

 

“올려다보려니 목 아프다! 내려와서 이야기하자.” 

 

“네. 주인님.” 

 

샤락! 

 

 그의 부름에 응답하듯 날갯짓을 하며 공중에 멈추어 서 있던 그녀는 재빨리 자신이 가꾼 꽃들의 위로 사뿐히 내려와 섰다. 하지만 등에 달린 그녀의 두 쌍의 날개는 멈출 줄을 몰랐다. 

 

사락-! 사락-! 

 

“..용케 꽃들은 안 밟고 날아오네?” 

 

“모처럼 주인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화단인데요. 망가뜨리면 아쉽잖아요.” 

 

“등 뒤에 가위로 여길 가꾼 건 아니지?” 

 

 언뜻 보면 갈색의 머릿결이 인상적인 정원사 차림의 그녀, 리제는 언제나 그렇듯 한시도 떼어놓지 않는 거대한 가위와 함께 그의 두 걸음 앞에서 멈추어섰다. 환한 햇빛에 은빛의 겉면을 반짝이는 가위의 자태가 지금의 산뜻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라붕이 작전관의 밝은 미소는 어느새 쓴웃음으로 돌아서 있었다. 

 

"가위는 조금 작은 게 더 실용적이지 않냐?" 

 

“히히. 이 가위는 저와 한 몸이나 다름없어요. 주인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소중하디소중한 가위인걸요?” 

 

“..아니. 뭐. 다른 가위도 있는데 굳이 그 큰 걸 이런 화단을 가꿀 때 쓰는 건..” 

 

“절대 싫어요. 이 가위가 아니면, 저는 다른 가위를 쓰기 싫어요. 주인님께서 주시는 가위라면 그 어떤 가위도 좋지만. 이 가위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 

 

 어딘가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리제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황홀하다는 듯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라붕이 작전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게 저 가위가 좋은가? 뭐..그럴 수도 있지. 그것까지는..’ 

 

“그래. 네 의사가 그렇다면야. 그것까지는 내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 

 

“주인님.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건 저를 보러 오신 거죠? 그쵸?” 

 

“..아침 회의 시간의 주제가 뭐였니? 리제.” 

 

 옅은 연보랏빛 홍채를 반짝이며 고개를 이리저리 좌우로 흔들어대는 정원사의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른 이들을 물색하듯 시선을 요리조리 돌려대었다. 

 

“여기에 불청객이 계속 나타난다며? 네 입으로 이야기했잖냐.” 

 

“...그 불청객은 제가 꼭 잡을게요. 주인님. 그러니 오늘은..” 

 

“아니. 우선 그 문제부터 해결을..” 

 

타-다닥! 타-다다! 

 

 그의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돌아서려 하자 리제는 밝은 미소를 거두곤 진지한 듯 또는 어두운 얼굴로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하지만 라붕이 작전관이 미처 그녀의 얼굴 변화를 눈치채기 전, 그의 관심사는 이미 새로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여러 페어리들에게로 돌아선 후였다. 

 

“대장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헤헤헤!” 

 

와-락! 

 

“어이쿠! 요 녀석. 등에 달린 날개는 장식이니? 왜 언니들처럼 날아오지 않고 뛰어오냐!”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회색빛의 돌 타일들을 밟고 품으로 달려든 벌꿀 소녀의 등장에 라붕이 작전관은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소녀의 뒤를 따라 자신의 앞에 도달한 이들에게 늦은 아침 인사를 건네었다. 

 

“모두 아침은 먹고 일하냐?” 

 

“네. 대장님. 어서 오세요.” 

 

“대장님께서는 매번 물어오는 대사가 같네요. 헤헤.” 

 

 수 명의 여성들은 항상 듣는 그의 인사말에 싫지 않다는 듯 저마다의 밝은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방문을 환영했다. 그런 그녀들의 지적에 라붕이 작전관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익살스러운 어투와 함께 품에 넣어두었던 선글라스를 콧등 위에 올렸다. 

 

“밥 먹고 일하는 것만큼 이 동네에서 중요한 일이 더 있을까. 막노동에는 밥심이야.” 

 

“가끔 듣고 있으면 대장님만큼 식사에 중점을 두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어요.” 

 

“소완 주방장님의 식사를 놓치는 건 저희도 아쉬운 일이에요. 대장님. 저희가 힘껏 가꾼 쌀알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빛나다니.” 

 

“아무렴. 아무렴.” 

 

 볏짚 모자를 쓴 채 쓴웃음을 짓는 여성과 그녀의 한걸음 뒤에 서 있는 살짝이 키가 큰 시골 소녀와 같은 여성들의 밝은 회답에 그 역시 화색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있던 아쿠아 역시 그와 같은 밝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 채로 손가락을 좌우로 요리조리 돌려대었다. 

 

“대장님! 대장님! 어때? 여기 많~이 바뀌었지?! 히힛!” 

 

“오. 그래. 그래.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한 거냐? 저번에 들렸을 때는 꽃 한 송이 못 봤는데.” 

 

“헤헷. 리제 언니가 리리스 언니한테서 꽃 종자가 몇몇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준비한 거야!” 

 

“오오? 그래?” 

 

 자신의 품에 안겨 마치 자기의 업적인 것처럼 으쓱대는 소녀의 진실 토로에 라붕이 작전관의 시선이 다시 이 화단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여전히 자신과 두 걸음의 거리를 유지한 채 화단 위를 가볍게 날고 있는 요정은 차분하던 일전과 달리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려 들었다. 

 

“그..주..주인님. 그게..” 

 

“리리스랑 사이가 좋은 모양이네. 리제.” 

 

“언니의 친구라고 부를 분은 아무래도 블랙 리리스님 뿐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주인님.” 

 

“맞아요. 매번 블랙 리리스님과 다투시기는 하지만, 가끔 보면 친하니까 싸운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이 같아요.” 

 

“...” 

 

 동생들의 확인사살까지 들어오자 언제나 평탄한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던 리제의 얼굴에는 흘릴 리 없던 식은땀마저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라붕이 작전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쿠아를 품에서 살짝이 밀어내며 리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럼 어디 여기 정원사님의 안내를 받아 사건 현장으로 가볼까요?” 

 

“..짓궂으십니다. 폐하.” 

 

 부관의 밝은 태클에도 라붕이 작전관은 살짝이 오른쪽으로 걸음을 한 걸음 옮겨 여전히 화단 위를 거니는 리제를 위해 옆자리를 선뜻 건네었다. 

 

"...히힛." 

 

 그러자 리제 역시 그것이 마냥 싫지는 않다는 것처럼 작은 홍조를 띄우며 선선히 타일 위로 날갯짓을 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라붕이 작전관과 리제의 사이로 항상 해맑기 그지없는 큐피트가 끼어 들어왔다. 

 

“헤헷! 대장님! 왼손!” 

 

“...오냐. 아쿠아. 비싼 손이다. 흐흐.” 

 

“리제 언니! 오른손!” 

 

“..어?” 

 

“손! 오른손!”

 

 라붕이 작전관의 왼손을 억세게 쥐어 잡은 채 자신을 향해 오른손을 요구해오는 막내의 왼손을 빤히 내려다보던 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오른손을 건네었다.

 

“헤헤! 이제 아쿠아가 대장님을 창고로 데리고 갈게!” 

 

“...그래. 그래.” 

 

“어? 어어?” 

 

 마치 어린이날 선물을 사러 가는 들뜬 아이처럼 힘차게 앞으로 걸어나가려는 아쿠아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선뜻 그녀의 빠른 걸음에 맞추어 앞으로 걸어나갔다. 

 

뚜벅-뚜벅 

 

“헤헤! 대장님! 그러고 보니 아침에 소완 언니가 대장님 조각상을 만들었다!” 

 

“..안 그래도 보고 오는 길이다. 아침부터 상상치 못한 걸 너무 봤어. 여기도 그렇고.” 

 

 라붕이 작전관의 걸음을 맞추어 앞으로 걸어가는 페어리들의 입에서 얼음 조각상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그는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런 그의 얼굴보다는 잠깐 전에 보았던 쇼의 장면들을 되새기며 그 광경을 회상하기 바빴다. 

 

“대장님이 소완 언니가 그걸 만드는 걸 봤어야 했는데! 엄청났어! 칼이 막! 슝! 슝!” 

 

“소완님의 칼솜씨야 아우로라들에게 자주 들어만 봤는데 오늘 직접 보니 엄청났어요. 거대한 얼음이 하나의 갈라짐도 없이 삭-베이는 모습은..” 

 

“저희도 날붙이를 쓰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쓸 수 있을 거라고는..” 

 

“드리아드 언니들도 낫을 잘 쓰지만! 소완 언니의 칼솜씨는 정말 멋졌어!” 

 

“..그 정도냐?” 

 

 사방에서 이어지는 소완에 대한 찬사에 라붕이 작전관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물음에 다프네는 쓰고 있던 볏짚 모자를 살짝이 아래로 잡아당기며 주제에서 살짝 벗어난 감상을 새로이 내놓았다. 

 

“...하지만 그 칼이 제 목에 들어오면 엄청 무서울 것 같아요. 파견 분들이 소완님을 무서워하는 이유를 살짝 알 것 같아요.” 

 

 소완의 부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이곳의 인원들은 다프네의 짤막한 감상에 쓴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부업을 시킨 장본인인 라붕이 작전관은 쓴웃음을 넘어 입술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칼을 잘 쓸 줄은..아니. 애초에 생각해보면 게임 승리 모션도 그렇고. 첫 등장 때도 중식도로 앨리스를 격파했잖아.’ 

 

 이제는 이 땅을 떠난 자칭 동부의 에이스, 세라피어스 앨리스를 단박에 격침 시킨 인물이 누구였는지를 떠올린 라붕이 작전관은 입꼬리를 파르르 떨어대기 시작했다. 

 

‘..소완 개체들은 다 저런가? 스토리에서 본 것보다 더 음험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라붕이 작전관의 머릿속에 박힌 이곳의 소완의 이미지는 음흉하기 짝이 없는, 하지만 헌신적인 여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아우로라들이나 포티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 걱정과 달리 막 그렇게 거리를 두는 사람이 아니라던데.’ 

 

 소완 개체만의 특유의 완벽주의 탓에 취사장 인원들이 한껏 고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우려하던 그의 예상과 달리 소완은 주방 인원들에게 있어 아이돌, 그 이상의 존재였다. 당장에 아우로라들의 입에서는 소완에 대한 찬사가 하루가 멀다하고 끊이질 않았으니. 

 

‘사실 사람 놀래는 것만 빼면..일전에 약물도 아르망의 설명에 의하면 오리진 더스트로 인한 육체적 피로를 중화시키는 용도였다고 하니..나한테는 과분한 여잔데.’ 

 

 이제는 일전에 먹던 음식들이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조차 못 할 정도로 그녀의 식사에 빠져버린 라붕이 작전관, 그는 남아있던 오른손으로 까끌까끌한 턱을 문지르며 소완의 음흉한 얼굴 위로 자신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그려내었다. 

 

‘소완이야. 뭐. 스토리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성격이기도 하고. 생각보다 그렇게 막 애들을 괴롭히거나 압박하지도 않는 것 같으니. 이거 본편보다 더 나은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그래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라붕이 작전관의 머리에는 당장 아침에 있었던 끔찍하기 짝이 없는 참상이 다시금 떠오르고야 말았다. 

 

‘매일 먹는 건 좋지만..왜 매일 아침이야. 씨발..’ 

 

 나잇살을 꽤 먹었음에도 여전히 건강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한탄으로 라붕이 작전관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왼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변화를 눈치챈 소녀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드리웠다. 

 

“대장님. 대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아니. 잠깐 안 좋은 기억이..” 

 

“안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으면 돼! 헤헷!” 

 

“...그래. 네 말이 백번 맞다. 아쿠아. 흐흐.” 

 

 언제나 해맑기 그지없는 소녀의 조언에 라붕이 작전관은 무심코 숙이려던 고개를 들어 주변의 화단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꽃에 대한 조예도 없는 그가 보기에도 화려하고 산뜻하기 짝이 없는 색색의 꽃들의 향연, 라붕이 작전관의 그 사이를 거닐며 눈으로는 꽃들의 봉오리를 바라보고 또 코로는 꽃들의 향기를 맡아가며 평화로운 오전의 한때를 만끽했다. 

 

‘이런 게 평화지. 그래. 으음. 분위기 좋고. 공기도 좋고.’ 

 

이제는 좀 더 산뜻한 대화를 나누고자 라붕이 작전관은 시선을 자신의 왼편으로 돌렸다. 

 

“그래서 아쿠아. 너는 어떠냐? 언니들이 좋니?” 

 

“응! 다프네 언니는 언제나 보살펴 줘서 좋고! 드리아드 언니들은 언제나 해맑아서 좋아! 그리고..” 

 

"..." 

 

"그리고 리제 언니는 언제나 듬직해서 좋아!" 

 

"...하하하! 그러냐!" 

 

 아쿠아의 솔직한 감상에 라붕이 작전관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얼굴에 다시 한번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후훗. 소녀의 감상은 언제나 정직합니다." 

 

"리제 언니가 오고 나서부터 아쿠아가 더 밝아진 것 같아요." 

 

"돔 시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내부에 해충이 없는 건 아닌데..리제 언니가 언제나 수고해주세요." 

 

"호오. 호오." 

 

 사방에서 들려오는 리제를 향한 찬사에 라붕이 작전관은 선글라스 아래서 눈동자만 굴려 화제의 장본인을 살폈다. 

 

"..." 

 

 해맑은 동생들과 달리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앞으로 걸어가기만 할 뿐인 그녀들의 맏언니, 리제는 아까부터 가만히 침묵만 유지하고 있었다. 

 

"저..리제 언니? 어디 편찮으신가요?" 

 

 평소 침착하기만 한 언니의 안색이 어딘가 어두워 보이자 볏짚 모자를 쓴 그녀의 여동생이 한 걸음 그녀와 거리를 좁혀들었다. 

 

"...으응. 아..아무것도 아니야." 

 

"바깥에 너무 오래 계셨어요. 혹시 더위라도.." 

 

"그..아니...응.." 

 

"...흐음." 

 

 다프네와 리제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라붕이 작전관의 눈썹이 미묘하게 휘어져 들어갔다. 

 

'한 쪽은 최대한 다가가려는 눈친데..다른 쪽은 그것이 영 어색한 모양이네.' 

 

 언니를 챙기려는 다프네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영 대하기 어려운 것인지, 살짝이 당황해하는 리제의 동태를 주시하던 그는 오른손으로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매만지다 씨익-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쿠아. 손 그네라고 아냐?" 

 

"웅? 그게 뭐야?" 

 

"자. 리제 언니 오른손을 꽉 잡고..하나 둘 하면 양 무릎을 굽히는 거다?" 

 

"응! 응!" 

 

"..네?" 

 

곁에서 무언가를 떠들어 대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지금의 상황에 기뻐야해야 할 지, 짜증을 내야할 지를 몰라 초조해하던 리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 라붕이 작전관의 선글라스가 들어오는 순간, 라붕이 작전관은 익살스러운 미소와 함께 아쿠아에게 신호를 알렸다. 

 

"자, 하나. 둘!" 

 

"읏쌰!" 

 

"..어?! 엇!" 

 

후웅! 

 

 그의 입에서 신호소리가 터져 나오자 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와 같이 아쿠아의 손을 꼭 잡은 오른손을 그와 같이 힘껏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양 옆의 두 사람에 의해 날아오른 아쿠아는 등에 달린 날개를 퍼덕이며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재밌어! 대장님!" 

 

"하하하! 다시 한번 간다!" 

 

"응응!" 

 

"폐하, 팔에 부담이 가실 터인데.." 

 

"괜찮아. 오리진 더스트 하루 이틀 맞았냐! 하하!" 

 

"그..저희도 가능할까요?" 

 

"...그건 무리지!" 

 

"아하하하!" 

 

 꽃봉오리들이 만개한 화단의 사잇길을 걸어가는 다수의 남녀가 저마다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어두운 안색을 띄우던 정원사는 제 곁을 함께 걸어가는 이들의 얼굴에 맺힌 미소를 보고는 살포시 눈끝을 누그러뜨렸다. 

 

"..히힛." 

 

"어어. 아쿠아. 네 맏언니 웃는다." 

 

리제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옅어지자 라붕이 작전관은 오른 검지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러자 다른 이들의 주목이 순식간에 그녀를 향해 쏠렸다. 

 

"리제 언니가 웃는 거 처음 봐! 헤헤!" 

 

"리제 언니가 웃는 걸 보는 건 처음 아닌가요?" 

 

"..후훗. 언니도 참. 저희와 있을 때도 자주 웃어주세요." 

 

"...아..알았어. 칫." 

 

동생들의 살가운 요구에 리제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페어리들은 그제야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걸음을 맞추어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한 남성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오른편을 따라 걷는 아르망에게 엄지를 척 세웠다.

 

“어떠냐. 내 말솜씨가.”

 

“..폐하의 말솜씨는 일찍이 잘 보았습니다. 후훗.”

 

'페어리들은 언제나 보기 좋네. 소완이나 리제, 리리스까지 모두 좋은 애들이라 다행이야.' 

 

 유독 메인 스토리에서 겉돌던 리제라는 캐릭터가 이곳에서는 주변 자매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 라붕이 작전관은 선글라스의 어두운 선팅 아래서 속눈썹으로 무지개를 그렸다. 

 

'처음에는 꽤 기겁했지만. 같이 살아보니 그렇게..음. 그래도 밤마다 창밖에서 날 바라보는 건 조금 그런데. 사령관 녀석, 강심장이었나. 이런 애들을 데리고 어떻게..' 

 

"대장님! 대장님! 한번만 더!" 

 

"오. 그래." 

 

아쿠아의 반짝이는 눈빛을 따라 라붕이 작전관은 생각하던 것을 멈추곤 다시 목청을 드높였다. 

 

"자, 하나! 둘!" 

 

"꺄아! 꺄하하하!" 

 

"..저도 어린 소체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후훗." 

 

"다프네의 어린 모습이라..나쁘지 않겠는데?" 

 

"폐하. 심히 음흉한 발언입니다." 

 

"오. 아르망. 너도 해줄까? 너까지는 가능.." 

 

자신의 오른편에서 한 걸음 떨어져 걷는 소녀의 목소리에 라붕이 작전관이 고개를 홱 돌려 그녀의 의향을 물으려 들었자 아르망은 재주 좋게 눈썹 위를 꿈틀대었다.

 

"...폐하?" 

 

"..옙." 

 

낮게 깔린 그녀의 되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홱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르망의 얼굴에는 다시 화색이 돌았다. 

 

'어쩌면 저희가 폐하를 휘두르기보다는 폐하께서 저희를 휘두르시는 것 같네요.' 

 

소위 삼얀이라 불리는 이들과 모략을 꾸민 아르망은 앞으로 이 섬에서 펼쳐질 일들을 상상하며 밝디밝은 얼굴로 그를 둘러싼 이들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햇볕이든, 선선한 바닷바람이든. 그의 주변은 언제나 밝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설마 이리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될 줄이야. 아르망은 몇 년간 꿈에도 그리던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곧 식료품 창고에 도착합니다."

 

"그래. 어이쿠. 저건 내가 만든 팻말 아니냐? 이제는 저거 필요없는 거 아닌가?" 

 

"싫어! 대장님이 아쿠아한테 선물해준 거잖아!" 

 

"..선물이라기 보다는 임시방편이었는데. 이젠 들락날락하는 놈들도 없잖냐." 

 

"그래도 안 뺄 거야!" 

 

"아쿠아가 매일 저걸 얼마나 열심히 관리하는데요. 대장님." 

 

"가끔 홍차 생산시설이 저것 때문에 있는 것 같아요. 이걸..주객전도라고 하나요?" 

 

드리아드들의 뒷말에 라붕이 작전관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대었다. 별 볼 일 없는 행동인 줄로만 알았건만, 어느새 영양 생산시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팻말을 그는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렘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대장님. 저기 저건.." 

 

"응?" 

 

다프네의 작은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창고로 향했다. 녹색의 페인트가 발라진 식료창고의 앞에 떡하니 자리 잡은 대형 운송 트럭, 그 뒤에는 녹색의 컨테이너가 하나 실려있었다. 

 

"벌써 운송시간인가? 평소보다 빠른데?" 

 

"..폐하. 저건 아마.." 

 

"주인님~!" 

 

이른 시간부터 파견 인원이 일을 시작한 줄로만 알았던 라붕이 작전관의 물음에 그의 부관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저 멀리서 트럭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여성의 등장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쟨 언제 여기 온 거야?" 

 

타다닥! 

 

은발의 머릿결을 휘날리며 한달음에 무리를 향해 달려오는 여성의 등장에 리제는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것처럼 얼굴을 구기었다. 

 

"...칫. 해충. 멋대로 남의 구역에 들락날락거리기는." 

 

"언니. 그렇게 험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너희 사이좋은 거 맞지?" 

 

"주인님~! 리리스가 주인님을 찾아 왔답니다!" 


타-다다!


그렇게 한가로운 아침의 한때, 라붕이 작전관은 따사로운 햇살의 축복 아래 환한 웃음꽃을 피웠다. 

 

"뭘 그렇게 급하게 오냐! 하하하!" 

 

더 이상 그에게는 일말의 외로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를 쫓기 바빴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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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늦었다. 지각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걸리긴 했는데, 현생이 바빴던 탓도 있지만 사실 내가 이번 에피소드가 전 에피소드처럼 잘 풀어갈 자신이 크게 줄어 들었던 게 컸다.

 에피소드 1은 대한민국 남성들이라면 죽고 못 사는 군대썰이 가장 큰 기반이었기에 장편 문학이라고는 안 믿길 정도로 반응이 좋았지만 이번 2번째 에피소드는 군대 관련 이야기는 없을 거라..그리고 내가 러브코미디를 별로 안 보는 놈이기에 대체 삼얀과 아르망, 그리고 라붕이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에 있어 너희들이 만족할 만한 서사를 내놓을 수 있을까라는 부담이 제일 컸다. 이것 저것 친구한테 추천 받아서 읽어봤는데, 역시 내 취향은 아니더라.

 그런데 막상 이틀 전에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애당초 이건 일상물이고, 러브 코미디 장르가 아닌데. 정작 글 쓰는 내가 이 작품의 장르를 착각하고 앉아 있었다는걸 깨달았다.

 29편 이것만 한 9번은 썼다, 폐기했다. 썼다. 폐기했다를 반복했는데..씨발. 역시 내 ㅈ대로 쓰는 게 최고다. 캐릭터성만 내가 잊지 않으면 그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