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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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음? 요안나. 그게 사실이야?”

-그렇다네. 주군. 작전관이 이곳 생산 인원들을 위해 며칠 간의 휴가를 보내고자 한다네.

“흐음. 라붕이 형님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하하! 꽤 즐거워 보이네만. 주군.

 오르카 1호의 작디작은 개인실. 의미를 알기 힘든 여러 소품이 찬장과 책장을 한가득 놓여 있는 이 좁은 방안에는 한두 명이 눕기에는 충분한 침대와 1인용 테이블이 하나 덜렁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테이블의 앞에 앉아 있는 남성은 이 소박한 방의 구조와 유난스러운 분위기를 즐길 줄 아는 이였다.

“우리도 곧 여름 휴가를 보낼 계획이었는데. 형님이 계신 곳만 일하게 두기는 건 역시 좀 아니지.”

-작전관에게도 미리 그리 설명해두었네. 주군께서도 이맘때면 휴가를 보내니. 이쪽 역시 조금 쉬겠다 한들 무어라 하진 않을 거라 말이네.

“그래? 다행이네. 형님께서 괜히 마음 쓰실 필요가 없는 사안인데.”

 테이블의 앞에 앉아 눈앞에 놓인 홀로그램 너머의 여성과 대화를 나누던 남성, 사령관은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요안나의 현황 보고는 굳이 말하자면 현황 보고라기보다는 라붕이 작전관에 관한 보고가 주를 이루었다.

“거기 날씨가 유독 무더운 모양이네?”

-음. 언제나 덥기는 하네만. 평소보다 더 후덥지근한 것은 사실이라네.

“흐음. 형님이 아니었으면 그 날씨에 괜히 후방 애들만 고생하게 둘 뻔했네. 좋아. 요안나. 형님께 괜찮다고 말씀드려. 전방 지휘관들에게도 내가 일러둘게.”

-음음. 알겠네. 주군. 작전관이나 주군이나. 언제나 바이오로이드들이 우선인 점이 난 참 좋다네.

“..굳이 바이오로이드라는 벽을 우리 사이에 세울 필요가 있을까? 요안나. 사실 따지자면 형님이나 나나. 둘 다 너희 덕분에 잘살고 있는걸.”

 홀로그램 스크린 속 너머의 여성, 요안나의 뒷말에 사령관은 쓴웃음을 거두곤 한껏 진중한 얼굴로 돌아서며 테이블의 한 편에 얹어둔 커피잔에 손을 가져갔다.

딸-그락

“후-요안나. 나는 인간과 바이오로이드, 이 둘에 대한 차별과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워.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쭉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미 식은 지 오래인 커피잔의 내용물을 습관적으로 후 부는 사령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많은 이들을 봤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전혀 변함이 없어.”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말을 잇는 사령관의 언동에 이번에는 요안나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내가 실언을 했네. 주군.

“아니야. 너도 그렇지만. 다른 멸망 전 아이들을 보면..네 생각이 쉽사리 바뀌기 힘들다는 것 정도는 나 역시 알고 있어.”

 사령관이라 불리는 이 미지의 남성이 이 자리에 앉은 지가 어언 3년. 사령관은 그 시간 동안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내었다. 저항군의 규모 확장과 더불어 백전불패의 전설, 그리고 수많은 인원을 적재적소의 위치에 배치하는 인선 능력까지. 그 어떤 작은 결함도 찾아보기 힘든 그였으나, 언제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무거운 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리나 라비아타. 그리고 레모네이드 알파와 무적의 용. 모든 멸망 전 개체들은 하나같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적의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후룩-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작게는 불신을, 크게는 위협을 겪어온 사령관은 처음에는 그녀들의 적의에 대해 기겁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이 무얼 잘못 했었나.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가. 행여 자신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라 생각하기까지 한 그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녀들의 불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그는 깨닫고 말았다.
 

“...요안나. 나는 차라리 내가 기억이 없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해.”

 커피잔 속의 시커먼 내용을 빤히 바라보던 사령관의 머릿속에는 이미 과거 그가 보았던 추악한 인류의 민낯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후우. C구역을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초코 여왕이라 불린 여성의 일기를 읽을 때. 그리고..철의 왕자를 만났을 때. 내가 저들과 다르다는 것에 얼마나 기뻤던지.”

 C구역으로 들어서려는 자신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르망의 눈빛, 인간적인 예우를 해준다 한들 결국에는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이라는 벽을 허물지 않았던 초코 여왕. 그리고 바이오로이드들을 물건 이하로 취급하는 철의 왕자. 사령관은 3년간 자신이 보아온 멸망 전 인류들의 유산과 사상에 미간을 찌푸렸다.

“난 그들과 달라. 그리고 너희들과 다르지 않아. 비록 지금은 내가 이렇게 막중한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기에 앉아 있을 뿐. 만일 이 전쟁이 끝을 맺는다면..”

-..그때는 주군의 마음일세. 그 누구도 무어라 하지 않을 것이네.

“..그래. 그리고 이 생각은 형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야. 난 적어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어.”

딸-그락

 오른손에 들린 커피잔의 손잡이를 살포시 내려놓는 사령관의 얼굴은 어느새 밝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지독하리만큼 멸망 전 인류에게 불신을 가지던 그에게 있어, 라붕이 작전관의 존재는 더없이 든든한 것이었다.

“형님의 덕분에 깨달았어. 내가 별종이 아니라는 걸. 세상 모든 인간이 펙스의 노괴들처럼 지독하리만큼 악독하지도 않았다는 것 역시 깨우쳤지.”

 눈을 뜬 이래 처음 만난 새로운 인간 남성, 라붕이 작전관. 사령관은 처음 그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때의 흥분감과 불안감을 떠올리며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지휘관들은 모두 그를 의심하기 바빴지. 그가 혹시 멸망 전 인류와 같은 몹쓸 인간이 아닐지. 혹 오메가의 수작이 아닐지. 그리고..”

딸그락-!

“..나 역시 처음에는 형님이 어떤 인간일 지에 대한 기대감도. 그리고 불신도 있었지만. 뭐. 지금 와서는 이런 이야기는 다 지나간 이야기지. 안 그래? 요안나?”

-..맞네. 주군.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이야기일세. 내 주군께 괜한 소리를 했네.

“아니야. 요안나. 덕분에 나도 지금 그때의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으니까.”

 요안나의 짤막한 사과에 사령관은 평온한 얼굴로 다시금 커피잔에 들린 내용물을 조용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평온한 오전의 한때, 사령관에게 있어 지금만큼 평화로운 시간이 없었다.

“요새 전방도 덜 시끌벅적하고. 형님 쪽도 별다른 문제 없이 흘러가는 걸 보니 지금만큼 쉬기에 적절한 때가 없어.” 

-주군도 이제는 여름휴가를 구상하는 중이겠네만. 내 주군의 귀중한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것 같으니 이제는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네.

“응. 수고했어. 요안나.”

-다시 주군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네. 후후.

삑-!

 스크린 속의 여성이 짤막한 작별인사와 함께 모습을 감추자 사령관의 얼굴에 걸려있던 여유로운 미소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후우우우..”

 커피잔을 천천히 다시 컵 받침 위로 내려두는 사령관의 미간에는 아까와 달리 깊은 주름이 그려져 있었다.

“..왓슨. 왜 그래?”

 코앞의 홀로그램 모니터를 향해 긴 한숨을 푸-내쉬는 사령관의 행동에 요안나와의 통신 이전부터 방 내의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주홍빛 머릿결이 인상적인 여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아니. 그게..”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라도 있어? 그 라붕이인가 하는 인간님에게?”

“...미심쩍기보다는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음..”

 계속해서 말을 돌리는 사령관의 언동에 리엔이라 불린 여성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미심쩍은 부분이 아니라면..우리 왓슨이 그 인간님에게 무언가 다른 고민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

“..다른 게 아니라. 그..내가 형님께 말이지.”

 사령관에게 있어 리엔이라는 여성은 유독 특별하게 다가온 여성이었다. 처음에는 가상 현실 세계에서 마주한 한 토모 개체에 불과했으나, 그 가상 세계 속에서 그녀와 셜록이라는 남성과 몇몇 사건을 겪고 난 이후부터 리엔은 그에게 ‘친구’라는 존재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어머. 왓슨의 형님이 되셨구나? 그 인간님."

 그러한 배경 탓인지, 사령관은 남몰래 끙끙 앓던 문제를 그녀에게 술술 읊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형님이라고 호칭을 붙인 건 내 독단이야.”

“어머.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뭘까?”

“음...형님은 계속해서 나랑 그 거리? 응. 거리를 유지하려고 드는 것 같기도 했고. 메시지이긴 하지만 항상 보내오는 문자 내용도 좀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그래서 못 참고 괜히 풀 악셀을 밟았구나. 후훗. 왓슨답네.”

“..그렇지 뭐. 사실 내가 형님께 원했던 관계는 그런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었거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리엔과 달리 쓴웃음을 지울 줄 모르던 사령관은 뒷말을 살짝 흐리며 불이 꺼진 검은 화면의 위를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둘의 대화 소리만 넘실거리던 방안에 누구인지 모를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삑-!

-나는 그때 친구라는 말이 국산말인 줄 알았는데, 국어선생 얌생이가 칠판에 ‘친할 친’자에 ‘옛 구’자를 써서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귄 벗이라고 썼던 게 기억난다. 억수로 멋있는 말 아이가?

“..이건 영화의 한 대목이야?”

“응. 워울프들이 좋아하는 멸망 전 영화 중 하나. ‘친구’라는 영화야.”

“..왓슨. 그러면 오히려 형님이라는 호칭은 친구라는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닐까?”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말소리와 사령관의 말소리를 번갈아 듣던 리엔은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로 돌아섰다. 턱을 매만지며 어떤 조언을 그에게 해줄까하고 그녀가 잠깐 침묵을 유지하는 사이, 사령관은 둑 터진 물살처럼 계속해서 자신의 고민을 그녀에게 토로하였다.

“아니. 사실 친구든 형님이든. 나한테는 그게 그거야. 리엔.”

“응? 어째서?”

“..이 세상에 발견된 인간 남성은 아직 형님과 나, 둘뿐이잖아.”

“응응.”

“처음에는 형제든 친구든.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닥터의 작업실에서 눈을 뜬 형님이랑 마주한 순간 딱 내게 감이 오는 거야.”

 사령관은 찬찬히 말을 읊어가는 한편, 라붕이 작전관과의 첫만남을 회상했다. 갑판에서 피를 줄줄 흘린 채 슬레이프니르에게 실려 왔던 그가 설마 눈을 뜨자마자 자신에게 날린 대사가 필승이라는 우렁찬 경례일 줄이야.

“형님의 경례 목소리를 듣고. 또 지휘관들에게 보이는 각진 행동을 보는 순간 느꼈지. 아, 이 사람은 내 형님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으음. 그렇게 들으니까 어쩐지 사령관보다 좀 사회생활? 응. 그런 게 더 눈에 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오네.”

“그래. 그 깐깐한 마리나 용마저 형님에 대한 경계심을 빨리 허물었다니까. 나도 처음엔 그 둘한테 쩔쩔매었는데.”

“후훗. 지금은 그 두 사람이 왓슨에게 쩔쩔매지만.”

 리엔의 짤막한 태클에 사령관은 쓴웃음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사실 그녀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모습이 멸망 전 인류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 가장 큰 어필 포인트였으나, 도대체 저 섬에 있는 남성에게는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맹점이었다.

“일전에 메리가 그렸던 그..아. 음...어..”

“..그 그림이 좀 어지간히 충격이긴 했나 봐? 왓슨.”

“..응. 설마 멸망 전 문화 속에 그런 게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여태껏 왓슨이 챙겨보던 건 아무래도 이성 간의 로맨스뿐이었으니까. 모를 만도 했어.”

“..하여튼 괜히 형님께 쉽사리 다가서려 했다간 그런 방향으로 오해도 사겠다 싶어서인지. 요새는 내가 더 딱딱해진 느낌이랄까. 뭐랄까.”

“...”

“사실 내가 일방적으로 형님, 형님 부르는 거지. 그마저도 라붕이 형님은 처음 내가 대차게 형님이라고 부를 거라고 말하니까 꽤 많이 당황해하시더라고...후우.”

“...흐음. 왓슨의 고민, 이제는 대충 감이 오는데?”

 골머리를 싸매며 어떻게 라붕이 작전관과 돈독한 우애를 쌓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령관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던 리엔은 눈길을 허공에 돌린 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이윽고 그녀는 오른손으로 망치를 만들어 제 왼손바닥 위를 톡하고 내리쳤다.

“왓슨. 왓슨은 게임 속에서 만났던 셜록을 어떻게 생각해?”

“응? 셜록? 셜록은 당연히 내 친구지. 비록 가상 현실 속이었다지만 나 역시 그에게 배울 점이 많았어.”

 리엔의 물음에 사령관은 눈썹을 살짝이 들어 올리며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셜록이라는 남성에 대한 제 생각을 술술 내뱉었다. 비록 실제로 만난 사람도 아니고, 또 이미 죽은 지 한참이 지난 인물이지만. 사령관에게 있어 셜록은 그 누구보다 활동적이고 또 믿음직스러운 남성이었다.

“셜록은 언제나 활기찼지. 수많은 난관 끝에 진실을 찾아낸 셜록만큼 나 역시 이 세계의 진실을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눈앞의 여성이 복원된 그 날. 사령관은 리엔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셜록을 추도하였다. 그건 사령관에게 있어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추모해보는, 또 누군가를 떠올려 보는 아주 진귀한 시간이었다.

“그렇지? 후훗. 왓슨은 정말 마음 씀씀이가 좋다니까.”

“그런데 셜록이 갑자기 왜?”

“흐응~왓슨은 어떻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셜록에게 친밀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이건 대답할 수 있겠어?”

“...으음. 아무래도 그 세상에서 여러 난관을 함께 넘기다 보니..”

“응응. 바로 그거야! 왓슨!”

“응?”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리엔의 행동에 사령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신이 내뱉은 말 속에 담긴 뜻을 스스로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셜록에게 내가 친밀감을 느낀 이유가..난관. 난관? 혹시?’

“왓슨. 사람과의 관계는 누구 하나가 막 밀어붙여도, 또 누구가 막 멀어지기만 해도 쉽게 무너지는 법이야.”

“...응.”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그 라붕이라는 인간님은 여기에 아주 잠깐 머무른 게 다라고 하던데?”

“응. 형님이 이곳에 오자마자 후방으로..”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던 거야! 기껏 해봐야 문자 몇 통. 통화 몇 번. 이걸로 어떻게 친해져? 아무리 왓슨이 그 인간님에게 다가서려 해봤자, 반대로 그 인간님은 왓슨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역시. 역시 그렇겠지?”

"왓슨이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참된 동성 인간이기에 반갑지만. 그 인간님 입장에서는 왓슨은 뭐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거니까. 경계부터 먼저 하겠지."

 리엔의 확신에 찬 말소리에 이번에는 사령관이 턱을 짚고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형님과 같은 인간을 기다리던 나한테 있어서 형님은 친근해지고 싶은 대상이지만. 형님에게 있어서 나는 뜬금없이 다가오려는 무례한 이미지로 보일 수도.’

“남성 경력 전무! 그게 왓슨의 맹점!”

“..그건 이미 수차례 지휘관들에게 지적받았어. 특히나 칸이나 아스널에게는 더욱더.”

 검지를 척 세우며 허리를 꼿꼿이 펴는 리엔의 지적에 사령관은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서 어떻게든 그에게 조언과 지적을 내주어도 마음만 급했던 그였기에 지금과 같이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이라.
 리엔은 그러한 점도 알겠다는 듯 이번에는 사령관의 볼 위를 콕콕 찌르며 장난기가 가득 묻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후훗. 불굴의 마리 소장님이나 무적의 용 중장님. 거기에 라비아타 전 통령처럼 인간에게 벽을 쌓은 분들에게도 먹히는 왓슨이 겨우 남성 한 명에게 이렇게 매달릴 줄은 몰랐네~”

“...음. 뭐. 나도 새롭긴 해. 이런 내가.”

“빠르게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왓슨의 장점 중 하나야. 하여튼 왓슨, 내가 해주고 싶은 조언이 뭔지 알겠어?”

“...혹시 라붕이 형님과 내가 좀 더 같이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걸까?”

“빙-고!”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는 것처럼 싱긋이 밝은 미소를 짓는 사령관을 향해 리엔은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왓슨과 그 라붕이라는 인간님이 좀 더 친해지기 위해서는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더 필요해. 그 대화의 주제가 서로 관심이 있는 분야나 공통된 난관의 극복이라면 더욱더 좋고!”

“..공통된 난관이라. 흐음. 하지만 갑자기 요안나 아일랜드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이유나 시간이 있어야 할 텐데.”

 오르카 1호의 이동 경로는 사령관이 홀로 쉽사리 변경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행여나 그의 위치가 발각될 일을 염두에 두어 무적의 용이 이끄는 무적함대의 호위망이 잠수함의 인근으로 겹겹이 둘러싸 있기에 만일 그가 멋대로 행선지를 변경하려 든다면 그 함대 인원들에게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걱정을 리엔은 가볍게 해결방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유야 차고 넘치지. 예를 들어 최후방 기습 점검이라던가. 아니면 그 섬에 있는 리조트 건물 방문이라던가. 애초에 거기는 휴양시설도 확장하는 중이잖아.”

“..형님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휴양시설의 건설이 예상보다 늦어진다고..”

“그러니까-우리가 더욱더 가야 하는 게 아니겠어? 왓슨?”

“..아하! 그렇네! 우리라면 전문 인력이 차고 넘치니까!”

“응응! 완벽하게 이해했구나? 후훗.”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던 사령관의 목소리가 다시 활기를 되찾자 리엔은 쉼 없이 제 주장을 그에게 펼쳤다.

“그리고 왓슨이 날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였어? 근래 들어 전방의 전선에 오메가 세력의 침입이 옅어진다고 했잖아. 그거에 대한 추리를 물어보려 불렀던 거지?”

“닥터의 보고에 따르면 형님이 특수 작전을 펼칠 당시. 오르카 메인 서버가 일시적인 해킹을 당했다고 해. 혹시 이것과 관련이 있을까?”

“없다고는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겠어. 아마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할 거야.”

“안 그래도 조금 있다가 지휘관들과 그것에 대해 상의하기로 했어. 여러 대책안이 나오긴 했는데..”

“그러면 그것도 하나의 방문 명분이 될 거야. 왓슨. 언제 침공을 당할지 모르는 섬에 왓슨이 직접 방문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든든할 테니까.”

 이제는 막바지에 다다른 그녀와의 대화에 사령관은 처음과 달리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오른손 위에 자신의 양손을 살짝이 포개었다. 그리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그녀에게 전하였다.

“...리엔. 정말 고마워. 역시 믿음직한 친구라니까. 너는.”

“에..에엣. 헤헤헤. 별것도 아닌 문제로 이렇게 칭찬해주면 너무 부담스러운데..”

“별 것도 아니긴. 덕분에 형님과 어떻게 벽을 허물지에 대한 내 생각이 모두 정리되었는걸.”

“도..도움이 되었으면 그만이고.”

 쑥스럽다는 듯 볼을 긁적이는 리엔에게 사령관은 눈웃음을 그리며 그녀의 오른손에서 양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리엔은 조금 아쉽다는 듯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오른손을 매만지다 이내 그의 홀로그램 스크린 위에 올라오는 여러 보고서에 눈길을 주곤 그에게서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곧 회의 시간이지? 왓슨.”

“응. 형님이 지내는 요안나 아일랜드에 파견군대 말고도 상비군을 주둔시키는 게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인원을 추리느라 좀 시끌시끌해.”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왓슨의 업무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니까.”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 리엔. 다음에는..”

“..다음에 볼 때는 밤이겠네. 기대할게~”

지-잉!
 
 홍조를 붉힌 채 방문을 열고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 사령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서 그녀를 배웅했다. 이제는 평상시와 같은 바쁜 나날이 시작될 터, 어느새 그의 머릿속은 라붕이 작전관이 아닌 앞으로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업무 일지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 보자. 분명 닥터가 형님에게 줄 방탄모를 오늘까지 개발한다고 했었는데..”

 하나둘 자신의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올라오는 갖가지의 보고서들. 사령관은 그것들을 꼼꼼히 읽어가며 오늘 하루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상비군은 지원형식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선발 형식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 오늘 회의 시간에 이야기하기로 했고. 음. 리엔의 말마따나 형님이 계신 요안나 아일랜드 방문 계획도 조정해볼까? 어차피 계획했던 가고시마라는 섬의 방문 일정은 다음 주니까..음.”

 자신 혼자 떨렁 남아버린 방안에서 계속 혼잣말을 해가며 눈으로는 보고서를, 머릿속으로는 가상의 회의를 진행 중이던 사령관은 미처 자신의 자동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서는 한 소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권속? 일하는..중인가?”

“흐음. 우선 닥터에게 개발 진행 척도를 물어봐야겠어. 그게 완성만 되었다면 내가 형님의 섬에 방문할 이유가 하나 더 느는 셈이니.”

“...히잉.”

 발소리도 내지 않은 채 조용히 방안에 들어선 연푸른빛 머릿결의 소녀는 자신에게 눈동자조차 돌리지 않는 사령관의 모습에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수없이 관람하고 들어온 소녀는 조용히 방의 한구석으로 걸음을 돌렸다.

“우선 회의 내용을 정리해둔 보고서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사령관의 검지에 점차 가속도가 붙으려는 무렵, 흰색의 보고서들이 줄지어 올라와 있던 그의 화면 위로 어떤 이의 통신이 갑작스레 들이닥쳤다.

삑-

“응? 닥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별일이 있어야 내가 통신을 걸어? 흥! 요새 오빠 나한테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 통신을 걸어온 소녀의 등장에 사령관은 너스레를 떨며 그녀와의 대화에 임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 위에 들린 진한 녹색의 모자에 사령관의 눈이 반짝대었다.

“하하! 너무 그렇게 삐지지 마. 근데 머리 위에 그건 뭐야?”

-우리 오빠가 그렇게~걱정하는 라붕이 오빠한테 줄 선물!

“아! 설마 그거 완성됐어? 정말로?”

“...”

 화면 너머의 밝디밝은 목소리에 사령관 역시 반색하며 그녀의 머리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반색하는 것을,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소녀 역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스!”

-나이스! 나이스!

“..히잉.”

 밝은 목소리로 소녀와의 대화에 임하는 사령관, 그는 어느 때보다 밝고 활기찬 목소리로 화면 속의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때는 호기심을, 어떤 대목에서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가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령관의 모습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던 소녀는 그와 그녀의 대화에 귀 기울이다 둘의 대화에 끝맺음이 나려 하자 다시 조용히 발걸음을 그에게로 가져갔다.

“좋아. 우선 다수의 수량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그건 네가 보관해둬. 괜히 네 말처럼 분란이 생기면 나도 머리가 아프니까.”

-어쨌든 나 이제 좀 잘게. 며칠 내내 잠도 안 잤더니 피곤해. 하아암~

“응. 수고했어. 닥터. 푹 자.”

-물건은 테이블에 올려둘 테니까. 심부름꾼은 알아서 보내. 오빠.

“응응. 자고 일어나서 봐.”

 그리고 어느새 대화를 끝마칠 때가 다가온 사령관이 화면 속의 소녀와 짧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어느새 그의 곁에는 착-달라붙은 연푸른빛 머릿결의 소녀, LRL은 뾰로통한 얼굴로 그의 옆모습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권속! 어째서 짐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느냐!”

“어? LRL? 언제 왔니?”

“권속이 업무를 보고 있을 때부터다! 히잉!”

“하..하하하! 미안해. LRL. 내가 미처 신경을 못 써줬어. 사탕 먹을래?”

“..권속. 짐은 참치캔이 더 좋다.”

 의미불명의 검은 안대로 오른쪽 눈을 가린 LRL은 사령관이 선뜻 건네는 알사탕들을 챙기는 한편, 그에게 자신이 원하는 공물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공물 요구에 사령관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서랍 아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음..참치캔. 참치캔이라..”

덜그럭-덜그럭

“잠깐만. LRL. 분명 여기에 하나 뒀을 건데..”

“..권속. 권속.”

“아. 찾았다. 자, 여기. LRL. 참치캔..”

“혹시 짐에게 부탁할 것이 없느냐?”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LRL.”

 밖으로 드러난 샛노란 왼 눈동자를 반짝대는 LRL의 물음에 사령관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령관은 이어지는 소녀의 설명에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미가 그랬다. 남에게 무언가를 바랄 때는 그 사람의 희망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후후. 그렇네. 그럼 LRL에게 내가 무언가 부탁하면 LRL은 내게서 참치캔을 받아가면 되는 거네?”

“그렇다! 그러니 짐이 특별히 권속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겠다!”

 윗입술을 앞으로 삐죽 내밀며 무언가 기대하는 눈치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LRL의 눈빛에 사령관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선뜻 그녀에게 한 가지의 부탁을 건네었다.

“그럼 LRL. 바로 한 가지 부탁해도 괜찮을까?”

“응응!”

“닥터의 작업실에 가면 생김새가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그 아이의 작업대 위에 있을 거야. 둥그런 외형인데. 아마 보자마자 눈치챌 수 있을걸?”

“알겠다! 권속! 그걸 가져오면 되는 것인가?!”

“음. 곧장 회의가 있으니까. 여기 말고 작전회의실로 바로 와줄래? 작전회의 중에 설명해야 할 물건이기도 하니까.”

“알겠다! 그러면 권속은 짐에게 줄 공물을 준비해두도록 하여라!”

“알겠어. 뛰지 말고 천천히 와도 된다? 그리고 닥터는 철야 작업 탓에 자고 있을 테니까. 지금처럼 조용히 들어가고. 알겠지?”

“짐을 누구라 생각하느냐! 짐은 사일런스 프린세스! 걱정하지 말아라!”

 사일런스가 아니라 사이클롭스 아니었니. 사령관은 근질근질한 제 입술을 꾹 다문 채 LRL의 연푸른빛 머리카락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기특하네. LRL. 그럼 나 먼저 회의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흐흥! 이 몸이 직접 하사하러 갈 터이니 공물은 챙겨가도록 하여라!”

“그래. 그럼 나중에 봐.”

토-도도도!

 그의 손길이 유독 그리웠던 것인지. LRL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등에 매달린 곰돌이 인형의 다리를 허공에 덜렁거리며 재빨리 방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사령관 역시 몇몇 서류를 챙기고선 그녀를 따라 방문 밖으로 걸음을 나섰다.

뚜벅-뚜벅

 몇 걸음을 복도 위에 내딛던 사령관은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손에 들린 문서들을 하나씩 검수해갔다. 그러다 문득 불안한 상상이 든 그는 시선을 서류 위에서 떼고는 자신의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혹시..음. 아니다. LRL이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그렇게 눈에 띄는 방탄모를 두고 다른 물건으로 착각하겠어? 설마.”

뚜벅-뚜벅

 LRL에게 설명이 부족했던 탓에 행여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까, 내심 초조해지던 사령관은 이내 좋은 생각만 가지자는 마인드로 돌아서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형님께 말씀드리고 방문할까. 아니면 서프라이즈 형식으로 방문할까. 이것도 고민인데? 하하!”

 머릿속에는 이미 라붕이 작전관과 즐거운 여름 방학을 보낼 생각이 가득한 사령관은 홀가분한 웃음 소리를 내며 그 누구도 없는 복도를 힘차게 걸어갔다.

100)

부스럭-부스럭

“...어라? 왜 식료품 창고가 텅텅 빈 것이지?”

 땅거미가 내려앉은 지도 한참이 지난 어두컴컴한 밤하늘의 아래, 영양 생산 시설의 인원들이 퇴근한 지도 한참이 지난 이 늦은 시간에 어떤 한 검은 인영이 아무도 없는 영양 생산 시설의 식료품 창고 앞에서 서성거렸다.

“으으. 분명 매일 적당량을 창고에 비축했을 건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발소리도 내지 않은 채 창고의 앞을 왔다 갔다 하던 검은 인영은 활짝이 열린 식료품 창고의 안이 텅텅 빈 것이 내심 불만스러운 것인지 그 누구도 없는 평평한 길 위에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여기가 아니면 그 비축 창고로 가야 하는데..으으. 어쩔 수 없다. 날씨가 더우니 음식이 빨리 상하려 한다. 지금 비축해둔 음식들을 대신할 식량이 필요하다. 그리고 배..고프다.”

 달빛조차 가린 구름의 탓에 어둑어둑한 대지 위에 옅은 인영만을 드러낸 채 서 있던 여성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꼬르륵대는 배꼽을 부여잡았다.

“차라리 나도 그 취사장에 가서 밥이나 먹을 걸 그랬다. 아마..내가 가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도 못 할 텐데. 으으..”

사락-!

 홀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머리 위에 무언가를 뒤집어쓰자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여성의 인영이 이제는 아예 땅 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이 땅 위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쏴-아아아!

“...비축 창고. 비축 창고로 가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이..”

 발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우거진 수풀 사이를 가로지르는 여성의 눈앞에는 짙은 어둠만이 그녀를 반길 뿐이었다. 그 누구도 쉽사리 발길을 들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을 그녀는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종횡무진 질주했다.

사락-! 사락!

“기껏 해봐야 한두 개다. 그러니 그들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사락!

“..아마 범인이 누구인지 쉽게 찾지도 못하겠지. 애당초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를 테니.”

 긴 세월 동안 혼자서 지낸 탓에 이제는 입에 착 달라 붙어버린 혼잣말, 여성은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 아래로 수심이 깊은 얼굴을 띄웠다.

“본대도 나라는 존재를 있을 터.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도 나라는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나는 대체 이 세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탁-!

 어느새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요안나 아일랜드의 비축 창고의 앞에 도착한 여성은 좌우로 고개를 둘러보다 이내 그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식료품 창고에 들어설 때처럼 발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비축 창고의 내부로 들어섰다.

‘오늘은 식료품 쪽에도 이곳에도 그녀들이 없다. 후우. 다행이긴 하지만 어서 챙길 걸 챙기고 여길 떠야 한다.’

 전등 하나 켜지 않은 어두운 비축 창고의 내부, 앞뒤도 분간하기 어두운 짙은 어둠이었으나 여성의 새빨간 눈동자 속에는 창고의 안을 가득히 메운 컨테이너들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아이는 항상 식료품들을 좌측 상단 쪽에 적재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탁-!

 들릴 듯 말 듯 한 도약 소리와 함께 컨테이너 위로 날아오른 여성은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재빨리 컨테이너의 걸쇠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대충 유통기한은 3일로 추정된다. 그러니 이틀 치 분량만 챙기면..’

끼-이익!

 조급한 마음 탓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유독 심란한 마음 탓인지. 여성은 평소에는 내지도 않던 쇳소리를 내며 컨테이너의 걸쇠를 들어 올렸다. 비록 걸쇠의 눅진한 쇳소리가 적막만이 흐르던 창고의 내부에 한가득 울려 퍼졌으나, 어차피 들을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 판단한 그녀는 거침없이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 재꼈다.

덜-컹!

‘어서 챙길 거 챙기고 여길 빠져나가서 주린 배부터..’

삑-!

“..응?”

 컨테이너의 안을 한가득 채운 박스 중 하나를 골라 그 위에 그녀가 애용하는 단도를 가져가려 할 때, 갑자기 창고의 어느 한구석에서 짤막한 비프음이 들려오자 여성은 재빨리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대충 쓸어내린 먼지만이 한가득하던 창고의 어느 한구석, 그곳에는 그녀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기다란 철봉 같은 것이 하나 꼿꼿이 세워져 있었다.

“...어? 저건..”

 어딘가 이 창고의 내부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의 등장에 여성의 새빨간 눈이 점차 커질 무렵, 이번에는 창고의 온 사방에서 방금 울려 퍼진 비프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삑-! 삑-! 삑-!

“어..어어?!”

 자신의 눈동자 색과 같은 시뻘건 전조등이 어두컴컴한 창고의 내부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자 여성은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좌우로 굴려 대다 그만 자리를 뜰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찰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시뻘건 전조등을 빛내는 철제봉들의 끄트머리에서 강렬한 전자파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삐-이익!

“-꺄아악!”

 피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머릿속으로 헤집고 들어오는 전자파의 영향에 여성은 벙-찐 입술을 다물 틈도 없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전자파가 닿자마자 느껴지는 강렬한 두통,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릿속의 한구석에 들려온 파-직! 하는 소리.

“끄으으..이..이건..분명..떠..떠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여길 떠야!”

 한순간의 방심으로 머릿속에 있던 전투 모듈이 작동을 멈춘 것을 눈치챈 여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릴 새도 없이 재빨리 창고의 문 쪽으로 박차려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이윽고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와 콧노래로 제지당하고 말았다.

뚜벅-뚜벅

“-흐흐흥♪ 흐흥♪”

뚜벅-뚜벅

“대장. 대장은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해?”

뚜벅-뚜벅

“설마 또 파견 분들인 건 아니겠죠? 후우..”

또각-또각!

“히힛. 누가 되었든 오늘이야말로 그 해충을 붙잡고 말 거야.”

“...히익!”

 얼추 들어도 세 넷은 가뿐히 넘어 보이는 무리의 발소리에 컨테이너 위에 꽁꽁 얼어 붙어있던 여성은 황급히 눈길을 문에서 천장으로 돌렸다. 커다란 창고의 구조 탓인지 족히 한 사람쯤은 가뿐히 들어갈 만한 통풍구의 넓이를 눈대중으로 가늠한 그녀는 재빨리 천장의 환풍구 덮개로 도약해 날아올랐다.

탁-!

“제발! 열려라!”

덜컹!

“..후우!”

 창고의 천장에 매달려 환풍구 덮개를 한 손으로 들어낸 그녀는 재빨리 먼지가 풀풀 날리는 통풍구의 내부로 자신의 상체를 비집어 넣으려 들었다. 

“읏-샤! 어..어서!”

이곳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저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비록 전투 모듈은 작동을 멈추었으나 제 어깨를 둘러싼 이 망토의 기능은 여전하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가 통풍구의 내부에 머리를 들이 넣었다.
 
"사..살았다!"

 우격다짐으로 머리와 어깨를 통풍구로 집어 넣은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채 뺨 위로 올라가기도 전, 그녀는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머. 누가 오셨나 보네요.”

“...어?”

 어두컴컴한 통풍구의 내부,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어떤 이의 호박색의 두 눈동자와 마주친 그녀가 어벙한 목소리를 내자 그와 동시에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쇄도해왔다.

“그럼! 다시 내려가 주세요! 후훗!”

슉-!

“히익!”

타-닥!

 바람을 찢으며 날아오는 것이 무언인지는 몰라도 맞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통풍구의 내부에 걸치고 있던 팔꿈치를 재빨리 회수한 여성은 다시 한번 창고의 내부로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허억..허억..저..저 여자가 왜 대체 저기에..”


“폐하. 물러서 계십시오.”

“그래.”

“..어?”

촤-르륵!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에 여성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 이미 창고의 문 앞까지 도달한 이들 중 어둠 속에서도 푸르른 눈동자를 빛내는 어느 소녀의 목소리에 침입자는 황급히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로 무언가-강렬한 빛줄기가 내리쳤다.

콰-앙!

“-꺄아악!”

 머릿속을 헤집는 고통이 아닌, 머리 위를 내리찍는 강렬한 고통에 휩싸인 여성은 그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를 뒤집고 있던 투명한 후드가 그 충격으로 인해 살짝이 벗겨졌다.

“아으으..대..대체 이게 무슨..”

“..저기 있다! 리제! 소완!”

“알겠사옵니다!”

슉-!

“..어?”

 자신의 후드가 벗겨진 줄도 모르고 있던 여성의 눈앞으로 쇄도하는 두 줄기의 바람이 여성의 양쪽 귓바퀴를 지나 뒤쪽으로 휙-하고 날아갔다. 그리고 그 바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그녀가 눈치를 채기도 전, 그녀의 가느다란 목 줄기 위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연보랏빛 눈동자와 함께 들어섰다.

“...헤..헤에?”

“히힛! 너구나! 내 화단에 멋대로 들어섰던 해충이. 맞지? 응? 너지?”

“...히이이익!”

 생애 처음으로 마주한 누군가의 강렬한 적의, 일전의 바람 탓에 완전히 벗겨진 자신의 후드 탓에 이제는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여성의 앞으로 몇몇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타-악!

“주인님! 리리스가 해냈어요!”

“어차피 예상 도주로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잖사옵니까. 뭘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난리옵니까?”

“폐하. 그녀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대장. 언제봐도 드는 생각인데. 이 누나들, 여기에 있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아? 히힛.”

“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저분들이 아니면 어떻게 이 탈취범을 붙잡았겠어요.”

뚜벅-뚜벅

 점차 자신과 가까워지는 여러 이들의 목소리와 발걸음. 평소 같았으면 자신의 옆을 스쳐갈 뿐인 바람과 같은 것일었을 터인데.

"...이프리트. 노움. 어서 저 녀석을 구속해라."

"네네. 대체 어떤 녀석인지 한번 볼..어?"

"언니. 왜 그러세요? 응? 어?"

"..."

 오늘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두 여성이 연푸른빛 눈동자들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자 리제의 가윗날에 꼼짝도 못하던 침입자는 가만히 고개를 툭 떨구었다.

"왜 그러시옵니까? 어서 저 불순분자를 붙잡지 아니하고."

"그..소완 언니? 혹시 이 녀석을 식당에서 본 적 있어?"

"음? 대체 무슨 일이온진데.."

또각-또각

"...으으."

 점차 자신의 주변을 에워싸는 무리의 발걸음 소리에 불순분자의 고개를 점차 무거워졌다. 딱히 포승줄을 두르지 않아도 이미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만 그녀는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해 창고의 바닥 위에 풀썩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뚜벅-! 뚜벅!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으로 그녀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힘찬 군홧발 소리가 멈추어섰다.

"흐음. 그래. 너냐? 쥐도 새도 모르게 우리 동네를 헤집고 다니던 녀석이."

"..."

"어두워서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네. 아르망."

"예. 폐하."

촤-르륵!

"으읏!"

 어두운 창고의 한가운데서 갑자기 퍼져 나오는 밝은 빛에 언제나 어둠 속에 숨어 지내던 여성은 저도 모르게 팔로 얼굴을 가리려 들었다. 그러나 그 행동 탓에 그녀의 양팔에 기다란 밧줄이 휘감겨 들었다.

"노움! 그쪽 꽉 묶어!"

"네! 언니!"

"으..이..이러지 마라! 나..난 아무것도 안 했다!"

"안 하긴! 네가 범인이잖아! 아니. 애당초. 너 어디서 온 녀석이야?!"

 자신의 양팔을 꽉 조으며 푸르딩딩한 눈매을 드세우는 분홍머리 소녀의 기백에 이제는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침입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아르망의 책자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 아래 온전히 외관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에 제일 처음 그녀와 조우했던 블랙 리리스는 눈썹을 씰룩였다.

"...호오. 당신. 외관을 보니..아하. 그래서 저희가 당신을 못 알아챈 거였네요. 후훗. 정말이지. 이름대로 유령같은 분이네요."

"하으으.."

 연보랏빛의 머릿결을 가지런히 뒤로 한데 묶어 정리한 정돈한 외관. 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연보랏빛 구렛나루 아래로 이어진 날카로운 턱선과 새빨간 눈동자.
 성숙한 몸체를 판초우의와 비슷한 모양새의 망토로 가린 채 다소곳이 주저 앉아 있는 이 여성의 모델명은 다름아닌..

"..팬텀이었사옵니까? 흐음. 이런 자는 취사장에서도 보지 못했사옵니다. 대체..어디서 온 분이옵니까?"

팬텀이라는 명칭과 같이 언제나 제 모습을 은폐하는데에 있어 스페셜리스트와 다름없는 그녀의 등장에 블랙 리리스와 소완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녀 둘을 제외한 이들의 눈빛은 그리 그녀를 달갑게 여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출신 따위는 안 궁금해. 이 해충 때문에 동생들이 마음 고생한 걸 생각하면..햇츙!"

"폐하. 그녀의 처우를 제게 맞겨주시겠습니까? 하루면 됩니다."

"으으으!"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 그녀들의 순수한 적의. 팬텀은 전투 모듈마저 잃어버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곤 리제와 아르망, 그리고 이프리트와 노움의 차가운 시선에 망토로 숨긴 제 어깨를 부르르 떨어댈 뿐이었다.

'이..이럴 줄 알았다. 나는 어딜 가도 환대받지 못할 녀석이었다. 흑..'

 결국에는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인가. 팬텀은 지난 3년 간의 고생들을 떠올리며 눈물샘을 글썽였다. 언제나 홀로 추위를 견디고, 더위를 견디던 나날. 갈 때마저 이렇게 타인의 경멸어린 시선을 받으며 가야 한다니.

'그저..그저 이 외로움만 떨구고 가고 싶었는데. 어차피 내 소망 따윈 한낱 도구의 바람일 뿐이었다.'

"..흐끅. 흐끅..."

"...이봐. 야. 야. 임마."

"...?"

 자신의 처량한 삶을 되돌아 보며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던 팬텀은 어느새 자신과 눈 위치를 맞추려 제 앞에서 무릎을 굽힌 남성의 부름에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영락없이 쥐새끼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큰 놈이었네. 크크."

"...왜..왜 날 그렇게 바라보는 건가?"

 소완이나 블랙 리리스처럼 무심한 눈빛도 아닌, 그렇다고 제 주변을 둘러싼 다른 여성들처럼 적의가 한가득 담긴 눈빛도 아닌.

"어디 보자. 여기 쯤에 넣어뒀는데.."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붕이 작전관의 중얼거림에 팬텀의 시선이 코트 아래를 뒤적대는 그의 행동에 고정되었다.

"아. 찾았다. 야."

"나..나 말인가?"

"여기서 너 아님 내가 누굴 찾겠냐? 지금."

슥-!

 오른손에는 기다란 검은 지휘봉을 감추곤 왼손에 들린 기다란 살색의 무언가를 자신에게 내미는 그의 행동에 팬텀은 울먹이던 것을 멈추곤 제 앞에 놓인 물건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이건 뭔가?"

"..넌 소세지 별로 안 좋아하냐? 크크크."

"에..?"

"안 먹을 거냐? 배고파서 몰래 들어온 거 아니냐."

"...어..고..고맙..으으!"

"고맙단 소리도 하기 힘드냐? 흐흐흐."

 그렇게 팬텀은 그날, 생애 처음으로 타인에게 무언가를 선물받는 진귀한 경험을 가졌다. 그 물건이라는 게 소시지 한 개라는 것이 그녀에겐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아..아니다! 고맙다! 인간!"

탁-!

"옳지. 옳지. 그래. 만나서 반갑다. 크크크!"

'이..이 인간이 대체 무슨 연유로..내게 이걸 준 거지? 여전히 속을 모를 인간이다. 그..그래도..헤헤.'

 하지만 그런 들 어떠하리. 팬텀은 눈앞의 남성이 내미는 소시지 하나를 조심스레 받아쥐었다. 그렇게 한적한 어느 여름날의 밤, 섬에 숨어있던 유령이 드디어 어둠 속에서 달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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