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유별난 구석이 많았다. 대세나 유행에서 벗어난 마이너한 것을 좋아하는 면이 있었어서 간혹가다가 오컬트적인 것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이곳 저곳에서 긁어모은 으스스한(물론 그녀만 으스스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이야기들을 하루종일 해대곤 했는데, 그런 그녀가 중학교 2학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보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실은 거짓이라면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 눈을 신용하지 못하겠어.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이 받아들이는 정보야말로 정말로 진실된 것 아닐까?'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감각의 각도를 틀어보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귀신이라던가. 그런 뜻이겠지. 어쨌든 나는 그녀가 그런 종류의 이야기들을 할 때 마다 또 헛소리나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질끈 눈을 감고있다. 그녀는 이후로도 '오감 중에서 시각은 가장 믿을 수 없는 감각이니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라는 주장을 펼쳐 지론으로 삼았고, 지금 나는 그 지론에 기대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저 나를 놀리기 위한 그녀의 짓궂음의 산물인지도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의 지론을 지지한다.


팔뚝에 펼쳐져있는 촉각이 움찔 반응한다. 무언가가 살살 어루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비벼대는 것 같기도 하다. 청각이 제멋대로 정보를 받아들인다. 인간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시하고 계속 눈을 감고 있는다. 눈꺼풀 한 장 너머에 있는 외계로부터 최대한 오감을 차단하기 위해 아무 생각이나 해본다. 그래. 그녀의 지론에 힘을 실어보자. 그러는 것으로 의식도 외계와 차단하는 것이다.


시각은 가장 신용할 수 없는 감각이라는 그녀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반사된 빛은 각막, 동공, 수정체를 지나면서 수어번 굴절된다. 그렇게 망막에 투사되면 시신경에 의해 처리할 정보로 변환되어 시상침을 거쳐 후두엽에 이르고 또 다시 두정엽, 편도체, 측두엽에 가서야 처리된다. 처리되면 끝인가? 아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각 개인의 고유한 사고방식이나 편견이 가세하여 시각정보의 재구성에 크게 간섭한다. 보라. 몇 번의 굴절과 복잡한 경로를 거치는 것도 모자라 사고회로의 간섭까지 받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지론은 옳다. 오컬트적으로 접근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뻥이요!"


파열음에 의해 진동한 공기가 달아난다. 느닷없이 날아든 굉음에 반사적으로 눈을 떠버렸다.


"씨발..."


"뭐야? 왜 다짜고짜 욕을 해?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도 안하다가. 눈은 또 왜 감고 있었어?"


"좀... 닥쳐 봐."


궁시렁대는 확성기를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내 눈은 여전히 이 곳을 저잣거리 시장으로 보고있다. 그 외에 다른 무언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확성기의 말과 다르게 보이는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해도,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도 이 곳은 시장이라고 알려온다. 방금 들린 굉음 뒤에 나는 뻥튀기 냄새, 수상생물 특유의 냄새, 상당한 인파가 부딪힐듯 말듯 지나쳐가는 감촉.


그리고 아까부터 오른쪽 팔뚝에서 느껴지는 금속질의 무언가.


고개를 내리기 싫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 


"와와 인간 아져찌야."


혀짧은 말투에 어울리는 앳된 목소리다. 시야 한구석에서 가물거리는 실루엣으로 보아 어린애인듯한데, 허리아래에서 팔뚝에 비비적댄다는 거리감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한가지 위화감이 계속, 확인하는 것을 망설이게 한다.


"떽! 욘석! 떨어지지 못해! 아이고! 죄송합니다. 추기경 님. 추기경 님이 동행하시는 걸 보니 귀하신 손님인 듯 한데, 제 딸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괜찮아, 괜찮아. 이 인간이 여기 처음와서 그래."


목소리에 노이즈가 껴있다. 확성기를 추기경이라 부른 방금 목소리에도 노이즈가 껴있다.


멋대로 들어버린 확신에 못이겨 고개를 내렸다.


"앙뇽하세용. 인간 아져찌."


"으아아아악!"


검은 색의 둥그런 무언가에서 다급히 팔을 빼고 거리를 벌렸다. 의도치 않게 확성기 뒤에 숨어버리고 말았다.


"아, 거 참. 애가 놀랐잖아. 애 처음 봐?"


"놀란 건 나야! 이 씨발 확성기야! 저게 어떻게 애야!"


"뭐라!? 씨발!? 야! 애 앞에서 할 말 못할 말이 따로 있지, 왜 욕을 해! 이 별종새끼야!"


"우에에에엥..."


빠르게 오가던 인파가 어느새 에워싸듯 주위에 모여있다. "어머어머, 애를 울렸어… 어쩜 저래.'  '아무리 인간이라도 저건 좀" 나보고 들으라는 듯한 웅성대는 소리들이 들린다. 애라고? 저게? 기억하기로, 지금 노이즈섞인 울음소리를 내고있는 저 철충은 나이트 칙이라는 녀석이다. 나이트 칙이라는 개체의 본래 크기는 모르겠지만, 높이는 내 허벅지 언저리까지 오는 것 같고, 굵기는 내 몸통만 하다. 머리에 해당하는 부위에는 분홍색 끈이 둘러져있고 매듭은 앙증맞은 리본으로 되어있다. 동체 전체에는 연지색... 거적대기가 덮혀있는데, 잘못보면 마치 옷이라도 입은 것 같다고 착각할 모양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추기경 님과 손님께서 다투실 일이 아닙니다! 아이교육을 잘못시킨 못난 제 탓입니다! 녀석아! 그만 울고 어서 사과드려라!"


청색 거적대기를 두른 빅 칙이 한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빅 칙이 아버지고, 지금 저기서 노이즈랑 기계음 섞인 목소리로 우는 저게 딸인거야? 가족이라고? 철충이?


"아니야. 사과할 놈은 따로있어. 야이 새끼야! 당장 애한테 사과 해!"


확성기가 버저를 울리며 소리친다. 버저 소리는 숲에서 듣던 것보다 간결하지만 맹렬하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군중이 요동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저들이 이상한 건가. 그건 그렇고, 이 확성기. 부탁하는 입장인 주제에 아까부터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새끼? 생각해보니 열 받는다. 할 말 못할 말 못가리는 건 이 놈이다.


"야! 이게 네가 한다던 증명!" "그만!"


당찬 목소리가 군중 속에서 뛰쳐나왔다. 모두가 돌아본다. 막 군중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낯설다면 낯선 이였다. 바이오로이드인 건 알겠는데, 라스트 오리진의 배경지식이 얕아 정확히 누구인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이 요람의 어디에서도 다퉈선 안된다는 걸 잊으신건가요?"


감청에 가까운 흑발, 네온 블루를 머금은 두 눈, 자로 재어 조형한 듯한 상하체의 비율, 가는 허리, 살짝 언밸런스해 보이는 가슴, 시선을 빨아들이는 눈물점.


"오. 촌장. 마침 잘 왔어. 


"조용히 하세요!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시다가 갑자기 오셔서는 소란이나 피우시고!"


촌장이란 자의 일갈에 확성기가 움찔했다. 마이크에서 일어나는 하울링 같은 소리가 고요해진 시장바닥에 울렸다.


박력있다.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되어 시선을 돌린다. 나이트 칙과 눈(?)이 맞았다. 코어의 붉은 빛을 빠르게 명멸시키고 있다. 아무래도 여전히 훌쩍이고 있는 듯 했다.


"그 미안 해."


"갠 갠차나요 죄송함미당... 인간 아져찌..."


잘 들어보면 어린 여자애 목소리 같기도 하다. 섞여있는 노이즈만 뺀다면.


누군가 어깨를 두들겼다. 옆으로 돌아보니 촌장이란 자가 필요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인간 님. 사과가 늦어요."


싱긋 웃은 촌장은 군중 한 켠에 손짓해 길을 열고 말했다.


"대화하기 좋은 곳으로 가요."






* * *





"좀 드실래요?"


촌장이 흰 봉투에서 뻥튀기를 한 줌 쥐어 건네온다. 고소하면서 살짝 달큰한 향이 나는게, 상당히 좋은 원료로 만든 것 같다. 일반적인 뻥튀기라면 텁텁한 냄새가 나는 것이 보통이다. 침이 고였지만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경계센서가 반응한 탓이다.


촌장은 이해한다는 미소를 지어보이고 고개를 돌렸다.


"예쁘죠?"


"그렇네요."


촌장의 말에 따르면, 내가 지나온 삼색동산 (그 장소는 정말로 삼색동산이라고 불린다 한다. 촌장은 어떻게 알았냐며 놀랐다.)은 이 균열의 남쪽에 해당하고 지금 있는 곳은 북쪽이다. 남쪽과 지형은 비슷하나 사방은 녹빛일색이다. 먼 발치에 양이 돌아다니고 소와 말까지 있다. 몇몇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서로에게 외쳐가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다가 도중에 멈춰서서 허리를 굽혔다 편다. 손에 들린 건 삽인 것 같고, 삽에 얹혀진 건 색깔이 거뭇한 걸로 보아 가축들의 배설물일까.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아, 여기에 앉죠."


언덕에 다다르자 먼저 앉은 촌장이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두들겼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초면에 갑자기 그러는 건 좀 어려운데요."


촌장이 두들긴 자리에서 좀 더 떨어진 곳에 앉는다. 잔디는 보드라워 마치 고급스러운 방석과도 같이 느껴진다.


성인 한 명이 껴들어 앉을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촌장과 나 사이에 생겼다. 거리감이 애매하여 좀 더 떨어져 앉을까 고민하던 때에 촌장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존댓말 하시는 인간 님은 어려워요."


"그래도..."


"뭐 어때요~ 그 오르카에도 계셨었으면서. 그렇죠? 추기경 님?"


확성기는 뒤쪽 가까운 곳에서 양들에게 둘러싸여있다. 촌장의 목소리는 메에- 하는 울음소리에도 묻히지 않을 크기였는데, 확성기는 답이없다.


"삐지셨어. 자기 편 안들어줬다고 저러는거에요."


"그게 편을 가르고 안가르고의 문제냐! 애가 울었잖아!"


하울링에 놀란 양들이 달아났다가 다시 확성기에게 모여든다. 저 녀석, 아까부터 못들은 척 하던 건 둘째치고 양에게 꽤 사랑받는 것 같다.


"영희는 제가 잘 달랬으니까 이제 됐잖아요. 인간 님도 확실히 사과하셨고."


촌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인명은 친숙하지만 그 인명이 지칭하는게 설마 철충인가 싶어서 촌장에게 물었다.


"영희는 아까 그 작은 철충을 말하는 건가요? 거야?


빤히 쳐다보던 촌장이 말끝을 수정한 것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인간 님이 울린 그 아이. 착한 애라구요? 다음엔 그러지 마세요."


이런저런 말들이 목구멍에서 엉켰다가 도로 들어갔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은데 뭐부터 물어야할지 모르겠다.


내가 듣고싶은 말을 알고 있다는 것 처럼 촌장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궁금한게 많으시죠? 아, 그러고보니 소개를 안했네요. 저는 레아. 오베로니아 레아에요."


"알고 있어. 여기 오는 도중에 기억났거든. 복장이 내 기억과는 달라서 금방 떠올리기 어려웠어."


"어머! 인간 님은 레프리콘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은데. 제 이름을 기억하시다니 의외네요."


게임 속의 저는 인간 님 취향에 맞았나봐요. 라며 소리내어 웃은 레아가 두 팔로 짤막하게 이동해 거리를 가까이했다. 레아가 다가온 거리만큼 다시 거리를 벌리고 내가 말했다.


"...너도 확성기랑 같아?"


"네. 저도 인간 님 옆에서 인간 님을 보고 있었어요." 양 손을 얼굴 옆에서 펼치고 목소리를 내리깐다.  "유령 처럼요."


빤히 레아를 바라보다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첫 차를 산 날짜는?"


"2019년 5월 4일, 36개월 할부, 국산, 중형."


모델명도 말씀드릴까요? 묻지 않은 것까지 술술 대답한 레아에게 고개를 젓고 손을 내밀었다. 뻥튀기 세 알을 입에 넣어 혀 위에서 굴린다. 아무래도 확성기도 레아도 진짜 유령이었던 것 같다.


고개만 돌려 확성기를 바라보던 레아가 말했다.


"음... 일단 확인 하겠는데요. 추기경 님께 설명은 들으셨나요?"


"들었어. 대충은."


"어떻게 잘 이해는 되셨어요?"


"아니. 저 놈이 횡설수설해서 이해는 고사하고 혼란스럽기만 해."


그럼 그렇지, 하고 레아가 한숨을 쉰다. 확성기 쪽에서 헛기침 같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어짜피 제대로 설명 못할 게 대부분이라 그냥 쉽게쉽게 말씀드리라고 했는데... 죄송해요. 저희 추기경 님이 좀 모자라신 구석이 있어요."


누가 모자라다는 거야! 레아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확성기에게 곁눈질 한 번 안하고 말을 이었다. 양 한 마리가 나와 레아 사이로 달아나듯 지나갔다.


"추기경 님께 들으신 것들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좀 더 알기쉽게 말씀드리려면 얼마나 어떤 식으로 알고계신지 파악하는 편이 빠를 것 같거든요."


나는 확성기에게 들은 것들을 다시 대략적으로 정리하여 레아에게 전달했다. 레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인상을 쓰고, 가끔씩 확성기 쪽을 돌아보고선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말을 마치자 머리가 아프고 혀가 피곤하다. 균열이니 게임이니 세계니 뭐니 하는 비일상적인 것들이 계속 드나든 탓에 목구멍이 저린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대충은 알았어요." 레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보다 잘 정리하셨네요. 추기경 님 설명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나봐요?"


"나빴으니까 따로 정리를 한 거지."


"그건 그래요. 그래도 이해하는게 많이 힘든 무리인 이야기이니까요. 추기경 님 치곤 꽤 괜찮았을 거에요. 자, 그건 그렇고, 죄송하네요. 여기에 오시자마자 다짜고짜 붙잡고 피곤하게 해드려서. 융숭히 대접해 드리는게 먼저인데 말이죠. 이해해주세요. 어디서 편하게 할 수 없는 이야기라"


"괜찮아. 조용해서 좋아. 장소로만 따지면 그 오르카보다 백 배 나아."


레아가 안타깝다는 미소를 지었다. 확성기와 같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산들바람에 녹색이 물결친다. 네 번째로 녹색이 물결치고나서 레아가 입을 열었다.


"먼저 저희에 대해 말씀드리는게 우선인 것 같아요. 어째서 철충과 바이오로이드가 한 장소에서, 그것도 사이좋게 살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눈치셔서요."


"부탁 해."


"아, 그 전에, 숲에서 잠들어있던 인간 님을 돌본 건 저에요. 원래는 추기경 님이 보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인간 님이나 저희 처럼 수분이나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으셔서요.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헤매시더라구요."


"고맙다고 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인간 님의 인생사를 생각하면요. 그래도, 꼭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드릴 테니까요! 그러니까 인간 님을 돌본 건 저라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


"알았어."


"다시 본론으로 가죠. 인간 님. 라스트 오리진 세계관에서의 인류는 어떻게 멸망했는지 아세요?"


"라스트 오리진 스토리는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어서 말이야. 철충들한테 쓸렸다고만 알고있어."


 "맞아요. 그것만 아시면 돼요. 어떠세요? 철충들이 미우신가요?"


"딱히. 게임 속 스토리잖아. 지금의 나하곤 상관도 없는 얘기고."


"여기선 현실이지만 말이죠. 뭐, 인간 님 다운 반응이에요. 그래도, 그래도 말이죠. 인간 님께 미약하게나마 인류애가 남아있다고 쳐보자고요. 그러면 어떠세요? 그러면 철충들이 좀 미우세요?"


"그렇지 않을까."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레아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만약, 철충들이 인류를 멸망시킨게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어떠세요?"


"저 확성기가 말했어. 자각이 없었다고." 검지만 등 뒤로 넘기며 말했다. "뭔가가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레아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고 위협하듯 눈을 크게 떴다.


"믿겨지세요?" 


"믿고 자시고, 어쨌든 인류를 멸망시켰잖아. 뭐, 불쌍하다는 대답이라도 듣고싶은거야?"


후후, 하고 입가를 가리고 웃은 레아가 고개를 저으며 저도 철충들이 미워요. 라고 중얼거렸다.


"어디까지나 옛날에 한해서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잘 지내죠. 무려 철충들이랑요. ……있죠, 인간 님. 이 세계는 인간 님이 사시던 세계와 같이 엄연한 현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작위적이기도 해요. 그것만은 인간 님의 세계와 달라요."


"게임을 현실로 구현해놓은 듯한 세계니까 그렇겠지."


레아는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침묵하더니 1분 정도 지났을 때 깊이 심호흡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는 멸망 전 개체에요. 그 날... 인간 님들이 토치에 지져지는 날벌레떼 마냥 죽어나가고, 한 시간 마다 하나의 도시가 사라지고, 완전히 생지옥이었어요. 아뇨, 지옥 그 이상의 무언가였죠. 그 지옥 위에서 더 이상 인간 님들을 찾아 볼 수 없게 됐을 때, 저는 그 숲에 갔어요. 인간 님이 잠들어계셨던 숲이요. 그 때 당시엔 그 근방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녹색을 가진 곳이었거든요. 거기서 추기경 님과 만나게 됐어요. 혼자계셨고, 그래서 처리하기 쉽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갑자기 스피커 추기경 님이 말을 거신거에요. 우리는 너희와 싸우고 싶지 않다, 라고. 철충들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 보다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싶었어요. 환청이라도 들리는건가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전투를 벌였고, 저는 패배했어요. 갑자기 나타난 돌쇠 아저씨 익스큐셔너에 의해서요. 아, 돌쇠 아저씨는 시장에서 정육점을 운영하시는 분이에요. 어쨌든 이대로 죽는구나 하고 있을 때 추기경 님이 다시 말해요. 익스큐셔너의 말을 들어보라고."


듣고 계시죠? 레아가 살피듯 곁눈질 하는 것에 고개를 까딱였다.


"돌쇠 아저씨가 그랬어요. 의식이 생겼을 때는 한창 인간들을 무참히 도륙하는 중이었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려고 하는데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래도 계속 그만두려고 하니까 나중에 가서는 아예 의식이 신체와 분리된 듯 했대요. 멋대로 움직이는 몸을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나요. 저는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이미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서. 어울리지도 않는 변명말고 빨리 죽이라고 외쳤어요. 외치려 했어요."


"그래서?"


"그 때, 눈을 뜬거에요. 갑자기."


"그... 계시인가 뭔가 하는 거 말하는거야?"


레아가 쿡쿡 웃었다.


"추기경 님은 계시라고 표현하셨나요? 하긴, 추기경 님은 그럴 듯한 표현을 좋아하시니까요. 그래요. 계시라고 쳐요. ……계시라고 하긴 뭐하지만, 갑자기 그런 소리가 머릿 속에서 들리는 거에요. 이 세계에는 정해진 흐름이 있고, 그대로 흘러 갈 것이라고. 지금부터 너는 세계를 넘나들 수 있다고.

멸망 때 하도 험한 꼴을 많이 봤어서일까요. 제 자신이 완전히 돌아버린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익스큐셔너에게 목이 날아갈 상황이었단 말이에요. 보여야 할 주마등은 안보이고 별 이상한 소리나 들리잖아요. 그러더니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 하는 그런 저를 보신 추기경 님은 직감하셨었대요. 이 녀석도 나와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신 추기경 님이 제게 다가왔는데, 가까운 곳에서 쿵-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두통은 가셨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죠. 그리고 이 곳을 발견한거에요. 이 곳과 통하는 엘리베이터를. 균열을."


"갑자기 생겼다는 말이야? 이런 곳이?"


"그건 몰라요. 갑자기 생긴 걸 수도 있고 원래부터 있던 곳인데 드러나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죠. 어쨌든, 저와 추기경 님, 돌쇠 아저씨는 뭔가에 홀린듯이 그 엘리베이터에 향했어요. 아, 참고로, 인간 님이 타고 오신 엘리베이터랑은 다른 거에요. 훠얼씬 큰 엘리베이터 였는데 지금은 사라졌어요. ……어쨌든, 이 곳으로 오고나서 놀랄 새도 없이 저와 추기경 님만 빨려들어가듯이 그 장소에서 사라지고 말아요. 돌쇠 아저씨 말로는 그랬대요. 그랬던 저희가 어디에서 나타났느냐, 바로 제 눈 앞에 계신 인간 님 옆이었죠. 10살이었을 때의 인간 님."


"잠깐! 잠깐만!" 다급히 손짓해 레아를 제지했다. "자그마치 나를 20년 동안이나 지켜봤다고? 그래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아무래도 그건 뭔가 좀 이상한데?"


"다 합쳐서 20년이에요. 여러 번 왔다갔다 했거든요. 체감 상 20년이라고 여기서도 그대로 20년이 지난 것도 아니구요. 인간 님의 생을 나이순으로 지켜본 것도 아니고 이건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저희가 확신하게 되었다는 거죠. 인간 님이 가지고 계신 스마트 폰을 통해서. 그 앱과, 우리 세계와 닮은 다른 세계들을 대조해서."


"계시가 사실이라고."


"맞아요." 내게서 고개를 돌린 레아가 하늘을 본다. 따라서 올려다 보니 하늘에 꽂혀있는 새털구름이 꼭 백조의 깃털 처럼 보였다. "그 흐름이란, 철충들의 완전한 사멸을 뜻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즉, 죽기 위해 태어난 거란 소리에요. 제물인 거죠. 인류저항군을 위한. 그걸 알게 된 저희는 그렇게 이 균열에 숨어든 거에요. 그 이 균열 말인데요. 라스트 오리진에서 들어 보거나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없어."


"추기경 님이 드린 말씀과 제가 이제껏 드린 말씀을 종합해보면 균열이 무얼 뜻하는지 아실거에요."


미안하다. 모르겠다. 사실 미안해 할 이유는 없다. 모르겠어도 빤히 바라보는 레아에게 눈치가 보여서 그럴듯한 답이라도 생각해본다. 시야가 차단되고 미간이 좁혀진다. 


그렇게 수십 초 후에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한숨이었다. 레아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다. 비현실과 같은 현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데,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해서였다.


시야 끄트머리에 검지가 보였다. 레아는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눈만 내게 향하고 있었다.


"설정파괴에요."


"아 그렇군."


"추기경 님이 멋대로 균열이라고 이름붙인 것 뿐이에요. 그냥 설정파괴라고 부르자고 했는데 싫다고 하시더라구요."


설정파괴라고. 확성기 놈, 실존하는 세계니 진짜 현실이니 뭐니 했으면서 이런 면은 영락없이 게임같지 않은가.


"게임 같으면서도 현실 같고, 현실 같으면서도 게임 같네. 그러면서도 엄연히 실재하는 세계라니. 너희가 설명하기 어려워한 이유만큼은 어느 정도 이해됐어."


"감사해요. 그렇게 헤아려주신 것만 해도 엄청난 거에요. 인간 님과 마주할 때가 됐을 때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하고 끙끙댔거든요."


해맑게 미소짓고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뱉은 레아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어떻게 된거야? 듣기로는 철충들하고 험하게 싸워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사이가 좋아서 투닥대는걸로 밖에는 안보여. 동정심이라도 든 거야?"


"그럴지도요."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동행하게 됐지만, 함께 인간 님을 지켜보면서 인간 님이 사시던 세계의 지식을 배우고, 이 균열 속에서 함께 보낸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정이 든 걸지도 몰라요. 그런 것도 있지만, 추기경 님이 맨날 찾아오셔서 지겹게 굴었거든요. 모두 미안하다고. 본인들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지금부터라도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그래서 마음이 흔들렸는지도요. 아,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처음엔 바이오로이드들이랑 철충들이 사는 구역이 나뉘여있었어요. 바이오로이드는 서쪽, 철충은 동쪽."


시장에서 본대로이지만 바이오로이드와 철충이 공존하고 있다고 레아의 입이 못을 박았다. 눈 앞의 이 레아라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그 인간 처럼 행동하던 철충들은? 의문이 또 의문을 낳는다.


그 의문에 레아는, 라스트 오리진 용어 중에서 '통발'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게임에서 레프리콘만 주구장창 모아 키우셨던 인간 님이라면 아시죠? 구조를 바라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찾아다녔던 거에요."


"여기엔 철충이 있잖아. 그런데도 아무런 저항감 없이 공존하게 됐다고?"


"그래서 처음엔 구역이 나눠졌었다고 했잖아요. 뭐, 말은 이렇게 했어도, 저항감이 그렇게 심하진 않았어요. ……인간 님. 인간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바이오로이드는 생각 만큼 강하지 않아요. 감정이 있다구요. 인간과 같이요. 더는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하면 제 손으로 무장을 해제 할 이들은 넘쳐나요. 무엇보다도, 적인 철충 쪽에서 그런 권유를 해와요. 거듭 사죄하면서요. 그럼 끝인거죠. 인간의 전쟁사 속에서도 남몰래 적과 공존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여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세요? 매일 피와 내장을 뒤집어쓰는 걸 누가 좋아하나요? 동료의 시체가 터져나가는 건 누가 좋아하냔 말이에요. 게다가요. 바이오로이드 중에서는 내심, 인간의 멸망을 바라던 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최근에는 오르카의 존재를 알고있어도, 인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류저항군에 합류하길 거부하는 이도 있었구요."


이상할 건 하나도 없어요, 라고 냉랭하게 말을 마친다. 나는 다음 의문에 대해 물었다.


"그럼 철충은? 철충들은 어째서 저렇게 인간같이 구는건데? 거적대기를 옷인 것 마냥 걸치고, 시장바닥에서 생선이나 고기를 팔아대잖아. 뭐가 어떻게 되서 저렇게 된건데?"


"추기경 님을 따라서 균열에 들어온 철충들은 다 저렇게 되던데요? 바이오로이드는 철충들의 말을 알아듣게 됐고요. 여기는 설정파괴 그 자체에요. 설정이 파괴된 철충들은 모두 저런 식으로 변하는 건지도 모르죠."


"허어..."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좀 과열되어서 실례를 저질렀네요. 용서해주세요."


"아냐. 죄송할 거 없어"


그래. 죄송할 거 없다. 냉랭해졌던 말투 따윈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러우니까. 레아는 본인이 확성기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였다. 그리고 아니나 달라, 이후에 계속 이어진 레아의 설명은 확성기가 말한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표현만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한 번 더 정리해본다. 바이오로이드들의 패배는 '사령관'의 등장 전까지 였으며, 그 때 까지의 흐름은 철충과 인류저항군의 대립구도를 구축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구도는 철충의 철저한 패배로 이어지고, 인류저항군은 먼 미래에 광복과 환희에 젖어 미쳐날뛴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1255059의 세계와 완전히 같았던 다른 세계들에서의 철충들의 말로, 바이오로이드 입장에서 그려진 라스트 오리진이라는 앱, 그 라스트 오리진을 제작한 제작자들의 공식발언들이다. 여기서 또 파고들어가 라스트 오리진의 세부설정들은 '균열의 영향'을 받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거스를 수 없는 이유는 모른다. 그냥 라스트 오리진이라는 앱과 완전히 동일한 세계이기에 그런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레아는 이 세계에서 '라오의 설정'은 법칙과 같다고 덧붙였다. 중력의 발생원인을 몰라 법칙이란 단어로 뭉뚱그려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어이, 인간." 


레아의 한숨과 함께 대화가 일단락되자 확성기가 끼어들었다. 확성기는 뭔 짓을 하고 왔는지 온몸에 검댕같은 것이 잔뜩 묻어있다. 구리구리한 냄새가 나는 걸로 봐서 아마도… 가축들의 배설물 같았다. 


"얘기 끝났으면 따라 와. 어짜피 이 이상 설명해도 이해하기는 무리야. 그냥 직접 눈으로 보면서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하는 수 밖에 없어. 해당하는 상황이 오면 너희 세계에서 말하는 설명충 마냥 부연설명이라도 해줄테니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고."


그렇게 말하고 확성기는 숲에서와 같이 알아서 따라오라는 듯 떠나갔다. 레아는 그런 확성기에게서 뭔가를 알아챈건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돌아봤다.


"보여드리고 싶은게 있어요."


그 뒤로 몇 분, 몇 시간을 걸었는지는 모른다. 개울을 건너고 들판을 지나, 조금 가파른 산을 올랐다. 오고가는 이가 많은 등산코스라도 되는건지 길이 잘 정돈 되어있어 몸에 무리가 가진 않았다. 또 한가지 다행인 부분이 있었다면 8월임에도 이 균열은 그다지 덥지 않았다는 점이다. 산 속이라는 걸 감안해도 말이다.


이름모를 산새들의 지저귐과 잊을만 하면 들려오던 매미들의 울음소리는 정상에 다다르자 모두 사라졌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체감상 높이에 어울리지 않는 호수가 정상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호수 주위로는 레아와 함께 있었던 초원이 연상되는 녹색이 가득하다. 비슷한 장소에 빗대본다면 백두산 천지가 그려지는 풍경이다.


"여기에요. 이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레아의 앞에 있는 그것은, 동상이었다.


한쌍의 남녀와 그 사이에 있는 어린아이가 나란히 서서 손을 맞잡고 있는 동상. 가족을 표현했다는 느낌이 물씬 든다.


동상의 뒤로는 거대한 회백색 벽이 호수 한 켠을 따라 세워져있다. 벽의 끝에서부터 반대편까지 5분은 걸었는데도 아직 끝이 남아있다. "추모비에요. 인간 님들을 기리는." 앞서 천천히 걷던 레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무엇을 기리는 추모비인지 짐작이 가서 따로 숙연해지진 않았다. 이것을 세운 자들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랬고, 1255059 세계의 인류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분강개할 일이니까. 다만, 추모비 곳곳에 새겨져있는 무궁화 문양이 신경쓰여서 레아에게 물었다.


"무궁화의 꽃말이 뭐야?"


"영원."


대답한 것은 레아가 아니었다.


"무궁화가 의미하는 영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원히 잊지 않을 거니까. 그래서 무궁화야."


"…쳇."


난데없이 치고들어오기는. 쓸데없이 목소리는 왜 잠겨있었는지 모르겠다. 


추모비의 중간에 다다르자 확성기가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신경에 거슬려 뒤를 곁눈질에 확인해보니, 확성기는 소리 죽여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걷고 있었다. 동체를 추모비 쪽으로 향한 채. 그런 확성기는 어째서인지 비통해보이기도 했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어서 이렇다 할 인상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냥 움직이는 확성기로 보일 뿐인데. 그런 녀석에게서 비통함을 느꼈다니 내 눈도 어떻게 됐나보다. 나는 그녀의 지론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눈은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나는 다시 중얼거린다. 그녀에게. 이번만큼은 당신이 틀린 것 같다고.


침묵하던 확성기는 어떤 곡을 연주했다. 아니, 연주했다는게 맞는 표현일까. 기계인데다 확성기인 녀석에게는 그냥 재생했다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인 건 아닐까. 확성기가 입에 해당한다면 노래한다는 표현도 알맞을 것 같다.


녀석이 내뱉는 멜로디는 비탈리의 샤콘이었다. 비통하기 짝이 없는 곡. 그 곡을 한동안 듣고있자 이상하게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안그래도 애써 숙연해지지 않으려하는데 녀석이 '내가 지금 슬퍼하는 것' 좀 알아달라고 광고를 하는 것 같이 느껴졌던 탓이다. 심술이 나서 왜 또 샤콘이냐고, 퍽이나 인류가 좋아하겠다고 궁시렁대고 말았다.   


그 산에서 내려오고 레아와 확성기에게 보름동안 지낼 거처를 안내받았다. 균열의 서쪽과 북쪽 사이에 자그만 산, 그 산의 어귀 근처에 있는 오두막이었다. 8평 정도 될까.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 이 균열에서 귀한 것으로 취급되는 향나무로 지은 것이니 불만말고 지내라고 떠나가기 전 확성기가 윽박지르듯 지껄였다. 불만은 없다. 정말이다. 오두막 전체에 아른거리는 향나무 향은 그런대로 마음에 들고 내부도 그럴 듯 하다. 갖춰져있을 것은 다 갖춰져있다. 침대시트도 나무로 되어있다는게 문제였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딱딱한 나무에 담요 하나 얹어놨다고 푹신해지는가. 이래서 어떻게 자라는 것인가. 그 뿐만이 아니다. 갖춰져있을 것은 다 갖춰져있는데 위치가 문제다. 옷장이며 테이블이며 책장이며 책상이며 의자며 침대 옆으로 벽을 따라 나란히 서있다. 무슨 가구매장인가? 정리는 나보고 알아서 하란건가? 융숭히 대접하지 못해 죄송하다던 레아의 말이 머릿 속을 스쳤다. 죄송할 것 없다. 이보다 더 융숭할 수 없으니까. 


책상을 침대 맡은편으로 옮기고 테이블을 오두막 중앙에 둔 다음에, 가구배치에 힘을 쓸 이유가 있나 싶어서 침대에 누웠다. 어짜피 보름이다. 오르카에서 보낸 시간이 보름이었으니 공평하게 취급해 준 것일 뿐이다. 이 곳이 진짜 존재하는 세계고 현실이라 한들, 철충이나 인류저항군이나 나한테는 큰 의미가 없으니까.


분명 나는 그렇게 여기고 있을 터였는데, 어째서인지 잠들기 전까지 확성기와 레아의 설명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이 세계의 그 법칙이란 것 중에는, 어떠한 행위를 하게 된 연유를 망각하게 만든다는 법칙이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나는 속은게 아닐까. 인류저항군이라는 녀석들에게. 그 오르카에서 들었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던게 아닐까. 실은 철충들은 착한 녀석들이고, 진짜 나쁜 놈들은 인류저항군이 아닐까. 피식했다. 진짜로 그랬다면 이 곳의 레아가 했던 멸망 전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된다. 확성기가 추모비에서 보인 행동은 의미없는 행동이 된다.


"…모르겠네."


그래. 정말로 모르겠다.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는데 양 측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보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저울질을 하게 되고 만다. 


인류저항군이 승리하는 게 옳은 것이 아닐까? 미래에 맞이할 환희는, 그만한 고통과 인류의 멸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얻게 되는 정당한 것이 아닐까? 인류저항군 녀석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게도 보이지만 뭔가가 캥긴다. 


그렇다면 확성기 녀석 쪽이 옳은가?    


그 때의 나는 망설임 없이 확성기 녀석은 더더욱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1255059의 세계와 똑닮은 세계들의 미래가 모두 그랬다고 해서, 라스트 오리진이라는 앱을 그대로 따른다고 해서, 1255059의 세계도 그와 같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는 건 확성기 녀석도 확실히 하지 못했으니까. 어디까지나 애매한 확신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악역이면 악역다운 최후를 맞는 것이 옳다는, 편견과 다름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 * *




"일어 나!! 인간!!!!!"


 "으아악! 내 귀!!"


귀가 통째로 터져버릴 것 같은 소리에 놀라 몸을 굴리다가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허리로 착지했다. 아, 이건 무조건 부러졌다, 라고 직감 할 수 있는 고통이 전신을 내달리는데 무언가가 얼굴(?)을 들이밀고 한층 더 큰 소리를 냈다.


"오늘부터 네가 맡게 될 역할이 있어어!! 비록 보름 한정이라도 너는 이 균열의 주민이야아아!!"


"볼륨 줄여 새끼야!!"


"그러면 굼뱅이마냥 꼬물꼬물대지 말고 얼른 일어나아아아---"


귀를 틀어막고 오두막에서 내쫓기듯 뛰쳐나왔다. 이 씨발놈의 새끼. 새벽안개가 자욱한 시간부터 이게 무슨 짓인가. 역할이고 나발이고 이런 식으로 깨운 것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갈았다.


"일어났으면 씻어야 될 거 아니야아아! 뒷쪽에 있는 숲을 지나면 개울이 있다아아!! 거기서 당장 씻어!!"


"이 개새끼야! 넌 두고보자!"


진심으로 기분좋아 보이는 확성기 녀석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숲으로 향했다. 증명을 하겠다고 한 녀석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가장 깊은 곳이 허벅지 언저리까지 밖에 안되는 개울가에서 세수하다가, 옷을 벗어던지고 걸어들어갔다. 어짜피 씻게 된 거 구석구석 씻는게 나았다. 


후에 듣게 된 거지만, 이 곳은 전기가 없다. 있기는 한데, 내 오두막까지는 닿지 않는단다. 그럼 뭐가 있느냐고 확성기에게 따져물었다. 어제는 자느라 신경쓰지 못했지만 오두막에는 샤워실도, 싱크대도, 화장실도 없었다. 무슨 중근대시대인가? 확성기는 '알아서 해결 해.' 라고 굉장히 무책임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아주 염병할 것의 융숭한 대접에 자지러질 정도로 감격에 겨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어찌 됐든 씻고, 찾아온 레아에게 받은 새옷(오버사이즈의 슬랙스와 사용된 소재가 의심되는 반팔 티였다. 모두 이 균열에서 제작했단다.)으로 갈아입고, 레아가 차려준 밥을 먹고(그래봐야 그냥 빵이었지만.) 둘을 따라 나섰다. 저잣거리 같은 시장을 지나 동쪽으로 향했고, 도착한 곳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나는 장소였다. 


누런 흙모래로 된 운동장, 사열대, 작고 낡은 교사.


"오늘부터 넌 선생님이야." 


확성기가 말했다.


"뭐?"


"뭘 넋빠진 표정을 짓는거야. 선생님이라고. 교사. 교사 몰라? 애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아니… 씨발…"


"야! 욕 좀 하지 마! 애들 앞에서도 욕할거야?! 아니 이새낀 무슨 지 살던 세계에선 욕 한 마디 안하더니 여기선 아주 틈만 나면 욕이야!?"


빨리 들어가 임마! 라는 확성기의 말을 왜 따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어이가 없었어서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건지도 모른다. 어제도 이해가 불가능한 것으로 가득한 하루였는데, 오늘은 시작부터가 이해불가능이다. 


교사로 들어가고 1층의 복도를 지나다가 한 교실에서 레아가 멈춰섰다. 레아가 손을 뻗자 목재 미닫이 문이 드르륵하고 열렸다.


"안녕! 얘들아!"


과장된 몸짓으로 해맑게 인사한 레아에게 노이즈 섞인 기계음과 인간과 다를 것 없는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 ""앙녕하세용-!"" ""안녕하세요!"" "


"뭐 해. 빨리 들어가."


뒤에서 확성기가 어깨를 툭툭쳐댄다. 교사로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가슴 깊은 곳에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겠다는 다이너마이트가 제조되어 있었는데 목이 도화선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


다리가 움직인다. 내 의지가 아니다.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교실로 들어가 레아 옆에 섰다. 


"많이들 기다렸죠! 오늘부터 1학년 친구들의 수업을 재개할게요! 여기계신 이 분은 여러 분의 수업을 책임져주실 새로운 선생님! 다들 환영해줘요! 와~ 박수!"


금속이 텅텅대는 소리와 박수다운 박수소리가 울려퍼진다. 이런 종류의 부조화는 난생 처음이다.


"자, 그럼. 우린 가지. 어디 잘 해보라고. 선생."


킥킥댄 확성기와 생긋 웃은 레아가 문을 닫고 떠나간다. 정면을 본다. 상당히 작은 크기의 철충들이 코어를 빠르게 빛내고, 바이오로이드들도 눈을 빛낸다. 


"아니…"


내가 왜 여기에 있는거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거지."


생각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그것이 녀석들에게 꺼낸 첫마디였다.






* * *


다음화


https://arca.live/b/lastorigin/32681557 



휴. 빨리 써보려했는데 좀 늦은 감이 있네.


재밌게 읽어 줘~


퇴고는 천천히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