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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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요안나 아일래드의 부품 생산 시설, 그곳은 말이 부품 생산 시설이라 불릴 뿐 전방에서 활용되는 대다수의 군수 물자들을 총괄적으로 생산하는 곳이다.

 작게는 총알부터, 크게는 포탄까지. 다양한 부대를 운영하는 오르카 저항군의 특성상 그에 맞추어 각각의 부대가 요구하는 수십 종류의 총알과 제복까지, 제각기 다른 부대의 요구치를 할당하기 위해 이 공장 지대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소음을 내기 바쁜 곳이었다.

 

기-이잉! 철컹! 기이이-잉!

 

“으음. 리리스양? 그러니까..그쪽에서 요구하는 게..”

 

 거대한 기계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는 어느 거대한 공장 내의 어딘가. 세 명의 여성은 서로를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한 명은 이 공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더치걸들의 통솔자이자 이 땅의 유일한 재단사, 오드리.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는 두 명의 여성들은 본디 이곳에 있어야 할 이들이 아니었다.

 

“앞으로 있을 휴가에 맞춰 저희의 사회자 복장을 따로 발주하고 싶다는 거랍니다. 오드리양.”

 

“오-그것참. 후훗. 제가 뭐라 거부하기도 어려운 사안이군요. 정말.”

 

“...그래서 해줄 거야? 말 거야? 똑똑히 대답해줘.”

 

“리제양. 그렇게 절 노려 보지 않아도 된답니다. 물론 휴가 내의 이벤트를 담당할 아가씨들에게 제가 옷 한 벌을 못 건네겠나요.”

 

“정말이지? 정말 네 입으로 말한 거야. 무르기 없기야. 물렀다가는..”

 

“쉿. 이 멍청아. 다 된 밥에 재 뿌릴 심산이야? 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이익! 누가 누구보고 멍청이라는 거야! 이 해충이!”

 

 방금까지 좋게 좋게 대화를 해가던 분위기는 어디로 흘려보내고 제 앞에서 서로를 바라본 채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두 여성의 모습에 오드리는 살포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정말이지. 두 분을 보고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어요.”

 

“무슨 뜻이야! 나는 이 녀석이랑 별로..!”

 

“싸울 만큼 사이가 좋다는 말이 따로 있는 건 아니랍니다. 리제양. 후훗.”

 

“오드리양! 저는 이런 부끄럼쟁이 스토커와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에요! 정정을 요구할게요!”

 

“안 친하다는 소리는 안 하는군요. 리리스양. 정말이지. 대장의 곁에는 이렇게 센시티브한 아가씨들만 모여 있으니, 제가 영감이 멈출 새가 없어요.”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이빨을 드러내는 리리스와 리제의 모습에 오드리는 볼 위에 그려두었던 보조개를 더욱더 크게 만들어 보였다. 이제는 그녀들이 이 땅에 온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녀들의 아옹다옹하는 모습은 생산 인원들의 가십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서로 칼만 겨누지 않으면, 좋은 친구라는 뜻 아니겠어요?”

 

“...내 가위. 내 가위로 이 녀석의 목을 네 앞에서 당장에 따줄 게! 히히!”

 

“-이 미친 스토커가!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 이거야?!”

 

챙-! 철-컥!

 

“...제가 허언을 했군요. 죄송해요. 그러니 두 분 모두 가위와 권총을 거두어 주시겠어요?”

 

 괜한 소리는 하는 게 아니다. 오드리는 이제 서로를 향해 무장을 겨누는 두 여성 사이로 살짝이 고개를 밀어 넣으며 짧게 자른 은발 사이로 식은땀을 흘렸다.

 

“두 분께서 이렇게 싸우면, 저도 협력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얼른..”

 

샤-샥!

 

“이틀 뒤를 기대할게요. 오드리양. 제 매력을 주인님께 선보일 때, 오드리양의 이름을 빼먹지 않겠어요. 후훗.”

 

“..해충. 나는 주인님을 홀릴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수영복을 원해. 그러니..그. 잘 부탁할게.”

 

“..한쪽은 뱀 같고, 한쪽은 불 같군요. 나쁘지 않은 영감이에요. 후훗.”

 

 오늘은 혀를 놀리는 날이 아닌 것 같다, 오드리는 그렇게 속으로 혼잣말을 되뇌며 방문 목적을 달성한 그녀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 후-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작업량이 늘어나면 제 빼숀은 언제 구상할지. 흐음.’

 

 속으로 이 땅에 있는 유일한 남성을 홀릴 계획을 준비 중이던 오드리는 제 목적은 살짝이 뒤로 제쳐둔 채 눈앞의 두 여성이 입기에 괜찮은 수영복을 계속해서 구상했다. 이것은 그녀의 직업병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어차피 그가 이 땅을 떠날 일도 없으니. 이번에는 그녀들을 서포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오히려 어떤 식의 유혹이 그에게 효과적일지 확인할 기회일 지도.’

 

“두 분의 수영복은 내일 밤 중으로 제가 직접 전달해드릴게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어머. 그렇게까지 빨리 준비해주지 않으셔도 되는데~오드리양도 수영복을 따로 구상하고 있던 것 아닌가요?”

 

“..주인님은 내 거야. 넘보지 마.”

 

“어머. 그것참 귀여운 엄포네요.”

 

 리제의 살벌한 눈살에도 오드리는 가볍게 그녀의 말소리를 흘려들으며 시선을 다시 은발의 여성에게로 돌렸다.

 눈앞의 두 여성이 이곳을 방문한 첫 번째 이유가 그녀들의 수영복이라면 이제 돌려보내어도 무관했으나 그녀들에게는 두 번째 이유가 있었다. 오드리는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났으니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리리스가 처음에 건넨 의복 주문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리스양. 그런데 이틀 뒤의 휴가 때에 어떤 걸 하려고 하나요?”

 

“아. 그건 비밀이에요. 오드리양.”

 

“..간이 전투복을 백여 벌이나 준비해두라니. 거기에 약간의 방탄소재는 또 무슨 요구죠?”

 

“이벤트를 위한 만반의 준비라고 해둘게요. 후훗.”

 

“..어떤 이벤트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대량으로 발주를 넣어주시다니. 우리 애들이 꽤 고생하겠어요.”

 

“어머. 전투복은 오늘 오후 중으로 생산을 멈추셔도 괜찮답니다? 안드바리가 여분의 물자를 이미 항구로 보냈어요.”

 

“..그럼 퍼펙트하네요. 괜찮네요. 백 여벌이면 오늘 저녁 전에 끝낼 수 있을 테니.”

 

 이미 모든 물자 점검을 끝냈다는 리리스의 밝은 대답에 오드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도 수백 벌의 전투복을 생산해내는 시설의 규모상, 백여 벌의 간이 전투복쯤이야.

 오히려 내일부터 휴가의 시작이라는 듯 말해오는 리리스의 세세한 설명에 오드리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러면 저는 내일부터 수영복 의상 제작에 들어가야겠군요.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주문이 폭주했는데, 시간이 남아서 괜찮네요.”

 

“..그..해..아니. 익충. 내 수영복이 제일 먼저라는 거..”

 

“알고 있어요. 리제양. 설마 제가 두 분의 의상부터 만들지 않고 다른 애들의 의상부터 준비하겠어요? 걱정하지 말고 휴가계획에 힘써주세요.”

 

“아..알겠어. 칫.”

 

 오드리의 확답을 여러 차례 듣고 나서야 리제는 안심이 된다는 듯 허리 뒤에 달린 기동장치를 퍼덕이며 조용히 공장의 문밖으로 나섰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리리스와 오드리는 그녀가 햇볕 아래로 걸어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서로를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친구로군요. 리리스양.”

 

“..친구...네. 뭐, 그렇다고 해둘게요. 제게는 손이 좀 많이 가는 동생 같은 느낌이지만요.”

 

사-락!

 

“취사장의 소완양도 두 분과 제법 친한 사이죠? 세 분이 함께 다니는 모습을 종종 봤었는데.”

 

“..후훗. 저희 셋은 같은 날에 이곳에 온 사이니. 아무래도 동기라는 느낌일까요?”

 

“좋은 이야기에요. 세 분 덕분에 저희 섬이 활기를 되찾았으니, 언제까지나 좋은 관계로 남길 바랄게요. 지금 두 분을 보면 딱히 제가 걱정할 필요도 없어보이지만요.”

 

사-락!

 

 자신에게서 건네받은 의복 주문서를 훑으며 대화에 임하는 오드리의 말에 블랙 리리스는 눈썹을 가늘게 뜨며 서류를 확인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는 아까와 다른, 음흉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실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 부분은 저희 셋의 비밀이랍니다?”

 

 작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블랙 리리스의 목소리는 그녀 곁에서 쿵-쿵 거리는 기계의 소음에 묻혀 오드리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비록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들, 오드리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 리는 만무했겠지만 말이다.

 

“그럼 뒷일은 부탁드릴게요. 오드리양.”

 

“맡겨만 줘요. 리리스양.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죠?”

 

“? 뭔가요?”

 

 리제를 따라 이제 건물 밖으로 걸어나가려던 리리스는 되물어오는 오드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빙글 돌려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서류 대신 누군가의 남루한 전투복이 들려 있었다.

 

부-스럭!

 

“이건 대체 누구의 전투복이죠? 정말 몇 날 며칠을 벗지 않고 입은 것처럼 여기저기가 늘어나 있어요.”

 

 제 손에 들린 전신 타이즈 형태의 전투복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오드리는 옷의 모양새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날이 선 목소리로 리리스에게 이 옷의 주인을 물어왔다.

 

“이렇게 전투복을 소홀히 관리하다니. 전투복 형태만 보면 전투형 바이오로이드의 전투복 같은데, 리리스양. 이 전투복, 누구 건가요?”

 

“...아하하하. 그..그건 나중에 주인님께서 직접 설명해주실 거에요. 아하하하.”

 

 눈썹을 가늘게 뜨는 오드리의 물음에 리리스는 눈 아래가 씰룩이는 것을 꾹 참으며 황급히 건물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뒤에서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는 오드리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으나, 리리스의 눈썹을 씰룩이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날 선 태도가 아니었다.

 

‘..그 암 고양이. 감히..감히..주인님께 별명을 하사받다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 암 고양이. 갑자기 나타나 감히 주인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아간, 그 암 고양이! 두고 봐요!”

 

104)

 

끼-이익!

 

“어. 그래. 아르망. 조사해봤냐?”

 

-예. 폐하. 2년 전,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생산 인원과 작업 인원들의 목록을 전부 조사해 봤습니다만..없습니다.

 

딸-깍!

 

“..없어? 없다고?”

 

쿵-! 쿵!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간, 섬 동쪽 방면의 부품 생산 시설에 도착한 나는 지프차에서 몸을 내리며 주변을 둘러다 보았다. 어디고 할 것 없이 시끄러운 소리가 넘쳐 흐르는 이곳은 아까까지 내가 서 있었던 부둣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요안나는? 지금 곁에 있나?”

 

 시끄러운 기계음이 울려 퍼지는 공장을 지그시 바라본 채, 나는 청각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 곁에 딱 달라붙어 이야기해주었을 그녀였으나, 오늘의 그녀는 내 곁을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잡은 운전대가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았다.

 

-예. 요안나양 역시 지금 같이 신원을 조회하는 중이나 팬텀 개체가 이 땅에 머무른 적도, 또 떠난 적도 없습니다.

 

-작전관! 이 몸은 이런 일에 약하다네! 제발 이 몸을 해방해 주게나!

 

“..사무업무가 쥐약이었구나. 요안나.”

 

 아르망의 뒤에 있는지, 그녀의 목소리보다 조금 멀리서 들려오는 요안나의 울먹대는 목소리에 나는 쓴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요안나양. 섬의 수색에 미흡해 비관련 인원을 여태껏 본관에 그녀가 머무르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어서 1년 전 자료들을 수색하세요.

 

-으으. 대체 저 많은 서류를 어떻게 확인하겠나. 애당초 아르망 그대가 직접 읊지 않았나. 그 팬텀 개체는 이 땅에..

 

-시끄럽습니다. 요안나양. 어서 확인하십시오.

 

 듣는 사람에게 하여금 애처롭게 들리기까지 한 그녀의 SOS 신호는 단호하기 짝이 없는 아르망의 단답에 가로막히고야 말았다. 보급 물자 탈취 건에서도 이렇게 날 선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그녀였는데, 팬텀의 등장이 어지간히 거슬리긴 했었나.

 

“아르망. 우선 팬텀의 전투 모듈은 작동이 중지된 상태니까. 너무 그렇게 날 세울 필요는 없다.”

 

-..행여 그녀가 폐하의 신위에 해를 가하려 들었다면 매우 큰 일로 번질 수 있었던 사안입니다.

 

“그 녀석이 마음먹고 숨으려 들면 우리 동네 리리스도 못 찾았는데. 요안나라고 별수 있었겠냐.”

 

-..폐하의 말씀이 백번도 옳습니다만. 이 사안은 그리 가볍게 넘길..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을 이어가는 부관의 목소리에 나는 쓴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공장들의 사잇길을 말없이 걸어갔다. 아마 군대에 있었을 적의 나라면 나 역시 그녀처럼 날 선 반응을 보였으리라. 하지만 이곳은 내가 살던 동네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녀석의 등장에 선뜻 호의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뚜벅-뚜벅

 

“그리고 그 짬 타이거 녀석의 태도 봤잖아. 그냥 겁이 나서, 잘 몰라서 여태껏 숨어다녔다는데. 뭘 더 파고들 필요가 있어? 우선 그 녀석을 좀 보고 올 테니까. 상부에 올릴 보고서 작성부터 좀 부탁한다.”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그녀를 조심하세요. 폐하.

 

“그래. 조금 있다 거기로 갈 테니까. 너무 힘쓰지 말고. 요안나도 적당히 괴롭히고.”

 

-..기다리겠습니다. 폐하.

 

“그래. 수고해라.”

 

삑-!

 

“..후. 아르망 달래느라 죽는 줄 알았네.”

 

 단말기의 짤막한 비프음을 들은 후에야 나는 주머니에 주섬주섬 단말기를 집어넣었다. 몇 걸음을 걷지도 않았지만, 내가 목표한 도착지에 어느새 도착해 나는 보도에서 걸음을 돌려 거대한 공장 건물의 내부로 들어섰다.

 

뚜벅-뚜벅

 

기-이잉! 기-이잉!

 

“..여긴 평소랑 다를 게 없네. 후.”

 

 후덥지근한 바깥 공기와 시원한 에어컨의 공기가 서로 마주친 공장의 내부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내 뇌파를 읽은 분홍 머리의 소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대는 것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발걸음이 가벼우신 분이 오늘도 왔네?”

 

“여. 이프리트. 작업은 잘 되어가냐?”

 

“오늘도 할 일이 없어서 농땡이야?”

 

기-이잉! 쿵! 기-이잉!

 

 거대한 공장 건물의 문턱을 밟고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귀를 찢는 기계의 소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들어도 사람의 신경을 긁기에는 충분한 소음이었으나 지금 당장에는 저 소음을 어찌할 방도가 내게는 없었다.

 

‘같은 포츈이라고 해도 본대의 포츈과 우리 동네의 포츈은..숙련도가 다르니.’

 

 일전에 전력 생산 시설의 포츈에게 이 기계의 검수를 부탁한 적이 있었으나, 그녀는 자신이 설계한 물건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었다. 그때 비로써 같은 모델이라 한들, 경험치의 차이로 발생하는 격차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뚜벅-뚜벅

 

“..오늘은 좀 덜 덥네. 애들은?”

 

“다른 애들은 컨테이너 적재 작업 중이지. 대장도 같이할래? 히히.”

 

 어쩌면 나는 그 사실을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장에 내 앞에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내 부하 중 한 명, 요 맹랑한 이프리트만 해도 몇십 년을 살아온 노병이 아니던가. 나는 양팔에 총알이 한가득 담긴 플라스틱 박스를 내려다 놓는 그녀의 핑크빛 정수리를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짜식이. 어디 대장을 막 부려먹으려고?”

 

“땀 묻어! 대장!”

 

“땀은 무슨. 비듬이나 묻지. 너 매일 씻긴 씻지?”

 

“..성희롱으로 상부에 신고해버린다? 대장?”

 

 내 거친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프리트는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날 노려다 보았다. 연식이 오래된 놈이라 그런지 짓궂은 내 장난에 이렇게 살갑게 굴어주는 놈은 이 동네에서 노움을 제외하고는 이 녀석뿐이었다.

 

“성희롱이라면 어제의 너희가 성희롱이지. 이 자식아. 남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녀석들이.”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노움이 했지.”

 

“여기서 후임을 파네.”

 

 내 말대답에 자기도 할 말은 없는지 눈길을 재빨리 돌리는 말년병장의 태도에 그녀의 분홍 머리 위에 얹어진 내 손길이 더욱더 빨라졌다. 거친 내 손길이 그리 썩 나쁘지는 않은지 테티스와 같이 미성숙한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른 애들도 이 녀석처럼 귀여운 맛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아.’

 

 어디까지나 내 스트라이크 존은 성인이다. 이프리트나 테티스처럼 여중생 같은 체구는 아웃이라고. 물론 아르망은 제외지만.

 이프리트의 샐쭉한 푸른빛 눈동자에서 눈을 뗀 나는 이리저리 공장 내부를 훑으며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그 녀석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자 내 의도를 알아챘다는 듯 이프리트는 선뜻 내게 방문 목적을 물어왔다.

 

“그래서 무슨 일로 갑자기 여길 온 거야? 대장?”

 

“뭐긴. 그 짬 타이거는 어디 있냐? 내가 분명 지금 시간에는 취사장에서 여기 오라고 해뒀는데.”

 

“..아. 그 녀석? 참 별의별 이상한 별명도 다 지어줬네.”

 

“어울리지 않냐? 맨날 여기저기서 몰래몰래 식량을 빼돌려 먹고 다니던 놈이라니.”

 

“그건 쥐잖아. 쥐. 어딜 봐서 고양이야?”

 

“..그리고 파견 녀석들이 엉망으로 만든 곳을 일일이 청소까지 해두고 다녔다는데. 쥐새끼라 부르기엔 조금 미안하지.”

 

 어제 늦저녁, 눈앞의 이프리트에게 꽁꽁 묶인 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짬 타이거, 개체명 팬텀의 억울하다는 눈동자가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프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뾰료통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담담히 나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기에 생산 시설이 들어선 지가 2년인데. 자기 혼자서 생산 시설이 지어지기 전인 3년 전부터 살아왔다는 거야? 대장은 그 말을 믿어?”

 

“..여기도 바다. 저기도 바다. 망망대해에서 좌초하다가 파도에 휩쓸리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모르는데. 하하하!”

 

 이프리트의 표독스러운 물음에 나는 어물쩍 웃음으로 무마하려 들었다. 하지만 내 말이 틀린 말도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 왜. 로비슨 크루소인가? 멸망 전의 문학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잖냐.”

 

“..그건 창작이고. 실제로는..”

 

“그리고 모아이 섬이라고 들어 봤지? 거기도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였는데, 얼떨결에 원주민들이 바다로 나갔다가 정착한 섬이라는 설도 있으니. 그 짬 타이거도 비슷한 경우가 아니겠어?”

 

“..대장, 대장 정말로 기억 없는 사람 맞아? 왜 그런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술술 내뱉어?”

 

 아차차. 이프리트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는 내심 뜨끔한 가슴을 어떻게든 감추며 소녀의 날카로운 시선에서 눈길을 다시 떼어냈다. 역시 오래 산 눈칫밥이 장난이 아니구나.

 

“..네가 문학을 너무 안 읽는 거 아닐까? 야. 중앙 건물 밑에 가면 사령관님이 보관해두신 멸망 전 문학들이랑 영화가 잔뜩이야.”

 

“날 애로 알아? 내가 왜 그런 걸..”

 

“심심할 때 빌려 봐. 아, 아르망한테 대출 카드 내는 건 잊지 말고.”

 

“..그 이야기는 됐고, 우선 따라와. 그 녀석이라면 지금쯤 우리 애들이랑 적재 작업 중일 테니까.”

 

 국방 나시티를 입은 소녀가 선도하는 대로 나는 그녀의 작은 등을 따라 페인트가 발려진 공장의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그리고 작업장으로 가는 와중에도 이프리트와 나 사이의 대화는 멈출 줄을 몰랐다.

 

“대장. 그런데 그 녀석은 어떻게 할 셈이야?”

 

“어떻게 하긴. 우선 휴가 이후에 사령관님께 발견 인원으로 보고해야지.”

 

“휴가 이후에? 왜?”

 

“..휴가 직전에 3년 동안 이 땅에서 거주한 원주민을 잡았습니다 라고 전보를 부쳐봐라. 곧바로 휴가 짤린다.”

 

“..그것도 그렇네. 휴가가 짤리는 건 사양이야.”

 

“암암.”

 

 어차피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다. 자고로 무슨 문제가 발견되면 곧바로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 철칙이나, 휴가 직전에는 이야기가 다르지. 그리고 그 녀석의 발견이 그렇게 특별히 놀랄 일이 아니라는 점이 컸다.

 

“아르망은 꽤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방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있다며?”

 

“응. 아무래도 인간님들이 멸망한 이후부터 꾸준히 살아오던 녀석들이 여기저기 철충을 피해 숨어 있으니까. 소속도 없어, 상관도 없어. 그냥 한 마디로 부랑자 신세라는 거지. 아마 그 녀석도 그런 부류일걸?”

 

 어딘가 세세하게 설명을 해오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나는 눈썹을 위로 들어 올렸다.

 

“뭔가 자세하게 안다?”

 

“..나도 나름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놈이야. 처음부터 마리 대장님 밑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너도 그 녀석이랑 비슷한 부류였구나?”

 

“완전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하여튼 그런 애들은 통칭 ‘구조 인원’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불러.”

 

 어깨를 으쓱이는 이프리트의 대답에 나는 무심코 턱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 보면 게임에서도 있지 않았던가. 거지런을 하다 보면 차곡차곡 쌓이던 B등급이나 SS등급 녀석들이.

 

‘여기서는 구조 인원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네.’

 

“..구조 인원이라. 파견이나 생산 애들도 아니고. 우선 휴가는 이틀 뒤, 그리고 2일 정도 쉴 테니. 사령관님께 보고는 다음 주중으로 드리는 편이 낫겠네.”

 

“히힛. 대장도 참 강심장이야. 이 동네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장뿐일걸?”

 

 내게 월권을 행사한다는 말을 빙 돌려 해오는 이프리트의 샐쭉한 미소에 나 역시 미소로 응수했다. 분대장 시절의 나였다면 미쳤다고 지금의 나에게 난리를 쳤겠지만..

 

‘어차피 내 위로는 그 녀석뿐인데. 뭘. 그리고 본대에서도 천향의 히루메 같은 전례가 있으니.’

 

 그 마음씨 고운 사령관 녀석이라면 별다른 소리도 안 할 터. 다만 내가 보고를 휴가 이후로 미뤘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추궁을 당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애당초 그럴 일은 없을 터.

 

‘요안나는 한동안 아르망에게 시달릴 거고, 팬텀의 존재는 우리 생산 애들만 알고 있으니.’

 

 사령관이 이 땅에 오지 않는 한, 내가 책 잡힐 가능성 따위는 없다. 전방을 두루 살피랴, 잠수함 생활에 집중하랴. 요안나에게 설명을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픈 일들이 수두룩한 양반이 이런 최후방에 올 턱은 만무했다.

 

“..그러니까 조용히 휴가를 즐길 생각만 하자고. 중.위.님.”

 

“예예. 어련하시겠어요. 대.장.님.”

 

“케케케!”

 

“히히히!”

 

 그렇게 이 영악한 장교와 떠들며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서 열심히 플라스틱 박스를 들고 가는 여성들이 한두 명씩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익숙한 얼굴, 그리고 이프리트와 같이 어깨가 훤히 드러난 나시티를 입은 여성들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제 업무에 충실히 임하고 있었다.

 

“..우리 애들만큼 성실한 애들이 없어요. 진짜.”

 

“대장. 대장의 뇌파 때문에 애들이 저렇게 일하고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도 안 해?”

 

“...설마. 그것보다 그 짬 타이거는 어디 있냐?”

 

“저기 있네. 브라우니들 사이에.”

 

 이프리트의 검지를 따라 눈길을 돌리니 갈색 머리 여성들 사이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플라스틱 상자를 들고 다니는 연보랏빛 머릿결의 여성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발견 당시 입고 있던 위장 망토와 의복은 오드리에게 넘긴 탓에 그녀 역시 연녹색의 나시티를 입은 채 양팔에 들린 박스를 브라우니들의 지도에 따라 옮기고 서 있었다.

 

“그 박스는 발할라 특수탄임다. 여기다 쌓으십쇼!”

 

“..아..알겠다.”

 

덜-컹!

 

“아아-! 그거 그렇게 쌓으면 안 됨다! 거기는 특수탄이 아니라 일반 제식 소총 탄환임다!”

 

“아..아! 알겠다!”

 

“도우러 오신 분이 왜 이렇게 멍 때리심까! 다음은 스틸라인 제식 소총 탄환임다! 저기 벽 쪽에 있으니 들고 오십쇼!”

 

“..으으..”

 

“나 살다 살다 브라우니들한테 혼나는 애는 처음 봐.”

 

“...”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저 짬 타이거. 말단 중의 말단인 브라우니들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 나름 암살자라는 명칭을 단 녀석인데 머릿속에 있는 전투 모듈이 작동을 멈추어서인지 아니면 3년 동안 독수공방을 해오던 녀석이라 타인과의 대화가 서툴러서인지.

 

“이프리트. 쟤 너희 생활관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냐?”

 

“아마 지금이랑 비슷할걸? 브라우니들한테도 죽을 못 쑤는데. 나라고 어떻게 하겠어?”

 

“그래? 레프리콘이랑 노움은?”

 

“걔들이 아마 챙겨주기야 할 텐데..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이야기를 나눠봤어야지.”

 

 취사 지원 쪽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3년이라는 세월을 남몰래 살아온 자신을 갑작스레 밖에다 내던져 놓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짬 타이거의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본대의 팬텀이 이런 느낌인가? 흐음...’

 

뚜벅-뚜벅

 

“응? 대장?”

 

 문득 게임 속에서 스크립트만 읽어봤던 팬텀 개체 특유의 안타까운 성격이 머리에 떠오른 나는 혀를 끌끌 차는 이프리트의 곁에서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본대의 팬텀이 아닌데, 그녀의 처우에 대해 그리 깊이 고민할 게 없었다.

 

“야. 짬 타이거!”

 

“앗! 대장임다! 필-승!”

 

“그래. 브라우니. 고생한다. 하여튼 짬 타이거, 너 이리로 좀 와 봐라.”

 

“나..나 말인가?”

 

 너 말고 내가 누굴 여기서 짬 타이거라 부르겠냐. 내 부름에 짬 타이거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다 이내 죽상이 된 얼굴로 내 앞에 걸어왔다.

 여기저기 땀방울이 흥건한 모습, 그리고 마치 먹이를 달라는 듯 눈망울을 글썽대는 여성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뺨을 긁적였다.

 

“..일 힘드냐?”

 

“아..아니다. 주방에서 소완이라는 여성이 말했다. 여기서 살아가려면 일을 해야한다고 말이다.”

 

“그래? 소완이랑은 벌써 말문을 텄네.”

 

“..그녀가 내게 양파를 깎으라고 해서 했다. 대신 일이 끝나고 식사를 건네받았다.”

 

“밥맛은 좋지? 맨날 몰래 먹던 샌드위치보다야. 크크.”

 

“..그. 그렇다. 혼자 먹던 식사보다 호화로웠다. 그..근데..”

 

“? 근데?”

 

 하얗다 못해 새하얀 눈꽃처럼 허연 피부 아래 홍조를 붉히는 팬텀의 모습에 나는 그녀의 뒷말에 집중했다. 혹 누군가에게 심한 부조리를 겪었나 싶어 내심 걱정하던 찰나에 그녀는 머뭇대는 입술 사이로 힘겹게 뒷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너무 몰리는 게..힘들었다.”

 

“...어이쿠야.”

 

 생각보다 심각하네. 자기가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만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고야 말았다. 아무리 색기가 넘치는 성인 여성이면 뭘 하리, 그녀는 마음만은 갓 전학 온 초등학생처럼 무리에 섞이지도, 관심을 견디기도 힘들어하는 완전한 꼬맹이처럼 그 자체였다.

 

‘이걸 어쩐다. 얘를 함부로 어디 넣기도 힘들고..’

 

 소완이야 당장에 주방 인원들과 생활 중이고, 거기에는 언제나 활달한 아우로라가 있을 테니 거기에 합숙을 시켜야 하나. 아니면 리제..는 안 되겠지. 그래.

 

‘전력 쪽에 넣을까? 샌드걸이야 언제나처럼 별 관심은 안 둘 거고. 그렘린은 공구함 뒤적이기 바쁠 테고. 포츈이 있으니 거기에서 생활하는데 별로 어렵지는 않겠지?’

 

“..짬 타이거.”

 

“으으..나는 짬 타이거가 아니다. 팬텀이다.”

 

“내가 짬 타이거라면 짬 타이거지. 토 달지 말고. 하여튼 너 전력 생산 시설 어디 있는 줄 아냐?”

 

“..산 정상 쪽에 있는 건물을 말하는 건가? 안다.”

 

“...거기로 가는 길도 아냐?”

 

 내 되물음에 팬텀은 살짝이 고개를 끄덕이며 회답했다. 설마 거기까지 가는 길도 다 안다고?

 

‘외부인의 방문이 극도로 적은 우리 동네의 전력 생산 시설도 안다니.’

 

 3년이라는 시간을 이 섬에서 홀로 보내온 눈앞의 여성은 그간의 시간 탓인지 우리 동네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또 누가 어디서 살고, 어디서 뭘 하는지까지 다 안다고 한다. 이쯤되면 첩보원이든 암살자든. 둘 다 제격이긴 하다.

 

‘성격도 일부러 소심하게 만든 건가? 아예 잠입해서 다니게 하려고?’

 

“왜..왜 그렇게 쏘아보나? 내가 뭐 잘못한 건가?”

 

“..그건 아니다. 그래. 우선 여기 작업은 이 정도로 하고. 거기 가서 얼굴이나 비추고 와라.”

 

 성숙한 포츈이라면 곧바로 이 아가씨의 커뮤니케이션 장애를 눈치챌 테고, 그러면 차츰차츰 이 소심한 성격을 어떻게 해볼 여지는 만들어주겠지. 나는 그렇게 속으로 이 녀석을 어디로 보낼지 잠정 결론을 내리고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소완의 말마따나 앞으로 여기서 살아가야 할 텐데. 얼굴 좀 비추고 살아. 숨어만 다니지 말고.”

 

“...”

 

“네 처우야 어떻게 되든.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야. 3년이라는 시간을 숨어 살고 다니던 야생 동물이 있었냐고 말이지. 크크.”

 

“야..야생 동물.”

 

 내 말소리에 나와 짬 타이거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브라우니들과 레프리콘들은 말없이 엄지를 척 세웠다. 이래나저래나, 우리 동네 애들도 참 포옹력이 좋다니까.

 

“네 망토랑 전투복은 옆 공장에 있는 오드리에게 수선을 맡겨둔 참이니까 내일쯤에 방문해서 받아가라. 알겠냐?”

 

“아..알겠다. 그런데 인간, 한..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음? 뭔데?”

 

“그..인간. 인간은 말이다. 왜..왜 그렇게까지..”

 

“-주인님! 여기 계셨군요!”

 

“응? 우왓!”

 

와-락!

 

 볼을 긁적대며 무언가를 물어오려는 팬텀의 작은 목소리가 무색해지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여성의 목소리가 내 청각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소리에 내가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 내 목과 어깨의 위로 어떤 무게감이 올라왔다.

 

“이..이 목소리는..”

 

“주인님! 주인님! 리리스가 주인님을 찾아-이렇게! 왔답니다?”

 

“리..리리스!”

 

“주인님도 리리스가 그리우셨던 거죠? 그렇죠? 후훗.”

 

 나는 네가 여기 있는 줄도 몰랐다. 내 어깨와 목에 양팔을 두른 여성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살짝이 옆으로 돌렸다.

 

“..리리스. 너 비축창고는 어떻게 하고..”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충실한 경호원이랍니다. 비축 창고도 좋지만, 주인님의 곁이 더 좋아요. 후후.”

 

“...”

 

 내 뺨과 귀를 간질이는 리리스의 간들어진 목소리에 내 얼굴에 경련이 미세하게 일어났다. 어째 평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 같은데, 고개를 돌려 리리스의 얼굴을 보려고 들어도 그녀의 양팔이 내 목을 꽉 조인 탓에 턱을 돌릴 형편이 되지 못했다.

 

‘...등에 닿은 이 푹신한 무언가. 이거 분명..’

 

“리리스. 우선 좀..떨어져 줄래? 응?”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내 등 짝에 착 달라붙은 그녀의 흉부가 가장 문제였다. 뜨뜻미지근한 이 온도와 무언가 푹신하면서도 딱딱한 듯한 감각, 분명 그녀의 작지 않은 흉부 지방이다.

 

“..주인님? 주인님은 혹시 제가 싫으신 건가요? 주인님이 그렇게 리리스를 거부하시면, 저는 너무 슬픈걸요?”

 

“설..설마!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응?”

 

 등에 착 달라붙은 네 흉부 지방이 내 가슴에 무두질만 하지 않는다면야. 좋아 죽지. 그런데 지금은 사회적으로 죽을 것 같으니까 제발 저한테서 좀 떨어져 주시겠어요?

 

“보는 눈이 많..많다. 이제 그만..”

 

“어머! 주인님의 정실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눈도장을 박을 최적의 타이밍이네요!”

 

“...”

 

‘얘가 지금 뭐라는 거니. 정실이라니, 여기가 무슨 조선 사회니? 정부, 첩으로 마누라들을 구분하게?’

 

 리리스의 당당한 선전포고에 내 말문이 꽉 닫히자 나는 고개를 가만히 둔 채 이 상황을 쓴웃음을 지으며 관람하는 이프리트에게로 눈동자를 굴렸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을 여기서 믿어볼 때다.

 

‘도와줘! 야!’

 

“..대장. 포기해. 리리스 언니의 팔 힘을 이길 재간을 가진 애들은 여기 없어.”

 

‘..날 버리는 거냐!’

 

“응. 그럼 앞으로의 일은 그 언니랑 알아서 해. 난 간다~”

 

 이심전심은 믿겠는데, 동료애는 못 믿겠다. 이프리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위기에 처한 내 곁에서 떠나갔다. 이제는 이 자리에 남아있는 이라고는 내게 계속해서 흉부 지방을 들이미는 발랄한 경호원과 이 상황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식은땀을 흘리는 짬 타이거뿐이었다.

 

“어머? 팬텀양. 여기 일이 조금 고되지요? 후훗. 얼굴을 보아하니 조금 기친 기색이 엿보이네요.”

 

“으..그..그게 아니다. 나는 괜찮다. 하..할 만하다.”

 

“...리리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지금 쟤 째려보고 있니?”

 

 어딘가 날이 선 듯한 리리스의 물음에 나는 그녀의 양팔 사이의 틈에 손가락을 어떻게든 집어넣으려던 행동을 뚝 멈추었다. 아르망이나 리제야 처음부터 그녀를 달갑게 보지는 않았으나, 대놓고 경계하지 않았던 소완이나 리리스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설마요. 주인님. 주인님의 착한 경호원인 제가, 저 불쌍한 아가씨를 노려볼 리가 없잖아요.”

 

“...”

 

 얘 안색은 안 그렇다는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짬 타이거를 보고 있자니 여기서 저 녀석이 적응하는 데는 한참이 걸릴 거 같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말문을 닫은 짬 타이거에게 다시 자리로 가보라는 식으로 손사래를 쳤다.

 

“우선 내 말 기억하지? 짬 타이거. 대충 여기 작업 끝내고 전력 생산 설비로 가 봐.”

 

“아..알겠다. 그러고 나서 뭐하면 되겠나?”

 

“거기 일도 마무리되면 그쪽 인원들과 저녁 먹고, 본관으로 돌아와서 아르망을 찾아. 아마 네 생활관을 정해줄 터이니.”

 

“새..생활관은 내가 예전부터 쓰던 곳은 안 되나?”

 

“거긴 빈 생활관이야. 언제까지 혼자 지낼 테냐. 어떻게든 여기에 적응해라. 같이 지내다 보면 너도 적응할 테니.”

 

 여기 애들이 그렇게 나쁜 애들이 아니니 그녀가 왕따를 당한다거나, 아니면 소외되거나 할 일은 없겠지. 만일 잘 적응을 못 할 시를 대비해 아르망이 여러 측면을 고려한 배정을 내릴 것이 틀림없다.

 

“차차 적응해. 언제까지 숨어만 다닐 거냐.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나한테 오고. 알겠지?”

 

“아..알겠다.”

 

“그래. 얼른 가 봐. 바쁜데 불러내서 미안하다. 어서.”

 

“..그럼 가보겠다. 인간.”

 

타-다닥!

 

“그래. 뒤돌아보지 말고. 얼른 가라!”

 

 주춤거리며 다시 브라우니들에게로 달려가는 짬 타이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후-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에 안심했냐고? 당연히 내 옆에서 날 놔줄지 모르는 이 아가씨 때문이지.

 

“..리리스. 그래서 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대체 뭐냐?”

 

“어머. 주인님! 방금 그 아가씨에게는 살갑게 구시더니, 저한테는 너무 매몰차신 거 아닌가요? 리리스는, 주인님의 그런 언동에 너무 상처받았답니다.”

 

“...혀에 모터를 달아뒀니?”

 

 속사포처럼 내게 불만을 토해내는 여성이 점차 내 목을 옥죄던 팔의 힘을 풀기 시작하자 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팔 위를 톡톡 두드리며 그녀와의 만담을 이어갔다.

 

“그래서 본 목적은 따로 있었지? 네가 아무 이유없이 여기로 올 턱이 없으니.”

 

“후훗. 그건 비밀이랍니다. 주인님. 앞으로의 휴가계획을 위해 밑 작업을 하러 온 것뿐이니까요.”

 

“..아. 이벤트? 대체 무슨 이벤트를 열려고?”

 

 내 목을 온전히 놓아주고는 등에서 가슴을 떼어낸 그녀에게 나는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 보고 섰다. 공장의 열린 문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등진 그녀의 은빛 머릿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시야를 가득 채우며 그 사이로 반짝이는 호박색의 눈동자를 강조해왔다.

 

“주인님께서 좋아하실만한 깜짝 이벤트로 준비하려고요. 물론 이벤트이니만큼 여기 인원들 대다수가 참가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준비했답니다?”

 

“..여기 애들이 다 참가하는 정도면 엄청나게 큰 건데?”

 

“저와 리제만 믿어주세요. 주인님. 아, 리제는 먼저 영양 생산 시설로 떠났으니 그녀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후훗.”

 

 마지막 한 마디가 핵심이지? 나는 입술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으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리리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완이나 리제만큼 밖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녀 역시 독점욕 하나만큼은 그녀들 못지 않으리라.

 

‘..꼴초뱀. 난 이게 너무 행복한데, 내가 미치기라도 했나 봐.’

 

 언젠가 눈앞의 여성이 실제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거냐는 대화를 나누었던 양반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내고 있자니, 문득 오르카 1호에서 잠깐 지냈을 때 만났던 리리스 개체가 떠올랐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땐 나에게 이런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을 했는데.’

 

 아마 그 리리스가 내가 아는 리리스일 것이라. 스토리에서 사령관의 곁을 지키던, 리제와 항상 아옹다옹하던, 소완을 견제하던 그 리리스이리라. 그때는 내가 실로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녀와 함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눈물을 찔끔 흘렸지.

 

“주인님. 주인님은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네?”

 

 다 큰 성인 여성이 이렇게 귀여워도 될까. 양손을 허리 뒤에 숨긴 채 상체를 기우뚱 눕히는 경호원의 물음에 나는 과거의 쓴맛을 뒤로 넘긴 채 눈앞의 달콤함에 집중했다. 비록 눈앞의 여성이 내가 알던 리리스가 아닐지언정, 이제는 내게 별 상관도 없었다.

 

“..어디로 갈까? 네가 정해봐라. 리리스.”

 

“저는~주인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요. 이렇게 주인님과 마주 보고, 또 대화를 나누다니. 이 리리스는..여기에 도착한 이후부터가 매일 매일이 행복하답니다?”

 

 과장된 어조로 날 기쁘게 만들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리리스 개체의 특징인가?

 

“너무 과장된 거 아니냐? 누가 들으면 네가 직녀인 줄 알겠다. 하하하!”

 

“...직녀라. 저는 직녀는 별로네요. 주인님.”

 

“응?”

 

 뻥 뚫린 공장의 내부로 큰 걸음을 내딛던 블랙 리리스는 내 헛소리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눈치로 허공을 응시하다 곧장 내 표현에 부정을 내놓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살짝 슬퍼보인 것은 내 착각이겠지.

 

“직녀는..사랑하는 낭군님을 일 년에 단 하루밖에 못 보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저는 직녀는 하기 싫어요. 주인님. 후훗.”

 

“...네 말재간은 못 이기겠네.”

 

 생각해보면 그렇다. 리리스의 참신한 부정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이 그리 흥겨운 것인지, 그녀는 어느새 내 앞을 한 걸음 앞서 걸어가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보다 주인님! 오늘은 리리스가 주인님을 독점해도 되죠? 그렇죠?”

 

“독점? 내가 무슨 물건이니?”

 

“매번 주인님의 곁에는 아르망양이 있었으니까요. 저도 그녀처럼, 주인님과 항상 함께 있고 싶은데. 경호원건은 어떻게..안 될까요?”

 

“...하..하하하!”

 

 최대한 나에게 제 건의를 통과 받고 싶은지, 귀엽게 볼을 부풀리는 리리스는 울상을 지으며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로 다시 한번 똑같은 건의를 내게 어필해왔다. 이거 결국에는 내가 지는 엔딩인가.

 

‘그래도 리리스의 입장에서는 제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일이니. 나중에 안드바리나 설득해야겠네.’

 

 아마 제 언니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겠지. 그 소녀는. 하지만 이렇게 어필 당하면 나로서는 이겨낼 방법이 없단다. 안드바리.

 

뚜벅-뚜벅

 

“...독점은 조금 그렇고. 오랜만에 같이 드라이브나 갈까? 날씨도 좋은데 말이다.”

 

“..소리만 들어도 행복한 제안이에요. 주인님. 그럼 운전은 제가 할까요?”

 

“안 돼! 내가 한다! 너, 오토바이 운전하는 거 보면 심상치 않아! 절대 안 돼!”

 

“...헤헷! 네! 주인님!”

 

‘여기가 내 낙원이다. 정말.’

 

 그렇게 느긋하기 짝이 없는 어느 여름날의 오후, 어젯밤의 소동 따위는 저 푸르른 지평선으로 흘려보낸 나는 꿈에도 그리던 그녀와의 시원한 드라이브로 언제 나와 같은 평화로운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폐하. 하루 제가 따라나서지 않았다고는 하나, 지금이 몇 시인 줄 아십니까?”

 

“...그게 말이다? 그..”

 

“아..아르망양! 이건 제가 주인님에게 더 있다 들어가자고 졸라서..!”

 

“리리스양. 이건 폐하와 저의 문제입니다. 참견하지 말아 주십시오.”

 

“네엡.”

 

 물론 시간 가는 줄 몰라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나서 본관으로 복귀해 아르망에게 대판 깨지기는 했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이 귀여운 소녀의 질투 정도야 내게 별문제 되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훈계에 가까운 소리니까. 그런데, 내 업무 테이블에 놓인 저 종이 뭉치의 높이가 계속해서 내 눈에 밟혔다.

 

쿵-!

 

“...내가 잘못했다! 한 번만 봐주라! 저..저 서류들은 대체 뭔데!”

 

“새로 합류한 팬텀양에 대한 결제 서류입니다. 폐하. 어서 처리하시지요.”

 

“하하..작전관. 어서 오게나. 여기가..지옥이라네.”

 

 무릎을 꿇어 봐야 오늘의 아르망은 착한 아르망이 아니었다. 덕분에 그 날, 나는 새벽까지 짬 타이거 녀석의 구조 관련 서류와 편입 서류를 작성하느라 요안나와 함께 이 양식, 저 양식들을 뒤적여대었다.


'짬 타이거 한 마리 덕분에..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진짜!'


 그래도 내일만 지나면, 꿈에도 그리던 휴가다. 나는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그렇게 무거운 눈꺼풀을 감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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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이야기 진도가 안 나가네. 씨발. 좀 더 압축해서 온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