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만을 바라보는 꽃 시라유리 시점


시라유리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항상 무언가 꾸미는 듯 하면서도 내게는 진실로 그녀의 마음을 허락했다.


그녀를 부관으로 임명한지 몇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는 흐트러짐 없이

내 뒤에서, 내 곁에서 나와 시간을 보낸다.


"특이 하시네요."


"응?"


"사령관님 말이에요."


이따금씩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속이 깊은 말을 건네는 그녀. 

나는 그녀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그런가? 난 비교적 평범한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솔직한 내 심정. 난 지휘관으로써 군재도 평범했고 수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감당하기엔

가끔씩 버거워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후훗, 그렇게 생각 하신다면 제 생각이 틀린 모양이지만요." 


"뭐야? 시시하게."


내 대답에 시라유리는 금세 수긍했다. 그녀의 순수하게 웃는 얼굴, 항상 곁에서 보는

그녀의 얼굴이지만 이럴때 만큼은 유독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를 띄워주고 가장 친근하게, 

가장 헌신적으로 내 옆에 그녀는 항상 머물렀다.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특별했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그녀도 더이상은 캐묻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그녀의 투명한 눈을 마주할때면 내 연심이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만약 그녀가 거부한다면 난 순순히 그녀를 놓아줄 수 있을까.

나는 잡념을 털기위해 업무에 집중했다. 어차피 그녀에게 곧 내 마음을 전할 계획이다.




"아이고~ 요즘들어 눈이 침침하다니까."


계속 업무를 보던 중 나도 모르게 툭 내뱉은 말. 항상 시라유리와 같이 있을 때에는 그녀가 혹여

지루하지 않을까 이렇게 사소한 말이라도 하는 편이었다.


"최근 무리를 하시긴 했죠."


"빈말이라도 걱정은 안돼?"


네~ 네. 걱정이네요."


시라유리가 내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장난기를 가볍게 섞어 그녀에게 농을 던진다.

그녀또한 내 농을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럼 커피라도 타 드릴까요?"


"음~ 커피 좋지. 설탕은...."


"각설탕 3개, 우유는 1/3 비율로, 맞죠?" 


"역시, 시라유리!"


역시 시라유리, 그 말대로 그녀는 나의 사소한 부분까지 커다란 존재감을 가졌다.

차분히, 단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와 쭉

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을 누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그녀의 치마 주머니에 뾰족 튀어나온 그녀의 수첩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항상 무언가를 적거나 끄적이는 습관이 있었다.


"시라유리."


"네, 사령관님."


"항상 들고다니는 그 수첩 말이야. 무언가 열심히 적는 것 같던데 무슨 내용이야?"


"비밀이랍니다."


"쳇."


딱 끊어 답변을 거절하는 그녀를 보며 가볍게 혀를 찻다. 그녀와 가장 친한 관계이며

가장 그녀를 아끼기에 더욱 다가서고 싶었다. 


하지만 소중하기에, 가장 아끼기에 그녀가 싫어하는 행위를 해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비단 그녀뿐 아니라 모든 오르카 호의 아이들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사령관이 되고 가장 처음 결심했으니까.


딸깍-


찻잔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시라유리가 각설탕을 커피에 녹여내고 있었다.

은은하게 미소짓는 옆모습에 새삼스레 다시한번 반하게 된다.


"비밀은 여자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법이랍니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시라유리가 내게 살며시 윙크하며 말했다. 

아마 그녀는 내가 그녀의 비밀을 알지못해 토라진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시라유리는 욕심이 너무 많네."


"욕심이 많다.. 글쎄요, 전 그렇게 욕심이 많지는 않은걸요?" 


시라유리가 내 말에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이 진심임을 이미 알고있다. 그

녀는 늘 나에게 배풀고 맞춰주며 곁에 있었다. 욕심이 있었다면 진즉 무언가 요구하거나 

더 자신을 내세우며 사실상 공을 세우기 힘든 부관같은 한직이 아닌 공을 세우기 쉬운 보직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심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내심 품고있던 진심을 고백했다.


"얼마나 더 아름다워 지려고 그러는걸까?"


".....네?"


그녀가 아주 잠깐이지만 당황했다. 가끔 이런식으로 당황할 경우에 그녀는 말을 되묻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첩보요원이랄까 순식간에 그녀는 표정을 고치고 능숙하게 대꾸했다.


"후후, 사령관님이 딱 반할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역시 그녀답게 능숙하게 받아친다.


"이야, 그건 곤란한데."


내심 진심으로 대답했다. 여기서 더 반해버리면 모두를 사랑해야 할 사령관으로써 실격이니까.

그녀또한 내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입가를 가리고 살며시 미소지었다.


'너의 그 차분한 미소, 난 너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에게 아직 말하지 못한 내가 품은 진심. 하지만 오늘 만큼은 내 진심을 말하기로 각오했다.


"이미 반했는데 더 아름다워지면 어쩌지?"


나는 서류로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심장은 이미 터질듯 쿵쾅거렸지만 이게 내 본심이다.

긴 시간동안 항상 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항상 말해주고 싶었던 나의 본심.


그녀는 내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저 차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따뜻하게 뎁혀진 커피를 내려놓을뿐.


"여기 커피입니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고마워."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 앉아 자신의 수첩을 꺼내들었다.

나는 그래도 내 본심을 전한 것으로 일단 만족하고 다시 '중요한 고백'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업무를 정리 하면서 가끔 그녀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면 그녀 역시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있었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것을 보면 그녀의 그 행위는 무척 소중하고

양보할 수 없는 그녀만의 소중한 행위라는 것이 느껴졌다.


"시라유리."


그녀의 그 소중한 행위를 방해하는 것에는 미안함과 거부감이 들었지만 나또한 그녀에게

꼭 전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기에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네, 사령관님."


"지금 부관 컴퓨터로 향후 일정 계획표를 보냈거든. 그것좀 검토해줘."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녀는 차분히 수첩을 덮고 내가 보낸 일정 계획표를 열람하기 시작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내쪽으로 시선을 향하였다.


"좀 기네요. 혹시 이걸 전부 이번주 내에 모두 하실 계획이신가요?"


"응, 꼭 이번주 내에 다 해야할 일들이야." 


"으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긴 것 같은데요." 


향후의 계획을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꼭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본심이 어떻든간에 그녀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할 수는 없었다.


"너무 무리한것 같다 싶으면 조금 수정해도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되도록이면 본래 일정을 최대한 유지하는 방향으로 검토 하겠습니다." 


시라유리가 잠시 날 바라보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늘 내 곁에서 자신보다는

나를 위해 맞추는 스타일이니까.


그 후 그녀는 새심하게 일정표를 검토, 수정하기 시작했다. 간혹 전화를 통해 타 부서와

연락하며 되도록이면 상대방의 양보를 이끌어 내는 등 그녀 특유의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 되도록 많은 업무를 미리 처리해두기 위해 다시

가득 쌓여있는 서류들로 정신을 집중했다.




"휴~"


시라유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시간을 확인했다. 나는 그녀의 한숨소리에 벌써

시간이 이토록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령관님, 일정표 검토 끝났습니다. 사령관님 컴퓨터로 보낼까요?" 


"응? 아, 그래 지금 보내줘." 


"네." 


그녀는 내 컴퓨터로 자신의 결과물을 보낸 뒤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앉아있어서 그런지 나 또한 몸이 굳은 느낌이었지만 그녀가 보낸 결과물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이야~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완벽하게 조율해뒀네, 고마워. 시라유리."


시라유리는 역시 최초 내 계획이 틀어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효율로 조정해 두었다.


"그정도야, 제가 맡으면 간단하죠." 


"유능한 부관을 둬서 다행이라니까." 


"알아주시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내 솔직한 감탄사에 시라유리 또한 기쁜 모양인지 살며시 미소짓는다. 그러던 도중 그녀는

처음부터 궁금했다는 듯 내게 질문했다.


"그런데 다음주에 어떤 일을 하시려고 그토록 타이트하게 이번 주 일정을 잡으셨나요?" 


"응..? 아, 그거.."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드디어, 드디어 왔다. 그녀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시간이 내 앞에 도달했다.

내가 말을 흐리자 시라유리가 씨익 미소짓고 음흉한 목소리로 압박해 들어왔다.


"흐응~ 흥미가 샘솟는걸요?" 


"하하하... 역시 시라유리를 속이긴 힘들겠지."


바로 말하고 싶지만 역시 용기가 잘 나지 않았다.


"제가 따로 나선다면 어렵지 않겠지만... 실토할 기회를 드릴게요." 


역시 이쯤 되면 그녀의 말대로 실토를.. 아니, 고백하는 편이 좋겠지. 더이상 미루어봤자

그녀에게도 내게도 썩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으음.... 그래, 내일 모레면 너도 좋든 싫은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내 말에 그녀의 눈매가 더욱 좁아졌다. 감이 잡히지 않는듯한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에게

보충 설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방금 전 그 일정표. 내일 모레에는 어떤 일정이 있었지?" 


"어디보자... 월 말 지휘관 정기 결산 회의, 마음의 편지 일괄 수령 후 검토, 보급품 결산...

그리고 오드리님과 면담이 잡혀 있네요."


그녀는 내 힌트에도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더욱 구체적인 힌트를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오드리 하면 뭐가 떠올라?" 


"음... 아! 새로운 의상인가요?" 


드디어 눈치를 챈 모양인지 시라유리가 손벽을 치며 대답했다. 나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제 고백을 할 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응. 누군가에게 새롭고 '특별한' 의상을 선물 할 계획이야." 


"누가될지 참 부럽네요. 전 매일같이 사령관님을 도와서 막중한 업무에 시달리는데." 


내 말에 곧 죽어도 자신이 옷을 받을 대상이란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시라유리가 즉답했다. 

그정도로 자신의 몫을 내게 요구하지 않고 순수하게 곁에 머물러 준 그녀이기에 반한 것이겠지.


"흠, 흠!"


나는 목청을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첫 실전을 지휘했을때 보다, 큰 작전이 있기 전보다 더

긴장되고 가슴이 떨렸다.


"그게... 너한테 줄 옷.. 아니 드레스야." 


"네~ 네~ 그러시... 네?" 


그녀는 내 대답에 평소의 여유는 어디에 둔 것인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당황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눈망울이 흔들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 그럼 이것도 마저 처리해 주겠니?" 


나는 다음의 말을 위해 그녀에게 또다른 문서를 건내주었다.


"아, 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더욱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그, 그곳에 네 이름만 서명되면 그대로 진행할거야." 

 

그녀가 받아본 것은 나와 그녀가 진행할 서약식의 계획이 작성된 문건.

지금까지 내 옆에 묵묵히 있었던 그녀에게 앞으로도 쭉 내 곁에서 머물러 주었으면 한다는

내 진심이 담긴 말.


"시, 시라유리! 나, 나와 서약해줘! 물론 내 평생에 너 한명과만 서약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첫번째 서약은 무조건 시라유리, 너가 되야 한다고 새, 생각했어!"


나는 늘 되도록이면 긴장하지 않도록, 발표를 하거나 무언가 큰 일을 진행할때 아주 세밀하게

계획을 짜놓고 경우의 수를 대비했다. 말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수백 수천번을 홀로 되내이며

반복연습을 해 두는 편이지만 이 고백의 말 만큼은 눈꼴시렵게 더듬고 말았다.


"이, 이걸 받아주겠니?" 


나는 그녀의 앞에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반지와 꽃다발을 건내주었다.

홀로 연습했을 때는 매끄럽고 부드럽게 했건만, 막상 실제로 하려니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에?'


그때 시라유리의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그녀를 몰아붙였다는 생각에

나 또한 혼비백산하여 정신이 없었다. 

 

"우, 울지말고.. 놀라게해서 미안해! 바, 받아줄거지?"


"당연하죠! 제가... 제가 얼마나... 얼마나 원했는데!" 


드디어 그녀가 내게 자신의 욕심을 말했다. 솔직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게 요구했다.

그 충족감에 가슴 한켠에서 감동이 밀려왔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저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그저 그녀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저 그녀의 바램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저 그녀의 버팀목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의 곁에서 살아가고자 했다.


시라유리라는 이름의 뜻은 흰 백합, 흰 백합의 꽃말은 순결이지만

나는 흰 백합의 다른 꽃말인 순수한 사랑, 깨끗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이젠 그녀의 꽃을 내 마음속에 품어 활짝 피어나는 행복을 누리도록 지켜나갈 것이다.